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진 합종군 | ||
장소 | ||
위나라 하내~하외~관중 | ||
기간 | ||
기원전 247년 ~ | ||
교전세력 |
위나라 초나라 조나라 한나라 연나라 |
진나라 |
지휘관[1] |
상장군 위무기 차장군 조괄 항연 이목 극신 |
왕전 몽무 장당† 사마경 몽오† |
병력 |
조군 7만+a 초군 7만 위군 7만 한군 4만 연군 3만 총합 21만~30만[2][3] |
30만+a[4][5] |
피해 규모 | 피해 불명[6] | 20만 이상[7] |
결과 | ||
합종군의 승리 | ||
영향 | ||
진나라의 삼가분진 연국론의 대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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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간절히의 대체역사소설 헉 내가 조괄이다에 등장하는 가공의 전쟁. 대진 합종군 이후 역사의 복원을 시도하는 진나라와 관동 국가들 사이의 2번째 전쟁이다.2. 배경
2.1. 관동의 정세 변화
대진 합종군 이후로 관동 육국은 언제 함께 싸웠느냐는 듯이 서로를 적대하기 시작했다. 초나라는 노나라를 공격해 합병했고, 조나라도 대군을 동원해 연나라를 공격해 많은 이득을 챙겼다. 이 뒤에는 친진파 매국노들의 암약이 있었다.평원군 조승, 제 군태후 등 기존의 합종책 거물들이 연이어 사망하면서 각국간의 사이를 조율하고 대국을 볼 사람도 줄어들었다.
조괄은 언젠가 다시 관동을 공격할 진나라에 대비해 위나라의 객경으로 가서 개혁을 완수하고, 연국론을 퍼뜨리기 위해 노력한다. 한편 위나라 개혁 이후 한나라에 머물던 조괄은 한비자에게 이론의 완성보다는, 지지할 세력을 모으라는 조언을 듣고는 노나라에서 좌절한 묵가들의 합류 약속을 받는다. 그 후 조괄은 조나라 정계에서 한발 물러나 연단술에 빠졌다는 핑계로 화약 개발에 매진한다.
2.2. 진의 국력 회복
소양왕은 대전 패배 이후 이를 갈고 후대에라도 천하통일을 맡기겠다 결심하고, 도강언 공사를 시작한다. 무모한 원정 대신에 내실 다지기를 택한 소양왕의 선택은 옳았으며, 1차 대진 합종군 이후 9년이 흘러, 진의 30만 대군이 연 단위 원정이 가능할 정도로 막강히 국력을 증진한다.소양왕이 죽고, 장양왕이 즉위한 후 마침내 진나라는 대외 정복을 결정한다.
왕전이 이 대군의 상장군이 되었으며, 사마경, 장당, 몽무 등 진나라의 군부 중역들이 총출동하면서 천하통일을 위한 전쟁을 시작하게 된다. 진군은 함곡관을 열고 출진하면서 악승의 조나라군이 지키던 상당 땅을 다시 공격, 간신히 복구되어 가던 상당을 다시 파괴하고 악승과 조군을 패퇴시키고 본격적으로 관동에 진입한다.
3. 전력
3.1. 진나라
- 총병력 30만+a.[8]
- 유지 가능 기간 : 최대 5년[스포일러]
- 상장군 왕전/ 장당, 몽무, 사마경
- 이외에 능, 왕분(왕전의 아들), 환기, 양단화 등이 지휘관으로 참전. 또한 후반부 몽오가 함곡관 전선을 담당한다.
3.2. 합종군
- 총병력 23만+a/실제 전투병력 21만[10][11]
- 함곡관 공격전 당시 병력 26만~30만
- 유지 가능 기간 : 최대 6개월 미만.[12]
- 상장군 위무기/ 차장군 조괄, 이목, 항연
- 이외에 방난, 이담, 사마상, 양통 등이 지휘관으로 참전. 함곡관 공략 시점에는 악간과 극신, 악승과 경사가 합류한다.
4. 관동의 전쟁
4.1. 한의 후퇴와 위의 붕괴
한나라는 지난 전쟁에서 땅을 넓히긴 했지만 동원력은 간신히 5~6만. 질적으로도 불리했다. 한나라 조정은 위나라가 적극적으로 맞서야 제대로 싸울 수 있다고 판단하고 고의적으로 위나라로 가는 길을 비워버린다. 왕전의 진군 역시 굳이 군을 갈라 한나라 수도 신정을 치기보다는 그대로 북상해 위나라를 공격한다.왕전은 30만 대군을 황하 인근에 배치, 위군 정예가 배치된 고도성과 읍성마저 수적 우위를 앞세워 전투 끝에 점령하고, 고도와 읍성을 중심으로 환기와 양단화에게 5만 대군을 맡겨서 위무기와 조나라의 개입을 막고 25만 대군으로 위나라 본토인 하외에 진입한다.
위나라는 순식간에 하외 본토에서도 연패해 국토의 대부분을 상실한다. 왕전의 하외 진입 후, 채 한 달이 되지도 않았는데도 수도권인 대량만을 간신히 지키게 된 안리왕은 신릉군에게 복귀를 청한다.
신릉군은 안리왕이 이 와중에도 대진 합종군 당시의 부절 절도, 진비 암살건은 거론치 않는 걸 보고 이를 갈았으나, 결국 받아들여서 합종군 복귀를 천명한다.
4.2. 하내 전투
조나라 조정에서는 비상이 걸렸다. 효성왕은 바로 위무기를 합종 상장군으로 인정하고 2만명의 조군을 맡겨서 위나라로 보낸다. 위무기와 조괄은 다시 합종군을 만들기 위해 위나라로 출발한다. 일단 조나라군 2만이 호위로 붙기는 했지만 진나라가 하내에 배치한 병력만 5만이었다. 물론 이 5만명은 대부분 방어선에 길게 투입되었기에 조나라군이 힘을 집중한다면 돌파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두 장수가 가진 5천이 넘는 기병들이였다. 이 기병들은 수년간의 훈련으로 조나라 흉노 기병에 지지않는 전투력을 가지고 있어서 조나라군을 경악케 한다.진군 기병이 계속해서 방해하면 조군은 도저히 진군 방어선을 지나서 황하를 건널 수가 없었다. 이에 신릉군은 결국 진군과 싸워야 한다고 계산하고 나선다. 조괄은 이들을 격파할 방법으로 짚단벽 작전을 입안하고 방난과 함께 진군을 상대하러 나선다.
양단화와 환기는 조군 기병 5천기와 보병 1천을 보고는 싸울만 하다고 생각해 승부에 응한다. 진군 기병은 매서운 기세로 돌격했으나... 직전에 보병들이 발석거로 던진 짚단들이 조군과 진군 사이에 떨어져 방벽을 형성. 진군 기병들은 짚단을 피해 돌거나 멈추느라 진형이 엉망이 되었다. 그러나 방난과 사마상의 조군 기병들은 미리 약속한대로 움직여 전열을 유지했고 그대로 진군 기병을 유린했다.
후방의 환기는 어떻게든 아군을 구출하기 위해서 후위의 기병 1천을 몰고 보병을 지휘하던 조괄을 위협한다. 그러나 조나라 보병들은 목책에 의지해 역시 극렬히 저항했으며, 이담이 50기의 기병으로 환기의 유인 작전을 실패시킨다. 양단화와 환기는 포기하지 않았으나 업성 쪽에서 신릉군의 원병이 오는 듯이 보이자 어쩔 수 없이 남은 병력을 정비해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에도 신릉군은 한동안 하내에 주둔하면서 진군과 대치한다. 하외에서 위나라 수도권을 점령해가던 왕전의 본군 지휘부에는 이에 혼란에 빠진다. 인재가 없는 위나라 주력군은 약했지만, 어쨌든 저항이 이어지는데 하내의 양단화와 환기군을 구원하기 위해 전력을 빼기 뭐했다. 이 때 군을 지휘하던 몽오의 아들 몽무는 애당초 괜히 하내에 5만이 넘는 군을 분산배치한 왕전의 작전이 틀렸다고 불만을 가진다.
신릉군은 그대로 하내의 위나라 영토를 연결하는 요충지인 신중성을 조괄에게 공격하게 만들고 본인은 급성을 공격한다. 또한 조나라 본국에서도 염파가 효성왕과 협상해 5만 대군을 이목에게 맡겨서 출진시키고 본인도 조군 2만에 연나라군까지 이끌고 후방에서 출진하기로 한다. 이목은 엄청난 기동력으로 남하해 급성의 환기를 쳤고, 아무리 수성전이라지만 신릉군과 이목이라는 양대 명장의 공세에 당하던 환기는 양단화에게 연락해 황급히 후퇴한다.
