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문서: 한국야구위원회/역대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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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야구위원회 역대 총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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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대 서종철 |
제3·4대 이웅희 |
제5대 이상훈 |
제6대 오명 |
제7대 권영해 |
제8대 김기춘 |
제9·10대 홍재형 |
제11대 정대철 |
|
제12-14대 박용오 |
제15·16대 신상우 |
제17·18대 유영구 |
제19-21대 구본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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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대 정운찬 |
제23대 정지택 |
제24·25대 허구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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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KBO 사무총장 | }}}}}}}}} |
'''
''' 韓國野球委員會 總裁 President Of Korea Baseball Organization |
||||
현임 | 허구연 (24·25대) | |||
취임일 | 2022년 3월 25일 | |||
역대 한국야구위원회 총재 | ||||
23대 | ← | 24·25대 | → | 현직 |
정지택 | 허구연 | 재직 중 |
기사나 자료별로 재임 기간 등이 조금씩 다르거나 부정확한 경우가 있어서 오류가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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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대·2대 서종철
초대, 2대 | |
재임기간 (2299일) |
1981년
12월 11일 ~
1985년
4월 1일 1985년 4월 1일 ~ 1988년 3월 27일 |
전형적인 군사정권 낙하산 인사로, 전두환이 컨트롤하기 힘든 자기보다 기수가 높은 선배를 권력에서 배제하는 과정에서 한직으로 내려앉히는 인사였다. 전두환이 컨트롤하기 힘든 거물 인사지만 신군부에 우호적인 인사였기에 권력과 관계없는 그럴듯한 직함을 주어 내려보낸 것. 마침 서총재는 학창시절 야구선수이기도 했고 육군야구단장도 역임했을 정도로 군내에서 알아주는 야구광이었기에 딱 적임인 자리였던 것.
이렇듯 취임 과정 자체는 깨끗하지 않았으나 업적은 상당한데, 프로야구 초기에 적극적인(=반강제적인) 대기업의 참여와 기타 정부 지원 등이 야구광이자 정부에도 강력한 입김을 지닌 서종철 전 총재가 적극적으로 나선 덕분이다. 프로야구 출범 직전 정부에 신청한 야구장 조명탑 설치, 보수 공사 예산이 거부당하자 노태우 전 체육부장관에게 전화 한 통으로 바로 해결한 사례도 있다. 정부도 프로야구의 정착이 정권 유지에 도움이되면 되었지 방해가 되지 않았고 선배의 체면을 차려주는 차원에서 서종철 전 총재의 요구를 거의 무제한으로 들어주어 프로야구는 빠르게 기틀을 잡을 있었다.
요약하자면 정계에 힘이 있는 야구광으로서 한국프로야구의 정착에 큰 역할을 한 인물. 2010년 11월 20일 노환으로 사망했다.
여담으로 야구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샵(S#arp) 멤버 출신 서지영의 할아버지로 기억되기도 한다.
2. 3·4대 이웅희
3대, 4대 | |
재임기간 (1634일) |
1988년
4월 1일 ~
1991년
3월 31일 1991년 4월 1일 ~ 1992년 5월 26일 |
MBC 청룡 매각 문제를 해결하고[3] 전북특별자치도 연고의 쌍방울 레이더스 창단(1991년)으로 8개 구단 시대를 연 총재이기도 하다.
2014년 6월 3일 사망했다.
3. 5대 이상훈
5대 | |
재임기간 (409일) |
1992년 5월 27일 ~ 1993년 7월 9일 |
4. 6대 오명
6대 | |
재임기간 (25일) |
1993년 11월 26일 ~ 1993년 12월 21일 |
새로 출범한 문민정부는 민주화 분위기 속에서 지난 정권과 달리 낙하산 총재를 따로 보내지 않았고 그 덕분에 야구계가 정치권의 간섭없이 삼고초려 끝에 스스로 영입한 인물. 야구에는 완전 문외한이었으나, 조직위원장으로 1993 대전 엑스포를 성공적으로 개최한 행정능력을 보고 데려왔다.
