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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5 23:19:46

가쓰라 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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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C3C965>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이토 히로부미 구로다 기요타카 야마가타 아리토모 마쓰카타 마사요시
<rowcolor=#c3c965>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이토 히로부미 마쓰카타 마사요시 이토 히로부미 오쿠마 시게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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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가타 아리토모 이토 히로부미 가쓰라 다로 사이온지 긴모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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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쓰라 다로 사이온지 긴모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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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온지 긴모치 가쓰라 다로 야마모토 곤노효에 오쿠마 시게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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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라우치 마사타케 하라 다카시 다카하시 고레키요 가토 도모사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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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모토 곤노효에 기요우라 게이고 가토 다카아키 와카쓰키 레이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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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누카이 쓰요시 사이토 마코토 오카다 게이스케 히로타 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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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시 센주로 고노에 후미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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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노에 후미마로 히라누마 기이치로 아베 노부유키 요나이 미쓰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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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노에 후미마로 도조 히데키 고이소 구니아키 스즈키 간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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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C3C965> 제42대 제43대 제44대 제45대
스즈키 간타로 시데하라 기주로 요시다 시게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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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타야마 데쓰 아시다 히토시 요시다 시게루 하토야마 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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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바시 단잔 기시 노부스케 이케다 하야토 사토 에이사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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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카 가쿠에이 미키 다케오 후쿠다 다케오 오히라 마사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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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키 젠코 나카소네 야스히로 다케시타 노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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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세이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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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C3C965> 제74대 제75대 제76·77대 제78대
다케시타 노보루 우노 소스케 가이후 도시키 미야자와 기이치
<rowcolor=#C3C965> 제79대 제80대 제81대 제82·83대
호소카와 모리히로 하타 쓰토무 무라야마 도미이치 하시모토 류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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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부치 게이조 모리 요시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아베 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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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다 야스오 아소 다로 하토야마 유키오 간 나오토
