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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 정당 · 지역 정당 ) |
보수연합
Conservative Coalition |
|
<colbgcolor=#800080> 한국어 명칭 | <colbgcolor=#ffffff,#1f2023>보수동맹 / 보수연합 |
창시일 | 1937년 ~ 1990년대( )[1] |
리더 | 로버트 A. 태프트 |
주요 인물 |
해리 F. 버드[D] 카터 글라스 (Carter Glass)[D] 존 낸스 가너[D] 조시아 베일리(Josiah Bailey)[D] 로버트 A. 태프트[R][7] 리처드 러셀 주니어[D] 하워드 W. 스미스 (Howard W. Smith)[D] 칼 빈슨 (Carl Vinson)[D] |
이념 |
보수주의 (
미국) 전기 성향 :[A] 자유보수주의[12] 고보수주의 경제적 자유주의[13] 반공주의 반(反) 뉴딜 정책 반(反) 노동 운동 빅 텐트 후기 성향 :[A] 사회보수주의 재정보수주의 신자유주의 레이건주의 반공주의 |
스펙트럼 | 우익 |
대립세력 | 뉴딜연합 |
정당 |
|
1952년 공화당 대통령 예비선거에서 로버트 A. 태프트.[15] |
[clearfix]
1. 개요
20세기 오하이오 상원의원 로버트 A. 태프트를 위시로 한 공화당 의원들과 민주당 내 남부보수파 의원들이 결성한 비공식적인 의회 내 연합체였다. 보수연합은 이 연합이 주로 활동했던 1937년부터 1963년까지의 기간 동안 미국 의회 내에서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다.2. 역사
미국은 허버트 후버 대통령 재임 중에 대공황을 맞이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집권세력인 공화당은 책임론과 심판론에 직면해 뉴딜 정책을 내세운 민주당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에게 정권을 내주게 되고, 상하원 의석 또한 민주당이 개헌선을 훌쩍 뛰어넘었고 빈곤층들도 뉴딜정책으로 일자리를 받아서라도 벌어먹고살수있게 되었기 때문에 루스벨트의 인기는 매우 높았다. 이 때문에 루스벨트는 1930년대 중후반까지 뉴딜 정책을 위한 입법을 거침없이 통과시키게 된다.하지만 민주당의 진보화에 불만을 품고 있던 민주당 내 남부보수파 의원들과 공화당 의원들이 점차 교류를 하기 시작하면서 보수연합이 결성, 공화당을 위시로 한 미국의 보수 진영은 뉴딜정책을 포함한 민주당 행정부들의 사회경제정책에 저항할 수 있는 의회 내 정치세력을 구축하게 되었다. 그리고 1938년 중간선거에시 공화당이 어느정도 세력을 회복한 뒤에 보수연합은 뉴딜정책을 뒷받침하는 법안들을 대거 저지하는데 성공한다. 실제로 가장 마지막으로 입법화되는데 성공한 뉴딜정책 관련 중대한 법안은 1938년에 제정된 "공정한 노동기준에 대한 법(Fair Labor Standards Act of 1938)"이다.
또 뉴딜정책에 대한 법안들의 상당수를 위헌으로 판결한 당시의 보수적인 대법원을 무력화하기 위한 루스벨트 행정부의 대법관 증원 시도를 무산시키는 데에도 성공했다. 보수연합은 이후 등장한 해리 S. 트루먼 행정부의 "페어 딜(Fair Deal)"에 대해서도 이를 뒷받침하는 많은 법안들을 저지하는데 성공해 그 영향력을 과시하게 된다. 또 보수적인 남부 민주당원의 경우 그래도 이때까진 정치적 입지 불안[16], 지역 이권 문제[17] 등으로 인해 당적은 민주당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트루먼 때부턴 독자 출마 등 본격적인 탈당 노선을 걷기 시작한다.
