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모폰 명예의 전당 헌액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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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모폰 명예의 전당은 예술적 탁월함, 혁신, 혹은 상상력을 통해 클래식 음악 녹음에 기여한 예술가들을 기리기 위해 만들었다. ★는 첫 발표(2012년)때 헌액된 인물들이다. ☆는 두번째 발표(2013년)때 헌액된 인물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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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다비트 표도로비치 오이스트라흐 David Fyodorovich Oistrakh Дави́д Фёдорович О́йстрах |
출생 | 1908년 9월 30일 |
러시아 제국 오데사 | |
사망 | 1974년 10월 24일 (향년 66세) |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 |
국적 |
[[러시아 제국| ]][[틀:국기| ]][[틀:국기| ]] → [[소련|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바이올리니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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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가 죽음으로써 세계는 훨씬 더 지리한 곳이 되고 말았다. 그는 진정 보석같은 인간이었다."
- 아이작 스턴 -
- 아이작 스턴 -
"그가 연주할 때는 세상이 더욱 아름답게 빛났다."
- 쿠르트 잔데를링 -
- 쿠르트 잔데를링 -
소련의 바이올리니스트. 야샤 하이페츠와 함께 한 시대를 풍미한 20세기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로 손꼽힌다.
2. 생애
당시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던 우크라이나 오데사에서 태어났다.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 나탄 밀스타인[1]을 길러낸 표트르 스톨리아르스키에게서 처음으로 바이올린을 배웠다. 당시 러시아는 거의 레오폴드 아우어[2] 악파가 독점하다시피 했던 때로, 그 스타일은 상당히 절제적이고 통제적이었다. 그에 비해 스톨리아르스키의 스타일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다고 한다.
그 뒤 아주 어린 나이인 1914년 데뷔한 후, 이후 1923년부터 1926년까지 오데사 콘서바토리에서 바이올린을 공부하였다. 1927년 그의 음악에 매료된 작곡가 글라주노프에 의해 키예프에서 그의 바이올린협주곡을 협연함으로써 음악계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그 후 1934년부터 모스크바 콘서바토리에 강사자리를 얻게 되었고, 1935년에 소비에트연방콩쿠르에서 우승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비에니아프스키 콩쿨에서 2위를 차지했다. 이 때 참가자의 라인업이 대단한데, 다비드 오이스트라흐를 포함하여 콩쿠르 1위를 차지한 16세의 프랑스 소녀 지네트 느뵈[3], 특별상을 탄 7세의 이다 헨델도 있었다.
이후 이자이 콩쿨에서 우승을 거머쥐며, 단숨에 소련의 대표적인 바이올리니스트로 등극하게 된다.
그러나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오이스트라흐는 당의 지시로 공장과 병원에서 연주를 펼쳤다. 한편으로는 배급이 끊긴 레닌그라드 대공방전의 와중에 레닌그라드에 남아 항쟁 의지를 북돋우는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그는 1942년 스탈린상을 받으며 '인민예술가'의 칭호를 받음과 동시에 먀스콥스키와 하차투리안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헌정받았고, 프로코피예프의 바이올린 소나타 2번을 초연하기도 했다.[4]
그는 쇼스타코비치와 돈독한 관계를 맺기도 했다. 쇼스타코비치의 두 개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바이올린 소나타 또한 그에게 헌정되었으며, 오이스트라흐는 성공적으로 이를 초연하였다.
후에 지휘자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고결한 인품으로 명성이 높은 스승이자[5] 칭찬을 아끼지 않는 공정한 심사위원이었다. 아들 이고르 오이스트라흐와 더불어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가 그의 대표적인 제자로 꼽히며, 커리어와 함께 교육에도 크게 성공한 바이올리니스트라는 평을 듣는다.
1974년 암스테르담 연주여행 중에 사망하였고, 시신은 모스크바로 보내져 그곳에 묻혔다.
3. 연주 스타일과 평가
오이스트라흐는 같은 시대를 풍미하였던 야샤 하이페츠와 함께 20세기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자리를 양분하고 있다. 그의 연주는 화려하고 정확한 스케일을 바탕으로, 때로는 단호하고 매정하면서도 때로는 따뜻하고 구슬픈 다채롭고 서정적인 구성을 보여준다. 대체로 하이페츠에 비해 인간적이고 따뜻하다는 평.
