厳島の戦い
1. 개요
일본 3대 기습 중 하나로 꼽히는 전투로, 1555년 모리 모토나리가 스에 하루카타의 대군세를 격파한 전투이다.
미야지마 전투라고도 불리며 영문 위키백과에서는 이 이름으로 등록되어있다.
2. 배경
1551년, 스에 하루카타는 자신이 섬기던 주군 오우치 요시타카 부자를 죽이고 반대 세력을 제거한 후(다이네이지의 변) 요시타카의 조카 오우치 요시나가를 명목상의 군주로 내세워 오우치씨를 괴뢰 정권으로 만들어 사실상의 실권자가 되었다. 모리 모토나리는 일단은 하루카타를 인정하고 충성을 맹세하는 척을 하고, 한편으론 이 혼란을 틈타 빗추와 빈고 방면으로 세력을 확대하는 동시에 내부적으로 지배력 강화를 꾀하여 고쿠진 영주와 가신단을 재편하여 모리씨의 힘을 키웠다.이때 스에씨의 지배에 불만을 품은 이와미의 요시미 마사요리가 반란을 일으켰다. 마사요리는 하루카타에게 대항하기 위해 모토나리에게 원군을 요청했다. 이때 하루카타도 모토나리에게 마사요리 토벌을 위한 원군을 요청한다. 양쪽의 요청을 받고 모토나리는 고민 끝에 마사요리 측에 가담한다. 과거 오우치 요시타카에게 입은 은혜가 많은 모리 타카모토가 그동안 계속 스에 토벌을 주장했었으나, 모토나리는 신중하게 움직였다. 다만 그런 모토나리의 태도 자체도 모략이라는 말이 있다.
스에 하루카타도 원래는 모토나리와 관계가 나쁘진 않았다. 모토나리가 전 당주 요시타카를 지지하던 호족들을 공략하는 것에 대해 도움을 주었고, 아예 모리가 아키와 빈고의 호족들을 지배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을 조건으로 동맹까지 맺었기 때문. 그동안 맹약을 맺어왔던 하루카타에겐 모토나리의 배신은 충격이 컸었고, 이로써 모리를 토벌하려는 마음을 굳히게 된다. 하루카타와 마사요리의 싸움은 급히 종결되고, 모토나리와 하루카타 사이에 대결이 시작된다.
모토나리는 아키 일대의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 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남부를 공략해 여러 성들을 함락하고 히로시마 남쪽의 섬 이츠쿠시마를 점령했다. 이를 막기 위해 스에 하루카타는 군대를 파견했고, 그 양군의 전투가 1554년 일어났다. 이 전투에서 모리 군 3,000명, 스에 군 7,000명이란 병력의 열세 속에서도 모토나리의 지휘로 대승리를 거두었다.
패배 소식에 경악한 하루카타는 오우치 가문의 힘을 모두 모아 직접 전군을 이끌고 모리를 멸망시킬 것을 다짐하고, 전면전을 준비한다.
3. 전투 이전
모토나리는 이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 모략을 사용하였다.[1]
첫 번째 모략은 차도살인이었다. 스에 가에는 에라 후사히데라는 지장이 있었는데, 그는 모토나리와 함께 전장에 나선 적이 있어 모토나리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모토나리는 그를 자신의 진영에 끌어들이려 했으나, 후사히데는 태도를 분명히 하지 않았다. 그러자 모토나리는 하루카타에게 후사히데가 모리와 내통하고 있다는 정보를 흘려 이를 의심한 하루카타가 후사히데를 암살하게 만들어 후환을 없앴다.
두 번째 모략은 위장 내통이었다. 하루카타는 처음엔 육로로 전진하여 모토나리를 공격하려 했다. 육로에서 싸운다면 승산이 없다고 생각한 모토나리는 가신 카츠라 모토즈미를 거짓으로 하루카타와 내통시켜, 해로로 하루카타가 이츠쿠시마로 진격하면 자신이 모토나리의 거성을 빼앗겠다는 거짓 서약서를 보냈다. 이것을 믿고 하루카타는 해로로 공격할 것을 결정하고 이츠쿠시마로 향하게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모토나리는 하루카타를 이츠쿠시마로 유인하기 위해 점령할 생각도 없던 이츠쿠시마의 미야오 성을 증축하고[2] 병력을 주둔시키는 스케일 큰 기만 작전을 준비한다. 이츠쿠시마에는 이츠쿠시마 신사라는 신사가 있는데, 이 신사는 당시 일본인들이 종교적으로 신성하게 여기는 성지였기 때문에 성지를 무단으로 점거했다는 이유로 하루카타를 포함한 다른 다이묘들이 침공해 올 명분도 충분했다.[3] 하루카타는 몇 차레 부장을 파견해 미야오 성을 공격했으나 공격은 번번이 실패하고, 결국 자신이 직접 성을 공격하고자 9월 22일 2만의 대군을 탑승시킨 500척의 선단을 이끌고 이츠쿠시마에 도착했다.