하내를 거의 장악한 신릉군은 이참에 믿을 수 없는 위나라에 무리하게 합류하는 건 미루고, 이대로 하내에서 천천히 움직이며 진나라 후방을 위협하는 작전을 입안했다. 그러나 사태는 급박하게 흘렀는데 염파가 없어지자 매국노 곽개가 효성왕을 꼬드겨 황하를 건너기 전에 조정의 허가를 받으라는 명령서를 보낸 것이다. 조괄은 이 사태를 예측하고 군을 닦달해 황하를 건너버렸고, 쫓아와서 회군을 요구하는 친진파 고성상에게 그러다가 후방 기습이라도 당하면 책임져달라는 말싸움까지 벌이고서야 위나라 본토에 들어설 수 있었다.
4.3. 조군 추격전
조나라군이 위나라에 들어서자 왕전도 긴장하며 진군을 분산배치한다. 당시 항연이 이끄는 초군 7만명이 위나라 국경 주변에서 개입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기에 사마경에게 7만 군을 주어 그들을 견제한다. 또한 남은 군대 18만명을 3등분해서 각자 몽무, 장당, 왕전 자신이 지휘하며 조나라군 포위섬멸에 도전한다. 왕전 자신은 후방의 대량 위나라군을 견제하면서 중심을 잡고, 장당과 몽무가 각자 측후방에서 조군을 압박하는 것.조괄은 신릉군을 설득해 지휘권을 이목에게 맡기도록 한다. 이목은 강력한 조나라 기병을 이용해 정면돌파하면 대량까지는 갈 수 있겠지만, 그 과정에서 큰 피해를 입는 것도 필연이었기에 교전을 최대한 피하면서 진군의 포위망에 틈을 만들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이에 모든 장수들이 '조괄'에게 기대하고 조괄은 밑천이 없다고 한탄하다가 한번 쓴 기구 작전을 재활용하기로 한다.
그러나 왕전도 반격에 나선다. 조군의 핵심이 이목의 흉노기병이라는 것을 아는 왕전은 장당과 몽무와 연계해 포전택이라는 대량 주변 지형으로 조군을 유도한다. 포전택은 작은 강줄기가 범람해 이 시기면 늪지대가 사방에 생기는 땅이었다. 당연히 기병은 무력화되고 보병도 발이 느려졌다. 발이 느려지면 측후방에서 조군을 따라가는 장당과 몽무가 조군의 후위를 칠 수 있을 것이고, 때를 봐서 전방의 왕전까지 나서면 기병 같은 속도가 없는 조군 보병들은 그대로 괴멸당할 수밖에는 없었다.
위나라 지형에 밝은 신릉군은 이 사실을 깨달았으나, 이미 대량까지의 진로와 사방의 진군의 압박 탓에 포전택을 피할 길이 없었다. 결국 이목은 큰 피해를 각오하고 포전택 주변에서 진군과 겨루기로 각오한다. 조괄은 이 사태를 해결할 방도를 고민하다가, 진군과 보병과 보병으로 맞붙기보다는 차라리 보병으로 기병을 상대하면 통할만한 전술이 있다고 깨닫는다. 조괄은 국의의 협승 전술을 부친 조사의 전술 연구 중에 있었다면서 꺼내서 신릉군을 설득한다.
당연히 이목도 진군의 의도를 간파하고 있었다. 조군이 대량 근처의 중모성을 지날 때 장당이 북에서 조군 후방을, 몽무가 동쪽 측면을, 왕전이 남쪽에서 정면으로 포위해 조군을 중모성 서쪽 포전택으로 몰아넣은 다음 기동력을 잃은 조군을 수적 우위로 격살하려는 계획이었다. 이목은 역으로 포전택으로 진군해서 포위망에서 멀어진 다음, 당황해 급격히 추격할 진군의 선봉대를 조군 기병으로 격파해 진군 포위망의 완성을 막고 탈출하는 역습안을 계획한다. 신릉군과 조괄은 기병을 최소만 남기고 전부 데려가라고 말하고, 이목은 그러다 보병이 진군에게 함몰당하면 끝장이지만 둘의 능력을 믿고 동의한다.
조나라군의 포전택 방면 진격이 시작되자 당황한 장당은 진격 속도를 높인다. 이목은 그 상태를 눈치채고 바로 1만 5천 기병을 데리고 반전, 장당군의 선봉대를 지휘하던 능을 요격한다. 장당군의 기병은 많아야 겨우 7천명밖에 안되었기에 능은 이목을 도저히 당하지 못하고 후퇴해 장당의 본대에 합류한다.
한편 이목이 걱정하던 대로 조군 기병들이 전부 빠진 사실이 조군의 측면을 압박하던 몽무에게 들통난다. 몽무는 아들 몽염에게 자군 기병의 8할인 5천 기를 내주어 조군 보병대를 공격하라고 명한다. 이목과 조군 기병의 강력함을 알기에 그들이 조군 본대로 복귀하기 전에 조군 보병대를 격파하기 위함이었다. 몽염의 기병 오천기는 포전택 앞에서 조군과 격돌, 전력을 다해 조군을 공격했다.
그러나 방패와 쇠뇌, 장창으로 무장한 조군 보병대는 방패 사이의 쇠뇌 저격과 장창병들의 난전 돌입작전으로 몽염에게 반격했다. 보병들이 자리를 지키며 방패와 쇠뇌로 반격한다고는 생각 못했기에 진군 기병들은 방패벽과 저격을 피하려다가 측면을 드러냈고, 그대로 조군 기병에게 전열이 끊기고는 정예한 조군 보병들과 뒤섞여서 속도를 잃은 채로 수적 열세에 처한다. 몽염이 필사적으로 일부라도 추슬러 조군을 밀어내려 했지만 이담의 기병 300기가 몽염을 방해해 이루지 못했다. 결국 몽염은 기병 수천명을 잃고 겨우 후퇴한다.
진군 기병대를 격파해 장당군을 좌초시킨 이목은 신릉군과 조괄의 대승 소식을 듣고 안도하며 그대로 행로를 바꿔 움직여서 장당의 군까지 견제한다. 결국 대량까지 가는 길은 몽무군의 예봉이 꺾인 탓에 조나라군이 통과할 여유가 생기게 된다. 물론 재수 없으면 왕전과 몽무에게 협공당할 수도 있지만 신릉군은 이 행군을 성공시키고, 장당 역시 조군 기병들의 방해로 발이 묶인다. 결국 조군을 막을 수 있는 건 왕전의 군대밖에 안 남게 되었다. 그러나 왕전은 아무리 조군이 지쳤어도 그 실력을 감안하면 강적이라고 판단하고 막지 않았고, 그 대신 조군의 후미를 공격해 군수물자를 탈취하고자 하나 조군이 미리 군수물자를 버리고 달아나 조군을 죽이지는 못한다. 마침내 조군은 대량에 입성한다.
4.4. 합종군 결성
바로 위나라 상장군이 된 신릉군은 대량 남쪽 사마경의 진군을 공격할 준비를 한다. 그러나 이미 합종군의 결성을 못 막겠다고 여긴 왕전은 사마경을 후퇴시켰고, 이로서 항연도 위나라에 들어오면서 조, 위, 초 삼국의 군대가 대량에 모인다.그러나 조괄과 다른 장수들의 표정은 어두웠다. 조나라는 행군 중의 전투로 군사를 잃어서 6만, 위나라는 이미 본토를 거의 잃어서 전군이 7만, 초나라는 수도를 진성에서 거양으로 옮기느라 토목 공사로 예산을 낭비해 7만밖에 동원하지 못했다. 총 20만명으로 조나라를 제외하면 주요 삼국 전부가 지난 전투와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열등했던 것. 그나마 수적으론 우세를 점했던 지난 대진 합종군 전투보다도 부족했다. 한, 연과 염파의 조군 2만을 합치면 7~8만은 더 되겠지만 이들이 하외에 들어오려면 결국 전쟁의 주도권을 합종군이 가져와야 했다.