Leclair violin sonata no.3을 들어보자.
브람스 협주곡:
Brahms violin concerto 3rd mvt - David Oistrakh
하이페츠와 비교
Brahms violin concerto 3rd mvt - Jascha Heifetz
이작 펄만
Brahms violin concerto 3rd mvt - Itzhak Perlman
탬포를 다루는 능력이 탁월했다. 하이페츠가 기교를 적절히 과시하면서 곡 전체를 함축적으로 몰아치는 스타일이라면 오이스트라흐는 완급 조절이 매우 뛰어난 편이었다. 야구 선수로 비유하자면 하이페츠는 어마어마한 스터프의 포심으로 상대를 윽박지르는 아롤디스 채프먼 같은 스타일이었고, 오이스트라흐는 포심의 구위도 정상급이지만 완급 조절에도 능한 킹 펠릭스 같은 스타일.
소리에서도 하이페츠는 엄정하고 차가운 느낌이었다면 오이스트라흐는 서정적이고 따뜻한 느낌이다. 그의 레코딩 중에 대중에게 가장 유명한 것이 바흐의 2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인데, 오이스트라흐의 서정성과 따뜻한 음색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또한 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와 녹음한 프랑크 바이올린 소나타도 명연이다.[6] 다만 위에 사진으로 나온 오이스트라흐 에디션 세트음반을 최후로 재출반이 안되고 있어 아쉬울 뿐.
4. 여담
- 아들 이고르 오이스트라흐 또한 훌륭한 바이올리니스트로 성장했다. 참고로 손자인 발레리까지 3세대가 한무대에서 바이올린을 켠 적이 있다고 한다. 타고난 음악가 집안인 셈. 이고르는 아버지와 달리 장수해서 최근인 2021년에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아들 이고르 오이스트라흐와 펴낸 이중주 음반이 꽤 있다. 명연가인 부자의 두 바이올린이 잘 어우러져 들을 만하다.
5. 관련항목
- 바이올리니스트
- 야샤 하이페츠 - 오이스트라흐와 함께 20세기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로 손꼽히는 인물.
- 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 - 같이 연주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므스티슬라브 로스트로포비치, 스비아토슬라프 리흐테르,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를린필과 합주하기도 했다. 당시 EMI, 현재 워너 클래식 레이블로 음반을 구할 수 있다.[7]
- 기돈 크레머 - 오이스트라흐의 대표적인 제자.
[1]
오이스트라흐보다 훨씬 절제적인 바이올리니스트였다. 그 당시 대작곡가
글라주노프가 지휘하는 그의 협주곡에서(나단 밀스타인의 정식 데뷔 무대였다)어린 밀스타인은 이 작품을 자신의 생각대로 해석을 하여 연주했는데, 글라주노프는 이에 대해 의아해하며 자신의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느냐고 불만을 제기했다. 리허설이 끝나고 글라주노프는 밀스타인의 해석이 괜찮다는 것을 인정하는 어조로 그러한 접근 방법에 대해 인정하였다고 한다.
[2]
하이페츠의 스승이기도 하다.
[3]
느뵈의 연주가 대단한 나머지 소련의 심사위원도 그녀에게 점수를 더 줬다고 한다. 느뵈는 아쉽게도 젊은 나이에 비행기 사고로 요절하였다.
[4]
원곡은 플루트 소나타로, 오이스트라흐가 편곡을 제의하여 프로코피예프가 바이올린 소나타로 만들었다.
[5]
제자에게 '그 분(다비드 오이스트라흐)은 저를 아들처럼 대해주셨다.'라는 말을 들었다.
[6]
리흐테르는
로스트로포비치에 대해서는 이기적인 면모를 들며 사이가 멀어졌다고 하나, 오이스트라흐에 대해서는 연주 솜씨와 인간성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다만 상술한 프랑크 바이올린 소나타에 대해서는 견해가 달랐다고 하는데, 이 작품을 불후의 명작으로 여긴 리흐테르와 달리 오이스트라흐는 다소 가볍게 여겼다고 한다.
[7]
다만 리흐테르는 이를 '카라얀과 로스트로포비치가 한 패가 되고, 나와 오이스트라흐가 다른 패가 되어 치렀던 전쟁'이라 말하며 재앙이었다고 기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