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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파타다칼 기념물군 पत्तदक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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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A5D23><colcolor=#fcd116> 역사 | 무굴 제국/역사 | 수르 제국 |
정치 | 파디샤 | 틀:역대 무굴 황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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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 타지마할 | 비비 까 마끄바라 | |
기타 | 화약제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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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지마할의 전경과 공중 촬영 사진 |
유네스코 세계유산 | ||
이름 | 한국어 | 타지마할 |
영어 | Taj Mahal | |
프랑스어 | Le Taj Mahal | |
국가·위치 | 인도 아그라 | |
등재유형 | 문화유산 | |
등재연도 | 1983년 | |
등재기준 | (i)[1] | |
지정번호 | 252 | |
공식 홈페이지 |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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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타지 마할(Taj Mahal, ताजमहल, تاج محل)[2]은 인도 우타르프라데시주 아그라에 소재한 무굴 제국의 5대 황제 샤 자한과 그의 황후 뭄타즈 마할의 영묘이다.이슬람[3]-힌두 건축 양식이 조화를 이루는 인도 건축미의 우수함을 보여주는 정수로서 인도의 대표적인 랜드마크이며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하다. 건축 책임자는 페르시아 출신의 아흐마드 라호리(Ahmad Lahori, 1580 ~ 1649) 로 알려져 있다. 뭄타즈 마할이 죽은 1631년에 건축을 시작해서 22년의 공사 끝에 1653년 완공했다.
2. 특징
어느 날 흘러내린 눈물은 영원히 마르지 않을 것이며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더 맑고 투명하게 빛나리라.
그것이 타지마할이라네.
오, 황제여! 그대는 타지마할의 아름다움으로
시간에 마술을 걸려 하였다네.
그대는 경이로운 꽃다발을 짜서
우아하지 않은 주검을 죽음을 모르는 우아함으로 덮어버렸다네.
무덤은 자기 속으로 파묻고 뿌리내리어
먼지로부터.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타지마할'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더 맑고 투명하게 빛나리라.
그것이 타지마할이라네.
오, 황제여! 그대는 타지마할의 아름다움으로
시간에 마술을 걸려 하였다네.
그대는 경이로운 꽃다발을 짜서
우아하지 않은 주검을 죽음을 모르는 우아함으로 덮어버렸다네.
무덤은 자기 속으로 파묻고 뿌리내리어
먼지로부터.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타지마할'
물론 단순히 규모라든가 들이부은 예산 측면에서는 다른 건축물도 대단한 것이 많지만 이처럼 완벽한 비율과 좌우대칭으로 보여지는 조형미부터 주변 경관과의 배치에다 빛이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외관과 어우러져 일출과 일몰에 따라 그 자태가 변하는 건축물은 흔치 않다. 무엇보다 오늘날에 보기에도 감탄만 나오는 이런 건축물이 17세기 당시 기술로 22년 만에 완공되었다는 것은 그저 경이로울 따름이다. 더군다나 이 모든 것이 단지 한 황제의 순애보적 집념만으로 그 당대에 착공하여 완성까지 봤다는 점에서 비하인드 에피소드 역시 누누이 회자되는 건물이기도 하다.
특히 다른 거대 유적에서 느껴지는 호화롭고 현란한 웅장함이나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소박하고 정갈한 미관이야말로 이 건물이 진정으로 칭송받는 이유다. 오히려 잡스런 기교보다는 비례를 중시한 담백한 절제미 덕분에 시대를 초월한 절대적인 아름다움으로 회자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게다가 세속인들의 출입을 통제하는 텃세 강한 다른 유적지들과 달리 타지마할은 지금도 전세계에서 방문하는 무수한 방문객들이 발을 들여놓는 열린 공간이다는 특성 덕분에 더욱 대중적이기도 하다.
다만 근사한 겉모습에 비해 안쪽은 그다지 볼 것이 없다고 느낄 수도 있다. 특히 타지마할은 많은 매체를 통해 소개되었기 때문에 실제로 가 봐도 감동보다는 어디서 본 듯한 느낌에 빠질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너무 큰 기대를 하고 가면 되려 실망할 수도 있으니 심사숙고하는 것이 좋다.
