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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04 11:45:15

뉴욕 필하모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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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미 어워드#s-3.3.1|그래미 어워드 공로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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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353535> 1967년 게오르그 솔티, 존 컬쇼
1968년 듀크 엘링턴, 빌리 스트레이혼, 크시슈토프 펜데레츠키
1970년 로버트 무그
1971년 크리스 알버트슨, 존 하몬드, 레리 힐러, 폴 웨스턴
1972년 비틀즈
1977년 토머스 에디슨,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
1979년 고다드 리버슨, 프랭크 시나트라
1981년 카운트 베이시, 에런 코플런드
1983년 레스 폴
1984년 버르토크 벨러
1985년 엘드릿지 R. 존슨
1986년 조지 거슈윈, 아이라 거슈윈
1987년 해럴드 알렌, 에밀 벌리너, 제롬 컨, 조니 머서
1989년 월트 디즈니, 퀸시 존스, 콜 포터
1990년 딕 클라크
1991년 밀트 가블러, 베리 골디, 샘 필립스
1992년 토마스 A. 도시, 크리스틴 파논, 오스카 해머스타인 2세, 로렌즈 하트
1993년 아흐메트 에르테군, 네스시 에르테군, W. C. 핸디, 조지 T. 사이먼
1994년 노먼 그란츠
1995년 피에르 코세트
1996년 조지 마틴, 제리 웩슬러
1997년 허브 앨퍼트, 제리 모스, 버트 배커랙, 핼 데이비드, 알란 제이 러너, 프레드릭 뢰베, 제리 리버와 마이크 스톨러
1998년 홀렌드-호지어-홀렌드, 프란시스 W. 프레스톤, 리처드 로저스
1999년 갬블 & 허프
2000년 클라이브 데이비스, 필 스펙터
2001년 아리프 말딘, 필 라몬
2002년 톰 다우드, 앨런 프리드
2003년 알란 로막스, 뉴욕 필하모닉
2004년 게리 고핀 & 캐롤 킹, 오린 키프뉴스, 마리안 멕파랜드
2005년 호기 카마이클, 돈 코넬리우스, 알프레드 라이언, 빌리 테일러
2006년 크리스 블랙웰, 오웬 브래들리, 알 슈미트
2007년 에스텔 액스턴, 코시마 마타사, 스티븐 손드하임
2008년 클라렌스 애반트, 잭 홀츠만, 윌리 미첼
2009년 조지 아바키안, 엘리엇 카터, 알렌 투생
2010년 해롤드 브래들리, 플로렌스 그린버그, 월터 C. 밀러
2011년 알 벨, 윌마 코자트 파인, 브루스 룬드벌
2012년 데이브 바솔로뮤, 스티브 잡스, 루디 반 겔더
2013년 알란 버그만 & 마릴린 버그만, 레오나드 체스 & 필 체스, 알란 W. 리빙스턴
2014년 엔니오 모리코네, 릭 홀, 짐 마샬
2015년 베리 만 & 신시아 웨일, 리차드 페리, 조지 웨인
2016년 존 케이지, 프레드 포스터, 크리스 스트레비치
2017년 톰 벨, 모 오스틴, 랄프 피어
2018년 빌 그레이엄, 세이무어 스테인, 존 윌리엄스
2019년 루 애들러, 애쉬포드 & 심슨, 조니 멘델
2020년 프랭크 버클리 워커, 켄 에를리히, 필립 글래스
2021년 에드 처니, 베니 골슨, 베이비페이스
2023년 헨리 딜츠, 엘리스 마살리스, 짐 스튜어트
같이 보기: 평생 공로상 수상자 · 레전드상 수상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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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York Philharmon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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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초기의 역사2.2. 말러2.3. 스트란스키, 멩겔베르크, 토스카니니2.4. 바비롤리, 로진스키, 미트로풀로스 외2.5. 번스타인2.6. 불레즈2.7. 메타2.8. 마주어2.9. 마젤2.10. 길버트2.11. 판 즈베덴2.12. 두다멜
3. 역대 음악 감독4. 특징5. 음반/영상물

1. 개요

미국 뉴욕을 거점으로 하는 관현악단.

한 때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세계 3대 관현악단' 이라 언급되기도 했지만, 최근에는 이와 다른 평가가 지배적이다.[1] 지금은 '미국을 대표하는 유명 관현악단 중 하나' 정도이고, 미국 빅5에 포함되기에 부족함은 없는 수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빅 5[2]는 미국인들이 스스로 만들어내어 오랫동안 통용된 용어임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근래에 서부의 LA필,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등이 떠오르면서 미국 빅5라는 말은 과거만큼 많이 쓰이고 있지는 않는다. 미국 내에서 빅 5라고 불리는 오케스트라가 등장한 배경은 오케스트라에 대한 재정적 풍요가 확보되고 단원의 실력을 인정하면서부터이다. 하지만 미국의 경제적 상황이 도시에 따라 변화가 생기면서 그러한 수사는 현재 많이 쓰이고 있지 않다.

뉴욕 필의 특징적인 점은 일년 내내 모든 연주가 여전히 만원 관중을 모으는 명문 오케스트라라는 점이다. 미국에서는 뉴욕 필과 함께 시카고 심포니, 클리블랜드, 보스턴 심포니, 필라델피아, 샌프란스시코 심포니, LA 필 등이 오랜 동안 좋은 평가를 받아왔으나 어느 오케스트라가 좋고 나쁨은 평자들의 선호와 시기에 따라 변화된다. 뉴욕 필이 세계3대 오케스트라까지 불리게 된 배경은 20세기 미국이라는 초 강대국 제일 도시의 오케스트라라는 점과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오케스트라이며 단원들의 높은 연주 실력이라는 점 등인 듯하다.

다만 지휘자의 역량이 오케스트라의 평가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면에서 현 뉴욕 필은 예전과 같은 좋은 평을 받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현실과는 별개로 세계 금융중심지인 뉴욕의 갑부들로부터 많은 후원을 받고 있기 때문에 재정적으로는 풍족함을 유지하고 있으며, 음악감독과 단원의 연봉은 시카고 심포니와 함께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른다.

