헉 내가 조괄이다 | |
|
|
장르 | 대체역사, 착각, 빙의 |
작가 | 간절히 |
출판사 | KW북스 |
연재처 | |
연재 기간 | 2023. 06. 12. ~ 2024. 01. 30. |
[clearfix]
1. 개요
한국의 대체역사 웹소설. 작가는 < 백제의 이름을 잇다>, < 아! 내가 마속이다>를 집필한 간절히.2. 줄거리
대학원생 김선명!
싱크홀에 빠져 전국시대 조나라의 장군 조괄에게 빙의하게 된다
때는 조나라 군사 40만이 생매장 당해 죽는 장평대전 직전!
조괄이 된 김선명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 문피아 작품 소개
싱크홀에 빠져 전국시대 조나라의 장군 조괄에게 빙의하게 된다
때는 조나라 군사 40만이 생매장 당해 죽는 장평대전 직전!
조괄이 된 김선명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 문피아 작품 소개
마이너한 고대 동북아 전쟁사를 다루는 대학원생 김선명.
박사 학위 논문 심사만 남았는데......
우연히 싱크홀에 빠져 전국시대 조괄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내일이 되면 그 나라의 명운을 걸린 장평으로 떠나는 날.
"아, 안 돼! 이대로면 조나라의 40만 병사가 생매장 당한다!"
최악의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한 조괄의 전국시대 생존물.
<헉 내가 조괄이다>
- 카카오페이지 작품 소개
박사 학위 논문 심사만 남았는데......
우연히 싱크홀에 빠져 전국시대 조괄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내일이 되면 그 나라의 명운을 걸린 장평으로 떠나는 날.
"아, 안 돼! 이대로면 조나라의 40만 병사가 생매장 당한다!"
최악의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한 조괄의 전국시대 생존물.
<헉 내가 조괄이다>
- 카카오페이지 작품 소개
3. 연재 현황
문피아에서 2023년 6월 12일부터 연재를 시작했다.2023년 8월 10일 자로 유료화되었다.
2023년 11월 7일 카카오페이지에 연재본이 발매되었다.
2024년 1월 15일에 170화 내외로 완결 예정이라고 카카오페이지 공지가 올라왔다.
2024년 1월 30일 173화로 완결되었다.
4. 등장인물
4.1. 조나라
주인공의 빙의로 가장 큰 수혜를 본 나라. 원래대로라면 조괄의 뻘짓으로 장평에서 45만명이 몰살당하며 망조에 접어들 예정이었으나 빙의한 조괄 덕에 장평대전에서 승리하고 상당 17성을 차지했다. 국력을 멀쩡하게 유지한 덕에[1] 진나라도 무시 못하고 원역사에서 빈집털이를 노렸던 연나라는 아예 엄두를 못 낼 정도로 강국 포지션을 차지하고 있다.다만 조괄이 이어받은 염파의 전략이 조나라의 국력에 워낙 부담이 되었고, 관중을 차지한 진나라와의 기본적인 국력차가 큰 것이 문제. 게다가 누완을 위시한 친진매국노들이 조나라 조정에 암약하고 있다. 그래도 염파-이목으로 대표되는 군부의 라인업은 튼실하고, 태행산맥을 끼고 있어 방어에 유리해 진나라에 대한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다.
진양의 소금광산과 누번의 소금호수를 지켜냈기에 진나라와 교역이 끊기더라도 문제가 없고, 위와 한에 간간이 소금을 공급하는 편이다.[2] 흉노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중원에서 최초로 기병을 주력 병과로 도입하는 등 중원에서 진나라 다음가는 군사력을 보유했다.[3][4] 순자도 관동 합종군에서 초나라와 함께 이강 체제라고 언급한다.
군사적 인재만이 아니라 다른 면으로도 인재들이 출중하다. 순자도 초나라에 살고 있었지만 조나라 출생이며, 평원군과 그 식객인 모수. 조나라가 망했어도 항전한 조가 등. 문제는 매국노 라인업도 튼실해서 조나라를 반쯤 자멸시킨 곽개와 한창, 누완 탓에 조괄은 정작 위나라 매국노들은 쉬운 놈들밖에 없다고 한탄했다.
2차 대진 합종군 전쟁에서는 9만의 대군과 정병을 보낸 사실상 최고 주력군이다.[5] 초, 위군이 진군에게 정예도에서 밀리는데 조군은 지휘관이 이목이기도 하지만 정예한 기병과 평균은 넘는 보병의 힘으로 비등한 수의 진군보다 강하다고 평가받는다.
최종적으론 제, 초와 함께 몰락한 진나라를 제치고 중원의 강국으로 남았다. 다만 이후의 조왕이 개막장이던 조도양왕이라는 사실이 문제. 멀쩡한 조가는 조괄이 촉왕으로 끌어들여 버렸으니... 그래도 이목, 사마상 등의 명신들이 원역사보다 훨씬 큰 입지를 차지하고 조나라에 남았기 때문에 창후 등도 함부로 활개치진 못할 것이다.
4.1.1. 조괄 라인[6]
-
마복군[7]
조괄
주인공. 관직은 상장군→사도→사공→무관[8]→합종군 차장→마복군. 본래 김선명이라는 이름의 대학원생이었으나 사고로 싱크홀에 빠져서 수천년 전 전국시대 조괄에 빙의한다. 장평대전의 비극을 알고 있었지만 하필 빙의한 시점에서 이미 효성왕과 중신들은 염파를 해임하고 조괄을 보내기로 결론을 낸 상황이었다. 이제 와서 말을 번복했다가는 왕을 우롱한 죄로 죽을 상황인데다, 어차피 조괄이 발을 빼봤자 조나라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는 전비를 감당할 수 없어 장기전이 아닌 단기결전으로 전략을 바꿨기 때문에 속절없이 장평으로 향한다.
장평에서 조괄은 효성왕에게 설파한 기병을 이용한 공세 전략은 완전히 묻어두고서 염파의 우주방어 전략을 그대로 유지한다. 그러나 효성왕이 공세를 재촉하며 압력을 넣자[9] 온갖 핑계를 대면서 버티다가, 이 시대 사람들은 모르지만 미래인인 자신은 알고 있는 역사 지식인 백기가 극비리에 장평에 와서 진나라군을 몰래 지휘한다는 것과, 진나라 재상 범수와 백기 간의 불화를 떠올리고서 범수의 파벌인 진군 장수 정안평에게 모략을 건다.
한편 조군 못지않게 진군 역시 한계에 도달했음을 체감한 백기는 젊어서 경험이 없는 조괄을 진영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서 손해를 감수하고 전면적인 대공세를 가한다. 그러나 조괄은 쩔쩔매면서도 절대로 후방의 병력을 당겨오지 않고 뚝심있게 버텨낸다. 결국 왕계와 정안평이 조괄의 유도에 넘어간 데다 사마상과 이담의 활약으로 후방에 잠복한 정예 진군도 패퇴하면서 장평대전은 조나라의 승리로 끝나고 상당군 17성도 조나라의 것이 된다. 이후 조괄은 효성왕에게 찍혔으나, 이런 전개 과정을 미리 예측한 인상여가 남긴 계책 덕분에 평원군의 지지와 염파의 용서를 받고 사도 벼슬까지 오른다.
그 후에는 자신에게 이를 가는 진소양왕과 범수, 백기를 막아내고, 편한 삶을 살겠다는 목표를 갖고 인재를 모으며 분주하게 활동한다. 진나라를 막기 위한 합종책의 첫걸음으로 삼진[10]합종을 달성하기 위해서 상당군을 놓고 원래 땅 주인인 한나라와 새 주인인 조나라의 갈등을 봉합하며 진나라의 합종 방해공작을 분쇄했고, 재차 진나라가 위제의 목을 요구하자[11] 평원군과 함께 함양으로 갔다가 탈출하면서 조나라의 인재로 천하에 이름을 떨치게 된다.
진나라는 정치질로 조괄을 실각시키는데 끝내 실패하자, 조나라의 고위직인 사공으로 승진시켜 북방 대 땅으로 보내서라도 조나라 정계에서 격리하는 극단적인 수를 쓰게 된다. 조괄은 친진파의 수작을 눈치채지만 자신도 군사적 경험을 쌓고 진나라를 막을 전략을 세울 시간이 필요했기에 받아들인다. 그렇게 대 지역 안문군에 부임해 친진파의 간자들을 연판장에 받아둔 지문을 이용해 모조리 숙청하고, 이목과 방난과 친분을 쌓고 그들을 지원한다.
결국 진나라가 주나라를 침공하자 북방에서 모은 의군 2천명에 평원군이 지원한 3천 병력, 그리고 묵가 병력 2천명과 함께 낙양에 입성해 진나라에 1년을 맞서 싸운다. 초나라가 주도한 합종군의 패배 이후 사실상 주나라가 멸망하리라 여겼던 천하는 조괄의 분투로 인해 격동한다. 그리고 이것이 조괄의 노림수였다. 협객 기질이 강한 신릉군과 조나라 군부의 불안, 초나라의 복수심 등을 일거에 자극한 것. 특히 원래 역사에서 신릉군이 조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병부를 훔치고 장군을 죽이고 위나라 군권을 장악한 극단적인 선택을 했음을 알기 때문에 비슷한 상황을 조성하면 반드시 신릉군이 호응하리라 여겼다. 과연 진군의 공세가 시들해졌다가 갑자기 격해지자 원군이 머지 않았음을 깨닫고 아끼던 물자를 풀면서 진의 최종 공세를 막아낸다. 결국 초나라의 원군이 도착하면서 낙양을 해방시킨다.
초나라에 이어 한나라도 합류하면서 총 15만에 육박하는 대군이 되고 신릉군이 이끄는 8만 위군도 신안성을 치는 상황에서, 신릉군이 진나라군과 정면승부를 벌인다고 하자, 다른 합종군 장수들은 빨리 장당의 진군을 쳐서 격파하고[12] 신릉군을 도와야 한다고 하지만, 조괄 혼자서 신릉군이라면 진군을 야전에서 격파할 수 있을 것이라고 고집해 공세를 연기한다. 그 말대로 신릉군은 왕릉의 진군을 격파하고 조괄의 발언권은 경양도 먼저 양보할만큼 커진다.
지휘권을 본래도 유능한 경양에게 양보하고 신릉군의 위군과 합류. 조나라와 연나라 군대도 합류해 총 28만이라는 대군을 이룬다. 조괄은 그 군의 차장이 되어서 명목상 서열 2위의 지휘권을 갖게 된다. 실상 차장은 총사령관인 상장처럼 타국 군대에 명령도 내릴 수 없고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처리하는 빛 좋은 개살구라서 조괄은 짜증을 냈다. 그러나 후군 5만을 이끌고 신안성을 포위하고 물길을 통해 보급하려는 진나라 수군과 2번 싸운 끝에 그들을 격멸한다. 이후 벌어진 결전에서는 기구를 활용한 맵핵으로 백기가 경양의 우회기동을 예측하고 카운터를 노린다는 것을 간파하고는 경양에게 암호를 보내 재차 경양이 카운터의 카운터를 치게 해주는 활약을 보인다. 결국 마지막 민지 전투에서도 신릉군과 함께 공을 세워 대진 합종군의 양대 주역이 되었다.
대전 이후 마복군으로 책봉받아 조나라의 대귀족이라 자부할 수 있는 신분이 된다. 진나라의 사주를 받은 곽개가 합종군의 분열을 야기하기 위해 연나라 침공을 계획하자 이를 반대했고, 합종군 사이의 균형을 맞추고 대진 전력을 마련하기 위해서 위나라로 건너간다. 위나라에서 자순과 협력하며 여러 책략을 부린 끝에 변법을 단행하나 친진파의 훼방과 안리왕의 방관으로 일이 길어지자, 사마상을 시켜서 무졸들을 격파하고 도주한다. 이기적인 안리왕이 무졸의 무용함을 보고도 변법을 안 할 수가 없다는 점을 이용한 것이다.
그렇게 조연전쟁이 끝날 때까지 지내던 한나라에서 한비자를 만나고, 천하만민이 긍정할 때까지 사상을 보완하는 것보다는 불완전하더라도 그 사상을 지지하는 강력하고 적극적인 집단을 만들어야 한다는 조언을 듣는다. 조괄은 큰 깨달음을 얻고 파촉을 자신의 영지로 만드는 것으로 행보를 다시 정하게 된다.[13] 귀국 이후 연단술에 심취한 척을 하면서 수많은 광물을 사 모았고 진나라의 수작을 역이용해 초석까지 손에 넣게 된다. 그렇게 제나라에 즉묵용린[14]까지 써가면서 화약을 완성한 조괄은 진나라의 대규모 공세를 상대하기 위해 이목을 불러들여 조나라 총사령관을 맡긴다.
신릉군을 위나라에 보내 합종군 결성을 위해 황하를 향하고 진군 정예기병 1만과 대치한다. 환기와 양단화의 기병 공세를 물에 적신 짚단을 이용해 급조한 벽으로 기동력을 제한하고 방난과 공격해 대파한다. 이후 신릉군과 이목과 같이 2차 대진합종군을 조직해 왕전이 이끄는 진군과 격돌한다. 본격적으로 역사를 뒤틀어버린 탓에 원래 역사보다 백기가 더 오래 진군을 지휘했고, 백기 사후 그 못잖게 난적인 왕전이 지휘하는[15] 상황에 불평하면서도 조나라 기병을 봉쇄하기 위해 왕전이 설정한 전장에서 역으로 보병으로 진나라 기병을 물리치는 대공을 세우고[16] 분투 끝에 박랑사에서 진군이 대패하며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그리고 함곡관에 다다르자 화약을 써서 함곡관을 무너뜨리면서 전국 역사의 변곡점을 만든다.
조괄이 약법삼장을 천명하자 진나라 민심이 흔들리고, 바로 이 시점에 진장양왕이 앓아눕고 어린 아들 영정(훗날의 진시황)이 왕위 계승자로 있었는데, 조괄은 진나라 조정의 혼란을 노리고 역이기와 함께 창평군에게 이반계를 건다. 짐짓 속내를 감췄으나 창평군은 왕후장상 영유종호 한마디에 결국 본색을 드러내고 진나라와 초나라를 적대하며 남군 땅에 스스로 나라를 일으킬 것을 결심한다. 명분이 필요했기에 조나라 출신인 여불위와 영정이 진나라를 망치고 있다고 선전하면서 장안군을 왕으로 추대한다고 선포하라고 작전을 세운다. 갑자기 역모에 엮이게 된 장안군은 함양에서 달아나 관중 북쪽에 봉기, 진나라는 세 세력으로 분열하게 된다. 합종군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일어난 내전은 진나라에게 치명타였으며, 마지막으로 조괄은 신릉군의 쿠데타를 두려워하는 위안리왕을 꼬드겨 EU를 본뜬 제도 중추원을 만들도록 하고, 조효성왕이 태자 조도양왕(조언)이 태자비와 태손( 조가)과의 사이가 나쁜 것을 고민하는 것을 이용, 자신이 죽은 뒤 태손이 어찌 될까 근심하던 효성왕에게 조가에게 촉나라 왕위를 물려줄 기회라며 꼬드겨서 조가를 촉왕으로 봉하게 한다. 효성왕이 태자를 폐하거나 태자가 왕위에 오른 뒤 조가가 아닌 조천에게 왕위를 물려주면 왕실 내에 분란이 생기거나 내전이 일어날 수 있지만( 조무령왕 때 사구정변이라는 전례가 있다.) 조가가 촉나라로 독립해나가면 조도양왕이 조천( 조유류왕)에게 왕위를 물려주더라도 분쟁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촉나라와 조나라는 멀리 떨어져 있고 진나라가 사이에 있기에 분쟁이 생길 일도 없다.
이렇게 천하는 절대강국이던 진나라는 셋으로 쪼개지며 합종국 또한 오랜 전쟁으로 국력이 피폐해지고, 평화를 유지하는 세력단체 중추원의 등장으로 힘의 균형이 대략 맞아떨어져서 교착상태에 빠지며 조괄이 구상한 대로 평화가 찾아온다.
기본적으로 전쟁이나 정치를 경험해본 적 없는 현대인, 한낱 대학원생에 불과하기 때문에 마복군 조사의 아들이자 조나라의 장군임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자리에서 못미덥게 굴거나 긴장하는 등 실태를 보여 적수들이 얕잡아보는 장면도 나오지만, 거꾸로 미래 지식으로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태연히 대응하는 것을 보고서 비범한 인물로 여긴다. 또한 당대 사람들이 상상조차 하기 힘든 극적인 사실들을 알고 행동하기 때문에 뻔뻔한 거짓말쟁이 혹은 현묘한 예언가처럼 보이기도 한다. 조사의 아들로 자라면서 승마, 궁술 등 무예를 부지런히 수련해 몸도 굉장히 건강하고 얼굴도 똑똑해보이는 미남이라고 한다.[17] 동양사뿐만이 아니라 서양전쟁사에도 지식이 많아서 아르키메데스의 청동거울 일화를 구현하고, 기중기 등의 설계도를 제작하는 등 공돌이 성향이 있다.
스스로 군재가 없음을 절감하며[18] 이담과 사마상 등의 기재들을 후원하고 자신은 보급이나 행정 업무 등을 맡는데, 낙양 공방전이나 여러 사건에서 조괄과 같이했던 인재들은 오히려 조괄의 지휘와 판단을 매우 신뢰한다. 상식적으로 불리한 결정을 하는데도 한번의 반대도 없을 정도.[19] 내심 조괄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조효성왕조차 저놈은 궁지에 몰리면 뭔가 비상한 수를 내서 빠져나오긴 한다고 걱정을 안할 정도. 종합적으로 볼 때는 대군을 지휘하는 신릉군, 이목, 염파, 진나라의 백기, 왕전 등의 상장들과 비할 만한 대군을 지휘한 적이 없지만 그들조차 속일 갖가지 기책을 낼 수 있고, 방어전이라면 명장 라인에 드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이후 함곡관을 무너뜨리면서 이제 부친을 넘어선 인물이 되었다.
데뷔전인 장평대전, 낙양공방, 곡수 전투, 민지 전투 전부 수세적인 입장에서 강세를 보였기 때문에[20] 수비전의 명장, 조사가 교육을 마치지 못했다 등의 유언비어가 나돌게 된다.
진나라의 통일을 막겠다는 이유는 한편으로는 조효성왕에게 밉보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진나라의 숙적이 된 자신의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서지만, 원래 역사에서 진시황의 폭정으로 분서갱유와 진승·오광의 난 초한전쟁 등이 일어난 비극적인 미래 시대상을 알기 때문. 진의 세력을 꺾기 위해 음험한 모략도 동원하면서도 자신의 반진 행보에 일말의 가책도 없다고 자신한다.
엔딩 이후 촉나라의 상국이자 건국 공신으로서 이후 초나라, 중추원을 노리는 각국 군대를 막아내면서 끝내 연국론이 중화의 대중적인 질서로 받아들여지게 만들었다. 워낙 다방면에서 굵직한 실적을 남겼고 마복군이라는 작위가 조씨 가문에 세습된 탓에 역사학자들이 마복군 조괄의 업적을 가려내는 데에 혼란이 많았다고 한다.[21]
-
순경
성악설로 유명한 대학자 순자. 본래 조나라 출신으로 작중 시점에선 초나라에서 살고 있었다. 전단이 죽은 뒤 가난한 노인으로 꾸미고 조괄을 찾아와 세객인 척 현 정세에서 비롯한 미래를 설파한다. 그런데 그 내용이 '진나라는 지나치게 가혹한 법률로 민심조차 도외시하는데, 천하가 나뉜 지금이야 가감이 되지만 결국 가혹한 법률을 제정한 조정에게 원망이 향할 것'이나 '권력이 왕에게 집중되어 왕 가까이서 일하는 환관들이 권력을 쥐고 사달을 낼 것'이라고 소름끼칠 정도로 정확한 예측이라 미래 사실을 알고 있는 조괄은 경악한다.
사실 노중련에게 조괄에 대해 듣고서 그 안목을 재보고 이야기하기 위해 방문한 것이었다. 순자를 알아본 조괄은 조언을 구하고, 순자는 조괄과 신릉군, 평원군 등이 지닌 모순[22]을 지적하고, 통일전쟁을 벌여 전국시대를 끝내고 평화를 가져온다는 진나라의 명분에 맞서서 육국의 선비와 백성들을 하나로 모을 명분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조괄은 순자에게 그 명분을 알려달라고 부탁하지만 순자도 아직 적절한 명분을 찾아내지 못한 상황이라 젊고 재기있는 조괄을 찾은 것이었다.
조괄은 그래도 순자와 대화하고 배우다 보면 미래의 사상이나 철학에서 그 명분을 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고 배움을 청한다. 순자는 진나라와 잦은 분쟁을 벌이는 조나라 대신 초나라에 있고자 했으나, 조괄이 주나라 구정을 기준으로 삼은 도량형을 만들어 천하에 퍼뜨리는 모습이 실마리가 될 수 있다고 여겨 조괄에게 의탁해 명분을 찾아나선다.
노나라에서 열린 묵가 대회에서 조괄은 진나라를 지지하는 별묵 파벌에게 고사성어 지록위마를 인용해 강력한 통일 국가가 지닌 위험성을 경고하며 묵가는 묵자 이래 지켜온 비공(非攻) 원칙을 고수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다. 결국 이 일로 묵가는 친진파와 반진파로 쪼개진다. 사실 지록위마는 훗날 진시황 시절 일화를 표절한 것이고 조괄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묵가가 진나라에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한 트롤링이었으나, 순자는 이 비유를 듣고 매우 감탄한다.[23] 조괄이 사도가 되어 북방으로 가자 그곳의 문화와 풍습에 대한 저서를 남긴다.
진나라가 주나라를 침공하자 조괄이 의군을 이끌고 낙양에 가자 조괄에게 부탁해 동행한다. 낙양에 갇혀 수성전을 벌이는 와중에 방난과 묵가, 주나라의 학자들과 매일같이 관객을 두고 토론한 끝에 전국통일에 맞설 육국의 명분을 완성해간다. 조괄은 명분을 완성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여기고 탈출용 기구의 비단까지 잘라서 기록지로 쓰라고 제공한다.
순자는 조괄의 힌트를 듣고 '연국론'이라고 불리는 이론을 제창했지만 십수년은 더 다듬을 기세라서 조괄은 낙양에서 나가서 전쟁이 끝나면 바로 순자의 기록을 빼앗아 발표해버릴 생각이다. 마침 순자 본인도 이건 자신의 생각이 아니고 조괄의 생각이니 조괄의 이름으로 발표하는 것이 옳다고 말하며 순순이 넘겨줬기에 연국론은 조괄이 주창한 것으로 알려질 듯 하다.
2차 합종군이 조괄이 뜻을 펼칠 기회라고 알고 응원하고, 조괄이 마침내 뜻을 이루자 관중의 합종군 군영에 찾아와 자신이 조괄을 믿은 게 옳았다며 기뻐했다. 그대로 조괄을 따라 파촉까지 가려했으나, 고령이라 파촉에 가면 죽을 때까지 나오기 힘들었기에 조괄은 낙양에 남아 중추원을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
이담[24]
조나라 하급관리의 아들. 원 역사에서 장평대전 이후 한단을 공격하던 진군의 선봉대를 막기 위해 평원군을 찾아가 결사대를 짜낸 중심인물로 삼천명의 조나라 결사대는 전부 죽었지만 덕분에 며칠의 시간을 벌면서 진나라의 내부 정쟁과, 위초의 지원군이 도착해 조나라의 수명을 수십년이나 연장할 수 있었다.
이 역사를 아는 조괄은 이담을 직접 스카우트해 장평에 데려온다.[25] 장평대전이 후반부에 접어들었을 때 후방을 공격한 왕흘이 사마상의 반격으로 후퇴할 때 진군의 허점을 정확히 찔러서[26] 수천의 진군을 무찌르는 큰 공을 세운다.
이후 조괄이 공을 세세히 적어서 사마상과 함께 군부에서 출세하며 한나라에 가는 조괄의 호위 등으로 참가한다. 사공이 된 조괄을 따라 안문군에 부임해 휘하에서 경험을 쌓는다. 주로 정예한 보병이나 기습 부대를 운용할 때 지휘를 맡는다. 대진 합종군 전쟁에 참전해 끝까지 싸웠으며 마지막 역추격에서 마침내 낙양을 1년 넘게 공격한 진군 장수 규를 직접 병사들을 몰고 참수한다. 귀국 후 크게 승진해 요직에 앉았다고 한다.
2차 대진 합종군에도 참전했으며 포전택 전투에서는 소수 기병으로 협승에 휘말린 몽염을 격파하고, 마지막 전투에서도 4천 병력으로 왕전의 측면을 위협하고 신릉군을 공격하는 왕전과 몽무에게 맞서는 등 혁혁한 공을 세웠다.
아무것도 없던 자신을 발탁한 조괄을 따라 파촉까지 온다.
-
사마상
조나라 말기의 명장. 장평의 후방에서 치중을 맡은 하급 장교로 등장한다. 조괄에게 후방의 치중부대만을 전방에 보내어 전방의 사기를 올리고 후방을 들이치는 진군을 유인해 역섬멸하자는 작전을 제안하고 이름값을 믿은 조괄이 허가하자 4만 5천의 병력으로 후방을 치는 왕흘에게 반격해 공을 세운다. 이후 조괄 산하로 들어와 이담과 같이 군부에서 승진한다.
이담과 함께 사공이 된 조괄 휘하로 안문군까지 부임한다. 이담과 함께 군사를 다루는 경험을 쌓는 중이다. 대진 합종군에도 참전. 낙양에서 1년을 버티면서 이담과 호흡을 맞춰 활약한다. 이담이 주로 중장보병을 지휘하는 대신 방난처럼 기병대를 주로 운용하는 모양. 전후에 조나라에서 승진했고 조괄은 위나라에 갈 때도 호위 겸 기병 지휘관으로 사마상을 데리고 간다. 사마상은 조괄의 기대대로 단 오백의 기병대로 급습이라지만 5천이 넘는 무졸들을 대파하는 기염을 토한다.
2차 대진 합종군에서도 방난과 같이 기병을 지휘하면서 활약했고, 박랑사 전투에서는 막바지에 기병 3천을 데리고 왕전의 후방을 공격해 진군에게 마지막 치명타를 가한다.
함양 점령 후에 합종군이 해산되자 이담, 주문과는 달리 고향과 일가 문제로 조나라에 남았다. 본인은 조괄과 동료들에게 미안함을 느꼈으나, 조괄은 조나라에 연국론을 정착시켜달라고 부탁하면서 불편함을 풀었다.
-
주문
원래 역사에서 시황제 사후 진나라에서 일어난 진승 오광의 난에서 30만 대군을 이끌고 함곡관을 위협하며 장한과 싸우다가 패배한 지휘관. 비록 패장으로 역사에 남았으나, 농민들을 모병한 대군을 이끌고 명장 장한을 상대로 맞서던 인물이다.
어린 나이에 초나라 항연 휘하에서 점쟁이 일을 했고 낙양에서 결성된 합종군에도 따라왔다. 조괄은 혹시나 싶어서 점을 쳐보자고 제안했다가 과연 주문이 있자 술김에 흰소리를 하는 척 " 관상을 보니 군사에 소질이 있는데 내 밑으로 들어오라" 제안했고 주문이 승락한다. 노골적인 스카웃 제의였지만 주문은 한낱 점쟁이 소년이였고 사람들은 조괄이 취했다고 웃어넘겼다. 다음 날 주문은 조괄이 술김에 실수라면서 제의를 번복할까봐 겁먹었지만 조괄은 애당초 취해서 한 일이 아니었기에 주문을 이담의 밑에 배치해 군무를 배우도록 한다.