그나마 다행히도 진군의 피해도 상당히 컸다. 이목과 조괄, 신릉군에게 연달아 패배한만큼 진군 기병은 전쟁 시작보다 거의 반토막 나서 만오천 정도밖에 안되었고, 하외에 남은 진군은 총 22만이었다. 3만의 정병을 잃은 것이다. 그러나 이로서 몽무와 장당이 왕전보다 확실하게 아랫 입장이 된지라 왕전에게 손해는 아니었다. 왕전은 그대로 군을 재정비해 박랑사에 진영을 만들고 수비 태세를 갖춘다. 신릉군은 왕전이 버티기로 나오자 방법이 없었다. 왕전은 하내의 기병을 데리고 온 환기와 양단화에게 기병 1만을 이끌고 하외의 농사를 막으라고 시킨다. 그리고 8살 어린아이인 감라를 합종군 진영에 보내서 신릉군을 위왕이라고 칭하며 이간질을 시도한다. 이에 조괄도 지록위마가 눈앞에서 벌어진다면서 감라와 유치한 말싸움을 벌인다.
그렇게 양군은 박랑사에서 대치에 들어간다. 탄탄한 수비진을 구축한 왕전의 군영은 정예한 조군 기병이라도 공격하기 어려웠고, 이대로 반년만 시간을 끌면 하외 본토가 황폐해지는 위나라가 망할 판이었다. 좌절하는 신릉군과 다른 장수들에 비해서 조괄은 여유롭게 대량에 가서 안리왕을 안심시키면서 편하게 지내는데...
4.5. 함양의 격변
진나라 함양. 합종군이 결성되어 오랜 대치를 벌여야 한다는 상황에 장양왕은 짜증을 낸다. 그래도 여불위는 왕전이 막고만 있어도 이기는 전쟁이라면서 이미 다 이긴 분위기인 중에 장양왕이 쓰러진다. 사실 50년을 넘게 통치한 소양왕과, 3일 만에 죽은 효문왕이 선선대, 선대여서 그렇지 장양왕도 3년만에 죽어서 진나라의 정계를 혼돈의 도가니로 만든 역사의 변곡점이었다.
장양왕은 바로 죽지는 않았지만 이미 병환이 깊었고, 결국 함양 조정은 관동의 30만 진군을 황급히 복귀시켜야 했다. 소양왕 대부터 이어진 방계와 차남 이하의 왕족들이 많은 상황인지라, 진나라 주력군이 계속 원정을 나간 상태라면 무슨 변수가 생길지 알 수 없었다. 결국 전 상방이자 현 강성군 채택이 하외로 파견되어 왕전에게 복귀를 명한다.
왕전은 미치도록 억울해하며 항의했다. 23만에 달하는 하외의 진나라군이[13] 퇴각하려면 당연히 합종군의 추격을 막아야 했다. 그러려 군영을 열고 합종군과 싸워야 한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채택은 장양왕에 대한 정보를 숨기고는[14] 합종군을 격퇴하고 회군하라고 명할 뿐이었다. 심지어 몽오의 아들 몽무가 퇴각시에 후방을 맡으라는 조정의 명령서까지 내민다. 이에 왕전은 설마 조정에서 자신을 역도로 의심하는 건가 경악하지만 결국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다.
4.6. 박랑사 전투
결국 진군은 각 군영을 열고 교두보를 개척하며 합종군과 승부에 나선다. 이에 합종군도 쾌재를 부르면서 결전에 응하고, 이로서 양 군 43만에 달하는 대군의 회전이 벌어진다. 왕전은 몽무와 왕분에게 4만 예비대를 맡기고 19만 군을 전방에 3군으로 나누어 배치한다. 동쪽에 배치한 합종군 최정예인 이목의 조나라군은 장당이 막는다. 이목이 그 기동력으로 전황에 영향을 주지 못하게 밀리더라도 물고 늘어지는 역할이었다. 중앙의 위나라군은 왕전 자신이, 서쪽의 초나라군은 사마경이 상대했다.한편 신릉군은 그대로 가면 조군 외의 위, 초군이 진군에게 수, 질적으로 밀린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에 변수를 만들 방법을 고민하는데 박랑사 동쪽에는 평야의 한복판에 제법 수풀이 자란 숲이 있었다. 신릉군은 이런 특이한 지형의 박랑사를 이용해 변수를 만들어야 한다고 판단한다. 물론 왕전도 이를 알고 숲 속에 복병을 숨겼고 조군 기병들이 움직여 박랑사 안의 진군 매복 부대를 공격했다. 물론 왕전은 처음부터 조군 전선은 시간 벌이가 목표였기에 신경쓰지 않았다.
문제는 서쪽 전선의 초군이었다. 초군은 재정난으로 정예도가 이전 합종군보다 부족했고, 합종군 특성상 그 편제를 함부로 바꾸지도 못했다. 사마경은 전력으로 항연의 초군에 맹공을 퍼부었고 항연은 뛰어난 능력과 정예를 앞세워 버티고는 있었지만 점차 밀리고 있었다. 결국 합종군 예비대가 초나라를 지원했으나, 이미 기가 꺾인 초군은 전세를 뒤집지 못했다.
한편 동쪽 전선은 이목과 방난의 조나라군이 장당을 박랑사 숲에서 밀어낸 참이었다. 그러나 장당의 주력군은 아직 숲 밖에서 버티고 있었고, 왕전은 환기에게 기병 2천과 보병 3천을 맡겨서 박랑사 숲 입구를 막았다. 이목과 방난은 어떻게든 진군의 방해를 뿌리치고 박랑사 숲 밖으로 나갈 방법을 찾아야 했다.
왕전은 서쪽 전선의 우세와 동쪽 전선의 교착 상태를 확인하고 이제 아들 왕분의 예비대 1만 5천까지 더해서 전력으로 위군을 공격했다. 위군만 격파한다면 이미 패색이 짙은 초군은 연이어 무너질 것이고, 정예라도 홀로 남은 조군은 수적 우위로 손쉽게 섬멸할 수 있었다. 채택 역시 그렇게 되면 한,위는 멸하는 것이고 주력군을 상실한 초, 조도 적수가 아니게 되니 천하통일이 약간 지체되어도 여유가 생긴다고 안도했다.
좌우군 모두 중앙군을 도울 수 없는 상황에 왕전의 대군이 공세를 취해오자 신릉군은 후퇴하기로 한다. 서쪽의 초군이 먼저 후퇴하고 중군도 합을 맞춰서 조금씩 물러나기 시작했다. 결국 조괄이 화약을 써야겠다고 다짐한 그 때 신릉군은 갑자기 조괄에게 자신이 자리를 비우면 차장으로서 지휘를 맡아달라고 조괄에게 부탁하고 전차에 오른다. 유언 같은 소리에 신릉군이 죽을 생각이라 착각한 조괄이 뜯어말리자 신릉군은 '마복군이 그렇게 생각했다면 왕전도 그럴 것이다'라면서 모종의 전술을 시행한다.
이 때 교착 상태에 빠진 동쪽 전선과 달리 서쪽과 중앙은 진군이 합종군을 몰아부치고 있었다. 가장 밀리는 건 힘싸움에서부터 불리한 항연의 초군이었는데, 항연은 사마경의 맹공을 버텨내면서 중군의 도움을 받기 위해 조금씩 중앙쪽에 가까워지도록 후퇴했다. 사마경도 추격해 바짝 따라붙으면서 점차 왕전의 중군에 밀착하게 된다. 문제는 진군의 동쪽도 공간이 좁았다. 왕전은 이목의 조군 기병을 막기 위해 전장 가운데에 있던 박랑사 숲을 선점한 상태였다. 덕분에 조군을 한참동안 물고 늘어지게 만들고 다른 전선에서 전력의 우위를 차지했지만, 중군이 예비대까지 흡수해서 진격하기 시작하면서 박랑사 숲으로 바로 옆이 막혀버린 것이다.
왕전도 조금 늦게 이 상황을 눈치챈다. 숲에 접한 좁은 공간에 밀집한 진군을 신릉군의 정예부대가 공격한다면 큰 피해가 발생할 것이 뻔했으나 그렇다고 진격중인 부대를 무르는 것도 약점을 보일 수 있어 함부로 명령할 수 없었다.[15] 하지만 신릉군이 전차에 올라서 돌격할 것처럼 굴자, 이를 본 왕전보다도 다른 장수가 먼저 움직인다.
