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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49년 4월 19일에서 9월 6일, 프랑스 지중해 연안의 항구도시 마실리아(현재 마르세유)를 둘러싼 카이사르군과 옵티마테스군의 공방전.2. 배경
기원전 49년 1월,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부재 중 집정관 선거 입후보를 절대로 허락하지 않고 자신에게만 군대 해산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원로원과 대립하다가, 이대로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에 들어갔다간 정적들의 맹공으로 정치생명이 끝장나고 명예가 실추된다고 판단해 내전을 감행했다. 이탈리아 주민들은 갈리아 전쟁의 영웅인 그를 열렬히 환영했고, 병사들은 앞다퉈 그에게 가담했다. 원로원으로부터 카이사르를 대신해 갈리아 전체의 총독으로 임명된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코르피니움 시에서 33개 코호트를 주둔시켜 카이사르와 대적했다.( 코르피니움 공방전) 그는 폼페이우스가 곧 도와줄 거라고 믿고 버티려 했으나, 폼페이우스는 구원 요청에 응하지 않고 "내 지시에 따르지 않고 멋대로 행동하지 마라"며 당장 귀환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의 메시지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포위되었고, 그는 군대를 버리고 달아나려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군대의 반란으로 사로잡혀 카이사르에게 넘겨졌다.카이사르는 아헤노바르부스를 비롯하여 자신에게 귀순한 옵티마테스파 인사들을 군인들의 모욕으로부터 보호해준 뒤 자신과 다시는 싸우지 않겠다고 맹세하게 한 뒤 각자 원하는 데로 가라며 풀어줬다. 물론 병사들 역시 어떠한 해코지도 하지 않고 자신의 군단에 배속시켰다. 그는 코르피니움 원로원으로부터 600만 세스테르티우스를 전달받았으나, 이를 받지 않고 돌려보냈다. 그렇게 해서 전투는 마무리되었고, 카이사르는 7일간 코르피니움에 머물렀다가 폼페이우스가 있는 아풀리아로 진군했다. 카이사르의 승리를 알게 된 폼페이우스는 그때까지 모은 병력을 이끌고 루케니아에서 카누시움으로 갔다가, 다시 이탈리아 끝자락인 브룬디시움으로 이동했다. 카이사르는 그가 이탈리아를 빠져나오지 못하게 해서 내전을 조기에 끝내고자 브룬디시움으로 향했다.
기원전 49년 3월 9일에서 18일까지 벌어진 브룬디시움 공방전 결과, 폼페이우스가 무사히 브룬디시움을 빠져나오면서 내전을 조기에 끝내려던 카이사르의 계획은 실패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키살피나, 피체노움, 메시나 해협 등 전 해안 지역의 함선들을 총동원해 브룬디시움에 집결시키라는 통보를 내렸다. 하지만 그러려면 기나긴 시간이 필요했고, 그는 그 동안 히스파니아의 폼페이우스군을 물리치기로 했다. 기원전 49년 4월 1일 로마에 입성한 뒤 국고를 확보하여 군자금을 마련한 후, 일주일 뒤 히스파니아로 진군했다. 그런데 지중해 연안 도로를 따라 진군하던 중 한 도시가 복종을 거부했으니, 바로 마실리아였다.
마실리아는 기원전 7세기 말 그리스인들이 건설한 항구도시였다. 이 도시는 삼면에 물로 둘러싸여서 수비에 매우 유리한 천혜의 지형을 갖췄다. 시민들은 이러한 이점을 잘 살려 해적과 갈리아족으로부터 도시를 지킬 수 있었다. 또한 론 강 계곡과 가까워서 갈리아 부족들과 원활한 무역을 할 수 있었다. 마실리아인들은 갈리아인들에게 포도주, 올리브 오일, 도자기를 주고, 그들로부터 주석, 곡물, 호박 등을 받았다. 그들은 고대 카르타고를 건설한 페니키아인들과 치열한 상업 경쟁을 벌였고, 로마가 강성해지자 로마와 연합하여 카르타고에 대항했다. 이후 마실리아는 남부 프랑스 지중해 연안에서 로마의 가장 굳건한 동맹시로 남았다.
