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불교조계종 | |
월명산 동국사 月明山 東國寺 | Dongguks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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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8c00><colcolor=#ffffff> 설립일 | 1909년 ( 1955년 이후 현재 명칭으로 변경) |
소속국가 | 대한민국 |
주지 스님 | 재안 |
위치 | |
전북특별자치도 군산시 동국사길 16 (금광동) | |
전화 | 063-462-53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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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8c00> 군산문화재야행에서 제작한 동국사 온라인 해설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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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국가등록문화재 제64호. 전북특별자치도 군산시 금광동에 위치한 사찰이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24교구 본사 선운사의 말사이다.'동국사(東國寺)'란 이름은 '해동(海東) 대한민국(大韓民國)'을 줄인 것으로, 일본의 사찰이 아니라 이제 한국의 사찰이란 의미라고 한다.[2]
2. 상세
1909년( 융희 3년) 우치다 붓칸(內田佛觀)이라는 일본 불교 조동종(曹洞宗)의 노승이 전북특별자치도 군산시에 금강선사라는 포교당을 차린 것이 동국사의 뿌리다. 우치다는 군산에 사는 일본인들의 도움을 받아 절을 빠르게 성장시켰는데, 일본인 부호들로부터 시주받은 거금과 땅을 바탕으로 1913년 군산시 금광동 현재의 동국사 자리에 금강사(錦江寺)라는 절을 지었다. 금강사는 일본과 자국민들의 무운(武運)과 번영을 빌었다. 금강사 납골당에는 일본인들의 유골과 전사한 일본군의 위패도 있었다.8.15 광복 이후로는 한국 불교의 절로 바뀌었다. 이름도 동국사로 바꾸고,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 금산사 대장전에 있던 조선 중기에 제작된 소조여래삼존상을 동국사 대웅전으로 옮겼다. 동국사 소조여래삼존상과 복장유물[3] 2011년 보물 제 1718호로 지정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식민지 조선에는 일본사찰 500여 곳이 있었다고 하는데, 동국사는 광복 이후로도 살아남은 몇 안 되는 건물이다.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일제강점기 사찰건물들 중에서 유일하게 사찰이라는 본래의 기능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건축 당시의 원형을 가장 잘 보존하여 가치가 있다.
동국사를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일본식 사찰'이라고 흔히들 말하지만, 이는 명백히 사실이 아니다. 링크. 다른 일제강점기 사찰들은 건물은 온전히 남았으되 도심사찰들이라 쓸모가 많아 더 이상은 절(불교)이 아니거나, 계속 사찰로서 기능하지만 건물 형태가 많이 바뀌거나 기존 건물들이 사라진 경우가 많다.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다른 일본식 사찰 건물로는 전라남도 목포시의 구 동본원사 목포별원과 경상북도 경주시의 구 서경사가 있다. 전자는 해방 후 개신교 예배당으로 사용되었다가 현재는 지자체의 문화센터가 되었다. 후자는 주인이 자주 바뀌면서 다양한 용도로 쓰였고, 현재는 정가 전수관으로 사용 중이다. 큰 훼손 없이 아직도 사찰로 기능하는 일본식 사찰로는 대구광역시 중구 삼덕동의 관음사가 있다. 경상남도 창원시의 '포교당'으로 잘 알려진 정법사의 경우, 구한말에 처음 지을 때부터 절 건축은 한국식 사찰로 지었는데, 바닥은 다다미가 깔려 있었다. 현재는 신식 콘크리트 건물로 개축해서 플로어 마룻바닥을 싹 깔았다.
이전에는 동국사 주변에 일옥(日屋)들이 있었다고 하지만, 1945년 8.15 광복과 1950년 6.25 전쟁 등을 겪으며 모두 없어졌다.
동국사 종각 옆에는 2012년 일본 조동종이 세운 참회의 비석과 2015년에 세운 평화의 소녀상이 있다. 동국사는 일본 불교와 한국 불교의 인연과 악연을 보여주는 희귀한 공간이다. 불행했던 역사의 증거지만, 최근에는 이색적인 근대의 모습을 즐기는 군산시 관광의 필수코스로 자리잡았다.