대진 합종군이 진나라와 싸울 동안은 아직 전투에 투입할 수준이 되지 않아 조괄의 곁에서 잡무를 거들었지만, 주문이 위나라에서 변법을 실행하기 위해 대량에 가게 되자 본격적으로 군무에 투입된다. 조괄은 주문이 아무리 진나라 막장 시기라지만 30만이라는 엄청난 농민군을 조직했던 실력에 주목해 주문을 폭동 전문가라고 칭하면서(...) 무졸들의 폭동에 대비해 방어 작전을 짜도록 시킨다.
2차 대진 합종군에도 참전해 조괄의 호위 겸 전술가로 활약한다. 중요한 순간에는 전장에서 칼을 휘두르고, 박랑사 전투에서도 지금 조괄이 나가야 병사들이 버틴다면서 조언하는 등 조괄의 기대처럼 능력을 꽃피웠다. 조괄이 함곡관을 깨고 진나라를 셋으로 쪼개 촉땅에 부임하자 주문 역시 따라간다.[27]
내심 점쟁이 시절을 흑역사로 여기고 있어서 조괄이 점쟁이 노릇을 했으면 혹시 연단술도 알지 않냐고 묻자 그런 건 모른다고 딱 잘랐다. 다시는 점 흉내도 내지 않을 것이라고.
-
역이기
원 역사에서 유방의 참모로 활약한 명 책사. 작중에서는 10대 소년으로 대량 인근 문지기로 일했다. 후영의 이름을 팔아서 조괄을 찾아왔고, 무졸들의 합류를 막는 것에 협조하지 않는 위나라 조정 탓에 고민하는 조괄에게 "용양군이 만든 미남 출입금지령을 이용하라"라고 조언한다.
조괄은 이 덕을 보고서 역이기와 가족들을 자신의 식객으로 거둔다.
2차 대진 합종군에서 조괄의 참모로 종군. 창평군 설득 사절로 파견된다. 조괄이 흔들자 마지막 승부수로 창평군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이후 조괄을 따라서 파촉까지 갔을 것으로 보인다.[28]
4.1.2. 왕족
-
효성왕
현 조나라 왕. 조괄이 왕 앞에서 늘어놓은 단기결전 구상이 아닌 염파와 마찬가지로 우주방어로 일관하며 전비를 늘리자 장평대전이 조나라의 승리로 끝났음에도 조괄을 불신한다. 하지만 진나라의 모략으로 상당 지방을 두고 외교 분쟁이 터졌을 때 조괄이 돈 한푼 들이지 않고 세치 혀를 놀려 해결하자 다시 조괄을 재신임한다(...)
그 후에도 조괄이 여러가지 난제를 해결하자 난관을 피하는 데 재능이 있다고 여기고 위기의 순간에만 써먹으면 되겠다고 중신으로 삼는다.
진나라가 주나라를 침공하자 조괄은 사공 직위를 내려놓고 조나라 대신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의병을 이끌고[29] 주나라를 구하러 가 1년을 버텨내자 국내의 민심, 특히 군부의 동요가 심각해짐을 느끼고 진나라와 완전히 척질 각오를 하고 조괄을 구해야 하나 고민한다. 결국 신릉군이 거병해 진군을 치자, 그제서야 연나라에게 길을 빌려준다는 명목으로 4만 보기를 편성해 악승과 경사에게 맡겨 합종군에 가담한다.[30]
대진 합종군 이후 친진파의 꼬드김에 넘어가 염파, 악승, 방난을 동원해 연나라를 공격해 승리한다. 하지만 원래 역사와 마찬가지로 끝내 연나라의 수도를 함락하는 데는 실패한다.
2차 대진 합종군에 신릉군과 조괄에게 2만, 이목에게 5만, 염파에게 2만을 맡겨 보내며 가장 많은 병력을 동원했다. 그러나 곽개의 감언이설에 넘어가서 참전을 못하게 하려고 하는 등 암군의 면모도 드러낸다. 하지만 신릉군의 박랑사 전투 승리와 조괄의 함곡관 돌파가 이어지자 이번 기회에 상당을 조의 영토로 굳히고 진나라를 확실히 눌러놓기로 결심한다.
신릉군의 쿠데타를 두려워하는 안리왕과는 다르게 조나라 군부에 인재가 많아서 조괄을 딱히 견제하지 않는다. 조괄의 독단적 행보를 지켜보다가 왕손 조가를 촉땅에 봉군하라고 제안해오자 태자에게 마음이 떠난 것을 눈치챈 조괄의 지략에 혀를 내두르면서도 왕실의 문제를 해결할 방도라며[31]이를 허가한다.
조괄이 장평대전에서 단순히 진의 공세를 막아낸 것이 아니라 역습까지 해 진군을 만 단위로 처부순 전공에도 불구하고 거짓말한 잘못을 들어 조괄을 숙청할 생각이었고, 이후 조괄의 활약상을 보고도 재능을 인정하면서도 신뢰를 보내지는 않으며 기도메타에 가까운 상황에서만 중용한다. 하지만 원래 역사와 마찬가지로 장평대전의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조괄의 친족을 연좌하지 않겠단 약속을 지키고, 죽을 때까지 염파를 신뢰한 점이나 평원군을 잠재적 왕위 경쟁자로 견제하는 것이 아니라 믿을 만한 인척으로 지내는 점을 보면 암군은 아니다.[32] 위안리왕 등 주변국가 군주들이 하나같이 암군이라 그나마 인재 파악을 하는 효성왕이 상대적으로 고평가를 받는건 덤.
작중 친진파 매국노 간신들이 대놓고 활개치지 못하는 까닭도 효성왕이 하루가 다르게 격변하는 전국시대에 진나라와 닿는 끈도 있어야 한다는 의도로 등용했기 때문이지 개인적으로 총애를 주지는 않는다. 즉 쟤들은 친진파고 진나라한테 유리한 소리를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다만 인색한 건 맞다고.
장평대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두 차례 대진합종군으로 진나라를 몰락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했기 때문에 후세에 명군 혹은 그에 준하는 평가를 받을 듯 싶다. 후계자인 도양왕이 자타가 공인한 암군이라 문제이긴 하지만 내부 매국노들도 약해지고 이목 등의 명장명신들이 주요 직책을 차지할테니 나라에 문제는 없을 듯
-
평원군 조승
전국사군자 중 평원군. 작중에서도 주로 평원군이라 불린다. 조나라 왕족으로 성격이 좋고 식객을 삼천명이나 거느릴 정도로 재산도 많으며, 효성왕이 믿는 숙부라서 조나라 정계에 끼치는 영향력이 엄청나다. 하지만 평원군 항목에 나오듯 사람은 좋지만 재주는 없는 인물이라 처남이자 같은 전국사군자인 신릉군 위무기에게 열등감을 품고 있다.
반진파의 거두로 삼진의 우호를 지키기 위해 진나라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의탁한 위제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진나라로 향했다. 그러나 원래 역사에서 그 희생이 도움이 안 됨을 아는[33] 조괄은 평원군과 동행해 진나라에 갔다가 열기구를 사용해 무사히 탈출한다. 그후 열기구에 큰 감명을 받은 모양인지 개인적으로 기구 연구에 들어간다.
진나라가 주나라를 침공하자 조괄이 사공 직위를 버리고 의군을 꾸려서 낙양으로 출병했고 평원군 역시 동행하려 했으나 효성왕이 대외적으로 조나라는 간섭하지 않음을 꾸미는[34] 상황 탓에 불가능했다. 결국 사재를 털고 식객들 중에 병사를 모아 병사 천여명을 지원한다. 그렇게 1년여가 지나고 조괄이 진의 대군을 상대로 낙양을 사수해내자 조나라 내의 여론이 심상찮은 기세로 흔들리기 시작하며 평원군을 성토하기 시작한다.[35] 평원군의 식객들도 전부 떠났을 정도. 물론 평원군은 애국자였기에 억울해하기보다는 여전히 조괄을 도울 방법이 없음을 안타까워하며 효성왕에게 파병을 요청하는 한편 모수에게 조괄을 도울 방법을 묻는다.
대진 합종군에도 참가하며 존재감을 보였지만, 대진 합종군이 해산하고 조연전쟁 이후 병사한다. 죽기 전 조괄에게 부디 조나라군이 함곡관을 넘게 해달라고 유언을 남긴다. 조괄은 함곡관을 돌파할 때 평원군이라고 적은 기구를 띄워 그의 의지를 이었음을 드러낸다.
-
조가
효성왕의 맏손자로 현 조나라 태자[36]의 아들. 원래 역사에서는 부친 도양왕이 즉위 이후 이목의 간언도 무시하고 후처인 창후에게서 낳은 조천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그러나 조나라 멸망 후에도 대나라를 세워 짧은 기간이나마 진에게 저항한 인물이다.
아직 5-6세밖에 안된 아이로 할아버지 효성왕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다. 진나라가 주나라의 수도인 낙양을 공격할 낌새를 보이자, 효성왕은 주나라가 망하기 전에 손자가 낙양을 한 번 가봐야 한다고 낙양에 보낸다. 이때 조괄은 전국통일이라는 진의 명분에 맞설 합종의 명분을 세우고자 했기 때문에 낙양에 가는 내내 조가에게 구정에 대한 관심을 부추긴다. 결국 낙양에서 조가는 구정의 무게를 묻는다. 다행히 아직 어린 아이라 호기심의 발로 정도로 넘길 수 있었고, 이를 계기로 조괄은 구정의 무게를 재고[37] 천자에게 구정의 무게를 기준으로 삼는 주나라 근[38]을 발표하도록 권한다. 대세는 진나라의 전국통일이라는 사람들의 인식에 표준도량형을 제시함으로써 그래도 아직은 주나라죠라고 주의를 환기시는 효과를 노린 것.
귀국 후 효성왕은 천자 앞에서 구정의 무게를 묻는 패기를 보인 손자를 칭찬하고, 이 광경을 지켜보며 조괄은 역사개변을 통해 비극적인 조가의 삶을 바꿀 수 있기를 바란다.
이후 합종군은 장양왕이 죽음을 앞둔 시기에 함곡관을 돌파하고, 진나라 조정이 갈팡질팡하는 동안 창평군의 모반을 유도하면서 진나라를 셋으로 쪼갠다. 그중 하나인 촉 땅에 조괄은 조가를 촉왕으로 세운다. 원래 역사처럼 부친 도양왕의 눈밖에 난 상태였기 때문. 조괄 덕에 촉왕이 되고 연국론을 지지하며 원래 역사와는 달리 인정받는 일생을 보냈다.
-
조도양왕
효성왕의 아들. 미래 왕이 될 인물이나 조나라 망국화를 가속하는 인물인 걸 아는 조괄은 이 양반 밑에 못 있겠다고 탈출을 계획중이다.
원역사처럼 창후에게 빠져 아내와 아들과 사이가 파국에 이르고, 효성왕은 자신의 사후 왕실에 사고가 터지는 것을 막기 위해 손자 조가를 촉으로 보낸다.
4.1.3. 군부
조나라의 군인들. 반진 기조가 강해 진나라에 맞서고 있다. 염파, 이목이라는 전국시대를 대표하는 명장 두 명을 제외하고도 악승, 경사 등 대군을 능숙히 다루는 인재들이 포진해 있다. 그밖에 이담, 사마상, 방난 등 아직 신출내기거나 재야의 인재풀까지 따지자면 쟁쟁한 진나라 명장들에게도 꿀리지 않아 조괄은 싸울 사람은 충분히 있다고 평가할 정도.장평대전 이후 효성왕의 전적인 신뢰를 얻은 상장군 염파와[39] 대연 전선을 담당하는 악승이 군부의 서열이 가장 높은 듯 하며[40] 북군 대장 이목도 대 땅에서 흉노를 크게 격파한 이후 실력자로 인정받았다.
-
신평군
염파
기전파목의 일원으로 조나라 최고의 명장. 장평대전에서 강고한 방어 태세를 갖추고 점차 우세를 점했다. 그러나 막대한 군비 소모를 견디지 못한[41] 효성왕이 염파를 해임하고 조괄에게 대장 자리를 넘겨주자, 조괄 얼굴도 마주치기 싫어서 인수인계도 하지 않고 먼저 떠나버렸다.
염파가 몇달간 설계한 진영의 방어능력은 무척 뛰어나서 백기와 왕흘이 조괄 역시 염파처럼 계속 수비만 하는 것를 견디다 못해 대공세를 편다. 조나라가 악전고투 끝에 방어선을 한발 물릴 때 진나라는 예비부대까지 죄다 소모해버려 백기가 두손두발을 들 정도였다. 어쨌든 염파의 전략이 옳았음은 조괄을 통해 입증되었기 때문에 다시 조나라의 상장군이 된다.
조나라로 돌아온 조괄을 두고 염파는 자신의 공을 훔쳤다면서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이를 간다. 효성왕도 평원군도 못 말리는 다혈질이라서 조괄이 염파를 피해다니느라 한참 고생했다. 다행히도 인상여가 이 사태를 예측하고 비단 주머니에 계책을 남겨 염파에게 용서를 받는다.[42]
복귀하고는 효성왕의 신임을 받으며 상당 전선을 비롯한 국경에서 진나라와 대치하는데 백기와 소양왕은 경계 대상 1호인 염파를 국경에 묶기 위해 상당군에서 소모전을 계획한다. 또한 염파도 평소의 과격한 성격은 보이지 않고, 2차 방어전은 어렵다고 시인하지만 그래도 그 실력은 공인받아서 진나라도 백기를 상당 주변에 직접 파견해 염파를 묶어두게 한다. 조나라가 참전을 결의할 때 연나라군과 같이 낙양에 가야 했기에 염파는 분명 시비가 걸린다면서 제외된다. 평원군의 주 임무 중 하나가 염파를 진정시키는 것이라는 소리를 보면 낙양과 조괄군을 구하기 위해 참전해 진과 싸우자고 효성왕에게 주장했을 것이다.
진의 백기에게 판정승이나마 거둔 유일한 인물이며, 백기 또한 관동육국에는 염파가 가장 난적이라며 자신의 맞수로 평가했다.
대진 합종군 전쟁 이후로 신평군에게 책봉받으며 조괄, 악승과 함께 조나라 군부의 중역이 되었으나, 여전히 정치적 센스는 없어서 진나라의 사주를 받은 친진 매국노들이 연나라 공격을 주장하자 이길 수 있다고 좋아하며 지지한다.[43] 조연전쟁에서 연을 멸하지는 못하지만, 대승을 거두어 승장이 된다. 이후 상국 대행까지 오른다.
진나라가 30만 대군을 몰고 관동을 공격하기 시작하자, 국내에서 상국으로서 친진파를 견제하고 전략을 세우는 후방 사령탑 역할을 한다. 신릉군이 환기, 양단화의 5만 대군을 몰아붙이자 소식을 듣고 바로 효성왕에게 지금 출진해야 한다고 설득해 이목과 5만 군대를 출진시키고 본인은 2만 조군과 연군을 지휘해 참전한다. 조괄은 이 소식을 듣자마자 조나라 조정의 통제가 닿지 않는[44] 국경 너머로 급히 행군했다.
조괄이 함곡관을 부수고 관중이 합종군의 영향권에 닿자 효성왕에게 간해 상당을 다시 탈환하고 합종군에 추가지원을 보낸다. 대충 일이 줄어드면 바로 매국노 곽개 패거리를 죽이려 들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기전파목의 한 사람으로 백기나 신릉군에 못지 않은 명장이지만 주인공과 같은 나라 사람이라 주인공을 띄워주기 위해 큰 전쟁에는 본의가 아니게 조나라 수도 한단을 지키는 임무를 맡는다.[45]
-
무양군
악승
조나라의 대연전선 사령관. 원역사에서는 말년에 염파의 인수인계를 하러 오다 염파에게 패배하여 망신을 당해 군부에서 은퇴한다. 연나라의 명장인 악의의 먼 친척인데, 이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 자부심이 너무 지나친 나머지 스스로를 악의의 조카라 자부하고, 말을 할 때마다 악의를 가져다 붙여 곁에 있던 조괄과 평원군을 질리게 할 정도.
평원군의 함양행을 호위하며 첫 등장. 단정하게 수염을 기른 남자라고 한다. 조괄도 처음에는 염파보다 정상인이라고 대하다가 얼마 안가 이상성을 눈치채고 기가 질렸다.
염파와 같이 상당에 주둔해 백기와 견제중이었는데 효성왕이 합종군 참전을 결정할 때 연나라에 인연이 많다면서 지휘관으로 낙점된다. 합종군에 합류하고는 빛 좋은 개살구나 다름없는 차장군 직위를 조괄이 떠넘겨받을 때 잘 어울린다고 칭찬해서 열받게 만든다. 이후 합종군이 퇴각할 때까지 전투를 지휘하지는 못했으나 악승이 훈련시킨 조나라 보병들은 진나라 군사와도 호각을 겨루는 강군이었던 덕에 마지막 추격전에서 활약한다.
이후 상당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진나라와 왕전이 밀고 온 십수만 대군과 싸우다 끝내 상당을 탈환당한다. 염파의 해석으로는 악승의 실력은 뛰어나지만 상당 땅이 보급을 이어주질 못하니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박랑사 전투 이후 경사와 함께 조군 증원병과 같이 이목의 본대에 합류한다. 함곡관 전투 중에 조괄이 관을 폭파시키자 경악하면서 감격한다.[46]
-
경사
악승과 함께 조의 대연 전선을 담당하는 숙장. 악승의 악의 자랑을 참지 못하는 조괄에게 절대로 지적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악승과 함께 합종군에 참전한다. 합종군의 퇴각을 추격해오는 백기의 진군에 맞서는 저지군에 조괄과 같이 합류해 중군을 지휘한다. 정예한 장창병대를 지휘하고 있으며, 원 역사에서 진, 연 등을 상대로 활약한 명장인만큼 능의 진군에 충분히 맞선다. 사마경의 원군으로 수적 우위로 눌러오는 진군을 상대하며, 마지막 추격전에서도 이담에게 정예 창병을 맡겨서 승리에 일조한다. 박랑사 전투 이후 악승과 같이 이목의 본대에 합류한다.
-
허력
젊은 시절 마복군 조사에게 은혜를 입은 조나라의 장수. 은인의 아들인 조괄을 돕기 위해 그의 전략이 틀렸음을 알면서도 장평대전에 부관으로 동행한다. 조괄이 정작 장평에 도착하고서는 염파의 수비 작전을 유지하자 안도한다. 사마상의 진언을 듣지 않으려는 조괄을 설득해 사마상의 반격전을 입안시키고 대성공을 거둔다. 마지막까지 군기를 유지하며 진군의 후퇴를 확인한 후 승리를 확신하고 감격의 눈물을 흘린다.
이후 군부에 복귀해 한동안 등장이 없다가 조괄이 낙양을 구해낸 후 차장군 조괄이 지휘하는 합종군 후군의 지휘관으로 낙점되어, 조괄과 함께 공성전을 준비한다.
-
이목
기전파목의 명장. 원역사에서 절망적인 격차에도 진나라군을 연달아 격파했던 명장으로, 작중 시점에도 조나라 대 땅의 북군 대장으로 칠웅 못잖은 강대한 군사력을 가진 흉노를 대파해 국경을 안정시킨 명장이다. 장신의 30대 청년이나 고생을 많이 해서 실제보다 나이 들어 보이며, 팔꿈치 관절염 탓에 팔이 굽어 있어서 평소에는 팔을 고정하는 의수를 하고 다닌다. 원역사에서는 이 의수가 암살용 도구라는 말도 안 되는 모함을 당해 억울하게 사형당했다.
조괄이 사공으로 부임하면서 첫 만남을 가진다. 친진파에 한단으로 돌아갈 생각뿐이던 호곽과는 사이가 안 좋았으나, 조괄은 이목의 인생을 알기에 호감을 갖고 친절히 대한다. 조괄이 이목의 관절염을 완화시키는 치료법을 알려줬기에 조괄을 은인으로 여기고, 자신의 대계를 공유하고 협력하고자 한다.
이목의 대계는 흉노족과의 교역을 통한 교린 정책. 후대의 중원국가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정책으로 조괄은 이를 허용하고 물자를 지원하거나 옥패제를 도입해 더 상세하게 만든다. 그리고 흉노 기병들을 용병으로 모으겠다고 하자, 자신과 조괄이 있을 때야 괜찮지만 후대에는 어떻게 될 지 모른다고 반대하려다가 당장 진의 위협이 더 심하다는 반론에 납득한다.
이후 조괄이 떠난 후에 한동안 등장이 없다가 진의 2차 공세를 막을 지휘관으로 낙점되어 재등장한다. 염파의 명으로 5만 병력을 데리고 진군을 막으러 북상하여 조괄과 합류해 7만에 달하는 군세로 황하를 건넌다. 그러나 문제가 터지는데 대량에 있는 십만의 위군이 진나라군에 막혀 전혀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 이에 조괄에게 변수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하고, 조괄이 열기구로 낚시를 가한 끝에 기동을 시작한다. 기동전의 달인인만큼 약 15만에 달하는 진군이 조군을 잡으려 들어도 대량에 갈 수 있다고 판단하지만 그 과정에서 적의 공세를 상대해야 했다. 그러나 조괄은 협승 전술을 떠올리고 기병을 전부 이목에게 맡기고 보병만 가지고 진군을 상대한다.
본 역사에서 작중보다 더 불리한 상황에서도 왕전과 진나라 대군을 연 단위로 막아내고 매국노들의 방해만 아니었다면 조나라를 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인물답게 군사능력이 대단히 출중하다. 조괄은 7만 군세로 18만에 달하는 진군의 추격을 피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이목이라면 어떻게든 해낼 수 있다고 믿었고, 이목도 내심 '피해는 크겠지만 돌파할 수 있다'고 여겼다. 조괄의 미래지식으로 역으로 진군을 격퇴하면서 1:3 수준의 교전비를 냈지만 이목 혼자서도 작전 목표는 수행 가능했다는 소리.
박랑사 전투에서 왕전의 작전을 읽어내고, 장당의 행동까지 예측해 사마상을 왕전의 후방으로 보내는 것에 성공. 합종군의 승리에 큰 공을 세운다. 그 후 갑자기 난리를 치는 조괄을 연단술 탓에 돌았는가 하고 걱정했으나, 결국 조괄이 함곡관을 날려버리자 그 자리의 장수들 중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군사를 이끌고 함곡관을 공격했다.
몽오의 발악에도 진군을 밀어내고 결국 조괄과 같이 함곡관을 점령한다. 그리고 관중에서 몽오의 진군을 격파해 사실상의 진나라를 제압한다. 조괄이 떠날 때 그를 은인이라 여기며 아쉬워했다.
-
방난
조나라의 명장. 뛰어난 학자 겸 군사전문가로 조무령왕에게 발탁되어 활약했다. 그러나 무령왕이 계승 문제로 비참히 죽고나자, 그 측근이던 방난도 덩달아 몰락. 북방으로 쫓겨나게 된다. 당시 무령왕의 명으로 함곡관을 점령한 광장에게 정보를 캐내러 갔었는데 귀국하자 이미 일이 터진 후였다고.
사공부 앞에서 고함을 질러가며 억지로 조괄을 만난다. 조괄은 방난이 전국시대 막바지에 함곡관 안의 본토를 친 마지막 인물임을 알기에 그를 영입할 생각으로 만난다.[47] 방난은 조괄을 떠보더니 본심을 드러내는데, 주보(무령왕) 몰락 이후 방난은 변경에서 죄수처럼 30년을 날렸고, 이제 인생에서 남은 건 주보의 숙원인 진나라 본토 타격을 해내겠다는 열망밖에 없다면서 엎드려 빌며 조괄이 함곡관을 넘은 방도를 묻는다.
조괄의 함곡관 통과 방법 이야기를 듣고나자 자기의 연구를 알려주는데 함곡관 주변의 샛길을 이용한 우회책이었다.[48] 그러나 함곡관 진군에게 들키지 않고 관중에 진입하려면 보급도 안되고 수도 많아야 기보가 각 2천 정도로 총 4천 정도가 한계라고 한다. 이 4천의 병력만 해도 무령왕이 생전에 만든 지도를 통해 식수를 구할 수 있는 수원과 진나라의 감시를 피하고 병사들의 체력까지 고려해 상세하게 짠 진로. 이 수를 조금이라도 늘리고 보급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안문군에 온 이후로 유목민들에게 배운 육포 등의 보존식을 연구하고 있었다.
조괄은 어찌됐든 진나라를 놀라게 할 비장의 수라고 판단하고 연구자금으로 50금이란 거금을 후원한다. 그 후 조괄은 방난의 무례한 말투를 강제적으로 교정하게 시키고 용병을 모집하는 임무를 맡긴다. 처음에는 어차피 복귀도 못하는데 말투는 왜 고치냐며 무시하던 방난도 조괄의 확신어린 태도에 감화된다.
결국 1년도 안되어 진의 주나라 침공이 터지자 조괄이 효성왕에게 방난을 의군의 지휘관으로 쓰겠다면서 천거해 한단으로 복귀한다. 이 때 예법을 매우 잘 지키며 효성왕의 믿음을 사서 조괄이 어이없어 했을 정도. 무령왕 대의 거물이기에 얼굴을 아는 누완도 죽는 자리라고 안타까워하나 방난에게는 주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는 것이 안문군에서 썩는 것보다 낫다면서 개의치 않는다. 전쟁 중 행보는 대진 합종군 참고.
복귀 후 벼슬을 받아 중용되었고 조연전쟁에도 참전해 악승, 염파와 같이 활약했다. 2차 대진 합종군에도 조괄, 신릉군과 같이 군사를 지휘한다. 이목과 같이 조군 기병을 이끌었으며, 함곡관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는 감격해 눈물을 흘린다.
조괄이 떠날 때 자신의 고국과 인생을 구해준 조괄과 헤어진다는 걸 슬퍼하고 따라가고 싶어하지만, 노인인 방난은 더는 군부에서 뛰기도 어렵고 파촉에 가면 더는 고향에 오기 어려워지기에 포기했다. 이후 염파, 악승처럼 조나라 군부의 원로로 대우받는다.
엘리트로서 명군의 신임을 받으며 잘 나가다가 하루아침에 몰락해 늙어버린 이력 탓에 한이 굉장히 많이 쌓였다. 조괄과도 평생의 숙원인 관중 공격을 위해서 일부러 억지까지 부려가며 만났음에도[49] 이야기가 자꾸 자신과 무령왕을 제외한 이들에 대한 욕설로 넘어가는 등 자신을 변경에 처박은 전대 조나라 기득권에 대한 분노와 자신에 대한 승인 욕구가 비대해진 듯 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리수였다고 평가하던 무령왕의 두 개의 조나라 정책조차 지지할 정도. 그럼에도 순자와 효성왕 앞에서는 예를 잘 지킨다. 낙양 공방전으로 복귀한 다음에는 초와 위의 귀족과 장수들이 자신을 인정해주자 매우 행복해한다.
4.1.4. 조정
-
인상여
조나라 상경. 전국시대를 대표하는 명신 가운데 한명으로 고사성어 화씨지벽과 문경지교의 유래가 된 지혜로운 인물이다. 작중 노환으로 죽을 날 만을 앞두고 있다. 장평에 염파 대신 조괄을 투입한다는 소식을 듣고 효성왕을 말리러 자리에 나온다. 미래 역사를 알고 있는 조괄은 뻗대지 않고 나가서 싸우지 않을 것이며 인상여가 자신을 믿어줘야 가서 지휘권이나마 제대로 쥘 수 있다며 자신을 지지해달라 부탁했고 인상여는 조괄이 분위기가 달라진데다가 무모한 자신감도 내비치지 않자 생각을 바꿔서 조괄을 지지해준다.
