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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7 21:32:57

대진 합종군

대진 합종군
장소
낙양에서 함곡관 일대 지역
기간
기원전 256년 ~
교전세력 주나라
초나라
위나라
조나라
한나라
연나라
진나라
지휘관[1] 상장군 위무기
차장군 조괄
경양
악승
극신
백기

몽오
장당
사마경
병력 주군(조괄) 5천여명
초군 10만
위군 8만
한군 3만
조군 4만
연군 2만
총합 27만
30만 이상 추정
피해 규모 피해 불명 사상자 총합 15만(추정)
결과
합종군의 승리
영향
진나라의 함곡관 후퇴
육국의 친진파 실각


1. 개요2. 배경
2.1. 진나라의 낙양 공세2.2. 하북의군의 등장
3. 전력
3.1. 진나라3.2. 합종군
4. 진행
4.1. 낙양의 상황4.2. 관동의 정세4.3. 낙양 해방4.4. 합종군4.5. 진의 대응4.6. 대치4.7. 퇴각과 추격
4.7.1. 방난의 관중 침입
4.8. 야전4.9. 승부4.10. 역추격
5. 전후 처리

[clearfix]

1. 개요

간절히 대체역사소설 헉 내가 조괄이다에 등장하는 가공의 전쟁. 장평대전의 변화로 인해 사라진 신릉군의 합종군이 재차 결성되어 원 역사 이상으로 큰 전쟁으로 번졌다.

2. 배경

2.1. 진나라의 낙양 공세

조괄에 의해 여러차례 전쟁이나 외교에 실패해 망신을 당한 진소양왕은 원 역사 이상으로 주나라 공략에 진력해 만회하려 시도했다. 천자의 권위를 빼앗아 자신의 권위를 중원 제일로 높이려고 한 것.

장평대전이 진국의 패배로 끝났기에 백기와 왕흘 등의 장수들도 실각하지 않았으며 국력도 회복이 더 빨랐다. 유능한 중도파 상방 채택과 명장 백기의 지휘 아래 진나라는 규를 지휘관으로 삼아 약 10만~15만의 병력을 동원해 주나라를 공격한다.

진나라군이 주나라를 치려면 주나라를 감싸는 한나라의 양평-부서를 지나야 했으나, 강력한 진나라군에게 약소국 한나라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진나라군은 별 무리 없이 양평과 부서를 빼앗아 주나라를 진나라 안에 가둔다.

이에 주나라의 난왕은 초나라의 병력과 제나라의 물자 지원, 각국 의병을 모은 3만의 군사로 항전했다. 그러나 초나라에서 파견한 장수인 굴격은 진나라의 유도에 넘어가 대패하고 전사했으며 주나라군 패잔병들은 간신히 낙양으로 후퇴한다.

관동 육국들은 800년 역사의 주나라가 이렇게 망하면 안된다는 것을 느꼈지만 차마 진나라를 막을 용기를 못 내고 있었다. 진나라는 각국 조정에 관여하지 말라는 협박을 하고 있었고, 친진파 매국노들도 이를 핑계삼아서 굳이 다른 나라 전쟁에 낄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진나라와 국경을 맞댄 삼진(조,위,한)은 주나라 다음은 자기들이라는 것을 알기에 더욱 애가 탔으나 서로 의견도 맞지 않고 준비가 부족해 진나라를 막지 못했다.[2]

그렇게 주나라는 멸망하는 듯 했다.

2.2. 하북의군의 등장


소양왕의 야망은 수년 전부터 각국 수뇌부에선 공공연히 알려져 있었고 조괄도 이 사태를 예상하고 있었다. 친진파의 공작으로 조나라 사공으로 안문군에 발령난 조괄은 흉노족 용병을 휘하에 모은다. 그리고 이목과 친분을 나누고, 방난을 영입하는 등 자신만의 군대를 양성했다. 그리고 주나라 침공 소식이 들려오자 바로 남하해 효성왕에게 자신과 조나라 군인들이 관직을 내려놓고 의군으로서 낙양을 구하러 가겠다고 요청한다.

이에 효성왕은 그 요청을 받아들이고, 초나라 장수 굴격의 전사 소식까지 들려오자 하북의군에게 바로 출병을 명한다. 특히 평원군 조승은 사재를 털어 1천명의 병력을 더 보태주기까지 한다. 그렇게 결성된 조괄의 하북의군은 신속한 기동력으로 진나라군보다 먼저 낙양 인근에 도착했고 조괄은 휘하 기병대를 낙양 성문에 몇번이나 왕복시키는 방법으로 기병 수만 1만에 달하게 보이도록 진군을 속인다.

이때 주나라를 지킬 전력이 강화된다는 소식이 들리는데 바로 제나라의 묵가 대표 상부영이 주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조괄의 의군에 합류하기로 하고 800명의 묵가를 데리고 주나라로 향한 것. 이에 제나라의 친진파들은 군 태후에게 묵가들을 억류하라고 요구했으나, 미약한 조괄에게 마지막 희망을 걸기로 한 군 태후는 오히려 자금을 지원해 묵가의 이동을 도와준다. 상부영 일행은 이동 도중 등릉박과 초나라 묵가들, 각국의 묵가들을 흡수해 2000명이 넘는 일군이 되어 낙양에 합류한다.