일부 함선들은 스에 군이 상륙한 지점을 지켰다. 9월 24일 스에 군 2만이 이츠쿠시마에 상륙한 것을 안 모토나리는 장남 모리 타카모토, 차남 킷카와 모토하루 등과 함께 병력 3,500을 이끌고 3남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와 합류했다. 이로서 모리의 병력은 4,000이 되었다. 모토나리의 전략은 스에 군을 이츠쿠시마에 끌어들인 뒤 후방에서 기습을 가해 전멸시킨다는 계획이었다. 이 계획을 위해선 스에 군 앞 바다를 지키는 수군 세력을 전멸시킬 필요가 있었다. 모토나리가 끌어모은 수군은 코바야카와 수군을 중심으로 한 300척으로 스에 군의 500척에 비해 열세였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모리 군은 무라카미 타케요시와 구루지마 미치야스[4] 휘하의 해적 집단인 무라카미 수군중을 회유하기로 했고, 코바야카와 타카카게가 이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다. 이때 모토나리는 수군중에게 단 하루만 배를 빌려달라고 전했다고 한다. 어차피 하루만에 다 결판 날 터이니 하룻밤 이상은 필요없다는 것.
9월 28일에 이르러 무라카미 수군 중 300척이 도래하여 수군 세력은 보강되었다. 당시 이츠쿠시마의 미야오 성은 함락 직전까지 가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약간만 늦었더라면 모토나리의 책략은 물거품이 될 뻔했다.
폭우가 쏟아지는 28일 오후 6시 모리 군 4,000명을 태운 배가 출발했다. 오후 10시 이츠쿠시마에 주둔한 스에 군의 후방인 츠츠미케우라에 도착했다. 여기서 타고 온 배를 돌려보내 배수의 진을 친 모리 군은 공격을 기다렸다.
4. 전투 진행
10월 1일 아침 6시 모리 군은 모토나리의 지시대로 스에 군을 기습했다. 날씨의 악화와 갑작스런 공격으로 인해 놀란 스에 군은 붕괴하며 흩어졌다. 배를 타고 도망치려했지만 모든 배는 이미 타카카게의 지휘를 받는 모리 군 측 수군에 의해 다 파괴되었다. 이로 인해 당황한 스에 군은 일부 부대를 제외하고 완전히 공황상태에 빠졌다. 공황 상태에 빠지지 않은 부대는 계속 항전해 하루카타가 도망갈 시간을 번다.하루카타는 탈출을 결심하지만 이미 해안에는 배가 한 척도 남아있지 않았다. 결국 하루카타는 해안선을 따라 남쪽으로 도망쳤다.
이를 추격한 것은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였다. 하지만 추격 도중 스에 군의 후군이 격렬히 저항하여 타카카게 자신도 부상을 입을 정도로 피해를 입었다. 이때 모토하루[5]가 급히 원군으로 달려와 후군을 전멸시키고 하루카타를 향한 추격을 계속했다.
하루카타는 이츠쿠시마 남방에 도착했지만 배는 한 척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운명이 다한 것을 안 하루카타는 결국 여기서 자결한다. 하루카타의 자결 후에도 히로나카 타카카네가 지휘하던 스에 군의 일부는 계속 저항한다. 하지만 3일 후 스에 군은 완전히 궤멸되었고 전투는 모리 군의 완승으로 끝났다.
5. 전투의 결과
대전투는 결국 모리의 완승으로 끝났다. 이 이후 오우치는 세력을 다시 일으키지 못하고, 결국 2년 뒤인 1557년 모리의 침공으로 오우치 요시나가가 자결하며 무너졌다. 모리는 이 전투를 계기로 오우치를 침공해 스오, 나가토 국을 차지하면서 주고쿠에서의 영향력이 더욱 확대되었다.모리 모토나리의 "끈기있게 밑밥을 깔고 적을 공략하는 모략"이 잘 나타난 전투로, 적을 쓰러뜨리기 위해 성을 짓고 차도살인에 거짓 항복, 그것도 모자라서 해적들의 수군까지 끌어오는 등 미칠듯한 준비로 병력의 열세를 이겨내고 스에 하루카타를 쓰러뜨렸다. 이 때문에 노부나가의 야망 창조의 이츠쿠시마 전투에선 노지마의 수군중이 스에 하루카타에게 그의 패배는 준비가 되지 않은 탓이라고 일갈한다.
