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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4 18:10:21

랑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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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랑의 주요 수상 및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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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첫 발표(2012년)때 헌액된 인물들이다.
☆는 두번째 발표(2013년)때 헌액된 인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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郎朗 | Lang Lang
파일:피아니스트 랑랑.jpg
출생 1982년 6월 14일 ([age(1982-06-14)]세)
중국 랴오닝성 선양시
국적
[[중국|]][[틀:국기|]][[틀:국기|]]
민족 만주족
신체 179cm
가족 아버지 랑궈런, 어머니 저우시우란
배우자 지나 앨리스
학력 커티스 음악원
직업 피아니스트
레이블 도이치 그라모폰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파일:시나 웨이보 아이콘.svg 파일:틱톡 아이콘.svg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2. 경력3. 연주 스타일4. 생애5. 비판
5.1. 곡에 따라 극과 극인 이상한 해석 센스5.2. 클래식계에서 전례가 없었을 정도의 과도한 쇼맨십
6. 음반7. 기타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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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스트의 파가니니에 의한 대 연습곡 3번 " 라 캄파넬라". 표정에서 여유가 느껴진다. 그리고 2분 39초쯤에 박수가 나온다[1]

중국 피아니스트. 2000년대 초반에 미국에서 혜성처럼 등장하여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고, 2000년대 중후반~2010년대 초반을 풍미했던 클래식계의 젊은 총아 중의 하나였으며, 현재 중견 음악가로서의 발돋움을 하고 있는 피아니스트.

2. 경력

3세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여, 5살 때 선양 콩쿠르에 나가 입상한 것이 그의 최초 경력. 이후 13세의 나이로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 (청소년 부문) 우승, 17세에 바르비에 뮤직 페스티벌에서 협연자 앙드레 와츠의 대타 자격으로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시카고 오케스트라 협연)을 연주하여 전 세계 클래식계의 폭발적인 주목을 받았다. 2010년에 첫 앨범의 녹음 작업을 수행하고, 2008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 2014 인천 아시안게임 개막식에서 피아노 연주를 선보였다.

3. 연주 스타일

주로 리스트 같은 낭만파 계열의 곡을 즐겨 연주하는 편이다. 그 대부분의 곡들이 스케일이 크고 화려하며 고난도의 테크닉을 요구하는 곡인데 그 또한 그에 걸맞게 굉장히 뛰어난 테크닉을 보유하고 있어서 많은 난곡들을 어려움 없이 소화해낸다. 그의 장기인 리스트 곡에서는 거의 미쳐 날뛴다고 해도 좋을 정도의 테크닉을 보여주는데 당장 위 영상의 라 캄파넬라[2]만 해도 어지간한 초보적 테크닉으론 대충 훑어보기조차 어려울 정도의 상당한 난곡이다. 이것을 초중반까지 여유로운 표정으로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얼핏 듣기에 쉽고 가벼운 곡으로 보이듯이 풀어낸다는건 정말 대단한 능력이다. 특히 위와 아래 영상에 나오는 저 '두 손 트릴[3]'은 랑랑의 트레이드 마크이기도 하다.


또한 필링을 잘 살린다고 평가할 수 있을 정도로 다이나믹(강약)의 음색 채도를 다양하게 구사한다는 것도 특징 중의 하나, 바로 위의 영상인 카네기 홀 실황 당시의 돈 주앙의 회상 환상곡에 나온 느린 구간을 들어본다면 피아노를 거의 쥐어짜낸다고 평가할 수 있을 정도로 음색이 매우 다양하다는 것을 눈여겨 볼 수 있다.[4] 페달 테크닉도 대단히 능수능란하고 풍부하게, 그러면서도 전혀 지저분하지 않게 페달을 사용하는 편이다. 이런 장점으로 느린 구간에서 빠르게 변하는 분위기일때의 이펙트를 굉장히 잘 살리는 편, 지구력도 굉장히 뛰어나서 체력 면에서 한번에 수 개의 대곡을 커버할 정도의 기량도 충분하다.[5] 마치 클래식 음악이라기 보단 락음악을 듣는 것처럼 감각적이고 동물적인 피아노 톤과 한편으론 느린 프레이즈를 능청스러울 정도로 우아하게 연주하는 점이 갭모에스러운 반전매력을 잘 살리면서 어우러지는데 중기 낭만계열, 특히 리스트의 피아노곡 음반은 이런 점 덕분에 대부분의 퀄리티와 평론 면에서 매우 호평을 듣는 편이다.

