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룸 전쟁 영어: Khan Krum's war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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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807년 ~ 816년 | |
장소 | 발칸반도 | |
원인 | 크룸의 영토 확장에 위협을 느낀 니키포로스 1세의 선제 공격 | |
교전 세력 | 동로마 제국 | 불가리아 제1제국 |
지휘관 |
니키포로스 1세† 스타브라키오스☠ 미하일 1세 랑가베스 레온 5세 |
크룸☠ 오무르타그 |
병력 | 불명 | 불명 |
피해 | 불명 | 불명 |
결과 | 동로마 제국과 불가리아 제1제국의 타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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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807~816년, 불가리아 제1제국의 칸 크룸과 동로마 제국의 전쟁. 동로마 제국은 이 전쟁에서 니키포로스 1세가 전사하고, 스타브라키오스가 중상을 입고, 미하일 1세 랑가베스가 패전 후 퇴위하는 등 심각한 타격을 입었지만 끝내 유리한 고지를 점한 채 평화 협정을 맺는 데 성공했다.2. 배경
756~775년, 동로마 제국 황제 콘스탄티노스 5세는 불가리아를 상대로 8차례의 원정을 단행했다.( 콘스탄티노스 5세의 불가리아 원정) 그 결과 불가리아는 큰 타격을 입고 수많은 칸들이 잇따라 피살당하는 등 대혼란에 휩싸였고, 동로마 제국은 발칸 반도의 패권을 확립하고 다뉴브 전선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스 5세 사후, 불가리아는 새 칸 카르담 휘하에서 혼란을 수습하고 다시 강성해지기 시작했다.791년, 카르담은 아드리아노폴리스 근처 프로바트에서 콘스탄티노스 6세의 로마군을 격파하고 적의 기지를 점령했다. 이에 콘스탄티노스 6세는 792년 7월 다시 군대를 이끌고 양국의 국경 근처에 이르렀다. 그는 마르켈라 요새(현재 카르노바트 인근)를 건설하여 전진기지로 삼고자 했다. 카르담은 7월 20일 그의 군대와 함께 인근 고지를 점거한 후 동로마군의 상황을 정찰하였다. 이때 점성술사 판크라티우스가 별자리를 보니 불가리아군을 섬멸하는 미래가 보였다고 주장하자, 황제는 이에 고무되어 주둔지를 떠나 불가리아군이 점거한 고지로 진격했다. 그러나 불가리아군은 역공을 가해 동로마군을 격파하였고, 판크라티우스를 포함한 많은 장군들이 전사했다. 카르담은 황제의 천막과 수많은 물자를 점거했다. 결국 전의를 상실한 황제는 불가리아와 평화 조약을 체결하여 매년 공물을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796년, 콘스탄티노스 6세가 공물을 버티지 않자, 카르담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서신을 보내 "공물을 바치지 않으면 트라키아 전역을 파괴하고 금문으로 가겠다."라고 위협했다. 이에 콘스탄티노스 6세는 "당신에게 어울리는 공물을 보내겠다"라며 금 대신 똥물을 보냈다. 그 후 불가리아로 출정했지만, 아드리아노폴리스 북쪽 숲에 불가리아군과 대면하자 주둔지를 세워둔 뒤 꼼짝도 하지 않았다. 참회자 테오파네스에 따르면, 카르담이 17일 동안 어서 회전을 벌이자고 촉구했지만, 황제는 주둔지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동안 양측은 평화 협상을 이어갔고, 792년의 조약을 갱신하기로 합의했다.
불가리아에 대한 거듭된 원정 실패는 콘스탄티노스 6세의 위상을 실추시켰고, 결국 797년 어머니 이리니가 정변을 일으켜 아들을 붙잡아 실명형에 처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이리하여 동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노스 5세의 원정을 통해 획득했던 발칸 반도 패권을 잃어버렸다.
불가리아는 카르담의 뒤를 이어 칸위에 오른 크룸의 치하 아래 계속 강성해졌다. 크룸은 803년부터 805년까지 2년간 카롤루스 대제와의 전쟁에서 큰 타격을 입은 아바르 칸국을 상대로 공세를 개시해, 프랑크 왕국이 아바르 칸국의 서쪽 영역을 장악하는 동안 동쪽 영역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프랑크 왕국과 불가리아는 다뉴브 중류를 따라 새 경계선을 정했다. 이렇듯 날로 강성해지는 불가리아가 조만간 제국을 침략할 것을 우려한 니키포로스 1세가 불가리아를 선제 공격하면서, 장장 9년간 이어진 전쟁의 막이 올랐다.