3. 방문시간 및 입장료
타지마할 안내도. 야무나 강이 있는 오른쪽이 북쪽이다. |
2023년 기준으로 일출 30분 전에 개장하고 일몰 30분 전에 폐쇄하며 (이슬람 휴일인) 금요일은 휴무이다. 매표소는 동쪽 게이트와 서쪽 게이트에만 있다.
유형 | 입장료 |
외국인 |
₹1,100 (영묘입장료 ₹200 별도) |
SAARC[4] 및 BIMSTEC 회원국[5] |
₹550 (영묘입장료 ₹200 별도) |
내국인, OCI 카드[6] |
₹50 (영묘입장료 ₹200 별도) |
●
온라인 예매시 ₹5(내국인), ₹50(외국인) 할인 ● 만 15세 미만 무료 |
인도에서 외국인 입장료(SAARC 및 BIMSTEC 회원국 제외)가 가장 비싼 곳이다. 인도 정부에선 타지마할이 있는 곳의 라자[7]에게도 따로 돈을 줘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4. 건설 배경
타지마할의 원래 구조. 도입부에 해당하던 타즈 간즈는 현재 시장 속으로 사라졌고 제2 문이 정문 역할을 하고 있다. 타지마할은 영묘 건물 중앙부의 두 석관과 모스크 건물의 미흐랍[8] 및 민바르[9]를 제외하면 완벽한 대칭을 이루고 있다.
4.1. 애처가 황제
타지마할의 건설을 주도한 샤 자한은 17세기 초에 재위한 무굴 제국의 5대 황제로, 당시 제국의 국력은 악바르 대제와 자한기르의 치세를 거치며 가히 절정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선대들에 비해 샤 자한은 정복보다 예술을 애호하는 문화 군주로서의 측면이 강했고 종교적으로도 대단히 관용적이었다. 물론 시크교는 빼고. 자한기르 때부터 틀어지기 시작한 시크교와의 관계는 그가 즉위하고 나서도 개선되지 않았다. 그의 명령으로 지도자가 처형당한 뒤 시크교도들은 군대를 양성해 저항하기 시작했다. 어쨌든 그의 치세 중에 제국은 번영과 안정을 누렸고 반란은 속속 진압되었으며 시민들은 평화를 영위하고 있었다. 적어도 그의 아내가 죽기 전까지는.무지막지한 애처가이기도 했던 샤 자한은 황후 뭄타즈 마할에게 털끝만큼의 오점도 없다고 없다고 했을 정도였다. 그녀는 반란 진압을 위해 샤 자한이 출전하자 따라가 내조하였으며 한번은 전황이 위험해지자 피신시키려는 것을 거부하고 남았을 정도니 이런 소리를 들을 만하다.
하지만 뭄타즈 마할은 일찍 세상을 떠나 버렸다. 직접적인 요인은 산후조리를 잘못한 것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아이를 너무 많이 낳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녀는 무려 14번째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 덕분에 결혼해서 죽기 전까지 임신하고 애 낳느라 침대에서 벗어날 날이 없었다. 남편을 멀리 따라다니며 출산했던 것도 일찍 죽은 요인 중 하나였으리라…
샤 자한은 큰 비통에 잠겼으며 그로 인한 실의를 장엄하기 짝이 없는 묘역을 조성함으로써 해소하고자 했다. 그는 곧장 제국 전역에서 막대한 세금과 인력을 징발해 당시까지 쌓아올려진 인도 건축 예술의 포텐셜을 한데 집중하도록 지시했는데 이것이 바로 타지마할이다.
4.2. 22년의 대역사
초창기에 세워진 정문 (다르와자)
제국의 수도 아그라에 타지마할이 축조되는 22년 동안 페르시아, 이탈리아, 프랑스등에서 기술자와 장인들을 초빙했고 이웃한 미얀마는 물론이고 멀리 중국( 명나라)과 오스만 제국, 이집트, 아라비아에서까지 온갖 건축자재가 수송되었다. 자재를 수송하는 데만 코끼리가 천여마리 넘게 동원되었다.