결국 장평대전을 치르는 동안 수명이 다해 죽었으나, 싸움은 조나라의 승리로 끝날 것이지만 조괄은 효성왕과 염파의 미움을 사리라고 예측하고는 비단 주머니에 계책을 남긴다. 평원군과 신릉군, 효성왕과 염파 등의 성격과 정세를 이용한 계책 덕분에 조괄은 무사히 조나라 중신으로 자리잡았고, 인상여의 계책을 본 조괄은 자신도 미래 지식을 바탕으로 비슷한 일을 할 수 있다고 깨닫는다.
-
우경
조나라 상경. 친진파와 대치하면서 조나라 정국을 주도하고 있다. 장평대전에서 염파와 조괄의 우주방어 전략을 지지하면서 학살자인 진의 명장 백기가 장평에 있다고 진언한다.
원래 역사에서 진나라 재상 범수의 원한을 산 위제가 조나라에 대피했을 때 효성왕이 비호해 주지 않자 위제와 같이 도망쳤으나 끝내 위나라에서도 버림받은 신세가 된 위제는 자살한다. 작중 조괄이 먼저 나서서 우경에게 무모한 짓은 말라고 조언하자 고심 끝에 그를 믿고서 버텨본다. 결국 조괄이 평원군을 데리고 진나라를 탈출하면서 간발의 차로 위제는 목숨을 건진다.
이후 중신으로 활약하며 주나라에 가거나, 조괄의 묵가대회 참가를 지지한다. 2차 대진 합종군의 막바지 당시 조괄이 천하 정세를 주도할 힘을 얻었으며, 이제 조나라에 돌아오지 않을 것을 예상한다.
-
모수
평원군의 식객 중 한명. 고사성어 낭중지추와 모수자천의 유래가 된 인물로 뛰어난 외교관이자 언변의 달인이다.
원래 역사에선 장평대전에서 패한 조나라가 멸망 직전까지 몰리자 평원군과 함께 초나라로 가서 원병을 끌고 왔다. 이 사실을 아는 조괄이 평원군에게 미리 부탁해 아직 미미한 신세였던 모수를 데려간다. 모수 역시 과거 이론만 번지르르하고 자랑하기 좋아하는 조괄이 무언가 달라졌다는 점을 깨닫고는 선뜻 동행한다.
진나라 군영에 사신으로 가 조괄의 말대로 왕흘이 대장이 아니라 백기가 잠복해 있음을 확인하고는, 한단에 정보전을 벌여 조괄에게 쏟아지던 공세 독촉을 약간이나마 늦춘다.
장평대전이 끝난 뒤 조괄은 결과야 어떻든 효성왕의 노여움을 산 이상 조나라를 떠나 위나라나 초나라로 망명할까 고민했는데, 이를 간파한 모수는 조나라는 마복군 조사의 이름을 봐서라도 조괄을 죽일 수는 없지만 위나라와 초나라는 굳이 조괄을 보호할 이유가 없다면서 조나라에 남으라고 조언한다.
평원군의 식객이지만 정작 평원군은 모수의 진가를 몰라보기 때문에 조괄이 사도 벼슬을 받아 한나라에 갈 때도 동행하는 등 사실상 조괄의 측근이나 다름없다. 조괄 역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는 모수와 상의하면 된다고 여기고 있다.
조괄이 사공이 된 이후 한동안 등장이 없었지만 평원군의 의논 상대가 되어 진나라의 주나라 침공에 맞서 낙양에서 농성하는 조괄을 도울 방법을 찾아낸다. 2차 합종군에도 조괄과 동행했다.
-
건신군
조나라에 봉군된 인물로 효성왕의 남자 애인. 말 그대로 손자까지 있는 효성왕이 총애하는 인물이라 효성왕도 견제하는 거물 왕족인 평양군 조표마저 건신군에게는 태도를 조심할 정도의 권력을 지녔다. 주인공 조괄조차 여차하면 조표에겐 한판 대거리할 생각은 했지만 건신군에겐 감히 말대꾸조차 못할 정도다.
일단 친진파는 맞지만 조괄은 아직 설득해서 의견을 돌릴 여지가 있다고 생각하며, 조괄을 어머니의 생신연회에 초대하는 등 다른 친진파처럼 조괄을 대놓고 미워하거나 적대하지는 않는 듯 하다.[50]
조괄은 친진파인 건신군에게 감정이 좋지 않았지만, 어쨌든 어머니의 고희연 초대장을 받았으니까 가보았는데 의외로 조나라 정계의 주요 라인에서 철저히 소외당하고 있었다. 심지어 건신군을 끌고와 조괄을 겁박하던 친진파 인사들조차 한명도 안 왔다. 때문에 조나라 조정의 거물이면서도 선뜻 연회에 참석해 어머니에게 축하인사를 한 조괄에게 감격한다. 이후 조괄 지지자로 돌아선다.
4.1.5. 친진파
연횡책을 지지하는 매국노 일파. 정치 외교적으로 친교 세력은 필요하지만 조나라의 친진파들은 진나라의 후원을 받고 충신들을 모함하고 자국군 수만명의 패사를 유도하는 등 명백히 선을 한참 넘겼다. 본래라면 장평대전 이후로는 분노한 여론에 의해 한동안 조용하다가 조나라 말기엔 결국 한창, 곽개 등이 득세하며 염파와 이목을 축출, 조나라의 망국을 유도한다.그러나 작중에서는 장평대전이 개변되어 이후로도 수장인 누완 등이 자리를 유지했으나, 조괄이 적극적으로 진나라의 책략을 훼방놓으면서 친진파에도 점차 큰 압박이 가해지고 있다. 여불위를 후원해 조나라 혈통을 진나라 왕위에 앉히려 드는 등 책략을 펴고 있으나, 그 결과를 아는 독자나 조괄 입장에서는 긍정적으로 볼 요소가 없다. 정작 궁극적으로는 나라를 위해서 움직인다는 이들이지만 진나라의 뇌물을 받았다는 약점 탓에 거절해야 할 일에도 휘둘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곽개 이전의 수장격인 누완은 진나라가 인접한 한,위,주 등을 명백히 멸하려 드는 정황이 보이고 자국군 수만명이 죽을 뻔 했음에도 진나라에 맞서지 마는 것이 평화라며 주장하는 매국노 그 자체다운 열변을 토한다.
조괄이 대진 합종군으로 부친 조사처럼 조나라 최고 요인으로 발돋움하자 친진파도 함부로 못 건드리게 되었지만, 그 상황에서도 조연전쟁을 부추기거나, 진의 2차 침공에서 합종군 거병을 막는 등 작품의 최고 욕먹는 세력이다. 하지만 함곡관이 개박살나고 진나라가 작살나는게 결정된 지금 현 상황에 이들이 숙청되는건 정해진 미래였지만 곽개가 생존본능을 발휘해 빠르게 진을 손절하고 연국론 지지론자로 변모 어떻게든 살아남는 생존력을 보여줬다.
-
누완
조나라 상경. 조나라의 중신이나 사실은 진나라의 뇌물을 받고 연횡책을 지지하는 매국노 간신배다. 자기 나름대로는 연횡책을 지지해 진나라의 편에 붙어야 나라가 건사할 수 있다는 논리가 있으나 장평대전에서 조나라의 패전을 계획하는 등 선을 넘겨도 한참 넘겼다.
조괄이 장평대전에 이어 점차 조나라에서 존재감을 올려가자 위기감을 느끼고 조괄을 제거하려 시도하고 있다. 조괄 역시 누완이 간첩이란 사실을 잘 알기에 자신의 체급이 충분히 오르면 누완을 치워버릴 생각이다. 조괄을 견제하는 틈틈이도 진나라를 위해 조나라에서 국정을 운영하고 있다. 상당군을 두고 한나라 건, 위제를 둔 위나라 건이나, 초나라의 대진 전쟁 협력 건 등에서 교묘하게 효성왕과 조정의 심리를 자극한다.
점차 늙어서 친진파의 수장 역할에서 물러나게 되었지만 여전히 친진파의 나팔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방난이 한단에 돌아와 주나라의 의군으로 간다고 듣자 옛 인연을 죽게 하고 싶지 않아 말리러 나왔다가 거절하자 작별인사를 한다. 이후 낙양 공방전이 진행되는 와중에 쓰러져서는 조괄이 중원을 전장으로 만들었다는 말도 안되는 험담을 하다가 병사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
한창
조나라 소사도. 원 역사에서는 무려 이목을 참소해 죽게 만든 장본인이다. 작중에서는 사도가 된 조괄의 직속부하로 등장하는데, 당연히 원 역사를 아는 조괄은 곳곳의 주요 작위마다 진나라의 간첩이 꽂혀있는 현실에 한탄한다.
-
평양군 조표
효성왕의 숙부로 효성왕이 싫어하는 데도 밀어낼 수 없을 정도의 조나라 왕가의 거물. 때문에 다른 친진파에 어느 정도 맞섰던 조괄도 쩔쩔맬 정도이다. 다만 조괄은 효성왕이 조표를 싫어하는 점을 이용해 한 방 먹일 생각을 하고 있다.
-
곽개
이목, 염파를 날려버린 한창과 더불어 조나라 최고의 매국노. 친진 매국노의 대표격인 누완이 늙어가자, 이를 대신해 채택이 고른 인물. 이를 위해서 일부러 휴전 조약을 깨고 상당군을 위협하는 쇼까지 하고 그 사신으로 오게 한 다음에 곽개가 진나라를 설득하는 모양을 내서 공을 세우게 만든다. 곽개 역시 연횡책을 지지하는 인물이라고 하나, 자국의 영웅인 염파와 조괄을 대놓고 무시하는 등 싹수가 노란 모습을 보인다.
누완이 늙어가자 친진파의 사실상 중심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본인들이 북방으로 보낸 조괄을 이제 감시할 수도 없게 되자 두려움을 느낀다.
대진 합종군 건수 이후로 합종파, 반진파와 힘관계가 역전되자, 조괄의 연국론을 비튼 하북통일론으로 육국 사이에 전쟁을 벌이게 만들어 진나라의 이득이 되게 한다. 진의 공격을 막기 위한 전쟁에서도 염파가 출정한 사이 효성왕을 꼬드겨 합종군 결성을 막으려 했지만 조괄이 선수를 쳐서 황하를 건너서 실패한다. 그러나 이를 두고 조나라 젊은이들이 억울히 죽는다면서 조괄과 염파, 이목을 오히려 매국노라고 보는 사이코패스 급의 인성을 보인다.
-
호곽
조나라 사공. 사공 직위가 상경에 준하는 고위직이고, 특히 조나라는 흉노와 국경을 맞댄 상황이라 다루는 실권만 따지면 훨씬 더 큰 요직이라[51] 친진파에서 특히 중요하게 여겼다.
그러나 호곽 본인은 늙은 나이에 한단에서 떨어져 척박한 북방에서 사는 것이라 불만이 많았기에 조괄이 후임이 되자 잽싸게 달려와서 인수를 내줘버린다. 후일 밝혀진 바로는 이목을 일부러 비난하거나, 자신의 말을 안 듣는 강직한 관리를 후임이 가장 먼저 건드릴 요직인 창조영에 앉히는 등 잔재주를 잔뜩 부려놨음이 밝혀졌다. 조괄은 일부러 사공 집무실을 비우며 미끼를 던진 후 지문을 채취해 호곽이 남긴 간첩들을 모조리 일망타진한다.
참고로 본인은 매국노인 친진파지만, 정작 아들 호첩은 후일 진나라에 맞서다가 전사한다.
4.1.6. 기타
-
조괄의 어머니
조괄의 모친으로 마복군 조사의 부인. 조괄이 장평으로 떠날 때 아들과 연을 끊겠다고 선언하고는 나와보지도 않았다. 원래 역사에서 효성왕에게 조괄에게 군권을 주면 안된다고 반대했던 굳은 심지의 여인이다. 원래 역사의 조괄이 어떤 작자인지 그리고 어떤 최후를 맞이했는지 알고 있었던 조괄도 연좌제로 가문이 멸족당하지 않으려면 그래야 한다고 이해했다.[52] 그러나 조괄이 장평에서 승리를 거두고 귀국하자 마중나와서 부모인 자신들이 보는 눈이 없었다면서 울며 사과한다.
조괄이 계속 성공을 거두자 혼사를 준비하고 싶어하지만, 조괄은 사공이 되어 대 땅으로 떠나면서 진나라를 평정할 때까지는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하자 흔한 대장부의 호기로운 표현인 줄 알고 그 뒤에 준비하자고 넘어간다. 사실은 조괄은 일생을 걸고 싸워도 진나라를 평정할까 말까인지라 평생 결혼 안합니다라고 돌려 말한 것이었다(...). 후에 조씨 가문이 성립된 걸 보면 다행히 손주는 보신 듯.
-
마복군
조사[53]
조괄의 부친. 기원전 270년 진의 대군을 연여에서 대파한 명장이다. 인상여, 염파와 같이 조나라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인물이었으나 연여 전투 이후 7년만에 병으로 사망했다. 활약한 기간은 짧았으나 이름값은 매우 높아서 조괄이 조나라에 있는 한 죽을 일만은 없다고 한다.
원래 역사에서 조괄은 입만 산 병신이라 조사는 아들 조괄을 천거하지 않았는데, 작중 조괄이 명장이자 책략가로 활약하며 수차례 진나라의 야욕을 꺾자 사람들은 아들에게 병법을 다 물려주지 못해서 그런 것 아니냐고 소문이 돌게 되었다(...)[54] 처음엔 일부 호사가들 사이에서만 돌았으나, 합종군의 극신이 적극적으로 소문을 퍼뜨렸고, 조괄이 화약을 제조하기 위해 연단술을 핑계로 초석을 몰래 들여올 때 경양도 마복군이 일찍 죽는 바람에 조괄이 잡학에 관심을 가진다고 오해했다.
조괄이 함곡관을 돌파하는 위업을 달성하고 진을 셋으로 쪼개면서 전국연일의 기치를 드높이며 기전파목이나 신릉군, 안평군, 악의, 광장 등의 명장들에 꿀리지 않을 업적을 달성한 이상 훗날 호부호자, 부전자전으로 엄청난 명성을 날릴 듯 하다.[55]
-
주보
효성왕 선선대의 조나라 국왕. 조나라의 전성기를 연 명군으로 방난을 발탁했으며, 기사호복 등의 개혁으로 조나라를 강국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후계자 문제를 엉망진창으로 휘저은 끝에 결국 사구정변으로 비참하게 아사한다.
생전에는 아직 전성기를 맞지 않은 진나라가 장래에는 조나라의 최대 위협이 될 것을 예상했고, 함곡관을 우회해 관중 본토를 공략할 계획을 세웠다. 태행산맥의 샛길을 이용하는 급습 작전을 세웠으나 사구정변으로 사망하면서 염원을 이루지 못했다. 말년의 오점에도 평원군 조승, 방난 등은 무령왕의 의지를 잇거나, 그를 조나라의 국구로 존중한다.
4.2. 위나라
한나라와 마찬가지로 진나라의 강한 압박을 받고 있다. 물론 한나라보다는 사정이 낫지만, 이 쪽도 그리 좋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56] 본래는 삼진을 구성하던 세 나라 중에 입지도 좋고 국력도 강했지만( 위문후 시기에는 전국칠웅 최강국이었다.) 연이은 전쟁의 패배와 내부의 부패로 이렇게 되었다고 한다.[57][58]10만 대군을 운용한다고 대외적으로는 알려져 있지만, 실질적인 동원력은 그 7~8할에도 약간 못 미친다. 한가구당 1명 징병 정책을 대놓고 무시하고 부자, 형제지간을 같이 징병해서 억지로 10만 대군이라고 뻥튀기한 것.[59] 결국 신릉군이 군권을 강탈해 폭주를 시작하면서 대진 전쟁의 서막을 열게 되고 당연히 위나라 조정의 뜻이 아니었던지라 위나라 조정은 대진 합종군이 만들어진 이후에도 신릉군에게 보급을 보내지 않았다. 이후 신릉군을 견제하기 위해 합종군 차장인 조괄에게 접촉했다가 조괄에게 역으로 설득당해 신릉군이 이끄는 군대에 보급을 다시 보내면서 합종군에 제대로 참전한다.
무졸이라는 오기가 제도화한 정예 중장보병이 특히 유명하다.[60] 신릉군 위무기는 이전에 집단으로 운용했던 무졸을 여러 부대에 분산배치해 각 부대의 공격력과 작전 수행능력을 높이는 개혁을 시행했다.[61] 그러나 사실 무졸은 위나라를 수렁에 가라앉히는 족쇄나 마찬가지다. 오기 시대에는 무졸군단이 말 그대로 일당백이었으나 전국시대가 절정에 오른 지금은 일반병들의 수준도 상당히 높아져서 무졸들도 전과같은 활약은 못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막대한 혜택을 받아가니 위나라가 체급에 비해 전력을 못 내게 된 것. 조괄은 객경으로 위나라 정계에 투신해 무졸을 혁파할 작전을 짠다.
위나라에도 다른 육국처럼 친진파가 득세해 위나라의 변법이나 반진행위를 막아왔다. 다만 네임드 매국노 곽개에 비할 사람은 없어서 행동이 단순해 조괄을 막겠다고 진이 힘들게 지원한 군자금도 낭비하고 있다.
진나라의 2차 관동 침공에서 한나라가 위나라가 빠지지 못하게 할 작정으로 길을 열어버리면서 30만 진군이 국토 대부분을 점거하고 수도를 위협하는 상황에 처한다. 이에 주력군을 모으는 한편 신릉군을 다시 불러들여 다시 전쟁을 준비한다. 조괄과 자순의 고생 덕인지 국토 대부분을 상실한 상황에서도 7만의 병력이 남아있었고 박랑사에서 합종군이 대승을 거두면서 끝내 나라를 지킨다.
4.2.1. 왕족
-
신릉군 위무기
전국사군자 중 신릉군. 삼진합종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위나라 정계의 거물이다.[62] 조괄이 장평에서 끝내 백기를 상대로 승리하자 조괄의 진가를 알아본다. 때문에 인상여는 신릉군을 통해 평원군을 자극해 조괄을 구하게 만드는 작전을 남겼고, 그 예상대로 신릉군은 조괄이 위나라에 온다면 벼슬은 물론 여비 명목으로 막대한 금까지 내준다면서 그를 환대한다는 조치를 보였고, 이에 자극받은 평원군이 조괄을 적극적으로 구명하였다.
원 역사에선 본인의 모든 것을 포기한 폭주로[63] 한때나마 삼진합종에 오국합종을 이뤄내어 진의 대군을 함곡관까지 후퇴하게 만든 걸물이다. 이 폭주를 아는 조괄은 한나라에서 신릉군에게 3천금을 빌려서 팔려가던 여인들을 구하려는 쇼를 했고, 신릉군도 가산을 팔아가며 돈을 마련하는 것으로 화답해서 진나라가 한발 물러서게 만든다.[64]
평원군과 조괄이 함양에서 탈출해 함곡관까지 빠져나갔음을 눈치채고 황하까지 식객을 데리고 마중나간다. 조괄이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깨닫고[65] 좀 더 터놓고 협조하고 싶어하지만 각국의 사정상 어려움에 아쉬워하며 조괄 일행을 조나라로 보내준다.
진나라가 묵가를 삼키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것에 공감. 노나라에서 열리는 묵가대회에 후영과 주해를 보내서 조괄을 보좌하도록 한다. 또한 조괄의 주나라 구원 작전에서도 핵심이 되는 인물인데, 조괄이 낙양에서 진나라를 상대로 싸워서 유의미한 성과를 내면 그걸 보고 위나라 대군을 이끌고 진의 후방을 쳐야 하기 때문. 즉 장평대전에서 보인 폭주를 낙양을 위해 보여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물론 괜히 소문냈다가 위무기가 억울하게 견제라도 당하면 안되기 때문에 조괄도 겉으로는 전혀 위무기를 신경쓰지 않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결국 조괄의 예상대로 진비를 암살하고 위군 지휘권을 빼앗아 전쟁에 개입한다. 이후 행보는 대진 합종군 참고.
종전 이후 본래는 낙양에 그대로 망명할 계획이었지만, 낙양에서는 진과 위의 암살시도를 막기 어렵기에 조괄의 주선으로 조나라에 망명한다. 조나라행 도중에 연국론을 보고 모든 건 관중에 진입해야 가능하다고 한탄한다.
그 후 조나라에서 저택과 봉록을 내려주자 영웅에게 매료된 사람들이 의식주 보장이 없더라도 식객이 되겠다고 몰려든다. 그러나 위무기 본인은 동료들을 수없이 잃고, 혈육을 배신했는데도 멸망을 조금 늦추는 것밖에 못했다면서 실의에 빠져 술만 마신다. 조괄의 도움 덕에 위나라의 변법을 성공했지만 진나라가 30만 대군으로 밀고들어오자 자신의 복귀를 허가하면서도 지난 대진 합종군 일은 사면하지 않는 안리왕의 그릇에 한숨을 쉬다가, 결국 위나라에 복귀해 다시 합종군의 상장이 된다.
위나라의 요충지 대부분의 지형을 알았기에 진군의 허를 찌르고, 조괄의 변수 창출능력에 힘입어 진군을 여러 번 격퇴해가며 결국 대량에 입성한다. 이후 20만 합종군을 지휘해 하외에서 왕전과 대치한다. 그러나 진군보다 수가 적은데도, 위의 본토 하외에서 시간을 끌수록 위나라가 망해가기에 대책이 없이 공세를 취해야 할 상황이었는데 조괄의 예상대로 장양왕이 병으로 쓰러지면서 왕전이 먼저 공세를 취하자 대등히 싸울 여건이 마련된다.
이목, 항연, 조괄이라는 인재들과 힘을 합친 끝에 전력의 열세를 극복하고 진나라 군대를 대파한다. 그러나 정작 함곡관을 넘을 수 있다는 생각은 못하고 있었는데, 마복군이 함곡관을 무너뜨리고 조나라가 공격해 관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듣자 마복군의 약속대로 자신도 약속을 지켜주겠다면서 환희에 차서 관으로 달려간다.
가히 기전파목에 비견할 수준의 군사재능을 가진 것으로 묘사된다. 당대 관동육국은 엇비슷한 전력으로 같은 조건이면 진나라에게 야전으로 진다고 봤는데[66] 신릉군은 처음으로 대군을 지휘하는데도 진나라를 이길 수 있다고 조괄이 평가할 정도이고 이 사실이 옳다는 것을 두번의 합종군에서 증명했다.
함양 공략만을 남겨두고 조괄에게 곧 설립될 중추원 의장으로 추대된다. 조괄과는 서로 평생 못 갚을 은인이라 느꼈고 파촉행을 가는 조괄과 헤어지면서 자신도 조괄의 연국을 자리잡게 하겠다고 다짐한다.
외형은 실 연령보다 몇살은 더 어려보이는 미남자. 첫 등장시 30대 중반이었는데 조괄도 처음에는 너무 젊다고 생각했다가 가까이 보고서야 나잇대가 맞다고 눈치챘을 정도로 젊은 미남이다. 다만 대진 합종군 이후에는 마음고생을 많이 한 탓인지 눈에 띄게 늙었다. 드문드문 흰머리가 보일 정도. 그나마 조괄이 무졸혁파와 진비 문제, 전쟁까지 여러 번 그의 문제해결을 도와준 덕에 원역사처럼 절망해서 자포자기하고 술만 마시며 건강을 해치진 않았다. 정확히 언급되진 않았으나, 원역사보다 10년 이상은 더 살았다. 삶의 목표가 생기고 근심걱정도 사라지니 수명이 연장된 모양.[67][68]
-
위제
위나라 전 상국. 안리왕의 이복동생으로 위무기와도 형제이나 친왕파라서 왕의 견제를 받는 위무기와는 사이가 나쁘다. 과거에 누명을 쓴 장록에게 크게 수치를 준 일이 있었고 범수가 이를 이용해 위나라와 조나라의 사이를 갈라놓으려 시도하면서 목숨의 위기를 맞는다. 위나라에서 도망쳐 평원군에게 몸을 의탁하나, 조나라 입장에서도 처치 곤란이었다. 내부의 친진파는 그냥 죽여서 성가신 일을 만들지 말자고 하고, 위나라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마냥 죽이거나 내쫓을 수도 없기 때문.
평원군이 담판을 짓기 위해 함양으로 갔으나, 효성왕은 외숙과 위나라 재상의 목숨을 교환할 생각 따위가 없있기에 위제를 체포하려 든다. 본 역사에서는 상경을 지내던 우경이 동반 도주라는 최악의 사건을 일으켜 조-위 양국의 체면을 바닥까지 떨어뜨렸으나 이번에는 조괄이 평원군과 같이 함양에 가서 위제 건과 휴전 건을 성사시키고 도주에 성공하면서 생명을 건진다.
대진 합종군 이후 고향을 그리워하면서 살다가, 조괄에게 위나라로 돌아갈 방책을 듣고 실행하면서 귀국을 허가받는 것에 성공. 조괄을 객경으로 초빙하고 그 후 조괄과 합종군을 지지한다.
-
위안희왕
현 위나라 대왕. 신릉군 위무기의 이복형. 이복동생 위무기를 좋아하지 않아 그의 의견을 거의 무시했다.[69] 때문에 뛰어난 재능에도 군사도 관직도 주지 않았다. 낙양 공방전에서도 10만 대군을 대기만 시키고 개입하지 않았는데 참다못한 신릉군이 마침내 부절을 훔치고 진비를 죽여 지휘권을 빼앗자 경악해 수도 대량에 남은 위무기의 식객들을 학살한다.
이후 무졸을 혁파하려고 자순을 상국으로 초빙하고, 조괄을 객경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본인은 매우 회피적인 태도를 보이며 외국인인 자순과 조괄을 무졸 혁파의 방패막이로 삼을 생각으로 자신은 병환을 핑계로 친위군만 데리고 궁궐에 칩거한다. 조괄은 이를 보고 치를 떨었다. 결국 조괄은 안리왕의 도움을 받지 않고 변법을 강행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고는 자순을 데리고 도망쳐버린다.[70] 진나라의 맹공으로 대량까지 위험한 상황에도 신릉군의 사면을 하지 않고 버티며 신릉군과 기싸움을 벌이다가 끝내 위무기의 약점을 잡은 채로 그를 귀국시킨다.
진나라의 평가로는 머리가 돌아가는 인물이지만, 한번만 더 크게 패배하면 위나라의 국체가 위험한 상황이라는 두려움에 제대로 된 결단을 못 내린다고 한다. 그러면서 신릉군의 주장대로 민생을 챙기지도 못한다는 점에서 실격인 군주. 또한 매우 이기적이라서 그 '효성왕'이 명군으로 보일 정도로 암군이다. 신릉군은 위나라에 있을 때 그에게 충성하고 속을 터놓았다고 하는데, 이 때문에 위무기를 자기 편한대로만 이용하면서도 만일 진작에 서로 믿어줬다면 이런 일은 없지 않았을까 하고 잠깐이나마 자책했다.