3. 전개
3.1. 니키포로스 1세와 크룸의 전쟁
807년, 니키포로스 1세는 불가리아를 공격하기 위해 군대를 소집하여 아드리아노폴리스로 진군했다. 그러나 도중에 내부에서 반란이 터지는 바람에 원정을 중단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와야 했다. 크룸은 로마군이 국경 근처까지 왔다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접하자, 동로마 제국을 응징하기로 마음먹었다. 808년, 그는 다뉴브 강의 지류인 싀트루마 강 계곡에서 동로마군을 습격해 큰 타격을 입히고 막대한 양의 금을 압수한 뒤 병사들에게 골고루 분배했다. 이후 809년 동로마 제국의 요세인 세르디카(현재 소피아)를 포위 공격한 끝에, 수비대에게 항복하면 살려주겠다는 약속을 하여 항복시킨 뒤 도시에 입성하자마자 수비대 전체를 몰살했다.
세르디카 함락에 진노한 니키로포스 1세는 군대를 끌어모아 응징에 나섰다. 니키포로스 1세가 수도에 보낸 서신에 따르면, 황제의 군대는 불가리아 국경을 통과해 플리스카에 입성한 뒤 철저히 파괴했다.[1] 황제는 돌아오는 길에 세르디카에서 요새 재건 작업을 실시한 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귀환했다. 811년, 아나톨리아의 테마 부대들과 타그마 부대들을 총동원해 대규모 병력을 모집한 니키포로스 1세는 이번 기회에 불가리아를 파괴하고자 대대적인 공세를 감행했다. 그해 5월, 아들 스타브라키오스와 함께 불가리아 영내로 진입한 니키포로스 1세는 6월 말에 마르셀라를 공략한 뒤 15일 이상 주둔했다.
크룸은 이번에는 이기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사절을 보내 평화 협정을 맺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니키포로스 1세는 불가리아를 멸망시킬 작정으로 온 터라 이를 거부하고 계속 진군하면서 잔학행위를 벌였다. 참회자 테오파네스에 따르면, 동로마군은 진군로 주변에 살던 민간인들을 모조리 죽였는데, 특히 여성과 유아들을 반드시 쳐 죽여서 씨를 말려버리려 했다고 한다. 크룸은 5만 병력을 규합해 반격했으나 동로마군에게 패배하고 산악 지대로 피신했고, 플리스카에 남겨진 12,000명의 수비대는 7월 20일 최후의 한 사람까지 결사적으로 싸웠지만 끝내 전멸했다. 그리하여 플리스카에 입성한 동로마군은 건물 전체를 파괴하고 주민들을 학살한 뒤, 그곳에 남겨진 수많은 보물을 나눠가졌다. 이에 크룸은 두 번째 사절을 보내 평화 협약을 맺자고 호소했다.
"당신이 이겼소. 이제 빼앗은 모든 것을 가지고 평화롭게 떠나주길 바라오."
그러나 니키포로스 1세는 이 말을 무시하고 전쟁을 이어가기로 했다. 그는 플리스카 주변의 마을들을 모조리 불태우고 불가르인을 잡는 대로 죽이거나 노예로 삼았다. 그 후 불가르족이 충분히 약해졌다고 판단하고 개선식을 거행하고자 귀환길에 올랐다. 그는 처음에 세르디카로 향하려 했지만, 크룸이 통로를 막고 매복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하는 길목으로 이동했다. 811년 7월 25일, 동로마군은 바르비사 협곡 인근에서 여러 개의 분견대로 나뉜 채 숙영했다. 크룸은 아바르, 슬라브인들을 용병으로 끌어모으고 여자들까지 동원하여 모든 병력을 이끌고 이들을 추격하다가 적이 협곡에서 숙영하는 틈을 타 해자와 나무 벽으로 협곡 입구를 막고 협곡 주변에 매복했다.
다음날 새벽, 불가르군은 황제가 있는 중앙 부대를 급습했다. 동로마군은 급히 무기를 챙겨 맞서려 했지만 조국을 짓밟고 가족을 해친 것에 대한 원한이 사무친 불가르군의 압도적인 기세에 압도당했다. 수많은 로마군이 강 쪽으로 달아났다가 건널목을 찾지 못하고 익사했고, 다른 이들은 전방으로 달아나 해자와 나무 벽을 뚫으려 했지만 쉽사리 그러지 못하다가 몰살당했다. 니키포로스 1세는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일설에 따르면, 크룸은 그의 유해를 찾아내고 도끼로 목을 자르면서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평화(Pax)를 받기 싫다면 도끼(Axe)나 받아라!"