조괄은 규의 진군이 자신의 의도대로 의군의 수를 오판해 공세를 늦춘 사이 낙양에 입성해 전투를 준비하게 되고 뒤늦게 장군 규의 5만 대군이 낙양성을 공격하면서 1차 공방전이 벌어진다.

조괄은 낙양에 오기 전에 미리 거중기를 개발하고, 흉노 기병대를 편제에 넣는 등 철저한 준비를 한 상태였고, 관동의 묵가 연합도 정예했기에 개전 첫날 진군은 공성병기를 대부분 잃어버리고 사상자만 4천명에 이르는 큰 피해를 입는다. 이로서 조괄은 난왕과 대부들의 인정을 받으며 정식으로 낙양의 군권을 장악한다.

함양의 소양왕은 낙양 장악에 실패했다는 소식에 격노했으나 진나라 군부는 낙양그라드가 되어버린 것을 깨닫고 규를 변호한다. 결국 진나라는 반년 이상의 전투를 각오하고 막대한 물자와 지원을 보내서 장기전에 돌입한다.

그렇게 1년이 흘렀다.

3. 전력

3.1. 진나라

3.2. 합종군

4. 진행

4.1. 낙양의 상황


원군과 물자를 지원받은 규는 약 10개월간 몇번이고 낙양성에 공세를 시도했다. 그러나 하북의군의 방어는 철저했고, 첫날만큼의 패배는 아니라도 나날이 공격하는 진군의 피해만 늘어났다. 결국 규는 좌천되고 야왕에서 위군을 견제하던 장당이 2만의 병력을 데리고 낙양으로 와 군권을 인수한다.

함양에서 그런 결정을 내린 이유는 감찰 결과 탓이었다. 1년 가까이 위군을 견제하는 야왕, 조군을 견제하는 상당 땅에서는 어떤 싸움도 없었던지라 꿀을 빨고 있던 해당 지역 진나라 병졸들은 병사들이 우수수 죽어나가는 낙양에 가지 않기 위해서 온갖 수작을 부리고 있었던 사실이 드러났던 것. 이에 진나라는 병사들에게 경고하고 빨리 싸움을 끝내기 위해 야왕의 진군과 장당을 낙양으로 증원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다만 이런 진군의 똥꼬쇼도 헛된 건 아니었는지 1년간의 전투 속에서 낙양성 내부의 주나라 조정과 하북의군도 크게 지쳐있었다. 진군의 방어 탓에 성 밖을 역습하는 것도 더는 불가능했고 의군이 1년간 진나라에 엄청난 피해를 강요한지라 항복해도 살려준다는 기대를 할 수가 없었다. 병사와 주민들은 묵가와 순자 등의 지식인들이 나누는 토론을 구경하면서 위안삼아 하루하루 버티고 있었다.

다만 하북의군의 명성은 천하를 흔들고 있었다.

4.2. 관동의 정세

진나라를 상대로 1년이나 버티고 있던 하북의군의 소식은 곧 관동을 넘어 전국 칠웅 국가 전체에 퍼지기 시작했고 곧 그들 국가들 사이에서 타도 진나라를 위한 유의미한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한다.

우선 초나라의 고열왕이 자신들이 남긴 물자로 항전하며 명성을 떨치는 조괄을 질투하면서, 어쩌면 진나라에 반격할 기회가 왔다는 생각에 임무군과 춘신군, 경양 등의 중역들을 불러 군사를 소집하기 시작했다.

조나라 같은 경우 효성왕이 평원군 조승을 불러 조괄이라도 열기구를 쓰면 낙양에서 탈출할 수 없겠느냐고 묻자 평원군이 조괄은 죽으면 죽었지 홀로 살아나오지 않으리라고 답한다. 이에 효성왕은 최근 조나라 국내의 여론, 특히 군부의 인내심이 한계라면서 불안해했다.[3] 즉, 조나라도 머지 않아 움직일 조짐이 일고 있었다.

제나라의 수도 임치에서도 각국 학자들이 모여 주나라의 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제자백가 중 제일인 유학자들은 묵가과 순자 등 정통에서 거리가 먼 사람들이 주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항전하고 있는데 자신들은 아무것도 못한다는 것에 자괴감을 느꼈다.

위나라에서는 신릉군 위무기가 일부 측근들과 같이 평고의 위나라 군영을 방문한다. 위나라 대장군 진비는 몇 차례 있던 대량의 위문이라고 생각하고 신릉군을 맞이하고... 잠시 후 잘린 목이 되어 나온다.

위군 장졸들이 경악하는데 신릉군은 안리왕이 주나라를 구원하라 명하고 부절을 내려 자신을 보냈으나, 진비가 명을 받들지 않아 군법대로 참했다면서 위군의 병권을 장악한다. 물론 위군 귀족과 장수들은 안리왕과 신릉군이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걸 알았기에 신릉군의 발언을 완전히 믿진 않았지만 신릉군은 개의치않고 식객들과 함께 위군의 군제를 재편한다.