그러나 취임한지 26일 만에 교통부장관으로 영전하여 떠나면서 KBO 총재를 징검다리로 역임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교통부장관 이후에는 동아일보 사장 및 회장, 아주대학교, 건국대학교 총장, 과학기술부장관을 역임했으며 철도기술연구원장으로 기여를 하면서 철도기술연구원 공연장이 아예 오명홀이란 이름으로 그를 기리고 있다.
5. 7대 권영해
7대 | |
재임기간 (277일) |
1994년 3월 21일 ~ 1994년 12월 23일 |
이후 총풍 사건[4] 때 조사 중 자해를 시도했으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고 나중에 북풍 3인방이 북한 인사와 접촉 사실을 알고도 수사 지시를 내리지 않은 혐의[5]로 기소가 되었으나 무죄 판결을 받았다.
6. 8대 김기춘
8대 | |
재임기간 (485일) |
1995년 2월 9일 ~ 1996년 6월 8일 |
법무부장관직에서 물러나고 2년 후인 1994년, 국가안전기획부로 부터 KBO 총재직을 제안 받았고 이를 수락하며 제8대 KBO 총재직에 올랐다. 다만 KBO 정관에는 "구단주들이 협의해 총재를 선정한다."라고 나와 있기에 이런 식의 추대는 정관에 위배되는 행동이었다.
이후 김기춘은 총재직에 오른 후 " 야구 얘기를 하고 사니까 도청당할 일도없어 평안하다." 같은 속 편한 소리나 하면서 임기를 수행하다가, 불과 취임 1년 만인 1996년에 자진 사퇴했다. 당시 기사. 당시 기사2. 낙하산 인사가 싫다고 야구계가 외치는데도 총재로 오더니 다른 이유도 아닌 의정 활동에 전념하겠다고 1년 반 만에 무책임하게 떠나버려서 이임 이후에도 비난을 받았다.
정작 본인은 총재 시절이 가장 재밌었다고 회고했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다른 직책에 비하면 납득이 안 가는 건 아니다. 후일 김기춘은 의정 활동을 하다가 박근혜 정부 첫 대통령비서실장으로 발탁되어 화려하게 청와대에 복귀하였다. 그리고......
한편 KBO 총재시절 연을 맺은 양해영 전 사무총장과도 관계가 있어 논란이 일기도 했다. 김기춘을 보호하라
7. 9·10대 홍재형
9대, 10대 | |
재임기간 (671일) |
1996년
7월 4일 ~
1997년
3월 31일 1997년 4월 1일 ~ 1998년 5월 6일 |
재임기간에 외국인 선수 제도를 처음으로 도입한 총재로, 앞 총재들과 달리 경제통이고 야구를 좋아해서인지 취임 때부터 향후 포부를 막힘없이 설명했다고 알려져 있다.
첫 임기는 잘마쳤지만 두 번째 임기에는 취임 직후인 1998년 5월 6일 자진 사퇴. 이유는 비리와 관련되어 조사를 받게 되자 부정적인 여론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다만 사퇴 이유에 대해서는 홍재형 총재측에서 반박했다. 홍재형 KBO 전 총재 사임과 관련한 반론보도문
이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에 입당, 당선된 뒤 3선 의원과 국회부의장을 역임했고, 진보 성향 낙선 운동 단체가 검찰 수사에 대해 문제를 전혀 제기하지 않은 점을 고려하면 검찰에서 무혐의 내지 기소유예 처분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8. 11대 정대철
11대 | |
재임기간 (100일) |
1998년 5월 27일 ~ 1998년 9월 3일 |
오명 전 총재에 이은 역대 두 번째 단기 총재이다.
9. 총재 대행, 12-14대 박용오
12대, 13대, 14대 | |
재임기간 (2611일) |
1998년
9월 23일 ~
1998년
11월 27일 1998년 12월 8일 ~ 2000년 3월 31일 2000년 4월 1일 ~ 2003년 3월 31일 2003년 4월 1일 ~ 2005년 11월 25일 |
전 두산그룹, 성지그룹 회장. 1998년 11대 정대철 전 총재가 비리 혐의로 구속당하면서 사퇴하자 9월 23일 총재 대행으로 취임을 했으나 2달 만에 총재 대행에서 사퇴하였다.[8] 그 이유는 당시 국민의 정부에서 구단주가 총재가 되는 것은 정관에 위배된다며 압력을 넣었기 때문. 그러나 사퇴한 지 일주일 후인 12월 8일 정식으로 12대 총재로 취임한다. 구단주끼리 돌아가면서 KBO 총재를 하기로 합의하였는데 그 첫 번째 인물.[9]
역대 총재에서 박용오가 가장 낫다고 평가하는 이들이 많았다.[10] 이 시기에 미필 프로야구 선수들의 국군체육부대 입대가 허용되면서 병역비리 비율을 낮췄고, 해체 위기에 몰린 쌍방울 레이더스와 해태 타이거즈의 매각 문제를 잘 처리해 8개 구단 체제를 유지했기 때문.