서군을 지휘하던 사마경 역시 신릉군과 위나라 전차부대의 기동을 목격했다. 그는 똑똑했기에 이대로 가면 부대를 정비할 공간이 없는 중군이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고 깨달았고, 여유가 있는 서군이 공간을 내어줘야 한다고 판단했다. 사마경의 명령으로 중군과 접한 면의 진군은 퇴각해서 공간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걸 예측한 이담의 병력 4천이 이 공간을 그대로 접수한다. 신릉군과 이야기를 끝낸 조괄의 대응, 이담의 속도가 워낙 빨랐기에 사마경은 눈 뜬 채로 기껏 만든 공간을 이담의 부대에게 내주고 말았다. 그리고 이담은 그대로 왕전의 진군 측면을 공격했다. 진군은 급작스런 측면의 공세에 반격하지 못하고 혼란에 빠졌다.
그리고 먼지만 일으키면서 시간을 벌던 신릉군도 이번에야말로 진군의 정면을 향해 돌격한다. 전차 부대를 압도하는 속도를 낼 거리도, 전차의 돌격을 막고 버틸 체급도 없던 진군은 그대로 무차별로 학살당하며 삽시간에 수천명이 쓰러졌다. 이는 진군의 부대 편성 탓이었는데, 왕전은 기존에 몽무 밑의 기병 5천기가 조괄의 협승 전술에 당해서 대패했다는 것을 듣고서 그런 경우를 막기 위해 기병, 전차, 보병을 고루 편성했다. 이는 유연한 대응이 가능했지만 역으로 극단적인 편성의 상성 우위 부대를 만나면 대응할 방법이 마땅찮게 된 것이다. 본래 이런 경우에는 보병들과 기병들이 우회해서 전차부대를 요격해야 하지만, 양쪽이 숲과 이담 부대에게 막힌 중군은 그럴 수가 없었다.
직전까지만 해도 합종군을 몰아부치던 왕전의 진나라 중군은 삼면을 포위당해 일방적인 소모전을 강요받는다. 사마경은 진나라 중군의 선두가 녹아내리는 걸 보고는 경악해 황급히 이담을 공격해 다시 공간을 회복하려고 했다. 그러나 항연 이은 사마경의 움직임을 눈치채고 부대를 정비해 반격했고 사마경은 정면의 항연을 막느라 이담을 치지 못한다. 이미 수천에 달하는 피해를 본 왕전은 이대로는 부대를 물릴 수 없다고 판단하고 환기의 별동대를 그대로 박랑사 숲으로 밀어넣어 버린다. 당연히 환기의 군은 숲 안에서 대치하던 조나라 병력의 공격에 대책없이 당해야 했다. 그렇게 생긴 공간으로 부대를 우회시켜 간신히 신릉군의 돌격을 저지할 수 있었다.
숲 밖에서 대치하던 장당은 환기의 군사들이 숲 안으로 들어가자 잠시 후 조군의 후방에 있던 예비 기병대 3천이 추가로 숲 안으로 진입하는 걸 보게 된다. 이를 보면서 조군 기병을 붙잡기 위해 큰 피해를 각오하고 예비대를 전부 동원해 다시 조나라군과 교전한다.
신릉군도 더는 돌격은 무리라고 판단하고 전차로 반원형의 진을 만들고 수비했다. 왕전은 비록 엄청난 피해를 입었지만, 최전방에 나온 신릉군만 죽이면 진의 승리임을 알았다. 왕전은 양단화에게 3천 병력으로 조군 기병들이 나올 박랑사 입구를 막으라고 명하고 뒤에 남은 몽무의 부대까지 불러서 신릉군을 전력으로 공격한다.
전방의 위군은 수레벽에 의지해 진군의 공세를 버틴다. 신릉군이 이제와서 몸을 뺄수도 없었고, 주문의 의견대로 조괄도 전방에 나가 군사를 독려하며 악착같이 버텼다. 진군은 직전의 큰 피해에도 수적 우위였기에 예비대와 본대를 교대해가며 차륜전을 벌였으나, 위군은 지친 상황에서도 두 지휘관을 믿고 막아낸다. 조괄은 왕전이 장기전에 지쳐 전력을 집중하면 화약을 쓸 생각까지 했지만 왕전은 조급해하지 않고 차륜전을 벌인다.[16]
동쪽에서는 이목의 조군이 장당군을 몰아붙였다. 방난이 장당의 동쪽 측면을 치고 이목이 정면에서 압박했다. 이목의 실력은 장당을 능가했지만 장당과 능은 결사적으로 싸웠기에 전투는 길어질 듯 했다. 그러나 격전 중 이목이 갑자기 신호를 보내자 박랑사 숲에서 사마상과 기병 3천이 달려나온다. 사실 아까 이목이 숲에 보낸 3천기 기병들은 중군을 치거나, 환기를 잡으러 가지 않고 그냥 숲 속에서 체력을 보존하고 쉬고 있던 것.
장당은 사마상의 기병들이 자신들의 측후방을 칠 거라 생각하고, 마지막 예비대를 앞세웠지만...사마상은 그대로 장당군을 지나쳐서 왕전의 후방을 들이친다. 사실 방난과 이목은 계획적으로 공격해 진군을 끌어내서[17] 기병들이 지나갈 길을 열었던 것이다. 장당은 조군에게 밀리고 있던 데다가, 이제 기병도 안 남아서 눈뜨고 당하고 말았다.
사마상은 그대로 왕전의 후방에 도착해 화살을 쏘고 흙먼지를 일으켰다. 왕전은 이미 마지막 병력인 양단화와 몽무의 예비대까지 전방에 합류시켜서 후방을 막을 병력이 없었다. 전방에서 위군과 싸우던 진군 병졸들도 이를 눈치채면서 순식간에 군의 패색이 짙어졌다. 결국 겁에 질린 진군 병졸들이 하나둘씩 박랑사 숲으로 도망친다.
왕전이 다급히 전방의 병력을 추스려서 후방을 막으려 했지만, 사마상은 이미 진군 군영까지 접근해 불화살을 쏘고 있었다. 결국 전방의 진군도 후방이 습격받았다는 걸 알고 두려움에 흔들리기 시작한다. 예비대를 지휘해 위군을 공격하던 몽무는 군을 정비하기 위해 일단 후퇴했고, 왕전과 몽무 등 진군 장수들이 필사적으로 군사들을 다잡으려 했지만, 겁 먹은 진군은 그나마 길이 열린 것처럼 보이는 박랑사 숲으로 뛰어들었다. 숲 입구를 지키던 양단화의 병력도 마찬가지였다.
몽무가 어떻게든 지친 위군을 격파해 위기를 타파하려고 했지만 이 때 신릉군이 나서서 지친 위군을 움직여 숲쪽 길을 막을 것처럼 굴자, 그쪽 길이 생문이라고 여긴 진군의 이탈은 더욱 심해졌다. 몽무가 정면의 위군을 격파해야 생로라고 소리쳤지만 효과가 없었다. 결국 진나라 중군은 정면과 후방의 압박, 박랑사 숲을 향한 병졸들의 탈영으로 붕괴한다.
서군에서 싸우던 사마경의 군세도 점차 항연의 초군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이담을 잡으려다가 항연에게 반격을 당한 데다가 뻔히 보이는 거리에 있던 총대장의 중군이 무너지는데 서군의 진나라 군사들이라고 계속 싸울 용기가 날 리가 없었다. 결국 승세가 완전히 기울었다고 여긴 사마경은 진군 전체의 퇴로 확보를 위해 중군과 같이 퇴각한다.
동쪽의 장당도 절망했다. 장당은 3개 군 중 가장 열세한 전력에도 아직 여력이 있었는데, 박랑사 숲을 낀 덕에 중군의 붕괴를 병사들이 못 봐서였다. 물론 기구와 전령을 통해 패전을 알게 된 지휘부는 활로를 찾아야 했다. 장당은 그래도 조나라 기병을 묶고라도 있으면 후퇴하는 진나라군이 더 많이 도망칠 수 있다면서 불리한 상황에도 항전을 계속한다.
4.7. 진나라의 퇴각
왕전의 진나라 중군은 완전히 진용이 무너진 채로 후퇴했다. 어지러운 군영에서 왕전은 더는 승산이 없음을 느끼고 채택에게 호위를 붙일 테니까 빨리 함양으로 탈출하라고 권한다. 왕전 자신은 이대로 싸우다 죽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채택은 신릉군의 공격을 막으려면 왕전과 몽오 둘 다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패장이 된 왕전에게 장양왕의 상황에 대해 털어놓는다. 결국 왕전은 전방에서 합종군에게 격파당하는 진군을 버려두고 후방의 통제 가능한 일부만 데리고 퇴각한다.