물론 공화당과 민주당 보수파의 입장이 갈리는 경우도 없지 않았는데, 대표적으로 도시화가 덜 된 시골 지역에 대한 정부 지출 문제와 대외정책 문제가 있었다. 주로 북동부와 중서부에 기반을 둔 공화당 의원들과 달리 농촌 위주의 남부를 지역구로 둔 민주당 의원들은 뉴딜 정책 중 농촌 재개발 측면에 대해서는 압도적으로 지지를 보냈으며[18], 같은 뉴딜 관련 법안이더라도 노동 관련 법안보다 훨씬 쉽게 의회를 통과한 큰 이유가 되었다. 또한, 2차대전 이전부터 전통적으로 고립주의 성향이 강했던 공화당과 달리 남부 민주당 보수파는 대부분 국제주의, 개입주의 성향이 짙었다. 예를 들어, 수십 년 동안 미 해군의 대변자로 활약한 칼 빈슨 하원의원 또한 남부 민주당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반대로 공화당원들은 민권법에 대해서는 진보 민주당원들과 뜻을 같이했지만 남부 민주당원들은 격렬히 반발하였다. 루즈벨트, 트루먼의 임기 중 보수연합은 민주당 주류 리버럴 계파의 건강보험 등 복지법안과 노동법안 등을 저지시키는 데 있어서는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또 보수연합은 "참전군인 사회복귀 지원법(G. I. Bill)" 제정과 통과를 주도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 퇴역 참전군인 단체인 "아메리칸 레전(American Legion)"은 참전군인에 대한 대대적인 지원과 보상을 요구했는데, 당초 루스벨트는 이들의 요구에 미온적이었고, 의례적인 참전 수당 및 일부 엘리트 대상 학자금 지급에 정부 지원을 국한하고자 했다. 반면 루스벨트와 대립하던 보수연합은 국가안보를 강조하며 미국의 자유 수호를 위해 헌신한 참전군인에게 합당한 보상을 하는 것이야말로 국가의 가장 기초적 의무라는 정신에 따라, 참전군인 지원법을 제정하고 통과시키는데 앞장섰다.
참전군인 지원법의 영향은 엄청났다. 200만명이 넘는 참전군인이 장학금 혜택을 받아 대학과 직업학교에 진학했다. 예전에는 대학 진학을 꿈꿀 수 없었던 빈곤층과 소수인종들이 대학 교육을 마치고 생산성 높은 인적 자원으로 사회에 재충원됐다. 400만명이 넘는 참전군인 가구가 주택담보 대출을 통해 내 집 마련에 성공했다. 창업 자금 지원으로 많은 소규모 비즈니스가 탄생했고, 이는 다시 지역경제 활성화와 세수 기반 확대로 이어졌다. 덕분에 참전군인 지원법은 기회 평등, 중산층 양성, 시민의식 제고를 통해 경제와 사회 모든 층위에서 미국의 근본적인 변혁을 가져왔으며, 미국이 1950년대에서 60년대까지 번영의 황금기를 구가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러한 보수연합의 영향력 덕분에 공화당은 소수정당으로 몰락할뻔한 위기를 벗어나 다시 세력을 키우게 되었고, 당시 2차대전 전쟁영웅으로 인기가 높았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를 영입해 1952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후보로 내세운다. 그리고 이 선거에서 승리하면서 20년만의 재집권에 성공한다. 당시 공화당은 야당 시절에 구축한 보수연합을 이용해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행정부에서 상당수의 법안들을 무사히 통과시키는데 성공한다.
이런 보수연합의 묘한 공생 관계는 1960년대까지 이어지지만, 1964년 상원의원 시절의 짬밥이 엄청나던 린든 B. 존슨 대통령이 공화당 의원들의 80%의 지지를 얻어내며 남부 민주당원들의 필리버스터를 뚫고 연방 민권법 가결에 성공하면서 보수연합은 크게 약화된다. 1964년의 배리 골드워터의 남부 선전, 1972년 리처드 닉슨의 남부 석권 등을 거쳐 남부에서의 공화당에 대한 거부감은 상당히 희석되었다.[19] 워터게이트 사건 이후 1974년 중간선거에서는 민주당이 대승하면서 엄청난 수의 북부 및 리버럴 초선의원들이 탄생했고, 이들은 기존의 민주당 리버럴 세력과 힘을 합쳐 주요 상임위원회를 장악한 남부 보수파 다선의원들을 위원장에서 쫓아내고 상원의 필리버스터 요건을 기존의 2/3에서 현재의 60석 이상으로 완화시켜 남부 민주당원들의 영향력을 매우 저하시켰다.
로널드 레이건 시기에는 1980년 미국 대통령 선거, 198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의 압승에도 불구하고도 하원에서는 민주당의 우위가 지속되었다. 레이거노믹스 법안을 통과하기 위해서 공화당과 남부 보수 민주당원[20]의 연합은 예산안 처리에서 행정부에 협조했고 필 그램처럼 친(親)레이건 민주당원에서 공화당으로 넘어간 하원의원도 있었다. 빌 클린턴 임기 중의 1994년 미국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32년만에 하원 다수당을 탈환하면서 보수연합의 필요성이 떨어졌고, 민주당에 잔존한 보수 민주당원들은 청견연합으로 조직을 재편하게 되어 보수연합은 해체되게 된다.