연주 스타일은 아니지만 연주 도중 표정이나 제스쳐가 거의 독보적일 정도로 풍부해서[6] 이 점에 대해서 얘깃거리가 많은 편인데 가끔씩 활동 초창기 때 연주영상들을 보면 이 인간이 지금 제정신으로 연주하나 싶을 정도의 안면기예로 매 연주마다 몸소 흑역사를 생산하신 때가 많다. 일단 본인의 입장에 따르면 '음악을 느끼는 순간의 감정을 온몸으로 표출하는 것으로 봐 달라' 정도의 얘기로 입장표명이 되는 편인데, 좋게 말해서 이런 점 이외에도 여러 연주나 음반 포스터를 보면 쇼맨십 또한 대단히 풍부한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래도 이제 30대 중반은 된 나이라서 그런지 예전만큼의 안면기예는 보기 힘든 편 은근히 이런거에 정들은 팬들은 랑무룩 하지만 단점이 되기도 하는 편인데 아래 비판 항목에서 후술.

사실 서정적인 곡도 연주를 한다면 잘 살려서 연주한다. G선상의 아리아 피아노 편곡중에서 흔히 연주되는게 랑랑버전이다. 예시

4. 생애

사실 여기까지 오는데에 상당히 비참한 생활을 해 왔다고 한다. 중국의 저출산 정책에 영향을 입어 외동아들로 태어나[7] 가족들의 온 지원을 한 몸에 입은 것까진 좋은데 4살쯤 때 부터 아들이 음악에 재능을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된 아버지가 모든 걸 바쳐서라도 아들을 세계적인 음악가로 키우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8]

랑랑과 아버지가 카네기 홀에서 함께 연주하는 영상[9]

Good Evening! This is my father. (clap) And this instrument is called 'èrhú(二胡)', (laugh) it's a Chinese Instrument they call 'chinese violin' which have two strings. And Now we're gonna play a piece called 'Competing Horses', since we have a Erhu and piano here, so I called 'Two horses competing'.
안녕하세요! 이 분은 저희 아버지십니다. (관객 박수) 그리고 저 악기는 '얼↘후↗'(관객 웃음)라고 하는데, ' 중국의 2현 짜리 바이올린'이라 보시면 될 것 같네요. 이제 저희가 '경마'[10]라는 곡을 연주할 건데요, 여기 얼후 피아노가 있으니, '2마리의 경주마'라고 하겠습니다.[11]

자서전을 보면 그 교육열의 집착적인 면모에 광기가 느껴질 정돈데, 초등학생 정도의 나이 때 부터 이미 하루에 약 8시간 연습을 강요당하고 아버지의 퇴근 후 조금이라도 노는 기색을 보였다면 매우 심한 꾸지람을 당했다고 한다. 자서전에 써 있기를, 한 번은 그의 어머니가 그를 불렀는데 퇴근한 뒤에 그 상황을 본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면박을 준 뒤 랑랑이 좋아하는 장난감을 애 앞에서 보란듯이 창가 밖으로 갖다 버리고 연습을 다시 시킨다.[12] 그러나 이건 후술할 만행에 비하면 약과 수준이다.