중군의 후퇴를 확인한 장당은 오대부 능에게 잔존 병력을 데리고 빠져나가라고 한 후 휘하 병사들과 조군의 추격을 막다가 전사한다. 장당의 계산대로 조나라 기병들이 장당에게 붙잡힌 동안은 적지않은 진군 패잔병들이 붙잡히지 않고 퇴각할 수 있었다.
그렇게 박랑사에서 진군이 다 빠져나갔을 때 진군의 피해는 8만명에 달했다. 게다가 박랑사 숲으로 도망친 수만 명의 진군도 며칠 못 버티고 나와서 항복했는데 수가 4만이었다. 진군의 총 피해는 박랑사 전투 직후 확인한 것만 12만명에 달했다. 게다가 남은 11만의 진군이 제대로 합류한 것도 아니었다.
남은 병력으론 도저히 추격을 저지할 수 없다고 판단한 왕전은 전병력을 데리고 함곡관으로 필사적으로 도주한다.[18] 신릉군은 합종군을 신속히 움직여 진군을 추적하기로 결정하고 한나라를 해방한 후 함곡관으로 향한다.
4.8. 조괄의 준비
조괄은 본격적으로 함곡관 파괴와 그 이후를 위한 준비에 나선다.다만 그 방법으로 항연과 다른 장수들의 의견인 '진군 포로 갱살'을 권위로 찍어누르고,[19] 친진파 중 강성 매국노를 제외한 사람들에겐 책임을 물리지 않는다는 방식이라서 많은 원성을 사게 된다.
이목과 신릉군은 지금껏 조괄과의 의리가 있어서 끝까지 반대하지 못하고 조괄의 책략을 수용했지만 속으로는 '조괄이 드디어 미친건가'라고 생각할 정도. 위무기의 공이 커지는 것을 걱정하던 안리왕만 조괄이 이렇게 장난질을 치는 것을 지원했다.
그래도 진나라는 이미 함곡관에만 집중하고 있어서, 조괄이 멋대로 굴어도 관동에서는 고생할 일이 없었다. 합종군에는 한나라군 4만, 연나라군 3만, 그리고 악승과 경사가 5천의 조군을 데리고 증원해와 후방을 지킬 군사를 제외하고도 함곡관을 공격하는 군사만 26만에 달하게 된다.
신안성에서 합종군은 함곡관을 공략할 계획을 짠다. 조괄은 선뜻 신릉군에게 조나라군이 함곡관 공격의 선두에 서겠다고 말하고 이에 신릉군과 이목은 안심한다. 물론 조괄은 화약을 사용하기 위해선 함곡관에 가까이 가야 했기에 그랬다.
그렇게 26만명이 넘는 합종군 중 7만의 조군이 선봉대로 함곡관에 도착한다.
4.9. 함곡관 공방전
7만에 달하는 조나라군이 함곡관 공격의 선봉에 선다. 정석적인 요새로서 최고의 조건을 가진 함곡관은 명장 이목과 숙장인 악승, 경사에게도 별다른 대책이 없었다. 결국 조나라군은 발석거, 운제, 충차를 동원해 함곡관에 정석적인 공격을 시작한다.
이 때 함곡관 방어군은 몽오가 지휘하고 있었다. 진나라군 병력은 함곡관을 가득 채우고도 남는 6만명에 달했으며, 관중에서는 수만의 병력이 추가로 대기하고 있었다. 왕전의 원정군 일부도 복귀했기에 몽오는 여유롭게 병력을 운용해 조나라군을 격퇴했다.
며칠 간의 공방전 동안 조군의 피해가 점차 쌓였을 무렵. 조나라 땅굴 부대는 함곡관 밑에까지 땅굴을 파는 것에 성공한다. 그러나 문제는 몽오도 이를 알고 역습할 준비를 한 상태였다. 조군 땅굴 부대장은 굴은 곧 완성하지만 진군이 눈치챘다고 보고한다. 그러나 조괄은 성벽 밑에 굴이 닿았다는 것만 알자 그걸로 충분하다며 그곳에 화약을 가득 채워넣었다.
그리고 다음 날. 조괄은 이목에게 오늘은 조군 기보를 돌격 대형으로 바꾸라고 명령하고, 오늘은 궁노와 발석거 부대도 자신이 지휘하겠다고 한다. 이목은 순간 조괄이 또 연단술 후유증으로 돌았나 싶었지만 진지한 표정을 보고 순순히 전투를 준비한다.
그리고 조군의 진형이 바뀌고 함곡관 정면에 섰을 때 평원군이라고 적힌 기구가 공중에 떠오른다. 몽오는 조군의 진용 변화와 평원군 기구를 보고 당황하지만 조괄의 계획을 눈치챌 수 없었다. 조괄은 자신을 도와준 두 은인. 안평군 전단과 평원군 조승을 떠올리며 공격 대형을 짠 조군의 선두에 섰다. 이 때 조괄은 전단이 준 즉묵용린을 말에게 달았는데, 낡은 비단조각을 매달아놓은 모양새라서 누가 봐도 장수다운 모습이 아니었다.
이담, 사마상, 주문 등 조괄의 측근들과 조나라군, 몽오와 진군마저 이를 의아하게 보고 있었는데... 조괄은 기름 먹인 밧줄에 불을 붙이고 크게 외친다.
함곡관이 곧 무너진다!
관동과 관서의 경계가 사라진다!
그리고 합종과 연횡이 하나가 된다!
내가 천하를 잇는다!
관동과 관서의 경계가 사라진다!
그리고 합종과 연횡이 하나가 된다!
내가 천하를 잇는다!
라는 말이 끝나고 함곡관이 폭발한다.
수천 근에 달하는 화약이 일거에 터지면서 폭발에 직격을 당한 폭심지는 그대로 가루가 되었고, 가까이에 있던 진군 병사들도 폭발과 화염에 휘말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죽었다. 이 광경은 진군 뿐만 아니라 조군에게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폭발은 수십 초나 이어졌고, 반응조차 못한 진군과 달리 조나라는 두려움에 떨면서 그 광경을 보고 느꼈다.
양측 모두가 당황해서 반응하지 못할 때 가장 연장자인 방난은 "함곡관이 뚫렸다!" 라고 외치면서 상황을 인지시킨다. 마찬가지로 노장인 악승과 방난이 반세기 가까이 자신들이 엄두를 못낸 함곡관을 파괴한 조괄을 쳐다보았고 조괄은 궁노와 발석거 부대에게 명령해 폭심지 주변에 아직 멀쩡한 진군을 공격하게 시킨다. 이를 시작으로 이목이 군을 정비해 진격하면서 다시 전투가 재개된다.
몽오는 경악한 와중에도 필사적으로 병사들을 통제해 조군을 막으려 했지만, 진군의 혼란은 지독했고 이목은 그 난장판을 점차 뚫고 돌격했다. 조괄은 이 틈을 보다가 주력군을 일거에 투입했고 함곡관을 붕괴시킨 조괄의 명령에 사기가 충만한 조나라군은 맹렬히 함곡관을 치기 시작했다.[20]
몽오는 압도적 기세의 조나라군을 보면서 졌다는 걸 깨닫고 비명을 흘리면서도 발악한다. 하지만 최대한 전투를 줄이고 싶던 조괄은 "함곡관 남쪽도 무너진다"라고 외치며 심리전을 걸었고, 이에 몽오 주변의 병력과 남쪽 성벽에 배치된 병사들도 겁먹고 도망치면서 함곡관 성벽은 조나라군의 손에 들어온다.
결국 충차가 비어버린 함곡관 정문을 파괴하면서 조군 대부대까지 들어올 통로가 만들어져 함곡관은 변명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함락된다. 몽오가 악을 쓰며 버티려 했지만 이미 함곡관 방어군은 완전히 기세를 잃고 도망치고 있었고, 몽오는 후퇴하는 부대를 지휘하기 위해 퇴각한다.
그 후 조군은 무사히 함곡관을 차지하고 합종군 본대를 맞기 위한 준비와 전투 후 재정비를 거친다.
함곡관을 무너뜨린 조괄은 합종군 장졸들에게 있어서 관동의 조정보다도 높은 권위를 얻었고 이에 연국자치론의 세력화를 위한 준비에 들어간다.
