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라 켄지로의 역임 직책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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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 서울 올림픽 {{{#8c8c8c 은메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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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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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1991년 센트럴리그 최다 도루 | ||||||
1989년 쇼다 코조 ( 히로시마 도요 카프) 34도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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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라 켄지로 ( 히로시마 도요 카프) 오가타 코이치[A] ( 요미우리 자이언츠) 33도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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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라 켄지로 ( 히로시마 도요 카프) 31도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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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이이다 테츠야 ( 야쿠르트 스왈로즈) 33도루 |
1994년 센트럴리그 최다 도루 | ||||
1993년 이시이 타쿠로 (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오가타 코이치[A] ( 요미우리 자이언츠) 24도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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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라 켄지로 ( 히로시마 도요 카프) 37도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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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오가타 코이치 ( 히로시마 도요 카프) 47도루 |
1994-1995년 센트럴리그 최다 안타 | ||||
타이틀 제정 | → |
노무라 켄지로 ( 히로시마 도요 카프) 169안타(1994년) 173안타(199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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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알론조 파웰 ( 주니치 드래곤즈) 176안타 |
1991년 센트럴리그 유격수 부문 베스트나인 | ||||
이케야마 타카히로 ( 야쿠르트 스왈로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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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라 켄지로 ( 히로시마 도요 카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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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케야마 타카히로 ( 야쿠르트 스왈로즈) |
1995-1996년 센트럴리그 유격수 부문 베스트나인 | ||||
1994 카와이 마사히로 ( 요미우리 자이언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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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라 켄지로 ( 히로시마 도요 카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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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 이시이 타쿠로 (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
1995년 센트럴리그 유격수 골든글러브 | ||||
카와이 마사히로 ( 요미우리 자이언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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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라 켄지로 ( 히로시마 카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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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와이 마사히로 ( 요미우리 자이언츠) |
{{{#ffffff [[히로시마 도요 카프|히로시마 도요 카프]] 등번호 7번}}} | ||||
오가와 타츠키 (1986-1988) |
→ |
노무라 켄지로 (1989-20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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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바야시 쇼타 (2013~) |
{{{#ffffff [[히로시마 도요 카프|히로시마 도요 카프]] 등번호 77번}}} | ||||
코 신지 (1999-20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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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라 켄지로 (2010-2014) |
→ | 결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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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라 켄지로 野村謙二郎 | Kenjiro Nomur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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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월일 | 1966년 9월 19일 ([age(1966-09-19)]세)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출신지 | 오이타현 사이키시 |
포지션 | 유격수 |
투타 | 우투좌타 |
학력 | 오이타 현립 사이키카쿠죠 고등학교 - 코마자와 대학 |
프로입단 | 1988년 드래프트 1위 |
소속팀 | 히로시마 도요 카프 (1989-2005) |
지도자 | 히로시마 도요 카프 감독 (2010-2014) |
응원가 | 히로시마 시절[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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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1990년대 카프의 중심 타자로 이름을 날린 스타 플레이어였다. 별명은 노무켄[4], 붉은 헬멧의 악마 등[5]. 모자라는 자금력으로 인한 빈약한 선수층을 빡센 훈련으로 메우면서 버텨내던 1970년대 후반 ~ 1990년대 초반 카프 전성기의 유산이자 마지막 상징같은 존재.[6] 감독으로써도 카프의 15년 연속 B클래스 행진을 중단시키고, 2년 연속 클라이맥스 시리즈에 진출시키며 리빌딩 감독으로써 나름대로의 수완을 보여주었다.