<rowcolor=#C3C965> 제95대 제96-98대
노다 요시히코 아베 신조
[[레이와 시대|
레이와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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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C3C965> 제98대 제99대 제100·101대
아베 신조 스가 요시히데 기시다 후미오
← 태정대신
섭관 · 원정 · 헤이케 · 가마쿠라 · 무로마치
오다 · 도요토미 · 에도 · 내무경 ·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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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 구로다 기요타카 야마가타 아리토모
마쓰카타 마사요시 이노우에 가오루 사이고 주도
오야마 이와오 가쓰라 다로 사이온지 긴모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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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D1D1D,#e2e2e2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제5대
가바야마 스케노리 가쓰라 다로 노기 마레스케 고다마 겐타로 사쿠마 사마타
제6대 제7대 제8대 제9대 제10대
안도 사다요시 아카시 모토지로 덴 겐지로 우치다 가카치 이자와 다키오
제11대 제12대 제13대 제14대 제15대
가미야마 만노신 가와무라 다케지 이시즈카 에이조 오타 마사히로 미나미 히로시
제16대 제17대 제18대 제19대
나카가와 겐조 고바야시 세이조 하세가와 기요시 안도 리키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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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e5e5e5
외무경 (1869년~1879년) · 외무사무총재 (1873년)
초대
사와 노부요시
2대
이와쿠라 도모미
3대
소에지마 다네오미
4대
데라시마 무네노리
5대
이노우에 가오루
전전 외무대신 (1885년~194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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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
이노우에 가오루
6대
이토 히로부미
7대
오쿠마 시게노부
8대
아오키 슈조
9대
에노모토 다케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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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무쓰 무네미쓰
11대
사이온지 긴모치
12대
오쿠마 시게노부
13대
니시 도쿠지로
14대
오쿠마 시게노부
15대
아오키 슈조
16대
가토 다카아키
17대
소네 아라스케
18대
고무라 주타로
19대
가토 다카아키
20대
사이온지 긴모치
21대
하야시 타다스
22대
데라우치 마사타케
23대
고무라 주타로
24대
우치다 고사이
25대
가쓰라 다로
26대
가토 다카아키
27대
마키노 노부아키
28대
가토 다카아키
29대
오쿠마 시게노부
30대
이시이 기쿠지로
31대
데라우치 마사타케
32대
모토노 이치로
33대
고토 신페이
34대
우치다 고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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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대
우치다 고사이
35대
야마모토 곤노효에
36대
이주인 히코키치
37대
마쓰이 게시로
38대
시데하라 기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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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대
다나카 기이치
40대
시데하라 기주로
41대
이누카이 쓰요시
42대
요시자와 겐키치
43대
사이토 마코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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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대
우치다 고사이
45대
히로타 고키
46대
아리타 하치로
47대
하야시 센주로
48대
사토 나오타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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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대
히로타 고키
50대
우가키 가즈시게
51대
고노에 후미마로
52대
아리타 하치로
53대
아베 노부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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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대
노무라 기치사부로
55대
아리타 하치로
56대
마쓰오카 요스케
57대
도요다 데이지로
58대
도고 시게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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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대
도조 히데키
60대
다니 마사유키
61대
시게미쓰 마모루
62대
스즈키 간타로
63대
도고 시게노리
전후 외무대신 (1945년~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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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대
시게미쓰 마모루
65대
요시다 시게루
66대
가타야마 데쓰
67·68대
아시다 히토시
69·70·71대
요시다 시게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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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73·74대
오카자키 가쓰오
75·76·77대
시게미쓰 마모루
78대
이시바시 단잔
79·80대
기시 노부스케
81·82대
