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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08 16:26:13

로마-아랍 전쟁

파일:로마 제국 깃발.svg 파일:투명.png 로마의 대외전쟁파일:투명.png 파일:라바룸.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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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만티아 전쟁 파일:external/b66a81d7e3c5440cfef450e3309a2b4b425f1dcd788e510bd84b747e2e2573be.png 아레바키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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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파일:attachment/mon_256_8.png 폰토스 왕국 · 파일:SoundCloud82837371853.jpg 아르메니아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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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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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630년대에 이슬람이 대두된 이래, 아랍인들이 세운 국가들과 로마 제국의 전쟁. 정통 칼리파 시대의 이슬람 세력을 시작으로 우마이야 왕조, 아바스 왕조 이슬람 제국, 아글라브 왕조, 파티마 왕조, 함단 왕조, 시칠리아 토후국, 크레타 토후국 등 여러 이슬람 세력들이 로마인들과 전쟁을 치렀다. 전쟁은 1050년대에 튀르크족이 아랍인을 대신하여 이슬람 세계의 주역이 될 때까지 이어졌다.

2. 배경

7세기 초, 로마 제국은 심각한 곤경에 처했다. 지난 세기부터 횡행한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으로 인해 수많은 인명이 목숨을 잃거나 허약해지면서 국력이 쇠진해졌고, 랑고바르드족, 아바르족, 슬라브족 등 여러 이민족의 침략이 갈수록 거세졌다. 특히 603년부터 발발한 로마-페르시아 전쟁은 제국을 파멸 직전으로 몰아갔다. 페르시아군은 쇠약해진 로마군을 상대로 연전연승해 시리아에 이어 소아시아, 이집트 일대를 모조리 공략하고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위협했다.

하지만 622년 이라클리오스가 반격을 가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그는 사산 왕조군이 광활한 점령지를 지키기 위해 병력을 분산시키느라 정작 본거지인 메소포타미아가 비어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점령지를 일일이 탈환하는 대신 적의 본거지로 직공했다. 그의 계책은 절묘하게 맞아들어갔고, 페르시아군은 급히 그를 막으려 했다가 연전연패했다. 628년 6월 로마군이 수도 크테시폰 근방까지 진격해오자, 호스로 2세는 거듭된 패전에 격분해 귀족 및 장군과 병사들을 모조리 처형하고, 노예들을 대거 징집해 크테시폰에서 최후의 일전을 벌이려 했다가 귀족들의 정변으로 폐위되었고 아들 카바드 2세가 새 샤한샤로 등극했다.

카바드 2세는 네스토리우스파 주교들로 구성된 사절단을 이라클리오스에게 보내 평화 협정을 맺기를 원한다고 알렸다. 이라클리오스는 배상금 지불, 모든 포로의 석방, 예루살렘에서 탈취한 성십자가 반환, 사산 왕조가 빼앗아간 모든 영토 양도, 수비대와 야전군의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했다. 그는 즉각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고, 이라클리오스는 만족한 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했다.

이리하여 로마 제국은 장장 25년간 이어지던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사산 왕조의 압제를 20여 년간 받았던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의 행정 및 군사 체계를 복구하는 데 애를 먹어야 했다. 게다가 전임 황제 포카스가 자행한 유대인 박해로 인해 기독교인과 유대인간 감정 대립이 심각했다. 유대인들은 사산 왕조가 지배하던 시절에 예루살렘에서 독자적인 정부를 수립했고, 시리아가 제국에 도로 들어간 뒤에도 복종을 거부했다. 비록 제국군에 의해 무력으로 진압되었지만, 그들이 제국에 품은 악감정까지 없애지는 못했다.

이라클리오스는 시리아를 탈환한 후 가자에서 사해 남쪽 끝까지 이어지는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 방어선들은 도적떼로부터 보급로 및 교통로를 지키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때 요새 대부분은 사산 왕조가 또다시 쳐들어 올 것을 대비해 시리아 북부에 집중되었고, 남쪽의 아라비아에서 북상할 때 저지할 방어선은 상대적으로 허술했다. 아라비아에 거주하는 아랍인들은 가끔 약탈하러 왔다 갈 뿐 큰 위협이 된 적은 없었고, 가산 왕국이 그 방면을 지켜주고 있으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이라클리오스에게는 불행히도, 오랜 세월 부족 간 전쟁에 몰두하던 아랍인들이 무함마드가 계시한 이슬람교로 통합되면서, 로마 제국은 새로운 강적을 마주하고 만다.

3. 무슬림의 대공세

3.1. 무슬림의 시리아 정복 전쟁

629년, 보즈라로 가던 무함마드의 사절단이 가산 왕국 군대에게 피살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무함마드는 보복을 위해 군대를 파견했으나, 그해 9월 요르단 강 동쪽의 무타크 마을 인근에서 벌어진 무타크 전투에서 참패했다. 이 전투에서 자이드 이븐 하리타를 포함한 3명의 무슬림 지도자가 전사했고,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가 잔여 병력을 수습한 뒤 메디나로 귀환했다. 630년 메카에 입성하면서 수 년간 이어지던 아랍 내전을 종식하고 아라비아를 평정한 무함마드는 우사마 이븐 자이드에게 군대를 맡겨 무타크 전투의 패배를 보복하게 했다. 우사마는 632년 5~6월에 가산 왕국군을 격파하고 시리아 일대를 약탈한 뒤 귀환했다.

632년 6월 무함마드가 사망하고 아부 바크르가 새 칼리파로 등극했다. 몇몇 아랍 부족들이 이 때를 틈타 반란을 일으켰지만 1년 만에 제압되었다. 그 후 아부 바크르는 사산 왕조로 왈리드가 이끄는 무슬림군을 파견했고, 왈리드는 사산 왕조군을 모조리 격파하고 이라크 일대를 거점으로 삼았다. 잇따른 성공에 고무된 아랍 부족들이 대거 몰려들자, 아부 바크르는 군대를 4개 군단으로 편성해 각각 지휘관과 공략 목표를 지정했다.

아므르 이븐 알 아스 알 샤흐미는 팔레스타인을 공격하고, 야지드 이븐 아부 수피안은 다마스쿠스를 공격하며, 슈라빌 빈 하사나는 요르단을 공격하며, 아부 우바이다 이븐 알 자라흐는 에메사를 공격하게 했다. 이렇듯 4개 방면을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해, 로마군이 어느 한 쪽에 집중하지 못하게 했다. 만약 군단이 한 번의 주요 전투에 집중해야 할 경우, 아부 우바이다 이븐 알 자라흐가 총사령관을 맡도록 했다.

이리하여 634년 4월 메디나에서 출진한 무슬림군은 가산 왕국을 삽시간에 멸망시킨 뒤 로마령 시리아로 진입해 아즈나다인 전투에서 현지 로마군을 섬멸하고 시리아 남부와 중부를 2년여 만에 석권했다. 이에 이라클리오스는 사산 왕조와 동맹을 맺고 심복들에게 대군을 맡겨 무슬림을 상대로 대대적인 반격에 나서게 했으나, 636년 8월 15~21일 야르무크 전투에서 왈리드가 이끄는 무슬림군에게 참패했다.

무슬림군은 여세를 몰아 예루살렘, 카이사레아, 에메사, 칼키스, 안티오키아 등 시리아의 핵심 도시들을 모조리 장악하고 북쪽으로 계속 진군해 아나톨리아의 카즐리르막 강까지 나아갔다. 이라클리오스는 무서운 기세로 몰아붙이는 적을 피해 에데사로 이동한 뒤 자지라와 아르메니아를 지키기 위한 방어선 구축을 완료한 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동했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산길을 통해 무슬림군을 회피하다가 킬리키아 성문을 지나면서 다음과 같은 넋두리를 남겼다고 한다.
"잘있거라, 시리아여. 그대에게 기나긴 작별 인사를 고한다. 나의 사랑하는 속주여. 너의 아름다움은 이제 이교도의 수중에 있구나. 오, 시리아여, 그대에게 평화가 있으라. 그대가 적들의 손에 얼마나 아름다운 땅이 될 것인가!"

왈리드는 에데사, 아미타, 말라티아와 아르메니아 전체를 공략하고 아라라트 등 북 아나톨리아와 중앙 아나톨리아를 급습했다. 이라클리오스는 이에 대응하여 안티오키아와 타르투스 사이의 모든 요새를 버리고 그곳에 사는 백성들을 전부 아나톨리아로 이송시켜서 무슬림 지배 지역과 아나톨리아 본토 사이에 무인 지대를 만들었다. 왈리드는 내친김에 아나톨리아까지 석권하려 했지만,칼리파 우마르는 이를 저지하고 시리아로 돌아가서 통치에 전념하라고 명령했다. 그 후 왈리드가 너무 많은 승리를 거두면서 명성이 자신을 능가할 정도가 된 것에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우상 숭배 금지는 이슬람의 교리인데 민중들이 왈리드를 신으로 섬기니 불경하다"는 이유로 해임했다. 후대의 많은 이슬람 학자들은 우마르가 왈리드가 아나톨리아로 진격하는 것을 허용했다면 동로마 제국을 조기에 끝장내고 유럽을 도모할 수 있었을 거라며 아쉬움을 표했다.

639년, 시리아에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아부 우바이다 이븐 알 자라, 슈라빌 이븐 하사나, 야지드 이븐 아비 수피안, 이야드 이븐 간므 이븐 주하이르 알 피르 등 시리아 방면 장성들이 잇따라 병사했다. 이에 우마르는 무아위야 이븐 아비 수피안을 신임 다마스쿠스 총독으로 선임해 시리아를 다스리게 했다. 당시 그의 처지는 영 좋지 않았다. 시리아에 주둔한 무슬림군 대부분이 역병으로 죽거나 무력해졌고, 기독교를 신봉하는 현지 주민들은 이교도인 아랍인들의 지배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무아위야는 이들을 회유할 필요성을 느끼고, 시리아에서 기독교를 신봉하는 아랍 부족인 칼브 부족장의 딸 마이순과 결혼했다. 이후 기독교도들에게 관용을 베풀었고, 동로마 제국의 과중한 과세로 고통받던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세금을 대폭 삭감했다. 이에 주민들은 그를 절대적으로 지지했다. 이와 함께 병력을 대폭 충원하고 철저한 훈련을 실시했으며, 우수한 장비를 가급적 확보하고 병사들의 봉급을 인상하고 정기적으로 지급했다. 그 결과 시리아의 무슬림군은 강력한 전투력을 확보할 수 있었고, 장병들은 그를 절대적으로 지지했다. 한편, 그는 동로마 제국 사산 왕조의 행정 체계를 대폭 수용해 행정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시리아를 재정비하는 데 성공한 우마위야는 645년에서 646년 사이에 시리아 해안에 있는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요새인 트리폴리를 함락하면서 시리아 정복을 완료했다.

3.2. 무슬림의 이집트 정복 전쟁

시리아에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무슬림군이 극심한 손실에 시달리던 639년 12월, 시리아 방면 무슬림 사령관 아므르 이븐 알 아스 알 샤흐미가 우마르의 허락을 받지도 않은 채 4,000명의 장병을 이끌고 이집트로 쳐들어갔다. 이집트 국경 인근에 이르렀을 때, 우마르가 급파한 사절이 찾아와 칼리파의 서신을 전했다. 그러나 아므르는 우마르가 자신을 막으려 한다고 예측하고 병사들에게 진군 속도를 높이라고 명령하고 사절에게는 병사들이 밤에 행군을 멈췄을 때 서신을 개봉하겠다고 밝혔다.