2. 아마추어 시절
정육점을 경영하던 아버지는 고교야구 선수였고, 어머니는 장거리 육상선수 출신인 체육인 집안의 2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지역 리틀야구 팀에 입단하여 야구에 발을 들였고, 학창시절 준족의 유격수로 주목받았다.자기 아버지의 모교인 사이키카쿠죠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빠른 발을 살리고자 우투좌타로 전향하였다.그 후 고마자와 대학 시절 1988년 서울 올림픽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어 유격수, 1번 타자를 맡아 (시범종목이긴 했지만) 일본의 야구 은메달에 일조하기도 하였다. 이 때 일본 대표팀 동료로는 사회인 야구 선발 멤버이자 훗날 일본프로야구에서 맹활약을 펼치며 함께 명구회에 가입한 노모 히데오와 후루타 아츠야, 명구회에는 가입하지 못했지만 프로에서 활약한 선수로 하츠시바 키요시, 이시이 다케히로[7], 시오자키 테츠야, 와타나베 토미오, 오가와 히로후미 등이 있었다. 이 중 후루타와 하츠시바하고는 1999년 서울에서 개최된 시드니올림픽 아시아예선에서 다시 한번 대표팀생활을 함께 한다. 올림픽티켓 획득은 덤.[8] 그렇지만 이듬해 열린 올림픽 본선에는 3명 다 참가하지 못한다.
3. 프로 시절
1988년 드래프트 회의 때 히로시마 카프의 1차 지명을 받아 프로에 발을 들였다. 당시 카프에는 타카하시 요시히코[9]가 주전 유격수로 버티고 있었고 노무라는 데뷔 첫해인 1989년 주로 대주자나 내, 외야 대수비로 활약하며 88경기 출장에 타율 0.258, 21도루의 기록을 남겼다. 이 시절에는 스위치 히터에도 도전했지만, 결국 우투좌타로 돌아가게 된다.이듬해인 1990년 시즌부터 노무라는 노쇠화된 타카하시를 밀어내고[10] 주전 유격수로 뿌리를 내렸고 33도루로 도루왕 타이틀을 획득했으며[11], 1991년 시즌에도 31도루를 기록하여 2년 연속 도루왕을 거머쥐는 한편 170안타로 리그 최다안타도 기록했다.(다만 타이틀 시상은 1994년부터) 이후 주로 히로시마의 1번, 3번 타순을 오가며 빠른 발과 정확한 타격으로 그라운드를 휘저었다. 1991년은 2016년 이전까지 카프의 마지막 센트럴리그 우승이자 일본시리즈 진출의 해였고 노무라는 그 해 카프의 선봉장이었다. 같은 해 첫 한일 슈퍼게임에도 출전하여 정교한 타격과 주루 센스를 앞세워 한국 올스타팀에게 가장 위협적인 선수로 평가받았다.[12][13]
1995년에는 타율 0.315, 32홈런, 30도루로 30-30 클럽에 가입하며 일본프로야구 사상 6번째이자 좌타자 최초의 트리플 쓰리(3할-30홈런-30도루)[14][15]를 기록했다, 같은 해에 NPB 역대 최단기록 5위인 857경기 만에 1천안타를 달성했다. 그리고 통산 1천 5백안타 기록을 1999년 1289경기 만에 작성하며 역대 최단기록 4위에 이름을 올렸다.
2000년 이후 부상과 슬럼프가 겹치며 3루수, 1루수를 오갔고 기량이 쇠한 선수 말년엔 주로 대타나 대수비로 나서는 등 부침이 있었다, 그래도 2005년 6월 23일 히로시마 시민구장에서 열린 야쿠르트 스왈로즈와의 홈 경기에서 NPB 사상 33번째로 통산 2천안타라는 대 기록을 세우며 명구회에 가입한다. 그리고 노무라는 그 해를 끝으로 유니폼을 벗고 현역에서 물러났다.
프로 17년 통산 1927경기 출장, 2020안타, 타율 0.285, 169홈런, 765타점, 250도루의 기록을 남겼으며, 최다 도루 타이틀 3회를 획득했고 최다안타 3회를 기록하였다.