비록 왕의 견제로 병권을 쥐어보지 못했으나, 십수년간 위나라의 정치와 군사를 공부한 신릉군과 신분 상관없이 재능있는 사람들이 모인 식객들의 솜씨는 뛰어났고 그 덕에 한가구 당 2명이 징집된 사람들을 전역시켜 2만명의 병사가 줄었음에도 위나라는 실 전력을 거의 깎지 않고 움직일 수 있게 된다.

이 솜씨를 본 위나라 장졸들은 그제서야 정말로 대량에서 준비를 하고 일을 벌였다면서 신릉군을 믿고 따르게 되고 그렇게 준비를 마친 신릉군은 8만의 군대를 이끌고 진군을 치러 남하한다.

4.3. 낙양 해방

그렇게 천하가 요동치는 와중에도 낙양의 장당 휘하 진군과 조괄의 의군 사이에는 사력을 다한 공방이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장당은 사상자가 계속 늘어나는 상황에서도 군을 물리지 않았고, 이에 조괄도 물자를 아끼지 않고 쏟아부으며 진군을 막아나갔다.

이런 난전 속에서 상황은 조괄의 의군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는데 진군은 일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았기에 어떤 큰 피해를 보더라도 낙양을 빨리 제압해야 해서 다급해질 수밖에 없었고 조괄은 오히려 이를 보면서 원군이 온다는 희망을 가지고 대범하게 나왔기에 낙양의 수세는 굳건했다

한편 평고에서 정비를 마친 신릉군의 위군은 3만 병력밖에 안 남은 야왕성의 진군을 일거에 들이친다. 야왕의 진군은 쓸만한 정병, 장수, 물자를 전부 낙양에 보냈기에 3배에 달하는 위군의 공세에 수시간도 버티지 못하고 패배한다. 신릉군은 진군을 대파하고 남은 물자를 손에 넣고서, 또 한나라에 야왕성을 넘겨주면서 합종군 참전을 제안한다.

초나라는 제나라의 군 태후에게 위군이 야왕을 치고서 서진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환호하면서 미리 준비한 10만 병력을 북진시킨다. 본래 고열왕은 전국사군자 춘신군에게 군대를 맡기려 했으나, 후일 왕권에 도전하는 이미지가 남을까봐 춘신군이 건강문제를 핑계로 거절하면서 경양이 사령관을 맡는다.

위군은 황하를 건너고 남진해서 낙양을 포위한 진군을 공격할 줄 알았으나, 신릉군은 함곡관을 향해서 기동한다. 신릉군의 큰 그림은 주나라 구원이 끝이 아니라, 진의 군사자원을 최대한 소진시키는 것으로 진군이 함곡관 안에서 수십만 대군을 준비해 출병하기 전에 관동에 남은 진나라 병력과 군 설비를 선점해 파괴하려고 했던 것.

낙양을 공격하던 장당은 야왕이 함락됐다는 소식을 듣고 위군이 곧 낙양에 올 거라고 생각해 다급히 공세를 중단한다. 빨리 퇴각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조정의 허가 없이는 군을 물릴 수가 없었기에 장당은 결국 낙양군과 위군 사이에 끼어 수비&포위전을 병행하며 시간을 벌 준비를 한다. 죽음을 각오한 하북의군은 갑자기 공세를 멈춘 진군을 보고 당황하지만, 곧 경양의 초나라군이 낙양에 당도했다는 소식을 알고 감격한다.

장당은 위군이 아니라 초군이 왔다는 사실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는데 남방에 위치한 초나라의 군대가 왔다는 것은 사이의 한나라가 초군에게 길을 열어주었다는 뜻이었기 때문. 즉, 10만 초군에 곧 한나라군도 가세할 것이 확실했다. 장당은 지금이라도 후퇴하고 싶었지만 이미 위와 초의 군대가 양측에 있는 상황이라 이미 적기를 놓친 후였다. 이에 장당은 굳게 군영을 지키다가 적군의 간격을 찔러서 야전으로 초군을 몰아내려는 계획을 구상한다.

낙양의 의군 지휘부는 초군이 장당의 진군을 밀어낼 수 있도록 내부에서 호응하기로 하나, 어디로 나가야 할 지 애매했다. 초군이 동남방에서 왔으니 의군도 동문 아니면 남문쪽으로 가자는 의견이었고, 실제로 진군도 규와 장당이 동남쪽을 각자 맡아서 주력을 배치한 상태였다. 그러나 조괄은 본래 역사의 장평대전 이후 한단포위전에서 조나라를 구원하러 온 경양이 대담한 우회 작전으로 승리했음을 알기에 이번에도 북문으로 온다고 확신하고 정병을 북문에 배치한다.

조괄의 예상대로, 경양은 4만에 달하는 주력 부대를 몰래 빼서 수백리를 행군해 북문을 공격했고 겨우 수천 명에 불과한 북문의 진군은 내부에서 출격한 의군과 초군의 양공으로 순식간에 붕괴하면서 낙양은 드디어 포위에서 해방된다. 야전으로 역전을 노리던 진군의 계획은 이 시점에서 좌절되었고, 낙양과 연결된 초군을 당할 수 없게 되어 결국 퇴각하게 된다.