2. 역사

2.1. 초기의 역사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관현악단으로 여겨지는데, 서양 음악사에서도 보기 드물게 극장이나 귀족에 예속되지 않은 연주회 전문 독립 악단이었다. 이러한 점에서도 빈 필과 함께 음악사에서 중요한 의미로 기록되었다. 특히 클래식 음악의 본고장인 유럽도 아니고 아직 독립한지 오래되지 않아 '식민지 출신의 시골뜨기' 정도로 취급받던 미국에서 행해진 시도였기 때문에, 나름대로 음악적 자부심도 키워준 모양.

1842년에 유렐리 코렐리 힐이라는 바이올리니스트가 뉴욕 시를 거점으로 한 '필하모닉 협회' 를 결성했는데, 이것이 시초로 여겨지고 있다. 첫 공연은 같은 해 12월에 아폴로 룸즈라는 소규모 공연장에서 개최되었는데, 빈 필보다는 좀 늦은 셈이었다. 동시에 힐이 지휘자로 전직해 1847년까지 악단의 기초를 닦아놨고, 뒤이어 테오도어 아이스펠트, 칼 버그만, 레오폴트 댐로슈 등의 독일계 지휘자들이 자리를 이어받았다.

하지만 독립 악단의 특성상 열악한 재정 형편으로 인해 단원들의 봉급도 상당히 적었고, 그것을 충당하기 위해 너무도 여유가 없는 연주 일정에 시달린 나머지 퇴단하는 단원들도 속출했다. 이처럼 암담했던 상황에서 벗어난 것은 시어도어 토머스가 지휘자로 부임한 1877년에야 가서였는데,[3] 이 때부터 외부 기금을 적극적으로 끌어모으고 단원들의 처우를 개선하는 등의 시도가 행해졌다.

토머스의 후임이었던 안톤 자이들은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를 세계 초연하고, 바그너 브루크너[4]의 작품을 미국 초연하는 등 곡목을 당대 최신곡까지 확장시켰고, 이 때부터 미국을 대표하는 관현악단으로 평가받기 시작했다.

2.2. 말러

1909년에는 구스타프 말러가 뉴욕 필의 상임지휘자에 취임하였다. 빈 필과 빈 국립 오페라의 지휘자로 있던 말러를 뉴욕 필이 거액으로 스카웃해 온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지만, 실상은 당시에 말러가 처음 계약을 맺은 것은 뉴욕 필이 아닌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였다. 말러가 뉴욕으로 간것은 메트로폴리탄의 금전적인 대우가 좋아서라기보다, 빈에서 각종 언론 및 비평가들 등과의 갈등에 지쳐서 빈을 떠나고자 했던 말러의 욕구가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1907년부터 말러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지휘자로 뉴욕에 체류하자 인근에 있던 뉴욕 필이 말러에게 접근했던 것. 하지만 말러는 처음엔 미온적이었이었다. 말러가 맡기 전 뉴욕 필은 일종의 슬럼프 시기로 재정적으로나 음악적으로 훌륭하다고 할 수 없는 악단인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말러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관계도 삐거덕거리기 시작했고, 뉴욕 필 단원들이 의외로 말러에 잘 따르면서 말러는 결국 뉴욕 필의 상임지휘자까지 맡게 되었다.

당시 뉴욕 필은 상태가 그리 좋은 악단은 아니었다. 당시 말러의 편지를 보면 뉴욕 필의 단원은 50명 정도에 불과했고 재정적으로도 좋지는 않았다고 한다. 말러는 특유의 엄격한 지도력과 함께 단원 증원/재임용과 운영진 재조정 등 행정 개혁까지 단행하면서 체질 개선을 시도했다. 뉴욕 필은 초기에 말러의 이러한 개혁과 엄격한 연습에 생각보다는 잘 따라와 준 것으로 보인다. 유럽에 비해 일찍 산업화가 되면서 노조의 힘이 강했던 뉴욕에서는 오케스트라 리허설 시간에 지휘자가 정해진 연습시간을 1분이라도 넘기면 단원들이 그자리에서 악보를 덮고 일어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말러가 오고 나서는 연습시간을 30분 이상 초과해도 아무도 일어서는 사람이 없었다고. 어쨋거나 말러의 짧은 재임기간 동안 뉴욕 필은 단기간 안에 체질을 개선하고 객석 점유율을 높이는 등의 성과를 보였다.

2.3. 스트란스키, 멩겔베르크, 토스카니니

1911년 말러 사후 후임으로 베를린에서 활동하던 체코의 지휘자 요제프 스트란스키가 상임지휘자로 영입되었다. 하지만 39세의 젊은 지휘자로서 국제적인 커리어가 부족했던 스트란스키가 취임하자 뉴욕 평단은 전임자 구스타프 말러의 화려한 이력과 비교하며 뉴욕 필이 단지 싼 맛에 부려먹으러 스트란스키를 데려왔다고 혹평했다. 이후 스트란스키는 실제로 준수한 지휘자라는 것을 입증해 보였지만, 평단과 청중은 말러의 영감에 찬 지휘와 비교하며 여전히 그에게 만족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스트란스키는 1923년까지 장기간 자리를 지켰다.

그가 장기 집권한데는 사실 제1차 세계대전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1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음악의 본고장인 독일 출신의 거장 지휘자들을 초빙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던 것. 뉴욕 필과 스트란스키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 음악의 비중을 줄이고 대신 프랑스, 영국, 러시아 음악의 비중을 크게 늘리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는 음악계의 판도에도 영향을 미쳤다. 음악의 본고장인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1차 세계대전 패전 후 기록적인 전쟁 배상금을 갚느라 하이퍼 인플레이션을 겪으며 경제가 파탄이 난 사이, 미국은 전후 호황을 누리며 1920년대에 유럽과 격차를 벌이며 진정한 초강대국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뉴욕 필 역시 이러한 호황 덕분에 1910년대까지 빌빌거리던 재정난에서 벗어나 부자 악단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1921년에는 경쟁 악단인 뉴욕 내셔널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합병했다. 그리고 1922년에는 명문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 오케스트라를 이끌던 네덜란드의 거장 빌렘 멩겔베르크를 공동상임지휘자로 영입했다. 반 시즌 후에 스트란스키가 사임하면서 멩겔베르크의 단독 상임지휘자 체제가 구축되었다. 오늘날 스트란스키는 말러 이후 현재까지 뉴욕 필을 맡았던 여러 기라성 같은 지휘자들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존재감이 없지만, 그럼에도 스트란스키는 시어도어 토머스, 레너드 번스타인, 주빈 메타, 쿠르트 마주어 등과 함께 10년 이상 뉴욕 필에서 장기 집권한 지휘자 중 한 명이 되었다.