결국 위무기와 조나라 대군 6만여명이 고전 끝에 대량에 입성하자 위군 7만을 맡겨 합종군을 꾸린다. 그러나 합종군 20만이 하외에 진을 친 왕전을 상대하지 못하고 대치하게 되자 위무기가 대군을 가지고 있단 불안감에 또 사고를 칠 낌새가 있어서 조괄이 대량에 입성해 자신이 신릉군을 질투하는 척 하면서 안리왕을 달래야 했다. 박랑사 전투 이후 위무기에게 군을 빼앗으려 했지만, 다른 신하들이 지금 발을 빼면 조와 초가 가만 안 있을 거라고 경고했다. 때문에 조괄에게 돈까지 보내주면서 합종군 내에서 깽판을 쳐달라고 비는 중.하지만 관중까지 갔으니 매우 길어질 것이다
조괄은 안리왕 앞에서 위 조정이 지난 약속과는 달리 자신을 상장군으로 지지하지 않고 위무기에게 조용히 군권을 주는 바람에 자신은 또 2인자 노릇만 한다고 불평하면서 자신이 위무기를 질투하는 것처럼 꾸몄다. 안리왕은 조괄처럼 적당히 소인배에 속물적인 사람이 호감이 간다고 느낀다(...) 조괄이 함곡관을 깨자 이제 위무기를 못 막는다고 망연자실했으나, 창평군 건을 성공시킨 조괄이 와서 연국론을 이용해 일을 크게 벌여서 중추원 설립을 주도하고 위무기에게 허울뿐인 중추원 의장 자리를 주고, 선비들의 여론을 집중시키자는 계획을 내자 찬동한다. 단 조괄은 중추원이 허울뿐인 조직으로 착각하게 했지만 사실 중추원은 위나라의 전 수도인 안읍을 중심으로 하는 위나라의 상실한 영토를 기반으로 하는 국가연합체이자 경제공동체이며 군사동맹체였기에 조괄에게 또 속았다고 생각했을 듯 하다. 그래도 위나라의 기존 영토와 국체는 유지한 채 태자에게 왕위를 전할 수 있게 했으니 참고 넘어갈 정도는 됐을 것이다.
-
위익
위나라 공자. 상국이 되겠다는 야망으로 무졸혁파를 준비하는 자순을 비난한다. 그러나 정작 무졸혁파를 못하면 위나라가 망할 거란 것도 알아서 언쟁 중도에 멋대로 말을 끊어버리는 등 매우 불쾌하게 나온다.
이후 재등장할 때 보면 안리왕과 같이 조괄과 자순이 중도에 이탈한 개혁을 꾸역꾸역 마무리했다고 한다.
4.2.2. 군부
-
진비
위나라 대장군. 본래 장평대전 이후 위나라 국경에서 대기하다가 조나라를 구하려고 폭주한 위무기에게 살해당한 비운의 군인. 그러나 여기서는 장평대전의 비극이 없었기에 여전히 위나라의 주요 지휘관으로 활동하고 있다.
대진 합종군 당시 주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10만 대군을 몰고 국경까지 왔으나, 원 역사의 장평대전 이후처럼 위왕이 진의 보복을 걱정해 개입을 하지 말라고 명령해 자리만 지키고 있다. 그러나 그 실력은 진나라도 인정하는지 따로 5만명의 증원군을 준비해서 견제중이니 나름 도움은 되는 셈.
그렇게 평고에 주둔하기를 1여년. 결국 원역사대로 신릉군 위무기가 손님으로 방문해 주해와 함께 진비를 살해하면서 원역사처럼 허무한 죽음을 맞았다.
그의 죽음은 후일 진나라가 위무기를 끝장낼 때 이용되나, 조괄은 일부러 위나라에서 진비를 거론해 친진파와 무졸들이 자신을 치는 데에 진비 건을 쓰게 만든다.
-
신원영
위나라 장군. 위나라의 사신으로 합종군 서열 2위 차장군 조괄에게 찾아와 신릉군을 축출하자고 건의한다. 이에 조괄은 당연히 신릉군이 합종군을 지휘해야 진나라에 제대로 맞설 수 있다고 판단했기에 도와줄 생각이 없었지만 위나라 안리왕을 이용해 합종군의 보급 부담을 줄이려고 시도한다. 사실 조괄도 위무기에게 견제를 당하고 있으며, 얼마 전의 신안성 보급대 저지 작전의 실패를 빌미삼아서 모욕을 당했다고 주장한 것.[71]
위나라 군사들이 신릉군의 사병화가 되는 걸 막기 위해 위나라 조정에서 직접 보급과 포상을 진행하라고 설득한다. 또한 진나라 수군에 맞서기 위한 합종군의 수군이 지금 약하므로, 자신이 군공을 세워 신릉군을 견제할 수 있도록 수군을 지원해달라고 주장한다. 고민하던 신원영은 조괄의 호언장담에 넘어가서 전방 위나라군에 군량, 조괄의 후군에 선박을 지원하도록 대량을 설득하기로 한다.
그 후에도 위나라의 사신으로 조나라에 드나들면서 위제를 귀국시키고 조괄을 객경으로 초빙하도록 만든다. 조괄이 연단술에 관심이 있는 듯 하자 이를 이용해 조괄에게 뇌물을 쓸 수 있겠다는 착각을 한다. 일단 위나라 내에서는 조괄과 그나마 친분이 있는 군부 인물이지만 조괄의 평가로는 군사적 솜씨는 별로인 모양이라서 조괄은 자신과 조나라 세력으로 변법 반대파 무졸들과 내전까지 벌인다. 이후에도 여전히 위나라에서 활동하지만 군사를 모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정치군인
-
양통
위나라의 군인. 대진 합종군 당시 신릉군의 부관을 맡았다. 다만 후영과 주해에 비할 능력자는 아닌지라 조괄도 이해하는 전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자리만 지키는 무능한 모습을 보인다. 귀국 후 위나라의 장군이 되었는데 조괄은 위나라에 사람이 정말 없다는 걸 체감했지만, 그래도 일단 위나라에 변법을 해줘야 하는 상황인지라 겉으로는 양통을 칭찬한다.
2차 대진 합종군에도 신릉군을 따라 참전해 박랑사에서 진군과 싸운다. 이래저래해도 용기나 애국심은 있는 모양이며 위나라 왕실에서 양통을 언급하지 않는 걸 보면 위무기를 배신하거나 할 능력과 인성은 안되는 걸로 보인다.
4.2.3. 기타
-
용양군
안희왕의 남총. 조나라에도 건신군이라는 남총이 있지만 정치적으로는 별 야망이 없고, 개인 행실도 나쁘지 않은 건신군에 비해서 용양군은 적극적으로 정치에 개입해 횡포를 부리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조괄이 대량에 도착했을 당시에도 대량에서 미소년들을 강제 추방시키는 말도 안되는 폭거를 저지르고 있었다.
조괄이 위나라 왕실에서 대면했을 때는 과연 엄청난 미남이었다고 한다. 조괄은 용양군의 폭거를 이용. 무졸들을 대량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다.
하는 짓은 위나라의 암세포이자, 진나라의 간첩이지만 실제로는 그냥 간신배이고, 안리왕이 일부러 반발이 심할 때 내세우기 위해 냅둔다는 묘사가 있다.
-
자순
공자의 직계후손인 당대의 지식인. 대진 합종군 이후에 위나라 상국으로 초빙된다. 무졸혁파를 위해 조괄과 사전에 이야기를 하고 있었으며 함께 무졸들을 제압할 계획을 짠다. 사실 위나라 안희왕과 조정에게 철저히 이용당하는 입장이다. 무졸혁파만 이루고 나면 자순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워서 내쫓을 생각인 것. 본인은 부디 내전 없이 무졸을 혁파할 수 있기를 희망하지만 조괄은 그럴 확률은 낮다고 평한다.
결국 변법에 반대하는 무졸들이 봉기하지만 조괄이 성공적으로 진압하자 희망을 갖는다. 그러나 친진파의 발악과 안리왕의 비협조적 태도로 일이 쉽게 끝나지 않게 되자 조괄은 사마상을 시켜서 무장한 무졸들이 모인 상구를 공격해 대파해 무졸의 도태상을 천하에 알리고, 자순과 함께 조나라로 도주한다.
그 후에는 한나라에서 쉬다 노나라로 돌아갔으나, 노나라가 망하고 실의에 빠져살다가 다시 위나라에 불려가며, 2차 대진 합종군이 함곡관을 빼앗고 관중에 진입하자 안리왕을 설득해 합종군을 추가적으로 지원하도록 한다.
-
당저
위나라의 중신. 나이 아흔이 넘은 초고령 관리다. 위나라 중신들 대부분은 무졸제도를 어떻게 하지 않으면 10년 후부터 공세를 재개할 진나라를 막을 수 없단 사실을 알지만, 무졸들의 폭동이 두려워 손을 못대는 상황인데 당저는 자신은 충분히 살았다며 두려워하지 않고 자순과 조괄을 돕고 있다. 변법이 본격적으로 시행되자 조괄과 자순에게 곧 내전을 터뜨려야 하니까 전투를 준비하자며 대범하게 나온다.
조괄과 자순이 도망친 이후 안리왕을 도와 변법을 마치고 수년이 흘렀을 때도 현역으로 남아있었다. 조나라에서 신릉군을 불러오기 위해 파견되는 등 100살이 다 되었는데도 현역으로 구르고 있다.
-
후영
신릉군 위무기의 측근. 식객으로 신릉군이 장평대전 이후 조나라를 도와야 하는데 방법이 없어 고민하자 진비 암살을 입안한 책사다.
나이를 먹고도 하급 관리인 문지기에 불과하나 그 진가를 아는 신릉군은 이미 후영을 곁에 데리고 다니고 있었다.
조괄 일행의 함양 탈출 사건에서 등장. 지친 조괄에게 지난 망명 언급부터 신릉군께 빚이 많다고 압박하나 피로한 조괄이 그의 이름을 맞추자 경악한다. 조괄을 대량에 억류하자고 제안하나 신릉군이 거부한다. 이후 묵가대회에도 주해와 함께 조괄을 보조해 이박에게 막타를 꽂는다.
낙양과 하북의군을 구하기 위해 원역사처럼 진비 암살 작전을 수립. 대량의 성문을 열어 위무기의 식객들을 대피시키고 혼자 남아 포위되자 자결한다. 이 때 나름 재주를 자부하면서도 평생 문지기로 살았고, 점차 문지기 생활에도 정을 들였지만 주민들 덕에 말년에야 위무기, 조괄과 함께 위나라를 위해 뭔가 할 수 있었음과 이 일로 많은 생명이 죽었음을 안타까워하며 눈을 감는다.
-
주해
신릉군의 식객. 본래 백정이지만 젊은 장사로 선봉장의 자질이 있는 인물이다. 진비 살해의 실행범이며, 신릉군을 위해서 이를 공표하고 대진 전쟁에서 죽을 각오로 기병대를 이끌고 전쟁마다 선봉에 선다.
야왕성, 신안성 전투에서 활약했으나 합종군의 퇴각전에 벌어진 전투에서 민지성 내부에 숨었다가 백기에게 수를 읽혀서 규의 반격에 당해 끝까지 싸우다 죽는다. 마지막 측근이던 주해마저 죽자 신릉군은 큰 심적 충격을 받는다.
-
장이
신릉군의 식객. 후일 진나라, 초한전쟁 시기까지 여러 영향을 미치게 될 인물이다. 2차 대진 합종군부터 신릉군의 측근으로 활동하면서 하내 전투, 박랑사 전투에서 싸웠다. 전쟁이 끝나갈 즈음 조괄이 신릉군을 중추원에 추대하자, 천하의 어떤 비난도 듣지 않고 신릉군이 자리잡을 세력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 적극적으로 찬동한다.
4.3. 한나라
전국시대 내내 극히 일부시기를 제외하면 약소국 신세를 면치 못했으며, 작중시기에도 그렇다. 애초에 장평대전이 일어난 이유도 한나라가 본토와 상당 17성을 연결하는 야왕성을 뺏기고 진군이 상당으로 진격하자 상당태수가 상당 17성을 조나라에게 바친 것이니 말 다했다.이 때문에 항상 진나라의 압박을 받으며 눈치를 보고 있다. 진나라에 바칠 무거운 조공을 바칠 여력이 부족해 미녀들을 노예로 팔아 비용을 충당하고, 장기적으로 볼 때는 큰 악수인 피진계[72]를 잠깐의 시간이라도 벌기 위해 울며 겨자먹기로 쓸 정도.
주나라를 멸하기 위해 가해진 공격에서도 양평과 부서 지역을 빼앗기며 크게 패전하고 있다. 그러나 조괄이 악착같이 버티면서 전황이 고착되자 위나라, 초나라가 개입한다. 한나라는 진에게 당한 게 많기에 고민했지만, 빼앗긴 야왕성과 국토를 회복하기 위해 결국 위군이 내준 야왕성을 점령하고, 초나라에 길을 내주면서 대진 합종군에 합류해 군사를 소집하면서 전쟁에 본격적으로 참전한다. 삼진 중에 가장 상황이 안 좋아서, 국력을 기울여 모은 병력이 3만에 불과했다.
대진합종군이 끝난 후에는 진나라의 관동영토를 무상으로 받아서 진나라와 다시 국경을 맞댔다. 말년에는 진나라 속국이나 마찬가지였던 원역사와는 달리[73] 반진 기조를 확실히 다잡아서 진나라가 오륙만 정도의 군대로 협박해도 굴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또한 조괄의 인기와 연국론에 대한 관심이 굉장히 높은 국가기도 하다.
진군의 재침공이 30만명이라는 말도 안되는 규모라서 막을 엄두를 못내고 서쪽 지역 대부분을 빼앗긴다. 그러나 이는 위나라가 총력을 다하게 만들기 위해서 일부러 저항을 포기하고 군사력을 보존한 것이기도 하다. 대진 합종군에서 영토를 두 배 가까이 늘리기는 했지만 제대로 복구하기도 전에 진군이 쳐들어왔기에 동원력은 5만 정도라고.
박랑사에서 왕전과 진군이 대패해 합종군이 관동을 회복하자 합종군에 병력의 대부분인 4만 병력을 보내고, 함곡관이 파괴되자 한나라는 힘을 다 쥐어짜서 합종군을 지원하는데 쓰기 시작한다.
-
환혜왕
한나라 대왕.
-
장평
한나라 상국. 그 유명한 장량의 아버지이다. 상당군을 두고 조나라와 마찰을 일으킨다. 물론 바로 직전에 진나라에게 망할 뻔하고 국토 반 가까이를 빼앗긴 사정상 조나라에게라도 위신을 세워야 했기에 무리를 하던 것. 조괄은 피진계를 언급하면서 한나라와 상당군을 두고 합의에 성공한다.
하지만 상당군과는 별개로 나라 사정이 워낙 급해서 피진계를 실행하려 했다. 그러나 진나라의 압박으로 바치고 있던 금 때문에 팔려나간 한나라 미인들을 조괄이 신릉군과 짜고서 구해주면서 반진 감정으로 나라가 뭉치고, 진나라 내에서도 삼진합종책에 대한 우려로 원교근공책에 대한 재고[74]가 이루어지면서 몇년의 유예를 갖게 된다.
진의 침공으로 주나라까지의 길을 빼앗기면서 주나라와의 연결이 끊긴다. 신릉군의 거병과 초나라가 낙양을 구하기 위해 군사가 지날 길을 열어달라고 하자, 고민 끝에 3만 병력을 장평이 직접 지휘해 합종군에 합류한다. 운 좋게도 장평이 합류한 이후 제대로 된 전투는 병량이 떨어진 장당의 진군 섬멸전 이후에는 벌어지지 않았고, 백기의 추격을 요격하는 합종군 정예에도 한나라 병력은 동원되지 않았다. 본인도 내심 '어려운 싸움은 위무기와 조괄이 다 했다'라고 좋아했을 정도.
위나라 변법에 결정타를 맺은 조괄이 한나라로 대피하면서 다시 만난다. 상국 자리에서는 내려왔으나 아직 한나라 정계에 힘이 있어서 조괄이 원한다면 한나라 객경으로 초대해서 변법을 진행하도록 돕겠다고 말한다. 물론 위나라처럼 선명한 방도가 없었기에 조괄은 거절했다.
-
풍정
한나라 상당군 태수. 진나라가 한나라 본토와 연결을 끊어버리고 상당으로 진격해오자, 진나라보다는 조나라가 낫다는 판단 하에 상당 17성을 들고 조나라로 귀순했다. 그 후 상당 주민들을 이끌고 조나라 군영에 합류해 진군과 대치했다. 염파에서 조괄로 사령관이 바뀌었음에도 대전략에 변경이 없자 안도하는 태도를 보였고, 일전 끝에 진군이 퇴각하자 감격의 눈물을 흘린다.
종전 후에도 상당의 식량사정을 두고 조괄에게 읍소하는 등 상당지역을 관리하는 것으로 보인다.
-
정국
한나라의 뛰어난 기술자. 피진계의 핵심을 차지하는 인물로 본래라면 진나라에 파견되어 치수 공사를 하면서 진나라의 국력을 일시적으로 소진시키고 장기적으로는 엄청나게 신장시키지만, 조괄이 이를 막고서 조나라로 데려온다. 그 후 조괄의 식객으로 지내면서 풍구, 열기구 등을 개발하는 일에 조력한다. 조괄은 정국을 혼자 두면 한나라가 접촉해 또 피진계처럼 엉뚱한 일을 벌일지도 모른다 염려해 사공에 부임할 때도 대 땅까지 데려갔다.
낙양 공방전이 길어지면서 한나라 조정에서 소환해서는 조괄에 대해 온갖 정보를 캐냈다고 한다.
-
한비자
한나라의 대학자. 순자의 제자 출신 유명인이다. 한나라 왕족 출신으로 위나라 변법 이후 한나라에 머물던 조괄을 찾아온다. 조괄은 연국론을 보완하기 위해 그를 만났으나 한비자는 자신이 눈치챈 연국론의 허점만 늘어놓아서 조괄을 열받게 했다. 한비자는 연국론은 허점이 많지만, 완벽한 이론은 찾기 힘드니 이제 이론의 완성에 집착하지 말고 그 이론을 지지하는 집단을 키우라고 조언한다.[75]
후일 중추원의 한나라 의원으로 임명받아 오며, 조괄의 중추원 계획이 충분히 실현 가능함을 가장 먼저 눈치챈다.
여담으로 말을 심하게 더듬어서 목간으로 의사소통을 한다. 조괄은 자기 할말만 하고는 목간을 깎는다고 시간을 번다고 이를 갈았다. 조괄은 분필과 칠판을 개발해 선물했다.
4.4. 연나라
조나라, 제나라, 위나라와 접경하고 있는 중원 동북쪽의 전국칠웅 국가. 연나라 왕가에는 주나라 왕실의 피가 섞였다. 조괄의 말로는 주요 칠국 중에서는 상대적으로 약체라고 한다. 물론 어디까지나 칠국 중에서나 약체에 변방국가인 것이지, 인접한 제나라, 조나라와는 십수만 대군을 동원해 싸울 수 있는 강국 반열에 든다. 25년 전 제연전쟁으로 합종군의 선봉에서 명장 악의가 제나라를 붕괴 직전까지 몰고 갔으며, 현재 조나라도 국경에 악승과 경사 등의 유능한 장수들과 대군을 배치해 장평대전이 벌어진 도중에도 경계를 풀지 않았다.본래 역사대로라면 장평대전으로 약해진 조나라를 대대적으로 침공했다가 염파와 악승에게 털리고, 나중에 보복을 시도했다가 방난에게 격파당하며 역으로 얻어터지는 참교육을 맛봤겠지만, 여기서는 조나라가 멀쩡하면서 연나라는 조용히 있었다. 덕분에 국력은 유지한 셈이며 조나라와의 사이도 원수 지간으로 벌어지지 않았다. 덕분에 대진 합종군에도 2만명의 병력을 조나라가 열어준 길을 통해 보내면서 참전한다.
그러나 하북을 일통하면 관중(진)에 견주는 국력이 나오기 때문에 이번에는 조나라 측에서 친진파들의 입김으로 연나라를 칠 욕심을 부리는 상황.[76] 결국 조괄을 딴 나라로 보내고 염파, 악승, 방난의 지휘로 대군을 동원한 조나라에게 대패하지만 수도 계성을 지키면서 시간을 벌고 있다. 결국 조나라에게 영지 일부와 상국 임명을 넘겨주고 협상한다. 2차 합종군에선 조나라의 요구로 3만을 동원한다.
-
극신
연나라의 장군. 방난처럼 나이 60이 넘은 노장으로, 본래 조나라 사람이었지만 주보(조무령왕)의 말년에 대나라 계획을 듣고는 망조라고 직감하고 연나라로 이주했다고 한다.
2만명의 병력을 데리고 합종군에 합류한다. 그러나 연회가 열렸을 때 일부러 방난에게 젊을 적 극신이 주보를 떠나자고 제안한 걸 받아들였으면 안문군에 버려지진 않았을 거라고 도발한다. 당연히 방난은 화를 냈고 조괄과 다른 이들이 말리지 않았으면 사달이 날 뻔 했다.
사실은 연나라의 병력을 진군과 전면전에서 소모하지 않으려고 수작을 부린 것. 방난은 기병 지휘관이라 전방에 갈 수밖에 없다는 걸 이용해 상장군 위무기가 자신을 후방에 보내도록 한 것이다.
조괄과 신릉군은 이를 눈치챘지만 지적하지 않고 그를 조괄 산하에 배속시켜 신안성을 포위하는 후군에 남긴다. 위무기의 말로는 극신이 능력은 있지만, 방난과는 달리 진군과의 전면대결에 동원할 수준은 결코 아니어서 어차피 후방에 놔둘 생각이었다고 한다.
조괄이 신안성과 진나라 수군에게 고전하자, 마복군에게 수비전의 정수를 배웠지만, 공격전은 배우지 못하지 않았냐고 묻는다. 이후 조괄의 작전이 성공해 전세가 유리해지자, 자기보신적인 성격으로 소극적이던 이전과는 달리 공을 얻기 위해 적극적으로 연군을 지휘해 진군을 공격한다. 신안성의 진군이 백기의 허가를 받고 항복하자 진나라가 하듯이 전부 갱살하자고 주장했으나 조괄은 노역을 시키겠다고 하면서 거부한다. 이에 불만이 매우 컸는지 대놓고 항명하지는 못했지만 뒤에서는 조괄은 마복군에게 수비밖에 못 배운 반쪽이 서생이라면서 뒷담화를 깠다.
이후 연나라가 조나라에게 지고 2차 대진 합종군이 벌어질 때도 현역으로 남았다. 당연히 조에 좋은 감정이 없어서 염파의 참전 요구를 핑계를 대면서 미루었으나, 신릉군이 박랑사에서 대승을 거두자 승세가 넘어온 걸 눈치채고 적극적으로 태도를 바꾼다.
본래 역사에서는 장평대전 이후에 벌어진 조연전쟁에서 염파와 악승이 실각한 조나라를 공격하다가 방난에게 패배하고 전사한다. 조괄 왈 방난이 제정신이 아닌 건 맞지만 그렇다고 싸움을 못하는 건 아니라면서 극신도 별 거 없는 작자라고 깠다. 조괄과의 교류에서 밝혀진 바로는 서열 놀이를 매우 좋아하는 성격이다. 조괄에게 창국군과 신릉군을 비교하면 누가 낫겠냐는 말을 듣더니 온갖 평을 다 했다. 소문을 오랫 동안 모아서 쌓인 자료를 토대로 그럴 듯한 말을 하는 능력이 뛰어나서 듣다 보면 흥미가 생기게 된다고 한다. 극신의 입담 탓에 조괄은 대진 합종군 사건 이후 전국에 수비전에 한정하면 최상위권 명장이라고 인정받았다. 2차 합종군에서는 박랑사 전투 이후 신릉군을 백기와 비견되는 존재로, 조괄은 여전히 쓸만한 인물 정도로 평가한다. 그러나 함곡관 돌파 소식이 들려오자 조괄을 자신의 뇌속 명장 라인 몇위에 올려야 하는지 고뇌한다...[77]
에필로그를 인물 평전으로 장식했다. 조괄을 두고 유세객(정치인, 사상가)로는 일세의 기재, 수비전에선 전국 한손에 드는 명장, 방사로서는 최고 중의 최고. 다만 학자나 전술가로는 그냥 적당히 우수한 인물로 평했다. 다만 본인이 얕보던 방난에게 처발린 이력 탓에 그닥 신뢰도는 없다고...
-
악간
연나라의 장군. 그 유명한 악의의 아들이다. 극신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합종군에 합류한다. 2차 합종군에서는 극신과 같이 이득을 챙기려면 빨리 2차 합종군에 합류해야 한다면서 태도를 바꾸고 적극적으로 나선다.
4.5. 제나라
불과 30년 전까지만 해도 진나라와 둘이서 동제와 서제를 칭할 것을 고려하는 등 칠웅 중 강국으로 꼽혔고, 명장 광장이 삼국의 합종군을 지휘해 함곡관도 깰 정도의 기세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소모가 너무 커서 관중에는 제대로 진입도 못하고, 이 것이 이전의 업보와 더해져 제나라를 경계한 이웃의 맹공으로 멸망 직전까지 갔다.25년전에 제연전쟁으로 국가가 멸망할 위기를 넘긴 후 조나라가 45만명에 달하는 대군을 동원할 수 있게 지원할 수 있을 정도로 얼추 국력을 회복했으나, 전쟁의 트라우마로 국가 전체가 소극적, 고립주의적으로 변해 전단과 군태후만이 어찌저찌 타 6국에 대한 지원을 주도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도 노쇠하여 살 날이 얼마남지 않은 상황이다. 고립주의로 타국과의 교류가 줄어들고 몽오와 같은 인재가 유출되며 군대가 약체화 되는 것도 약점.[78]
주나라의 멸망을 막기 위해 초나라를 도와 낙양에 군수물자를 보급했다. 초나라는 깨졌지만, 이후 조괄과 신릉군이 나타나 진나라를 크게 격파하자, 병력은 보내지 않았지만 막대한 군량을 낙양에 지원하면서 사실상 참전했다. 종전 후 군 태후가 사망하면서 나라가 고립주의에 접어들었다. 조괄은 진나라도 '제나라'처럼 만들어버릴 작정이다.
2차 대진 합종군 당시는 함곡관 파괴시까지 참전하지 않았지만, 진이 갈라지면서, 삼진이나 초나라보다 더한 이득을 보고 결국 전국시대의 승자가 되었다.[79][80]
-
전단
일찍이 연나라에 의해 멸망할 위기에서 제나라를 구해낸 걸물. 제연 전쟁 이후 수십년간이나 제나라의 중역으로 활약했으나 이제는 왕과 다른 신하들에게 권력을 넘겨주고 조나라에 와서 상경 업무를 하다가 은퇴해 노후를 보내고 있었다. 여전히 육국 전체에 막대한 영향력과 명성이 남아있어서 장평에서 생환한 조괄에게 만남을 청한다.
원역사에서 벌어졌던 마복군 조사와의 토론을[81] 두고는 조괄의 느낌상 일부러 그럴듯하고 위협적인 헛소리를 해서 자신을 깔보게 만들거나 상대가 화나게 만들어서 더 많은 정보나 속내를 털어놓도록 유도하는 타입이라고 한다.
조괄에게도 강하게 나가면서 자신의 말 몇마디면 지금 가난해진 조나라에게 주어지던 제나라의 물자 지원을 끊어버릴 수 있다고 위협한다. 그러나 조괄은 역사지식으로 제나라의 현상황을 확연히 지적했고[82] 이에 결국 속내를 털어놓고 진나라가 육국보다 우세한 강함을 보이는 이유를 경제, 지리, 사회적으로 근거를 들어서 설명하며 대화를 나눈다.[83] 전단 본인은 염파 해임 이후 조나라의 패망을 예상하고 노중련을 불러서 뒷처리를 준비했는데, 조괄이 의외의 승리를 거두자 그에게 희망을 본다.
조괄에게 제나라의 보물인 즉묵용린을 건네주고 미래를 빌어보기로 한다. 그 후 조괄이 평원군과 함양에 간 사이 노환으로 결국 사망했다. 조괄은 처음에는 자신에게 계속 신경전을 건다고 마음에 들지 않아 했으나, 이후 다른 이들을 만나며 전단은 선녀였다는(...)[84] 사실을 깨닫게 되어 진심으로 그의 죽음을 슬퍼했으며, 이후 함곡관 격파 작전에서도 전단이 준 즉묵용린을 굳이 말에 달아 자신이 그의 의지를 잇고 있음을 선언한다.