한편 후방에서 20만 대군을 끌고 달려오던 합종군 본대는 별로 긍정적인 전망을 갖고 있지 않았는데[21] 뜬금없이 전령들이 달려와 조괄이 함곡관을 무너뜨리고 조나라 군이 그대로 관을 점령했다고 전해온다.
마복군이 손을 펼치고 외치니 성이 번쩍이며 지진과 폭풍을 일으키고 무너졌다.로 요약되는 황당한 보고에 합종군 장수들은 당황했지만 수십명의 전령들이 차례대로 달려와 비슷한 말을 하니 곧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합종군은 강행군을 해 곧 조나라 깃발이 꽂힌 함곡관에 도착하고 정말로 함곡관을 차지한 것을 보고 감격했다. 또한 수만명의 진나라 포로들은 조괄의 조치 덕에 멀쩡히 걸어서 함곡관에 돌아왔는데, 고향을 지키던 관문이 함락당한 것을 깨닫고 절망하게 된다. 항연은 이들을 최대한 건강하게 만들어서 풀어주는 걸로 관중 전토에 이 소식을 알리기로 한다.
전쟁의 무대는 함곡관 이후 처음으로 관중으로 옮겨진다.
5. 관중의 전쟁
5.1. 관동의 호응
함곡관이 무너졌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모든 나라에 퍼졌다.특히 한나라는 가장 가까운만큼 빠르고 신속히 반응했다. 함곡관이 터지기 이전에 이미 총력을 기울인 4만 병력을 보낸 환혜왕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아이와 노인들까지 동원해서 합종군을 지원할 물자를 수송하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나라의 국운을 걸고서 합종군에 투자하고 있었고 한나라 사람들도 불만을 갖지 않았다.
위나라 안리왕은 함곡관 앞에서 적당히 싸우다 전쟁이 끝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합종군이 함곡관을 차지하고 관중에 진입하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상국 자순을 비롯해 위나라 중신과 백성들 모두가 이제는 합종군이 진나라를 제대로 밟아놓기를 원했다. 위나라도 한나라처럼 총력을 동원해 합종군을 받쳐줘야 한다는 주장에 안리왕도 결국 응한다.
여기에 모수가 제나라에 가서 후승에게 연국론에 탑승해야 한다고 언질을 놓았고 후승도 여기에 호응하기 시작한다.
조나라의 효성왕도 상당 지방을 다시 공격해 차지하고, 함곡관에 지원을 늘리면서 합종군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효성왕은 자기가 살아있는 때에 미래를 위해 진나라를 완전히 작살내버리기로 제대로 결심한다. 한편 친진파들은 이제 말도 못꺼내는 상황에 연국론으로 여론을 돌려서 위기를 넘기려 시도한다.
그 외에도 연, 초까지 육국 전체가 격동하고 있었다.
5.2. 약법삼장 vs 상앙변법
신릉군 위무기와 마복군 조괄은 함곡관에서 다시 만난다. 이제 조괄의 위상은 위무기에 지지 않을만큼 높았다.
둘은 향후의 전술전략을 논의했다. 진나라는 관동에서 정병 십수만을 잃었지만 여전히 수십만을 동원할 수 있었다. 조,위가 그랬듯이 본토를 공격당한 판이니 전력을 다해서 합종군을 공격할 터였다.
신릉군은 조괄이 반대해서 살려놓았던 진군 포로 4만명을 석방하는 걸 통해 관중에 여론전을 계획한다.[22] 조괄은 이 여론전의 지휘를 맡겠다고 하고, 자세한 작전을 들은 신릉군은 고민하다가 승락한다.
진군 포로들은 관중에 진입한 후 더 좋은 대우를 받았다. 함곡관이 무너지고 포로들에게 정치적 가치가 생긴 걸 알게되자 합종군 국가들이 각자 군량을 보조해줬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함곡관이 무너지고 25만이 넘는 합종군이 관중에 들어온 걸 본 진군 포로들은 두려움에 차 있었다.
조괄은 조나라 병사들을 데리고 가서 포로 중에 노약자들과 부상자들은 돌려보낸다면서 4천 명을 골라낸다. 그리고 진군 포로들에게 앞으로 합종군은 점령지에서 약법삼장을 시행하겠다고 선포한다.
진나라는 법가 사상을 중심으로 가혹한 법령을 통해 통치하고 있었는데 이는 진나라가 국력을 풀로 발휘하는 데엔 도움이 되었으나 진나라 백성들 입장에서는 괴로운 일이었다.
심플한 약법삼장의 내용에 적지않은 진군 포로들이 진심으로 기뻐하고, 4천명의 포로들이 풀려나면서 관중 전체에 약법삼장의 내용이 퍼지게 된다.
함양의 여불위는 이 상황에 이를 갈았다. 약법삼장은 이미 전국에 퍼졌고, 소문을 퍼뜨린 포로들을 벌했다가는 민심이 완전히 돌아설 판이었다. 창평군의 의견대로 일단은 진나라도 법의 수위를 크게 낮추면서 민심을 붙잡았다. 여불위는 관동에 많은 사신을 보내고, 전장에도 여러 인물들을 파견해 대처에 나선다.
함곡관을 중심으로 한 합종군 군영은 장기전 태세에 들어선다. 아무리 진나라지만 이미 정병을 수십만이나 소모한 이상 군대의 질은 전에 비해 낮아진 상황이고, 대규모 야전을 지휘할 사람 몽오와 왕전이 이미 대패한 상황이라 대체할 인재가 없었다. 신릉군은 진군이 합종군을 관중 본토로 끌어들여 장기전을 벌일 것이라 판단한다.
조괄은 합종군의 마지막 고비가 왔음을 알았지만 힘든 작업에도 얼굴에 희망을 가진 관동 사람들을 보고 안심한다. 그리고 진나라가 상앙변법을 포기하고 민심을 모으려고 노력중이라 듣고 자신의 연국론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실감한다.
5.3. 대치 시작
합종군은 관중에서 함양을 향해 진격하고 순조롭게 요새인 영진성까지 빼았는다.그러나 관중에서 장기전이 벌어질 것이라는 신릉군의 예상은 빗나갔다. 진나라는 함양을 제외한 관중 고을들을 포기하고, 파촉과 함양 사이의 길목인 자오곡에 군을 배치했다.
사실 이번 관동 원정의 패배로 관중은 여력이 없었기에, 아직 경제력이 풍족한 파촉을 배후지로 삼아 보급을 유지하며 함양과 파촉이라도 지키기로 작정한 것이다. 함양을 직공하면 함양 수비군과 자오곡 진군과 양면전쟁을 치러야 했다. 왕전과 몽오의 지휘하에 자오곡에 철저한 방어진을 펼친 진군의 군영은 함부로 공격할 수 없었다.
항연은 굳이 어울리지 말고 방어가 빈 관중을 파괴하자고 주장한다. 함양은 무리라도 관중 상당 부분이 합종군의 사정권에 들어온 상황이었다. 신릉군은 그 작전 역시 50년은 가겠지만 근본적 구조의 변화는 안되기에 우선은 보류한다.
합종군은 진군과 대치하면서 장기전에 돌입하나... 조괄은 이 대치가 길어진다면 자신에겐 이득이 없다면서 모종의 작전을 세우는데 신릉군은 위험하다 경악했지만 결국 작전을 허가한다.
이 때 문제는 초나라였다. 초나라는 수도권인 영과 언이 있는 남군을 돌려받는다면 그만 발을 뺄 생각이었고, 진나라 사신 모초의 거래에 응하기로 한 것이다. 수도 거양에서는 진나라와 초나라 간의 지난한 협상이 시작되었다. 사실상 초나라가 합종에서 반쯤 발을 빼버린 것이다.
5.4. 창평군
한편 이 때 창평군은 파촉과 함양을 잇는 포사도 길목을 관리하며 군량 수송 업무를 담당했다. 창평군은 열성적으로 일하면서도, 함양에 남은 여불위가 다음 세대에도 일인지하 만인지상 자리를 차지하고 호가호위할 거란 생각에 불쾌함을 참지 못했다.그러던 중 합종군의 사자가 창평군을 찾아온다. 사자단의 대표는 역이기로 창평군이 삶아죽일 것처럼 위협해도 전혀 굴하지 않았다. 다만 그 옆의 시종들은 겁에 질려있었는데 조괄도 있었다.[23]
창평군은 사신에게 정보만 뽑아내고 제거할 생각이었으나, 조괄이 정체를 밝히고 설득을 시도한다. 왕후장상 영유종호라는 구호의 제안은 창평군의 욕망을 강하게 일깨운다.[24] 조괄은 자신은 십수년간 진나라와 싸웠고 매번 이겼으나 조정과 노신들의 눈치를 보는 자신의 상황을 알렸고, 창평군은 자신 역시 어떤 큰 공을 세워도 여불위보다 나아질 수 없다는 것에 내심 공감한다.