아랍군은 이집트 국경을 넘어 알 아리시 계곡에 자리를 잡았고, 아므르는 그제야 서신을 읽었다. 그의 예상대로, 그 서신에는 당장 팔레스타인으로 복귀하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아므르는 부하들을 모아놓고 "이미 이집트로 진입한 이상 원정을 계속하자"고 결의한 뒤 우마르에게 자신의 뜻을 전했다. 우마르는 아므르가 허락없이 이집트를 침공한 것에 분개했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이집트도 공략하기로 하고 원군을 보내기로 했다.

이리하여 벌어진 이집트 전쟁은 단성론을 억압하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당국에 대한 콥트교인들의 뿌리깊은 반감, 현지 로마군의 박약한 전투 의지, 베르베르인들의 호응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불과 2년 만인 641년에 무슬림이 이집트 전역을 차지하는 결과로 마무리되었다. 아므르는 내친 김에 이집트 남쪽의 누비아 마저 공략하기로 하고, 642년 사촌 우크바 이븐 나피에게 원정을 맡겼다. 그러나 탁월한 궁술을 갖춘 누비아인들의 무자비한 화살 세례로 인해 250명의 무슬림 전사들이 전사했고, 누비아 기병대의 속도가 너무 빨라서 무슬림 기병대가 따라잡는 데 애를 먹었다. 결국 우크바는 적의 치고 빠지는 전술에 애를 먹은 끝에 아므르의 허락을 받고 누비아에서 철수했다.

644년 11월 3일, 칼리파 우마르가 모스크에서 예배 드리던 중 페르시아계 기독교도 노예 피루즈에게 암살당하고 우스만이 새 칼리파로 등극했다. 우스만은 아므르를 메디나로 소환했고, 이집트는 압둘라 이븐 사드가 이끄는 수천 병사들에 의해 통제되었다. 콘스탄스 2세는 이 때를 틈타 이집트를 탈환하기로 마음먹고, 645년 300척에 달하는 대규모 함대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집결시킨 뒤 마누일 장군의 지휘하에 알렉산드리아로 파견했다. 그는 1,000명의 수비대만 있던 알렉산드리아를 빠르게 공략했다. 그러나 로마군은 공세를 이어가는 대신 알렉산드리아에 그대로 머물면서 주변 일대를 황폐화시키고 주민들을 가혹하게 착취하는 행태를 일삼았고, 이로 인해 주민들은 그들을 무슬림의 지배로부터 해방하러 온 자들이 아닌 침략자로 여겼다.

우스만은 로마군이 알렉산드리아를 공략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아므르를 즉시 이집트로 보냈다. 아므르는 니키오스 요새에서 병력을 소집했지만 알렉산드리아로 직공하는 대신 마누일이 알렉산드리아 요새를 떠나 자신에게 접근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마누일이 알렉산드리아에서 출발하여 니키오스 요새로 접근하자, 그는 즉시 요격했다. 646년 5월 니키오스 요새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무슬림군이 대승을 거뒀고, 마누일은 잔여 병력을 수습한 뒤 알렉산드리아로 도주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은 마누일에게 협조하기를 단호히 거부했고, 결국 마누일은 무슬림군이 알렉산드리아에 무혈 입성하기 직전에 함대에 몸을 싣고 알렉산드리아에서 도주했다. 아므르는 알렉산드리아가 또다시 항전할 가능성을 배제하고자 모든 성벽과 요새를 허물었다. 이리하여 이집트는 로마의 품에서 영원히 떠났다.

3.3. 무슬림의 마그레브 정복 전쟁

우마르는 이집트를 정복한 여세를 몰아 동로마 제국이 장악하고 있는 아프리카 속주마저 정복하기로 마음먹고 이집트 총독 압둘라 이븐 사드에게 침공을 명령했다. 압둘라는 우마르의 지시에 따라 647년 멤피스에서 20,000명의 병력을 일으켜 아프리카 총독부가 있는 카르타고를 향해 진군해 아프리카 총독 그레고리오스의 로마군과 수페툴라에서 격돌했다. 전투 양상은 한 달 가까이 팽팽하게 진행되었지만, 메디나에서 2만 명의 추가 병력을 이끌고 달려온 이븐 주바이르가 도착하면서 전세는 무슬림군에게 급격하게 기울었다.

결국 그레고리오스는 전사했고, 그의 딸은 아랍군에게 붙들려 이집트로 끌려가다가 도중에 낙타에서 떨어져 죽었다. 아랍군은 수페툴라를 약탈한 뒤 카르타고 총독부를 공격했지만, 동로마군이 요새에서 결사 저항하자 공략을 포기하고, 후임 총독 겐나디우스 2세로부터 330,000 노미스마타, 즉 금 2톤을 공물로 받는 대가로 이집트로 돌아가기로 했다. 동로마 제국은 이 덕분에 아프리카 속주를 유지할 수 있었으나, 수페툴라 전투의 여파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여 아프리카에서의 영향력이 나날이 줄어들었다.

656년 제4대 칼리파 우스만이 피살당한 사건이 벌어진 후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를 지지하는 세력과 무아위야 1세를 지지하는 세력이 맞붙으면서 1차 피트나가 발발했다. 이슬람 세계 전체가 두 패로 갈라져 싸운 대규모 내전이었기에, 무슬림군은 한동안 아프리카 속주에 관심을 두지 못 했다. 그 후 내전에서 승리한 무아위야 1세는 우마이야 왕조를 건국한 뒤 다시 아프리카 속주에 관심을 보였다.

때마침 아프리카 속주에서 분란이 일어났다. 아프리카 총독 겐나디우스 2세는 이슬람 세력과 콘스탄티노폴리스 모두에게 공물을 바쳤다. 여기에 군대를 재건하기 위해 막대한 비용이 필요하자, 그는 세금을 대폭 늘렸다. 이에 민심은 이반했고, 베르베르인들은 제국에 대한 충성맹세를 철회했다. 특히 남부 튀니지 일대는 총독의 통제에서 벗어났다. 이렇듯 상황이 갈수록 심각해지던 664년, 콘스탄스 2세가 시라쿠사로 황궁을 옮긴 뒤 게나디오스에게 공물을 더 보내라고 요구했다. 겐나디우스 2세는 이에 반발해 사절을 추방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665년, 엘레우테리오스가 이끄는 수비대가 봉기했다. 엘레우테리오스는 스스로 총독을 자처했고, 콘스탄스 2세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겐나디우스 2세는 카르타고에서 축출된 뒤 다마스쿠스로 도망쳐서 무아위야 1세에게 자신이 총독으로 복귀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청했다. 무아위야 1세는 우크바 이븐 나피에게 1만 병력을 줘서 아프리카 속주로 진군하게 했다. 겐나디우스 2세는 이들을 따라갔으나, 665년 말 알렉산드리아로 도착한 직후 알려지지 않은 사유로 사망했다. 우크바는 겐나디우스 2세가 사망한 후에도 원정을 이어가 아프리카 속주를 약탈하고 시칠리아에서 달려온 동로마 장군 니키포로스를 격파한 뒤 이집트로 귀환했다. 그 후 670년 카이루안 시를 전진 기지로 삼은 뒤 본격적인 원정을 감행해 로마군의 미약한 저항을 분쇄하고 요새화된, 탕헤르, 카르타고를 제외한 아프리카 속주 대부분을 장악했다.

그러나 그는 카르타고와 탕헤르 정복에 실패했고, 동로마 제국의 통치가 무너져서 혼란한 틈을 타 독립을 꾀한 베르베르의 봉기에 직면했다. 683년, 베르베르 왕 쿠사일라[1]가 잔여 로마군과 연합하여 베세라 전투에서 우크바를 주살했다. 원정군은 이로 인해 공황 상태에 빠졌고, 결국 키레나이카로 철수했다. 쿠사일라는 카이루안을 장악한 뒤 왕국의 수도로 삼았다.

688년, 2차 피트나에서 승기를 잡은 우마이야 칼리파 아브드 알 말리크는 주하이르 이븐 카이스에게 베르베르-동로마 동맹을 격파하고 북아프리카를 공략하는 임무를 맡겼다. 주하이르는 명령을 받들어 카이루안으로 진군해 쿠실라를 죽이고 베르베르인들을 서쪽의 맘스로 몰아냈다. 그러나 688년 베르베르-동로마 연합군의 습격을 받고 전사했다. 주하이르가 죽자, 아브드 알 말리크는 하산 이븐 알 누만에게 원정을 맡겼다. 하산은 이집트에서 군대를 소집한 뒤 서쪽으로 진군하여 승승장구한 끝에 695년 카르타고를 공략했다. 이에 레온티오스 황제는 파트리키오스 신분인 요안니스와 게르만 혈통의 장군 아프시마로스에게 해군을 맡겨 카르타고를 탈환하게 했다. 두 장군은 697년 기습 공격을 감행해 카르타고를 성공적으로 탈환하고 아랍군을 카이로로 축출했다. 아프시마로스는 게르만 혈통의 장군인데 비해 요안니스는 파트리키오스 신분이었다고 하니, 요안니스가 아프리카 총독을 맡았을 것이다.

698년, 하산 이븐 알 누만은 카르타고로 재차 쳐들어가 동로마군을 도시에서 몰아냈다. 함대가 크레타 섬으로 철수한 뒤, 병사들은 레온티오스에 반기를 들기로 작정했다. 아프시마로스는 티베리오스 3세를 칭한 뒤 요안니스를 처단한 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해 레온티오스를 체포하여 코와 혀를 잘라버리고 달마티아의 수도원으로 보낸 뒤 새 황제로 즉위했다. 이리하여 동로마 제국은 아프리카 속주를 영원히 잃어버렸다.

다만 우마이야 왕조의 아프리카 지배는 아직 완수되지 못 했다. 베르베르 여왕 카히나가 무슬림군에 반감을 품은 베르베르인들을 모집하여 항전했기 때문이다. 카히나는 698년 옴 엘 부아기 지방의 메스키아나 전투에서 하산 이븐 알 누만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고 무슬림들을 키레나이카로 쫓아내기도 했다. 그러나 무슬림군의 압도적인 전력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703년경 타바르카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한 후 목숨을 잃었다. 이후에도 베르베르인들의 저항이 이어졌지만 709년에 최종적으로 진압되었다.

3.4. 해상 공세와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649년, 시리아 총독을 맡던 무아위야 1세는 기독교인 선원들과 무슬림 군대로 구성된 해군을 창설했다. 이후 해상 원정을 감행해 키프로스(649년)와 로도스(654년)를 잇따라 점령하고 아나톨리아의 리키아 해안에서 벌어진 마스트 해전에서 동로마 함선 500척을 섬멸했다. 이와 동시에 정기적으로 아나톨리아에 약탈 원정을 떠나 상당한 타격을 입혔고, 우스만의 지시에 따라 콘스탄티노폴리스 원정을 준비했다. 그러나 656년 우스만이 피살된 뒤 1차 피트나가 발발하면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원정은 중단되었다.

마스트 해전 때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던 콘스탄스 2세는 아랍인들이 내전으로 혼란한 틈을 타 군사 개혁에 착수했다. 제국의 남은 영토를 여러 개의 '테마'로 나누고 군사에 통달한 사령관들을 스트라테고스로 선임해 배치했으며, 병사들은 그들의 복무에 대한 대가로 해당 지역에 토지를 배정받았다. 이 테마 제도는 향후 수 세기 동안 동로마 제국 방어 체계의 중추를 이루었다. 이후 내전에서 승리하고 우마이야 왕조를 개창한 무아위야 1세는 칼리파 직위를 찬탈했다는 오명을 씻고 정통성을 고취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략에 착수했다.

672년, 이슬람 함대는 헬레스폰트를 지나 마르마라 해로 들어와서 콘스탄티노플에서 해로로 불과 80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시지쿠스 반도에 주둔해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할 준비에 착수했다. 2년 후인 674년, 이슬람 함대는 콘스탄티노플로 진격했다. 그들은 육중한 공성기와 거대한 투석기를 싣고 와서 성벽과 방어 병력을 한꺼번에 포격하려 했다. 그러나 마르마라에서 황금뿔 지대까지 늘어서 있는 요새들은 적의 공세를 훌륭하게 방어했다. 여기에 비밀 무기인 그리스의 불을 활용해 이슬람 함대를 격파했다.