3. 역사
경술국치 1년 전인 융희 3년(1909), 우치다(內田佛觀)를 위시한 일본 조동종(曹洞宗) 승려들이 금강선사(錦江禪寺 긴코젠지)란 이름으로 군산에 포교소로 개창하면서 시작되었다. 현 동국사 부지를 기증받아 건물을 신축, 1913년에 완공하여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일제강점기 동안은 조동종 소속 사찰로서 기능했는데, 정식명칭은 '금강선사'였지만 흔히 '금강사(錦江寺, 긴코지)'라 불렀다. 군산시에 일본인들이 많이 모여 살았으므로, 이들 일본인 신자들을 위한 사찰로 기능하였다.
1대 주지 우치다(內田佛觀, 1832-1916)는 1836년 호키국(伯耆国, 오늘날
돗토리현)에서 태어났다. 출가 이전의 성이 우치다(內田),
법명이 불관(佛觀), 법호가 선응(善應)이다. 1845년(13세)에
천태종에 입문하였으나 1848년(16세)에 조동종으로 종파를 바꾸었다. 1860년(28세)엔
고메이 천황을 만나 교지를 받는 등 승승장구하였으며, 이후
돗토리현 등
주부(中部) 지방 사찰 4곳의 주지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1902년(70세)에 마지막으로
구마모토현의 사찰 주지가 되었고, 이후 어느 시점에서 직무를 내려놓고 은퇴하였다. 그런데 1909년, 만 77세의 노구를 이끌고 도항하여 군산에서 금강선사(錦江禪寺)란 이름으로 포교소를 개창하였다. 절 이름은 군산을 거쳐 굽이쳐 흐르는 금강에서 따왔다. 포교소를 연 지 1달 만에 당시 군산 지방의 일본인 부호 미야사키 케이타로(宮崎佳太郞)를 만나 현 동국사 부지 300평을 기증받았다. 그 부지에 사찰 건물 신축을 시작했다. 1910년(78세)에 한일합방이 되었다. 1913년(81세)에 현 동국사를 완공하고, 일본의 조동종 본산으로부터 정식 사찰로 인정받아 금강사(錦江寺)란 이름을 내걸었다. 1916년(84세)에 조선총독부로부터 사찰로 인가를 받고 며칠 지나지 않아 입적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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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8c00> 1920년 후반의 모습 |
1996년 식민잔재 청산을 이유로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한 김영삼 정부는 일본식 사찰 건물들이 아직 국내에 남아있음을 확인하고, 그 중 동국사를 철거할지 검토하였다. 그러나 이 절은 조계종의 사유재산이라서 철거보상을 해줘야 했는데 비용 3억 원 때문에 하지 못하였고, 그 이후로는 철거여론도 잠잠해졌다. 2003년에 등록문화재 제64호로 지정받았다.
4. 건축물
4.1.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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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8c00> 동국사 입구 |
석주에는 처음 금강사를 창건할 적에 시주했던 일본 연호와 일본인 시주자들의 이름도 새겼으나, 누군가가 施主(시주)란 글자만 남기고 연호와 일본인들의 이름을 다 깎아내었다. 한편 한국인 노 아무개의 이름도 한글과 한자로 석주에 있는데, 노 아무개는 시주자가 아니다. 1952년에 아버지가 병을 앓는 9살 난 아들이 쾌유하기를 바라며 석주에 아들의 이름을 새겼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정성이 무심하게도 아이는 결국 요절했다.