3. 보수 강령
공식적인 명칭은 "미국 국민께 드리는 말씀(An address to the People of the United States)"이다. 공화당과 민주당 내 남부보수파 의원들은 보수연합을 결성하면서, 아래와 같은 조항들이 포함된 "보수 강령(Conservative Manifesto)"을 발표했다. # 보수연합이 추구하는 보수주의, 재정보수주의, 제한된 정부, 경제적 자유주의에 기반한 경제 어젠다들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자본 소득과 이윤에 대한 추가적인 과세의 전면 재검토를 통한 투자 활성화 유도
- 정부지출 삭감을 통한 균형재정 달성과 이를 통한 사업 확장을 방해하는 두려움 진정
- 자본과 노동 사이의 관계에 대한 강압과 폭력 제거
- 사기업에 대한 정부의 불필요한 경쟁 참여 반대
- 기업과 개인 투자자들에게 이윤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지
- 신용이 근거로 하는 담보 보장
- 세율 인하, 그리고 만약 이것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추가적인 세율 인상의 봉쇄 보증
- 주의 자치권과 지방자치 수호
- 실업자에 대한 지역공동체의 책임 강화
- 미국적인 형태의 정부와 미국적인 시스템으로 이뤄진 기업들의 역할 존중
4. 남부전략과 신보수주의에 끼친 영향
이러한 보수연합의 성립은 공화당과 남부 사이의 오랜 원한을 희석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사실 20세기 들어와서도 남부에서 공화당의 입지는 거의 없었다. 공화당이 남북 전쟁 이후 남부를 방치한 것도 있지만, 남북전쟁 자체가 노예제라는 한 제도를 넘어 노예제를 포함한 여러 문제, 즉 농업과 산업의 대립, 남부의 상품작물 대농장과 북부 개척민(자영농)들의 대립 등 다양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기에, 아예 출신 성분 자체가 달랐던 공화당은 남부와 접점이 없었기 때문이다.하지만 뉴딜정책와 민주당의 진보화에 맞서 보수연합을 구축한 경험은 공화당과 남부 사이에 연결고리를 만드는 계기가 되었고, 공화당 자체적으로도 아일랜드계, 이탈리아계, 동유럽계와 같은 이민자들이 북부 대도시들에서 꾸준히 증가해 이들 지역에서의 민주당 지지세가 강해지고 있다는 부분을 인지하게 됐는데, 이는 북부 대도시들의 인구구성 자체가 공화당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에 따라 북부 도시들을 대체할 지역적 기반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보수연합을 통한 남부와의 새로 생긴 접점과 북부의 인구구성 변동은 공화당으로 하여금 민주당의 텃밭인 남부를 공략하는 전술, 일명 남부전략(Southern Strategy)을 추진할 기반과 동기가 되었다.
민주당의 남부보수파들 또한 루스벨트와 트루먼 시절에는 그래도 정치적 입지 불안 등으로 민주당에 그럭저럭 몸담고 있었지만, 1960년대 존 F. 케네디와 린든 B. 존슨이 흑인민권운동을 강력히 지지하면서부터는 민주당의 주류로 떠오른 진보주의자들과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기 시작한다. 1964년 린든 B. 존슨이 연방 민권법에 서명하자, 남부 민주당원들은 격렬하게 반대하였고, 스트롬 서먼드등의 일부는 공화당에 입당하기까지 한다.[21]
1964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는 애리조나 상원의원 배리 골드워터였다. 그래도 결국 선거 결과는 존슨의 대승으로 끝나나, 민주당의 압승 속에도 공화당을 지지한 것은 도리어 남부였다. 존슨의 지지 기반이었던 텍사스를 비롯하여 아칸소, 테네시, 노스캐롤라이나, 버지니아 주 등은 존슨을 찍어 주었으나 Deep South로 분류되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앨라배마, 조지아, 미시시피, 루이지애나는 골드워터의 손을 들어 주었다. 참고로 50개주 + DC 중에서 골드워터가 승리한 주는 전술한 Deep South 5개주 + 골드워터의 Home State인 애리조나가 전부. 상황이 정반대가 된 것이다.[22]
이후 공화당은 닉슨을 내세워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와 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게 되고, 이 때부터 남부는 압도적으로 공화당을 지지하기 시작한다. 이는 남부 출신인 지미 카터가 등장하면서 잠시 주춤해지지만[23], 이후 등장한 로널드 레이건은 이런 문화적 보수주의 전략을 한층 더 승화시켜서 현대 공화당의 전략을 확립했고, 이렇게 레이건의 공화당은 198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해 신보수주의 운동의 화룡점정을 찍는다.[24]
5. 둘러보기
[1]
정확히 언제 사라졌는지는 의견이 갈리나 보통 공화당과 민주당의 정치 색깔이 확고해지는 '
깅리치 혁명' 등이 발생한 1990년대 즈음으로 사라졌다고 본다.