675년 봄, 이슬람 함대는 다시 공격을 개시했다. 하지만 이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이슬람군은 678년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게다가 육로에서 그들을 돕기로 했던 마르다이트족이 패배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결국 무아위야 1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략을 포기하고 679년 콘스탄티노스 4세의 강화 제의를 받아들여 그동안 점령했던 에게 해의 섬들을 반환하고 황제에게 매년 노예 50명, 말 50마리, 금 3천 파운드의 공물을 보내기로 했다.

3.5. 유스티니아노스 2세의 공세와 우마이야 왕조의 반격

2차 피트나로 인해 우마이야 왕조가 혼란에 휩싸이던 686년, 유스티니아노스 2세 레온티오스 장군에게 군대를 맡겼다. 레온티오스는 캅카스로 진격하여 알바니아( 아제르바이잔의 고대 지명)에서 아랍군을 격파했다. 우마이야 칼리파 아브드 알 말리크는 내전 수습이 시급했던 터라 688년 동로마 제국과의 평화 조약을 갱신하였고, 일시불로 1,000 노미스마타를 지급하며 매주 금요일마다 말과 노예를 바치기로 했다. 또한, 키프로스와 이베리아 (현재 조지아 중부), 아르메니아의 세금도 양국이 양분하기로 했다.

692년, 유스티니아노스 2세가 예수의 초상이 새겨진 노미스마타 금화를 주조했다. 이슬람 교리에 따라 인간의 모습을 새기는 것에 거부감을 느낀 알 말리크는 황금의 무게는 같게 하되 예수의 모습이 없는 노마스마타 금화를 주조하여 동로마 제국에 보냈다.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이를 빌미삼아 레온티오스에게 침공을 명령했다. 그러나 이어진 세바스토폴리스 전투에서, 동로마군에 배속되었던 20,000여 명의 슬라브 병사들이 진영을 이탈하는 바람에 동로마군이 참패했다.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이 패전에 격노하여 레온티오스를 투옥했다가 695년에 풀어주고 헬라스 테마의 스트라테고스로 삼았다. 그러나 레온티오스는 황제에게 반감을 품고있던 청색당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의 협조하에 반란을 일으켜 유스티니아노스 2세를 폐위시키고 코를 자르고 크림 반도의 케르손으로 유배보낸 뒤 황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아랍군의 공세로 빼앗긴 카르타고를 탈환하는 데 실패했고, 카르타고 원정대 지휘관 아프시마로스가 티베리오스 3세로 개명한 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해 레온티오스를 폐위시키고 황위에 올랐다.

티베리오스 3세는 나름대로 유능한 인물이었다. 그는 아나톨리아의 육상과 바다의 방어를 강화했고 700년에는 동생 헤라클리오스에게 군대를 맡겨 사라센이 장악하고 있던 시리아를 침공해 아르메니아의 일부를 잠시 되찾았다. 그 뒤 703년과 704년에도 아랍인들의 연이은 킬리키아 침공을 물리쳤다. 그러나 705년 불가리아 칸 테르벨의 협력을 얻은 유스티니아노스 2세에 의해 폐위된 후 레온티오스와 함께 처형되었다. 이때 티베리오스의 동생 헤라클리오스도 처형되면서 아랍 전선의 로마군 전력이 약해졌다.

칼리파 왈리드 1세는 이 때를 틈타 이복 형제 마슬라마를 아나톨리아로 파견했다. 마슬라마는 707년 티아나에서 동로마군을 격파하고 708년 아모리움을 공략해 아나톨리아의 중심부를 장악했다. 뒤이어 712년 멜리테네 정복을 완료하고 아마세아와 미스티아를 약탈한 후 그곳에서 겨울을 보냈다. 이듬해 갈라티아로 진군하여 그 일대를 평정했다. 왈리드 1세는 잇따른 성공에 고무되어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략을 준비했다.

3.6.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왈리드 1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노린다는 사실을 간파한 아나스타시오스 2세는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전면 보수하고 금각만에서 함선 건조에 착수하고 식량을 대대적으로 비축해 아랍군의 침략을 대비했다. 그러던 715년 원정을 준비하던 왈리드 1세가 죽고 젊은 칼리파 술라이만이 즉위했다. 이 소식을 접한 아나스타시오스 2세는 무슬림들이 새 칼리파 즉위로 어수선한 틈을 타 선제 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심하고, 옵시키온 군대를 동원해 동방 원정을 단행하려 했다. 그러나 지난날 전 황제 필리피코스를 폐위한 뒤 그를 옹립한 동료들을 처형한 것에 원한을 품었던 옵시키온 군대가 오히려 반란을 일으켰다.

아나스타시오스 2세는 수도에 도착한 반란군과 몇달 동안 격렬한 전투를 벌였으나 끝내 패배했고 니케아로 도망쳤다가 716년에 항복하고 테살로니카의 한 수도원에 감금되었다. 옵시키온 군대에 의해 황제로 추대된 테오도시오스 3세는 그 해 술라이만의 이복 동생 마슬라마가 쳐들어오자 아나톨리콘 테마 사령관 레온 3세에게 이를 저지하게 했다. 그런데 레온은 마슬라마가 포위한 아모리움에 소수의 지원군만 보낸 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직공해 니코메디아를 함락하고 테오도시오스 3세의 아들을 생포했다. 이와 동시에 마슬라마는 페르가몬과 사르디스를 약탈하고 에게 해 연안의 여러 섬을 장악했다.

717년 3월, 레온 3세는 별 다른 저항 없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하고 테오도시오스 3세로부터 황관을 넘겨받고 새 황제에 등극했다. 그해 6월, 마슬라마는 수만의 병사들을 태운 전함과 함께 다르다넬스를 지나 8월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외곽에 상륙하였다. 그들은 성을 쌓아 장기 주둔을 준비했고 주변의 트라키아 지역을 약탈했다. 그러나 이어진 공세에서 그리스의 불과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완강한 방어력, 불가리아 칸 테르벨의 습격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막대한 손실을 입었고, 결국 718년 신임 칼리파 우마르 2세의 지시에 따라 철수했다.

4. 전선의 고착화

4.1. 아나톨리아 전쟁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을 2번 연속 실패한 뒤, 우마이야 왕조의 칼리파 히샴은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략 대신 국경지대 약탈로 인한 국력 소모 강요로 틀었고, 720년대부터 아나톨리아에 대한 심각한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728년, 그의 아들 무아위야는 킬리키아의 사말루 요새를 공략했다. 729년에는 사이드 이븐 히샴과 함께 아나톨리아 전역을 약탈했고, 731년 카파도키아의 하르시아논을 검령했으며, 732년 아크로이논을 약탈했다. 무슬림군은 이후에도 734년부터 737년까지 매년 아나톨리아를 침공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738년 술레이만 이븐 히샴이 신디라를 점령했고, 738년에서 739년 사이에 마슬라마가 카파도키아의 일부 지역을 공략했다.

이렇듯 아나톨리아에 대한 지속적인 습격 작전을 이어가던 히샴은 740년 알 가미르가 이끄는 경무장 기병대 1만 명을 아나톨리아 서부의 해안지대로 보내고 압달라 알 바탈과 아부 말리크 이븐 슈에비브에게 후속 병력을 이끌고 뒤따르게 했으며, 아들 술라이만에게 또다른 병력을 맡겨 카파도키아를 공격하게 했다. 이에 레온 3세가 이끄는 동로마군이 출진하여 아크로이논 전투에서 아나톨리아 서부의 해안지대를 휩쓸던 압달라와 아부 말리크를 주살하고 1만여 명의 아랍군을 섬멸했다. 술라이만은 아나톨리아의 시골 지역을 약탈했지만 요새화된 도시 공략에 실패하다가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패퇴했다. 그 과정에서 2만에 달하는 인명이 동로마군의 포로가 되었다. 레온 3세는 승리를 기념하여 아크로이논을 '승리의 도시'라는 뜻의 니코폴리스(Νικόπολις)로 개명했다.

히샴은 아크로이논 전투의 패배를 설욕하려 했지만, 얼마 후 알안달루스 마그레브 일대에서 베르베르 대항거가 벌어지는 바람에 이를 진압하는 데 골머리를 썩다가 743년 2월에 사망했다. 그 후 우마이야 왕조는 쇠락하다가 750년 3차 피트나에서 아바스 왕조에게 패망했다. 동로마 제국은 무슬림들이 일련의 내전으로 혼란한 틈을 타 일시적으로 상실했던 아르메니아와 시칠리아를 탈환했다.

새로 집권한 아바스 왕조는 초기엔 각지의 반란을 제압하느라 여념이 없었기에 동로마 제국과의 대규모 전쟁을 미뤘지만, 각지의 에미르들이 아나톨리아에 개별적으로 침입해 약탈을 벌이는 건 용인했다. 그러던 778년, 동로마 황제 레온 4세가 파견한 동로마군이 타우루스 산맥 너머 시리아에 거주하던 기독교인들을 트라키아에 강제 이주시키자, 칼리파 무함마드 알 마흐디는 780년 아들 하룬 알 라시드에게 10만에 달하는 병력을 맡겨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하게 했다. 무슬림군은 대대적인 공세를 가해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지척인 칼케돈 인근까지 이르렀고, 아르메니아 장군 타차테스의 항복을 받아냈다. 당시 어린 콘스탄티노스 6세를 대신하여 통치하던 이리니 황태후는 향후 3년간 7만 디나르를 바치고 칼리파에 경의를 표하겠다는 조건하에 평화 협약을 맺어야 했다.

802년, 이리니 여제를 몰아내고 동로마 황제로 등극한 니키포로스 1세가 그동안 바치던 조공을 더이상 보내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이에 하룬 알 라시드는 친히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아나톨리아를 침공해 동로마군을 크게 격파하고 배상금을 받아냈다. 그러나 805년 니키포로스 1세가 또다시 평화 조약을 파기하자, 그는 크게 분노하여 14만에 달하는 대군을 동원하여 806년까지 아나톨리아 전역을 휩쓸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위협했다. 이에 니키포로스 1세는 조공을 다시 바치겠으니 군대를 물려달라고 부탁했고, 당시 호라산 일대에 쳐들어온 투르크족을 물리쳐야 했던 하룬은 이를 받아들이고 철수했다.

4.2. 무슬림의 시칠리아 정복 전쟁

799년 아바스 왕조 칼리파 하룬 알 라시드에 의해 이프리키야 에미르로 인정받은 이브라힘 이븐 알 아글라브는 아바스 왕조에 충성을 바치면서도 현재 튀니지를 중심으로 실질적으로 독립된 국가를 세웠다.( 아글라브 왕조) 그는 아바스 왕조에 적대적인 시아파가 세운 이드리스 왕조의 동진을 차단하는 데 전력을 쏟아붓고 싶었기에, 805년 시칠리아 총독과 평화 협약을 맺었다. 812년 이브라힘이 사망한 후 뒤를 이은 압둘라 1세와 지야다탈라 1세 역시 평화 협약을 준수했고, 양자는 무역 거래를 활발히 했다.

그러던 827년, 시칠리아 해군 사령관 에우페미오스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보다 앞서, 그는 한 수녀에게 매력을 느끼고 그녀가 자신과 결혼하도록 강요했다. 이에 수녀의 형제들이 시칠리아 총독 콘스탄티노스 소우다스에게 고발했고, 콘스탄티노스의 보고를 받은 동로마 황제 미하일 2세는 에우페미오스를 체포하여 코를 자르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정보가 새면서 자신이 위험에 처했다는 것을 알게 된 에우페미오스는 반란을 결심했다. 그는 황제를 자칭하고 시칠리아의 수도 시라쿠사를 빠르게 공략했다. 콘스탄티노스 총독은 내륙으로 도피한 뒤 군대를 모아 반격에 가했지만, 가볍게 격파했다. 콘스탄티노스는 카나타에 피신했다가 에우페미오스가 보낸 추격병에 잡혀 처형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팔레르모의 군사 사령관 발라타가 거병하여 시라쿠사를 공격했다.