4.2. 대웅전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 ||||
63호 | ← | 64호 | → | 65호 |
함평 구 학다리역 급수탑 | 군산 동국사 대웅전 | 제천 엽연초생산조합 구 사옥 |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제64호 | ||
군산 동국사 대웅전 群山 東國寺 大雄殿 Daeungjeon Hall of Dongguksa Temple, Guns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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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전북특별자치도
군산시 동국사길 16 (금광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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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등록문화재 / 기타 / 종교시설 | |
수량 / 면적 | 1동, 연면적 479.3㎡ | |
지정연도 | 2003년 7월 15일 | |
시대 | 1932년) | |
소유자 (소유단체) |
대한불교조계종 동국사 | |
관리자 (관리단체) |
대한불교조계종 동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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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8c00> 동국사 대웅전(위)과 내부(아래)[4] |
대웅전은 1932년에 다시 지어진 것이다. 정면 5칸 측면 5칸의 건물로, 정방형 단층팔자지붕 홑처마 형식의 에도시대(江戶時代) 양식이다. 외관이 화려하지는 않지만 색이 차분해서 정갈한 느낌을 준다. 지붕의 기울기인 물매(경사, slope)가 75도 급경사이기 때문에, 기와는 못질을 해서 고정한다.
건물 외벽에 미서기(미닫이)문이 많은데 습한 일본기후의 특성이 반영된 일본 건축기술로 건축되었기 때문이고, 용마루는 일직선으로 전통 한옥과는 구조나 외형에서 차이가 상당하다. 처마 밑만 보더라도 서까래는 그저 평행하고 한국 사찰 건물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공포(栱包)[5]가 매우 단순하여 밋밋한데, 에도시대 건물에서 서까래와 공포는 거의 장식이고 실제 구조와 분리되기 때문이다. 실제 구조는 법당 천장 위에 있기 때문에 볼 수 없다. 또한 한국의 사찰 건축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단청이 없다.
공간구조 역시 다르다. 한국 사찰과 달리 '법당'과 승려들이 생활하는 건물인 ' 요사채'가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다. 법당에 들어갈 때는 대웅전의 문이 아니라 회랑 쪽 문을 통해 들어간다. 법당 내부는 신발을 신고 들어올 수 있는 정면의 현관과 절을 할 수 있는 외진, 불상이 놓이는 내진으로 구분되는 일본식 절의 공간구조대로이다. 외진과 내진 사이에는 란마(欄間)라는 통풍창이 있는데, 그 아래에는 미닫이문틀이 남아 있으므로 원래는 미닫이를 설치했던 듯하다.
동국사 대웅전을 수리하면서 일본식 기와가 필요했기에 수입하려고 했다. 그러나 문화재청이 수입은 안 된다면서 제동을 걸었기 때문에, 결국 한국에서 일본식 기와를 만들 수 있는 곳을 수소문하여 전라남도 강진군에서 만들어 가져왔다. 비용은 수입의 2배가 들었다고 한다.
원래 지붕 용마루 양 끝에 있던 것으로 보이는 샤치호코상이, 지금은 동국사 현관 옆 밖에 놓여 있다. 몸은 물고기, 머리는 호랑이 모양의 상상의 동물로, 화재를 제압한다는 의미이다. 한국의 치미와 비슷하다.
4.3. 종각
법당 옆에는 1919년 일본에서 만든 종을 들여와 지었다는 종각이 하나 있는데, 종각을 둘러싼 석불들 역시 일본에서 가져온 것이다. 32면 관세음보살상과 12지 수본존 석불상이다. 맨 앞에는 아이를 안은 자안 관세음 수본존불상이 있으며, 그 뒤로 관세음보살이 중생교화를 위해 근기에 따라 나타난다는 32가지 모습을 형상화한 상들이 있다. 밀교에 기반한 풍습이라고 한다.종 역시 전형적인 일본식 종인데 교토에서 만들어 가져왔다. 종의 명문에 따르면 다이쇼 8년(1919)에 제작했는데, '금강선사'라고 씐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명문에는 "금강선사가 창건된 이래 천하가 태평하고 만민이 즐거우며 모든 시주자들의 복이 늘어나기를 조석으로 태만함 없이 기원한다"는 내용이 있다. 또한 " 일한병합 및 세계대전( 1차대전)의 평화를 구하고, 월명산 앞 금강사에 새로 범종을 만들어 거니, 나라와 백성들이 복을 받는다"고 씐 한시, 일본인 시주자들의 명단이 있다. 당시 군산 지역의 쟁쟁한 일본인 부호들 이름이 여럿 보인다.