하지만 재임 3년 차인 2000년 초,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가 결성되자 방송 인터뷰에서 선수협을 비판하면서 "프로야구 따위 없애버린다."고 대놓고 망언을 한 탓에 많은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국내 최초 돔구장 부지가 두산타워 인근인 구 동대문운동장 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주장했다가 축구계의 어그로를 끈 바도 있다.
2005년 11월 25일 일신상의 이유로 총재직을 사퇴한다고 했으나, 실은 두산그룹 경영권 분쟁 과정에서 동생들의 비리를 폭로했다가 역관광당하면서 7월 27일에 출국금지 리스트에 이름이 올라가고 검찰의 수사망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그 뒤 회삿돈 297억 여원의 비자금을 조성하고 29억원을 횡령한 혐의[11] 등으로 불구속 기소,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벌금 80억원을 선고 받았다. 나중에 대법원까지 끌고 갔지만 결과는 1~3심 모두 같았다.
그 후 성지건설을 인수하여 재기를 노렸지만 대침체로 인해 사운을 건 용산 재개발 사업이 베이퍼웨어화되면서 회사가 부도위기에 몰렸고, 설상가상으로 차남 박중원(당시 성지건설 부사장)이 주가 조작 혐의로 구속된 뒤 2009년 7월의 1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자 많은 스트레스를 받다가 2009년 11월 4일 자택에서 자살했다. 향년 72세.
10. 15·16대 신상우
15대, 16대 | |
재임기간 (1072일) |
2006년
1월 10일 ~
2006년
3월 31일 2006년 4월 1일 ~ 2008년 12월 16일 |
정권에 의한 전형적인 낙하산 인사였고 야구계의 의지와 무관하게 선임되었기 때문에 특이하게도 대행이라는 딱지를 3달간 붙이고 활동했고, 석 달 후에야 정식 총재가 되었다.
총재 개인의 정치인들과의 연줄 덕에 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4강 진출후, 쉽게 선수들의 병역 혜택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물론 이 병역 혜택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았다.
하지만 현대 유니콘스 해체와 매각 과정, 그리고 히어로즈의 출범 과정에서의 잡음 및 원활하지 못한 처리로 인해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재임기간 중 현대 유니콘스가 해체되는 와중에 농협, STX, KT 등 몇몇 대기업이 유니콘스의 인수를 시도했지만 KBO가 너무 자기 이익만 고집하다가 결국 모두 파토나고 말았다. 그렇게 KBO가 7개 구단으로 돌아갈 위협에 처하자 급박해진 신상우 총재는 갑자기 나타난 센테니얼 인베스트먼트라는 정체불명의 투자 및 M&A 회사가 나타나자 이전 대기업들에게 제시했던 조건보다 훨씬 완화된 조건을 제시하며 이장석에게 급히 손을 내밀었다.
신상우는 8개 구단 유지를 자신의 업적으로 내세우지만 사실은 농협, STX, KT 등 훨씬 좋은 조건을 내세웠던 대기업들의 제안을 호기롭게 내치다가 결국 센테니얼이라는 개인회사에게 부탁하다시피 현대를 인수시켰고, 이는 향후 KBO에 여러 파행을 불러오게 된 원흉이 되었다.[12]
2008년 12월 15일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기소된 조영주 전 KTF 사장이 "신상우 KBO 총재에게 법인카드를 줬다"고 진술한 내용이 드러나자, 다음날 사퇴 의사를 표명하고 불명예 퇴진했다.
이후 2012년 1월 26일 사망했다.