인건비, 자재비, 물류비 등을 생각하면 제국의 재정 상태가 휘청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더구나 이 건물은 전쟁 방어용 성 같은 실용성은 전혀 없는 그야말로 순수한 예술 건축물이었다. 오늘날이야 관광객이 몰려들어 수입을 내고 있을 뿐 당시로서는 생산성이 전혀 없는 건물을 위해 제국의 국력이 소진되었던 것이다. 당연히 백성들은 이거 짓고 유지비 댄다고 죽어났다. 신하들도 보다못해 반대했지만 샤 자한은 그런 신하들을 힘으로 억눌러 버리고 강행했다.
만약 그가 완공을 보지 못하고 일찍 사망했다면 중도에 적당히 변경해서 작게 지었겠지만 다행이랄지 어떨지 그는 22년의 준공 기간 내내 재위했음은 물론이고 완공된 1653년에서 5년이나 지난 1658년까지 군주직을 유지했고 다시 8년이 지난 1666년까지 살았던 74세의 장수 군주였다. 지금과 달리 저때는 동양이든 서양이든 평균수명이 40대 수준임을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거다.
끝내 아들 아우랑제브[10]가 그를 왕좌에서 끌어내려 아그라 요새 탑에 가두어 버리고 말았다. 사실 타지마할의 무리한 축조 탓에 세금을 각출당한 시민의 불만도 굉장했던 터이니 자업자득적인 측면도 없지는 않았다. 특히 샤 자한은 정사에도 무관심한 암군이 되었던 터라 폐위당했을때 무굴 제국에서는 폐위에 불만을 품은 반란조차 일어나지 않았으며 아우랑제브뿐만 아니라 다른 자식들도 암군이 된 아버지에게 진절머리가 난 터라 굳이 아우랑제브가 아니더라도 다른 자식들에게 폐위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탑의 창문 너머로 보이는 자신의 위대한 건축물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1666년 겨울까지 갇혀 있다가 죽었다. 당시 샤 자한이 아우랑제브에게 보낸 편지가 현재도 남아 있다. 편지 내용은 음식은 짜고 물도 부족하고 춥고 옷도 없다고 하소연한 것으로, 이걸 봐도 아버지를 엄청 박대했음을 알 수 있다. 그나마 큰딸 자하나라 베굼 사히브 공주가 아버지 곁에서 돌봐줘야 겨우 생활할 수 있었다.
아우랑제브는 죽은 아버지의 장례조차 제대로 치러주지 않은 후레자식이었다. 아예 안 치른 것은 아니고 샤 자한이 죽고 나서 큰누나 자하나라 공주가 국장을 성대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아우랑제브가 거부하며 간소하게 치르도록 했다. 그래도 샤 자한의 유해는 뭄타즈 마할과 마찬가지로 타지마할에 공동 안장하였다. 이후 아그라 요새 지하에서 타지마할과 연결되는 통로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최소한의 배려였다는 설이 있다.
원래 샤 자한이 여기 합장될 계획이 아니었기 때문에 타지마할에서 유일하게 좌우대칭이 아닌 곳이 석관이 안치된 곳이라고 한다. 위 사진의 가운데에 있는 것이 뭄타즈 마할의 석관이고 그 왼쪽에 있는 것은 샤 자한의 석관이다. 참고로 둘의 유해는 저 석관 속이 아니라 관대 아래층 지하에 묻혔다. 이는 이슬람 전통에서 시신은 흙 속에 묻혀야 하기 때문으로, 다른 이슬람 무덤들에서도 관 자체는 그저 묻힌 위치를 표시하는 의례용 구조물에 불과하다.