그 후 크룸은 니키포로스 1세의 두개골의 살과 가죽을 벗긴 뒤 은으로 다듬어서 술잔으로 개조한 뒤 슬라브 지도자들과 함께 잔치를 벌일 때 두개골에 술을 따르며 명예를 지키고 나라를 구원하게 해준 신에게 감사를 표했다고 한다. 동로마인들은 크룸의 이러한 행동에 두려움을 품고 아시리아의 왕 센나케립에 빗대어 "새로운 센나케립"이라고 불렀다.
3.2. 미하일 1세 랑가베스와 크룸의 전쟁
니키포로스 1세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을 때, 그의 아들 스타브라키오스는 바르비사 협곡에서 일부 패잔병과 함께 가까스로 빠져나왔지만 그 과정에서 척추가 골절되고 다리가 부러지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한 뒤 황제로 추대되었지만 누가 봐도 오래 살 수 없을 게 분명했다. 이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은 국가 비상 사태를 극복할 적임자로 니키포로스 1세의 사위인 미하일 1세 랑가베스를 추대하려 했다. 여기에 미하일의 아내이자 스타브라키오스의 누나 프로코피아도 스타브라키오스를 설득했다.
그러나 스타브라키오스는 주변의 충고를 듣지 않았다. 어떤 이유 때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미하일을 매우 싫어했고 오히려 자기 아내인 테오파노를 후계자로 지명하려 했다. 그러나 죽어가는 황제가 동의하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는 사이, 811년 10월 2일에 마하일 1세 랑가베스가 황제가 되었다. 이후 원로원 의원들은 스타브라키오스를 강제로 수도원에 보내 삭발식을 거행하게 했다. 그후 스타브라키오스는 석달 만인 812년 1월 11일에 사망했다.
812년, 크룸의 군대가 국경을 넘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하면서 그곳을 보호하는 여러 요새를 공략했다. 그렇지만 테오도시우스 성벽의 위용을 잘 알고 있던 그는 새 황제 미하일 1세에게 매년 자신들에게 공물을 바치고 포로를 돌려보낸다면 물러가겠다고 제안했다. 미하일 1세가 제안을 거부하자, 크룸은 812년 메셈브리아를 포위했다. 그는 일찍이 니키포로스 1세에게 고용되었다가 황제의 강압적인 태도에 불만을 품고 아드리아노폴리스에서 이탈하여 불가르군에 가담한 아랍 공성 기술자들을 동원해 각종 공성 무기를 제작했다. 결국 메셈브리아는 함락되었고, 도시에 있던 그리스의 불 무기들이 불가르군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813년 2월, 크룸은 다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했지만 동로마군에 의해 격퇴되었다. 미하일 1세는 이 성공에 고무되어 동로마 제국 전역에서 군대를 소집해 적과 일전을 벌이려 했다. 양측은 813년 6월 아드리아노폴리스 인근의 베르시니키아 인근에서 마주쳤다. 2주간 대치가 이어진 끝에 6월 22일 본격적인 교전이 벌어졌다. 한 때 동로마 좌익 부대가 상대를 밀어붙이면서 전세가 동로마 쪽으로 기울어지는 듯했다. 그런데 아르메니아 출신의 장성 레온 5세가 이끌던 우익 부대가 독단적으로 도주하면서 동로마 전열이 무너졌고, 불가르군이 이 틈을 노려 대대적으로 공격하는 바람에 참패당했다. 그 후 잔여 병력을 수습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온 뒤 아내 프로코피아의 반대를 무릅쓰고 레온 5세에게 황위를 넘겼다.
3.3. 레온 5세와 크룸의 전쟁
베르시니키아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크룸은 여세를 몰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 앞에 진을 치고 불가르인들이 섬기는 신들을 위한 의식을 거행하는 한편, 도랑을 파고 요새를 쌓아 오랫동안 주둔할 기색을 내비쳤다. 그러면서 레온 5세에게 약속한 대로 금, 비단, 그리고 미인을 달라고 요구했다. 이로 볼 때 레온 5세는 사전에 크룸과 밀약을 맺었던 것으로 보인다. 레온 5세는 크룸과 골든혼 해변가에서 협상하자고 제안했고, 크룸은 이에 따라 몇몇 수행원을 대동하여 협상장으로 갔다.그러나 크룸 일행이 혐상장에 도착하자, 사전에 매복해 있던 궁수들이 그들을 향해 화살을 일제히 쐈다. 이로 인해 수행원들이 대부분 죽었고, 크룸 역시 부상을 입었지만 타고 다니던 군마가 재빨리 달아나 준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 일로 극도로 분노한 크룸은 불가르 군대를 이끌고 셀렘브리아 등 콘스탄티노플 인근 지역을 유린하였으며 아드리아노플을 함락하여 주민 1만 명을 학살했다. 이에 레온도 보복으로 메셈브리아를 공격하여 그곳의 불가르 수비대를 학살했다.