조괄은 낙양에 입성한 초군과 경양을 환대하는 한편 방난을 불러 난왕에게 상주하여 받아놓은 주나라의 부절과 상장군의 직위를 신릉군에게 전하라고 부탁한다.

4.4. 합종군

낙양 해방에서 며칠 후. 한나라 상방 장평이 직접 3만 병사를 지휘해 합류하면서 위,초,한 삼국의 합종군이 기정사실화 된다.

그리고 낙양 해방이 알려지자 조나라와 연나라 조정에서도 변화가 일고 있었다. 낙양 해방의 승전은 확정이나 마찬가지라고 알게 된 연, 조 양국이 합종 참가를 결의한 것이다.

연나라에서 먼저 극신과 악간에게 2만 병력을 내려 보낼 것이라면서 조나라가 길을 열어달라고 요청했고 효성왕은 이에 생색을 내면서 연을 감독한다면서 악승과 경사, 평원군에게 4만 병력을 이끌게 하며 사실상의 파병을 선언한다.

한편 신릉군이 이끄는 위군 8만명은 함곡관까지 이어지는 신안, 민지, 섬을 연결한 대로를 통해 진격했다. 진나라는 신릉군의 서진을 예상하지 못했고, 신릉군이 바라던 대로 관동과 함곡관의 병력을 합쳐 급한대로 6만 병력으로 신안성을 지키도록 한다.

신안성의 진군을 지휘하는 왕릉은 성에서 나오지 않고 수비만 유지한다. 그렇게 시간을 벌면서 신릉군 위무기가 부절을 훔치고 진비를 살해한 역적이라면서 선동을 시도한다. 점차 장졸들이 불안해 할 즈음 조괄이 보낸 방난이 도착. 위나라 전군이 보는 앞에서 주나라 천자의 부절을 내리는 것으로 위군의 동요를 진정시킨다.

신릉군은 군이 안정되자 병력 1만 5천을 따로 빼서 동쪽으로 보내게 되고 신안성에서 이를 파악한 왕릉이 의아해하던 찰나 곧 진군 전령이 달려와 구원을 청한다. 여기서 신릉군이 파견한 병력 1만 5천의 목적이 밝혀지는데 바로 장당의 진군이 퇴각할 길목을 막는 것. 낙양에서 퇴각하던 장당은 초군의 추적으로 1만 이상의 병력을 잃었고, 5만여 병력을 겨우 끌고 퇴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함곡관에서 낙양까지 이어지는 길 남쪽은 산맥 지형이었기에 돌아갈 수가 없는 상황에서 신릉군이 보낸 군대가 대로를 막아버리며 이제는 낙양의 조괄과 경양에게 압박당하고 군량도 다 떨어져 간신히 버티고 있던 것.

왕릉은 장당군을 구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출병해 신릉군과 야전을 벌이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낙양에서는 신릉군이 버티고만 있으면 낙양의 초,한군이 군량이 떨어진 장당을 격파하고 도울 것인데 일을 서두른다면서 계획을 앞당겨 장당을 치려 한다. 그러나 조괄은 신릉군의 패전이 전제로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자신이 보기에는 신릉군이 무조건 이긴다면서[4] 합종군의 출격을 미루고 경양 역시 조괄의 발언권을 무시할 수 없어 출전을 연기한다.

신안성 방면에서는 신릉군과 왕릉의 일전이 벌어진다. 위군은 전중후좌우 총 5개 군단으로 나뉘었고, 진군은 좌중우 3개 군단으로 나뉘어 전투가 시작된다. 왕릉은 진군의 질, 체력의 우위를 이용해 위군을 몰아붙인다.

그런데 중도에 신릉군의 식객들이 전차 수백대를 미끼로 진군의 예비대를 좌익으로 끌어낸 사이 위나라 예비대인 중군, 후군이 진나라 우군과 중군의 연결을 끊었고, 곡수와 위나라군 사이에 갇힌 진나라 우군이 그대로 궤멸당하면서 진군이 함몰당해 왕릉도 전사하고 만다.[5]

이 소식은 금방 낙양에 전해졌고, 사기가 오른 합종군은 경양의 초군을 주력 삼아 세 방향에서 동시에 장당의 진군을 쳤다. 군량도 부족하고 사기도 바닥에 떨어진 장당의 진군 5만명은 14만명에 달하는 대대적인 합종군의 공세를 버티지 못했고, 그대로 궤멸당하고 장당과 규는 간신히 도망친다. 그리고 합종군은 그대로 신안성 인근에 주둔한 위군과 합류. 대략 22만명에 달하는 대군이 집결한다.

4.5. 진의 대응

함양에서는 끝없이 들어오는 패전 소식에 난리가 났다. 야왕성이 무너지고, 낙양의 장당이 패퇴했으며, 그 소식이 들어오자마자 신안성의 왕릉군 6만명이 궤멸당하고, 퇴각하던 장당이 추격에 당해 7만에 달하는 병력이 산산이 해체 당하고 말았다. 이 모든 것이 신릉군의 거병 이후 두 달도 되지 않아 벌어진 일이었다.