랑랑이 선양에서 어느 정도 두각을 나타낸 후, 베이징의 음악원에 보내려는 계획을 세운다. 원래 얼후 연주자였으나 모종의 이유로 경찰로 전환하게 된 아버지는 자신의 직장인 경찰마저 포기하고 베이징으로 건너가 말만 아파트지, 허름한 빌라나 다름없는 곳에서 부자끼리 생활하는 동안 방음도 안 되는 집에서 이젠 밤이고 새벽이고 가릴 것 없이 연습을 시켰다고 한다. 당연히 주민들의 원성이 엄청났다는데 이걸 모두 무시했다고 한다. 한 번은 경찰에게 신고까지 넘어왔다. 하지만 어찌저찌 넘어간 모양이다.[13][14]

그러나 베이징에서 레슨을 받아주던 음악선생[15]이 계속 랑랑을 평가절하 하다가 결국에는 내치자[16] 이 아버지는 거의 편집증 수준으로 랑랑을 더더욱 들볶았다고 한다. 그 정도가 절정에 달한 때의 묘사를 보면 상당히 공포스러울 정도인데 랑랑이 학교 합창부 반주의 일로 2시간 정도 집에 오는 시간이 늦어지자 완전히 이성을 잃은 채로 초등학생 나이밖에 안 되는 애를 붙잡고 베란다로 가서 뛰어내리느라니, 강한 항생제 알약병을 내밀며 30알을 전부 삼키라느니 둥의 온갖 폭언을 했다 한다. 이쯤 되면 PTSD에 시달리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 당시에 랑랑은 정신상태가 한계에 몰리자 주먹을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 벽에다가 찧으면서[17] 아버지를 원망했다고 하며, 겨우 정신을 차린 아버지와는 거의 1달동안 말을 제대로 섞지 않고, 물론 피아노도 전혀 치지 않았다고 한다.[18] 하지만 어쩌다가 말을 트게 된 과일상인이 보여 준 친절함[19]과 일련의 사건, 결정적으로 자신에게 처음 피아노를 가르쳐 준 선생님의 방문으로 다시 피아노를 시작하게 됐다고 한다.[20]

이후에 여러 음해들에 불구하고 베이징중앙음악원에 수석으로 입학한 뒤 중국 내의 국제콩쿠르에서는 5위로 쓴맛을 보지만, 랑랑에게 있어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된 독일 에틀링겐 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했으며[21] 이 후, 차이코프스키 국제 영재 콩쿠르에서 지도 교수들이 반대한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2번으로 1위를 차지하여 대내외의 관심을 받는다.[22]

당연히 이 우승 이후로 클래식계에서 국제적으로 엄청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만 새옹지마 격으로 음악원 내에서 적들도 상당히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자서전에 의하면 베토벤을 추천했던 레슨 교수는 쇼팽 협주곡이 자신이 추천한 곡이라며 언플을 털고, 그의 부인은[23] 자신의 제자와 랑랑이 같은 자리에 있을 때마다 노골적으로 랑랑에게 패널티를 주려 했다고 한다.

자신의 주장과 음악원 교수들과의 마찰이 잦은 것도 있고[24] 이런 분위기 때문인지 랑랑의 아버지는 미국의 커티스 음악원 음악과장인 게리 그래프먼에게 스카우트 제의가 오자, 랑랑을 데리고 바로 그쪽으로 갔다고. 당시 현역으로 뛰던 걸출한 피아니스트들이 입회한 입학 시험에서 합격한다. 커티스 음악원은 소수정예인 대신 등록금 전액 면제를 기본으로 까는데다가 무려 스타인웨이 피아노[25]가 딸린 숙소 1채를 무상으로 제공한다.[26]이 이외에도 안타까운 사연이 또 하나 있는데 랑랑은 이 동안 아버지 주도하의 고별 연주를 다닐 정도로 여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정신력이 약해지면 안된다라는 지론으로 떠나기 까지 어머니를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다고 한다.