-
군 태후
제양왕의 아내로 제왕건의 어머니. 현 제나라 섭정으로 고립주의적 태도를 가진 제나라에서 전단과 함께 유이하게 외부에서 뭔가를 하려고 시도하는 인물이다. 군 태후가 현역에서 물러난다면 제나라는 완벽하게 고립주의로 바뀐다고 한다.
조괄과 경양이 찾아오자 경양에게 초나라의 실태를 꼬집으며 자신은 한참은 건재할 것을 과시한다. 그리고 조괄에게 진나라를 막으려면 작고 간접적인 것 여러 번보다 보다 크고 직접적인 무언가를 보여줘야 한다고 말한다.[85] 그리고 자신이 없으면 제나라가 다른 나라에 간섭하지 않을 것을 은근히 흘리는데 당황한 경양과는 달리 차분한 조괄을 신기하게 바라본다.
초나라가 주나라를 도와 진을 치려는 계획을 지지하고 자금을 지원했으나, 초나라 장수 굴격이 패배하고 그나마 진에 맞설만한 조나라도 생색만 내자 이미 졌다고 판단한다. 그리고 자기 눈치를 보면 별 반응이 없는 아들 제왕 전건과 제나라 사람들을 보고는 크게 절망한다. 그러던 차 묵가들이 낙양에 간다고 듣자 허가하지 말라는 친진파의 의견을 무시하고서 금과 명분을 제공해 묵가를 돕는다.
묵가와 조괄군이 힘을 합쳐서 낙양을 지켜내고 합종군까지 결성되자 위나라의 보급을 못 받는 신릉군을 위해 20만 석의 군량미와 소금 등의 물자를 보낸다. 보내면서 관동의 평화를 지키자는 각서에 신릉군과 조괄의 수결을 받은 건 덤. 종전 후 평원군과 같은 해에 사망하면서 제나라는 고립주의로 전환한다.
-
노중련
전단의 자택에서 신세를 지고 있는 제나라 식객. 사실은 전단이 장평대전의 패배를 예감하고 조나라의 명줄을 연장시키기 위해 불렀다. 그러나 조괄이 장평에서 생환하고 전단과의 대화에서도 뛰어난 판단력을 보여주자 그를 인정하고 손님으로 그와 친분을 가진다.
전단이 사망한 후 조괄에게 의탁한다. 순자에게 조괄에 대해 전해서 둘을 만나게 한다. 이 때 순자가 강하게 부탁해 조괄에게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조괄이 눈치채긴 했지만 나름 미안한 감이 있어서 그 후로는 그 누가 요구한다 해도 조괄에게 전부 털어놓겠다고 약속한다.
제나라에 매인 몸이라 대 땅까지 따라가지는 못했으나, 계속해서 편지로 교류하고 있다. 조괄이 돌아와 관직을 반납하고 낙양으로 떠날 때도 배웅하며 의군을 도울 방법을 찾겠다고 한다.
대진 합종군 종전 후에는 위나라 변법 이후 연단술에 빠진 조괄을 보면서 한탄했으나, 조괄이 다시 합종군에 복무하러 일어나자 기뻐한다.
-
상부영
제나라 묵가 대표. 진나라 별묵의 자금 공세에 먹혀가는 묵가의 근본 정신을 지켜야 한다는 파벌이기에 조괄이 함곡관을 날아서 넘었다는 소문을 믿고 조력을 요청한다. 묵가대회에서 조괄에게 배운 고무동력기로 묵자의 전설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해야지, 현실정치에 몸을 담그면 안된다고 주장한다.
조괄의 계략이 먹혀들어서 진묵의 묵가 장악을 막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조괄은 다음 묵가 대회를 대비할 것을 조언하고, 감사의 표시로 제나라 묵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보증표인 패를 넘긴다.
진의 주 침공전에서 조괄이 의군을 일으키자 합류하기 위해 700명의 동료들과 함께 낙양으로 향한다. 가봐야 헛된 죽음일 것이라 짐작하면서도 자신이 묵가에 받은 감동을 잊을 수 없기에 각오하고 가는 것. 다행히 군태후의 지원과 등릉박 일행의 합류로 2000명에 달하는 유의미한 군세가 되어 낙양에 합류. 조괄과 함께 낙양 수성전을 벌인다. 별묵이 묵가의 병법은 대개 알기에 걱정했으나 조괄이 개발한 기중기로 초전부터 적의 공성장비를 대부분 파괴하는 전공을 세운다.
낙양 해방 이후 귀국했으며 수년 후 노나라를 지키기 위해 와서 재회한다. 그러나 노나라는 주나라와 달리 항전할 의지가 없었고 결국 초나라군을 막을 수 없었다. 이 때 조괄에게 혹시 묵가의 의지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자신에게 올 수 있냐면서 후일 파촉 점령의 의지를 드러내자 찬동한다.
함곡관이 무너지자 제자들을 모아서 조괄에게 합류한다. 이 때 등릉박과 협의 끝에 묵가의 비공 원칙을 어기더라도 조괄과 함께하려 했지만 다행히 파촉 정복은 순조롭게 이루어져서 그런 일은 없었다.그 후 파촉의 중신이 되어 연국론을 정착시키는 일에 열중하며 일생을 보냈다.
-
전학
제나라 장군. 군태후를 보러온 경양과 조괄에게 자국의 군을 사열하여 국력을 과시하려 한다. 하지만 그 군대가 기병대신 전차만 많은 구시대적 구성을 하고 있었고, 이에 제나라가 합종에 이바지하길 바라는 조괄은 한탄하고, 은근히 제나라를 칠 생각이 있던 경양은 좋아한다. 조괄이 은근슬쩍 전차 병종의 도태를 지적하나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결국 조괄이 대놓고 진나라가 삼진과 타국을 멸하고 나면 제나라 차례라고 하지만, 전국칠웅의 균형은 흔들려도 깨지지 않는다면서 근거없는 자신감을 보인다.
-
후승
제나라 중신으로 대표적인 친진파. 어떻게든 외부에 영향력을 투사하려는 군 태후를 이해하지 못하며, 나라를 지키려면 진나라와 동맹해 연횡책을 따라야 한다고 믿고 있다. 군 태후 사망이후 제나라를 사실상 고립주의로 돌렸다. 조괄이 즉묵용린을 가지고 돈을 요구하자 1만금을 내준다.
함곡관 붕괴 이후 제나라는 손해를 하나도 안 보고 국체를 안정시킨 승리자가 되면서 제나라의 정권을 장악했다. 그럴 때 모수가 와서 연국론을 인정하고 합종군에 참가할 것을 제안하자 조괄의 능력을 보면 해볼 만 하다면서 긍정적 신호를 준다.
4.6. 초나라
춘추시대부터 진(晉)나라와 이극 체제를 이룰 만큼 강국이었고, 전국 시대에도 진(秦)나라와 천하통일을 다툴 나라로 평가받았지만, 초회왕의 뻘짓과 백기의 공격으로 형주 중부에 해당하는 수도 영과 부수도 언을 빼앗기고 구 오나라, 월나라 땅으로 수도를 옮긴 상태. 이 때문에 계속 진나라에 대한 복수를 열망하지만,[86] 백기 때문에 번번히 깨지는 상황.[87]그렇게 합종군에서 활약했지만 그 이후 노나라를 공격하거나, 제대로 된 구상 없이 수도를 거양으로 옮겼다가 진군의 공세 사정권에 들어오는 등 국력을 낭비하며 트롤짓을 하고 있다. 진의 대공세를 저지하기 위해 다시 합종군을 결성하기 위해 전군을 소집했지만 거양 수도 이전의 예산 낭비 탓에 간신히 7만. 그것도 정예도가 이전보다 확연히 떨어졌다고 한다. 게다가 함곡관 돌파 후 자오곡 대치가 길어지자 자기들만 남군을 돌려받고 발을 뺄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협상은 관중에 파견된 초나라군이 진군의 기습으로 큰 피해를 입으면서 엎어졌다.
창평군이 초나라가 회복하려던 남군을 창평군을 내세워 가로챘고, 후일 초의 10만 대군도 수전에서 압도해 싸우지도 못하고 물러나게 만든다. 초나라가 몇번이나 조괄을 고생시키고 도움이 안되었던 탓에 일부러 초나라 유리할 일을 해주지 않았다고.[89]
-
고열왕
현 초나라 대왕. 진나라와의 전쟁으로 나라가 수십만의 인명과 수도까지 이전해야 한 아픈 과거 직후 즉위한 왕이다보니[90] 반진감정이 심하다. 주나라 합종군 작전도 실패한 임무군이 정계에서 매장되어도 무시했으나, 조괄이 의군과 초나라가 모아둔 군량을 이용해 1년이 넘도록 버티며 여론을 반전시키자 임무군과 경양을 복귀시켜 다시 진나라를 칠 준비를 한다. 위나라의 거병 사실을 제나라에게 전해듣자 곧바로 10만 대군을 출진시킨다.
그로부터 수년 후에는 거양으로 수도를 옮겼으나, 고기 방패가 되어줄 위나라가 일격에 무너지자 당황하며 항연에게 7만 군대를 맡겨 출진시킨다. 진나라 사신 모초에게는 자신은 반대하지만 중신인 춘신군의 의견이 다르니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앞세워 협상을 진행한다.
-
임무군
초나라 군부의 1인자. 초의 수도인 영과 언을 지키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노력했으나 백기에게 연패하고 초에 이를 갈고 있다고 언급된다.
전단의 조문을 위해 조나라에 방문한다. 초나라 군부의 일인자가 방문한다는 것에 조나라 조정은 긴장했는데, 아니나다를까 조만간 진나라를 공격할 예정이라면서 조나라가 휴전협정을 맺은 것은 알고 있지만 군마 수출 정도는 상관없지 않냐면서 협력을 부탁한다. 조괄의 명성 또한 알고 있어서 함곡관을 넘은 방법을 궁금해한다.
진나라의 목표가 된 주나라와 연합해 진나라 군에게 반격할 계획을 짜고 있다.[91] 제나라의 후원을 받고 믿을만한 굴격이라는 군인까지 파견했으나 진나라의 매복에 크게 패해 굴격도 전사하자 절망해 칩거한다. 1년 후 조괄과 하북의군이 명성을 떨치며 진나라를 막아내자 고열왕이 복귀시켜 다시 출진 준비를 한다.
본래는 자신이 출진할 생각이었지만 춘신군이 경양을 추천하면서, 한 정치 파벌의 대표격이자 전국에 먹히는 상징을 가진 자신들은 나가면 신릉군과 마찬가지로 엮인다고 말하자 납득한다. 2차 대진 합종군 이후에도 현역에 남아있었고 춘신군과 함께 수군을 몰고 남군을 탈환하려 했으나 조괄의 촉군에게 패전한다.
-
경양
초나라 장군이자 묵가. 묵가가 진나라인 거자의 밑에서 흡수되는 걸 막기 위해 노나라에 왔다. 그러나 이박이 침략을 부정하던 묵자의 사상에 대해 언급하자 전혀 반박하지 못한다. 사실 조만간 초나라가 노나라를 공격할 계획이었기에 경양이 여기서 부정했다가는 초나라의 국책에 반대한다고 오해를 살 수 있었기 때문. 그러나 조괄이 대놓고 묵자의 사상이 시대에 비해 너무 빨랐을 뿐 언젠가 맞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식으로 반박하자 자신도 일단 우겼어야 했다고 감탄한다.
묵가대회에 참석한 후 조괄과 함께 제나라 군태후를 찾아보려 제나라로 가며 겸사겸사 유사시 제나라를 치고자 제나라를 정탐하고, 이를 꿰뚫어본 조괄은 합종을 할 생각은 안 하고 서로를 칠려만 하는 관동육국의 현실에 한탄한다. 고열왕의 낙양 전선의 진을 향한 전쟁 준비 명에는 냉정하게 아직 초나라 입자에서는 그렇게 유리하지 않다는 현실을 지적하나 고열왕의 의지가 굳자 명을 따른다. 위나라 덕에 초나라가 개입하는 것이 확정되자 춘신군 대신에 10만 병력의 지휘를 맡아 북진한다.
낙양 인근에 도착하자 화살에 편지를 묶어 자신의 도착을 알리고, 4만 대군을 이끌고 수백리를 다시 행군해 우회. 낙양의 북문을 들이친다. 북문에는 병력이 적었기에 진군의 패사는 확정사항. 조괄 역시 이를 예상하고 호응하며, 경양의 승전은 분명하다고 판단한다.
그런데 이길 거라고 생각은 하고 술을 마셨는데도, 조괄이 안에서 북쪽에 맞춰서 호응해준 덕에 싸움이 순식간에 승리로 끝나버린다. 이에 이겼음에도 속내를 완전히 읽혔다는 기분에 황당해한다. 그 후 한나라까지 더해 13만이 넘는 대군이 모이자 신릉군이 진군과 정면승부하기 전에 도와야 한다고 판단해 패주한 장당의 5만 진군을 추격하려고 하나 조괄이 신릉군이 이길 것이니 제대로 적기를 노려서 공격하자고 하자,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조괄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었고[92], 합종군의 지휘권 일원화를 위해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기다리기로 한다.
그러나 조괄의 예상대로 신릉군은 대승을 거두었고, 당연히 역으로 경양은 조괄의 의견을 따르기로 하나 조괄은 미래지식 치트는 이번 전장에 더 통할 것이 없다면서 경양을 지휘관으로 추대한다. 이에 경양은 조괄이 합종군을 위해 일부러 양보했다고 생각하고 감탄한다.
신릉군의 위군과 합류한 이후 그를 상장으로 인정하고 차장군 자리나 제나라의 수결까지 거부하면서 은근슬쩍 자기 이득만 우선한다. 다만 제법 성격이 좋은 편인데, 조괄이 자기 마음대로 묵가를 돌려보낸 걸 듣고도 싫은 말을 하지 않거나[93], 신안성 수전에서 패배에 가까운 결과가 나왔어도 차장군 조괄에게는 절대로 티를 내지 않았다.[94]
이후 섬성과 함곡관에서 3개월을 대치하다가 퇴각하게 되나, 추격하는 백기와 야전을 벌일 때 정예 2만을 데리고 참전한다. 이 때 과거 영과 언이 공격당할 때 참전했지만 백기에게 초군이 무너지는 것을 봤었고, 백기와 정면에서 못 싸운다고 생각해 우회기동을 주력전술로 삼았음이 밝혀진다. 민지 전투에서도 우회를 시도했으나 조괄이 열기구로 진군이 대비하고 있다고 알리자 두 명장(위무기,조괄)이 있을 때 진군과 승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을 바꾸고 주력을 장당의 진군에 부딪친다. 장당의 저항과 백기의 야습으로 혼전이 되었으나 진군에 다대한 피해를 주고 끝내 버텨낸다.
이후 낙양에서 술을 잔뜩 마시며 승전연회를 즐기는데, 조괄의 열기구 덕에 위기를 넘겼다며 감탄하다가 조괄이 연국론을 배포하자 민지 전투의 은혜도 잊고 대놓고 화를 내고 싶다고 투덜댔다.
경양의 특징은 바로 알코올 중독자라는 것. 중요할 때는 맨정신으로 집중하기에 표면적인 불이익은 없지만, 명백한 단점이다 보니 나름 명장반열에 드는 능력자인데도 정치적 힘이나 수완이 없다고 한다. 실제로 본인도 우회에 성공하자 그냥 돌격만 하면 된다고 하면서 바로 술을 들이키고 만취했다. 결국 이 탓에 대진 합종군 이후 건강을 해쳐서 은퇴했다.
-
춘신군
전국사군자의 일원. 초나라의 중신으로 고열왕의 사전 병력 소집령이 위나라의 거병으로 헛일이 아니게되자 왕의 결단력을 칭찬한다. 본래 고열왕은 춘신군에게 군사를 맡기려 했지만, 건강문제를 들어 거부하고 한나라와의 협상만 담당한다. 사실은 신릉군이 대단한 일을 벌이기는 했지만 왕의 입장에서는 반역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일을 벌였기 때문에 정치적 영향력이 있는 춘신군이 갔다가 왕의 의심을 살까봐 두려웠기 때문.
이후 노나라 공세를 준비하며 등릉박을 불러서 그대로 연금시켰다고 한다. 노나라 점령군을 이끌면서 조괄과 대치. 조괄에게 노나라를 합병해봤자 도움이 안될 것이라고 듣지만 이를 믿지 않는다.[95]
30만 진군의 공세로 한나라와 위나라가 버티지 못하고 초나라 수도 거양조차 진군의 사정권에 들어오자 조괄의 말을 떠올리며 경악한다.[96] 이후 고열왕을 대리해서 진나라와 영과 언 반환 협상을 담당한다. 그러나 뭐가 정해지기도 전에 전쟁이 끝나고 남군이 창평군에게 넘어가버린다. 이에 수년 에 10만 대군을 몰고 남군의 창평군을 공격한다. 조괄에게는 남군만 되찾으면 중추원에 찬성하겠다고 협상을 시도하나, 노나라 사태 이후 초나라에 감정이 안 좋은 조괄은 무시하고 화약으로 수십 척의 선박을 아작내는 모습을 보여주며 춘신군을 퇴각시킨다.
이후 원 역사대로 고열왕 사후 스캔들에 휘말려 몰락했다고 한다.
-
등릉박
초나라 묵가의 수장. 매우 과격한 근본주의자로 자기들을 도우러 온 경양이 초나라 본국 문제로 이박의 의견에 반박하지 못하자 분노해 경양에게 화를 내려다가 동료들이 제지한다. 조괄이 고무 동력기를 발명해 묵자의 나무로 된 새 전설을 재현하자 눈물을 글썽였다.
조괄의 계략으로 묵가를 지킬 수 있게 되자 감사의 표시로 초나라 묵가를 동원할 수 있다는 묵가의 패를 양도한다. 이후 낙양 수성전에서 상부영과 함께 조괄에게 가세한다. 수성전에서 묵가 제자들과 같이 매우 뛰어난 활약을 하며 장기전으로 상황을 몰고간다. 낙양이 해방된 이후 비공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조괄의 배려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후 춘신군을 만났다가 갑자기 연금당하는 바람에 노나라 공격을 막지 못한다. 2차 대진 합종군 전쟁 당시에는 해방되었고, 전쟁 막바지에 합종군에 합류한다. 등릉박과 상부영은 조괄과 묵가의 안정을 위해 한번은 묵가의 도리를 어길 각오도 했지만 조괄은 그런 걸 시키지 않았다.
-
굴격
초나라 군인. 임무군이 주나라에 파견해 진에 맞서게 한다. 합종군과 난왕까지 친정시켜 이궐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이는 오대부 능의 낚시였고, 이어진 반격에 대패해 전사한다.
-
항연
초나라 군인. 원 역사에서 진나라의 20만 대군을 격파했으나 왕전과 60만 대군의 장기전에 패배한 비운의 군인. 초나라 명문가 출신으로 주나라가 멸망한 기원전 250년대 중순에는 이제 막 20세가 된 젊은 나이의 청년이다.
경양 휘하에 종군해 참전해 조괄을 대면한다. 조괄은 항연을 탐냈지만 초나라 귀족인 항연을 스카우트할 방법이 없어서 그 산하에 있던 주문을 대신 스카우트한다. 그 후로도 합종군에서 조괄 산하로 배치되어 복무한다.
대진 합종군의 마지막 전투에서도 경양과 같이 참전했고 큰 공을 세웠다. 이후 초나라의 주력 장수로 출세해 2차 합종군에서는 초나라 지휘관으로 출전한다. 박랑사 전투에서 진나라의 장군 사마경에게 고전했으나, 중군의 변화를 눈치채고 반격하며 버티다가 끝내 사마경을 밀어낸다.
함곡관 진격 중에 진군 포로를 죽이자고 제안하나 조괄이 반대하자 불만을 갖는다. 그 후에도 진군 포로를 죽일 핑계를 찾으며 초군을 지휘해 합종군 주력과 같이 진격 중에 선봉에 선 조나라가 함곡관을 점령한 모습을 보자 바로 '마복군'으로 칭호를 올리고 진군 포로를 건강하게 관리해서 석방시켜 관중 민심을 흔들 구상을 한다.
자오곡 대치 중에 본국에서 협상을 진행하는 중이므로 진군과 싸우지 말라는 명령을 듣자 황당해했으나[97] 거역하지 못하고 합종군과 거리를 둔다. 게다가 기밀 유지가 안되어서 소문이 나 군기가 해이해지자 이를 우려하다가 몽오의 야습을 받게 된다. 직속 병력으로 독하게 버티는 사이 합종군이 몽오의 후방을 공격해서 살아남는다.
그러나 종전 이후 신릉군과 마복군이 전횡하는 걸 못 막았다고 추궁을 당해 공을 세우고도 전혀 상을 못 받았고, 이후엔 남군 침공전을 반대하다가 결국은 실각했다고 한다. 다행히 초나라가 전쟁에 실패하면서 명예회복에 성공했을 듯 하다.
4.7. 진나라
전국시대의 명실상부한 최강국. 전국칠웅 중 삼분의 일 영토와 이분의 일 수준의 인구를 가지고 있다. 그나마 비견할 만한 것은 초나라뿐이지만 질적으로는 진나라가 훨씬 더 우위에 있다. 위염의 섭정을 거쳐서 전성기를 맞았으며 지독히 엄격한 법가 통치로 강력한 군대를 보유했다. 철통의 방벽인 함곡관 안의 본토에 더해 작중 시점에는 함곡관 동쪽에도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있다.함곡관 안의 본토만 해도 생산력으로 중원 제일을 달리는데, 초나라에게 빼앗은 형주의 영과 언, 위나라에게 강탈한 안읍 등 서하 영토로 막강한 경제력을 보유한다.
경제력, 군사력, 인재풀 모두가 육국 최상위권에 달하지만 소양왕의 집권기에 활약하다 죽은 외척 양후 위염과 그에 열등감을 느낀 소양왕의 갈등과 민작 제도와 잔혹한 법가 통치를 싫어하는 육국의 백성들 문제 등 약점은 존재한다. 군대들이 전부 검은색 천이나 옷으로 무장해서 상대하는 육국에게 위압감을 준다고 한다. 조괄은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고 벌어지는 실태를 알기에 진나라를 막는 것에 양심의 가책이 없다. 대진 합종군에게 크게 패한 이후 관동 영토를 포기하고 관중에 도강언 공사를 진행하는 등 본토의 개척사업에 총력을 쏟아 10년 후 수 배의 전력으로 재공세를 시도할 예정이다.
이 와중에도 관동육국에 정치전을 걸고 있다. 그러나 수천의 금을 뿌리던 대진 합종군 전쟁 이전과는 달리 오백 금을 뿌리는 것도 아슬아슬하며, 파촉 사람들을 강제로 노역에 동원하고 있어 내부의 불만이 팽배해지고 있다. 중간에 소양왕과 효문왕이 연달아 죽는 사건도 있었지만 이 불만을 억누르고 도강언을 완성. 다시 재충전한 국력으로 수십만 대군을 동원해서 조나라의 상당을 점령하는 것을 시작으로 다시 관동 진출을 시도한다. 무려 30만 대군으로 5년 이상의 군사작전을 각오하고 있다.
천하를 통일해 평화를 가져오겠다는 명분으로 학살에 거리낌이 없다.[98] 몽오, 채택 등은 진의 변법과 명분이 옳다고 생각해 귀순했다. 순자는 진나라의 천하통일 명분을 꺾을 사상이 필요하다고 여겼고, 조괄과 함께 연국론을 창설해 반박에 나선다.
진나라의 힘 자체도 육국 최고이지만 무엇보다 무적의 방어 라인 함곡관 탓에 진나라는 일방적으로 적국에 소모전을 강요할 수 있다. 유리할 때는 함곡관 밖의 조,한,위를 일방적으로 괴롭히다 합종군에 의해 전황이 불리해지면 함곡관 안으로 후퇴하는 것. 조괄은 여러 번 진나라에 타격을 주고 방해했지만 함곡관을 부수고 관중 본토를 타격하지 않는 한 제자리 걸음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화약을 개발해 함곡관을 파괴할 계획을 짠다.
2차 대진 합종군에서 왕전이 하외에서 대패하면서 관동 확장은 실패, 조괄이 함곡관을 날려버리면서 진나라는 수십년 간의 우위를 상실하고 본토를 침략받게 되었다.
한편 조괄은 진나라의 핵심 국력 중 일각인 파촉[99]을 진 본토 공략전에서 자신의 영지로 만들 계획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다. 정확히는 수비에 유리하지만 제대로 된 정부가 들어서지 못해 진, 초에게 수탈당하다 진에 합병된 파촉을 독립시키고, 파촉과 남군을 분리해 진나라를 삼등분 시켜서 하나는 자신이 차지하고 다른 하나도 중립국으로 만들어 연국론의 근거지로 삼을 생각.
결국 패배해 관중을 제외한 남군, 파촉이 전부 영토에서 떨어져나가게 되면서 국력이 절반 이하로 떨어지게 된다. 이후 촉나라가 7번 출병해서 연국론 질서를 지켰다고 하는 걸 보면 끝내 관중에서 다시 나오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4.7.1. 조정
-
소양왕
진나라 대왕. 진나라의 전성기를 연 왕으로 통하지만 내실은 외숙인 양후 위염에 대한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다.[100] 위염 일파를 누르는 데 공헌한 범수를 재상으로 삼고 큰 믿음을 보여주나, 조괄이 바뀌면서 나비효과로 범수가 계속 실패하자 둘의 사이도 점차 멀어지기 시작한다.
결국 범수가 계속 실패해 자신도 평원군에게 망신을 당하자, 범수를 상국에서 파직시키고 중도파인 채택을 임명해 정계를 수습한다. 결국 자신은 노인이 되도록 직접 이룬 것이 없이 양후 위염의 실력에 업혀서 전국 최강국의 왕이 되었다는 굴욕을 해소하기 위해 백기를 재등용하고 전쟁을 준비해 주나라를 멸망시키려고 한다.
조괄이 주나라에서 구정의 무게를 재고 이를 근거로 표준 도량형을 제시하자 이를 듣고 자연스럽게 3,300근짜리 물건을 나를 수단을 강구하라면서 조괄의 노림수에 그대로 넘어간다. 조괄이 잔머리가 잘 돌아간다면서 함곡관을 탈출한 방도도 묻겠다고, 잡으면 다리를 자르고 입은 남겨둔다고 한다. 이후 주나라를 쳤으나 조괄에게 막혀 1년간이나 막대한 군비를 잃고 여론이 나빠지자 분통을 터뜨린다.
심지어 신릉군의 거병과 초나라의 참전으로 합종군이 결성되어 관동의 진나라 영내를 휩쓸자, 최대한 빨리 15만 대군. 그리고 수비용으로 다시 수십만 대군을 편성하라고 명하고 백기를 소환해 합종군을 상대하게 시키겠다고 결정한다.
소양왕의 기대대로 백기는 합종군의 주력이 함곡관을 넘는 걸 막기는 했지만 그 대가는 진군의 막대한 피해와 백기의 목숨이었고 그 사실을 전해듣고 실의에 빠져 나는 이제 피해 복구만 하다 죽을 것이라며 막막해한다. 백기가 전사했다는 사실을 공표하게 되면 군민의 사기가 떨어진다는 이유를 대서 병사로 발표하라고 지시를 내리고, 거기다 실의로 인해 건강 악화가 시작되려하며 원역사보다 빠르게 죽음을 맞을 것으로 보인다.
전쟁 이후 자신이 보지 못하더라도 더 강해진 진나라 군대로 관동을 평정하겠다는 야망을 가지고 조정의 총력을 기울여 관중의 관개공사를 천명한다. 이를 들은 조괄은 소양왕이 결국 머리가 좋다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다며 감탄했다. 그 후에는 위나라가 조괄과 자순을 주축으로 변법을 진행하자 예산을 쥐어짜 오백금을 지원한다. 사망 이후 효문왕, 장양왕이 즉위하나 2차 대진 합종군 전쟁에서 결국은 합종군에게 패배하면서 소양왕 치세에 열린 진나라의 전성기는 끝난다.