1920년대 뉴욕 필은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브루노 발터,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등 유럽의 거장들을 줄줄이 객원지휘자로 초빙하는 등 세계적으로 존재감을 뽐내게 되었다.

이것으로 성에 차지 않아 1928년에는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을 추가로 상임지휘자로 영입하여 공동 상임지휘자 체제를 구축했다. 또 같은 해에 경쟁악단인 뉴욕 심포니 협회를 인수합병했다. 이로서 뉴욕 시의 유일한 콘서트 전문 관현악단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었다. 경쟁 악단을 인수하면서 악단 명칭도 '뉴욕 필하모닉 교향악단(Philharmonic-Symphony Orchestra of New York)'으로 고쳤다.

그러나 1929년 하반기부터 세계 대공황 크리를 맞게 되었는데, 그 여파로 1930년 임기가 만료된 빌렘 멩겔베르크와 계약을 연장을 하지 않고, 토스카니니의 단독 상임지휘자 체제로 나가게 되었다. 이 시절 뉴욕 필은 토스카니니의 강력한 리더십으로 멩겔베르크 시절부터 이어오던 악단의 전성기의 정점을 맞게 되었다.

토스카니니는 창단 이래 처음으로 뉴욕 필을 유럽에 끌고 가 순회 공연을 펼치면서 '클래식의 종가'를 자처했던 유럽에 충공깽을 선사했다. 당시만 해도 미국 음악계는 유럽에 비하면 한수 아래로 취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뉴욕 필이 다녀간 후로는 이런 시각도 많이 바뀌게 되었다고.

2.4. 바비롤리, 로진스키, 미트로풀로스 외

1936년 토스카니니가 은퇴를 선언하며 사임하자[5], 운영진들은 나치와 갈등하며 베를린 필 상임지휘자직을 사임하고 반 칩거 상태에 있던 독일 본좌 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에게 재빨리 접촉을 시도했다. 하지만 푸르트벵글러는 과거 뉴욕 필을 객원지휘했을 때 미국 청중들에게 크게 실망했었기 때문에 뉴욕 필의 제안이 들어오자 이를 거절했다.

푸르트벵글러로부터 거절당하자 계약금의 절반 이하를 주고 영국 출신의 촉망받는 젊은 지휘자 존 바비롤리를 상임지휘자로 영입했다. 취임 당시 바비롤리는 30대 중반의 새파랗게 젊은 지휘자였다. 물론 바비롤리는 나중에 영국을 대표하는 대지휘자가 되었지만 그것은 훗날의 이야기이고 뉴욕 필에 취임했을 당시에는 워낙 엄청났던 전임자에 비해서는 너무나 일천한 커리어를 지닌 신예 지휘자에 불과했었다. 때문에 후원자들과 비평가들이 듣보잡으로 여겼고 이때문에 운영진들에게도 시달렸다. 바비롤리는 5년간 뉴욕 필을 이끈 후 1941년에 영국으로 돌아갔다. 뉴욕 생활을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가던 바비롤리가 홀가분한 마음을 표했을 정도. 운영진은 1939년 이후 뉴욕 필의 주요 객원지휘자로 활동하던 브루노 발터에게 상임지휘자직을 제의했지만, 캘리포니아 비버리 힐즈에 거주하던 발터는 자신이 뉴욕을 왕래하며 상임지휘자로서의 의무를 수행하기에는 고령이라는 이유로 이를 거절했다.

1943년 상임지휘자가 된 아르투르 로진스키는 멩겔베르크나 토스카니니 이상으로 악단을 갈궈대는 마왕 기질의 소유자였던 탓인지 1947년에 악단과 다투다가 불명예 퇴진하고 말았다. 하지만 오케스트라 조련사로 이름을 날렸던 로진스키의 시절은 뉴욕 필에게도 분명 도움이 되었던 시기로, 악단의 기량을 다시 끌어올리고 나아가 다음 세대 번스타인 시대의 전성기의 밑거름이 된 시기였다.

로진스키가 물러난 후 브루노 발터가 1949년까지 2년간 뉴욕 필을 이끌었는데, 정식으로 상임지휘자직을 맡지 않고 음악 고문이라는 포지션에 있었다. 1949년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 디미트리 미트로풀로스가 공동 상임지휘자가 되었다. 그러나 한 오케스트라에 오래 머물지 않았던 스토코프스키는 이듬해 뉴욕 필을 떠났고, 미트로풀로스가 1958년까지 상임지휘자로 악단을 이끌었다.

미트로풀로스는 외계인을 연상시키는 해괴한 외모로 흔히 저평가되는 지휘자지만, 그런 세간의 저평가와 낮은 인지도에도 불구하고 이론의 여지가 없는 출중한 지휘자였다. 토스카니니, 로진스키 등 뉴욕 필을 이끌었던 지휘자들의 노선의 연장 선상에 있는 지휘자로 빠른 템포를 기반으로 정확한 앙상블을 추구했다. 미트로풀로스가 뉴욕 필을 이끄는 9년간 뉴욕 필은 변함없이 정상급 기량을 유지했으며 국내외 순회 공연에서도 큰 호평을 받았다. 미트로풀로스 역시 뉴욕 필에서의 명성으로 빈 필과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주요 지휘자로 초청받는 등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미트로풀로스와 뉴욕 필은 우라니아 등에서 음반 녹음을 남기기도 했는데, 우라니아가 미국 이외에서는 듣보잡 음반사인데다가 음질도 그다지 좋지 않은 탓에 잊혀져가고 있지만 매니아들에게 매우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2.5. 번스타인

뉴욕 필이 토스카니니 시절에 이어 두번째이자 마지막 전성기를 맞이한 것은 레너드 번스타인이 재임하던 시기(1957~1969)다. 번스타인은 커티스 음악원 졸업 후 불안정한 백수생활을 하며 자살까지 생각하기도 하던 차에 로진스키에게 발탁되어 뉴욕 필의 부지휘자로 일하게 되었다. 그리고 몇개월 후에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브루노 발터의 대타로 극적으로 지휘자로 데뷔를 했다.

