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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01 22:25:23

장피에르 랑팔

그라모폰 명예의 전당 헌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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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bgcolor=#FFF,#1f2023>파일:D8FE539D-CCB2-44DA-9D5B-B6EEC0E8759F.png 그라모폰 명예의 전당은 예술적 탁월함, 혁신, 혹은 상상력을 통해 클래식 음악 녹음에 기여한 예술가들을 기리기 위해 만들었다.
★는 첫 발표(2012년)때 헌액된 인물들이다.
☆는 두번째 발표(2013년)때 헌액된 인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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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피에르 랑팔
Jean-Pierre Rampal
파일:24601343641_e53784653b_b.jpg
본명 장피에르 루이 랑팔
Jean-Pierre Louis Rampal
출생 1922년 1월 7일
프랑스 마르세유
사망 2000년 5월 20일 (향년 78세)
프랑스 파리
직업 플루티스트, 지휘자
활동 1940년대 ~ 2000년

1. 개요2. 생애
2.1. 어린시절2.2. 1950년대 이후
3. 제임스 골웨이와의 관계

[clearfix]

1. 개요

프랑스 출신의 세계적인 플루티스트이자 지휘자.

1922년 프랑스의 마르세이유에서 출생했다.

2. 생애

2.1. 어린시절

아버지인 조셉 랑팔은(Joseph Rampal, 1898~1983)저명한 플루티스트로써 훗날 또다른 세계적인 플루티스트 막상스 로리에(Maxence  Larrieu, 1934~)의 스승이기도 했는데 아직까지 그의 아버지는 랑팔을 플룻주자로 키우려 하지는 않았다.

13세때 아버지에게 플루트를 배웠으나 흥미를 가지지는 못하고, 화가를 지향하기도 했으나 결국 의과대학에 들어갔다.

이후 1943년에 대학교 3학년 당시 독일군[1]에 징집 되었다가 군의 배려로 프랑스 음악원에 입학 하고 5개월 만에 수석으로 졸업하였다.[2]

이 때 랑팔에게 플루트를 가르친 사람이 마르셀 모이즈(Marcel Moyse, 1889~1984)와 가스통 크루넬(Gaston Crunelle, 1898~1990) 교수[3]인데 이 둘은 당시 플루트 교육자 중에서는 최고로 꼽히는 인물들이었다.[4] 그렇게 졸업 이후 랑팔은 1946년에는 순회공연을 돌았고 1947년에는 제네바 콩쿠르에서 우승해 명성을 얻게 됐다.[5][6]

2.2. 1950년대 이후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여러 오케스트라를 거쳤는데, 1956년에 베를린 필에 들어 갈 것이라는 다른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파리 오페라 극장의 수석 플루트 주자로 취임했다.[7]

1958년에 들어서면 같은 프랑스 출신인 모리스 앙드레, 막상스 로리에 등과 교류하였고 이때는 주로 장-프랑수아 파이야르와 협연을 자주하였으며 후에는 독일 출신의 지휘자이자 실내악의 대가인 칼 뮌휭거를 만나 많은 곡을 남기게 된다.

1960년대에는 미국으로도 활동무대를 넓혔는데 미국의 텔레캐스트나 카네기 홀에서도 공연을 가졌다.

그가 점차 유명세를 이어나가기 시작하자, 이후 그를 세간에서는 황금 플루트의 사나이라고 불렀다. 실제로 그는 두 개의 금색 플루트를 사용했다고 한다. 사실 그의 플루트 연주는 정석과는 상당히 벗어난 것인데, 파리 음악원에서 5개월 만에 졸업을 했기 때문에 영향을 덜 받은 것이 그 원인이었다.
Irlandaise
Baroque and Blue
1974년에는 프랑스의 재즈피아니스트인 클로드 볼링과 여러 재즈풍의 플룻곡을 크로스오버하여 출시했는데, '바로크 앤 블루(Baroque and Blue)'와 '아일랜드의 여인(Irlandaise)' 등이 수록된 음반인 < Suite for Flute and Jazz Piano>의 경우 빌보드 차트에 530주간 40위를 유지하는 업적을 세웠다.[8][9]

지휘자로도 활동하여서 프랑스 국립 오케스트라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오케스트라, 몬트리올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객원 지휘자로도 활동했다.

1987년에는 프랑스 당국과 파리시의 주도로 그의 이름을 딴 국제 콩쿠르가 개최되었다.

하지만 그는 은퇴시기에 가까워지면서 시력에 문제가 생겨 안경을 끼고 연주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럼에도 그는 죽는 순간까지 계속 플루트를 연주하였고 결국 그는 2000년 5월 20일 프랑스 파리에서 사망하게 된다.

그가 평생 남긴 음반은 바흐와 헨델부터 드뷔시나 하차투라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레퍼토리로써 300여장에 달했다. 주로 ERATO라는 레이블을 통해 음반을 발매했는데 이 레이블은 거의 랑팔의 리마스터 제품을 내 놓고는 한다.

3. 제임스 골웨이와의 관계

저는 그의 아름다운 플루트 소리에 사로 잡힌 10대 시절을 회상 하고는 합니다. 당시 1960년대에는 젊은 플루티스트들에게 랑팔의 녹음을 듣는 것이 플루트 연주에 관한 한 스타들에게 한 걸음이되었었죠. 한번은 랑팔 선생님이 파리에서 열린 회의에서 저를 관대히 격려해 주시면서 칭찬하시던 때가 생각납니다. 그 때가 플루트의 영웅에게 인정받은 순간이었습니다. 그 분은 제 인생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쳤으며 여전히 선생님께서 해준 모든 일에 대해 여전히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랑팔 선생님은 플루트 세계와 음악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 분의 음악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일상 생활을 향상시키는 매력을 선사합니다.
제임스 골웨이가 자신을 격려하던 장-피에르 랑팔을 추억하며

국내외에서는 제임스 골웨이와 함께 가장 위대한 플루티스트였다 보니 서로 비교대상이 된다.