물론 진나라의 본토는 아직 무사했지만 이대로 가면 지난 수십년간 확장한 영토를 전부 잃을 상황이었다. 이에 몽오는 금방 편성 가능한 15만 대군으로 방어선을 짜서 버티면 위나라의 지원을 못 받는 데다가 연전으로 지친 위군을 깰 수 있고 그러면 합종군도 퇴각할 것이라고 대안을 세운다. 이에 소양왕도 진 국토 전체에서 군사를 모으는 한편 백기를 지휘관으로 보내서 합종군을 깨기로 한다. 상당 국경에 가 있는 백기가 올 동안 15만 진군의 지휘는 몽오가 맡게 된다.

4.6. 대치

장당을 깨뜨린 합종군은 신안성에서 합류한다. 이번 전쟁의 선봉장인 신릉군은 총사령관 상장군에 부임하고, 가진 병력은 적어도 가장 오랫동안 낙양을 지킨 조괄은 차장군이 된다.

당시 합종군의 문제는 당연히 보급이었다. 위군은 본국의 보급을 못 받기에 군량이 떨어져 갔고, 이는 다른 나라에서 보태서 해결해야 하는데 이걸로 마찰이 생길 게 분명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제나라와 군 태후가 해결했다. 그녀가 황하를 통해 20만석이나 되는 군량을 보낸 것. 물론 요상한 의미의 수결을 받는 바람에 위무기와 조괄은 후일을 걱정하면서도 급한대로 수결을 해준다.[6]

보급문제가 해결되자 상장군 위무기는 가용 가능한 25만 병력 중에서 20만 주력군을 이끌고 서진해 민지성까지 간다. 차장군 조괄은 아직 진군이 저항하고 있는 신안성을 5만 후군으로 포위하면서 합종군의 후방을 지키는 역할을 맡았다.

몽오는 민지성 주변에서 15만 진나라군을 이끌고 위무기와 대치한다. 몽오에게 내려진 명령은 백기가 올 때까지 수비하라는 것이었기에 몽오는 군영을 굳게 닫고 수비로 일관한다. 그러나 몽오는 신안성의 진군을 버릴 생각이 없었기에 곡수를 통해 군량을 지원했다.

조괄도 이를 알고 있었기에 부대를 동원해 곡수와 신안성의 연결을 막으려 했지만, 수군이 빈약한 사정 탓에 실패한다. 이 탓에 본군의 훈령을 들으며 후군 장수들이 분을 삭히고 있을 때 위나라의 군인 신원영이 조괄을 찾아온다. 신원영의 목표는 당연히 위무기의 힘을 빼앗는 것이었는데, 조괄은 이를 이용해 위군 장졸들이 위나라의 지원을 받게 해야 사병화가 되지 않는다면서 위나라가 합종군에 물자를 대게 만들어 제대로 합종군에 참전시킨다.

그리고 몽오는 신안성에 더욱 대량의 물자를 지원하기 위해 백여 척의 선박을 동원해 다시 곡수로 공격해온다. 그러나 이번에는 조괄도 철저히 준비를 한 상태였고, 초나라 수군과 박간을 단 선박들의 반격으로 진나라 수군은 대파당하고 민지성까지 합종군 수군의 힘이 닿게 된다.

백기는 이후에 민지성에 도착하고, 섬성까지 후퇴해 전선을 축소시킨다. 섬성은 함곡관에서 가깝기에 사실상 함곡관까지 퇴각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백기에게는 적들이 함곡관을 뚫지 못한다는 자신감이 있었고, 본래 소양왕의 눈치를 보지 않는 백기는 망설이지 않고 군을 후퇴시킨다.

결국 함곡관-섬성라인에서 합종군과 진군이 대치하게 된다. 버티던 신안성의 진군도 백기의 항복을 허가하는 밀서를 받고 항복하면서 조괄은 섬성 인근의 합종군에 합류한다. 합종군은 처음에는 진군할 수 있다고 기뻐했으나, 백기가 일부러 자신들의 보급부담을 줄이고 합종군의 부담을 늘리기 위해 민지성을 버렸음을 깨닫고 한탄한다.

4.7. 퇴각과 추격


대치 시작 후 3개월이 지났다. 서로 빈틈이 생기기만을 바라던 양 세력이었으나 백기도 위무기도 약점을 내보이지 않았다. 관동육국들도 점차 보급을 부담스러워하고 있었기에 결국 합종군은 퇴각을 결정한다.

그리고 백기는 지금이야말로 나설 때라면서 정병 4만을 동원해 추격에 나선다. 백기는 지금 여기서 합종군에 피해를 주지 못하면 향후 진나라가 이번에 상실한 관동의 영향력을 제대로 회복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7] 위무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합종군의 퇴로가 길어질수록 백기에게 잡히기 쉽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합종군 내의 위,초,조군에서 5개 정예군을 선발. 5만의 병력으로 민지성으로 회군해 대치한다. 남쪽은 곡수로 막히고 북쪽은 열려있는, 우연히도 신안성에서 위무기가 왕릉과 겨룰 때와 비슷한 상황과 진용이었다.