그러나 데뷔 이후에도 번스타인은 고정된 직장을 얻는데 실패했다. 미국에서 일자리가 여의치 않자 해외로 눈을 돌려 유럽에서 몇몇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기도 했는데, 클래식 불모지 미국에서 온 애송이 지휘자를 단원들이 무시하기도 했고 번스타인 본인도 젊은 시절의 괴팍한 성격으로 대응한 탓에 더 이상 객원지휘 초청을 받지 못하고 결국 미국으로 돌아왔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매카시즘의 영향으로 공산주의자로 지목되면서 몇년 동안 지휘활동을 사실상 접었다.

매카시즘 광풍이 수그러든 1950년대 중반, TV방송의 한 음악프로그램에 출현하게 되었는데 수려한 외모와 말빨, 호소력 있는 목소리와 고상한 동부 액센트를 갖춘 번스타인의 프로는 예상 외의 큰 호응을 얻었고 단숨에 전국에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이 방송에 출연한지 불과 2년이 채 지나지 않은 1957년, 실질적인 지휘 경력이 별로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번스타인은 미트풀로스와 함께 뉴욕 필의 공동 상임지휘자가 되었고, 이듬해에는 미트로풀로스가 물러나면서 단독 상임지휘자가 되었다.

번스타인이 이처럼 단시간에 뉴욕 필의 상임지휘자가 된 것은 자국 출신의 지휘자에 대한 미국인들의 갈망이 크게 작용했다. 당시 미국 음악계는 독일을 비롯한 유럽 이민자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심지어 이런 이민자 음악가들 간에 밥그릇 싸움이 벌어지곤 했는데 이런 밥그릇 싸움이 표면화된 대표적인 예가 1950년 푸르트벵글러의 시카고 심포니 상임지휘자 취임 논란이었다. 당시 푸르트벵글러의 취임을 반대하던 미국의 음악가들은 그가 나치에 부역했다는 이유로 반대했지만, 정작 유대인이었던 브루노 발터는 이것은 단지 미국 음악계에서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유대계 음악가들이 다른 세력을 포섭해서 독일계의 세력 확장을 저지하기 위한 밥그릇 싸움에 불과하다고 비판한 바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 이끌면서 세계 최강대국으로 자리매김하던 미국은 음악분야에서도 유럽에 대한 종속과 열등의식을 끊어버릴 필요가 있었는데, 그 적임자로 지목된 것이 번스타인이었다. 시어도어 토머스 이래 두 번째로 미국 본토 출신 지휘자로 뉴욕 필의 음악 감독이 된 레너드 번스타인은, 취임 직후 부터 전속사인 CBS(현재 소니 클래시컬)에 상당히 많은 녹음을 남기고 새로운 대중 매체였던 텔레비전의 파급 효과를 적극 활용해 '청소년 음악회' 라는 강의식 콘서트를 마련하는 등 미국의 클래식 향유층을 급속도로 증가시켰다. 이 때를 두 번째 전성기로 볼 수 있고, 대외적인 명칭도 '오케스트라' 를 뺀 현재의 축약형 명칭으로 확정되었다.[6]

번스타인이 뉴욕 필에 공헌한 점 중 하나는 세계 최초 말러 교향곡 전곡 녹음이었다.[7] 당시에는 생소한 레퍼토리였던 말러를 적극적으로 연주, 소개하여 미국에서 말러 붐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8].

다만 번스타인은 음악의 표현력을 극도로 중요시하는 지휘자로, 정확성을 추구하는 유형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뉴욕 필의 기량에는 긍정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평도 있다. 번스타인 퇴임 직후 1970년대에 뉴욕 필이 빠른 속도로 추락하게 된 원인이 바로 번스타인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지적도 있다. 번스타인 재임 시기 조지 셀이 이끄는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가 뉴욕에 연주여행을 왔을 때 뉴욕 비평가들은 충격을 받았다. 당시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도 전성기였는데 뉴욕 필하모닉의 기량에 비해 동일 레퍼토리에서도 더 좋은 합주력과 투명한 사운드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 시절 번스타인 밑에서 뉴욕 필 부지휘자를 했던 세이지 오자와도 만년에 무라카미 하루키와의 대담집에서[9] 애초부터 번스타인이 워낙 천재 스타일이라 오케스트라를 착실히 조련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어 소리가 날림이었고, 그 후임들 누가 와도 그 악단은 소리가 나아지질 않았다는 식으로 대놓고 디스하기도 했다. (죽은 상사 디스)[10]

2.6. 불레즈

번스타인이 1969년에 작곡 활동에 전념하고 싶다는 이유로 사임한 이후 뉴욕 필은 제대로 망 테크를 타기 시작했고 지금까지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번스타인의 사임 직후 조지 셀이 브루노 발터 시절처럼 음악 고문으로 잠시 공백을 메꾸다가 프랑스 출신 현대음악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당시에는 듣보잡 피에르 불레즈가 음악 감독 자리를 이어받았다.

야심가였던 불레즈는 현대음악 작곡가로서는 꽤 인지도가 있었지만 지휘자로서는 무명에 가까웠는데, 현대음악 작곡가답게 현대음악을 적극 소개하는데 앞장섰고 유명한 작품을 파격적인 해석으로 지휘해 자신의 입지를 높이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현대음악 위주의 레퍼토리는 관중들로부터 외면을 받았고 고전주의 음악의 파격적인 해석도 흥미는 끌었지만 음악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결국 뉴욕 필에 자금줄을 대고 있던 후원자들도 하나둘씩 등을 돌렸다. 또 번스타인 시절 대량으로 음반을 녹음하면서 단원들이 고정급 보다 많은 부가 수입을 올릴 수 있었는데, 불레즈 시절 녹음 스케줄이 대폭 줄면서 단원들의 지지도 받지 못했다.