후지야마 아이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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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84대
고사카 젠타로
85·86대
오히라 마사요시
87·88대
시이나 에쓰사부로
89·90대
미키 다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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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대
사토 에이사쿠
92·93대
아이치 기이치
94대
후쿠다 다케오
95·96대
오히라 마사요시
97대
기무라 도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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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대
미야자와 기이치
99대
고사카 젠타로
100대
하토야마 이이치로
101·102대
소노다 스나오
103대
오키타 사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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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대
이토 마사요시
105대
소노다 스나오
106대
사쿠라우치 요시오
107·108대
아베 신타로
109대
구라나리 다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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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대
우노 소스케
105대
미쓰즈카 히로시
106대
나카야마 타로
107·108대
와타나베 미치오
109대
무토 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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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대
하타 쓰토무
117대
가키자와 고지
118대
고노 요헤이
119·120대
이케다 유키히코
121대
오부치 게이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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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대
고무라 마사히코
123·124·125대
고노 요헤이
126대
다나카 마키코
127대
고이즈미 준이치로
128·129대
가와구치 요리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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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131대
마치무라 노부타카
132·133대
아소 다로
134대
마치무라 노부타카
135대
고무라 마사히코
136대
나카소네 히로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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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138대
오카다 가쓰야
139대
마에하라 세이지
140대
에다노 유키오
141대
마쓰모토 다케아키
142대
겐바 고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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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144대
기시다 후미오
145·146대
고노 다로
147-149대
모테기 도시미쓰
150대
기시다 후미오
151대
하야시 요시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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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대
가미카와 요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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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e5e5e5
민부·대장경 (1869~1885)
초대
마츠다이라 슌가쿠
2대
다테 무네나리
-
오키 다카토
3대
오쿠보 도시미치
4대
오쿠마 시게노부
5대
사노 쓰네타미
6대
마쓰카타 마사요시
전전 대장대신 (1885~1947)
1·3·5·8대
마쓰카타 마사요시
1·3·5·8대
마쓰카타 마사요시
2·4·9대
와타나베 구니타케
1·3·5·8대
마쓰카타 마사요시
2·4·9대
와타나베 구니타케
1·3·5·8대
마쓰카타 마사요시
6대
이노우에 가오루
7·12대
마쓰다 마사히사
1·3·5·8대
마쓰카타 마사요시
2·4·9대
와타나베 구니타케
-
사이온지 긴모치
10대
소네 아라스케
11대
사카타니 요시로
7·12대
마쓰다 마사히사
13대
가쓰라 다로
14대
야마모토 다쓰오
15·17대
와카쓰키 레이지로
16·21·28·31·33대
다카하시 고레키요
15·17대
와카쓰키 레이지로
18대
다케토미 도키토시
19대
데라우치 마사타케
20·24대
쇼다 가즈에
16·21·28·31·33대
다카하시 고레키요
22대
이치키 오토히코
23·30대
이노우에 준노스케
20·24대
쇼다 가즈에
25대
하마구치 오사치
26대
하야미 센지
27대
가타오카 나오하루
16·21·28·31·33대
다카하시 고레키요
29대
미쓰치 주조
23·30대
이노우에 준노스케
16·21·28·31·33대
다카하시 고레키요
16·21·28·31·33대
다카하시 고레키요
32대
후지이 사다노부
16·21·28·31·33대
다카하시 고레키요
34대
마치다 추지
35대
바바 에이이치
36대
유우키 도요타로
37·44대
가야 오키노리
38대
이케다 시케아키
39·45대
이시와타 소타로
40대
아오키 가즈오
41대
사쿠라우치 유키오
42대
가와다 이사오
43대
오구라 마사쓰네
37·44대
가야 오키노리
39·45대
이시와타 소타로
46·48대
쓰시마 준이치
47대
히로세 도요사쿠
46·48대
쓰시마 준이치
49대
시부사와 게이조
50대
이시바시 단잔
전후 대장대신 (1947~2001)
-
가타야마 데쓰
51대
야노 쇼타로
52대
구루스 다케오
53대
기타무라 도쿠타로
-
요시다 시게루
54대
이즈미야마 산로쿠
-
오야 신조
55·61-62대
이케다 하야토
56대
무카이 다다하루
57대
오가사와라 산쿠로
58-60·63대
이치마다 히사토
55·61-62대
이케다 하야토
58-60·63대
이치마다 히사토
64대
사토 에이사쿠
65-66·71-72·75대
미즈타 미키오
67-69대
다나카 가쿠에이
70·73-74·78대
후쿠다 다케오
65-66·71-72·75대
미즈타 미키오
70·73-74·78대
후쿠다 다케오
65-66·71-72·75대
미즈타 미키오
76대
우에키 코시로
77대
아이치 기이치
-
다나카 가쿠에이
70·73-74·78대
후쿠다 다케오
79-80대
오히라 마사요시
81대