4. 은퇴 이후
그라운드를 떠난 이듬해인 2006년 부터 2009년 까지 노무라는 히로시마 TV, 닛폰 테레비, 스포츠 닛폰의 해설가와 평론가로 활동하면서, 2007년 친정팀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춘계 캠프 때 인스트럭터로 일한 바 있다.2010년 시즌부터 친정팀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하지만 정식 코치 경력도 없이 프랜차이즈 스타랍시고 곧바로 감독직에 앉힌 것에 대해 회의적으로 보는 평가가 대다수였으며, 실제 감독 부임 후 성적은 5위-5위-4위로 그리 신통치는 않다(...). 감독 첫 해에는 지명타자제도가 있는 퍼시픽리그 오릭스 버팔로즈와의 교류전 경기에서 투수인 이마무라 타케루를 지명타자로 올리는 실수를 저질러 야구 룰도 까먹은 돌대가리냐고 엄청 까인 적도 있다(...)[16].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3년 시즌에도 히로시마의 지휘봉은 계속 잡게 되었지만, 승수-패수가 -10 이상 임에도 3년 연속 히로시마의 감독으로 남아 있는 것은 노무라가 시라이시 카츠미 이후 두번째라고 한다(...).
그리고 대망의 2013년 시즌, 센트럴리그 3위로 히로시마는 드디어 비밀번호를 끊고 첫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에 성공했고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에서 한신 타이거스에 스윕승을 거두며 히로시마를 CS 파이널 스테이지까지 진출 시키면서 노무라가 아직까지 감독 직에서 잘리지 않은 이유를 증명해냈다.
2014년 시즌에는 시즌 막판까지 2위 싸움을 했지만 결국 마지막 경기에서 무너져 또다시 3위로 클라이맥스 시리즈에 진출해 한신 타이거스에 지난해의 리벤지를 당하며 탈락했고, 노무라 켄지로는 이 경기를 끝으로 건강상의 이유로 감독직에서 물러나고 후임으로 동시대 히로시마의 중심멤버였던 야수종합코치 오가타 고이치가 선임됐다. 그리고 오가타 정권 2년 차인 2016년, 카프는 25년 만에 리그 우승을 달성하며 2016년 일본시리즈에 팀을 진출시켰다.
5. 여담
초등학교 때부터 프로까지 줄곧 주장을 맡으면서 항상 다른 선수들과 팀을 걱정했다고 한다. 1994년부터는 주장과 팀 리더로서의 자질을 인정받아, FA권한을 취득했을 땐 구단도 노무라를 지도자로서 기대를 걸고 잔류하길 바랬다고.히가시데 아키히로와 아라이 타카히로가 부진에 시달렸을 때는 격려를 아끼지 않아, 아라이는 '진심으로 의지가 되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아라이는 프로 데뷔 이전부터 노무라의 자택에 찾아가 스윙에 대해 지도받는 등 교류가 있었던 사이이기도 하다.[17] 가네모토 도모아키가 트리플 쓰리를 달성할 때는 경험자로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외국인 선수와는 정기적으로 식사를 하는데, 대화를 영어(!)로 한다고 한다. 노무라는 "단어나 문법은 형편없지만, 용기로서 소통한다" 며 외국인 선수들에게 신뢰를 얻고 있고 주장한다. 외국인 선수에 대한 타격지도에도 정평(?)이 나 있어, 2014년 개막전부터 호조를 보이고 있는 브래드 엘드레드는 "케니[18]의 조언 덕분이다"며 노무라에게 감사한다고.[19]
1988년 서울 올림픽 당시,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은 결승전인 미국전에서 상대 투수인 짐 애보트에게 막혀 고전하고 있었다. 이때 스즈키 감독이 "우타자가 필요한데, 누구 칠 수 있는 사람?"이라며 묻자 노무라가 바로 손을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선언대로 안타를 쳤는데, 문제는 위 항목의 프로필을 보면 알겠지만 노무라는 우투좌타 선수다. 게다가 고교 입학시부터 프로 은퇴때까지 공식전에서 우타석에 서 본 적은 그때가 유일했다고(...)[20]