불레즈는 인기가 많았던 전임자 번스타인을 의식해서 그가 뉴욕 필을 지휘하는 것을 막았고 이 때문에 번스타인과 감정이 상하기도 했다. 뉴욕 필의 계관지휘자였던 번스타인은 뉴욕 필 상임지휘자직을 사임한 후에도 계관지휘자로서 자주 뉴욕 필을 지휘할 생각이었고 단원들과 청중들도 그러길 원했지만, 불레즈의 철저한 방해로 뉴욕 필을 지휘하기가 어려워졌다. 번스타인은 매우 분노했지만 별다른 뾰족한 도리가 없었고 결국 유럽 진출을 모색하게 된다. 불레즈는 결국 1977년 강판되었다.

불레즈 시절의 수많은 현대음악 녹음과 공연은 당시 뉴욕의 음악팬들의 외면을 불러왔고, 금전적으로도 악단에게 마이너스가 되었지만, 다만 현대음악가들은 음악적으로는 훌륭했다고 자평을 하고 있다. 다만 그 현대음악을 실제로 듣는 사람이 소수의 현대음악가 및 평론가 말고 없어서 그렇지...

또 베토벤 교향곡 5번 1악장을 무려 9분이 넘는 파격적으로 느린 템포로 연주한 음반은 당시에 큰 이슈를 몰고 왔고 많은 사람들이 도대체 어떻게 연주했는지 궁금해서 음반을 사보게 만드는 등, 여러가지 파격적인 이슈로 당시 주류계에선 인기 없었지만 히피들에게 컬트적인 인기도 얻었다. 이런 이슈성 연주는 초기에 몇번하다가 그칠 것이라 보는 경우가 많았지만 예상과 달리 불레즈는 이런 이슈화에 재미가 들린 것인지 아니면 그냥 고집이 센 것인지 임기말까지도 특이한 해석으로 지휘하는 행보를 이어갔다. 하지만 초기와 달리 이런 감동도 없고 재미도 없는 연주에 청중들과 평단은 뉴욕 필을 외면하고 말았다. 그를 지지한다던 히피(?)들은 무척 소수였을 뿐만 아니라 애초에 연주회에 오질 않았다.

결과적으로 뉴욕 필과 불레즈의 동행은, 자기 포장 솜씨가 뛰어났던 불레즈의 지휘자로서의 몸값만 높여주고, 뉴욕 필의 명성은 돌이킬 수 없게 추락시킨 채 끝났다. 오히려 불레즈는 젊은 시절인 70년대에 뉴욕 필과 바이로이트 등 미국과 유럽 양단에서 받은 신랄한 비판을 토대로 이후 나이가 들면서 오히려 점차 보수적이고 안정된 해석을 보이며 지휘자로서의 평가도 달라지게 되었다.

2.7. 메타

불레즈 시절부터 그 동안의 명성이 무너지고 있다는 탄식이 여기저기서 들려왔지만, 인도 출신의 주빈 메타가 불레즈 후임으로 들어오면서 뉴욕 필의 침체가 고착화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메타는 뉴욕 필을 맡기 전에는 장래가 기대되는 차세대 유망주 지휘자들의 대표주자였고, 특히 미국 음악계에서 상대적으로 변방으로 취급받던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가 후임으로 올 만큼 수준을 높이면서 오케스트라 트레이너로써의 능력도 인정받았다.

메타가 뉴욕 필의 상임지휘자로 선임되자, 불레즈의 실험정신(?)과 기행에 기쳐가던 여론은 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는 메타의 취임에 호의적이었다. 메타는 과거 LA 필 시절 같이 작업했던 데카와 결별하고 CBS와 레코딩 계약을 맺으면서 말러의 교향곡 1번, 베르디의 레퀴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에밀 길렐스, 아이작 스턴 같은 일류 독주자들과 차이콥스키, 브람스 등의 협주곡 음반을 발매하며 순조롭게 출발했다. 그러나 점차 CBS가 재정난으로 뉴욕 필과의 브람스 교향곡 전집 싸이클을 일방적으로 취소해 버린 것을 기점으로 음반 발매가 정체되고 [11], 악단의 명성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당시 뉴욕의 음악 평론가들은 뉴욕 필 위기의 원인에 대해서 메타에게 집요한 혹평을 쏟아냈는데, 그후부터 지금까지 유수의 지휘자들이 뉴욕필을 승계했어도 앙상블이 늘 그 수준인걸 보면 사실 엉뚱한 분풀이였던 측면이 강하다. 유럽 본토 출신도 아니고, 레바인이나 슬레트킨같은 미국 출신도 아닌 유색인종 메타에게 뉴욕의 평론가들은 잔혹할 정도로 혹평을 쏟았는데, 메타와 뉴욕의 평론가들 사이가 얼마나 감정적으로 험악했냐면, 없는 사실까지 지어내 메타에 대해 이죽거리는 수준에 이르렀다. 예를 들어 모차르트의 비 플렛 장조, 그란 파르티타(Gran Partita)를 연주회 곡목으로 올리면서, 18세기에 유행한 바셋 혼(Basset horn) 주자를 비엔나에서 뉴욕으로 초빙까지 해서 연주했음에도, 막상 다음날 평론에서는 메타가 원전 연주 대세에 무식해서 뉴욕 필의 베이스 클라리넷 주자로 그 자리를 멋대로 대체했다는 평이 실리기도 했다. 사실상 연주회를 안보고 평을 썼거나, 바셋 혼을 구별할 실력도 없는 사람이 뉴욕의 신문 지면을 채우는 평론가였다는 이야기. 또 슈베르트 교향곡 4번 4악장의 맨 마지막 빈 마디에서, 지휘자는 장난스레 바톤을 휘두르고 단원 몇몇은 그 익살에 웃음으로 반응하는 광경을 보고, 메타가 음악이 끝난 줄도 몰랐고 단원들은 그걸 보고 대놓고 비웃었다는 악담이 실리기까지 했다 (하여간에 어디서나 기레기가 문제...)