지하실에 있는 샤 자한 부부의 '진짜' 석관
사실 샤 자한은 자신의 묘역으로 기존 타지마할과 대조되는 색채의 검은 타지마할을 따로 축조할 계획도 있었으며 심지어 이게 실각당한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검은 타지마할을 계획했다는 것은 야사에 불과하다. 히스토리 채널에서도 타지마할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제법 진지하게 다루기도 했는데 결과는 검은 타지마할보다는 거대 연못 쪽에 더 무게를 두었다. 검은 타지마할 설에 대해 많은 학자들은 그냥 전설로 치부한다. 1665년에 장 바티스트 타베르니에르(Jean Baptiste Tavernier)라는 유럽 여행가가 아그라를 방문하고서 자신의 소설에 검은 타지마할이라는 것을 꾸며넣은 것이 전설의 시초가 된 듯 하다.
5. 구조
타지마할 일대의 위성사진
타지마할은 대리석의 영묘 자체 외에도 굉장히 넓은 부지 내에 여러 건물들이 있다. 우선 2중의 정원이 있고 영묘 건물 좌우에도 전형적인 무굴 양식으로 세워진 사암 건물이 있다. 좌측은 모스크이고, 우측은 그저 대칭을 위해 만든 건물인 자왑이다. 위의 사진에서 서문 및 모스크 밖에 보이는 구조물은 샤자한 후궁의 영묘들이다. 야무나 강 건너편의 배후지에도 달빛 정원이 있는데, 거기까지 가는 사람은 극히 드문 편이다. 전반적으로도 타지마할은 완벽한 좌우 대칭을 추구하는데 그 오차가 극히 미세하다.
건축 당시 타지마할 단지의 도면
위의 도면에서 보이듯 본래 첫 정원 앞에 타즈 간지라고 하는 바자르 및 카라반사라이 (여관) 건물도 있었다.[11] 타지마할은 모스크도 겸했기 때문에 모스크 앞에 시장이 서는 이슬람 전통을 따른 것이다. 임대료 등 여기서 나는 수익은 유지 관리에 보탰다. 하지만 무굴 제국이 쇠락하며 관리가 되지 않던 와중에 시장이 확장되면서 기존 구조물이 파괴되었고 겉을 두른 벽과 회랑만이 남아있다. 오늘날에는
5.1. 차르바그 (타지 정원)
차르바그 주요부 전경
영묘 건물에서 바라본 차르바그와 다르와자(정문)
차르 바그는 페르시아어 및 우르두어로 '네 개의 정원'이란 뜻이다. 타지마할에는 2곳의 정원이 있다. 다르와자 앞의 1차 정원의 좌우에는 동양의 고루 기능을 하는 나우바트 카나가 있는데 그 중 서쪽의 건물이 박물관으로 개조된 상태이다. 두 정원 모두 4개의 구역으로 구획되어 있는데 보통 차르바그라 하면 더 크고 아름다운 2차 정원을 지칭한다.
차르바그는 이슬람에서 생각하는 천국(4개 정원과 4개의 강)을 묘사한 페르시아 정원의 한 갈래인 무굴 정원의 대표적인 예시다. 정원은 2개의 수로 및 인도(키야반) 및 대리석 연못(알하우드 알카우타르)으로 나뉘어 있고 각 면에 4개씩 16개의 꽃밭이 있다. 연못은 영묘 건물을 투영하도록 배치되었다. 북서쪽 면에는 영묘 완성 전에 뭄타즈 마할이 임시로 매장되었던 곳이 표시되어 있다.
한편 타지 정원은 기존의 무굴 정원들과 달리 그 중앙에 핵심 건축물이 있지 않고 그 뒤에 배치했다. 무굴 제국의 쇠퇴와 함께 제대로 관리되지 않던 정원은 영국 당국의 관리 하에서 런던의 정원들과 비슷하게 식생 구조가 바뀌었다. 정원의 물은 야무나 강에서 지하 수로를 통해 끌어오며 동벽 밑에 저장 탱크에 모인 후 동물의 힘으로 작동하는 도르레 및 수차로 정원 곳곳에 배분된다. 연못에 있는 5개의 분수대는 구리 관으로 만들어졌다.