에우페미오스는 발라타에게 참패하여 시라쿠사에서 축출된 뒤, 아글라브 왕조에 찾아가서 자신을 시칠리아의 지배자로 만들어준다면 매년 공물을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지야다탈라 1세는 그의 제안에 매력을 느꼈다. 당시 아글라브 왕조는 호화로운 궁정을 짓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기 때문에 말리크파 법학자들로부터 반이슬람적이라는 비난을 받았고, 현지의 베르베르인들로부터 불만을 샀다. 이런 상황에서 시칠리아 원정을 성사시킨다면, 이슬람 포교를 위해 지하드를 수행한 셈이니 말리크파 학자들이 잠잠해질 테고, 불만이 많은 베르베르인들을 시칠리아로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시칠리아는 부가 넘치기로 유명했으니, 그곳을 확보한다면 막대한 재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감행된 시칠리아 정복 전쟁은 이제까지의 정복 전쟁과는 달리 쉽게 결판이 나지 않았다. 시칠리아 만큼은 절대로 내줄 수 없다고 여긴 동로마 당국의 적극적인 원조와 현지 주민들의 항전 의지, 전염병 창궐, 아랍인과 베르베르인간의 내분 등 여러 요인이 겹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글라브 왕조는 지지부진한 전쟁에도 물러서지 않고 지하드를 명분삼아 전쟁을 지속한 반면, 동로마 제국은 멀리 떨어진 시칠리아에 지원을 계속하기엔 불가리아와 아바스 왕조의 압박이 갈수록 심해졌기에 불가능했다. 결국 902년 마지막까지 항전하던 타오르미나 요새가 함락되고 남은 기독교 요새들이 복속되면서 시칠리아 전역이 무슬림의 영토가 되었다.

하지만 무슬림과 동로마 제국의 시칠리아 전쟁은 이것으로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909년 아글라브 왕조를 멸망시킨 파티마 왕조는 시칠리아에서 자신들에 대항하여 봉기를 일으킨 시칠리아 토후국들을 짓밟는 데 힘을 기울여야 했다. 그 사이, 타오르미나 요새는 다시 동로마 령으로 돌아갔다. 그 후 그들은 50여 년간 버텼으나 962년 파티마 왕국군에 의해 함락당하고 주민 전원이 죽거나 노예로 끌려갔다.

963년, 무슬림군은 시칠리아에 남아있는 마지막 기독교 요새인 로메타를 포위 공격했다. 니키포로스 2세는 로메타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자 환관이었던 니키타스 아발란티스를 총사령관 겸 해군사령관으로, 본인의 조카인 마누일 포카스를 그 산하의 상륙군 사령관으로 하여 4만여 명에 달하는 대군을 일으켜 시칠리아로 파견했다. 동로마군은 메시나, 히메라, 타오르미나, 레온티니 등 시칠리아 북동부의 여러 도시를 쉽게 공략했지만, 적을 우습게 여기고 경계를 게을리 한 채 로메타로 진군하던 중 매복 공격을 받고 크게 패해 마누일이 전사한 뒤 메사나로 도주했다. 로메타는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되자 항복했다.

이탈리아 본토에 있던 니키타스 아발란티스가 이끄는 동로마 함대가 메사나를 구하려고 출격했으나, 메사나 해협에서 파타마 함대의 급습을 받아 처참한 패배를 당했고, 니키타스 아발란티스 및 주요 간부들은 파티마 왕조에 끌려갔다. 이 참상을 목도한 메사나의 동로마군이 모든 희망을 잃고 항복하면서, 시칠리아 전역은 무슬림군의 수중에 완전히 넘어갔다. 이에 니키포로스 2세는 967년 파타마 왕조의 시칠리아 영유를 인정하고 연공을 바치는 대신 칼타브리아에 대한 약탈을 더 이상 안하게 하는 조건하에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 평화 협정으로 아발란티스를 포함한 포로들이 몸값과 교환되어 석방되었다.[2]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하면서 시칠리아를 장악한 무슬림들은 시칠리아 토후국을 세운 뒤 지중해 해안 지역들을 지속적으로 약탈하고 기독교인들을 노예로 팔아넘겼다. 그러면서도 지중해 해상 무역을 주관하면서 막대한 수익을 벌어들였고, 이를 발판삼아 이슬람 문화를 시칠리아에서 꽃피웠다.

4.3. 무슬림의 크레타 정복

826년, 후우마이야 왕조에서 추방된 뒤 알렉산드리아를 잠시 점거했다가 도로 쫓겨난 아랍인들이 크레타 섬에 상륙했다. 그들은 2년간 전쟁을 치른 끝에 크레타 섬을 완전 장악하고 기존의 중심지였던 고르티나를 파괴한 뒤 새로운 성채를 건설했다. 그들은 이 성채에 라브드 알 한다크(ربض الخندق‎)[3]라는 이름을 지었는데, 그리스인들은 이 성채를 한닥스(Χάνδαξ)라고 불렀다. 그 후 한닥스를 중심지로 삼은 크레타 토후국은 에게해에 해적 행위를 일삼으며 동로마 제국의 본토인 발칸 반도와 아나톨리아 해안 지대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고, 기독교도들을 대거 잡아서 노예로 팔았다.

동로마 제국은 당연히 크레타를 탈환하고자 노력했다. 842~843년, 미하일 3세의 섭정인 테오크리스토스가 파견한 동로마 함대가 크레타의 일부 영역을 장악했다. 그러나 테오크리스토스는 다른 전선에서 외적과 대항하느라 크레타에 지속적인 지원을 하지 못했고, 크레타 토후국은 얼마 후 이들을 축출했다. 866년 봄, 미하일 3세의 또다른 섭정 바르다스가 크레타를 탈환하기 위한 원정을 개시하려 했지만, 출항 전 날에 미하일 3세와 바실리오스 1세의 음모로 인해 살해당했다.

904년, 트리폴리의 레온이 테살로니카를 습격해 20,000명 이상의 포로를 잡아들인 뒤 크레타에 모조리 팔았다. 이에 레온 6세는 911년 이메리오스 제독 휘하 177척을 맡겨 크레타를 탈환하게 했다. 이메리오스는 911년 겨울부터 이듬해 봄까지 6개월간 한닥스를 포위 공격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던 912년 4월, 수도로부터 황제의 건강이 악화되어 오래가기 어렵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그는 어쩔 수 없이 포위를 풀고 수도를 향해 출발했다. 그러나 그의 함대가 히오스 섬을 돌았을 때 트리폴리의 레온이 이끄는 사라센 함대가 습격했고, 이메리오스는 얼마 안 되는 함선만 수습하여 본국으로 도주했다.

4.4. 테오필로스의 아바스 전쟁

816년 크룸 전쟁이 종식되면서 불가리아와 동로마 제국 양자의 20년 평화가 성립되었다. 이로서 아나톨리아에 힘을 기울일 수 있게 되었지만, 820년 12월 25일 레온 5세의 피살과 미하일 2세의 등극에 반발한 슬라브인 토마스의 대규모 반란, 무슬림의 시칠리아 정복 전쟁 크레타 함락으로 인해 한동안 아나톨리아 방면에 신경쓰기 힘들었다. 그러다 829년 미하일 2세가 사망한 후 황위에 오른 테오필로스는 전임 황제들이 미뤘던 아나톨리아 전선 문제를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다.

830년, 테오필로스는 아나톨리콘 테마의 일부를 카파도키아 테마로 분리했다. 카파도키아 테마는 서로는 타타 호, 북으로는 할리스 강, 남으로는 타우로스 산맥으로 둘러싸인 지역이었다. 그는 테마를 가로지르는 타우로스 산맥에 20개 이상의 요새를 설치하거나 강화했다. 특히 시리아에서 아나톨리아로 진입하려면 일반적으로 통과해야 하는 킬리키아 관문의 방위를 대폭 강화했다. 칼리파 알 마문은 이에 대응해 아나톨리아로 쳐들어가 카파도키아 테마의 수도인 코론을 점령하고 순두스와 시난 등 2개 요새를 함락시킨 뒤. 지난날 동로마 제국으로 끌려갔던 백성들을 도로 아바스 왕조의 영역으로 데려갔다.

831년 봄, 킬리키아의 아랍인들이 아다타 고개를 통해 아나톨리아로 진입했다. 테오필로스는 즉시 기병대를 이끌고 이들을 요격하여 하시아논 인근에서 적을 급습해 섬멸하고 7,000명의 포로를 잡았으며, 뒤이어 타르수스를 공략하고 무슬림 1,600명을 살해했다. 그 후 금문교를 통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가서 아야 소피아로 행진하며 군중의 환호를 받은 뒤, 승리를 기념하는 경마 대회를 개최했다. 알 마문이 이에 보복하고자 그해 가을 킬리키아로 이동했을 때, 테오필로스로부터 평화 협약을 맺을 용의가 있다는 전갈과 함께 500명의 아랍인 포로를 받았다. 그러나 알 마문은 이를 무시하고 형제 알 무타심, 아들 알 아바스와 함께 각각 한 개 분견대 씩 거느린 채 카파도키아로 진입하여 티아나 요새를 공략하고 테오필로스가 이끄는 구원 부대를 격파한 뒤 상당량의 전리품과 포로를 확보한 후 귀환했다.

테오필로스는 다시 사절을 보내 평화 협약을 맺자고 청했지만, 알 마문은 서신에서 동로마 황제가 칼리파보다 우선 순위로 두었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832년 봄, 아랍군은 다시 카파도키아를 침공해 이 지역의 주요 군사 거점인 로우론 요새를 포위했다. 그러나 요새가 좀처럼 함락되지 않자, 알 마문은 부하에게 포위를 맡긴 뒤 다마스쿠스로 귀환했다. 로우론 수비대는 야간 기습을 가해 적장을 포로로 잡는 등 분투했지만 포위망을 풀지 못했다. 그해 9월 테오필로스가 구원군을 이끌고 달려왔지만 아랍군에게 패해 철수했고, 결국 로우론 수비대는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은 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가는 대가로 항복했다. 아랍군은 그해 겨울을 로우론에서 보내면서 카파도키아를 점진적으로 공략하고자 했다.

테오필로스는 이러한 상황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평화 협약을 맺자고 호소했지만, 알 마문은 이슬람교로 개종하지 않으면 평화는 없다며 못을 박았다. 833년 5월, 알 아바스가 이끄는 아랍군이 재차 카파도키아를 침공해 동로마군에게 큰 타격을 입히고 카파도키아 전역을 석권하려 했다. 이에 테오필로스는 금화 10만 개와 아랍 포로 7천 명을 석방할 테니 물러가달라고 청했고, 알 마문은 일단 이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알 마문은 장차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공략하기 위한 대규모 원정을 준비했다. 그러던 833년 여름 돌연 중병에 걸려 쓰러졌고, 그해 8월 7일에 사망했다. 이후 이복동생 알 무타심이 새 칼리파로 등극했지만, 각지에서 그에 대항하는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에 이를 수습하느라 동로마 제국에 대한 원정을 벌이지 못했다.