이 후, 개리 그래프먼 밑에 수학하면서 그의 권유로 어떠한 콩쿠르에도 나가지 않으며 꾸준히 자신의 실력을 쌓았다고 한다. 영재 콩쿠르 이후로 콩쿠르 참가 경력이 없는건 이 때문[27] 그 동안 미국의 수많은 오케스트라에 대리 연주자 요청을 내고[28], 뛰어난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인 크리스토퍼 예센바흐의 지인 눈에 들게 되어 그에게 오디션을 받았다고 하는데 보통 몇십분 내에 끝날 오디션을 그의 연주에 푹 빠진 예센바흐의 요청으로 2시간이나 받게 되면서 매우 흡족한 평가를 들었다고 한다. 이후 대리 연주자로 어느 정도의 대기를 기다리다가 예센바흐가 지휘하는 바르비에 뮤직 페스티벌의 협연자 중 하나였던 앙드레 와츠가 급작스러운 고열로 연주를 패스해야되는 상황이 오자 대리 연주자 자격으로 대타를 맡으며 화려하게 데뷔 스타트를 끊었다고 한다.[29][30]

데뷔해서 재산을 얼마 모으자마자 콘서트 피아니스트라는 직업 특성 상 집에 오래 들르지 못하는데 왜 집을 사냐는 친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전까지 집 없이 거의 떠돌이 생활에 가까운 삶을 살았던 데에 대한 보상기재인지[31] 제일 먼저 한 일이 미국 필라델피아 다운타운에 집을 사는 것이었다고 한다. 상당히 씁쓸한 대목.

5. 비판

개인적인 견해 차가 있겠지만, 랑랑의 실력은 절대 비난받을 실력이 아니다. 일단 그의 테크닉이 비르투오소급이라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위의 라 캄파넬라를 포함한 많은 (특히 리스트의) 연주에서 누구에게도 뒤떨어지지 않는 섬세하고 가벼운 터치를 보여주는 것이 그의 연주이다. 그러나 뛰어난 테크닉과는 별개로 표현이 종종 미흡하거나 다소 과장되고, 정석과 거리가 먼 연주를 한다는 점에서 비판을 많이 받는다.

5.1. 곡에 따라 극과 극인 이상한 해석 센스

인기가 높은 만큼 안티도 상당한 편이다. 분명 실력 면에서는 누구도 부정하는 사람 없을 정도로 최상위를 달리지만, 해석 등에서 호불호가 상당히 갈리는 것은 둘째 치고 그의 활동 초중반기에는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치는게 너무나 많이 보였기 때문에 거품이 꺼지자마자 비평가들의 공격을 상당히 많이 받은 편이다.[32] 베토벤 같은 진중한 음악에서 평론가들 입장은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나의 베토벤은 이렇지 않아!". 국내의 경우, 1990년대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입상자 출신의 피아니스트 백혜선은 '너무 피아노를 갖고 노는 것처럼 친다' 며 '말초적인 감각에 집중하지 않는 진중한 연주가가 되길 바란다'라며 그의 연주에 대한 비평을 하기도 했다. 물론 바흐 음악은 말 할 것도 없다.

그리고 까방권 수준으로 실드를 받던 낭만 음악에서도 호불호가 상당히 갈리는 편이다. 특정 작곡가의 작품에 발견할 수 있는 특유의 악상을 무시하는 행위[33] 등으로 유튜브 등지에서도 잘 보면 골수 클래식 팬들에게 상당히 까인다. 그렇다고 재해석이 각광을 받느냐면 그것도 글쎄올시다 수준의 애매하거나 팬들조차 이해하기 힘든 해석 센스를 보일 때도 종종 있어서. 대표적으로 쇼팽 발라드 1번 같은경우는 상당히 호불호가 갈리는 이상한 해석을 보여준다. 이런 성향은 발라드 3번에서도 잘 드러나는데, 이 부분은 한 번 직접 들어보길 https://youtu.be/6-_NnU5tkEs. 발라드 2번과 4번 같은 경우, 앞에서 말한 두 개보다는 덜하다. 특히 4번의 코다는 두고두고 인정받을 수준의 명연주.