코르피니움 공방전에서 카이사르에게 패하고 포로가 되었던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석방된 뒤 차후 행보를 고민하다가 마실리아로 가기로 했다. 한편 폼페이우스를 지지하는 마실리아의 젊은 귀족들이 고향에 찾아가서 카이사르에 대항하라고 격려했다. 시민들은 이들의 권고에 따라, 마실리아에 도착한 아헤노바르부스를 수비대 사령관으로 선출하고 카이사르에 대항하기로 했다. 카이사르는 마실리아가 곡식 등 긴 농성에 필요한 수많은 물품들을 비축했고, 요새와 선박을 강화했으며, 갈리아 부족들의 도움을 청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카이사르는 자신이 갈리아 전쟁에서 활약한 덕분에 그들이 갈리아 전역에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었던 걸 상기시키며, 대항하지 말고 복종하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그들은 카이사르가 갈리아 총독으로 재임하는 동안 그와의 관계가 상당히 긍정적이었다는 건 인정했지만, 과거에 폼페이우스로부터 동등한 혜택을 받았으며, 둘 중 하나를 택하지 않고 중립을 지킬 테니 복종을 강요하지 말라고 답했다. 결국 카이사르는 무력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에게 3개 군단을 맡겨 육상에서 공격하게 하고, 데키무스 브루투스에게 해군을 맡겨 해상에서 봉쇄하게 한 뒤, 자신은 히스파니아로 계속 진군했다. 이리하여 마실리아 공방전의 막이 올랐다.
3. 양측의 전력
3.1. 카이사르군
- 육군: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 지휘, 3개 군단 15,000명
- 해군: 데키무스 브루투스 지휘, 초기 12척, 후기 22척
3.2. 마르세유 수비대 + 옵티마테스군
- 마르세유 수비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지휘, 8,000명
- 마르세유 함대: 17척
- 옵티마테스 함대: 루키우스 나시두스 지휘, 17척
4. 경과
기원전 49년 4월 19일부터 마실리아 포위전에 착수한 카이사르군은 육지와 해상에서 봉쇄 작전을 벌였다. 트레보니우스는 참호를 파고 방벽을 세운 뒤, 투석기, 탑, 사다리 등 공성용 무기를 대량으로 제작했다. 한편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12척의 전함을 이끌고 해상을 봉쇄했다. 아헤노바르부스는 17척의 마르세유 함대에 궁수, 갈리아 전사, 이탈리아에서 데려온 로마인 병사들을 태운 뒤 브루투스 함대를 쳐부수러 출진했다.두 함대는 곧 마르세유 앞바다에서 교전했다. 마실리아 함대는 능숙한 항해 실력을 발휘하여 적 함대의 개별 선박 주위를 배회하며 화살비를 퍼부으려 했다. 브루투스는 적이 가까이 접근할 때까지 어떠한 대응도 하지 말라고 지시한 뒤, 적이 충분히 다가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긑에 낫이 달린 밧줄을 던져서 적 선박에 연결한 뒤 병사들에게 적선에 뛰어들라고 명령했다. 이리하여 전투는 육지에서의 근접전과 유사하게 전개되었고, 탁월한 전투력을 갖춘 카이사르군이 상대를 압도했다. 결국 마실리아 함대는 9척의 배가 나포되거나 파괴된 뒤 항구로 달아났다.