워낙 뉴욕 한곳에만 머물지 못할 정도로 본인의 스케쥴이 바쁜 메타인데다가, 악단과의 관계도 악화되던 메타로서는, 90-91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재계약을 포기한다. 메타의 후임으로 클라우디오 아바도, 레너드 슬레트킨 등 여러 지휘자들이 물망에 올랐지만, 유럽 본류의 거장 아래에서 착실하게 악단을 재건해야 한다는 여론이 힘을 얻으면서 메타의 후임으로 동독 출신의 쿠르트 마주어가 초빙된다.

2.8. 마주어

뉴욕 필은 메타의 후임으로 런던 심포니와 빈 국립 오페라를 맡고 있던 클라오디오 아바도를 지목하여 협상을 진행했다. 그러나 거의 협상 성사단계까지 갔다가 아바도가 갑자기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로 지명되는 바람에 물 건너가 버리고 말았다. 결국 1991년 메타의 후임으로 동독 출신의 쿠르트 마주어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동독으로 대표하는 거장이었던 마주어의 취임으로 뉴욕필은 재도약을 기대했다. 마주어는 독일 정통 레퍼토리를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뉴욕 필을 기본부터 다시 다지는데 주력했다. 정통 독일계 주류 레퍼토리 위주로 운영되었고 마주어의 해석도 상당히 안정적이었기 때문에 뉴욕 현지 뿐만아니라 해외 음악계에서도 반응은 좋은 편이었고 뉴욕 필의 평가도 다소 반등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에 텔덱에서 녹음된 브루크너, 브람스 등의 교향곡 음반들을 보면, 마주어의 정돈된 지휘에 성실하게 호응해 보려는 뉴욕필의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이외에도 말러 교향곡 1, 9번, 드보르작, 프랑크, 리스트,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에프 등의 교향곡과 관현악곡, 그리고 브리튼의 전쟁레퀴엠 등 일련의 녹음 등을 발표하고, 퇴근시간 직장인들을 위한 1시간 짜리 음악회를 도입하는 등 나름 활발한 성과를 보였다.

그러나 마주어의 임기가 흘러가면서 뉴욕 필은 마주어 취임 초기의 기대만큼 향상된 모습을 보이지는 못했다. 초반의 정돈되는 듯 했던 앙상블은 후반기로 갈수록 뉴욕 필 특유의 거친 금속성 사운드가 되살아났고, 마주어도 단원들과의 관계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뉴욕 필에서 후원자들 접대 등 음악 외적인 부분에서 시달림 당하는 것을 싫어했던 마주어는 결국 뉴욕 필 연봉의 절반 밖에 되지 않던 런던 필로 떠나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마주어 자신은 후임 인선에 그리 탐탁지 않아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나보다 나이 차이도 얼마 안나는 로린 마젤이 후임이라니"라고 어이없어 했다는 후문도 있다 (믿거나 말거나.)

2.9. 마젤

2002년 마주어가 사임한 이후 로린 마젤이 자리를 이어받았다. 고령의 마젤은 장년기 시절에 비해 매우 보수적이고 안정적인 해석을 보였고 평단과 청중들의 반응도 엇갈렸다. 커리어 만년에 이른 고령의 마젤과 역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연봉을 받으며 복지부동하던 단원들 사이에서 종종 트러블이 발생하는 등 순탄치 않은 재임 기간을 보냈다.

전임 쿠르트 마주어 시절 텔덱에서 제법 여러 레코딩들을 출시했지만, 마주어와 뉴욕필의 파트너쉽은 마주어-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시절만큼 찰떡궁합은 아니었던지라 그리 판매고가 신통치는 않았고, 마젤 재임시기에 이르면 CD로 음반 출시를 중단하고, MP3 파일로 말러의 교향곡 전집 연주를 발표하는 당시로서는 새로운 실험을 시도해서 나름의 성과를 거뒀다. 재임 말기에 뉴욕 필하모닉을 이끌고 방북하여 평양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음악적인 면과 별도로, 로린 마젤 자체가 워낙 미국계 지휘자 중 가장 대표적인 거장이고, 2008년 세계금융공황 이전 뉴욕 월스트리트 금융가의 호황이 최고에 이른 때라, 뉴욕 필의 후원 및 재정적 수준은 그 어느때보다 풍족했다.

2.10. 길버트

불레즈 이후 '미국 5대 관현악단'에서도 탈락될 정도로 암담한 시기를 보내던 뉴욕 필은 2009년에 마젤이 사임하자, 빅 네임 지휘자가 뒤를 이을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산타페 오페라(Santa Fe Opera)의 음악감독이었던 당시 41세인 앨런 길버트를 혈연 및 지연으로 [12] 후임으로 임명함으로써 재기의 희망을 완전히 접은 듯 했다. 이와 함께 뉴욕 필하모닉 상임지휘자로는 최초로 뉴욕 출신 상임 지휘자가 되는 영예를 안았다.

뉴욕 필 선임 시점 무명에 가까운 인지도로 우려를 자아냈던 길버트는 '무난함'과 예상 밖의 '안정감'을 무기로 극도의 지휘자난을 겪고 있는 현 클래식 시장에서 자기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듯 하다. 최근에는 뉴욕 필의 상임지휘자라는 강력한 간판을 무기로 유럽 진출도 꽤하고 있는데, 베를린 필을 객원지휘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의외로 인지도가 별로 없는 오케스트라의 객원 지휘도 마다하지 않고 있다. 80년대 영국을 중심으로 음악계를 휩쓴 원전 연주 붐의 영향으로 최근 젊은 지휘자들은 가볍고 빠른 톤을 선호하거나 오히려 과거 독일 낭만주의 거장들을 흉내내 과도한 템포 루바토를 구하사는 경우가 있는데, 길버트의 지휘는 이에 비해 정공법적인 해석을 취하고 있다.