834년, 나스르가 이끄는 15,000명의 아르메니아 반란군이 아바스 왕조군의 공세를 피해 동로마 제국으로 망명했다. 나스르는 테오필로스의 지시에 따라 기독교로 개종하고 테오포보스로 개명했으며, 그의 부하들 역시 기독교로 개종했다. 황제는 아내의 누이를 테오포보스에게 시집보내고, 그가 데려온 병사들을 로마군에 편입시켜 전력을 대폭 강화했다. 그렇게 준비를 갖춘 그는 837년 7만 대군을 일으켜 타우루스 산맥을 넘어 소조페트라를 공략한 뒤 메소포타미아 북부를 휩쓸며 사모사타를 함락시키고 멜리테네( 말라티아)를 조공 도시로 만들었다.

838년 봄, 알 무타심은 작년의 패배에 보복하고자 타르수스에 8만 대군을 집결시킨 뒤 아나톨리아로 쳐들어갔다. 아바스군은 칼과 방패에 테오필로스 가문의 고향인 아모리움 글자를 새겨 복수 의지를 다졌다. 이들은 알 아프신과 칼리파의 부대로 나뉘었다. 알 아프신의 부대는 카파도키아로 진군했고, 칼리파의 부대는 칼라키아 관문을 통해 진격했다. 테오필로스는 두 부대의 합류를 저지하기 위해 토카트 인근의 다지몬(얀첸)에서 알 아프신의 군대와 대적했다. 당시 동로마군에 귀순한 뒤 용맹을 떨쳤던 아르메니아 장군 테오포보스가 이 전투에서 맹활약하여 아바스군에 큰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알 아프신이 급파한 튀르크 궁기병이 갑자기 튀어나와 돌격하는 동로마 대열을 파괴하자 전세는 역전되었다. 게다가 테오필로스가 말을 잃고 친위대와 함께 동분서주할 때, 병사들이 황제가 보이지 않자 죽은 줄 알고 전의를 상실하고 도주해버렸다. 이리하여 테오필로스가 얼마 안 남은 친위대와 함께 언덕에서 무슬림군에게 포위되었을 때, 아르메니아인 마누일이 사력을 다해 싸워 황제를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켰으나 곧 전사했다.

결국 다지몬(얀첸) 전투에서 동로마군은 완패했고, 아바스군은 여세를 몰아 앙카라를 공략한 뒤 아모리움을 포위해 2주만에 함락시키고 7만에 달하는 시민 중 절반을 학살하고 나머지는 노에로 끌고 갔다. 그러나 승리를 거두고 귀환한 알 무타심은 알 마문의 아들 알 아바스가 주변인들의 권고에 따라 칼리파를 찬탈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즉시 얄 사흐르 이븐 샤히, 아므르 알 파르하나, 우제이프 이븐 안바사, 아흐마드 이븐 알 할릴을 처형하고 아바스는 감옥에 갇힌 뒤 가혹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옥중에서 사망했다. 심지어 다지몬 전투의 승리를 이끌었던 알 아프신 마저 정적들의 모함으로 인해 반역죄를 뒤집어쓰고 처형되었다.

한편, 테오포보스는 다지몬 전투 패배 후 잔여 병력을 수습한 뒤 시노페에서 아랍군에 대항할 준비에 들어갔다. 이때 병사들은 테오필로스가 전사했다는 소문을 믿고 그를 황제로 추대했다. 하지만 얼마 후 테오필로스가 살아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테오필로스에게 사절을 보내 항복하겠으니 직위를 유지해달라고 요청했다. 테오필로스는 흔쾌히 받아들였고, 그 대신 그가 이끌고 있던 부대를 여러 연대로 나누어 각지의 테마로 분산시켰다. 이후 839년 소규모 아랍군이 카파도키아로 쳐들어왔다가 격퇴되었고, 841년에는 동로마군이 게르마니키아와 아다타를 약탈했다. 842년 1월 테오필로스와 알 무타심이 잇따라 사망하면서 전쟁은 중단되었다.

4.5. 미하일 3세의 아바스 전쟁

844년, 멜리테네의 에미르 우마르 알 아크타가 이끄는 아바스군이 842년 2살의 어린 황제 미하일 4세의 등극으로 어수선한 동로마 제국의 아나톨리아 영역 깊숙히 침입하여 보스포로스 해안까지 이동했다. 이후 우마르는 마우로포타모스 전투에서 동로마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비슷한 시기에 동로마 제국에서 이단으로 낙인찍혀 박해받은 파울리키아파가 지도자 카르베아스의 인솔 하에 아바스 왕조에 망명했다. 그들은 아바스-동로마 국경 지대에서 테프리케 요새를 중심으로 파울리키아 공국을 세우고 아랍인들과 함께 동로마 제국의 영역을 수시로 공격했다.

845년, 칼리파 알 와시크는 동로마 제국과 포로 교환을 하여 4,362년의 무슬림들이 조국으로 돌아오게 했다. 이것은 알 아민이 809년 또는 810년에 동로마 제국과 포로 교환을 한 이래 30여 년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해 3월 아모리온에서 포로로 잡힌 42명의 동로마 장교들이 이슬람교로의 개종을 거부한 후 사마라에서 처형되었다. 그 후 포로 교환을 위한 임시 휴전이 끝나자, 아바스 왕조의 타르수스 총독 아흐마드 이븐 사이드 이븐 살람은 845년 겨울 7,000명의 장병을 이끌고 아나톨리아 원정을 감행했다. 그러나 그러나 원정은 수많은 병사가 동사하거나 익사하고 상당수가 포로로 잡히는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그 후 양국은 6년간 전쟁을 벌이지 않았다.

855년 5월 22일, 동로마 제국 함대가 환관 다미아누스의 지휘하에 나일강 삼각주의 동쪽 끝자락에 있는 다미에타로 파견해 사라센 함선들을 모조리 불태우고 무기고를 파괴하며 많은 포로를 잡아들였다. 856년 킬리키아 아나자르부스에 동로마군이 들이닥쳐 무슬림들을 살해했다. 아랍 문헌에 따르면, 약 300척의 함대로 이뤄진 제국 함대가 에게 해와 시리아 해안 일대를 3차례 이상 공격했다고 한다. 칼리파 알 무타와킬은 일련의 사태에 분노했고 힘스에 살던 기독교인들을 동로마 제국과 내통하고 있다는 혐의를 씌워 추방했다. 하지만 각지의 반란이 극심했기에 동로마 제국으로의 역공을 감행하지 못했다.

863년 9월, 멜리테네의 아미르 우마르 알 아크타가 파울리키아파 수장 카르베아스와 함께 흑해 연안의 삼순을 공략하고 아르메니아콘 테마를 거쳐 아미수스를 약탈했다. 이에 동로마 제국의 실권자 바르다스는 동생 페트로나스가 이끄는 5만여 제국군을 파견해 이들을 치게 했다. 페트로나스는 병력을 셋으로 나눠 북쪽, 남쪽, 서쪽에서 동시에 진격해 포손-할리스 강과 그 지류인 랄라카온 강 사이의 어느 지점에서 우마르 이븐 아브둘라의 군대를 포위했다. 곧이어 벌어진 처절한 전투에서, 우마르, 카르베아스 등 아랍군 수뇌부와 장병들이 몰살당했다. 페트로나스는 뒤이어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아미다(지금의 디야르바키르)까지 진군해 많은 포로를 확보하고 트라키아로 이주시켰다. 이후 아바스 왕조에서 알 무스타인 알 무타즈의 내전(5차 피트나)이 발발하면서 혼란에 빠지자, 동로마 황제 미하일 3세는 이 때를 틈타 866년 친정을 감행해 유프라테스 강을 넘어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타격한 후 귀환했다.

그 후 아바스 왕조는 튀르크 장군들의 잇따른 칼리파 폐위와 각지에서 발발한 내란으로 인해 대혼란에 빠졌고, 동로마 제국은 남이탈리아와 시칠리아에서 세력을 회복하는 데 중점을 두다가 불가리아 제1제국 역사상 최고의 명군 시메온 대제의 침략( 시메온 전쟁)에 직면하면서 위축되었다. 이 때문에 동로마 제국과 아바스 왕조의 대규모 전쟁은 오랫동안 벌어지지 않았고, 동로마 제국령인 카파도키아 테마와 아바스 왕조령인 킬리키아 사이의 국경 지대에서 국경분쟁이 일어나는 수준에 그쳤다.

5. 동로마 제국의 재정복 전쟁

5.1. 쿠르쿠아스의 아랍 원정

926년 시메온 대제가 사망하고 불가리아 제1제국과의 평화 협약이 맺어지면서 시메온 전쟁이 종결되자, 로마노스 1세는 아나톨리아 방면 로마군 총사령관 요안니스 쿠르쿠아스에게 아랍 원정을 감행하라고 명령했다. 요안니스 쿠르쿠아스는 동생이자 칼디아 총독인 테오필로스 쿠르쿠아스와 함께 오랫동안 아나톨리아를 침략했던 멜리테네 토후국을 공격했다. 그는 아바시니아에서 공세를 펼쳐 아랍군을 수차례 격파하고 멜리테네 요새를 포위하고 수개월간 공격했다. 멜리테네 에미르 아부 하프스가 공물을 바칠 테니 휴전해달라고 애원하자, 그는 황제의 허락을 받고 포위를 풀었다.

927~928년, 요안니스는 아랍의 지배하에 있던 아르메니아에 대해 대대적인 원정을 단행했다. 유프라테스 강변에 위치한 중요한 요새인 사모사타를 점령하고 여세를 몰아 아르메니아의 수도인 드빈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나스르 알 수부키 장군이 드빈을 성공적으로 사수했고, 요안니스는 아랍 구원군이 근처에 이르자 철수했다. 그 후 카시 왕조의 통제하에 있던 아르메니아 남부 지역으로 진군하여 반 호수 주변 지역을 약탈하였고, 작은 도시인 클리아트와 비틀리스를 점령한 뒤 모스크의 민바르(minbar : 설교단)를 십자가로 대체하였다. 그 지역 아랍인들은 칼리프에게 구원을 요청했으나 묵살당했고, 오히려 이 요청으로 인해 무슬림들이 그 지역에서 즉시 쫓겨났다.

그러나 아나톨리아에서 기근이 발생했고, 남부 이탈리아에 대한 원정에 참여할 병력 마련을 위해 아나톨리아 방면 군대 일부가 차출되면서, 요안니스의 전력이 약해졌다. 사즈 왕조의 굴람(ghulam : 노예)인 무플리크와 아제르바이잔의 총독이 이 때를 틈타 역습을 가했고, 요안니스는 패전을 면치 못하고 아나톨리아로 귀환했다. 930년, 아르메니아 출신 동로마 장성이자 리칸도스 테마의 스트라테고스인 멜리아스 장군이 아랍에게 넘어간 사모사타를 공격했지만 아랍 장군 네즘에 의해 대패했다. 이 전투에서 멜리아스의 아들 중 한 명이 생포되어 바그다드로 이송되었다.

930년 전력을 재정비한 요안니스는 동생 테오필로스와 함께 콸리콸라 토후국의 수도인 테오도시오폴리스(Theodosiopolis: 현재의 에르주룸)를 공격했다. 이때 타오-클라르에타(Tao-Klarjeti : 오늘날 터키 북동부 일부 지역)의 이베리아 통치자들은 자신들의 국경선 근처에 동로마 제국이 직접적으로 통치를 하려는 것에 분개하여 포위된 도시에 공급품을 제공했고, 동로마 제국 손에 넘어간 몇 개의 작은 도시들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그 도시들 중 하나인 마스터톤(Mastaton) 요새가 인도되었을 때, 이베리아인들은 신속하게 아랍인들에게 이 요새를 돌려주었다. 요안니스는 이들을 달래기 위해 아락세스 강 북쪽의 모든 영토를 이베리아 왕 다비트 2세에게 주기로 했다. 그 후 테오도시오폴리스는 포위 공격 7개월 만인 931년 봄 함락되었고, 제국에 공물을 바치게 되었다.