보 히데오
82·91-92대
무라야마 다쓰오
83대
가네코 잇페이
84·86-87·90대
다케시타 노보루
85대
와타나베 미치오
84·86-87·90대
다케시타 노보루
88-89·105-107대
미야자와 기이치
84·86-87·90대
다케시타 노보루
82·91-92대
무라야마 다쓰오
93-94·103대
하시모토 류타로
95대
가이후 도시키
96대
하타 쓰토무
97대
하야시 요시로
98-99대
후지이 히로히사
임시대리
하타 쓰토무
98-99대
후지이 히로히사
100대
다케무라 마사요시
101대
구보 와타루
102대
미쓰즈카 히로시
93-94·103대
하시모토 류타로
104대
마쓰나가 히카루
88-89·105-107대
미야자와 기이치
재무대신 (2001~)
초대
미야자와 기이치
2대
시오카와 마사주로
3-5대
다니가키 사다카즈
6대
오미 고지
7·8대
누카가 후쿠시로
9대
이부키 분메이
10대
나카가와 쇼이치
11대
요사노 가오루
12대
후지이 히로히사
13대
간 나오토
14대
노다 요시히코
15대
아즈미 준
16대
조지마 고리키
17-20대
아소 다로
21·22대
스즈키 슌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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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내무대신 (1885년~1947년)
초대
야마가타 아리토모
임시대리·5대
마쓰카타 마사요시
초대
야마가타 아리토모
2·14대
사이고 주도
3대
시나가와 야지로
4대
소에지마 다네오미
임시대리·5대
마쓰카타 마사요시
6대
고노 도가마
7대
이노우에 가오루
8대
노무랴 야스시
9·12·19대
요시카와 아키마사
10·13대
이타가키 다이스케
11대
가바야마 스케노리
9·12·19대
요시카와 아키마사
10·13대
이타가키 다이스케
2·14대
사이고 주도
15대
스에마쓰 겐초
16대
우츠미 다다가쓰
17대
고다마 겐타로
18대
가쓰라 다로
9·12·19대
요시카와 아키마사
20대
기요우라 게이고
21·23·25대
하라 다카시
22대
히라타 도스케
21·23·25대
하라 다카시
24·27대
오우라 가네타케
21·23·25대
하라 다카시
26·28대
오쿠마 시게노부
24·27대
오우라 가네타케
26·28대
오쿠마 시게노부
29대
이치키 기토쿠로
30·34대
고토 신페이
31·33·35대
미즈노 렌타로
32대
도코나미 다케지로
31·33·35대
미즈노 렌타로
30·34대
고토 신페이
31·33·35대
미즈노 렌타로
36대
와카쓰키 레이지로
37대
하마구치 오사치
38·44대
스즈키 기사부로
39대
다나카 기이치
40대
모치즈키 게이스케
141대
아다치 겐조
42대
나카하시 토쿠고로
43대
이누카이 쓰요시
38·44대
스즈키 기사부로
45대
야마모토 다쓰오
46대
고토 후미오
47대
우시오 시게노스케
48대
가와라다 가키치
49대
바바 에이이치
50대
스에쓰구 노부마사
51대
기도 고이치
52대
오하라 나오시
53대
코다마 히데오
54대
야스이 에이지
55대
히라누마 기이치로
56대
다나베 하루미치
57대
도조 히데키
58대
우자와 미치오
59대
안도 기사부로
60대
오다치 시게오
61대
아베 겐키
62대
야마자키 이와오
63대
호리키리 젠지로
64대
미쓰치 주조
65대
오무라 세이이치
66대
우에하라 에쓰지로
임시대리
가타야마 데쓰
67대
기무라 고자에몬
폐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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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육군경 (1873년~188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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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10px" <rowcolor=#fff> 육군대신 (1885년~194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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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기야마 하지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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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57대
시모무라 사다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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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 대만총독
파일:11_KatsuraT.jpg
<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출생 1848년 1월 4일
나가토국 아부군 하기정
(現 야마구치현 하기시)
사망 1913년 10월 10일 (향년 65세)
도쿄부 도쿄시 시바구
(現 도쿄도 미나토구)
재임 기간 제11대 내각총리대신
1901년 6월 2일 ~ 1906년 1월 7일
제13대 내각총리대신
1908년 7월 14일 ~ 1911년 8월 30일
제15대 내각총리대신
1912년 12월 21일 ~ 1913년 2월 20일
서명 파일:KatsuraT_kao.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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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기요즈미(淸澄)
통칭 다로(太郞)
아호 가이조(海城)
배우자 가쓰라 우타코 1874년 ~ 1886년
가쓰라 사다코 1886년 ~ 1890년
가쓰라 가나코 1898년 ~ 1913년
작위 공작
정당
약력 제9-12대 육군대신
제2대 대만총독
제25대 외무대신
제18대 내무대신
제19대 문부대신
제13대 대장대신
제7대 시종장
제3대 내대신
초대 대만협회 회장[1]
제11·13·15대 내각총리대신
원로
군사 경력
복무 일본제국 육군
1874년 ~ 1900년
최종 계급 대장
주요 보직 제3사단장
참전 청일전쟁 }}}}}}}}}
1. 개요2. 생애3. 여담4.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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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군인 · 정치인. 제11·13·15대 내각총리대신을 지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흉수이자[2] 1905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압으로 박탈한 을사늑약, 대한제국의 국권을 완전히 침탈한 한일병합조약 체결( 경술국치) 당시의 총리였기 때문에 한국인 입장에서는 철천지 원수이나 이상하게 이토 히로부미에 비해 국내 인지도는 낮다. 또한 2019년 아베 신조에 의해 경신되기 전까지 역대 일본 최장수 총리 기록(2,886일)을 보유했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2. 생애