6. 통산 성적
통산 기록 | |||||||||||||||
<rowcolor=#ffffff> 연도 | 소속팀 | 경기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볼넷 | 장타율 | 출루율 | OPS |
1989 |
広 島 |
88 | 151 | .258 | 39 | 4 | 5 | 0 | 12 | 29 | 21 | 7 | .351 | .302 | .653 |
1990 | 125 | 519 | .287 | 149 | 28 | 8 | 16 | 44 | 84 | 33 | 45 | .464 | .354 | .818 | |
1991 | 132 | 524 | .324 | 170 | 22 | 7 | 10 | 66 | 75 | 31 | 29 | .450 | .366 | .817 | |
1992 | 130 | 545 | .288 | 157 | 22 | 5 | 14 | 63 | 89 | 21 | 56 | .424 | .358 | .783 | |
1993 | 130 | 556 | .266 | 148 | 21 | 1 | 14 | 48 | 67 | 12 | 39 | .383 | .319 | .703 | |
1994 | 130 | 558 | .303 | 169 | 20 | 4 | 10 | 61 | 77 | 37 | 45 | .407 | .357 | .764 | |
1995 | 131 | 550 | .315 | 173 | 29 | 5 | 32 | 75 | 109 | 30 | 53 | .560 | .380 | .940 | |
1996 | 124 | 514 | .292 | 150 | 30 | 3 | 12 | 68 | 77 | 8 | 38 | .432 | .343 | .775 | |
1997 | 131 | 540 | .280 | 151 | 25 | 0 | 13 | 52 | 81 | 26 | 54 | .398 | .349 | .748 | |
1998 | 135 | 561 | .282 | 158 | 26 | 4 | 14 | 49 | 75 | 15 | 41 | .417 | .333 | .750 | |
1999 | 101 | 350 | .291 | 102 | 20 | 1 | 6 | 42 | 37 | 2 | 33 | .406 | .355 | .761 | |
2000 | 61 | 208 | .240 | 50 | 4 | 1 | 2 | 17 | 15 | 1 | 13 | .298 | .298 | .596 | |
2001 | 117 | 403 | .273 | 110 | 18 | 1 | 9 | 53 | 35 | 7 | 31 | .390 | .324 | .714 | |
2002 | 85 | 175 | .211 | 37 | 4 | 0 | 3 | 11 | 14 | 1 | 9 | .286 | .249 | .534 | |
2003 | 94 | 310 | .274 | 85 | 8 | 0 | 5 | 32 | 25 | 3 | 27 | .348 | .333 | .682 | |
2004 | 107 | 359 | .270 | 97 | 18 | 2 | 5 | 43 | 27 | 1 | 24 | .373 | .319 | .692 | |
2005 | 106 | 272 | .276 | 75 | 14 | 0 | 4 | 29 | 19 | 1 | 18 | .371 | .321 | .692 | |
통산 | 1927 | 7095 | .285 | 2025 | 313 | 47 | 169 | 765 | 935 | 250 | 562 | .414 | .341 | .755 |
- 볼드체는 리그 1위.
[A]
前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감독과는 다른 인물이다. 이쪽은 이름 한자가 緒方耕一이다.
[A]
[3]
赤い闘志燃やせ 赤い旋風巻き起こせ 勝利目指して駆け抜けろ 走れ野村謙二郎 (붉은 투지 불태워라 붉은 회오리 일으켜라 승리를 향해 달려라 노무라 켄지로)
[4]
여담으로
비슷한 이름의 성우도 쓰는 별명이다
[5]
팀 선배이자 미스터 붉은 헬멧으로 유명했던
야마모토 코지의 업그레이드 버전. 이 둘은 야마모토 감독의 두 번의 임기 모두에서 한솥밥을 먹었다.