928년 멜리테네 에미르 아부 하프스가 사망하자, 멜리테네는 동로마 제국에 대한 충성의 의무를 포기했다. 동로마군은 이에 보복하여 말리테네의 평원 주변 언덕 위에 둥근 요새를 세우고 그 땅을 조직적으로 황폐화시켰다. 결국 멜리네테 거주민들은 931년 초 공물을 바치기로 동의하였을 뿐 아니라, 동로마 군대의 원정에 분견대를 파견하는 것도 동의했다. 이렇듯 동로마군의 침공이 날로 거세지자, 아바스 왕조가 반격에 나섰다. 931년 3월, 압바스 지휘관 무니스 알 카딤이 이끄는 아랍군이 소아시아를 3차례 침공했다. 뒤이어 8월에 타르소스의 아미르 수믈이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안키라와 아모리움까지 뚫고 들어와서 136,000 디나르(dinar: denarius)의 가치가 있는 포로들을 데리고 귀환했다.

요안니스의 동로마군은 그 동안 바스푸라칸 토후국의 통치자 가긱 1세를 돕기 위해 아르메니아 남부로 출전했다. 가긱 1세는 아르메니아 지방 군주들을 모아 동로마 군대와 힘을 합쳐 아제르바이잔의 아미르에 대항했다. 그들은 메소포타미아로 진군하기 전 카시 왕조의 영토를 공격해 클리아트와 베르크리를 남김없이 파괴했다. 그러나 카시 왕조의 아미르 무플리가 즉각 가긱 1세의 영지를 공격했고, 가긱 1세는 그를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요안니스는 그런 가긱 1세를 구하기 위해 달려와서 무플리의 아랍군을 물리쳤다.

한편, 멜리테네인들은 모술을 지배하고 있던 함단 왕조에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함단 왕조의 통치자 사이드 이븐 함단은 동로마 군대를 공격하여 사모사타에서 몰아냈다. 이리하여 멜리테네를 수비하기 어렵게 되자, 동로마 수비대는 931년 11월 멜리테네에서 물러났다. 그런데 사이드 이븐 함단은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멜리테네에 충분한 수비대를 남겨두지 않고 모술로 돌아갔고, 동로마군은 전열을 재정비하여 933년 요안니스의 지휘하에 멜리테네를 침공했다. 이에 아바스 왕조의 장성 무니스 알 카딤이 포위된 멜리테네를 구원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동로마군은 이들을 격파하여 많은 포로를 획득했지만, 포위를 더 이어가지 못하고 물러났다.

934년 초, 요안니스는 또 다시 50,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국경을 넘어 멜리테네를 향해 진격했다. 당시 칼리프 알 카히르가 폐위되면서 아랍 세계에서 내분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기에, 어떤 무슬림 국가도 멜리테네를 구원하지 못했다. 요안니스는 사모사타를 재차 점령하고 멜리테네를 포위했다. 도시의 많은 거주민들은 도시를 버리고 달아났으며, 남은 자들은 934년 5월 19일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항복했다. 요안니스는 반란이 일어날 걸 우려하여 기독교인으로 개종할 것을 요구했고, 응하지 않는 자를 추방했다. 이로서 멜리테네는 동로마 제국에 편입되었으며, 이곳의 비옥한 땅은 제국의 직할령이 되었다. 요안니스는 뒤이어 936년 사모사타의 남은 미 점령지르 마저 점령하고 사모사타 시를 남김없이 파괴했다.

936년, 함단 왕조의 새 통치자 사이프 알 다올라는 대대적인 반격에 착수했다. 그는 카르페테 요새를 점령했으며, 요안니스가 급파한 전위대를 격파하고 많은 노획물을 획득했다. 같은 해 동로마 제국과 아바스 왕조는 함단 왕조의 급격한 세력 성장을 경계하여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이리하여 전선이 축소되면서 병력을 집결할 수 있게 된 요안니스는 939년 테오도시오폴리스에서 반란이 일어나 주둔군이 쫓겨나자 즉각 탈환 작전을 감행했다. 비록 사이프의 구원군이 접근하자 철수했지만, 뒤이어 반 호수 주변의 무슬림 토후국들을 직접적으로 위협할 수 있는 아르메니아 남서쪽 산맥의 아르사모사타를 점령했다.

사이프 알 다올라는 이 상황을 뒤집기 위해 대대적인 원정을 감행했다. 그는 마이야피리킨에서 출진하여 반 호수 서쪽 15km에 위치한 비틀리스로 나아가 그곳의 몇몇 요새를 공략하고, 지역 군주들의 항복을 받아냈다. 뒤이어 테오도시오폴리스 주변의 동로마 영역을 황폐화시켰고, 콜로네이아까지 침공했다. 결국 요안니스는 그를 격퇴하기 위해 아르사모사타에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메소포타미아의 부이 왕조와 이집트-시리아의 이흐시드 왕조가 함단 왕조를 압박해오자, 사이프는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동로마 제국은 이흐시드 왕조와 우호 관계를 맺었고, 요안니스는 941년 여름 아랍 원정을 준비했다. 그런데 얼마 후 키예프 루스가 갑작스럽게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쳐들어오는 바람에, 아랍 원정을 중단하고 수도를 구하러 달려가야 했다.

942년 1월, 루스군을 격파한 요안니스는 아랍 원정을 재개했다. 그는 알레포 지역을 철저하게 약탈하였으며, 알레포 인근의 하무스 시를 함락했다. 아랍 사료에 따르면, 이때 10,000~15,000명이 포로로 잡혀갔다고 한다. 그해 여름, 타르소스의 수믈이 보복 공격을 가하여 국경의 몇개 마을을 약탈했다. 요안니스는 이에 아랑곳않고 가을에 대규모 원정에 착수했다. 아랍 사료에 따르면, 요안니스는 약 8만에 달하는 대군을 이끌고 반 호수 서쪽에 위치한 동맹국 타론을 가로질러 메소포타미아 북부로 쳐들어갔다고 한다. 동로마군은 이라클리오스 황제 이래로 발을 들이지도 못했던 못한 마이야피리킨, 아미다, 니시비스, 다라를 잇따라 공략했다. 요안니스의 최종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가 얼굴을 닦기 위해 사용한 뒤 얼굴 형상이 찍힌 천 만딜리온이 보관된 에데사였다.

요안니스는 942년부터 에데사를 매년 맹렬히 공격하였고, 에데사 주변 일대도 철저히 파괴했다. 943년 동로마군이 에데사를 완전 포위하자, 에데사 주민들은 강화를 요청했다. 요안니스는 모든 포로들을 돌려보내면서 그 대가로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 만딜리온을 요구했다. 에데사 주민들은 비록 무슬림이었지만 예수를 위대한 예언자의 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어서 초상을 귀한 유물로 여기고 있었기에 그의 요구에 난감해했다. 그들은 칼리프에게 직접 문의하겠다면서 칼리프의 지침을 받을 때까지 공격을 유보해 달라고 부탁했다.

944년 봄, 에데사 주민들은 칼리프에게서 "그대들을 구할 방법이 딱히 없으니 그리스도의 초상을 저들에게 넘겨라."는 답신을 받았다. 이에 주민들은 성대한 의식을 거행한 뒤 초상을 요안니스에게 넘겨줬고, 요안니스는 곧바로 엄중한 호위를 붙여 그것을 콘스탄티노플로 보냈다. 8월 초, 그 초상은 보스포루스의 아시아 쪽 해안에 도착했고 대기하고 있던 시종장 테오파네스가 직접 그것을 로마노스 황제에게 보냈다. 8월 15일, 그리스도의 초상은 금문을 통해 수도에 당당히 입성했고, 황궁 예배당에 안치되었다. 요안니스는 뒤이어 비트라와 게르마니케이아를 약탈하고 아나톨리아로 귀환했다.

요안니스 쿠르쿠아스는 아나톨리아를 아랍의 공세로부터 지켜내는 데서 그치지 않고 18년간 적극적인 원정을 감행해 시리아 북부와 아르메니아의 토후국들을 동로마 제국에 복속시켰다. 그러나 944년 가을 두 아들 스테파노스와 콘스탄티노스의 이간질에 현혹된 로마노스 1세는 요안니스를 위험인물로 여기고 직위에서 물러나게 했다. 이로 인해 동로마군의 기세는 한풀 꺾였고, 지난날 요안니스 쿠르쿠아스를 상대로 선전했던 함단 왕조의 사이프 알 다울라는 이 때를 틈타 지하드를 선포하고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역공을 가했다.

5.2. 함단 전쟁(1차전)

945~946년, 사이프 알 다울라는 아나톨리아의 카파도키아 테마를 습격해 전리품을 다소 확보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잡은 포로들은 전원 아랍인 포로 교환에 쓰였다. 948년 대 바르다스 포카스의 알레포 침공을 저지했지만, 바르다스의 아들 레온 포카스가 유프라테스 강 연안의 수그르 지역의 주요 거점인 하다스를 약탈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949년, 사이프는 라칸도스 테마를 급습했으나 방비를 뚫지 못했다. 동로마군은 즉시 역공을 가해 게르마니케이아를 약탈하고 안티오키아까지 급습했다.

950년, 사이프는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아나톨리아 반도의 라칸도스와 하시아논 테마로 쳐들어가 철저하게 약탈했다. 그러나 귀환하던 중 레온 포카스의 매복 공격을 당했다. 가즈와트 알-무시바(ghazwat al-musiba : 죽음의 원정)으로 알려진 이 전투에서, 사이프는 8,000명의 병사를 잃고 가까스로 포위망을 뚫고 탈출했다. 그러나 그는 동로마 제국과 평화 협약을 맺기를 거부하고 라탄도스와 멜리테네를 공격해 약탈을 자행한 뒤 겨울이 될 즈음에 철수했다.

951년, 사이프 알 다올라는 게르마니케이아와 하다스를 포함한 킬리키아와 시리아 북부 요새를 재건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대 바르다스 포카스를 이를 저지하고자 군대를 이끌고 킬리키아로 진입했지만 사이프에게 격퇴당했다. 953년, 대 바르다스 포카스는 대군을 이끌고 다시 침공했지만 게르마니케아 인근의 마라쉬 전투에서 참패했고, 그의 막내 아들 콘스탄티노스 포카스는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사이프를 "진정한 투사"로 칭송했던 아랍 역사가들은 마라쉬 전투에 많은 찬사를 보냈다. 954년, 사이프는 다시 바르다스 포카스를 물리치고 사마사타와 하다스를 탈환했다. 955년, 바르다스 포카스는 재차 원정에 착수했으나 또다시 패배했다. 이 일련의 패전으로 인해 위신을 잃은 대 바르다스 포카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소환되었고, 장남 니키포로스 포카스가 아나톨리아 방면군 총사령관으로 부임했다.

956년, 사이프 알 다올라는 카파도키아 테마를 재차 습격했다. 니키포로스 포카스의 부관 요안니스 치미스키스는 매복 공격을 준비했지만, 이를 간파한 사이프의 역공으로 4,000명을 잃고 패퇴했다. 이에 니키포로스 포카스가 보복에 나서 시리아로 쳐들어가 사이프의 사촌인 아부 알 아시아르를 격파하고 사로잡았다. 956년 후반, 사이프 알 다울라는 타르수스로 가서 키비라이오트 테마 소속 동로마 함대의 타르수스 침공을 저지했다.

957년, 니키포로스 포카스는 하다스를 함락시키고 철저히 파괴했다. 사이프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동로마 포로 180명을 처형하고 200명 이상을 신체 절단형에 처했다. 958년 봄, 요안니스 치미스키스는 자지라를 침공하여 다라를 공략하고 사이프 알 다올라의 심복인 체르케스인 나지야가 이끄는 10,000명의 적군을 상대로 아미다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환관 바실리오스 레카피노스와 함께 사모사타를 습격하고 사이프 본인이 직접 이끌고 온 적 구원부대를 격파했다. 959년, 레온 포카스는 키루스 일대를 침공해 여러 요새를 약탈했다.