국내의 클래식 애호가들은 카라얀의 영향을 받아 제임스 골웨이를 높게 평가하나[10] 랑팔에 대한 인지도가 낮은 것을 감안해야한다. 다만 국내외의 플루트 연주자들이나 음악가들은 대체로 랑팔을 더 높게 평하고 있다.[11]

사실. 실제로는 좀 다르다. 제임스 골웨이는 랑팔을 상당히 존경했고 랑팔에게 파리음악원에서 플루트 지도를 받은적도 있다.[12] 랑팔이 직접적으로 골웨이에 대해 언급한 적은 없지만 주변의 증언을 들어보면 골웨이는 랑팔이 상당히 인정하고 아꼇던 제자였다고 한다.

일단 랑팔과 골웨이는 플루트의 아버지라고 불릴만 한 마르셀 모이즈(Marcel Moyse)의 제자이다. 골웨이는 앞선 인터뷰에서 자신의 10대 때 랑팔의 아름다운 플루트 소리에 매료되었다고 하면서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플루티스트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랑팔은 모이즈에게 플루트를 배우던 파리 음악원 시작 시점부터 그에게 배운 사람이며, 골웨이는 1970년대에 이미 어느정도 유명세를 가진 상태에서 조금 더 공부하고자 모이즈에게 사사한 경우라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즉, 국내외의 라이벌 관계인식과는 달리 골웨이는 랑팔을 상당히 존경하고 스승 내지 정신적 지주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참고로 랑팔은 골웨이 뿐 아니라 현재 베를린 필의 수석 플루트 주자인 엠마누엘 파후드도 지도했다.

총 정리를 해보면 랑팔과 골웨이의 지지자들은 서로를 라이벌로 인식하고 있지만[13] 스승과 제자의 사이를 라이벌로 보기에는 크게 무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1] 당시는 프랑스가 독일군의 점령에 있었다. [2] 음악원은 대학과 같은 경우라서 5개월 만에 졸업이 어렵다. 아마 당시 시대가 전쟁 중이라서 일찍 졸업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랑팔이 너무 뛰어나서 가르칠게 없기 때문에 졸업을 시켜 줬을 수도 있다. [3] 랑팔의 제자인 가스통 그뤼에르와는 다른 인물이다. [4] 특히 마르셀 모이즈는 랑팔 이전의 최고의 플루티스트였고 플루티스트 활동을 접은 후에는 랑팔 이외에도 오렐 니콜레, 미셸 드보스트, 윌리엄 베넷, 제임스 골웨이의 스승이었다. [5] 아버지가 자신과 같은 악기를 해 왔고 프랑스 음악원 졸업 뒤 제네바 콩쿠르에서 1등으로 입상한 것은 트럼페터 모리스 앙드레와 비슷하다. 참고로 아버지의 제자였던 막상스 로리에는 제네바 국제 콩쿠르에서 2위를 수상했다. [6] 골웨이와 비교해보면 당장 랑팔은 제네바 국제 콩쿠르에서 1위로 수상했지만 골웨이는 아일랜드 챔피언쉽의 우승자이다. 두 콩쿠르의 체급차이가 어느 정도인지는 상상도 할 수 없다. [7] 당시에는 파리 음악원을 나와 세계 대회에서 입상하고 베를린 필이나 빈 필로 가는것이 플루티스트들에게는 엘리트 코스였다. 그럼에도 랑팔이 베를린 필 행이나 빈필 행을 거절 한 것으로, 랑팔이 베를린 필로 갔다면 카라얀과의 협연을 볼 수 있었겠지만 카라얀의 그늘에 가려서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더불어 이미 베를린 필에는 세계적 플루티스트인 오렐 니콜레가 있었다. 랑팔이 입단한 가능성은 낮았던 셈. [8] 들으면 누구나 아! 이거 하는 곡이다. 바로크 앤 블루나 아일랜드의 여인은 주로 카페에서나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에서 틀어주면서 플루리스트들이 공연 때 자주 연주하거나 연습하는 곡이기도 하다. [9] 수도권 전철 서해선에서 개통 이후 출발 BGM으로 아일랜드의 여인을 사용하다가, 2023년 6월 17일에 한국철도공사 로고송으로 변경되었다. [10] 한국은 카라얀을 매우 좋아하는 애호가들이 많기 때문에 그 영향으로 인해 베를린 필의 플룻 수석이던 제임스 골웨이를 크게 평가한다. 랑팔이 베를린 필에 입단했다면 국내의 평가도 달라졌을 것이다. [11] 전체적으로 논하자면 골웨이는 세계무대를 곳곳 누비며 기교에 중점을 둔 방면 랑팔은 업적을 많이 세우고 보다 자연스러운 연주를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많은 플루티스트들에게 세계 최고의 플루티스트가 누구였냐고 물으면 모두 랑팔을 지목하면 지목했지 골웨이를 꼽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12] 랑팔이 골웨이보다 17살이나 많으니 그렇게 이상 한 일도 아니다. [13] 한 사이트에서 랑팔과 골웨이를 비교하면 누가 더 나은 것 같냐는 질문을 던진 한 사람에게 또 다른 네티즌은 이미 랑팔이 전설적 위치로써 기반을 완전히 다져 놓았을 때 뒤늦게 들어온 게 골웨이인데 둘을 비교하는 것이 공정하지 않다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둘의 전성기 시절도 차이가 나는데다가 싸움 자체에 의미가 없다는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