대표적인 쇼팽 발라드 1번을 듣고 평가해보자. 헝가리의 피아니스트 율리안 본 카롤리의 옛날 레코딩에서 이와 비슷한 코다를 들을 수 있다.

5.2. 클래식계에서 전례가 없었을 정도의 과도한 쇼맨십

그리고 그보다 더 까이는 행위는... 상기했듯이, 클래식에서 현대음악사조 시대 이후에 전례가 없었을 정도의 과도한 쇼맨쉽에 상당히 공격을 많이 받은 편이다.[34] 어떻게 보면 양날의 검이라고 할 수 있는게 랑랑이 젊은 층에게 가장 많이 각광을 받는 피아니스트일 수 있는 이유이자, 랑랑이 까이는 알파와 오메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나

파일:external/senior.chosun.com/2012040665025_0.jpg

대충 이런 거라든가

타임에서 "클래식에서 '엄숙함'이라는 껍질을 걷어낸 혁명가"라는 평가를 받았듯이 그의 공연 또한 타 클래식 공연과 다르게 엄청나게 비범하다. 사실 이 바닥에서는 공연장에 연미복이나 양복만 안 입고, 혹은 제대로 안 입고 나와도 이단아 취급 받는 와중에 저정도면 거의 컬쳐쇼크 수준.[35]

'왜 클래식 공연은 브리트니 스피어스처럼 하면 안되는가요?'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그의 해석만큼이나 상당히 자유분방한 공연을 자랑하고 또 그런 점 때문에 국내에선 보수적인 클래식계 인사들에 의해 비판을 참 많이 받았던 피아니스트이다. 한 국내 원로 연주자는 '연주가 서커스 같고 기본을 안지키는 형편없는 연주'라고 혹평하며 연주를 다 듣지도 않고 연주장을 나갔다는 에피소드가 있을 정도, 이런 점 때문에 클래식계 내의 보수적 인사들 입장에서 클래식계가 점점 아이돌주의에 물들어갈 우려가 있다는 비판이 속출한다.

6. 음반

7. 기타


(아내 지나 앨리스와의 연탄곡 연주. 곡명은 브람스 헝가리 무곡 5번)
2022년 2월 23일, 예술의전당 내한 공연에 아내 지나 앨리스도 참석했다. 연주 후 청중들의 커튼콜 박수, 앙코르 연주(브람스의 헝가리 무곡 5번 등)에도 부부가 함께 하여 눈길을 끌었다.* 중국의 또다른 스타 피아니스트 윤디 리와는 동갑이라 같이 언급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윤디 리가 2022년 성매매로 체포 구속되면서 나락으로 떨어진뒤 볼드모트 취급을 받으며 이제는 언급되지 않는다.* 쿵푸팬더 3의 음악 부분에 참여했다.* 중국인이지만 한족이 아닌 만주족 출신이다. 중국의 만주족은 청나라 시절 귀족이었기에 현대에도 교육 수준이 상당히 높은 축에 든다고 한다.* 피아노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꽤 재미있다. 2살때 본 만화 영화를 보고 피아노에 눈을 떴다는데, 다름아닌 톰과 제리였다고 한다. # 정확히 말하면 톰과 제리 중에서 Cat Concerto 라는 에피소드를 본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36]* VOCALOID 뤄톈이와 함께 콘서트를 한 적이 있었으며, 이 소식이 한국의 KBS 뉴스에도 보도되었다. * 2022년 11월 23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한•중 수교 30주년 기념 공연으로 9개월 만에 또 다시 한국을 찾았다. 이 공연은 무려 피아니스트 선우예권과 함께하는 공연이었으며, 주최사가 문화체육관광부였던지라 전 좌석이 1만원에 오픈되었고,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전석 매진되었다. 랑랑은 2부에 등장하여 쇼팽, 바흐, 리스트, 드뷔시, 중국 전통 민요 등을 연주했다. 앙코르 곡으로 선우예권과 함께 브람스의 자장가, 헝가리 무곡 5번을 연주했다.[37]