하지만 마실리아인들은 투지를 잃지 않고 손상된 배를 수리하고 더 많은 배를 준비했다. 한편 브루투스 역시 기존의 12척에 나포한 6척을 합하여 18척으로 늘어났다. 얼마 후 폼페이우스가 그리스에서 직접 파견한 루키우스 나시두스 휘하의 함선 17척이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이들을 물리치기 위해 봉쇄를 풀고 진격했다. 마실리아 함대 역시 출격했고, 시민들은 신전에 몰려들어 신들에게 승리를 기원했다. 마실리아와 옵티마테스 함대는 도시의 동쪽 해안을 따라가다가 합세했고, 브루투스 함대는 타우로엔토 섬 앞바다에서 이들고 교전했다.( 타우로엔토 해전) 그 결과 브루투스 함대가 대승을 거뒀고, 나시두스는 히스파니아로 철수했다.
한편, 트레보니우스가 지휘하는 육군은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었다. 마실리아인들은 거대한 석궁과 투석기 등을 동원하여 노동자들과 적군을 향해 공격했다. 카이사르 본인의 설명에 따르면, 그들은 12피트 길이의 대형 미사일을 발사했는데, 그 위력은 방벽을 뚫을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카이사르군은 두꺼운 목재로 덮인 통로와 경사로를 지을 때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도록 동일한 재료로 된 큰 이동식 오두막(일명 '거북이)'을 설계했다. 마실리아인은들은 이에 맞서 갈리아 부족민들에게 도시 밖으로 돌진하여 로마군을 괴롭히고 불화살을 쏴서 그들의 작업을 방해하게 했다.
카이사르군은 이에 대응하여 마실리아의 성벽에서 60피트 정도 떨어진 곳에 30피트 정사각형의 벽돌 요새를 5피트 두께의 벽으로 짓기로 했다. 그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요새의 높이를 올렸고, 적의 포격과 방화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는 고정된 공성 탑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이를 발판 삼아 마실리아 성벽 방향으로 통로를 건설했다. 이 통로는 두꺼운 목재로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벽돌, 점토, 동물 가죽 및 젖은 이불로 덮어서 화재로부터 보호했다. 마실리아 수비대는 통로에 큰 돌덩어리와 불타는 짚더미를 떨어뜨렸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고, 공성 탑으로부터 투창과 투석 세레를 받았다. 또한 공병대는 통로 내부에서 마실리아 성벽 아래를 파서 성벽 일부를 무너뜨렸다.
상황이 이처럼 악화되자, 수비대는 곧 항복할 테니 공격을 미뤄달라고 청했다. 트레보니우스는 카이사르가 도시를 무력으로 점령하여 약탈을 벌이는 걸 원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이에 동의했다. 그러나 그날 밤 수비대가 어둠을 틈타 출격하여 탑을 불태워버렸다. 이에 격분한 카이사르군은 공성 무기를 다시 만들기 시작했다. 공성 탑을 다시 만들기에는 목재가 거의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양쪽에 두꺼운 벽돌 벽으로 둘러싸인 경사로를 만들고, 남은 나무를 토핑하고 불을 막기 위해 진흙으로 덮었다. 그들은 이 구조물을 마실리아 성벽 쪽으로 밀어붙였다. 수비대는 적의 끈질긴 공세에 질렸고, 5개월간 포위 공격을 받으면서 전염병과 식량 공급 부족으로 고통받았다.
9월 6일 카이사르가 이베리아 원정을 마치고 마실리아에 도착하자, 마실리아 정부는 더 이상 항전을 벌여봐야 소용없다고 판단하고 항복할 테니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청했다. 카이사르는 이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그들의 모든 무기와 선박과 금고에 있는 모든 돈을 넘기라고 명령했다. 마실리아는 이를 받아들였고, 카이사르는 혹여 또다시 반란이 일어날 가능성을 배제하고자 2개 군단을 도시에 배치했다. 한편, 아헤노바르부스는 급히 배에 올라 타 마침 불어닥친 폭풍우로 데키무스 브루투스의 함대가 육지로 흩어진 틈을 타 탈출하여 폼페이우스와 합류했다. 그 후 이탈리아로 돌아간 카이사르는 발칸 반도에 건너가 폼페이우스와 대결할 준비에 착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