11. 17·18대 유영구
17대, 18대 | |
재임기간 (798일) |
2009년
2월 24일 ~
2009년
3월 31일 2009년 4월 1일 ~ 2011년 5월 2일 |
유영구는 당시 야구계의 실세 중 한명이었던 이용일의 최측근이었고, 그밖에도 다른 야구인들과 연줄이 많았다. 이용일 본인이 직접 KBO 총재가 어려운 상황에서 유영구를 전폭적으로 밀어줬고, 다수의 야구계 원로 및 실세들이 이용일 또는 유영구와 인맥이 있어 결국 총재가 되었다.
이런 비리 혐의자를 총재로 앉힌 것에 대해 당시 야구계에서는 노무현 정부가 대통령의 측근인 신상우을 낙하산으로 총재로 앉힌 것처럼, 이명박 정부 역시 출범 직후 논공행상의 일환으로 KBO 총재 자리에 친이계 정치인을 낙하산 투하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해 야구인을 선임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변명에 불과하다. 이명박 정부가 친이계를 꽂는다는 소문 자체도 완전히 실체가 없었고, 그저 야구인들이 자신들의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범법 혐의자도 아랑곳하지 않고 총재로 선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김현철씨의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 부소장 부임을 전후해서 대선 당시에 이명박 후보를 도왔던 김영삼 대통령의 최측근 상도동계 박종웅 전 의원이 KBO 총재로 부임한다는 설이 돌았던 것을 보면 낙하산 총재를 막는다는 적당한 명분이 먹힐 수 있었고 원로들이 유영구 이사장을 급하게 앉혀버린 것이다.
낙하산이었던 전임 신상우와 달리 유영구는 야구인들이 직접 선임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신상우처럼 대행 딱지가 붙지도 않았다. 유영구는 17대 총재로써 잔여임기 1달을 채운 후 곧바로 18대 총재로 연임되었다. 하지만 그의 임기 내내 비리 논란이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유영구 본인도 야구계에 잔뼈가 굵은 인물은 아니었기에 사실상 이용일을 비롯한 야구계 원로들이 측근인 그를 총재로 앉혀 사실상 얼굴 마담 역할을 시키고 뒷방에서 그들이 사실상 좌지우지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실제로 유영구는 비리 수사를 받느라 야구판에는 신경 쓸 여력도 별로 없었다. 2010년 10월 21일에는 출금금지 조치를 당했다.
결국 범정 구속되기 하루 전인 2011년 5월 2일, KBO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자신의 후임으로는 그를 총재직에 앉힌 이용일을 선임하도록 미리 내정해 두었다. 다음날인 5월 3일 검찰에 구속되었고, 다음날인 5월 4일 사직서가 수리되었다. #
재임 기간 중 업적으로는 서울대학교에 베이스볼 아카데미[13][14]를 설립한 것이 있다.
12. 직무대행 이용일
18대 직무대행 | |
재임기간 (97일) |
2011년 5월 17일 ~ 2011년 8월 21일 |
인물에 대한 내용은 이용일 및 한국야구위원회/역대 사무총장 문서 참조.
13. 19-21대 구본능
19대, 20대, 21대 | |
이용일 전 총재 직무대행이 신임 구본능 전 총재의 취임식을 축하하고 있다. | |
재임기간 (2321일) |
2011년
8월 22일 ~
2011년
12월 31일 2012년 1월 1일 ~ 2014년 12월 31일 2015년 1월 1일 ~ 2017년 12월 31일 |
기업인 답게 KBO 리그 수익을 대폭 확충하고 KBO 리그 흥행 발전에 큰 기여를 한 총재로 10개 구단 체제[18] 확립과 중계권 500억 시대를 열어 제쳤고 아마추어 야구 발전에도 전폭적인 투자를 통해 야구 발전을 도모하는 등의 업적을 가지고 있다. 또한 억대연봉을 받을수 있었음에도 무급으로 일한 것도 화제가 되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KBO의 버드 셀릭이라는 평가내리기도 했었다.