창평군은 진나라 백성들이 그런 걸 따르겠냐고 호통을 치지만 이 말의 진의는 자기 뜻이야 어쨌건 자신을 따라줄 세력이 적다는 뜻이었다. 이에 조괄은 남군 이야기를 꺼낸다. 미래에는 삼국지의 주요 분쟁지역이 되기도 하는 형주 땅은 이 시기에도 부유하고 번성한 지역이었다.
중요한 건 남군 땅은 초나라 수도였다가 진나라에게 빼앗긴 땅이고, 지금은 또 초나라에게 넘어갈 상황이었다. 즉 이 지역 사람들은 지금 붕 뜬 처지로 합종군이 길을 터주고 창평군이 재주를 발휘한다면 충분히 흡수할 수 있었다. 조괄은 여기에 더해서 창평군이 남군에 할거하면 관동 출신의 진나라 관리와 군사들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한다. 정말로 일국을 운영할만한 세력이 모이는 것이다.
창평군은 그제서야 남군의 초나라 사람들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거병을 결심한다. 다만 휘하 대부분이 관중 출신 병력인 게 문제였는데 조괄이 계책을 알려준다.
다음날 포사도의 군량창고와 잔도가 불탄다. 창평군의 측근들이 기름까지 써서 지른 불은 잔도와 군량창고에 쌓인 군량을 완전히 재로 만들었다. 진나라 군사들은 망연자실 한다. 창평군은 좌절한 척 냅다 자결을 시도하고, 부하들이 말리는 와중에 약법삼장이니 뭐니해도 합종군이 퇴각하면 제도가 원상복구되어 포사도의 진군은 다 책임을 지고 참형을 당할 거라고 한탄한다.
그러자 군사들 사이 숨은 창평군의 측근들이 이렇게 된 거 조정을 엎어버리자고 선동하면서 창평군 휘하의 진군은 함양 조정의 통제에서 탈주하게 된다.[25]
5.5. 반전
창평군은 조괄의 말을 살짝 바꾼 공경대부 영유종호라는 말을 외치며 휘하의 군사들을 선동했다. 또한 조나라군이 진나라의 가장 난적인데 조나라 사람인 여불위, 영정을 진왕에 두는 건 말이 안된다면서 그들을 폐하고 장양왕의 아들인 장안군을 진왕으로 세우자고 주장했다. 굉장히 그럴 듯한 소리와 명분에 결국 포사도의 진군은 그대로 거병해 인근 고을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이 주장은 창평군의 반란 소식과 같이 함양에 흘러들어갔고, 여불위가 그들을 소환하려 들자 응하면 죽으리라 직감한 장안군과 그 세력은 곧바로 함양에서 도주한다.
함양이 혼란에 빠진 동안 창평군과 조괄은 이후 협조를 약속한 후 역이기를 연락책으로 남기고 합종군에 복귀한다. 왕전과 몽오는 이제 시급히 창평군을 치고 군량보급을 정상화시켜야 했는데, 합종군이 이를 제대로 방해한다면 군량 보급과 후방 치안이 붕괴한 진군은 이길 수 없었다.
신릉군과 제장들은 진군의 혼란을 보고 조괄의 성공을 직감하고 그를 마중나오며 움직일 준비를 한다. 이목과 신릉군은 이제 전력으로 왕전과 몽오를 칠 준비를 시작했다.
조괄이 연국론과 파촉 독립 준비를 위해 관동으로 떠나고도 관중의 상황은 나날이 혼란스러워졌다.
함양에서 도망친 장안군은 그대로 북쪽으로 가서 사람을 모아서 반란을 일으킨다. 문제는 함양에는 진압할 병력의 여유가 없었다. 사실 관중 포함해 진나라 전체의 남은 정병이 자오곡에 모인 상태라서 관중에 남은 한줌의 여력을 장안군이 쓸어담아도 막을 사람이 없었다.
함양의 수도방어용 정병들은 남았지만 여불위는 함양의 정병을 내보낼 생각이 없었다. 결국 여불위는 왕전과 몽오에게 자오곡의 군사 일부를 함양으로 파견하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당장 합종군이 기세를 올리고 있는 데다가 아직 포사도의 군량도 복구하지 못한 자오곡 진군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26] 포사도의 군량이 끊기면서 병사들의 사기도 크게 떨어지고 있었고, 왕전과 몽오도 어찌할지 모르고 있었다.
한편 그 중에 몽오는 유독 상태가 안 좋았다. 젊을 적 제나라에서 건너온 몽오는 천하무적의 강국인 진나라가 허망히 흔들리는 걸 보고 삶의 의미를 잃었다고 생각해 제정신이 아니었다. 결국 몽오는 합종군을 격파하고 자신의 옳음을 입증하기 위해 독단적으로 군사 행동에 나선다.
몽오의 목표는 근래 합종군에서 겉돌기 시작한 초나라였다. 초나라군은 초와 진의 남군 협상에 대한 소식이 전해지면서 군기가 해이해졌다. 항연만은 이러면 안된다고 생각하고 다잡으려고 했지만, 본국에서 진군과 싸우지 말고 합종군과 군영의 거리를 두라는 명령까지 내리면서 초나라군은 이미 싸움이 끝난 것처럼 방심하게 되었다.
그렇게 방심한 초군의 군영을 몽오의 정병 3만이 기습했다. 항연의 병사들을 제외하면 초군은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형편없이 밀렸다. 항연만이 어떻게든 군세를 다잡으려고 노력했으나 효과는 미비했다. 그렇게 진군이 한참 초군을 유린하고 있을 때, 합종군 병력이 몽오의 후방을 포위했다. 조군 기병들이 진군 후방을 찌르기 시작했고, 합종군이 후방에서 진형을 펼쳐 몽오의 퇴로를 막았다.
사실 합종군 본부의 신릉군 역시 이럴 경우를 대비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몽오가 군을 이끌고 나오자마자 군을 우회시켜 몽오의 후방을 공격한 것이다. 몽오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퇴로를 열려 했지만 후방을 막은 기병의 지휘관은 다름아닌 이목이었다. 그리고 지금이 결정적 기회라고 깨닫고 사기가 높고 정예한 합종군은 철저하게 진군을 몰아부쳤다. 결국 몽오의 군이 패배를 깨닫고 붕괴하면서 3만 진군은 대패하고 괴멸당한다.
5.6. 연국론
왕전이 뒤늦게 상황을 눈치챘을 때는 몽오는 이미 전사한 후였다. 게다가 파촉인들은 포사도 붕괴를 핑계로 진군 본영에 합류하기를 거부했다. 관중에 남은 주민들은 창평군과 장안군이 앞다퉈서 징발하고 있었다. 이제 진군은 합종군을 질로도, 양으로도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제 우세를 점한 합종군은 병력을 움직여 진군을 압박했고, 군량도 원병도 없는 진군은 그런 역포위망을 막을 능력이 없었다. 함양의 병력들도 나오지 않는다는 게 확실해지면서 진군은 사방이 막히게 된다.
흐름을 눈치챈 진군 병졸들도 갈수록 탈영을 시도하면서 군의 규모를 유지할 수도 없게 되어갔다. 결국 왕전은 관중만이라도 지키기 위해서 합종군에게 항복하기로 결정한다.
신릉군은 왕전의 항복을 받아들여 그 군을 사실상 해체시킨다. 이것으로 합종군을 막을 자들은 관중에 남지 않게 되었다.
조괄은 이 기간 동안 관동에서 연국자치의 기반을 다지고 실행만을 앞두고 관중에 복귀한다. 그리고 합종군의 제장들 앞에서 이후 진나라와 삼진의 접경지이자 경제적 요충지인 안읍 일대를 중추원의 땅으로 만들어 전쟁 억지력을 가지게 할 것이라 발표한다.
마지막 문제가 해결된 합종군은 함양 북쪽의 장안군과 함양의 여불위에게 연국론을 지지하며 항복하라고 서신을 보낸다.