[6]
왜 붉은 헬멧의
악마라는 별명이 붙었는지 생각해 보라. 이 시기 히로시마의 마지막 유산은
마에다 토모노리가 아니냐는 반론도 있을 수 있으나 마에다는 히로시마에 어울리지 않는 천재과로 분류된다는 것이
함정.
가네모토 도모아키는 주전 자리를 차지했을 당시 이미 팀이 내리막길에 접어들고 있었고...
[7]
1992년 일본시리즈 MVP
[8]
당시 노무라는 3루수, 하츠시바는 지명타자 롤을 맡았다.
[9]
호타준족의
스위치 히터.
1979년 일본시리즈 MVP. 일본프로야구 최다연속경기(33경기) 안타 기록 보유자이다.
이승엽을 지도할 시 "생각 할 시간 있으면 스윙하나 더하라"라는 말을 해줬으며, 그의 히로시마 시절 동료인
쇼다 코우조는 타카하시가 2만번 스윙을 하면 본인은 4만번 휘둘렀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10]
이후 다카하시는
한신 타이거스,
치바 롯데 마린즈를 거쳐 선수로서 은퇴한다.
[11]
근데 이 때 도루자도 23개로 전체 1위였다. 도루성공률은 58.9%로 역대 최저 도루성공률 도루왕. 보통 도루성공률이 75%를 넘어야 완전히 이득이며, 아무리 잘 쳐줘도 70%는 찍어줘야 도루를 할 가치가 있다고 평가한다. 보통 도루성공률이 낮아서 하나마나하다고 평가받는 선수들의 도루성공률이 60%대 중후반인 걸 감안하면 58.9%는 정말 자기 커리어를 위해 안 되는 걸 무리하게 한 수준. 이 정도 성공률이면 오히려 도루 시도 자체가 팀에게는 마이너스라고 한다.
[12]
실제로 한일 슈퍼게임에서 유격수 앞 땅볼을 치고도 워낙 빠른 발 때문에 내야 안타를 치기도 했다. 당시 유격수는 류중일.
[13]
1999년에는 서울에서 열린 시드니올림픽 아시아예선에 일본대표팀 자격으로 참가해서 일본의 올림픽티켓 획득에 기여한다. 당시 포지션은 3루수.
[14]
그런데 노무라가 30홈런 이상, 아니 20홈런 이상을 기록한 것은 1995년이 유일했고, 그 외 시즌은 10개 초중반의 홈런을 쳤다.
[15]
KBO 리그에도 비슷한 경우가 있는데 바로 1999년 LG의
라뱅이 있다.
[16]
7번 DH로 출장했다.
위장오더 작전을 시도한 거... 라고 할 수 있는데 지명타자는 첫 타석에서는 대타로 교체할 수 없다는 룰 때문에 그냥 불펜투수 한 명만 소모한 꼴이 되었다(...) 다행히(?) 이마무라 이전 타석의 타자가 출루했기에 이마무라는 희생번트라도 댈 수는 있었다. 그리고 선발 투수 겸 지명타자 룰(일명
오타니 룰)은 그로부터 10년이 더 지난 2022년에야 메이저 리그 공식 규정으로 도입되었다.
[17]
때문에 아라이의
한신 타이거스로 FA 이적했을 때, 이 때부터 이어진 카프와의 인연을 끊었다고 비난한 팬들이 많았다. 카프로 돌아온 지금은 다시 프랜차이즈로서 대우받지만.
[18]
노무라 감독을 일컫는다.
[19]
실제로 이 시즌에 엘드레드는 37개의 홈런으로 센트럴리그 홈런왕을 달성하게 된다.
[20]
중학교까지는 우타였고 프로에서도 잠시
스위치 히터를 도전하느라 우타석 연습을 하긴 했다고 하는데, 결국 잠깐 시도해보고 이후로는 계속 좌타자로만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