위나라 2개 군은 좌익과 중군 후방에 위무기가 지휘, 초나라 2개 군은 우익에 경양과 예비대 항연, 조나라 1개 군은 중군에 조괄과 경사가 지휘를 맡았다.

진군은 좌익에 사마경, 중군에 능, 우군에 장당을 배치했으며 백기는 예비대를 거느리고 후방에 위치했다. 진나라는 당장 추격대 4만 말고도 후방에서 10만에 달하는 진나라 본군이 따라오고 있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4.7.1. 방난의 관중 침입

그러나 진나라 본군은 전혀 따라오지 못하고 있었다. 합종군의 퇴각 몇 주 전. 방난은 조괄에게 보존식을 준비해달라고 요청했고 이 보존식 육포를 가지고 태행산맥의 샛길을 통해 관중에 수천 명의 기병을 투입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방난은 발길이 닿는 진나라의 영토를 모조리 파괴하고 불을 질렀고 허를 찔린 진나라 본토 수비병은 그들을 막지 못하고 연달아 격파당했다. 방난의 기병은 겨우 수천 명이었지만 무적의 요새인 함곡관만 믿던 함양의 충격은 지대했다. 소양왕의 조정은 방난이 들어온 샛길도, 쳐들어온 합종군의 수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당연히 진나라 주력군은 본토의 소식에 함곡관에서 나가지도 못하고, 우왕좌왕하며 어중간하게 남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4.8. 야전


백기는 합종군의 기세를 보면서 무언가 수작을 부린 것을 눈치챈다. 백기는 후군을 기대하지 않고서 전력을 다해 합종군과 겨루라고 명한다.

사마경은 민지성을 먼저 차지해 합종군을 상대하려 했으나, 백기는 민지성에 병력을 보내면 역습당할 것을 우려해 이를 중지시킨다. 이 예상은 들어맞아서 조괄이 숨겨둔 경기병들은 성과없이 물러난다.

마침내 합종군과 진군이 맞붙게 되는데 각국 정예들만이 뽑힌지라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치열한 싸움이 전개된다. 그리고 기회를 노린 민지성의 잠복 부대를 이끄는 주해가 기습을 시도했으나, 백기는 이를 예측하고 규를 시켜 궁병 다수를 숨겨둔 상태였다. 주해와 식객들은 규의 부대에 쫓겨 다시 민지성에 갇히고 점차 토벌당하고 만다.

이 작전을 아는 건 합종군에서 신릉군과 조괄 뿐이었다. 신릉군은 피묻은 깃발이 민지성에 걸린 것을 보고 자신을 따라준 식객들이 실패했음을 깨닫는다. 한편 조괄은 그래도 무언가 성과가 있지 않을까 하고 궁금해다가 참지 못하고 열기구를 올려서 민지성을 관찰하고야 실패한 걸 깨닫고 좌절한다.

역시 좌절한 신릉군이지만, 조괄이 열기구를 올리자 차장군이라면 여기서 버틸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위군 예비대를 데리고 우회해 우익으로 이동한다. 조괄은 예비대가 빠진다는 소식에 경악했지만 이를 악물고 버틸 수밖에 없었다.

한편 합종군 우익의 경양은 진군을 기습하기 위해 다시 측면 우회를 시도한다. 합종군 우익(북쪽 방면)은 길이 트여있어서 좌익처럼 좁지 않았다. 그러나 백기는 이를 예측하고 먼저 움직여 매복하고 있었다. 애당초 초군이 우회를 연습한 이유는 백기의 진군을 정면에서 당해내기 어렵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는데 그 당사자인 백기라면 이를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었고 그래서 대비도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백기는 합종군이 열기구라는 일종의 맵핵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열기구를 올려 전장을 관찰하던 조괄이 백기의 전략을 눈치 채고 이를 경양에게 알리기 위해 고민하다가 '조괄격고행연'이라는 문구를 열기구에 써서 띄운 것이다. 조괄이 북을 치고 잔치를 연다라는 문구는 진군에게는 무슨 의미인지 몰랐지만, 경양은 낙양에서 조괄이 자신의 우회를 예상하고 북을 치며 호응했던 일을 상기시켰고, 진군이 자신의 계획을 읽었음을 눈치챈다. 물론 그것을 본 백기도 합종군이 뭔갈 했다는 걸 눈치챘지만 당장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없었고 그저 조괄과 대치하는 능이 무언가 해주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한편 조괄이 무언가 변수를 만들고 있다는 것은 당연히 중군의 능도 간파했고 그래서 자신이 뭔가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측면의 불안 탓에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때마침 전세를 파악한 사마경이 3천의 병력을 중군의 능에게 지원해 측면을 보호해 주면서 능은 총력을 다해 중군의 조나라 병력을 공격할 수 있게 된다. 경사는 강해진 진군의 공세에 밀렸고 이담과 사마상은 사마경이 원군을 보낸지 모르고 이 틈을 치려다가 조괄의 제지로 아슬아슬하게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게 조괄이 중군의 공격을 버티고 있던 동안 경양은 우회 작전을 취소하고 초군의 전력 전부를 가지고 전방의 장당을 들이치게 되고 후방에 예비대로 있던 항연 역시 경양을 따라 진나라 좌익에 맹공을 퍼붓는다.