-
효문왕
소양왕의 아들이자 현 진나라 태자. 영이인의 부친. 대진 합종군 전쟁 이후 노쇠한 소양왕에 의해 국무를 점차 인수인계받고 있다. 역사대로라면 나이 50줄에 왕위를 이어받고 3일 후에 늙어 죽을 인물이다. 여기서는 좀 더 오래 통치할 수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정권을 이어받고 즉위한 지 일주일도 못가서 죽으면서 원 역사대로 장양왕이 즉위한다.
-
장양왕
효문왕의 아들. 조나라에 인질로 있다가 대진 합종군이 벌어진 틈에 도주해 귀국한다. 원역사대로 여불위의 지원으로 진왕이 된다. 조나라에서 좋은 기억은 하나도 없었고, 조나라를 멸망시키려고 벼르고 있다.
왕전과 30만 대군이 위나라를 휩쓸어 대부분을 점령하지만 합종군이 결성되자 일이 어려워졌다고 짜증낸다. 그래도 시간을 끌면 위나라 본토는 흡수할 수 있다고 자신만만했지만 병환으로 쓰러지면서 대전략이 완전히 어그러진다. 조괄은 장양왕이 즉위 3년만에 죽는다는 걸 알았기에 위나라 본토의 대치전을 별로 걱정하지 않았던 것. 결국 태자는 어리고 다른 왕족 직계 출신도 많은데 대호족 출신 왕전이 진의 전력을 지휘하면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알기에 신속히 복귀를 명하면서 합종군과의 결전을 서두르게 된다.
이후 합종군이 관중에 들어온 이후 몇달 못버티고 죽었으며, 그의 죽음으로 진나라의 전성기는 영원히 끝났다.
-
영정
장양왕의 아들, 작중 시작 시점엔 아직 갓난아기로 진시황의 부친 영이인은 당시 조나라 인질로 한단에 있다. 조괄은 영이인과 후일 태어날 영정을 이용할까 생각했지만 이들에게 직접 접근하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이고 이들을 이용한 계책에 대한 대략적인 구상도 떠오르지 않은 상태라 대신 이들의 뒤를 봐주고 있던 여불위에 접근했다.
하지만 이를 사전에 포착한 친진파들의 견제로 손을 제대로 대지 못했고, 대진 합종군 사태로 조나라에 계속 있으면 후일 계승 경쟁에 불리할 수도 있다고 판단한 여불위가 급히 손을 써서 영이인과 같이 진으로 도주시켰다.
홋날 진시황제가 될 예정인 사람이었으나 장양왕이 병사하고 동생 장안군이 진왕이 되면서 그가 왕이 될 기회는 영원히 사라진다. 본인이 뭔가 잘못한 것은 없으나 그의 유능함을 알고 있는 조괄은 그가 왕이 되게 놔둘 수 없었고 창평군과 장안군을 앞세워 후계구도에서 탈락시킨다. 태자였던 그는 진왕이 된 장안군에게 큰 위협이므로 적당한 구실을 가지고 숙청당하거나 독살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
범수(장록)
진나라의 상국. 본디 위나라 출신이나 진에 귀순하고 양후 위염을 축출하는 일에 큰 공을 세워서 출세했다. 진나라에 땅을 받은 응후라고 불린다. 장평대전 당시 막대한 자금을 퍼부어가며 후방에서 여론전을 벌였으나, 미래지식으로 확신을 갖고서 수비로 버틴 조괄에 의해 자신의 계획이 어그러지자 그를 제거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모든 계획이 어그러지고 평원군과 조괄이 탈출하자 평원군의 식객인 위제의 차도살인에 실패[101]하여 망신만 당한다. 그 후 책임을 지고 은퇴하며 중도파던 채택이 재상이 된다.
-
채택
범수 대신에 재상에 오른 진나라 중신. 연나라 출신이며 위염 파벌도 범수 파벌도 아닌 중도파 출신으로 소양왕의 정계의 분열을 수습하기 위해 앉혔다. 유능한 정치가이기에 주나라 공략을 백기와 함께 진두지휘하나, 조괄의 도량형 통일을 소양왕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자[102], 심상찮은 수임을 느끼고 불길해한다.
조괄을 제거하기 위해 조나라의 매국노들을 매수하며 묵가 포섭 등의 세력 확장과 암약에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이박과 상리현이 소양왕의 눈치를 보느라 대계를 그르치자 분노하나 정작 소양왕이 자기 기분대로 처분을 바꾸는 바람에 상국인 채택이 마음대로 벌할 수가 없어 허탈해한다. 조괄을 중원에서 내쫓기 위해 친진파를 협박[103]해 사공 관직까지 주게 만든다. 그러나 결국 조괄은 돌아와서 진나라의 낙양 공격을 막아내고 이에 한탄한다. 이후 합종군에 의해 백기가 전사했음을 알고 한탄하는 소양왕을 위로한다.
소양왕 사망 이후 채택도 은퇴해 강성군으로 봉군되었다. 상국은 여불위에게 물려줬으나 정계에서 여전히 주요 인물로 활동하며 30만 대군의 관동 공격도 관여한다. 그러나 장양왕이 쓰러지자 여불위와 의견을 맞춰서 왕전과 진군을 귀국시키기 위해 직접 따라나가 결전을 강요한다. 왕전과 같이 본군 지휘부에서 전황을 관찰했으나, 진군이 우세한 전력에도 합종군의 전술에 패하게 되자 공포를 느끼고 후일을 대비하기 위해 왕전을 설득해 같이 도주한다.
그 후 함곡관이 무너지고 조괄이 약법삼장 등 정치적 술수로 진나라를 압박하자 채택은 진나라 최대 실수는 조괄을 상장군으로 만든 것이라며 한탄한다. 합종군의 약법삼장에 대항해 진이 형벌을 유예하자, 자신이 믿고 따르던 진나라의 제도와 국시가 단순히 함곡관이 열렸다고 포기할 것이었냐고 회의감을 가진다. 이에 자기 인생을 허망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 반드시 조괄과 위무기를 죽이겠다 결심한다. 그러나 창평군이 반란하자 초나라 관련자들과 장안군을 증거가 없는데도 체포하려는 여불위의 명령에 반대하려다 자신도 모르게 '덕치'를 주장하는 스스로에게 큰 충격을 받는다. 이후 등장이 없는데, 관동 정벌에 적극적이던 정치 성향상 좋은 꼴은 보지 못했을 것이다.
-
이빙
진나라 촉군 태수. 내정과 토목의 달인으로 파촉 땅의 생산력을 개선하고 특산물을 찾아 진나라의 국력 상승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대진 합종군과의 전쟁에서 진나라가 큰 피해를 입자, 소양왕은 이빙을 함양으로 소환. 도강언이라고 하는 파촉의 관개 공사를 총괄시킨다. 이빙은 그 명대로 지반 자체를 파내는 대공사를 계획한다.
2차 합종군 시점에는 병사했고, 아들 이랑은 관중 전쟁의 결과를 전해듣고 순순이 촉나라의 신하가 되었다.
-
여불위
원 역사에서 조나라에 인질로 와 있던 진나라 왕족 영이인과 그의 아들 영정을 후원하여 진나라 왕에 오를 수 있게 하고, 이를 이용해 진나라 내에서 엄청난 권세를 누렸으나, 이 때문에 진왕 영정의 견제를 받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조괄은 아직 여불위가 상인에 불과하단 점을 생각하고서 그에게 접근하고 실제로 조괄의 앞에서 굽신거리는 태도만 보여준다. 하지만 역시 그 수완이 어디 가지 않았는지 조나라내 여러 친진파와 끈을 맺어둔 모습을 보여준다.
영이인 일가를 대진 합종군 전쟁 와중에 진으로 도주시켰고, 그 안에서 차분히 정치전을 벌인 끝에 급사한 효문왕의 뒤를 이어 장양왕으로 영이인을 즉위시킨다. 그 이후 공신으로 상국에 임명되어 관동 진출을 지휘한다. 장양왕이 죽고나자 자신이 미는 장양왕의 아들 영정의 안위를 위해 왕전에게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공격과 그 후의 귀국을 강요한다.
그러나 신릉군의 박랑사 전투 승리, 조괄의 함곡관 돌파로 진나라는 관중 본토에서 대전을 치르게 된다. 이에 약법삼장에 대항해 형벌을 유예하고, 다른 중신들을 전부 전장과 외국으로 보낸다. 그러나 야심을 가진 창평군이 반란을 일으키자 함양 내의 방계 왕족들과 외국 출신 신하들을 핍박하려고 해 혼란을 가중시켰고 이는 실제로 장안군의 반란을 유발한다.
결국 자오곡의 왕전, 몽오에게 장안군의 반란 진압을 위해 병사를 보내라고 명령하다가 몽오는 무모한 전투 끝에 전사하고 왕전은 자신의 명령을 거부하고서 항복, 장안군을 앞세운 합종군이 함양을 점령하자 절망해 자결했다.
-
창평군
초나라에서 진나라에 볼모로 간 초왕가의 아들. 작중 시점에서 10대 중반의 소년으로 진나라에서는 창평군을 자신들의 천하통일 첨병으로 삼기위해 군후로 봉하고 좋은 대우를 해주고 있다. 때문에 창평군도 평원군 앞에서 '우리 대진'이라고 말하면서 평원군을 비웃을 정도로 친진파가 된 상태다. 그러나 조괄은 창평군이 초왕가에 돌아간 후에는 군사를 일으켜 진에 대항하는 미래를 알기에 무례에도 그냥 웃어넘긴다.
그러나 장성한 후에도 조괄의 기대와는 달리 장성한 후에도 함양에서 진의 신하로서 정복전쟁에 조력하는 매국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조정의 중신으로서 활동하면서 은근히 정권을 노리는 야심가라서, 여불위의 견제대상 중 하나인 모양. 약법삼장에 민심을 뺏기지 않도록 함양에서도 형벌을 유예하고 다독이자는 의견을 제출하나, 곧 여불위에 의해 전장으로 나가 수송 업무를 맡는다.
장양왕이 남기는 유언과 사후 정리를 누가 맡느냐에 따라 차기 정권이 정해지는 판국에 함양에서 쫓겨나자 매우 분노했으나 딱히 방법이 없던 차에 합종군 사자로 온 역이기와, 시종으로 위장한 '조괄'의 방문을 받게 된다. 처음엔 정보만 빨아내고 처형하거나 함양에 넘길 생각이었으나, 조괄이 정체를 드러내어 설득한다. 남군을 거점으로 삼아 독립하라는 제안과 합종군의 지원 약속을 받자 거병을 결심하고, 일부러 군량고에 불을 내어 휘하 병사들을 선동해 사병으로 손에 넣는다. 그리고 함양 점령 뒤 조괄과 함께 파촉에 가는 척 하다가 남군으로 가 할거한다. 그리고 남군을 되찾으러 온 초군 10만명을 조괄의 파촉군과 함께 물리친다. 나중에 고열왕이 사망하자 군사를 일으켜 초나라를 공격한 듯 하나 조괄의 빈집털이에 당한 듯 하다.
-
장안군
장양왕의 아들 중 하나로 영정의 이복동생. 아직 어린 소년에 불과하나 미래에는 영정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는 인물이다. 조괄은 이 사실을 기억하고 창평군에게 장안군을 언급해 끌어들이라고 권하고, 창평군은 그 말대로 장안군을 즉위시켜야 한다면서 소문을 퍼뜨렸다.
여불위는 오히려 이를 빌미삼아 장안군을 체포하려고 하자 이에 장안군과 가신들은 죄다 함양에서 도망쳐버린다. 그대로 함양 북쪽의 세력을 모아서 반란을 일으켜 관중을 혼란으로 몰아넣는다.
그렇게 세력을 만들던 중 신릉군의 연국론 참가 제안을 받고는 곧바로 참가해 결국 여불위와 영정을 제치고 새로운 진왕으로 즉위한다. 조괄은 장안군의 가신들은 겉으로는 고분고분하나 실제론 관중의 피해가 복구되면 다시 파촉, 남군, 안읍 등을 공격해 진나라를 재건할 작정일 것이라 짐작했지만 중추원과 파촉, 남군의 연계라면 충분히 방비 가능하기에 그냥 넘긴다.[104] 실제로 이후 진나라는 다시는 확장하지 못한다.
4.7.2. 군부
-
백기
진나라의 명장으로 장평대전의 대학살자. 비밀리에 장평의 군권을 왕흘에게 넘겨받고 범수의 모략으로 교체된 조나라 총사령관 조괄을 도발해 45만 대군을 염파가 설계한 방어선 밖으로 끌어낸 다음 섬멸시킬 전략을 짜고 있다. 하지만 조괄이 병력을 빼지않고 버텼고 오히려 후방을 비운 척 하면서 미끼를 던지고 있다는 걸 눈치챈다. 그러나 왕계가 부절을 가지고 공세를 명하자 왕흘과 다른 장수들이 그 명령을 따랐기에 이담과 사마상의 맹활약으로 결국 장평대전에서 지고서 상당을 포기하고 퇴각한다. 그러면서 조괄의 위험성을 눈치채고 하루빨리 그를 제거하기로 결심한다.
본래대로라면 장평대전 이후 범수와 소양왕과의 마찰 끝에 자결을 명받고 장평에서 벌인 학살극을 자책하며 죽을 운명이었다. 본작에서는 반성하고 죽기는커녕 입지는 조금 줄었지만 여전히 진나라의 최고 명장으로 군림하며 육국의 위협으로 남게 된다. 이후 범수가 은퇴하고 소양왕에게 재등용되어 주나라를 멸망시킬 군사 전략을 짠다. 백기의 작전은 거의 들어맞았고, 백기 본인은 장군 규와 장당이 한나라와 위나라 등을 상대하는 동안 대군을 이끌고 상당 방면에 가서 염파의 조군을 견제한다. 이후 왕릉과 장당이 대패를 당하게 되자 합종군에 맞설 총사령관으로 기용하기 위해 소양왕에 의해 함양으로 소환된다.
그리고 민지성에서도 병력을 빼고 함곡관과 섬성에 15만 대군의 힘을 결집해 장기전으로 합종군을 상대하려 한다.[105] 그렇게 3개월간 대치만 하다가 결국 합종군이 물러나자 정예 4만명을 이끌고 합종군을 추격, 민지성 인근에서 이를 예측한 신릉군의 합종군 정예 5만과 승부를 겨룬다. 철벽같은 진용으로 합종군과 호각을 이루며, 경양의 우회를 예측해내 요격하려 하지만 기구라는 신문물을 내세운 조괄에 의해 경양이 우회 기동을 포기하면서 시간낭비만 한 꼴이 되었고 급하게 우익으로 기병만 이끌고 구원을 갔다가 합종군 보병들의 머릿수에 밀리게 되고 신릉군이 투입한 무졸들의 집중사격에 당해 전사하게 된다. 이후 소양왕에 의해 병사한 것으로 공식 발표된다.
전단과 조괄의 말에 의하면 본래 진나라가 강하기는 해도 본토만으로 천하의 힘 절반을 차지할 수준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백기가 위나라의 안읍, 초나라의 영과 언 등을 빼앗으면서 대량의 소금 생산지에 장강과 낙수의 주요 물줄기를 전부 틀어쥐면서 전국의 균형이 무너진 것. 그야말로 현 진나라의 위협을 만들어낸 장본인인 셈이다. 기전파목다운 군사능력에 비해 염파와 마찬가지로 정치적으로는 무심하거나 능력이 없는 편이다.
-
왕흘
진나라의 장군. 본래 염파와 장기간 대치하고 있었고, 때문에 응후 범수와 소양왕이 백기를 파견해 대신 사령관을 맡게 한다. 백기의 결정대로 조나라 진영에 총공세를 퍼부었지만 실패한 것을 알게 된다. 이후 왕계가 부절을 가지고 와서 기존 전술대로 후방을 치라고 강요하자 끝까지 반대한 백기와 달리 결국 명령을 받든다.
백기의 예상대로 조군 후방에는 사마상이 4만 5천의 병력으로 반격을 가해왔고, 왕흘은 어느정도 피해를 감수하며 군을 물렸으나 이담의 2차 반격으로 수천명의 피해를 본다. 결국 패장이 되어 퇴각한다. 이후 패배의 책임을 물어 왕계와 같이 파직되었고, 수 년 후에 합종군에 의해 주나라 원정군이 대패를 당하게 되자 신릉군을 잡기 위해 염파와 대치하고 있는 백기를 불러들여 교대하기 위해 상당으로 부임하러 간다.
-
몽오
제나라 출신의 군인. 범수가 백기의 영향을 최대한 안 받는 군부 인사를 만들기 위해 영입했다. 25년 전 대연전쟁 이후 무기력해진 제나라에 실망해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 진나라로 이주한 듯 하다. 진나라 군부에서 능력을 인정받고 있으며 범수가 실각하고도 별 일 없이 군부의 인사로 자리잡았다.
낙양 공방전에서 패하고 신안성과 민지성이 공격당하면서 함곡관이 합종군의 사정권에 들어오자, 합종군의 선봉장이자 시발점인 위무기를 격파해야 한다고 의견을 제시하고, 백기가 올 때까지 15만 대군을 일시적으로 지휘하게 된다. 민지성에서 15만 진군을 지휘해 백기가 오고 합종군이 지칠 때까지 수비로 일관했으나, 그런 와중에도 곡수를 통해 신안성을 구원하려고 시도한다. 1차 시도는 성공해 신안성에 물자를 보급하는 것에 성공하자, 단순히 버티는 걸 넘어서 신안성의 합종군 수군을 격멸하고 신안성을 해방할 계획을 세운다.[106] 이에 100여척의 군선과 많은 준비를 해서 수군을 다시 보냈으나... 역시 복수전을 준비한 조괄의 박간 선박들과 초나라 수군에 의해 진군이 괴멸당하고 만다.
수년 후 30만 대군을 지휘할 때는 왕전에게 상장 자리를 양보하고 일족만 참전한다. 그러나 아들인 몽무를 비롯해 일부 파벌 군인들은 이에 불만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덕분에 장양왕의 병환으로 군이 무리한 작전을 강요받게 되자 자기가 안 나가서 다행이라고 안도하며 함곡관을 지휘해 합종군의 추격을 막는다.
순조롭게 조군을 상대했으나 조괄에게 함곡관이 터지면서 대패해 후퇴한다. 그 후 왕전과 함께 자오곡에 대군을 모으고 합종군과 대치하고 있었으나, 나날이 불리해지는 전황에 정신줄을 놔버리고 만다. 다름아니라 몽오는 진나라가 옳다고 생각하고 고향 제나라의 동포들을 버리고 왔는데 합종군에게 멸망을 앞둔 진나라의 현황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 특히 자신이 무시한 제, 연, 한, 위, 조가[107] 이겨낸 시련을 진나라는 아직 그렇게 몰린 것도 아닌데 자체적으로 붕괴할 기미를 보인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이에 합종군을 깨면 자신의 인생도 의미를 잃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독단적으로 3만 병력을 동원해 초나라를 쳤으나 이 공세를 읽어낸 합종군에 의해 포위당한다. 왕전이 지원을 보낼 때까지 버티려 했으나 합종군의 맹공에 무너져 패배하게 되자[108] 자포자기하고 신릉군을 향해 닥치는 대로 돌격하다가 화살에 맞아 생을 마감한다.
-
몽무
몽오의 아들. 아버지 몽오가 수년 전 대진합종군에서 조괄에게 진 이래 왕전에게 군부 서열에서 밀린 것을 불만스레 여기고, 역전할 기회를 찾고 있다. 진나라 주력 장수의 아들인만큼 왕전에게 7만 군대를 받아 조군을 요격하는 역할을 맡는다. 이 때 전방의 왕전과 후방의 장당이 눈치채지 못한 조군의 기-보 분리 기동을 눈치채고 아들 몽염과 기병 5천명을 동원해 조나라 보병 4만 5천을 타격하려 시도한다. 그러나 기병대가 크게 패퇴하자 이를 갈며 군세를 정비해 조군을 추격하지만 끝내 막지 못하고 왕전과 합류한다.
박랑사 대전에서는 최후의 예비대 2만 5천명을 데리고 지치고 소모가 큰 왕전의 본군과 교대해 신릉군과 마지막 싸움을 벌였다. 그대로 전투에 집중했다면 신릉군과 조괄을 이겼겠지만, 후방을 기습한 조나라 기병에게 휘둘리면 사기가 떨어진 부대를 수습하지 못하고 공세에 실패하면서 패전을 확정짓는다. 그 후 관중에서 부친과 같이 자오곡에 군사를 모으나 자신이 관동 출신이라는 자각이 없던 탓에[109] 부친의 고뇌를 이해하지 못했고, 끝내 폭주를 막지 못한다.
-
몽염
몽무의 아들. 몽무의 부장으로 종군해 기병 5천을 몰고 신릉군과 조괄의 보병들을 요격하려 시도한다. 그러나 이는 협승 전술을 시도하려는 조괄의 미끼 작전이었고, 근거리에 매복하던 조군 쇠뇌병들의 사격에 기병들은 속력이 죽은 채로 수적으로 우세한 보병들과 달라붙어 큰 피해를 입는다. 결국 절반이 넘는 기병을 잃고 퇴각한다.
-
정안평
응후 범수가 심어놓은 진나라 장수. 사실 군경력도 없고 실력검증도 제대로 안되었지만, 백기를 비롯한 양후 위염 파벌을 견제하기 위해 꽂아넣은 사람이다. 때문에 백기도 정안평을 무시한다. 이 점을 노린 조괄이 장평대전에서 노골적으로 정안평에게 수작을 걸고, 이 때문에 백기가 정안평을 못마땅히 여겨서 지휘권을 압수하자, 범수는 왕계를 보내서 백기의 군권을 빼았는다.
-
이박
묵가 겸 진나라 어사. 묵가대회에서 진나라 묵가 거두인 상리현을 거자로 선출해 묵가를 진나라에서 흡수하기 위해 노나라에 온다. 고무 동력기로 상부영이 분위기를 가져가자, 묵가의 사상을 공격하는데 '수비만을 고집'하는 묵가의 사상이 현실과 어긋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묵가의 침략 반대는 많은 병법가들이 완벽하게는 실현 불가능한 사상이라고 평가하기에 다시 분위기를 가져오나 했지만, 조괄의 생생한 헛소리가[110] 가미된 반론으로 다시 분위기가 파토난다.
이에 조괄이 양심도 없이(...) 아무 말이나 막하면서 자신들을 공격한다고 여기고 대회장에서 쫓아내려고 한다. 그러나 조괄은 이박의 말실수를 유도해[111] 긍정도 부정도 못하는 가불기를 걸어버린다. 결국 상리현과 같이 실패하고 귀국했으며 이후 주나라 침공에 부역한다. 낙양 서쪽에서 장당군이 패했을 때 전사한 듯 하다.
-
상리현
진나라 묵가 거두. 묵가대회에서 묵가 거자가 되어 묵가를 진나라의 하부 조직으로 흡수할 계획이었다. 상부영과 등릉박보다 뛰어난 경력을 가졌기에 중도파에도 적잖이 지지자가 있어 상리현의 당선은 확실해보였으나, 조괄이 개입해 위염 건을 평가하게 만들자 아무 말도 못하고 조괄을 비난하고 퇴장한다.
그러나 소양왕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면서 자신들이 함양에서 벌 받을 일은 없다고 자신만만했고, 실제로 소양왕은 일을 실패한 상리현과 이박을 내치려다가 그래도 위염 칭찬을 안했으니 됐다면서 처분을 취소한다(...). 그 후 이박과 별묵을 데리고 주나라 침공전에 부역하나 등릉박과 상부영이 가세한 하북의군에게 속절없이 막혀 1년을 허비한다. 낙양 서쪽에서 장당군이 패했을 때 전사했을 듯 하다.
-
능
오대부 관직에 있는 범수의 부하. 능력을 인정받으며 위제건으로 함양에 온 평원군과 조괄을 맞이한다. 조괄은 평범한 인물이라고 얕잡아 봤으나 완전히 속아넘어가 평원군이 도망치는 걸 놓치게 된다.
그로부터 몇년 후 주나라 전쟁에 등장. 범수가 은퇴한 이후 그 부하인 오대부 능도 한직으로 내몰렸고, 미끼역의 패장 역까지 담당하게 된다. 다행히 매복도 선봉에 서서 오명을 만회했으나, 낙양에서 원수인 조괄이 나타나자 격노했으나 결국 어쩌지 못한다.
낙양에서 패전하고 합종군의 공격으로 병사를 잃고 15만 진군의 군영에 합류 후 백기에 의해 해방되어 다시 군사를 맡아 합종군에 맞선다. 조괄 탓에 인생을 말아먹은지라 악착같이 덤벼들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조괄이 열기구로 공중에서 전장을 내려다보는 것을 보고서야 함양 탈출사건의 진상을 깨닫는다. 직후 조괄이 열기구 안에서 청동 흉갑을 이용해 태양빛을 반사시켜 자신에게 비추자, 낙양성에서 똑같이 당했었던거를 떠올리며 광분하나, 한번만 더 실패하면 조정으로부터 큰 처벌을 받게 될 자신의 처지를 자각하며 조괄이 일부러 격장지계를 시전한다고 금방 마음을 다잡는다.
그렇게 종전 후에도 장당의 비호 덕에 간신히 벼슬에 남았다. 그러나 10여년 간 승진은커녕 패배자가 된 현실에 개탄하며[112] 다시 종군해 장당 휘하에서 조군과 상대한다. 그러나 조군을 끝내 잡지 못하고 박랑사 전투까지 참가. 조군과 공방을 벌였으나 패배해 장당이 뒤를 지키는 동안 후퇴한다.
-
규
주나라를 공격한 진나라 장군. 5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한나라를 우선 공격. 양성과 부서를 빼앗아 주나라를 진나라 안에 가둔 후 낙양을 침공했다. 그러나 뒤늦게 조괄과 방난이 의군을 이끌고 끼어들면서 강력한 저항에 부딪친다.
조괄의 기중기에 공성장비들이 죄다 파괴당할 위기에 놓이자 어떻게든 공성장비를 지키기 위해 병력을 추가투입했다가 방난의 흉노기병에게 기습당하지만 예비로 놓아둔 전차들과 부관들로 원진을 짜는 노련한 솜씨를 보여준다. 그러나 방난은 규가 추격을 명한 진나라 기병대를 완전히 압도한 후 유유히 퇴각한다.
결국 첫날에만 4000명의 병사와 공성장비 대부분을 상실하자 한탄하며 증원요청을 올린다. 소양왕은 노발대발했으나 군부의 변호 덕에 관직을 유지하고 장기전을 준비하면서 보루와 참호를 만든다.[113] 그렇게 1년여가 지나는 동안 몇번이나 공성을 시도했으나 끝내 군비와 인력만 낭비하고 낙양을 떨어뜨리지 못해 좌천되어 장당의 부관이 된다.
그후 민지성 전투때 백기의 전사 이후 후퇴하던 도중 자신이 한 계략을 역이용해 진나라군으로 변장한 합종군의 급습을 받고 전사한다.
-
장당
진나라의 장군. 규가 주나라를 공격할 동안 후방인 평고에 진을 친 위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5만 병력을 이끌고 야왕성에 도착한다. 그렇게 오랫동안 야왕에만 있었으나 규가 계속 실패하면서 좌천되자 대리하는 지휘관이 되어 2만의 증원병력을 더해 낙양을 치게 된다. 규가 1년여를 쳤음에도 격렬히 저항하는 낙양을 보고 답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주변 제후들의 반응이 심상찮았기에 막대한 피해를 각오하고 공세를 명한다.