5. 기타
}}} ||<colbgcolor=#ff8c00> 대웅전 뒤 대나무 숲과 요사채 안쪽의 정원 |
- 동국사 경내 북쪽에 해우소가 있고 해우소 바로 옆에 '100년 왕대숲 길' 푯말이 있는 통로가 있어 동국사 뒷편 대나무 언덕으로 올라갈 수 있다. 굵은 대나무들과 죽순들 사이로 난 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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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뒤에는 눈이 허연 개도 1마리 있는데, 이름은 '동백'이라고.
<colbgcolor=#ff8c00> 2020년 석가탄신일에 포착된 동백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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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사 진입로에는 돌을 쌓아서 만든 석축이 있는데 지그재그형으로 쌓였다. 이는 일본식으로 쌓은 석축인데,
군산 시내에서는 종종 볼 수 있다. 일본의 성에서도 발견되는 모습으로, 한국과 달리 일본의 건축물에는 이렇게
다이아몬드처럼 석축을 엇갈리게 쌓아 놓았다.
<colbgcolor=#ff8c00> 동국사 진입로 석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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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조동종은 1993년 과거 침략에 앞장섰던 조동종의 과오를 인정하는 '참사문(懺謝文)'을 발표했는데 "
일본 불교는 국가권력에 영합해
태평양전쟁에 가담하고 수많은 아시아인들에게 인권침해,
문화멸시, 일본문화 강요 등 커다란 상처를 남긴 점을 참회하면서 사죄드린다."라는 참사문 발췌 내용을 2012년 종각 옆에 세워진 비석에도 새겼다. 건립비용은 이치노헤 쇼코(一戶彰晃) 일본
아오모리현 운상사 주지가 주도하여 일본 불교계가 모금했다.
<colbgcolor=#ff8c00> 동국사 종각과 조동종의 참사문 비석 |
- 우리나라가 해방된 이후, 조계종에서 이 절을 인수할 때만 해도 군산에 살던 일본인들이 조상들의 뼈를 모신 납골당이 경내에 있었다. 그런데 이를 철거하면서 그곳에 있던 수많은 일본인들의 유골을 인근 강에다가 산골(散骨)해 버렸다.[6] 이후 1965년 한일기본조약으로 양국의 국교가 정상화되자, 과거에 군산에 살던 일본인들이 이 소식을 듣고 울면서 찾아와 절 마당의 흙을 유골가루 대신 퍼간 실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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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 바깥에서 안쪽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좌측 석주에 새겨진 명문에 있는 연호
쇼와(昭和)를 누군가 깎아낸 흔적이 역력하다.
<colbgcolor=#ff8c00> 석주 명문의 쇼와 연호를 누군가 깎아낸 흔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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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시 출신 시인
고은이
승려로 출가한 사찰로도 잘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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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본식 담을 두르고 있는 동국사의 정문까지 갔다. (…) 마당은 정결했다. 본당이 웅장했다. 서쪽으로 종각이 있고 거기에 큰 범종이 달려 있었다. (…) 정문 문짝에는 차문불문(此門不門)이라는 큰 글씨가 붙어 있었다. "이 문은 문이 아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드나들지어다."라는 뜻이었다.
시인 고은의 자전적 소설 《나, 고은》 中
6. 같이보기
[1]
위 사진은 2008년
대웅전 보수 이전에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현재와는 대웅전 문 형태가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2]
비슷한 사례로
동국대학교의 교명 역시 1946년에
양주동 박사의 의견에 따라 '우리나라'란 뜻에서, 한자까지 똑같은 '동국(東國)'이라고 정하였다.
[3]
불상의 뱃속 부분에 넣는
불경이나 발원문 등 유물들. 불상의 배 부분에 이런 물품들을 넣는 것을 불복장(佛腹藏)이라고 부른다.
[4]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5] 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기 위하여 기둥 위에 짜 맞추어 댄 나무 구조물 [6] 동국사에 위치한 안내판은 해당 유골들을 모두 바다에 뿌렸다고 설명한다.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5] 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기 위하여 기둥 위에 짜 맞추어 댄 나무 구조물 [6] 동국사에 위치한 안내판은 해당 유골들을 모두 바다에 뿌렸다고 설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