8. 관련 문서



[1] 사실 연주자가 연주를 치는 도중, 심지어 악장을 넘어가는 과정에서 연주자가 아무리 뜸을 들여도 절대 박수를 치지 않는 것이 정석이다. 하지만 각 악장의 연주가 너무 뛰어나거나 위 영상처럼 연주자가 대놓고 악보에 없는 부분을 넣어가면서 기교를 자랑할 경우에는 박수를 치기도 한다. 이 경우는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경우인데, 연주자가 자신의 편곡을 악보대로 치고 있는데 '원곡을 연주하는 줄 안' 사람들이 위처럼 기교를 자랑한다고 생각해서 박수를 치기도 했다. (사실 앞부분이 원곡과 같아서 착각할 만하다.) 근데 이것도 눈치봐서 잘 쳐야지 자기 혼자 치면 갑분싸가 되니 그냥 남들 칠 때 같이 따라 치면 된다. [2] 엄밀히 말해 이건 별칭이고 정확한 명칭은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대 연습곡-3번이다. [3] 헝가리 광시곡 2번 라싼 부분 중간의 '트릴같지 않게 표기된 트릴'이 바로 그것. [4] 맨 위의 라캄파넬라 영상에서는 거의 귀를 농락하는 수준의 솜털같은 피아니시모를 구사하는 대단한 터치를 옅볼 수 있다 [5] 지금이야 훨씬 더 많겠지만 그의 자서전에 쓰인 대뷔 초창기인 17살에는 예센바흐에게 밝힌 연주곡 레퍼토리 중 협주곡만 30개에 그 중 10여곡은 당장 연주할 수 있다고 밝혔단다(...) [6] 베토벤 운명 교향곡 처음 부분을 칠 때는 과장 조금 보태서 피아노 의자가 저 멀리까지 가 있다(...) [7] 랑랑은 중국의 소수민족인 만주족이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중국의 과거 한자녀 정책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웠다. 다만 랑랑이 태어난 1982년은 2010년대 이후와 달리 만주족이 자신들이 만주족이라는 사실을 필사적으로 숨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아마 한족들 속에서 한족인 척 연기하며 살아가는 차원에서 한족처럼 자녀를 1명만 낳게 된 듯하다. 여기에 만주족이 많이 사는 중국 동북 지역( 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이 중국 내에서 대표적인 저출산 지역인 점도 더해졌는지 현재까지도 만주족 중에는 외동아들, 외동딸이 많은 편이다. [8] 이 아버지 랑궈런 또한 중국 악기인 얼후 등에 재능이 있어서 음악가가 되고 싶었지만 금전적 문제 등의 여러 요인으로 포기한 전적이 있는 경찰이었다는데, 후술할 랑랑에 대한 집착적일 정도의 교육열을 보면 보상심리로 해석될 정도이다. [9] 위에 서술되어 있는 중국 악기 얼후를 아버지가 연주한다. [10] 원제는 '사이마(赛马)'. [11] 영상을 보면 아버지 또한 음악에 큰 재능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섬세한 셈여림은 물론이고, 후반부에서도 매우 뛰어난 기교를 보여준다. 거기다 한술 더 떠서 마지막엔 현악기로 소리를 재현까지 하신다(...) 외국인들 코멘터리는 대부분 '중국의 파가니니'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비르투오소라니' 등의 반응. [12] 때문인지 자서전에 실린 사진을 보면 식사 시간에서 장난감 헬리콥터를 만지작거리는 랑랑의 사진이 실려 있는 걸 볼 수 있다. [13] 이에 대해서 아래의 사례와 별개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랑랑이 새벽부터 연습하는 게 거의 일반화 되었던 시기에 랑랑이 애틀랜타 콩쿠르을 나갔던 그날 아침, 아파트의 주민들은 거의 대부분은 직장에 지각을 했다는데 그 이유가 대단하다. 