때마침 진군 좌익을 지휘하던 장당은 이번 전쟁에서 경양에 의해 휘하 장졸만 7만을 넘게 잃은지라 경양에게 큰 원한을 갖고 있었고 그래서 독하게 싸우며 버티지만 후방의 항연까지 가세하자 점차 뒤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조괄은 합종군 우익, 진군 좌익 측에서 결전이 벌어지는 것을 확인하고, 좌익의 위군에게서 지원을 받아 전세를 굳히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생기는데 신릉군의 부관이 조괄의 말을 듣지 않고 버티기만 했기 때문이다. 이 덕분에 진군 우익의 사마경은 3~4천에 이르는 병력을 다른 방면에 보낼 여유를 얻고 있었다.

조괄은 같은 조군이라면 달려가서 두들겨패고 지휘권을 압수했을 거라고 이를 갈았지만, 위나라 사람이라서 그럴 수도 없었다. 그 때 규는 민지성의 주해와 식객들을 거의 궤멸시켰는데 이에 진군 깃발을 배에 꽂아서 곡수로 내려보내서 심리전을 시도하는 한편, 진군 좌익에 합류하러 움직인다. 조괄은 열기구로 이를 보고 위군에게 자신이 진군의 움직임을 읽는다고 알려서 겨우 원군을 받아 전세를 굳힐 수 있었다.

4.9. 승부

백기는 뒤늦게야 초군이 자신을 속이고 정면의 전장에 출격했음을 깨닫는다. 이대로 두면 흥분한 장당이 예비대 없이 초군의 전력 공세에 노출된다는 걸 눈치채고, 다급히 기병과 전차만 끌고 달려가 항연의 측면을 요격한다. 백기는 뛰어난 실력으로 아직 젊은 항연을 압도하지만... 그런 백기의 측면을 다시 신릉군이 기습했다. 백기는 자신이 두고 온 진군 보병 예비대가 올 시간을 벌기 위해 호위 병력까지 보내서 신릉군을 막는다.

전장 우익은 4~5개 군이 뒤섞인 엄청난 난전이었고,[8] 백기가 급히 달려오면서 장군 깃발도 두고 와서 신릉군은 자신이 상대하고 있는 진나라 장수가 백기라는 것은 몰랐지만, 그 실력에 경악하면서 이번 전투에서 완승을 거두기 어렵다고 생각하게 된다. 신릉군은 전투에서 이기지 못한다면 저 지휘관이라도 죽여야겠다는 결론을 내리고는 휘하의 무졸 2천명에게 일거에 쇠뇌 사격을 명령하여 백기를 저격한다. 가슴팍에 화살을 두 발이나 맞고 낙마한 백기는 호위들에 의해 전장에서 구출되었지만 급히 달려온 장당에게 뭐라고 유언도 남기지 못하고 숨을 거둔다.

그 이후로도 신릉군은 자신이 백기를 죽였다는 사실을 몰랐고, 그 상태에서 민지성의 규가 주해의 수급을 들고 오는 바람에 심적인 충격을 입으면서 합종군의 공세는 둔화된다.

그렇게 해가 저물면서 양군은 모두 물러난다. 백기 사후 지휘권을 이어받은 사마경은 자신들만으로는 합종군을 이기기 어려운 현실을 인정하고 퇴각을 결정한다.

한편 겨우 정신을 추스른 신릉군도 더이상 싸워도 손해만 본다고 판단하고 퇴각을 결정한다. 그러나 열기구로 전황을 끝까지 본 조괄은 의견이 달랐다. 진군은 합종군의 공세가 둔화된 전투 후반부에도 역습을 노리기는커녕 후퇴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백기가 죽었기 때문이었지만 조괄은 거기까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진군의 선공은 걱정할 필요 없으며, 관중에서 빠져나올 방난을 구해야 하기 때문에, 그냥 이대로 전투를 끝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신릉군은 조괄의 의견을 인정했고,[9] 타 군은 모두 퇴각시키나 조군 일부와 자신의 위군 일부를 후위에 남겨 진군을 견제한다.

4.10. 역추격


다음날 사마경과 장당은 진군 추격대를 이끌고 퇴각을 시작했다. 둘은 이번 전투를 함양에다 뭐라고 해명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제서야 관중의 타격 소식이 전해진다. 소양왕은 시급히 백기와 정병들의 복귀를 명령하고 있었다.

이에 사마경과 장당도 마음이 급해졌고, 최대한 빠른 속도로 함곡관으로 복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퇴각하는 진군의 후위를 맡은 규가 이번에는 본군과 거리가 멀어지면서 합종군의 위협에 노출된다. 삼천명의 병력으로 퇴로를 지키던 규는 노심초사 하면서 신릉군의 움직임을 관측했다.