[D]
민주당원
[D]
[D]
[D]
[R]
공화당원
[7]
주요 인물 중 유일한 공화당원인거 같아보이는데 이는 공화당에서 보수주의자가 당시에 민주당보다 적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민주당 보수진영과 달리 태프트가 공화당 보수진영 전체를 주도하듯이 했기 때문이다.
[D]
[D]
[D]
[A]
원래 뉴딜 연합 결성된 이후에도 미국 우파 보수주의자들은 자유주의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당시 보수주의자들도 FDR의
새자유주의(new liberalism)에 맞서 자신들은
진정한 자유주의(true liberalism)을 내세웠을 정도이다.
# 그러나 미국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지고 이와 함께 소련 공산주의 세력이 급격하게 팽창함에 따라 마르크스주의와 대결할 하나의 이념으로 (자유주의가 배제된 형태의) 보수주의가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 게다가 흑인,성소수자 등 진보적 민권운동(내지 정체성 정치)의 부상 이후 1960년대부터 미국 우파는 자유주의와 더욱 거리를 두게 되었다. 실제로
독립협회가 내세운 자유민권, 일본 메이지와 다이쇼 시대
자유민권운동 등을 보아하듯 60년대 민권운동 이전에도 전세계적으로 민권 이슈는 자유주의 의제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현대 미국에서 자유주의는 보수주의(우파)에 대조되는 범좌파 이념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에 따라 미국과 비슷한 정치 구도를 가진 다른 국가들(가령 한국 등)에서도 보수주의가 우익, 자유주의 리버럴 진영이 범좌파로 나뉘는 구도가 형성되었다.
#
[12]
보수연합은 FDR의 새로운 자유주의(new liberalism)에 반대하여 자신들을 진짜 자유주의(true liberalism)라고 불렀다.
[13]
일부는 오늘날의
자유지상주의 (특히
우파 자유지상주의)
[A]
[15]
당시 오하이오 주의 상원의원이었다.
[16]
당시 남부는 지금과 달리 민주당 텃밭이었고, 물론 인종 문제 등으로 보수적인 성향은 있었다지만 뉴딜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꽤 있었기 때문에 당장 공화당으로 넘어가긴 배신자 프레임 등에 찍힐 염려도 있었다.
[17]
뉴딜 정책의 경우 도시 노동자들에 대한 복지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농촌 지역에 대한 지원 및 인프라 구축도 중요한 요소로 포함했는데, 남부 지역은 후자의 혜택을 누리는 대표적인 지역이었다.
[18]
대표적으로
테네시 주를 중심으로 한 테네시강 유역 개발공사(Tennessee Valley Authority)가 있다.
[19]
다만 남부 주의 상하원 선거에서의 민주당 우세는 여전했다.
[20]
레이건 시기의 당적은 민주당이면서 보수적이고 친정부적인 민주당 의원들을 비꼬는 명칭으로 목화
바구미(Boll wevill) 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
[21]
하지만 대부분의 남부 민주당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에 남았다.
[22]
참고로 골드워터가 출마한 이때를 미국 20세기 보수주의의 시작으로 본다. 골드워터가 처음 나왔을 때는 '자유의지주의'와 '신보수주의'가 생소한 개념이었으나, 어찌됐든 이후 미국에서
신보수주의의 싹이 피어나기 시작한다.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골드워터는
낙태를 반대하지 않는 등 그야말로 자유지상주의자라서 훗날의 미국 공화당 정서와는 조금 안 맞는 인물이긴 하다.(...)
[23]
카터는
버지니아 주,
오클라호마 주를 제외한 모든 남부 주에서 승리했다.
[24]
참고로
신자유주의와 혼동하지 않게 주의. 신자유주의를 레이건에 대입하기도 하는데, 정작
레이건주의는 경제적 자유주의와 신보수주의의 결합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