5.2. 영묘 (핵심 건물)
타지마할 핵심부와 야무나 강의 항공뷰
측면에서 올려다 본 영묘 건물
타자마할의 중심을 이루는 영묘 건물은 거대한 대리석 구조물로, 중심 돔까지 무려 73m의 높이를 자랑한다. 인도-이슬람 건축의 정수로, 티무르 제국 시기 구르 에미르의 양파돔 건물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영묘는 길이 300m, 높이 8.7m의 사암 기단부 위에 조성되었다.
다시 그 위에는 각 면이 95.5m, 높이 6m인 정사각꼴 대리석 기단부가 놓였으며 그 위에 각 면이 57.3m인 영묘가 들어섰다. 정원에서 영묘 기단부로 올라갈 때 필요한 계단은 남쪽 면에만 하나 있는데, 정면이 아닌 측면에 2개가 있어 조선왕릉의 정자각 계단을 연상시킨다.
장식에 있어 타지마할 전반적으로 붉은 사암 사이에는 하얀 대리석을, 흰 대리석 사이에는 짙은색 혹은 검은색 돌을 끼우는 상감 기법을 보인다. 이러한 색깔의 대조는 단조로울 수 있는 대형 건물들을 더욱 두드러지게 한다. 바닥 돌 역시 대치되는 색의 돌 혹은 타일로 꼼꼼히 매워져 있다. 대리석 기단부 주위는 특별히 사암과 대리석을 교차해 팔각형 속에 별이 들어있는 무늬로 장식되었다.
5.2.1. 외부
직경 44m의 거대한 중심 돔과 맨위에 올려진 탐가 (인장) | 화려하게 장식된 미나렛 상단부 |
남쪽 이완 (피슈타크)의 장식. 인도식 잘리 창문과 2중으로 둘러진 쿠란 글귀[12], 페르시아식 당초문이 조화를 이룬다. |
영묘에는 4개 면의 이완 (피슈타크)가 있다. 33m 높이의 아치 형태의 이완에는 양편에 작은 2층 이완이 더해졌고 모서리도 깎아 비슷하게 2층 이완이 조성되었다. 이완의 위에는 굴다스타스라 불리는 장식용 소첨탑이 각 면마다 4개씩 총 16개가 있다. 이완을 중심으로 한 외벽은 다양한 기법의 부조로 장식되어 있다. 다만 인간이나 동물의 묘사를 금하는 이슬람 율법에 따라 주로 빨강 & 청록색의 식물 혹은 기하학적 무늬( 아라베스크) 장식이 주를 이루며 검은 대리석이 두드러지는 쿠란 구절[13]도 새겨져 있다.
이완으로 구성된 건물의 몸체 위에는 23m 높이의 거대한 돔이 올려져 있다. 돔 위에는 다시 9.6m 높이의 마무리 장식이 있는데 바로 무굴 제국을 상징하는 탐가 인장이다. 본래 탐가는 금으로 만들어졌으나 훼손된 후 19세기 초에 동으로 대체되었다. 탐가의 끝에는 하늘을 가리키는 문 형상이 있다.
돔의 하단부에는 매듭형 장식과 아라베스크 문양이 새겨져 있다. 중앙 돔 주변 모서리에는 4개의 작은 돔들이 있는데, 이들은 아치형 기둥들로 지탱된다. 이러한 작은 돔들의 아치 창문은 건물 내부의 채광을 맡는다. 각 돔의 상단에는 인도의 상징인 연꽃 무늬의 원형 장식이 올려졌다.
각 모서리에 있는 미나렛은 40m 높이이고 인도-이슬람 양식의 차트리로 상단이 장식되어 있다. 미나렛의 중간 중간에는 구멍이 뚤린 돌들이 있어 계단을 오르는 사람이 산소 및 채광 부족을 겪지 않게 배려했다. 한편 혹시 모를 지진 등으로 인한 붕괴를 대비하여 미나렛들은 미세하게 영묘의 바깥쪽을 향하도록 설계되었다.