랑랑이 새벽에 피아노 연습을 하는 소리를 듣지 못해서 대부분의 주민들이 잠을 깰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14] 여담으로 상하이에서 생활할 동안은 랑랑의 아버지가 어머니 대신 요리를 했다는데, 맛이 하나같이 모두 이상해서 오죽하면 랑랑이 먹다 토할 정도였다고 한다. 랑랑의 어머니가 해준 음식은 상당히 괜찮았기 때문에 더더욱 비교를 당했다고 하며, 얼마나 트라우마였으면 프로필에서는 좋아하는 것에 '어머니의 요리'라고 적혀 있을 정도. [15] 베이징 음악학원의 교수였다고 한다. 참고로 예나 지금이나 음악계에선 어느 정도 당연하게 여겨지는 사실이긴 하지만, 음악원이나 음대의 경우에는 원하는 상위권 학교에 입학하려면 필수적인 사항은 아니지만, 입학을 수월하게 하려면 해당 대학의 교수, 적어도 강사에게는 레슨을 받아야 한다는 통념이 있다. 특수 대학교나 국립 대학교의 경우에는 당연히 불법이고 이외의 대학들도 물론 입시시험에 부정이 개입할 수 있기 때문에 과거에는 대다수의 대학이 입시 시에 평가교수와 응시자들 사이에 천막으로 가리게 했다 한다. [16] 자서전에서는 선양에서 같이 상경한 경쟁자들의 학부모와 선생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을 거라고 추정하는데, 자서전의 말을 전부 신용하자면 아예 가능성이 없는 게 아닌 것이 랑랑이 음악원 내에서 1등을 하자 담당 교수가 그 교수에게 랑랑에 대해 여쭤보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그 아이의 재능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국내 언론에서는 단지 저평가 받았다는 식으로 기술되어 있는 편이 많지만 아래 링크된 기사 중에 '너무 감정적이고 나이에 맞지 않게 연주한다.'라고 명확히 지적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어서 사실파악에 혼선을 빚는다. 진실은 저 너머에. [17] 자서전 회상에 의하면 랑랑은 당시에 손을 불구로 만들 각오로 자해를 했다고 한다. [18] 이 때동안 랑랑의 아버지는 랑랑이 간간이 피아노 치기를 종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연히 자신이 한 것도 어느 정도 있는 만큼 무리하게 권유하지는 못했고, 랑랑은 그 때마다 차갑게 응대했기 때문에 결국 이 기간동안은 제대로 화해하거나 다시 피아노를 치는 일 같은 게 없었다. [19] 랑랑이 수박을 사려고 했을 때 다른 사람들과 남다르게 수박을 두드리는 폼에 인연을 텄다고 한다. 이 일화는 EBS 2015년도 영어 인터넷 수능 교재에서 장문 문제 지문으로 소개됐었다. [20] 여기서 파생된 일련의 사건은 상당히 재밌는 사례인데, 랑랑이 한밤중과 새벽에 하던 연주를 가장 비난하던 한 사람이 돌연 불쑥 찾아와 "어째서 연주를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자신을 소개하는 말이 "나는 신경증 환자라 매일 연주를 들으면 증상이 악화되는 줄로만 알았는데, 랑랑이 연주를 하지 않게 된 이후로 신경증세가 더 심해졌으니 연주를 들려줬으면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왜 연주를 하지 않냐"는 질문에 랑랑의 아버지가 대답하길 "그 대답은 랑랑이 할 거다"라고 했다. [21] 당시에 이미 중국 내에서도 2명 정도의 우승후보가 꼽혀져 있었다고 한다 [22] 여담으로 이때 사진을 보면 랑랑은 연미복을 입지 못하고 반팔로 연주하고 있다. 