그러나 그 행태를 보고 외부 정세의 변화를 깨달은 조괄도 작정하고 수비를 지휘하면서 실패했고, 결국 위나라가 야왕성을 점령하면서 후방이 끊기게 된다. 공세를 중단하고 위나라군의 공격을 막을 방어전을 준비하는 사이 동남쪽에서는 초나라의 10만대군이 출현한다. 이에 7만의 병력으로 낙양을 봉쇄한 그대로 초나라와 야전을 벌여 그들을 격파하면 낙양도 같이 떨어뜨릴 수 있다면서 각오를 다지지만, 경양의 대우회 작전과 조괄의 호응으로 낙양과 초나라군이 연결되면서 끝내 실패했다. 왕릉의 대패 직후에 총공세를 취하는 합종군에 맞서 싸우지 않고, 규와 같이 소수의 부하들만 거느리고 도망간다.
이후 백기의 명으로 15만 진군에 합류해. 일군을 맡아 민지 전투에서 대진 합종군과 싸운다. 자신의 허를 찔러 7만 병력을 잃게 한 경양과 싸우나 분노로 인해 물러날 때를 못 읽은 실수였기에 결국 난전 끝에 물러난다.[114] 어쨌든 이 때 군을 지휘해 버틴 공을 인정받아 장군으로 복귀해 2차 침공에도 참전한다. 7만 대군을 가지고 늪지대에서 조군 기병을 봉쇄하는 왕전의 작전을 수행하려 하나, 하필 상대가 이목... 이목의 야습으로 규가 퇴각하자 군을 정비해 반격하려 했지만 이목은 상대하지 않고 다시 복귀하면서 시간만 낭비한 셈이 된다.
하지만 박랑사 전투에서 이목의 조군을 상대하며 치열하게 싸우나 결국 패배. 군대의 뒤를 지키다가 장렬히 전사한다.[115]
-
채위
장당의 부관. 장당이 야왕에서 낙양 방면으로 떠난 이후 야왕에 남은 3만명의 군사를 관리감독하고 있었으나 예상못한 신릉군의 기습에 당황해 항전해보려 했으나 끝내 패하고 전사한다.
-
사마경
진나라 명가 출신의 장군. 낙양 공방전이 길어지자 수공을 이용하자는 의견을 낸다. 물론 그렇게 하면 낙양의 보물이나 천자의 안위도 보장할 수 없기에 소양왕에게 거절당한다.
합종군의 퇴각을 추격하기 위한 백기의 추격대에 합류하면서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진군 우익을 맡아서 합종군 좌익과 싸운다. 이쪽 방면은 낙수와 중군 탓에 위아래가 다 막혀서 버티기에 들어가면 소모전밖에 답이 없었는데, 백기는 이걸 알고 사마경에게 우익을 맡겼다고 한다. 사마경은 명가 출신에 인덕이 좋아서 동료와 부하를 챙기면서 사방을 살피는 데 능하고, 본진을 지키는 게 단순한 만큼 다른 전선을 지원하기 쉽기 때문.
사마경은 백기의 기대대로 전방의 합종군 좌익과 싸우면서도 수천명의 병력을 중군에 보내서 조괄의 중군을 괴롭게 만들었다.
장당에게 백기가 전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지휘권을 승계받게 되고, 승산이 없어졌다는 것을 깨닫자 밤중에 허장성세로 합종군을 속이고 전면 퇴각할 것을 전군에 명령한다.
그러나 소양왕의 조정에서 함양이 위기라는 오보가 전해지자, 크게 당황해 추격대를 막기 위해 남긴 규의 병력을 버려두고 퇴각하다가 조괄의 기습으로 후위부대를 잃게 된다. 심지어 전방에서는 방난의 기병들이 나타나자, 흙먼지에 속아 멈추는 바람에 신속한 복귀도 못했다.
수년 후 왕전 휘하에서 다시 복무. 7만 군세를 이끌고 한나라 신정 땅에 나타난 초나라 7만 대군을 견제한다. 박랑사에서 일어난 합종군과의 결전에서는 초군을 상대로 우세했으나 중군의 전술에 휘말려 빈틈을 보였고, 결국 전세 전체가 기울면서 본인도 밀리자 여유를 두고 후퇴한다. 관중에서는 함양에서 전선과 수도의 의견을 전하고 조율하는 역할을 맡는다.
-
왕전
기전파목의 일인. 진나라 어전에서 백기의 전사소식을 어떻게 할 지 묻는다. 조괄은 백기가 없어도 왕전으로 대표되는 진국 차세대 명장들을 어찌할지 고민해야 했다.
진군 30만을 동원하는 2차 대전에서는 진군 상장군으로 총지휘를 맡는다. 30만 대군으로 위나라의 하내~하외 일대를 순식간에 장악하고 대량을 노리나, 신릉군과 조괄이 하내에 등장해 환기와 양단화와 맞붙자 경계한다.
초나라 군을 견제하며 진군을 나누어 신릉군이 있는 조군을 포위섬멸하려고 하지만 이목의 기동력과 조괄의 작전 탓에 장당과 몽무가 패배하고 놓친다. 결국 자신 말고는 조군을 막을 전력이 없어지자, 차라리 합종군이 모이면 자신들도 재정비한 진군의 총력으로 상대하기로 하고 군을 다시 합친다.
그대로 기다리면 수도권이 공격받은 위나라가 말라죽는 것을 알기에 저지른 수였으나... 장양왕이 병환으로 쓰러지면서 왕전은 오히려 자신이 움직이라고 강요받게 된다. 퇴각을 위해서는 합종군과 한 번 이상 싸워서 진격을 저지할 필요가 있었는데, 장평대전에서 그러했듯이 먼저 공격하는 쪽이 손해를 보는 상황이기에 움직이라고 강요받자 함양에서 자신을 반역자로 의심하는 것이냐고 두려워하며 결전을 준비한다.
박랑사에서 벌어진 대전투에서는 괜한 기책보다는 우세한 전력을 살릴 수 있는 장시간 소모전, 힘 승부를 택했으나... 그 우세한 전력을 너무 집중한 것이 문제가 되어서 신릉군과 이목의 전술에 차례대로 당해 대패한다.[116] 책임지고 싸우다 죽으려 했으나 채택의 설득으로 함께 함곡관으로 후퇴한다.
그러나 함곡관도 붕괴하자 자오곡까지 후퇴해 몽오와 같이 최후의 진나라 대군을 지휘한다. 자오곡에서 다시 장기전을 시도하나... 조괄에 의해 군량 대부분을 수송하는 포사도를 책임지던 창평군의 이반, 함양의 내분으로 인해 전세가 불리해진다. 심지어 몽오까지 상태가 안 좋아졌음에도 분투하나 결국 몽오의 폭주를 막지 못했다. 이후 합종군이 사방을 조여오고 군이 무너져가자 진나라의 국체를 위해서 합종군에게 항복한다.
기전파목의 일원인 만큼 전략·전술적 능력은 나무랄 데 없었고 처세 또한 문제가 없었으나 상대와 상황이 너무 안 좋았다. 필승전략을 세우고 잘 실행하고 있는 와중 장양왕의 위독으로 불리한 싸움을 강요받게 되어 신릉군과 전면전에 나서게 되었고 함곡관 돌파 이후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 패배하게 되었다. 진나라와 왕실을 지키기 위해 항복한다.
-
환기,양단화
진군 장수들. 왕전이 25만 군세로 하외를 휩쓸고 대량을 칠 동안 하내에서 합종군 창설을 방해하는 것이 임무로 받아 5만 군대를 지휘했다. 1만 정예기병을 동원해 조나라 기병들과도 호각으로 싸우며 신릉군을 위협했으나, 신릉군의 미끼 작전과 조괄의 급조 방벽에 당해 기병 상당수를 잃게 되면서 조군을 치기 어렵게 된다. 게다가 이목의 조군도 합류하면서 불리해지자 하내를 포기하고 왕전의 본군에 합류, 박랑사에서 대치하는 동안 하외를 황폐히 만들었다.
박랑사 대전에서는 각자 왕전 휘하에서 부대를 이끌고 차례대로 조군 기병을 견제했으나 차례대로 박랑사 숲으로 병력을 밀어넣는 바람에 군사 대부분을 잃거나 패주한다.
4.7.3. 기타
-
청 부인
진나라의 광물 재벌. 진 조정의 명을 받고 광물 수집에 혈안이 된(것처럼 위장한) 조괄에게 접근해 귀한 광물들을 거저나 다름없이 선물한다. 조괄은 이를 이용해 초석을 손에 넣었고, 함곡관을 파괴한다.
-
양후
위염
양후로 봉군받은 진나라의 섭정. 장평대전 5년 전에 물러났으나 섭정으로 수십년간 활약하며 엄청난 공을 쌓은 인물이다.[117] 소양왕은 장성하고는 위염을 몰아내려고 몇번이나 시도했으나 매번 실패했고, 위염은 범수에게 밀려나고 도읍으로 떠나 곧 죽었음에도 그의 파벌은 진나라의 핵심에 위치했다. 때문에 소양왕은 위염에게 엄청난 열등감을 가지고 있으며, 진나라의 내부문제는 대부분이 위염과 소양왕의 갈등 때문에 발생한다.
4.8. 주나라
-
난왕
주나라의 천자. 50년이 넘게 재위에 있는 노왕. 조나라 왕자인 조가가 구정의 무게를 묻는 무례를 저질렀어도 손자뻘인 아이의 순수한 행동이라고 여기고 웃어 넘기는 도량의 소유자다.뭐, 웃어넘기지 않으면 조나라가 쳐들어올테니 별 수가 없겠지만.
진나라의 위협에 죽더라도 싸우지도 않고 자기 대에 나라를 망하게 둘 수는 없다고 전장에 나선다. 이궐에서는 이겼으나 이는 진나라의 미끼 작전이었고 이어진 반격에 대패해 낙양으로 도망친다
조괄이 의군을 몰고왔을 때 처음에는 경계했으나, 표면적으로나마 자기 명령을 들어주자 결사항전하기로 마음을 굳힌다. 제딴에는 마음을 굳게 먹었지만 늘그막까지 제대로 된 전쟁에 시달린 적이 없어서 허울뿐에 불과했다. 그나마 조괄이 난왕의 항전 의지가 중요하기에 신경을 써주는 편.
그러나 점차 난왕에게 무리한 부탁을 하고, 난왕도 조괄이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군권을 쥐어서 어떻게 못하는 등 사이가 내심 험악하다.
하지만 그 후 원군이 오고 전부 이기자 그 간의 악감정은 다 털어내고 다시 조괄을 신임한다. 다만 원역사대로 수명이 얼마 안 남아서 건강이 나빠졌다고 한다. 이후 얼마 안 가 사망한 듯.
-
시영
주나라 대부. 조괄이 하북의군을 이끌고 낙양 근처에 도착하자, 조괄을 찾아와 낙양을 건드리지 말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조괄 입장에서는 진나라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낙양과 그 시민들이 다치더라도 결사항전해야 했기에 무시한다. 도망치지 않고 남아서 난왕을 보필하며, 조괄은 자꾸 딴지를 거는 시영에게 칼을 만지작거리거나 고함을 지르는 걸로 넘겨버리고 있다.
하지만 결국 조괄의 말대로 낙양이 해방되자 조괄에 대한 원한을 풀고 예를 지킨다.
4.9. 촉나라
진나라에서 해방된 파촉 땅. 당시에는 연나라 이상가는 중원 변방으로 취급받았으나 실제론 진나라 국력의 한 축을 맡았던 땅이다. 도강언이 완공되 흉년이 들지 않게 된 땅이기도 하다. 그리고 소금광산도 상당수 존재한다. 조괄은 파촉의 잠재력이 중원의 지역들에서도 충분히 상위권에 들어간다고 알고 있었기에 2차 대진 합종군 이후 파촉을 분리해 조가를 왕으로 옹립해서 촉국을 세운다.파촉은 수비에 유리하고 화약의 힘까지 더하면 철통수비가 가능했으며, 파촉 사람들도 중원의 힘 과반을 차지하는 강국이 나타나면 파촉이 당해낼 수 없다는 걸 지난 식민 생활로 깨달았기에 연국론과 묵가를 지지하게 된다.
- 촉왕 조가
- 상국 조괄
- 등릉박
- 상부영
- 이담
- 주문
5. 개변된 역사
-
장평대전의 승패역전
장평의 대전쟁은 여전히 벌어졌지만 조괄이 염파의 작전을 이어받으면서 역사가 변한다. 조괄의 우주방어를 버티다 못한 백기가 전면공세를 시도했으나 염파가 준비한 포진의 저항으로 큰 손해를 보고, 후위 기습도 사마상과 이담의 반격으로 실패. 양측 합쳐 사상자가 수만 단위로 그치는 적당한(?) 교전 끝에 진나라의 패배로 대치가 끝난다. 여파로 진나라는 백기가 숙청되지 않고, 원 역사에서 위무기의 연합군에게 밀려난 것에 비하면 당장의 피해는 더 적었다. 물론 수십만 병력이 살아난 조나라야말로 최고 수혜자. 다만 지구전으로 양측 모두 시간을 너무 끌어 양측의 국력소모가 컸고 원역사의 평원군 인질극 때 진나라가 원역사에서 없던 3년 휴전 협정을 제안할 정도였다.
-
원교근공의 소극화
범수가 주장해 진나라의 대외적 외교 지침이 되었던 원교근공이 한나라에서 조괄과 신릉군에 의해 한나라의 반진 감정이 극도로 끓어오르면서 신릉군이 삼진의 영웅이 될 기회가 생긴다. 이에 원 역사의 합종군이 제대로 구성되면 진나라가 불리함을 아는 범수가 정치적 타격을 감수하고 한나라를 향한 조공을 철폐했다. 후에 범수가 계속되는 실패로 결국 상국에서 해임되었기에 원교근공 기조는 주류에서 확실히 밀려났을 가능성이 크다.
-
구정 도량형의 반포
조괄이 조가가 구정의 무게를 물은 것을 계기로 구정의 무게[118]를 잰 뒤 주나라 난왕에게 구정을 기준으로 한[119] 도량형을 반포해 추락해가는 주나라의 권위를 세울 것을 조언해 이루어진다.
힘을 거의 다 잃은 이 시기의 주나라가 그냥 막무가내로 도량형을 반포했다면 씨알도 안 먹혔겠지만, 구정을 기준으로 한 도량형이기에 그 권위가 엄청나다. 조괄에 집에 구정 도량형 기준 근을 구하러 오는 상인들이 넘쳐나고, 소양왕도 무심결에 구정 도량형을 쓸 정도. 그렇기에 진나라의 도량형 통일에 대한 명분을 반박하는 사례가 되고 있고, 소양왕과 백기와 같은 정치인이나 군인은 눈치를 못 챌지 몰라도 채택과 같은 지식인들은 이를 매우 경계하고 있다.
-
묵가의 분열
원역사에선 진나라에게 흡수된 묵가가 여전히 독자세력으로 남았다. 진나라 묵가는 묵자가 내세웠던 사상이 지금은 낡았으므로 변경해야 한다면서 이를 내세우면서 세력이 큰 진나라의 묵가를 중심으로 타국의 묵가들을 흡수할 계략을 내세웠는데, 이를 조괄이 막아낸 것. 조괄은 지록위마를 예시로 들었으며, 진나라의 묵가들이 삼은 본거지가 어진 정치로 다스려진 곳이냐고 물었는데 하필 이 본거지는 소양왕이 몰아낸 위염의 봉지였기 때문에 차마 이를 긍정할 수 없었던 것. 이에 타국의 묵가들은 진나라는 실제로 지록위마와 같은 일이 벌어질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게 되었고 진나라의 묵가들은 정당성을 잃어버려 나머지 묵가들을 흡수할 수 없게 되었다.
이후 주나라 낙양 공성전에서 조괄의 편에 붙은 상부영, 등릉박의 제&초 묵가들과 진나라에 종군하는 상리현의 진 묵가들이 적극적으로 맞붙으면서 묵가가 한 깃발 아래 뭉칠 가능성은 사라졌다.
이후 묵가는 조괄의 초빙으로 파촉으로 집단 이주 후 연국론과 결합한 대집단으로 거듭난다. 별묵은 소멸했을 가능성이 크다. 신릉군 사후 한위 연합군이 중추원의 안읍을 공격했으나 1만 명이 넘는 묵가가 수성전으로 1년을 넘게 버티면서 끝내 중추원을 구원한다.
-
주나라의 항전(낙양 공방전)
본래 주나라의 마지막 천자인 난왕은 초나라의 지원으로 꾸린 합종군으로 진에 항전했으나 패배하고 항복해, 주나라는 사라져야 했다.
본작에서도 초나라의 굴격이 패배해 합종군이 무너지는 것까지는 같지만, 조괄이 방난을 영입해 만든 하북의군과 제&초 묵가들이 각자의 신념과 조괄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참전하면서 주나라의 항전은 계속 이어진다.[120]
이 항전이 1년 넘게 이어지면서 육국의 민심은 폭주하듯이 흔들렸으며, 결국 신릉군이 진비를 살해하고 군권을 강탈, 야왕을 탈환하고 함곡관을 위협하며, 초나라 고열왕이 보낸 10만 병력과 경양이 낙양을 해방시키고, 한나라군이 합류. 끝내 조나라와 연나라까지 지원군을 보내면서 대진 합종이 실현된다.
-
연국론
조괄이 순자와 논의해 연구한 통치이론. 전국을 통일해 전쟁을 없앤다는 진의 통일론, 연횡론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었다. 통일 명분의 전쟁을 부정하며 대신 힘의 균형을 맞추어 전쟁으로 인한 이득을 줄이고 피해를 키우고 그럼으로 전쟁이 아닌 방법으로 전국을 잇는다는 것이 쟁점.
순자는 십수년은 더 보완할 예정이었지만 조괄은 최대한 퍼뜨리고 각지에서 알아서 보완시킬 생각이라 퍼뜨렸다.
이 연국론에는 진나라를 셋으로 쪼개자는 내용이 있는데, 실제로 정세가 그렇게 흘러가면서 조괄의 대계의 집약으로 평가받을 듯 하다.
-
무졸혁파
150여년 전. 오기가 만든 무졸제도는 위나라 전성기에는 좋은 제도였으나 전국시대가 오면서 일반 병졸의 수준도 매우 올랐고, 일반 병력의 10배 예산을 잡아먹는 무졸은 위나라의 무거운 족쇄가 되어버린다.[121] 그러나 무졸들은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고 발악했고 위나라는 멸망하는 순간까지 무졸제도를 혁파하지 못했다.
조괄은 위나라에 객경으로 초대되어 상경으로 취임. 무졸혁파를 시도한다. 위나라 조정도 명사 자순을 상국으로 삼고, 노신 당저가 공개적으로 지지했으나 가장 중요한 안리왕과 다른 중신들이 나몰라라 하며 나왔다. 무졸들은 나라가 망하더라도 기득권을 놓을 생각이 없었고, 이를 예측한 조괄에 의해 결국 수천명의 무졸들이 봉기한다. 조괄은 역이기의 조언과 파를 삶은 물과 유황가스 등으로 대량의 무졸들을 진압했다.
한편 도강언에 총력을 쏟던 진나라는 위나라가 강해지면 관동 정복이 버거워진다는 걸 깨닫고 친진파에게 3천금이라는 거액을 지원한다. 위나라 친진파들은 위나라의 다른 도시인 상구에서 오천명이나 되는 무졸들을 무장시켜 봉기를 준비했으나... 이것이 조괄의 노림수였다. 조괄은 모여봤자 제대로 된 지휘계통조차 없는 무졸들 따위는 격파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무졸들도 무장봉기를 일으키면 반역으로 몰린다는 걸 알아서 자제하고 있었는데, 대량에서의 연패와 친진파의 다급한 심정이 결국 명분을 주고 만 것이다. 여기에 조괄이 무졸혁파에 실패하더라도 장래 진나라의 무기를 줄여놓겠다는 심산을 위무기에게 살해당한 진비의 유족들을 이용해 자신을 공격하게 하여 명분 강화에 써먹는다.
조괄은 사마상과 기병들을 출격시키고, 자순과 함께 한나라로 야반도주 해버린다. 그리고 오백의 기병을 이끌고 상구로 출격한 사마상은 가볍게 오천 무졸들을 대파하면서 무졸이 이제는 그만한 가치가 없음을 입증한다. 안리왕은 뒤늦게 허가없이 내전을 벌인 조괄과 자순을 찾지만 둘 다 국내에는 없었다. 조괄은 안리왕이 이제는 쓸모없음이 입증된 무졸을 안고 갈 수 있겠냐면서 비웃고 귀국한다. 이 예상대로 안리왕과 위나라 신하들은 이를 악물고 개혁을 완수하면서 무졸 혁파는 완성되었다.
-
파촉 독립
본래 파촉은 연이나 초나라 이상으로 중원과는 떨어진 독립된 세력이었다. 그러나 진혜문왕 시기 사마착에게 정벌당한 이래로 진나라의 정복사업의 기반 중 하나가 된다. 당연히 파촉 사람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목숨과 재산이 진나라의 정복 사업에 이용당하는 것이 기분 좋을 리가 없었다. 조괄은 이 점을 노리고 한비자와의 만남 이후 자신의 연국론을 지지해줄 세력으로 파촉을 뽑는다.
2차 대진 합종군 막바지. 조괄은 2만명의 군사를 데리고 파촉에 들어간다. 새로운 진왕 장안군을 통해 이미 대세가 결정되었음을 아는 파촉 태수 이랑을 비롯해 파촉 주민들은 순순히 조괄에게 항복해 촉나라를 세운다. 중원의 제국 탄생을 막자는 연국론은 오랫동안 진나라에 수탈당한 파촉 주민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켰고, 연국론이 자리잡는 20년 동안 7차례나 출병하는데도 큰 문제없이 중원의 강대국 탄생을 저지하는 것에 성공한다.
-
중추원
EU를 본떠 조괄이 만든 분쟁억제기구. 각국 제자백가의 학자들이 의관이 되고, 중원에서 이름난 명사가 의장을 맡는다. 사실 이것만으로는 전쟁을 억제할 수단이 있는 건가 싶은데 조괄의 진짜 목적은 안읍과 그 인근을 기반으로 삼는 무력단체(EU에서 NATO의 역할)이자 경제공동체인 중추원이다. 안읍( 윈청시)은 위나라의 전 수도권으로 교통이 편리하고 소금 호수가 있어 소금 생산량이 엄청나며 철도 꽤 생산한다. 안읍 일대를 중추원이 통제할 수 있다면 아쉬운 대로 최소한의 전쟁 억제력을 가질 수 있다. 천자의 명을 명분삼아 중국 전체의 소금과 철을 통제하면 확실한 전쟁 억제력이 생기며 이를 막으려 중추원을 적대시하면 전국칠웅 각국이 중추원 설립에 찬성하며 의관을 파견했기 때문에 명분이 빈약해진다.
초대 의장은 신릉군. 초대 의관으로 순자, 한비자 등의 인물들이 참가했으며 합종군 출신 장졸들이 합류했다. 중원 최강의 무장 신릉군의 존재로 어느 정도 질서가 잡힌 중추원은 10여년 후 신릉군이 사망하면서 혼란을 맞는다. 이 때를 노린 한-위 연합군이 대군을 동원해 안읍을 공격했다.
중추원의 탄생은 각국 학자들의 예상보다 훨씬 더 광대한 영향력을 퍼뜨렸고 중원의 천하관과 이념 자체가 바뀌고 있었다. 가장 가까운 한과 위는 본래 중추원의 땅의 본래 주인이기도 한 만큼 이 변화로 인해 크게 영향을 받았기에 이를 억제하기 위해 중추원을 무너뜨리려 시도한 것이다. 그러나 중원의 세력 균형을 위해 중추원이 반드시 필요했던 파촉의 조괄은 1만의 묵가를 파견해 안읍을 1년간이나 지켜내고, 본인은 화약을 이용해 한위 연합군의 보급선을 끊어버리면서 중추원의 승리로 끝난다.
신릉군 사후의 혼란도 촉나라의 한위 연합군 격퇴로 끝나자, 연국 질서는 주도적인 질서로서 천하에 퍼지게 된다.
6. 기타
- 대체역사 갤러리에서 약칭은 '헉조괄'이다.
- 2023년 8월 23일 표지가 추가되었다. 그러나 평가는 영 좋지 않다. AI 생성 표지처럼 손이나 인체 구도에서 어색한데 정작 AI 특유의 준수한 부드러운 그림체도 아니다. {{{#!folding [ 펼치기 · 접기 ]
[1]
다만 장평대전의 예산 손해 탓에 수년 간이나 골골댔다.
[2]
다만 국토의 한계가 있어 바다를 낀 부유국인 제나라 수준의 자원 공급은 안된다.
[3]
장평 전투 이후로는 식견이 있는 사람들 상당수가 전국칠웅 중에 조나라만이 그나마 진나라와 비슷한 조건으로 싸울 수 있다고 여긴다. 실제로 위나라와 한나라는 이미 연이은 패배로 기본 동원력이 크게 밀리는 데다 접경지가 전부 평야라 수비의 이점을 살리지 못하는 상황이고, 초나라도 마찬가지로 원래 수도였던 영을 진나라에 빼앗긴 후부터는 전투 시의 입지가 불리해져 중원에서의 싸움은 시작부터 손해를 보고 들어가는 판이다. 멀리 떨어진 연나라와, 제연전쟁에서 큰 피해를 입고 전단 이후로는 대군을 지휘할 인재가 나오지 않는 제나라는 말할 것도 없다. 조나라만이 진나라와 마찬가지로 정병으로 수십만 대군을 동원해 불리하지 않은 조건으로 맞설 수 있는 것. 다만 경제력은 조나라가 진나라보다 못하기 때문에 제나라 등의 지원이 필요하다.
[4]
조경래 작가의
전국 등처럼 이 시대 대체역사물에서 조나라가 주요하게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5]
그 외에도 상당 땅에 적지않은 군사를 보내서 점령하는 등 합종군 외에도 군사활동을 벌였다.
[6]
조괄이 천거, 혹은 조괄에게 의탁해 계속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다.
[7]
아버지와 구분을 위해 소마복으로도 불린다. 2차 합종군부터는 부친을 넘어선 대마복이 된다.
[8]
하북의군을 이끌기 위해 관직을 내려놓았다.
[9]
장평에 도착한지 겨우 사흘만에 출전하라고 독촉을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여기 온지 일주일도 안돼서 파악이 덜 됐다는 핑계로 독촉을 막았지만 이후로도 매일같이 전령을 보내서 출전하라고 압박했다.
[10]
원래 조, 위, 한 삼국은 진(晉)나라가 셋으로 쪼개지며 성립한 나라들이라 흔히 삼진이라 부른다.
[11]
과거 위나라 재상이었으나 범수가 미미했던 시절 진나라 간첩임을 의심해 심한 매질을 하며 원한을 샀다. 이 과거사를 트집 잡아 조나라가 위제를 죽여서 위나라의 원망을 사게 만드려는 계책이다.
[12]
장당의 진군은 낙양의 패전과 위군의 보급로 차단으로 조금만 기다리면 전력이 급락할 상황이었다. 그래서 시간을 두고 치면 쉬운데 만약 신릉군이 진군에게 져버리면 다시 진군이 기력을 회복하고 우위에 서기 때문에 무리해서 치고 나가야 할 상황이었다.
[13]
만일 실제로 파촉왕이 된다면 간절히 작품에서 드물게도 비 왕족 출신으로 왕이 된 셈이다.
[14]
전단이 화우지계를 써서 멸망 일보직전까지 몰렸던 제나라를 구한 증표이다. 제나라 조정은 즉묵용린을 소지한 자의 소원을 하나 들어주기로 약속했다.