파일:가쓰라타로.jpg
막부말기 당시의 가쓰라
조슈 번 나가토노쿠니(長門國, 현 야마구치현) 출생. 지방의 여러 잡무를 맡아보던 사무라이의 아들로 태어났다.[3] 어렸을 때부터 서양식 군사 훈련에 참여했고 에도 막부 말 일어난 보신 전쟁에 존왕파 병사로 참가했다.

1870년에 프로이센 왕국으로 유학을 갔다. 거기서 당시 강성대국을 주장하던 프로이센의 군사 정책에 매료되어 국방 정책과 군사 과학을 배웠지만, 관비 유학이 아닌 사비 유학이었기 때문에 부담되어 결국 3년 만에 유학을 접고 일본으로 돌아왔다. 당시 일본은 메이지 유신의 여파로 정신이 없었던 시절이었다. 가쓰라는 거기서 일본 본국을 향해 줄기차게 자신의 독일 유학을 관비로 지원해달라고 요구했지만, 그의 요구는 묵살당했다.

유학 후 평소 알고 지내던 기도 다카요시의 연줄과 도움으로 육군에 장교로 편입되었고, 거기서 가쓰라 본인의 최대 수혜자가 되는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만난다. 이후 야마가타의 지원과 후광으로 청일전쟁에 참가해 승진을 거듭하고, 이토 내각의 육군대신과, 타이완 총독을 지내는 등 말 그대로 승승장구했다.

1901년, 이토 히로부미가 총리직을 사임하고 조선으로 떠나자 그의 후임을 둘러싸고 일대 파란이 일어났는데, 이토를 중심으로 하는 온건파 귀족[4]들은 내무대신과 대장대신을 역임했던 을미사변을 일으킨 이노우에 가오루를 후임 총리로 추천했지만, 야마가타 등 강경파 군인들은 이노우에보다는 차라리 같은 군인이었던 가쓰라 다로를 추천했다.

그 분쟁에서 메이지 덴노가 이노우에를 추천한 온건파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이노우에 카오루는 총리 취임을 위한 조각에 착수했다. 그러나 이토 내각의 육군대신이었던 가쓰라가 삐딱선을 타서 이노우에 내각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했고, 대장대신으로 입각시키려던 시부사와 에이이치[5]도 "군인과 같이 일하기 싫다."라며 입각을 거부하자, 결국 조각에 실패한 이노우에 카오루는 총리 취임 준비 계획을 포기했다. 총리 자리가 무주공산이 되자 야마가타는 때를 놓치지 않고 가쓰라를 적극 추천해 가쓰라가 이토의 후임 총리로 임명되었다.
파일:external/www.weblio.jp/souri11.jpg
11대 총리 취임 후.[6]

우여곡절 끝에 가쓰라가 총리로 취임했지만, 사실상 그의 취임이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지원 덕인 데다가 그가 임명한 내각 인사들도 초보 내각 가쓰라 1차 내각 인선은 어수룩하게 짜여졌는데, 대부분의 내각 인사들이 야마가타가 추천한 사람들인데다가, 대부분이 관료직을 거치지 않고 장관직에 앉아본 초보자들이었다. 게다가 소네 아라스케는 외무대신에 대장대신 겸임.현대 한국으로 치면, 외교부장관 기획재정부장관을 한 명이 겸임하는 셈이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비입헌 내각" "2류 내각"이라고 비꼬았다. 게다가 보통 총리가 되면 예비역으로 전역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가쓰라는 현역을 계속 유지했다.

1904년, 영일동맹을 성사시키고 러일전쟁을 일으켜 일대 대박을 친다. 한때는 뤼순에 구축한 러시아군의 뤼순 요새로 일본군을 꼴아박는 짓거리도 서슴지 않았지만( 203고지) 혈전 끝에 뤼순 요새를 함락시키고, 대한해협에서 도고 헤이하치로가 러시아 함대를 격파하자( 쓰시마 해전) 러시아는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중재로 결국 일본과 강화 할 수 밖에 없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정작 총리대신이었던 가쓰라의 국민적 인기는 바닥을 기었다. 당시 근대국가들이 그러했듯 전황에 대해 거짓으로만 일관해왔다. 뭐 이기긴 이기고 있었으니 크게 본다면 거짓은 아니었으나, 결국 일본은 몇 달만 더 전쟁을 계속해도 국가가 패망할 지경이었기에, 전쟁 배상금도 못 받고 얻은 거라고는 고작 사할린 남부와 쿠릴 열도뿐이었다. 이 땅들은 당시 오랑캐가 살다가 사회 빈곤층이 먹고 살려고 이주하던 식인곰 출몰지 홋카이도보다 더 위에 있는 오지로 쓸모없는 땅으로 여겨졌다. 수많은 사상자들, 전쟁 때문에 당한 극심한 수탈, 메이지 시대 전반적으로 서구화를 위한 피나는 분투 등을 떠올리곤 폭발해서 1905년 9월 히비야 폭동을 일으켰다. 히비야에서 우발적으로 일어난 이 폭동은 파출소 수천 곳을 작살내는 결과로까지 이어졌다.[7] 결국 가쓰라는 러일전쟁 승전 이후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었고[8], 얼마 되지 않아 총리직에서 사퇴했다.