한참을 그러다가 마침내 신릉군의 부대도 공격을 포기하고 퇴각하자 안심하고 군을 물려 사마경과 장당을 따라가려 했으나... 800명의 진군이 규를 습격한다. 갑작스런 진나라 부대의 반역에 규는 당황했고, 긴장을 풀고 방심하던 진군도 연달아 쓰러졌다. 진군의 깃발을 든 반역군에게 둘러싸이고서야 규는 그들의 정체를 깨닫는다.

그들은 진군으로 위장한 이담의 조군이었다. 규가 민지성 전투에서 빈 선박에 진군의 깃발을 꽂았는데, 조괄은 그 깃발을 가지고 이담과 조군 중보병들을 위장시켜 규의 부대에 섞이게 둔 것이다.

경사의 중장보병에서 강력한 장창병들을 골라온 데다가, 이담의 실력 역시 대단했기에 결국 규는 조나라 창병들에게 둘러싸여 그대로 전사한다. 규의 부대 3천여명도 회군해서 진격해온 신릉군과 조괄의 기병들에게 각개격파되어 괴멸된다.


함곡관을 향해 강행군하던 사마경과 장당은 선발대의 능에게서 정체불명의 기병대와 맞닥뜨렸다는 보고를 받고 자신들이 합종군 매복 부대에게 앞뒤로 둘러싸였다는 공포에 휩싸인다. 사실 전방의 기병대는 관중에서 막 탈출한 방난의 기병부대였고, 후방의 합종군도 겨우 수천에 불과했다. 그러나 정보가 없는 진군은 움직이지 못했고, 방난의 기병들과 신릉군, 조괄의 2차 추격대는 그대로 합류해서 무사히 퇴각한다.

그렇게 대진 합종군의 마지막 전투가 끝난다.

5. 전후 처리

낙양 공방전부터 시작해 2년 가까이 벌어진 전쟁이 끝났다. 비록 함곡관은 넘지 못했지만, 주나라를 지켜내고 진군만 10만~15만 가까이 전사시킨 합종군은 승리를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낙양으로 복귀한 조괄, 방난, 신릉군은 기다리고 있던 다른 장수들의 극찬을 받는다. 또한 백기가 전사했다는 소문을 듣지만 당장 확인할 방법이 없기에 이에 대한 판단은 뒤로 미루어진다.

질 뻔했던 전장을 역전시킨 조괄의 열기구는 초나라와 다른 나라들도 도입을 계획하게 된다. 조괄은 이틈을 노려서 순자가 연구하던 연국론을 발표해 진나라를 공략할 사상적 기반을 쌓는다.

진나라는 충격에 휩싸인다. 최후의 추격전에서조차 패배한 진나라는 이제 관동의 영토를 회복할 수 있을지도 불확실하며, 설령 회복하더라도 향후 관동육국에 이전같은 위상을 되찾으려면 10여년 이상은 기다려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사마경과 장당 등은 일단 관동 합종군을 물리쳤으며 진의 승리라고 주장하지만 백기가 전사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병사했다는 헛소문을 내야 했다.

이후 진나라는 확장을 연기하고 내부 개발에 주력하고, 관동육국 또한 자국의 이득을 위해 각자도생하면서 합종군은 사실상 해체된다.
[1] 각국 부관급은 제외하고 군사 지휘권자만 기재. [2] 한나라는 이미 패배해 길을 빼앗겼고, 위나라는 10만 대군을 국경 평고 땅에 주둔시켰으나 안리왕은 개입할 생각이 없었다. 조나라는 상당 땅에 염파와 악승을 보냈으나 백기가 직접 견제하는 데다가 효성왕도 안리왕처럼 개입할 용기가 없었다. [3] 당시 조나라는 반진 감정이 격심했는데, 조나라 사람들은 자국인 수천명이 외로이 진군에 싸우는 광경을 1년째 구경만 해야하는 상황에 이를 갈고 있었다. 친진파도 이 때문에 함부로 입도 못 여는 상황이었다. [4] 당연하지만 조괄은 미래인이라 신릉군의 능력을 알고 있었기에 신릉군의 승리를 장담할 수 있었다. [5] 낚여서 좌익측으로 달려간 예비대를 이용해 위나라 우군을 먼저 섬멸하려 했으나 후방과 측면이 다 막힌 진나라 우군과 달리 위나라 우군은 공간이 있어서 버텼다. [6] 사실은 군태후가 꾀를 낸 것이다. 겉으로는 파는 건데 세부 사항을 확인해보면 사실상 무상 원조였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신릉군과 조괄도 거침없이 수결을 해줬던 것. [7] 그렇지 않아도 조괄이 퇴로를 준비하면서 신안성을 파괴하고 민지성에 함정을 파는 등 진나라의 군사시설을 멋대로 파괴하거나 개조해버렸다. [8] 경양+항연+신릉군vs장당+백기+규가 차례대로 난입하면서 우회하고 습격한 부대를 역습격하는 등의 난리가 벌어졌다. [9] 신릉군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진나라 지휘관 하나를 제거했으므로 마지막까지 합종군의 승리라고 주장하고 그냥 퇴각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관중 본토를 타격한 방난이 버려져 죽기라도 하면 승전을 주장하기 애매해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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