그렇지만 2016년까지 두 차례의 승부조작이 발생했음에도 제대로 된 대처를 하지 못한 총재란 비판을 받았으며 2017년에 터진 KBO 리그 심판 최규순 금전요구 사건과 KBO-페럼 유착 사태가 불거졌을 때에는 아예 존재감이 사라졌다. 국정감사에서도 비판을 받았으며 결국 임기가 끝나면 연임하지 않고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국감 출석한 구본능 전 KBO 총재 "깨끗이 물러나겠다"
총재직에서 물러나고 오랜 시간이 지나서 친자인 구광모를 대신하여 LG 트윈스 구단주 대행에 올랐다.
14. 22대 정운찬
22대 | |
재임기간 (1096일) |
2018년 1월 1일 ~ 2020년 12월 31일 |
다만 그가 두산 베어스의 오랜 팬임을 예전부터 대놓고 홍보해왔기 때문에(...) 취임 초기 커미셔너로서의 공정성을 지킬 수 있겠느냐는 우려 있었는데 그것이 현실이 되어 자카르타 아시안 게임 최종 엔트리 논란이 불거졌을 때 어떠한 언급도 없이 방관했고 그것이 곧 나비효과로 이어져 첫 경기에서 대만에게 지는 자카르타 참사를 겪게 되었다.
천신만고 끝에 금메달을 취득했지만 대회에서 보여준 결과들이 병역특혜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부추기면서 재검토로 이어지는 악영향을 미치게 만들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이러한 병역특혜의 재검토로 이어지게 만든 발단을 초래했다는 이유로 국정감사로 이어졌는데 당시 손혜원 전 의원이 선동열 전 감독을 불러 무리수를 두는 비난을 쏟아질때 정운찬 전 총재 본인은 선동열 전 감독을 지키기는 커녕 오히려 비난하면서 자신만 보호하기 급급한 모습을 보여줘 여론의 지탄을 받았고 결국 그것이 선동열 감독이 국가대표 감독직을 사퇴하게 된 원인을 제공하게 되었다. 이러한 무책임한 언행으로 인해 일부 언론에서는 총재 사퇴를 거론하고 있다.
15. 23대 정지택
23대 | |
재임기간 (404일) |
2021년 1월 1일 ~ 2022년 2월 8일 |
2022년 2월 8일, 2021 시즌에 벌어진 각종 사건 사고에 책임을 지는 차원에서 총재직에서 사퇴했다.
16. 24·25대 허구연
24대 | |
재임기간 (?일) |
2022년 3월 25일 ~ 현재 |
2022년 2월 8일 정지택 전 총재가 갑작스럽게 사퇴함에 따라 정지택 전 총재의 잔여 임기 2년을 수행하게 되었다. 정치인 혹은 기업인 출신 총재가 아닌 '일하는' 총재가 필요하다는 공감대 속에서 두 번의 이사회 논의 끝에 단일 후보로 추대되었다. 구단주 총회에서 최종 승인이 떨어짐과 동시에 총재직을 수행할 예정이다. 2022년 3월 25일 KBO 총회가 서면 표결을 통해 만장일치로 24대 총재로 선출했다.
2023년 11월 8일, 만장일치로 25대 총재 후보로 추천되었으며 11월 22일 서면 표결을 통해 재선출되어 2026년 12월까지 총재직을 수행한다.
재선출된 직후 TVING과 모바일 중계권 계약을 맺으면서 최초로 KBO 리그의 뉴미디어 중계가 유료화됐는데, 중계 퀄리티가 무료로 보던 시절보다 오히려 더 퇴화하면서 야구팬들의 민심이 급격히 나빠지기도 했다. 다만 중계 퀄리티는 TVING이 즉각 외주업체를 교체하면서 개선됐고, 이번 계약으로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을 비롯한 SNS에 숏폼 영상 업로드 제한이 풀리면서 신규팬 유입도 크게 늘어났기 때문에 시즌초를 제외하면 비판하는 목소리는 잦아든 편.
MLB보다 먼저 도입하여 우려를 낳았던 ABS의 경우에는 선수-심판 간 감정 싸움이 사실상 없어져 경기 지연이 사라지는 효과를 가져왔으며, 경기를 직관하는 야구 팬들은 물론 TV로 시청하는 시청자 입장에서도 스트라이크-볼 판정에 의문을 제기 할 필요가 없어져 많은 호평을 받고 있다. 또한 인기 팀들의 선전에 힘입어 시즌 전반기에만 600만 관중을 돌파하고 프로야구 사상 첫 천만 관중 을 넘어서면서 역대급 흥행을 보이며 여론을 꽤 회복하였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비가 오는 와중에도 경기를 강행했다가 결국 서스펜디드를 하는 역대급 트롤짓을 벌이며 여론이 심하게 악화일로를 걷는 아쉬운 시즌의 마무리 행보를 보였다.