심지어 다른 참가자들은 다 하던 오케스트라 연습을 엄청난 고비용 때문에 한 번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결선에 임했다고 하는데 이럼에도 불구하고 우승했으니 대단하다. [23] 음악원에서의 교직원 서열이 남편보다 훨씬 높았다고 한다. [24] 주로 아들이 앞으로 연주할 곡목에 대해서 의견 차로 계속 다투었다고 한다. [25] 쓸만한 업라이트 피아노부터가 일반 그랜드 수준인 천만원대에서 시작하고, 그랜드 피아노가 최소 억대는 호가하는 브랜드다. [26] 이 때 오디션용으로 선곡한 곡에 대한 랑랑의 평가 역시 대단한데 쇼팽 연습곡 op.10의 2번을 무려 즐겨 치는 곡이라고. 참고로 이 곡은 쇼팽 연습곡의 그 어렵다기로 말 많은 op.10의 4번 추격의 난이도와 동급, 혹은 그 이상을 자랑하는 곡이다. [27] 이 시기의 자서전 대목을 읽어보면, 그래도 그 동안 경쟁을 할 수 있으며 명성을 쌓기 쉬웠던 대회에 참가하는 게 익숙한 아버지가 참지 못하고 랑랑에게 권유하자 랑랑이 콩쿠르 대회목록을 찾아보는데 이 목록 중에 리즈 콩쿠르도 끼어있다. 당시 리즈 콩쿠르에는 한국의 김선욱 씨가 우승하면서 김선욱 씨는 2006년 아시아인 최초로 리즈 콩쿠르에서 우승한 피아니스트로서 명망을 떨쳤는데 가능성이야 매우 낮았겠지만 만약 이 시기때 랑랑이 리즈 콩쿠르에 나갔더라면 리즈 콩쿠르의 첫 아시아인 우승자가 랑랑으로 나왔을 수도 있다. [28] 대게 순위권이 4등까지는 들었다고 한다 [29] 이 후, 랑랑이 건초염으로 추정되는 손 질환에 걸렸을 때 그 자신은 최소 중견 피아니스트임에도 불구하고 신인 피아니스트인 랑랑을 위해 대타로 뛰어주며 우정을 과시했다고 한다. [30] 앙드레 와츠는 랑랑이 자서전에서 자신의 음악적 스승이라고 했을 정도로 그의 음악적 가치관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연주자 였다고 한다. 잘 살펴보면 연주 스타일부터 백인위주로 돌아가던 음악장르에 유색인종으로서 일약 스타덤에 오른 점이라든가 둘이 닮은 점이 의외로 많다. [31] 자서전에 직접 언급된다. [32] 심한 경우는 예센바흐까지 싸잡아서 미친 피아니스트를 지원해줬다고 도가 지나칠 정도로 깠던 평론가에 대해 예센바흐가 공개적 사과를 요구했을 정도, 이 경우는 어투가 너무 직설적이어서 노이즈 마케팅을 노린게 아니냐는 역비판까지 나온다. [33]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쇼팽의 경우, 작품 대부분이 우아하고 시적인 서정성을 얼마나 잘 살리는지에 대해 평가받는다. [34] 미국의 피아니스트 리버라치도 과도한 쇼맨쉽으로 클래식종사자들에게 엄청까였다. 그래서 장르를 클래식에서 팝 재즈등으로 바꿨다. [35] 물론 나이젤 케네디나 이반 포코펠리치, 막심 므라비차 같은 이단적인 스타일의 연주자이면서 태클이 별로 들어오지 않는 연주자도 있다지만, 이들과 랑랑의 성공이 스케일부터 다른 데다가 랑랑은 연주스타일 마저 상당히 자기중심적인 만큼 더욱 논란이 크다고 볼 수 있다. [36] 제리가 연미복을 입고 좌우로 감사 인사를 하는 짤이 나온 그 에피소드다. [37] 헝가리 무곡 5번은 이전 내한 공연에서 아내 지나 앨리스와 함께 연주했던 곡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