크룸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켜 동로마 제국을 끝장내기로 작정하고, 슬라브인과 아바르인을 소집하고 강철로 제작된 충차 5,000대 등 공성병기들을 실은 함대를 준비했다. 이 소식을 접한 레온 5세는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보강하는 데 힘을 기울이는 한편 신성 로마 제국의 군주 루도비쿠스 1세에게 사절을 보내 불가리아의 후방을 공격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루도비쿠스 1세는 제국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을 수습하는 데 애를 먹고 있던 터라 동로마 제국을 돕지 못했다.
이제 동로마 제국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접어드는 듯했던 814년 4월 13일, 크룸이 급병에 걸려 사망했다. 레온 5세는 이 소식을 접하자 반격에 착수해 815년 말 또는 816년 초 제국 함대를 파견해 불가리아의 후방 지대인 네세바르 요새를 공략했다. 여기에 동로마 육군이 동부 트라키아의 여러 요새를 공략했다. 결국 불가리아의 새 칸 오무르타그는 평화 협약을 맺기로 결의했고, 816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라 양측의 국경지대, 특히 트라키아의 경계가 정해졌고, 동로마 제국 내 슬라브인들의 거취는 개개인의 의사에 맡기기로 했으며, 동로마 제국은 불가리아의 이교 신앙을 용인하고 불가리아는 자국 내 기독교인들을 박해하지 않기로 했다. 이리하여 9년간 이어진 전쟁은 막을 내렸다.
4. 이후
평화 조약이 체결된 후, 동로마 제국과 불가리아의 사이는 호전되었다. 823년 동로마 황제 미하일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한 슬라브인 토마스의 반란군을 물리쳐달라고 요청하자, 오무르타그는 헬라클케아 부근 케둑토스 평원에서 반란군을 습격해 막심한 타격을 입혔다. 토마스는 잔여 병력을 수습한 뒤 디아바시스로 후퇴하였지만, 결국 토벌대에게 패배하고 몰락했다.그러나 836년, 동로마 황제 테오필로스는 20년간 이어지던 평화 협약을 파기하고 불가리아로 침공하여 국경 일대를 황폐화시켰다. 불가리아군은 즉시 보복에 나서 필리포폴리스와 그 주변 일대를 공략했다. 837년 테살로니키 근처의 슬라브인들이 동로마 제국의 지배에 반기를 들자, 불가르 칸 프레시안 1세는 카반 이스불 장군에게 군대를 맡겨 이들을 지원하게 했다. 카반 이스불은 필리포폴리스 인근에서 동로마 제국군을 격파하고 필리포폴리스를 점령했다. 이리하여 불가리아는 콘스탄티노폴리스와 테살로니키 사이의 육로를 차단했고, 테살로니키 근처의 슬라브인들은 불가리아의 산하로 들어갔다.
842년 블라스티미르 대공을 위시로한 세르비아 부족들이 테오필로스 황제의 동의하에 자치국을 세우자, 이에 위협을 느낀 프레시안 1세는 세르비아를 전격 침공했다. 그러나 3년간의 전쟁에서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845년 별다른 영토 변경 없이 평화 협약을 맺기로 합의했다. 이후에도 동로마 제국과 불가리아간의 유혈충돌이 몇 차례 벌어지다가 863년 동로마 황제 미하일 3세의 강한 압박과 기근과 지진에 시달리는 국내 사정을 못이긴 보리스 1세가 정교회 개종을 결의하면서 양자는 전쟁을 멈췄다.
그러나 불가리아 내부에서는 정교회 개종에 대한 반감이 거셌다. 정교회로 개종하는 것은 형식상으로나마 불가리아의 칸에 대한 로마 황제의 우위를 인정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889년 보리스 1세가 퇴위한 후 칸위에 오른 장남 블라디미르가 반기독교 정책을 펴며 이교도 국가로 돌아가려 했다가 892년 보리스 1세의 쿠데타로 폐위되기도 했다. 그 후 보리스 1세에 의해 새 칸으로 지명된 시메온 1세는 정교회를 국교로 확립하면서도 동로마 황제를 제치고 자신이 정교회 최고 수장이 되기로 마음먹고, 이를 이루기 위해 동로마 제국을 굴복시키기 위한 전쟁을 벌였다.
[1]
다만 참회자 테오파네스는 플리스카 함락은 이뤄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