이후 총리직은 온건파였던 사이온지 긴모치와 돌아가며 사이도 좋게 번갈아 연임하게 되는데(사이온지가 12대, 14대), 그가 야마가타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의 일이었다.

사이온지가 총리직을 내려놓고 나서, 그에게 두 번째 임기가 찾아온다. 조선 그의 임기 중에 병탄당했고,[9] 고토쿠 사건[10]으로 인한 사회주의자 탄압 등 여러 정책을 그의 관록으로 밀어붙이자, 급성장하는 가쓰라를 두려워하였던 야마가타가 슬슬 그에게 브레이크(권리 제지)를 걸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쓰라는 옛 은인이었던 야마가타를 추방하기 위해 이미 야마가타 파벌에서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들을 은밀히 규합시켜놓은 상태였고, 또한 3차 가쓰라 내각도 이들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이런 사실을 알고 경악한 야마가타는 가쓰라가 두 번째 총리직을 사임하고 나서 메이지 덴노가 사망한 틈을 타서, 해외 시찰을 나간 가쓰라가 돌아오자마자 궁내성의 시종장과 내대신을 겸해주어 현실 정치에서 가쓰라의 입지를 괴멸시키려고 했다.[11] 그런데 그때 총리였던 사이온지가 돈도 없는데 예산 늘려달라고 징징거리는 육군에게 대항해 군축을 기획한다. 이에 빡친 일본군은 참으로 모래알 전통에 빛나는 일본군답게 육군대신을 사퇴시키고[12] 후임 추천을 보이콧한다. 이러자 내각을 구성할 수 없게 된 사이온지가 사임하게 된다.

이에 당연히 총리직 돌려먹기하던 가쓰라가 뒤를 이어 부임하니 이로서 총리직만 세 번째 역임이다. 그러나 이때 일본국민들은 상당히 화가 나 있었다. 러일전쟁을 전후해서 일본의 국민 쥐어짜기와 통제는 혹독한 수준이었는데 상술되었듯이 가쓰라 시기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했는데도 워낙 진을 뺀 탓에 포츠머스 회담에서 배상은 아예 못 받았으니 당장 국민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없었다. 그런데 러일전쟁만 이기면 뭔가 영광된 이상향에 다다를 것 같았던 선동과는 달리 러시아와의 전쟁으로 탈진에 가까운 상태이니 민중에 대한 쥐어짜기만 계속됐다. 이때 총리의 군축 요구에 군부가 반발해서 박살난 내각에 다시 돌려먹기로 가쓰라가 들어갔다는 정치 놀음에 민중들의 반발이 빗발쳤다. 하필 시기도 메이지 덴노가 죽은 직후, 즉 일본 입장에서는 거대했으며 기나길었으며 피땀과 눈물이 뒤섞인 숨가쁜 시대가 상징적인 종말을 고한 때였다. 그만큼 커다란 권위의 상실에 그에 비례하는 허탈감을 느낄 시기였다.

가쓰라가 비록 노련한 정치놀음으로 야마가타 파 자체를 자신의 세력으로 편입시키는 상한가를 쳤으나, 민중들은 그 나물에 그 밥 정치꾼들에게 더욱 분노했을 뿐이었다. 확실히 그 나물에 그 밥인 것이 가쓰라는 조슈파였고, 사이온지를 하야시킨 육군도 조슈파였고, 야마가타 파 역시 조슈파였다. 이에 정당정치인들이 맹공을 퍼부었고, 여기에 일본군답게 육군의 독주를 놔둘 수 없는 해군의 야마모토 곤노효에 등이 적극 지원했다. 이 난국을 돌파할 해법을 정치고수 가쓰라는 그의 풍부한 경험에서 찾고자 했으니, 그것은 바로 선배정치인을 본받는 것인데 그 선배정치인이란 바로 독물 이토 히로부미였다.

가쓰라는 이토 히로부미가 그랬듯 천황의 권위를 빌고자 했다. 곧 다이쇼 천황에게서 사이온지에게 정쟁을 중지하라는 칙허가 내려가나 이는 반대파들을 자극할 뿐이었다. 다이쇼는 메이지가 아니었다. 메이지 본인이 그 과정에서 어찌했건, 스스로에게 비롯하건 남이 의도적으로 실어주었건 간에 한 번 움직이면 절대적인 권위가 자연스레 따라오던 메이지와는 달랐다. 반대파는 그러잖아도 비겁자인 가쓰라가 어리고 혼암한 천황을 제멋대로 조종하려 든다고 여겨 더욱 혐오하게 되었다.