길버트에 대한 평은 아직도 오락가락하는 편이고 실제로도 레퍼토리에 따라 기복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뉴욕 필이 아닌 다른 오케스트라를 지휘했을 때 더 좋은 연주가 나오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뉴욕 현지에서는 예상 외로 앨런 길버트의 평가는 상당히 높은 편이고 현재 뉴욕 필의 연주력도 꽤 좋아졌다는 평도 있으나 해외 평론지의 오케스트라 순위에서 뉴욕 필의 순위는 여전히 좋지 못하다. 게다가 길버트 본인도 장기 집권을 원치 않기에 2017년 계약 종류 후 떠나겠다고 밝혔다.

2.11. 판 즈베덴

뉴욕타임즈를 비롯한 여러 언론에서는 뉴욕 필에서 2015년부터 상주작곡가로 있는 에사-페카 살로넨이 길버트의 후임으로 오길 바랬지만, 그는 작곡에 더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이유로 고사하였다.[13] 결국 피츠버그 심포니의 만프레드 호넥과 시애틀 심포니의 루도비치 머롯 등을 제치고 댈러스 심포니와 홍콩 필하모닉 음악감독을 맡고 있는 네덜란드 출신 얍 판 즈베덴을 차기 뉴욕 필 음악감독으로 선임하였다. 2017/18년도 1년 간 지명자 신분 및 향후 5년 간의 계약 기간 동안, 상주 공연장인 데이비드 게펜홀이 2년간 리노베이션 공사에 들어가게 된다.하지만 결국 2017년 10월 대규모 리노베이션은 취소로

2.12. 두다멜

3. 역대 음악 감독

음악 고문 직책으로 활동한 지휘자는 기울임체로 표기했다.

4. 특징

항목 첫머리와 역사 란에 쓴 대로 20세기 초중반 까지는 세계구 급으로 쩔어주게 유명한 악단이었지만, 지금은 많이 처진 상태다. 물론 몇몇 자뻑 미국 애호가들은 아직도 건재하다고 하지만,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비롯한 구 빅5나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등에 비하면 개말년 모드에서 헤어나질 못한다고 보는 것이 대체적인 평.

그래도 쇼미더머니 파워가 먹어주는 나라의 악단 특성상, 재정적 측면에서는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미국에서, 아니 세계에서 가장 풍족한 오케스트라다. 세계 금융 중심지 월스트리트 부호들의 후원금이 재정에 큰 보탬이 되고 있다. 단원 연봉도 세계 최고 수준으로 알려졌다. 단원들 개개인의 기량도 상당히 뛰어난 편인데, 왜 합주력은 제자리 걸음인지(...). 특히 나이가 먹을수록 원숙해지기 보다는 밋밋해진다고 까이는 메타와 마젤이 망쳐놨다고 까는 사람들이 많다. 지휘자의 말년 모드가 관현악단에 전이됐다는 주장.

이빨 빠진 호랑이 취급을 받기는 해도, 기본적으로는 재기의 여지가 충분히 남아 있고 길버트라는 젊은 지휘자가 급히 수혈됐으니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도 지켜볼 가치가 있다. 미국에서 최고로 오래된 악단 답게 그 상징성을 부각시켜 해외 공연도 많이 진행하고 있고, 한국을 가장 많이 방문한 미국 관현악단으로도 기록되고 있다.

그리고 2008년에는 북한 평양에 있는 동평양대극장에서 공연하는 진기록도 남겼는데, 북한이 그토록 까잡수고 싶어하는 적성국 관현악단의 첫 방북이라 전세계에 생중계된 것은 물론이고 DVD/ BD까지 발매되었다. 물론 역사적 상징성이 대단히 큰 이벤트였지만, 일각에서는 한국의 어느 계층에서 흔히 쓰는 '대북 퍼주기', '테러지원국에 굽실굽실' 드립 등의 비판도 제기되었다. 그리고 공연 자체도 곳곳에서 삑싸리와 뒤엉킨 합주력을 보여주는 등 '아직 멀었군' 이라는 한숨을 자아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참고

악단 상주 공연장은 1960년대 이래 미국 최대의 복합 공연장 시설인 링컨 센터의 콘서트 전용 공연장인 데이비드 게펜 홀(구. 에이버리 피셔 홀)[15]이다. 이전에는 카네기 홀을 상주 공연장으로 사용했고 그밖에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 브루클린 음악 아카데미 강당 등도 상주 공연장으로 썼다. 카네기홀의 경우 데이비드 게펜 홀의 음향이 막장이라고 한창 까일 때 상주 공연장 자격을 복권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지금은 쏙 들어간 상태. 참고로 데이비드 게펜 홀은 2010년에 또 한 차례 더 리모델링 공사에 들어갔다. 그러길래 지을 때 신경 좀 쓰지 데이비드 게펜 홀의 음향이 이렇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는데, 처음 지을 당시 음향설계사가 설계한 형상은 지금보다 객석이 더 적고 무대가 작은 형태였다. 그러나 설계안을 본 뉴욕의 평론가들이 객석이 너무 적고 규모가 작다며 클레임을 걸었고(...) 결국 원래의 설계에서 객석을 늘리고 홀을 넓히는 개조를 단행했다. 음향설계사는 디자인을 바꾸면 음향이 어떻게 변할지 예측할 수 없다며 극구 반대했지만 결국 건축은 바뀐대로 진행되었고 그 결과는 사막의 울림을 가진 건조한 음향의 콘서트 홀로 돌아왔다. 결과는 뉴욕 평론가들의 자업자득(...)

5. 음반/영상물

역사가 상당히 오래된 악단 답게 꽤 많은 편이다. 첫 녹음은 1917년에 음악 감독이었던 스트란스키의 지휘로 취입했고, 1920년대 중반 전기 녹음 방식이 도입되면서 멩엘베르흐와 토스카니니가 빅터(이후의 RCA)에 본격적인 음반 취입을 시작했다. 바비롤리는 컬럼비아(이후 CBS, 현 소니 클래시컬)에서 녹음 활동을 했고, 발터도 같은 음반사에서 취입했다.