과감한 ABS 도입과 KBO 리그의 역대급 흥행 유치, MLB 서울 시리즈의 성공적인 유치 등 고평가할 부분도 분명히 있지만, 일부 문제에 대한 허술한 대처, 특정 팀에 대한 차별 등 문제점을 보인 총재이다.
[1]
평생 전두환, 노태우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2]
이 때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땡전뉴스의 중단을 건의하여서 일시 중단되었으나 나중에 부활되었다.
[3]
전직
MBC 사장이자
MBC 청룡 2대 구단주 출신이었기에 매각 작업 개입에 용이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실제로
MBC 청룡 문서에도 잘 나와 있지만 MBC의 청룡 구단 운영은 상당히 후진적이었고 1980년대 후반에는 성적마저도 좋지 않아 야구단 운영에 대한 회의감이 커졌다. 결국 1989년 매각 작업이 추진됐고
럭키금성그룹이 청룡 구단을 인수하게 된다.
[4]
1997년 대선 직전 휴전선에서 무력 시위를 해달라고 북측에 요청한 사건.
[5]
국가보안법 위반.
[6]
1994년 재무부와 통합되며
기획재정부가 되었다.
[7]
대전광역시의 건설업체 경성이 대전광역시 지역
민영방송 사업권을 따내기 위해 유력 국회의원들에게 불법 정치자금을 제공한 사건.
[8]
과거에는 총재 대행이 없이 모두 정식 총재였지만 이번에는 총재 대행이었기 때문에 12대 총재가 아니었다.
[9]
다만 다른 재벌들이 부담을 느꼈는지 계속 고사하면서 3번 연임하다가 이후에는 다시 정치인이 왔다.
[10]
구본능 전 총재와 후임인 허구연 총재로 인해 많이 희석되었다.
[11]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횡령.
[12]
그러나 농협은 금산분리 때문에 어차피 프로야구단 직접 운영이 불가능했고 STX는 외형 확대를 계속하다가 무너졌기에 결과론이기는 하지만 이 둘이 빠진 것은 다행이었다. KT야 나중에 프로야구에 들어오게 되고.
[13]
지도자 양성 학교. 영어, 야구심리학, 야구사회학, 스포츠생리학등을 가르치며 시험을 통해 이수를 완료한 인원에게 지도자 라이선스를 지급한다. 축구계의 "축구 지도자 자격증"을 발급해주는 기관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14]
다만 2017년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베이스볼 아카데미 자격증을 인정하지 않으며, 정부 공식 지도자 자격증을 발급 받아야 아마추어 야구지도자가 될수 있다고 공문을 보내며 다시금 논란이 되었다. 기존 30만원 이상 돈을 지불하고 자격증을 딴 사람들이 붕 떠버렸기 때문.
[15]
사무총장 역임 후 쌍방울그룹 부회장과 쌍방울 레이더스 구단주 대행을 맡기는 했다.
[16]
구본무의 장남이 요절한 관계로 구본능의 아들이었던 구광모가 백부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17]
경남중학교 재학 시절까지 야구선수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 구자경이 반대해서 선수 생활을 접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
구본능 전 총재가 재임하던 임기 중에
창원시 연고의
NC 다이노스와
수원시 연고의
kt 위즈가 창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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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연 이외에 일주일이라도 정식 야구선수로서 뛰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서종철 초대 총재와
구본능 전 총재, 총재 대행이었던
이용일 3명이다. 구본능 전 총재는 경남중학교 재학 시절까지 야구선수로 생활했지만 아버지
구자경의 반대로 선수 생활을 중도에 접었다고 전해진다. 프런트 및 구단주 출신은
OB 베어스에서 사장과 구단주를 맡았던
박용오 전 총재와
두산 베어스 구단주 대행을 맡았던
정지택 전 총재 2명 뿐이다. 프로야구 출범 이전까지 올라가면 육군야구단장 출신 초대 서 총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