이츠쿠시마 전투 당시 모리 군의 암구호는 "이길수 있을까?"하고 물으면 승리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6. 대중 매체에서의 모습
노부나가의 야망에서도 이벤트로 등장한다. 거의 매번 빠지지 않는 이벤트 중 하나이다. 창조에서는 DLC 시나리오로 따로 나왔는데, 시작하자마자 따라서 플레이하면 된다. 다만 오케하자마와는 달리 자동으로 스에 하루카타가 사망하는 것으로 진행된다. 이후 스토리를 줄줄 따라가면 자동적으로 타카모토도 죽고(...) 아마고를 함락시킴으로서 모리원취전을 찍을수 있다. 이 시나리오로 가면 세 화살의 교훈 등 유명한 모리가의 스토리는 거의 다 볼수 있다. 노부나가의 야망 대지에선 시나리오로 나왔다.태합입지전 5에서도 등장한다. 하루카타로 플레이 해 승리하면 살아남을 수 있다.
전국무쌍 4에서는 주고쿠의 장 1전으로 등장한다.
전국 바사라 시리즈에서는 2편 이후로 3편, 4편까지 이츠쿠시마 전투라는 이름의 전장이 꾸준히 등장하며 모리 군의 주요 주둔지이다. 하지만 전국 바사라 시리즈에 나오는 전투가 다 그렇듯이 역사속의 이츠쿠시마 전투와는 별로 관계가 없고 대부분 이츠쿠시마에 있는 모리 모토나리를 치러 가는 것이 목적인 전투이다. 즉, 플레이어가 패배하지 않는 이상 이츠쿠시마 전투에서 모리가 승리하는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이츠쿠시마라는 장소의 컨셉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각 작품별 맵도 생긴게 거의 비슷하다. 전국 바사라의 모리 모토나리가 꽤 인기있는 캐릭터라서 그런지 실제 이츠쿠시마 신사에서도 전국 바사라 3편이 발매된 2010년 경에는 모리 모토나리가 프린트된 기념품들을 팔기도 했다.
모리 모토나리 맹세의 세 화살에서도 당연히 등장. 12장에서 벌어지며 시작하기 전에 애니메이션이 나오는 몇 안되는 전투중 하나인데, 이를 보기 위해선 모략을 성공해야 한다. 우선 에라 후사히데를 모략으로 주살한뒤 스에 군을 이츠쿠시마로 유인해야 된다. 그리고 무라카미 수군중을 포섭할때 "하루밤만 빌려달라"고 답해야 하며, 협상이 결렬되면 적의 수군에게 상당히 밀리는 모양세가 된다. 일단 교섭이 성공하면 애니메이션이 뜨지만, 정작 수군이 도착하지 않아 초조해하는 모리 모토나리와 아들들을 볼수 있다. 그러다가 무라카미 수군중이 도착하는 동시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모토나리가 전군에게 출진을 명령하며 전투 시작. 무라카미 수군중을 포섭한뒤 클리어하면 이후에 동료로 들어온다. 무라카미 수군 없이는 굉장히 힘든 전투로, 미야오 성을 지키면서 스에 하루카타의 대군을 상대해야 되는 점이 난점이다. 거기다가 모략이 실패해서[6] 이츠쿠시마를 스에 군이 무시하고 모리 군 본진으로 몰려가는 경우도 생긴다. 모략의 성공에 따라 전투의 시작이 완전히 바뀌는 경우이다.
드라마 모리 모토나리에서도 당연히 등장. 전투 자체는 41화에서 나오는데, 그 이전에 스에 하루카타에 맞서 모리 모토나리와 3부자가 싸우기로 결정하고 스에를 끝장낼 준비를 한다. 이후 41화에서 야습을 해서 승리.
5등분의 신부에서 우에스기 후타로가 나카노 자매에게 낸 쪽지시험 첫 문제가 이 전투의 패장 이름을 답하라는 것이다.
[1]
아마고의 신궁당 숙청도 모토나리의 책략에 의한 것이라는 말이 있지만, 최근의 조사에 따르면
아마고 하루히사가 권력 강화를 위해 독자적으로 한 일이라고 한다.
[2]
모토나리가 최초로 쌓은 것은 아니고, 원래 오우치 가문이 사용하던 성이 있었다고 한다.
[3]
모토나리도 성지를 더럽힌 것이 마음에 걸린 것인지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이츠쿠시마 신사 본전을 증축하였다. 이츠쿠시마 신사는 오늘날에도 남아 있으며, 바다 한가운데에 세워진
토리이가 있는 관광지이자 일본 신토의 성지로 유명하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되어 있다.
[4]
무라카미 미치야스(村上通康)라고도 하며 이 사람의 아들이 바로
구루시마 미치유키와
구루시마 미치후사이다. 그리고 두 사람 다
이순신에게 죽었다
[5]
모토하루는 공황에 빠지지 않은 일부 부대에게서 공격받아 하루카타의 추격을 하지 못하고 있다가, 결국 그 부대들을 격파하고 급히 달려왔다
[6]
이땐 스에 하루카타가 "모토나리의 모략도 바닥이 난 모양이군"이라며 비웃는 모습도 볼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