하지만 가장 많고 또 중요한 음반들은 번스타인 재임기에 CBS를 통해 우수수 쏟아져 나왔는데, 라이벌이었던 카라얀 지휘의 베를린 필에 버금가는 광범위한 곡목을 자랑한다. 특히 말러 교향곡 전집은 세계 최초로 시도된 것으로 유명하고, 이후 전세계로 퍼져나가고 있는 말러 붐에 크나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

번스타인 자신이 작곡가였던 만큼 미국 작곡가들의 작품도 많이 녹음됐는데, 자작곡 외에도 코플랜드 아이브스, 거슈인, 바버 등의 작품들이 적극적으로 음반화 되었다. 영상물도 번스타인 지휘의 것이 많은데, 특히 청소년 음악회 시리즈의 경우 텔레비전으로 중계된 만큼 전부 녹화되어 비디오 테이프- LD-DVD 순으로 계속 제작되고 있다.[16]

번스타인 이후에는 악단 수장들이었던 불레즈, 메타, 마주어, 마젤 등이 계속 음반 작업을 이어받았다. 불레즈는 논쟁이 극과 극으로 갈리는 음반으로 지금도 유명한데, 베토벤의 지독히도 유명한 교향곡 5번을 새롭게 비판적으로 편집한 악보로 연주한 것은 당시 기준으로 꽤 충격적이었다고 한다. 쇤베르크, 베베른, 베르크 등 '신 빈 악파' 의 관현악곡 시리즈를 비롯한 현대음악 레코드들도 나름대로 명반으로 손꼽힌다.

불레즈 이후에 만들어진 음반들은 그다지 높은 평가를 받지는 못하고 있는데, 다만 번스타인이 말년에 객원 지휘자로 복귀해 차이콥스키의 후기 교향곡과 미국 관현악 작품들을 지휘해 도이체 그라모폰에 취입한 음반들은 나름대로 괜찮다는 평을 받는다. 비록 극단적으로 느려진 템포 때문에 종종 까이기는 하지만.

그리고 2000년대 초반에 마젤이 취입한 존 애덤스의 'On the Transmigration of Souls' 라는 작품이 든 음반은 그래미상을 수상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17] 200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는 매출이 하락세를 보이고 있는 음반 시장보다 더 직접적으로 인터넷 세대들을 겨냥할 수 있는 MP3 다운로드나 실시간 스트리밍 서비스로 판로를 넓히고 있다.[18]


[1] 지휘자의 특성, 연주되는 음악과 재정적 여건 등에 따라 오케스트라 악단의 부침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런 수식어를 붙이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2] 뉴욕 필하모닉, 클리브랜드 오케스트라, 보스턴 심포니,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시카고 심포니 등 5개 악단을 지칭한다. [3] 참고로 창단 이후 최초의 미국 본토 출신 음악 감독이었다. [4] 안톤 자이들이 브루크너 교향곡 4번을 미국 초연을 위해 브루크너가 자이들에게 악보를 보낼 때 미세한 개정을 가했고 그것이 오늘날 이 곡의 하스판과 노바크판의 차이점이 되었다. [5] 물론 알려진대로 토스카니니는 뉴욕 필을 사임하고 은퇴한지 불과 몇개월 만에 NBC 방송국의 간절한 요청을 받아들여 NBC 교향악단의 지휘자로 금방 현역 복귀하였다. [6] 다만 공식 명칭은 1920년대의 타 악단 인수 때와 비슷하게 '뉴욕 필하모닉 교향악 협회' 라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부르는 사람은 악단 내에서도 거의 없다. [7] SONY에서 발간된 음반. 다만 이 중 8번 "천인"은 뉴욕 필하모닉과 남긴 1962년 음반은 1부만 담겨 있고, 8번 전체가 담긴 음반은 1966년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것이다. 전집에는 이 두 연주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 [8] 물론 번스타인 이전에도 다른 교향악단에 비해 뉴욕 필은 말러를 자주 연주하는 편이었고, 특히 번스타인의 전임자인 미트로풀로스도 말러 교향곡 6번을 미국 초연하는 등 말러의 보급에 기여했다. [9] <오자와 세이지씨와 음악을 이야기하다>, 권영주 역, 도서출판 비채, 2014 [10] 앙상블와 음의 조탁에 일가견이 있는 세이지 오자와이기에 이런 비판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그래서인지 오자와는 자신의 스승 중에서 카라얀을 매우 높이 평가하고 말년까지 사적으로도 깊은 관계를 이어갔지만, 번스타인에 대해서는 의외로 서먹서먹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11] CBS의 후신인 소니-BMG에서는 2016년 메타의 80세 생일 즈음에, 일방적으로 취소했던 뉴욕 필과의 브람스 작품 전집을 오리지낼 재킷 CD로 재발매해서, 일종의 미안한 마음(?)을 표현한다. [12] 이 사람의 모친이 선임 당시까지만 해도 뉴욕 필하모닉 현역이었던 단원이다. [13] 하지만 살로넨은 2020년 마이클 틸슨 토마스의 후임으로 샌프란시스코 교향악단 음악감독으로 취임한다. [14] 이외에 위키피디아 영어판에는 6명의 지휘자가 더 기입되어 있는데, 악단 태동기였고 지휘자 선정 문제가 복잡했던 만큼 창립자이자 중심적 역할을 한 힐만 적었다. [15] 원래 링컨 센터 필하모닉 홀이었으나 1972년 부호 에이버리 피셔의 기부금을 받아 홀 이름이 개칭되었다. 최근에 부호 데이비드 게펜에게 피셔와 같은 액수의 기부금을 받아 다시 홀 이름이 바뀌었다. [16] 한국에서는 EBS가 방영해 널리 알려졌다. 물론 DVD로도 발매. [17] 9.11 테러 희생자를 위한 추모곡이었다. 다만 그래미상이라는 것 자체가 음악성이나 예술성 보다는 상업성과 보편성을 중시하는 상이라, 애국주의가 지나치게 강했던 당시의 상황이 반영되었다고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18] 다만 존 윌리엄스 요요마의 협연 음반을 소니 클래시컬 레이블로 출반해 음반을 오랜만에 발매했다. 관련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