이에 장안군은 곧바로 응한다. 함양이라는 방벽도 없는 데다가, 여불위를 못 쳐내면 죽을 운명이던 장안군이었고, 신릉군도 이를 노리고 한 일이었다.
그리고 함양 성내에서는 결국 장양왕이 사망한다. 본 역사에서는 발빠르게 영정을 옹립하고 권세를 유지한 여불위였지만 여기서는 그럴 수 없었다. 함양의 중신들은 패배를 직감하고 성문을 열고 항복한다.
6. 전후 처리
함양 내의 진군은 저항하지 않았다. 여불위는 합종군이 쳐들어오자 절망해 자결했다. 합종군은 쉽사리 함양을 점령하고 무장을 해체시켰다. 영정을 포함한 대부분의 진나라 왕족들도 전부 포로가 되었다.
합종군은 장안군을 차기 진왕으로 세우며, 연국론 지지와 합종에 저항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는다. 물론 미래엔 장안군이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어차피 조괄의 계획상 진나라는 이제 다시는 전성기 시절로 돌아올 수 없었다.
그렇게 전후 처리를 마친 조괄은 이후 2만명의 군사와 창평군,[27] 자기 측근들을 데리고 파촉으로 떠난다. 합종군의 2인자인 마복군이 군을 떠나면서 사실상의 전쟁은 완전히 종결된다.
7. 결과
상앙변법 폐지진나라의 삼가분진 해체
파촉과 안읍 중추원의 중원 세력 균형 유지 천명화
진나라의 국력 핵심이던 관중, 파촉, 남군, 안읍 중에서 관중을 제외한 지역들이 모조리 떨어져나갔다. 파촉은 조괄이, 남군은 창평군이, 안읍은 신릉군의 중추원이 떼어가면서 진나라의 국력은 전쟁 이전의 절반 이하로 떨어진다. 물론 관중은 여전히 높은 생산력을 자랑하고, 관동육국들도 관중을 정복할 힘은 없지만 이제 관중이 관동에 일방적인 우위를 차지할 정도는 아니게 되었다.
관중 지역 또한 직접적으로 파괴나 약탈을 당하지는 않았으나, 변법 포기, 국왕 교체, 패전 같은 극심한 혼란상으로 인해 제 힘을 회복하기에는 수많은 세월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28]
남군에 자리잡은 창평군은 춘신군과 임무군의 10만 병력의 공세를 받았으나, 파촉의 조괄이 지원한 2만여 병력과 화약으로 보여준 경고로 연국론을 강제하게 되면서 전국은 연국 자치로 연결된다.
[1]
각국 부관급은 제외하고 군사 지휘권자만 기재. 혹은 직접 대치하지 못하고 주둔만 하고 있는 장수들도 제외.
[2]
조군은 최소 2만+a, 한과 연도 군사를 준비하기는 했지만 합종에 합류하거나 진군과 싸우지는 않으므로 제외.
[3]
박랑사 대전 이후 한, 연, 조군 증원과 의병들이 합류해 후방을 지킬 병력을 제외하고도 26만을 넘긴다.
[4]
왕전의 주력군 30만에다가 패전하면서 본토를 지키기 위해 대대적인 징병을 시행했다. 다만 관동에서 소모한 병력이 워낙 컸기에 최댓수가 30만을 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5]
이후 자오곡 대치 와중에 왕전이 직접 수적으로 합종군한테 확연히 밀린다고 언급한다.
[6]
조군의 대량입성까지 약 1만. 이후 벌어진 박랑사 대전에서도 중반까지 밀리고 있었기에 만 단위의 피해가 추가로 있었을 확률이 크다.
[7]
조군과의 전초전에서 약 3만. 박랑사 대전에서 사상자 8만 이상. 함곡관에서 6만 병력이 대패했고, 이후 몽오의 3만 정병이 궤멸당했다. 포로도 함곡관 도착 시점에 이미 4만으로 포로까지 합치면 적게 잡아도 20만명을 넘길 것으로 보인다.나머지 병력이 전부 집계한 것도 아니라서 더 늘어난다.
[8]
강족 포함 기병 2만 5천 내외.
[스포일러]
그러나 장양왕의 갑작스러운 병환으로 6개월로 쪼그라들었고, 결국 진군의 패망 원인이 된다.
[10]
염파의 후군 2만과 연군 등 실제 전장에 나가지 못한 군사도 있다.
[11]
조군 흉노기병 1만5천은 거의 특수전력으로 대우받았다.
[12]
반년 이상 하외가 점령당한 상태로는 위나라가 농사를 짓지 못해 망한다.
[13]
박랑사에 주둔하는 동안 본국과 하내 등에서 원병을 받아서 전력을 일부 회복했다. 만일 반년 넘게 대치했으면 25만 군세를 회복했을 것이라고 한다.
[14]
이건 다분히 심리적인 요인이었는데 당시 진나라의 주요 요인인 채택, 여불위, 몽오가 전부 연, 조, 제 출신의 외국인 귀화자였다. 반면 왕전은 진나라 토착 호족 출신이라서 자신들과 반목해 영정이 아니라 다른 왕족에게 붙을까봐 걱정한 것.
[15]
보통은 총사령관이 돌격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상대가 이미 전적이 있다보니 왕전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16]
바로 직전에 전력을 너무 집중시켰다가 피할 공간을 못 만들어 신릉군의 전차 돌격에 수천 명이 녹아내린 만큼 당연했다. 예비대를 더해서 전력을 회복했으니 여유도 있었다.
[17]
장당군의 역할이 조군을 붙잡아놓는 것이란 걸 깨달아서 물러나지 않고 오히려 전진하는 걸 역이용한 것이다.
[18]
신안, 민지성은 지난 합종군에서 조괄이 파괴했고 아직 제대로 재건된 상태가 아니었다.
[19]
신릉군은 의견을 내지는 않았지만, 딱히 나서서 반대도 안하고 있었다. 조괄이 억지로 항연을 찍어누르고 포로들을 먹이자 크게 당황한다. 이목도 갱살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 포로들의 식량을 조군에서 댄다는 말에는 경악하면서도 조괄의 권위를 존중해 반대하지 못했다.
[20]
참고로 조괄은 이담에게 물어본 건데 이담은 함곡관 붕괴의 감격에 빠져서 조괄이 시킨대로 하겠다고 답을 흘렸다.
[21]
항연은 4만 명의 진군 포로들을 죽이지 못한 게 불만이라 조괄을 욕했고, 신릉군은 함곡관 돌파는 생각도 안하고 진나라가 함곡관 밖으로 군사를 내보내기만 바라고 있었다. 조괄 말마따나 함곡관을 못 깼으면 이번의 대승리도 10년여 정도의 수명연장에 불과했던 것.
[22]
당연히 3,4천명씩 여러번 갈라서 풀어주는 것으로 진군에 금방 다시 모이지 못하는 식으로 진행할 예정이다.
[23]
조괄도 나름 각오를 하고 변장해서 섞였지만 솥에 물을 끓이는 걸 보고는 동요했다. 원 역사의 역이기가 한신의 배신으로 똑같이 죽었기 때문.
[24]
이 문구는 진승 오광의 난 당시 진승이 부르짖은 말이다.
[25]
진나라는 말년에 이런 식으로 망했다고 볼 수 있다. 너무 엄하고 잔인한 처벌 방식에 사방의 백성들이 너죽고 나죽자 식으로 들고 일어난 것. 진승 오광의 난도 시작은 홍수 탓에 노역장에 가는 게 늦어지자 병사들이 즉결에서 처형하려 들어 백성들이 반격한 것이 계기였다.
[26]
애당초 자오곡에 군영을 만든 이유가 촉의 군량 보급 외에도 관중이 파괴당해도 함양만은 지키기 위해서이다. 합종군이 함양을 공격하면 그들의 후방을 요격하기 위해서인데, 정반대로 함양에 원군을 보냈다가는 반대로 합종군이 이동하는 진군의 뒤를 칠 수 있게 된다.
[27]
초나라군이 아직 함양에 있어서 우선 파촉에 간다고 하고 도착 후에 남군으로 보낼 작정이다.
[28]
무엇보다 바로 남쪽의 남군과 파촉이 각자도생해가면서 설령 함곡관을 재건한다 한들 이전같은 무적의 방어력과 지리적 우세는 사라진 셈이다. 중추원, 남군, 파촉 세력이 바짝 붙어있어서 이전같은 본토의 안전은커녕 오히려 사방에서 공격당하게 되는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