가쓰라의 운명을 결정지은 것은 일본 의회사에서 길이 남을 명연설이었다. 후일 '일본 의회정치의 아버지'로 불리는 오자키 유키오(尾崎行雄)가 의회 질의 도중 가쓰라와 그의 관료 동지들을 덴노의 바짓가랑이 뒤에 숨어 있는 겁쟁이들이라고 신랄히 탄핵의 논박을 가한 것이다.
그들은 항상 입을 열면 곧바로 충애를 외치고, 마치 충군애국은 자기들만의 특기처럼 외치고 있지만, 그 하는 바를 보면 항상 옥좌의 그림자에 숨어서, 정적을 저격하는 듯한 거동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옥좌를 흉벽(胸壁)으로 삼아, 탄환 대신 조칙으로 정적을 쓰러뜨리려 하고 있지 않습니까.(중략)
오자키 유키오, 1913년 2월 5일 중의원 본회의에서 가쓰라 총리대신을 규탄하면서

오자키의 열변에 치욕을 견디지 못해서 가쓰라는 중의원을 해산하겠다고 길길이 날뛰어댔다. 하지만 중의원 의장 오오카 이쿠조로부터 중의원을 해산했다간 의회를 포위한 군중들의 폭동을 감당할 수 없으리란 경고를 받고 마침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두 달여 만에 사퇴했다. 이 1차 호헌운동은 훗날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시발점이 되었다.

총리 낙마 후 불과 8개월 만에 위암으로 급사. 총리 재임기간은 총 2886일, 7년 11개월로 일본의 모든 내각총리 중에서 100년 넘게 가장 오래 재직한 최장수 총리였다.[13]

3. 여담

4. 대중매체에서



[1] 現 타쿠쇼쿠대학 [2] 참고로 미국 측 대표이며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특사였던 윌리엄 태프트도 가쓰라의 총리 임기(2기~3기) 동안 대통령에 재임했었다. [3] 그의 집안은 대대로 조슈 번의 번주인 모리(毛利) 가문을 섬긴 집안으로, 조상들 중에는 이츠쿠시마 전투 스에 하루카타를 꾀어낸 모리 모토나리 가신 카츠라 모토즈미도 있다. [4] 물론 전혀 온건하지 않았지만,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이끄는 강성무골들에 비하면 대체로 온건했다. [5] 일본은행 총재, 도쿄 증권거래소 의장 등을 역임하며 당시 일본에 서구식 경제체제를 도입한 사람이다. [6] 위 사진에 적힌 출생일인 11월 28일 음력이다. 양력으로 바꾸면 1월 4일이 된다. [7] 목조로 된 파출소는 군중들이 아예 들어서 시궁창에다 던지고 불태워버렸다고 한다. [8] 흔히 알려진 것처럼 외무대신 시절에 맺은 것이 아니다.외무대신은 3차 내각 때 겸임했다. 태프트는 나중에 대통령과 연방 대법관이 되지만 이 당시에는 전쟁장관. [9] 이 때 태프트 역시 대통령직을 지내고 있었다. [10] 일명 대역사건. [11] 까다로운 예절과 규율을 중시하는 일본 궁내성은 아이러니한 공간이었다. 신으로 떠받들어지는 덴노였으나 덴노들은 현실 정치는 거의 모르는 허수아비에 불과했고, 당시 일본의 정치는 조슈와 사쓰마 파로 양분되어 운영되던 체제였다. 그런 상황에서 가쓰라에게 던져 준 시종장과 내대신 직위는 한 마디로 정치 일선에서 손 떼라는 의미였다. [12] 당시 일본 육군대신과 해군대신은 현역 장성만이 맡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군의 비위를 못 맞추면 화난 군부가 대신을 사퇴시키고 새 대신을 보내지 아니하여 총리는 아웃이므로 총리들은 군대 눈치도 잘 살펴야 했다. 이 제도를 '군부대신 현역 무관제'라고 하는데, 해군 출신의 야마모토 곤노효에 총리가 폐지하였다가 문민 출신의 히로타 고키 내각에서 부활한다. [13] 이 기록은 약 110여 년 뒤 아베 신조가 깨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