5.3. 한닥스 공방전

949년, 해군 사령관 콘스탄티노스 곤길리스가 콘스탄티노스 7세의 명령을 받들어 크레타 탈환에 착수했다. 그는 섬에 순조롭게 상륙한 뒤 한닥스를 포위했지만, 원정군 진영을 요새화하는 것을 소홀히 하는 바람에 사라센군이 야간 기습을 할 때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결국 군대는 와해되었고, 곤길리스는 기함을 타고 간신히 탈출했다. 콘스탄티노스 7세는 이를 복수하고자 더 많은 함대를 준비하고 한닥스 요새를 공략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했지만 959년 원정을 추진하기 전에 사망했다.

콘스탄티노스 7세 사후 황위에 오른 로마노스 2세는 정사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환관 요세프 브링가스가 권세를 누렸다. 그는 선제의 계획을 밀어붙이기로 하고, 무슬림과의 전쟁에서 탁월한 활약을 선보였던 니키포로스 포카스를 원정군 총사령관으로 삼았다. 니키포로스는 소아시아와 에페수스 일대에서 병력을 소집해 2만 7천 명의 해군 및 선원들을 징집하고 5만 명의 육군을 태우기 위한 308척의 함대를 소집했다.

960년 늦봄에 출항한 니키포로스 포카스의 함대는 7월 13일 크레타에 상륙했다. 테오파네스 콘티니아토스와 테오도시오스 부제는 동로마군이 상륙하는 동안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았다고 기술했지만, 레온 부제는 사라센들은 해안가에 군대를 배치하고 적이 상륙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밝혔다. 레온 부제의 설명에 따르면, 니키포로스는 적이 기다리고 있는 걸 보고 병력을 3개 대열로 편성한 뒤 곧바로 돌격했고, 사라센들은 적의 예상치 못한 맹공에 크게 패한 뒤 한닥스 요새로 달아났다고 한다.

그 후 니키포로스 포카스는 한닥스 요새를 9개월간 포위 공격한 끝에 961년 3월 6일에 함락시켰다. 로마군은 오랜 고생 끝에 공략한 것에 단단히 열받아서 여자들을 모조리 윤간하고 아이들을 살해했으며, 도시를 사흘간 약탈했다. 한닥스 요새 함락 후 크레타 섬의 나머지 지역은 로마군에 재빨리 항복했다. 동로마 제국은 어렵게 확보한 크레타를 기독교화하기 위해 장기간 포교 활동을 전개했고, 스트라테고스(군 사령관)를 한닥스에 배치해 섬의 전반적인 관리와 경비를 맡겼다. 그리하여 동로마 제국은 에게해의 안보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 후 크레타는 제4차 십자군 원정으로 동로마 제국이 무너진 뒤 베네치아 공화국의 영역이 될 때까지 동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5.4. 함단 전쟁(2차전)

960년, 사이프 알 다올라는 니키포로스 포카스가 한닥스 공방전을 치르기 위해 상당수의 아나톨리아 방면 로마군을 크레타로 이끌고 간 틈을 노리기로 했다. 그는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최대 병력인 3만 명을 이끌고 제국의 국경을 넘어 타우로스 산맥 동쪽의 협곡들을 무사히 통과하고 멜리테네 부근의 샤르시아논 요새로 가서 수비대를 죽이고 많은 포로를 잡았다. 니키포로스 포카스를 대신하여 수비를 맡았던 레온 포카스는 수적으로 열세인데다 길고 험한 원정으로 지쳐서 함부로 맞서지 않기로 하고, 산악 지대에 주둔하고 주요 길목에 병력을 세심하게 배치한 뒤 사이프가 본국으로 돌아가기를 기다렸다.

960년 11월 초, 사이프는 본국으로 귀환하다가 쿨린드로스 고개에서 레온 포카스가 이끄는 제국군의 기습을 받고 300명의 기병대와 함께 전속력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그를 따르던 병사들은 절반 가까이 죽었고 붙잡힌 병사들은 노예로 전락했다. 그 후 크레타 정복을 완수하고 귀환한 니키포로스 포카스는 962년 초 동생 레온 포카스와 함께 7만 대군을 이끌고 킬리키아로 진군하여 불과 3주만에 킬리키아의 도시 55개를 공략했다.

사이프는 적의 공세에 대응하기 위해 킬리키아로 향했다. 그러나 니키포로스 포카스는 킬리키아에 그대로 머물 생각이 없었다. 그는 부활절에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진군을 재개해 알렉산드레타 근처의 시리아 성문을 통과했다. 이후 그의 군대는 남쪽으로 서서히 이동하면서 도상의 촌락들을 불태웠고, 마침내 962년 12월 사이프의 수도 알레포에 도착했다. 알레포는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12월 23일 함락되었고, 사이프는 알레포 성벽 바깥에서 사로잡혔다가 가까스로 빠져나왔다. 동로마 병사들은 알레포 시내로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와 지칠 때까지 학살을 계속했고, 39만 디나르의 은, 낙타 2천 마리, 노새 1400마리,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아랍산 종마들을 약탈하고 궁궐을 불태웠다.

963년 로마노스 2세가 급사한 뒤 병사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받은 니키포로스 포카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하여 자신을 막으려 했던 환관 요세프 브링가스를 몰아내고 로마노스 2세의 황후이자 바실리오스 2세, 콘스탄티노스 8세 형제의 모후인 테오파노와 결혼한 뒤 공동 황제로 등극했다. 그리하여 사이프는 겨우 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지만, 당시 장염과 소변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병에 시달리면서 정상적인 활동을 하는 데 애를 먹으면서 군사 활동에 애를 먹었고, 알레포가 파괴되는 것을 막지 못했기 때문에 부하들의 신임을 잃었다.

급기야 조카이자 하란 총독인 히바트 알라가 사이프의 신임을 받던 기독교 비서를 죽인 후 반란을 일으켰다. 사이프는 나지야를 파견해 반란을 진압하게 했다. 나지야는 히바트를 물리쳤지만, 곧 사이프에게 반란을 일으키고 시아프의 부인이 거주하고 있던 마이야파리킨을 부와이 왕조에게 넘겨주고자 공격했다. 사이프는 이를 물리쳤지만, 나지야는 아르메니아로 피신한 뒤 반 호수 주변의 몇 개 요새를 공략했다. 964년, 나지야는 재차 마야파리킨을 공격하려 했다가 그가 새로 확보한 아르메니아 영토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바람에 군대를 돌려야 했다. 965년, 사이프는 군대를 끌어모은 뒤 아르메니아로 진군해 나지야를 생포한 후 마야파리킨으로 끌고 갔다. 그는 나지야를 살려주고 싶어했지만, 그의 부인이 나지야를 죽여야 한다고 강권하자 결국 처형했다.

이렇듯 내부분열이 심해졌고 병세가 악화되는 데다 기근도 닥쳤지만, 그는 963년 소아시아를 3차례 습격해 아이코니움까지 약탈하는 등 지하드를 멈추지 않았다. 이에 요안니스 치미스키스가 963년 겨울 킬리키아로 쳐들어가서 아다나 인근에서 아랍군을 격파한 뒤 모프수에스티아를 포위했으나 보급품이 떨어지자 철수했다. 964년 가을, 니키포로스 2세가 아랍 원정에 착수하여 모프수에스티아를 포위했지만 기근이 닥치자 철수했다. 하지만 니키포로스 2세는 965년에 또다시 4만 대군을 일으켜 모프수에스티아를 공격해 기어이 함락시켰고, 뒤이어 트리폴리를 포위해 2주 만인 965년 8월 16일 함락시키고 재기독교화 사업을 실시했다.

상황이 이처럼 좋지 않게 돌아가자, 사이프 알 다울라는 966년 초 사모사타를 점거하고 있던 동로마군에 사절을 보내 단기 휴전과 포로 교환을 요청했다. 제국이 이에 응하면서 많은 아랍 포로들을 보내자, 이를 통해 무너진 병력을 재건한 뒤 자신의 영지에 창궐하던 민란을 제압했다. 그러나 966년 10월 니키포로스 2세가 또다시 남하해오자 안전한 사자르 요새로 피신했다. 니키포로스 2세는 아미타, 다라, 니시비스를 습격한 뒤 히에라폴리스를 점거한 후, 안티오키아를 포위했지만 보급품이 떨어지자 철수했다. 사이프는 적이 물러간 후 967년 2월 초에 알레포로 돌아왔다가 967년 2월 8일 또는 9일에 사망했다.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오랜 세월 대적했던 사이프 알 다울라가 사망한 후, 아들 샤리프 알 다울라가 뒤를 이어 알레포의 에미르가 되었다. 니키포로스 2세는 968년 안티오키아에서 알렉산드레타로 가는 길에 있는 바그라스 요새에 1500명의 병사들을 배치하고 안티오키아 주변에 여러 요새를 세운 뒤 미하일 부르체스에게 안티오키아를 포위해서 굶주림에 시달리도록 유도하되 옛 총대주교좌로서 위상이 드높은 안티오키아를 손상 입히지 말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부르체스는 도시에서 내응하겠다는 유력자의 권고를 수락하고 포카스 가문의 일원인 페트로스 포카스와 함께 안티오키아를 기습 공격해 함락시켰다. 니키포로스 2세는 부르체스가 황명에 불순종했다는 이유로 해임했고, 이에 분노한 부르체스는 969년 12월 11일 요안니스 1세의 니키포로스 2세 암살에 가담했다.

한편, 부르체스를 대신하여 아랍 전선을 맡은 페트로스는 969년 12월에서 970년 1월 사이에 함단 왕조의 수도 알레포를 압박했다. 샤리프 알 다올라는 도저히 대항할 여력이 없었기에 동로마 제국의 봉신이 되기로 한 사파르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에는 아미르 지명 권한, 연공 바치기, 동로마로부터의 수입품에 10% 관세를 매기고 그것을 집행 및 감독하기 위한 관원 파견, 다른 이슬람 군대가 함단 왕조의 영토를 넘나드는 것을 금지, 시리아 지역에서의 로마군의 활동을 지원할 것, 함단 왕조 내 기독교인 지위 인정, 동로마 출신 탈주자 및 다른 이슬람 세력의 스파이 송환 등, 동로마 제국에 매우 유리한 조건이 많았다. 이리하여 동로마 제국은 오랜 숙적이었던 함단 왕조를 복속시키고 아랍 전선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얼마 후 이집트를 완전 장악한 파티마 왕조가 시리아로 진출하면서, 양국은 함단 왕조를 사이에 놓고 대치했다.

5.5. 파티마 왕조와의 시리아 전쟁

973년 7월, 파티마 왕조군이 아미다 성벽 앞에서 현지의 로마군을 괴멸시켰다. 이 소식을 접한 요안니스 1세는 동방으로 진격해 대대적으로 복수하기로 했다. 974년, 요안니스 1세는 군대를 이끌고 남쪽의 아미다와 마르티로폴리스를 공략한 후 이렇다 할 저항을 받지 않은 채 메소포타미아의 평원지대에 이르렀다. 이후 그는 바그다드를 지나쳐 안티오키아로 가서 그곳의 겨울 주둔지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이후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가서 서방의 교황과 총대주교 간의 갈등을 수습했다.

975년 동방으로 돌아간 요안니스는 안티오키아를 출발해 에메사로 가서 싸우지도 않고 항복을 얻어냈고 바알베크, 다마스쿠스, 티베리아스, 카이사레아, 베이루트, 비블로스까지 정벌했다. 이후 예루살렘까지 진격하려 했지만 파티마 왕조군이 철저하게 방비하자 포기했다. 이로서 요안니스는 이라클리오스 황제 이래 동로마 제국의 역대 황제가 밟아본 적이 없던 팔레스타인, 시리아, 레바논의 대부분을 동로마 제국의 영토로 귀속시켰다. 그러나 이 성과는 976년 요안니스 1세가 돌연 사망한 뒤 제국이 내란에 휘말린 틈을 타 파티마 왕조가 빼앗겼던 영토를 도로 되찾으면서 무위로 돌아갔다.