[15]
진나라 군부는 왕전과 몽오가 주도권을 놓고 경쟁하던 차였는데, 하필 조괄이 활약할 때마다 몽오가 묘하게 엮이면서 패전처리용으로 오명을 뒤집어쓰기 싫어서 몸을 사린 덕분에 왕전이 나서게 되었다.
[16]
훗날 삼국시대에 국의가 공손찬을 물리친 방법을 썼다.
[17]
조괄도 빙의 전에 효성왕이 넘어간 것에는 얼굴과 말빨 탓도 있다고 자평할 정도.
[18]
다만 기본적으로 머리도 좋고 경험도 상당히 쌓여서
대진 합종군 시기 정도가 되면 전황 정도는 정확히 읽는다.
[19]
최종 결전에서 화약을 터뜨려 함곡관을 무너뜨리려 할 때, 보안은 물론이고 전쟁사에서 화약이 첫선을 보이는 자리인지라 조괄도 두루뭉술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신릉군이나 이목은 조괄이 연금술에 심취하더니 살짝 돌았나 의심하면서도 반대를 하지 않았다.
[20]
사실 곡수 전투, 민지 전투는 합종과 연횡 가운데 승자가 전국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싸움인지라 어느 한쪽이 막는 거라고 보기는 애매하다. 곡수 전투는 수전, 민지 전투는 애당초 조괄이 주 지휘관이 아니라 경사가 맡았다. 다만 2차 합종군에서는 황하, 포전택에서 진나라 기병을 대파하면서 후대에는 조괄은 공방 어느쪽이든 평균 이상은 한다는 평을 받는다.
[21]
1대 마복군 조사가 연여 전투 이후 병사한 기록이 있으니까 장평대전부터 나오는 마복군은 조괄이 확실한데 그 때부터 20~30년간 전국 각지에서 활약한지라 다방면에 있던 조씨 가문의 사람 두세 명이 마복군 조괄 한명으로 합쳐진 것 아니냐는 추측이 있을 정도.
[22]
진의 천하통일을 막고자 하지만, 이들의 합종책 역시 서로 이익을 따지지 않고 한 나라처럼 힘을 합치자는 것이라 천하통일을 향한 행보로 해석할 수 있다.
[23]
진나라 별묵이 소양왕 눈치를 보느라 맞다 아니다면 끝나는 간단한 응답도 못했고, 이를 본 각국 묵가와 학자들은 정말로 지록위마가 현실성이 없지 않다고 느끼게 된다. 묵가의 반진 기조에 기세를 더해준 셈.
[24]
사마천의 부친
사마담과 동명인이라 사기에서는 이동이라고
피휘되어 나온다.
[25]
이 때 이담은 소년 나잇대라서 10대 중반의 어린아이에 불과했기에 하급 관리인 아버지도 너무 갑작스럽다면서 당황한다. 조괄은 이에 죄책감을 느꼈다.
[26]
왕흘의 지휘하에 침착하게 후퇴하는 진군이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다시 돌격해 급습. 긴장이 풀려 휴식하던 진군을 완전히 대파했다.
[27]
조나라 군부에서 차세대 유망주로 인정받은 이담, 사마상과 달리 주문은 조괄의 식객에 가까웠기 때문에 비교적 처신이 자유로왔다.
[28]
이담, 사마상과는 달리 주문처럼 어리고 경험도 적을 뿐더러 군부의 참모가 아니라 조괄의 식객이자 책사다.
[29]
물론 효성왕과 짜고 치는 고스톱이다. 의병 역시 사실상 조나라 군대였다
[30]
여기에 조괄이 세운 전공도 있겠다 제대로 숟가락좀 얹어볼 심산이라고
[31]
무작정 태자를 폐하고 다른 왕손에게 왕위를 물려준다면 장차 내란이 터지겠지만, 땅을 떼어주고 폐한다면 나라가 쪼개질지언정 왕위를 놓고 내란이 터질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촉땅은 원래 조나라 땅도 아니고 진에게 뺏은 땅이다. 촉나라와 조나라는 거리가 멀기에 전쟁이 터질 걱정도 없다.
[32]
원래 역사에서도 아들인 도양왕 수준의 암군까지는 아니었다. 염파 대신 기용한 조괄이 장평대전에서 대패했고, 이로 인한 염파의 축출, 인상여의 사망, 나라가 멸망의 기로에 선 상황에서 평원군마저도 역할이 축소되며 반진파가 몰락해 친진파인 곽개에 대항할 인물이 없었기 때문. 장평대전으로 나라가 휘청이긴 했지만 불과 몇년 뒤에는 진나라를 이기기도 했고 연나라를 상대로는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다만 장평대전의 여파를 극복하지 못했고 저렇게 연나라와 다투다보니 진나라에게 대량으로 땅을 뜯기는, 특히 첫 수도인 진양이 점령당하는 참사가 벌어지는 등 한계도 분명한 군주였다.
[33]
효성왕은 진나라에 인질로 잡힌 평원군을 살리기 위해서 위제를 진에 넘겨줄 생각이었고, 위제는 위나라로 도망쳤다가 위나라에서도 버림받자 자살했다. 결과적으로 조나라와 위나라는 의가 상했고, 평원군은 만천하에 빙다리핫바지 인증을 해버린 셈.
[34]
조괄의 계책을 받아들여 의군을 칭하며 관직을 버린 조괄과 조나라
사구정변에 연루되어 커리어가 끝장난 방난, 흉노족 기마병 등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발뺌할 수 있는 인선이었다
[35]
정확히 말하면 왕을 직접 까긴 뭣하니 대신 평원군을 까는거다. 사실상 평원군만이 아닌 조나라 윗선 전체를 까는 것.
[36]
훗날의
조도양왕
[37]
조조의 아들 조충이 코끼리의 무게를 잰 방법을 사용했다.
[38]
편의상 3300분의 1이 1근
[39]
원래 역사에서는 장평대전의 패배로 조나라가 절체절명의 상황에 몰린 뒤 효성왕이 다시 기용했지만, 여기서는 공세를 주장한 조괄이 정작 염파의 전략을 담습해 이기면서 인정받았다.
[40]
염파와 악승은 나이도 노인이 되었을 만큼 먹었고, 둘의 주장 아래 군부의 반진 기조와 기병 확장 정책이 진행되고 있을 정도다.
[41]
작중 조괄이 손자병법에 의거하여 계산한 바를 따르자면 현대 가치로 10조 8천억원 가량의 비용을 소모했고, 하루에 1천 80억원이 날라가는 상황이었다. 45만명이 징병된 것에 따른 기회비용을 합치면 그 몇배의 비용이 날아간 상황. 다만 시대별로 화폐와 금의 가치 물가와 인플레이션 등 고려할 요소가 많기 때문에 이런 어마어마한 거액이라는 느낌이지 정확한 액수라고 여기면 안된다. 참고로 2020년 대한민국 기준 550조를 국가예산으로 지출했다. 부처별 예산은 국방부와 교통부가 50조 노동부 30조 과기부 16조 농산부 15조 정도니 대략 감이 올 것이다.
[42]
고사성어
문경지교 시즌2를 찍었는데, 당사자인 염파는 이게 인상여가 알려준 계책이라는 걸 알아채고는 조괄을 붙잡자 인상여가 남긴 글을 내놓으라고 한다. 그 글에는 '조괄처럼 염파의 전략전술을 실현할 수 있는 젊은이가 있으면 오히려 기뻐해야하지 않겠냐. 네가 화를 내봤자 진나라만 좋아할 것이다.'라 써있었고 염파는 이를 수긍하며 조괄을 용서한다.
[43]
원래 역사에서도 염파는 열세한 전력으로 연나라를 대파해 수도 계성을 포위한 실적이 있다. 다만 그 상태로 1년 이상 결판을 못 내서 결국 강화를 맺고 끝난다. 그러나 이 일로 조-연 관계는 철천지 원수가 된다.
[44]
신릉군과 조괄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대전제는 진나라와 육국은 체급차가 너무 나기 때문에 시간을 끌면 진나라는 더욱 강해질 뿐이라 헛점을 보였을 때 한타 싸움에서 이기고 여세를 몰아 함곡관을 돌파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합종군은 육국의 복잡한 정치적 역학관계 때문에 어느 순간 누군가 발을 빼거나 간보기에 들어가면 동력을 잃기 때문이다.
[45]
효성왕이 조괄, 이목 등이 해외원정에서 독단적으로 구는데도 방치하는 이유는 한단에 염파가 있는 이상 만에 하나라도 반란군에게 기습당할 확률은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46]
악승도 방난과 비슷한 연배의 노장이라서 함곡관의 악명과 역사를 체감하며 살았기 때문.
[47]
전국시대 막바지에 모종의 수단으로 함곡관 서쪽의 진나라 본토 최 지역을 공격했다. 다만 여력이 부족했는지 제대로 된 데미지를 주지는 못했다고.
[48]
제나라의 명장인 광장은 뛰어난 군사적 수완으로 함곡관을 점령했지만, 정작 거기서 힘이 다 빠져서 진나라 본토에 진입하지를 못했다고 한다. 심지어 다른 다섯 국가에게는 경계대상이 되어서 합종군에게 제대로 깨지기까지 했다. 때문에 방난은 함곡관을 여유롭게 함락할 것이 아니라면 함부로 손을 대는 게 악수라고 여기고 우회책을 연구한 것.
[49]
조괄이 무시만 해준 것도 천운이었다. 무시하지 않고 화를 내며 장을 쳐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었다.
[50]
여불위와 접촉한 조괄을 압박하러 온 친진파 네 명과 다르게, 이런 자리인 줄 알았다면 오지 않았을 거라고 하며 다소 거리가 있는 스탠스를 취했다. 그후 누완, 한창, 조표, 곽개 등이 의논하는 자리에 없는걸 보면 그저 친진파가 왕의 총남에게 끈을 댄거지 친진 매국노는 아닌듯 하다.
[51]
조나라 북방 대 지역에서 수만 명의 인부, 장벽 건축과 관리용 물자 관리권을 가졌고, 한단과 멀기에 자체적으로 흉노와 전쟁을 할 수도 있을 정도.
[52]
원래 역사에서 조괄의 어머니는 조괄을 지휘관 삼으려는 효성왕을 뜯어말리다가 도저히 말릴 수 없자 대신에 조괄이 지더라도 일족에게 죄를 묻지 않는다는 약조를 받아냈다. 당시에 패장은 일족까지도 처벌받았기 때문이다.
[53]
본래 조괄이 소마복, 조사가 대마복이라고 불렸지만 2차 합종군 함곡관 돌파 때부터 조괄의 공이 너무 커져서 조사와 조괄 모두 대마복이 된다. 극신은 구별을 위해 조사를 노마복이라 불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54]
조괄이 장평, 낙양에서는 진군을 수월히 막았는데, 야전을 벌이지는 않으면서 수비전만 배우고, 공격전은 못 배웠다는 소문이 돌았다.
[55]
또 조괄이 자신의 업적 일부는 조사에게 배운 거라고 둘러대기도 했다.
[56]
진나라가 자랑하는 소금 호수가 있는 안읍이 본래 위나라의 수도권이다. 위 입장에서는 티배깅도 이런 티배깅이 따로 없다.함곡관도 본래 위나라 땅이었다.
[57]
실제로 위혜왕 시절부터 위나라는 진나라의 샌드백 신세였다. 게다가 장평대전 30여년 전에 벌어진 이궐 전투에서 위나라와 한나라는 대패를 당한 상태였다. 참고로 이 때 나섰던 장수 역시도 백기다(...)
[58]
그럼에도 조나라와 인구가 비슷한 저력이 있다고 한다. 황하를 낀 알짜 땅 대부분을 가진 덕이라고.
[59]
이에 신릉군은 이렇게 같이 징병된 병사들은 고향으로 돌려보낸 뒤 남은 8만의 군을 이끌고 합종군을 이루게 된다.
[60]
위나라 전성기에는 무졸 3만명이 진군 수십만을 깨고 다녔다. 그러나 백기 등장 이후 수십년간 한번도 못 이겨 나라가 반으로 쪼그라들었다.
[61]
무졸이 일종의 부사관 비슷한 역할을 수행케 한 것이다.
[62]
원역사에서도 조나라의 평원군과 처남매부관계라서 사이가 좋았고 또한 합종군을 이끌어본 적도 있었다.
[63]
장평대전 이후 위왕의 명령으로 한단 전선에 조나라를 도와 참전하지 않고 국경에서 대기만 하던 위나라 대장군 진비를 암살하고 군권을 빼앗아 조나라를 구원했다. 덕분에 조나라는 살았지만 위무기는 위나라의 기반 전부를 잃고 떠돌이 신세가 된다.
[64]
정확히는 이런 제스처를 본 진나라에서 알아서 한나라에 대한 압박을 포기했기 때문에 신릉군 역시 3천금을 마련하려고는 했으나 실질적인 지출은 없었다.
[65]
후영이 조괄에게 신릉군에게 빚이 많다고 겁박을 걸었는데, 몇주간의 도주생활로 지친 조괄이 대놓고 "후영 선생과 주해 장사가 참 능력 좋다고 자자하지요." 라고 아는 척을 했다. 문제는 후영과 주해는 신릉군이 총애할 뿐 당시엔 명성이나 실적은 하나도 없었다. 참고로 이 둘은 미래에 위무기가 진비를 죽일 때 계획범과 실행범을 맡은 사람들이다.
[66]
그나마 가장 정병을 보유한 조나라의 염파도 진심은 아니라지만 장평대전 당시 왕흘에게 국지전에서 밀렸다.
[67]
위무기의 본래 수명은 기원전 244년. 여기서는 두번째 합종군이 기원전 247년에 시작해 1년 정도 이어졌다. 이 시점에서 후일 언급된 한위 전쟁 얼마 전에 죽었다고 서술하니 정말 최소로 쳐도 5년은 더 살았고 최대 10년 이상도 생각할 수 있다. 작가가 에필로그를 날림으로 써서 추정하기 어렵지만, 한나라와 위나라에서 중추원으로 인한 사회적 영향을 걱정할 정도면 겨우 3, 4년 만에 그런 일이 생겼다고 보기는 어렵다.
[68]
본래도 나라를 구할 수 없다는 절망과 형제의 시기질투로 인한 극도의 스트레스, 그에 따른 주색잡기에 빠진 탓에 사실상의 자살로 요절했다. 본작에서 평원군, 인상여, 전단, 소양왕, 효문왕, 장양왕, 군 태후 등 병사, 자연사한 대부분의 인물들이 역사상의 수명을 못 넘겼는데 위무기는 위 인물들과 다르게 수명연장에 성공한 것.
[69]
원역사에서도 둘은 사이가 좋지못한 편이었는데 하루는 둘이 바둑을 두는데 갑자기 조나라가 쳐들어온다는 급보가 들려왔다. 이에 안희왕은 놀라서 당황했지만 신릉군은 태연하게 조나라 왕이 사냥나온 것 뿐이니 안심하시라고 했는데 나중에 알아보니 그 말이 사실이었다. 이에 안희왕이 어떻게 이를 알았냐고 하자 신릉군은 자기 밑에 조나라 왕의 일에 대해 알려주는 사람이 있다.고 말했고 이에 안희왕은 신릉군을 두려워하게 되었다고 한다. 결국 나중에 안희왕은 신릉군의 군권을 빼앗아버리고 이에 실의에 빠진 신릉군은 주색잡기에 빠져지내다 4년 뒤 사망한다.
[70]
친진파의 후원을 받은 무졸들이 상구에서 5천명이 넘게 몰리자, 사마상과 기병을 보내서 그들을 크게 대파했다. 무졸의 기세를 완전히 꺾어버림과 동시에 안리왕에게 경고한 것이다. 조괄과 자순이 사라진 이상 안리왕이 아무것도 안하면 변법은 실패하겠지만, 자기보신에 집착하는 안리왕의 성격상 위나라 정예군이 이미 허울에 불과하다는 게 만천하에 드러났으니 아무것도 안할 수가 없다고 한다. 결국 처음부터 도왔으면 편하게 할 수 있었는데 전부 떠넘기려다가 된통 뒤집어쓴 셈.
[71]
실제로 합종군은 계획없이 조괄과 신릉군의 폭주로 다분히 충동적으로 모인 다국적 연합군이라서 보급이나 수군 준비가 상당히 미흡했다. 조괄만 해도 신안성을 지원하는 진나라 수군을 막지는 못했지만, 제법 피해를 냈다고 생각해 무승부라고 판단했지만 자기 입지가 불안한 신릉군이 모종의 생각인지 조괄을 비난하는 서신을 보냈기에 조괄도 어이없어하는 와중이었다. 신릉군이 왜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냈는지는 불명확하다.
[72]
진나라가 운하와 같은 토목시설을 건설하게 하여 국력을 소모하게 하는 계책. 하지만 처음 10년 정도는 이게 먹혔으나 그 후 진나라가 그 토목시설의 덕으로 국력이 더욱 신장되어 압박이 더욱 거세졌다.
[73]
한비자는 진나라에 사신으로 가 진시황을 만나면서 한나라는 이미 진나라 속국이나 마찬가지라 진이 공격해도 욕만 먹을 것이다. 라고 대놓고 말할 정도였다.
[74]
삼진에 대해 강경책이 지속될 경우 삼진합종을 기점으로 연횡책 자체가 물거품이 될 우려가 제기되었다.
[75]
묵가를 예시로 드는데 비공의 원칙은 현실적으로 말이 안되지만 수백명의 묵가가 수성 기술을 익히고 실제 참전도 무서워하지를 않으니 누구도 그들을 무시하지 못한다.
[76]
조괄은 원역사에서도 조, 연이 수도가 포위당해도 독하게 버틴 것을 알기 때문에 얻을 것이 없다면서 전쟁에 반대한다.
[77]
종합적으로는 조사, 염파 등에 비견되는 1티어 위인이나, 책사적 면모를 빼고 군사적 면만 보면 애매해서 어려워한다.
[78]
시대에 뒤쳐져서 기병에게 도태되는 전차를 아직도 주력으로 굴리며, 사령관정도 되는 장군도 타국의 군대 주력병과를 전혀 모른다.
[79]
여담으로 조괄은 전단과 만남에서 제나라가 방관주의로 굴다가 망하면 정말 수천년을 조롱받게 된다고 비꼬았는데, 여기서는 멸망하지 않았고 욕은 먹겠지만 군량이나마 댔기에 그러지 않게 되었다.
[80]
제나라는 본국의 군사력은 하위권이지만 경제력은 수십만 대군의 물자를 휘청이지 않고 댈 정도의 강국이라서 촉과 같이 연국론의 주요 국가가 되었다. 제연전쟁 이후 타국 침공도 안해서 명분도 있고.
[81]
전단은 전쟁에 군대는 이삼만이면 충분한데 십수만 병력을 요구하는 마복군이나 다른 장군들의 전략이 형편없다고 깠는데, 이에 조사는 수십년 전과는 달리 지금의 전쟁은 인구 백만 이상의 칠국들끼리 국운을 걸고 싸우기에 십만단위 병력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전단 본인만 해도 수십만 병력끼리의 총력전을 치른 입장이니 뻔히 알면서 괜한 소리를 한 셈.
[82]
제연전쟁 후부터 전단과 태후를 제외하면 대국적 안목을 가지는 걸 포기했다. 그나마 전단이 있기에 지금은 반진 전선에 물자라도 보태지만 원역사에서 두 사람이 죽은 후 제나라는 그대로 어떤 반항도 안하고 망했다.
[83]
백기가 초와 위의 소금 광산을 강탈한데다가 한수와 장강을 장악하면서 경제적, 지리적으로 진나라는 다른 육국보다 훨씬 효율적인 국정 운영이 가능해졌다.
[84]
전단은 악의는 없을 뿐더러 제를 비하하는 조괄의 의견도 인정해주고, 후일 제나라를 통해 지원을 늘려주는 등 주고받는 게 확실했다.
[85]
단순히 조괄을 무시한다기보단 군태후가 살아있을 때 일을 벌여야 제나라가 도와줄 수 있다는 의사표시로 보인다.
[86]
작중에서는 이것 외에도 제연 전쟁으로 제나라가 골골 앓는 신세가 되고서는 진나라의 맞수라고 할만한 상대가 초나라만 남게 되자 진나라에서 작정하고 초나라를 괴롭혔다고 서술한다.
[87]
이 영과 언. 즉 형주 중부를 빼앗긴 게 유난히 뼈 아팠는데, 영은 장강의 지류을 통해 수로 교통이 매우 편한데, 한수를 통해 북쪽으로 움직이기 쉬웠기에 초나라가 언제든 중원에 개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진성 지역을 중심으로 육로로 움직이며 병사를 모아야 해서 효율이 반토막이 났다. 심지어 진나라는 영을 손에 넣으면서 자국 내의 운송 속도를 배로 올려 국력을 상승시켰다.
[88]
본래 초나라는 장강 인근인 남군 지역에 수도를 두고 그곳에 자생하는 갈대로 여러 생필품을 만들어 썼다. 그런데 수도를 옮긴 진성 땅에는 갈대가 나지 않다보니 갑작스런 인구 증가에 생필품이 동나버린 것. 때문에 제나라의 군 태후는 짐승가죽이나, 나무로 생필품을 만드는 장인들을 파견해 기술을 가르쳐주면서 은근슬쩍 경고한다.
[89]
또한 초나라가 전성기적 국력을 회복한다면 진나라 포지션을 가져갈지도 모르니 막아야 했다.
[90]
또한 고열왕은 진소양왕 밑에서 볼모 생활을 한 인물이다.
[91]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는 주나라에 모인 합종군은 손발이 안 맞아 진군에게 깨진다.
[92]
경양이 10만이나 되는 군사를 지휘하니 최고 권위자이기는 하지만 1년이나 낙양을 지켜 중원에 명성을 떨치는 인물인데다 본인도 낙양에 들어올 때부터 조괄과의 친분을 드러내면서 들어왔기에 마냥 무시할 수 없었다.
[93]
물론 순수 선의라기보다는 조괄이 부족한 점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자신의 지휘권이 확고해진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던 점도 있다.
[94]
대신 조괄 산하에 배치한 초나라 장수들에게는 하나하나 편지를 써서 갈궜다고 한다(...).
[95]
조괄은 수도권 문제를 해결 못해 수도를 이전하느라 국력을 소진하는 걸 꼬집은 것이다.
[96]
거양이 위험하니 주민들을 피난시키기로 한 곳이
수춘인데 이곳은 미래 강남 땅의 주요 요충지가 되는 곳이다. 조괄이 춘신군와의 대면에서 계속 봄을 강조했기에 이를 떠올린다.
[97]
또한 항연은 이 행위가 합종군을 배신하는 행위라고 알고 있기에 양심의 가책이 컸다.
[98]
실제로 백기와 진군의 학살은 당시에도 비난의 대상이었다.
[99]
이 시점 진나라의 주력 생산지는 관중, 한중, 파촉이다.
[100]
소양왕은 40년 넘게 왕위에 있었지만 30년이 넘는 시간을 위염을 실각시켰다가 생긴 여파를 감당 못해서 다시 복귀시키면서 눌려 살았다.
[101]
효성왕이 평원군을 돌려받기 위해 위제를 살해하여 조나라와 위나라의 사이를 벌리기 위한 술책이었는데, 평원군이 탈출하면서 효성왕이 위제를 죽일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
[102]
소양왕이 무의식적으로 구정의 무게를 (진나라의 단위가 아닌) 주나라에서 정한 3300근으로 언급했다.
[103]
친진파들도 채택의 이런 지시에 자신들이 채택의 부하인줄 아냐며 매우 불쾌해한다.
[104]
실제로 소금 산지로 막강한 경제력을 가질 중추원, 본래도 초나라 수도권이라 일국 사이즈인 남군, 역시 풍족하고 방어에 유리한 파촉이 군사적으로 연계하면 관중만 남은 진나라로선 어지간히 운이 따르지 않는 이상엔 못 먹는다.
[105]
근본적으로는 염파의 전략이자 전국시대의 흔한 전법이지만 진의 국력과 중원 정세상 백기의 승률이 훨씬 높아서 위협적이다.
[106]
신안성이 계속 버티기만 해도 적군 5만을 붙잡아 둘 수 있는데다가, 잘만 하면 민지성에서 곡수를 타고 병력을 신안성까지 보내서 합종군 주력부대의 후방을 차단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위무기랑 정면에서 싸울 필요도 없이 몽오가 이기는 셈이다.
[107]
제, 연, 한, 위는 수도가 포위당해도 한차례 이상 멸망하지 않고 버텼으며, 이 역사에선 사라졌으나 원 역사의 조나라도 한단포위전을 끝내 이겨냈다.
[108]
무엇보다 합종군의 약법삼장 구호에 진군이 사기를 잃는 걸 보고 진나라인들조차 상앙변법을 원치 않는다는 걸 깨닫고 절망했다.
[109]
제나라의 기대주까지 되었는데도 진에 온 몽오와는 달리, 몽무는 어린 시기에 진에 와서 출사했기에 고향을 버리고 진에 왔다는 생각이 없었다.
[110]
후일 조고가 벌인 지록위마의 고사가 진에서는 진짜 벌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당대 사람들에게는 환관 따위가 황제마저 엿먹이는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다고 욕을 먹었지만 일부는 묘하게 생생한 담론에 불안을 느끼게 된다.
[111]
대회가 열리는 노나라에 붙어 있던 양후 위염의 영지 도군을 이용해 양후 위염을 평가하도록 유도한다.
[112]
그나마 진나라가 능이 능력이 있다고 봐준 데다가 가족들 때문에라도 관직을 그만둘 수가 없었다고 한다.
[113]
군부가 규를 변호한 이유는 보고서만 봐도 낙양그라드가 연상되었기 때문이다. 조괄이 작정한 이상 누가가도 시간과 병력을 작정하고 쓰지 않으면 이길 수 없는 전장이라 규가 파직당하면 대신 지휘를 맡게 될까봐 그런 것.
[114]
만일 이 때 장당이 수비로 버텼다면 백기가 무리해서 원조에 나설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115]
본인이 조군 기병들의 기동을 끝내 막지 못해서 패배의 원인이 되었다고 판단했다. 이미 1차 대진 합종군에서 7만이나 되는 군대를 잃은 자신은 이제 귀국해봤자 전범이 된다고 판단하고 죽은 것.
[116]
사실 진나라 조정의 문제도 있는 것이 끝까지 왕전에게 장양왕 건을 비밀로 하는 바람에 왕전은 합종군을 완전히 무력화 시킬 수 있는 신릉군을 쓰러뜨리는 것에 집착했다. 어디까지나 진나라의 목표는 무사퇴각이었기에 퇴각 작전에 가장 문제가 되는 조나라의 기병들 상대에 집중하거나, 자신들보다 열세인 게 확실한 초군의 피해를 늘리는 데 집중했으면 작중처럼 함정에 넘어가진 않았을 것이다.
[117]
또한 염파도 불리하다고 생각한 연여 전투에서 호양과 함께 패하면서 조사가 두각을 보이게 만든 계기를 주기도 했다.
[118]
조조의 아들
조충이 배를 이용해 코끼리의 무게를 잰 일화를 이용한 것으로, 한나라 근 기준으로 3386근이 나왔다.
[119]
구정의 무게를 3,300근으로 하는 도량형이다.
[120]
한편, 조괄이 낙양 입성 과정에서
동탁이 한 일(병력을 일부러 들락날락시켜 과장시키기, 칼을 찬 채로 어전에 들어와 천자에게 반강제로 싸움 독려를 하도록 강요한 일 등)을 일부 따라해서, 독자들이 낙양 파트를 보면서 동탁이나
조조와 관련된 드립을 쏟아냈다(...).
[121]
무졸에 대한 평가로 노예는 양민이 되고, 양민은 부호가 된다. 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무졸에 대한 혜택은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