992년 6월, 파티마 왕조의 굴람(노예)이자 다마스쿠스 총독인 만주타킨이 파티마 칼리파 알 아지즈의 지시를 받들어 동로마 제국에 귀속된 알레포 공략에 착수했다. 그는 먼저 안티오키아의 미하일 부르체스가 이끄는 동로마군을 격파한 뒤 알레포를 포위했다. 그러나 13개월의 포위에도 함락하지 못하다가 993년 초 보급품이 떨어지자 다마스쿠스로 철수했다. 994년, 만주타킨은 공세를 재개하여 그해 9월 오론테스 전투에서 미하일 부르체스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바실리오스 2세는 이러한 상황을 전해듣자 군대를 소집한 뒤 16일 만에 소아시아를 거쳐 알레포에 도착했다. 황제가 이렇게 빨리 올 줄은 상상도 못했던 만주타킨은 급히 다마스쿠스로 퇴각했다.

그 후 바실리오스 2세는 남하하여 트리폴리와 타르투스를 공격하여 트리폴리 제압엔 실패했지만 타르투스를 공략했다. 알 아자즈는 친히 바실리오스 2세와 대적하기로 마음먹고 대규모 병력을 소집했지만, 995년 10월 14일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사후 알 아지즈의 어린 아들 알 하킴이 새 칼리파로 등극했다. 만주타킨은 이에 불복종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가 아스칼론 전투에서 술라이만 이븐 자파르가 이끄는 베르베르군에게 토벌되었다.

한편, 바실리오스 2세는 티레에서 일어난 반 파티마 봉기를 지원했고, 미하일 부르체스를 해임하고 다미아노스 달라시노스를 새 안티오키아 총독으로 임명했다. 998년, 달라세노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아파메아를 공격했지만 파티마 장군 자이흐 이븐 알 삼사마에게 패배했다. 바실리오스 2세는 패전 소식을 듣고 곧바로 시리아로 달려와 999년 10월 그곳에 도착한 뒤 헬리오폴리스를 급습하고 라리사에 수비대를 배치했으며, 아부 쿠바이스, 마샤트, 아르카 등 3개의 소규모 요새를 파괴했다. 12월에는 트리폴리를 포위했지만 함락에 실패했다.

1000년, 파티마 칼리파 알 하킴과 바실리오스 2세는 평화 협약을 체결하기로 했다. 알 하킴은 내정에 전념하길 희망했고, 바실리오스 2세는 불가리아 전쟁에 전념하고 싶었기에 협약이 성사될 수 있었다. 이리하여 동로마 제국과 파티마 왕조의 시리아 전쟁은 종결되었다.

5.6. 로마노스 3세의 알레포 전쟁

1030년, 로마노스는 알레포의 아미르를 공격하기 위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출정했다. 그가 안티오크에 도착했을 때, 아미르가 대사를 보내 기존의 평화 조약을 준수할 것을 요구하며 피해가 있다면 배상하겠다고 제의했다. 그러나 이미 개선식에 사용할 제관을 주문해 놓은 로마노스는 그 제의를 거부하고 알레포로 진군했다. 군대가 시리아에 이르러 좁은 고개로 막 들어서려 할 때 사라센군의 함성이 들리더니 갑자기 아미르의 병사들이 언덕의 양쪽 사면으로 내려왔다. 로마노스는 부관 한 명이 말을 오르게 해주고 자신을 경호해준 덕분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지만, 군대는 큰 타격을 입었다.

며칠 후, 사라센 기병대 800명은 제국군에게서 노획한 전리품을 가득 실은 채 텔루크로 다가왔다. 그들은 황제가 전사했고 제국군 전체가 괴멸되었다는 과장된 소식을 전하면서 텔루크 군사 총독 게오르기오스 마니아케스에게 이튿날 아침까지 항복하지 않으면 보복할 것이라고 협박했다. 마니아케스는 두려워하는 기색을 보이면서 사라센 진영에 많은 음식과 술을 보내주고 자신과 병사들은 동이 트자마자 항복하고 시가 소유한 금과 보물을 내놓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사라센군은 크게 기뻐하며 술을 마음껏 마셨다.

그러나 이것은 함정이었다. 마니아케스는 이튿날 새벽 기습을 가해 곯아 떨어진 사라센 기병 800명을 순식간에 도륙하고 모든 시신에서 코와 귀를 잘라냈다. 이후 그는 패주한 로마노스 황제를 카파도키아에서 만나 800개의 코와 1600개의 귀를 내놓았다. 그러자 황제는 크게 기뻐하며 마니아케스를 하(下) 메디아의 군사 총독으로 임명해 유프라테스 상류 유역의 모든 도시들을 다스리게 했다. 이후 마니아케스는 사라센군을 상대로 연전연승했고 1032년엔 에데사를 공략했다. 결국 알레포의 에미르는 동로마 제국에 복종을 맹세하고 조공을 바쳤다.

5.7. 마니아케스의 시칠리아 원정

동로마 제국은 963년 시칠리아를 최종적으로 상실한 후에도 그곳을 탈환할 기회를 노렸다. 1018년 바실리오스 2세 42년간 치렀던 불가리아 전쟁에서 승리해 불가리아를 완전히 정복한 뒤 시칠리아를 정벌하기 위한 대규모 군대를 준비했다. 그는 1027년에 시칠리아로 친정하려 했으나 1025년 12월 15일에 6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후 동로마 제국은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시칠리아 원정을 차일피일 미뤘다. 그러다 1034년 황위에 오른 미하일 4세는 시칠리아 원정을 단행하기로 마음먹었다. 때마침 시칠리아 토후국에서 내분이 일어나면서, 원정이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시칠리아 토후국의 중심지인 팔레르모의 에미르 아흐마드 이븐 유수프 알 아칼은 1031년 시칠리아 내 비 아랍인들을 대상으로 세금을 대폭 늘렸다. 이에 반감을 품은 민중이 1034년 알 아칼의 형제 아부 하프스의 선동에 호응하여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상황이 다급해지자, 알 아칼은 1035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사절을 보내 원군을 보내달라고 호소했다. 이는 가뜩이나 시칠리아를 정벌하려 했던 동로마 제국에게 좋은 명분을 제공했다. 비록 알 아칼은 1037년 암살당했지만, 미하일 4세는 어차피 명분이 충분한 만큼 그대로 원정을 감행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1038년, 동방 전선에서 아랍 토후국들을 상대로 활약해 에데사 공략에 기여했던 게오르기오스 마니아케스가 지휘하는 원정대가 시칠리아로 출발했다. 원정대는 아풀리아, 칼라브리아 지방 민병대와 동방 전선에서 소집된 장정들을 포함한 정규병에 하랄 3세 하르드라다가 포함된 500명의 바랑인 친위대, 랑고바르드 계열 살레르노 공국이 파견한 아르두인 휘하 랑고바르드군, 그리고 '무쇠팔' 빌럼 1세가 지휘하는 300명의 노르만 용병대로 구성되었다.

원정대는 레지오 지방의 칼라브리아 항구에 들린 뒤 1038년 늦여름에 시칠리아에 상륙하여 메시나를 빠르게 점령했다. 당시 시칠리아를 다스리던 지리 왕조의 왕자 아브드 알라와 팔레르모의 에미르 알 하산 알 삼삼이 이들을 저지하고자 진군했지만, 발데모네 전투에서 마니아케스에게 참패했다. 마니아케스는 여세를 몰아 팔레르모로 가는 북부 해안 도로와 메시나를 잇는 고개를 통제하는 중요한 요새인 로메타를 공격해 격전 끝에 함락시켰고, 뒤이어 시라쿠사로 진군해 1040년에 함락시켰다. 이때 빌럼 1세가 시라쿠사 에미르를 단칼에 베어죽였고, 이때부터 '무쇠 팔'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아랍측 일부 기록에 따르면, 동로마군은 몰타에 대한 해상 공격을 시도했지만 공략엔 실패했다고 한다.

이렇듯 동로마군은 원정을 개시한 이래 2년간 시라쿠사 등 시칠리아 동부 일대를 단숨에 석권했지만, 얼마 후 내홍에 시달렸다. 마니아케스는 군사적 역량이 탁월했지만 지나치게 독선적인 성격이었고 언행이 과격했다. 이로 인해 그에게 불만을 품은 이들이 잇따라 이탈했다. 급기야 미하일 4세의 매제였던 스테파노스와 심각한 갈등을 벌였고, 이에 앙심을 품은 스테파노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사절을 보내 마니아케스가 반역을 꾀하고 있다고 모함했다. 결국 마니아케스는 긴급 체포된 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끌려가 투옥되었다.

그 후 스테파노스가 새 사령관에 올랐지만 변변찮은 지휘력을 보이다가 얼마 안가 사망했다.[4] 환관 바실리오스가 뒤를 이었지만 역시 변변치 않았고, 원정군은 힘을 잃고 퇴각하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1040년 남부 이탈리아에서 노르만 용병대가 베네벤토 공자 아테눌프를 지도자로 선출한 뒤 이탈리아 속주 총독 엑사고스토스를 생포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시칠리아에 투입되었던 원정군 일부가 그쪽으로 긴급히 투입되면서 원정군의 전력은 한층 더 약화되었다.

아랍군은 이 때를 틈타 대대적인 반격을 가해 동로마군을 밀어붙였고, 1041년에 메시나를 제외한 시칠리아 전역이 도로 무슬림의 수중에 들어갔다. 최후의 전초기지였던 메시나 역시 1042년에 함락되었다. 이리하여 시칠리아 원정은 허망하게 실패했고, 동로마 제국은 두 번 다시 시칠리아에 손 대지 못했다. 다만 시칠리아 토후국은 이후에도 내분에 시달리다가 동로마 제국의 원정에 참여했다가 시칠리아의 풍요로운 자원과 온화한 기후를 눈여겨 본 노르만족에 의해 1072년 정복되었다.

6. 이후

11세기 중순, 튀르크 계열이 수립한 셀주크 제국이 급격하게 팽창해 중동 세계를 순식간에 장악하면서, 동로마 제국의 주요 상대는 아랍인에서 튀르크인으로 전환되었다. 1071년 제2차 만치케르트 전투에서 참패한 후 아나톨리아를 거의 상실했지만, 셀주크 제국의 내부분열과 제1차 십자군 원정으로 인해 무슬림들의 시선이 예루살렘에 쏠린 틈을 타 콤니노스 왕조의 치세에 세력을 회복하고 100여 년간 안정기를 누렸다.

그러나 안드로니코스 1세의 실정으로 인해 콤니노스 왕조가 무너진 후 쇠락의 길을 걷다가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면서 일시적으로 멸망했다. 1261년 니케아 제국 미하일 8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하면서 동로마 제국은 부활했지만, 이후에는 팔레올로고스 내전과 라틴계 국가들과 세르비아, 불가리아, 튀르크의 침략에 시달리다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최종적으로 정복되었다.


[1] 아랍식 이름은 쿠사일라 이븐 말잠(Kusaila Ibn Malzam)이고, 라틴어식 이름은 카이킬리우스(Caecilius)이다. [2] 아발란티스는 포로생활 동안 어느 정도의 자유를 인정받았는지, 4세기의 3대 카파도키아인 교부들 중 두 명인 카이사리아의 바실리오스(대 바실리오스) 및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의 설교집(Homilies)을 필사했고, 이 필사본은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고 있다. [3] 해자가 있는 성이란 뜻이다. [4] 아랍군과의 전투 도중 전사했다는 설과 병사했다는 설이 제기되나 불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