5.2.2. 내부
타지마할 영묘 내부 구조도
내부의 묘당
이완에서 내부로 들어가면 사각형의 방이 있고 각 모서리마다 있는 8각꼴의 방들과 연결되어 있다. 이렇게 띠를 두르는 8개의 방들의 안쪽에 각 면이 7.3m인 팔각꼴의 묘당이 있다. 내부는 2층으로 구성되어 있고, 높이는 이완보다 좀 낮은 25m이다. 그 천장에는 양파형 돔 밑에 조성된 '가짜 돔'이 얹혀 있고, 벽면에는 보석이 박혀 있었다.
1층에는 샤자한 부부의 가짜 석관이 있는데, 진짜 석관은 남쪽면의 계단으로 연결된 지하실에 있다. 시신은 두 석관 모두에 없고, 지하의 흙에 안장되었다. 1층의 석관들은 외부와 격리하기 위한 병풍 창살인 무샵바크로 둘러져 있다. 본래 석관들은 뭄타즈 마할 1주기부터 금으로 덮혀 있었으나 1643년 현재와 같은 대리석으로 교체되었다. 1층 석관들은 특히 더 섬세히 새겨진 식물 무늬와 쿠란 구절로 장식되었다.
지하의 석관들은 장식이 덜하고, 측면에 알라의 99개 이름이 새겨져 있다. 상단의 명문에서 샤자한은 본명 외에 천국 거주자, 즉 피르다우스 아쉬야니로도 지칭되었다. 남북으로 놓인 두 석관 중에 주인공인 뭄타즈 마할의 관이 정 중앙에 위치해 있고 샤 자한의 관은 살짝 서쪽에 치우쳐져 있다. 관과 시신은 이슬람 전통에 따라 머리 쪽이 북으로 하여 남북으로 배치되었고, 얼굴은 서쪽 메카 방면을 향하게 했다고 한다.
5.3. 모스크와 미흐만 카나
타지마할 부속 모스크 혹은 금요 모스크(자마 마스지드)
타지마할의 부속 건물로써 종종 관광객들이 무심코 지나치긴 하지만 모스크 역시 무굴 건축의 걸작 중 하나로 손꼽힌다. 영묘와 비슷한 양파 형태의 흰 돔들과 연꽃 무늬 장식, 벽을 수놓은 쿠란의 아랍어 부조, 피렌체 장인들이 전해줬다고 하는 석조 상감 기법의 문양, 팔각형의 첨탑 등은 사암과 대리석의 조화와 함께 동서양의 건축이 망라된 아름다운 모습을 자아낸다. 내부에는 뭄타즈 마할의 시신이 최종적으로 안장되기 전에 며칠간 안치되었던 작은 방이 있다.
모스크의 건너편에 대칭을 이루기 위해[14] 세워진 미흐만 카나[15] 혹은 나카르 카나는 매년 뭄타즈 마할의 기일에 모인 방문객들의 맞이방으로 쓰였다. 모스크와 구조는 거의 같으나 예배당은 아니기 때문에 미흐랍 및 민바르가 없으며 바닥에도 예배용 카펫이 없다. 모스크와 미흐만 카나 모두 60m x 30m의 규모를 지니고 있다.
6. 여담
금요일 정오 ~ 오후 2시까지 이어지는 주마 예배 |
- 타지마할은 기본적으로 이슬람 건축물이라 그 서쪽 면은 이슬람의 예배 방향인 키블라(메카 방향)를 정확히 따른다. 영묘 자체에도 이슬람 예배 시간을 알리는 미나렛이 있고 실제로 무굴 제국 시기에는 무에진이 첨탑을 올라가 아잔을 낭송하기도 했다. 현재에는 이슬람 휴일인 금요일에만 단지 전체가 휴장하고 무슬림들이 출입해 단체 예배를 드린다. 원래에는 모든 무슬림이 참석할 수 있었으나 무슬림인 척 휴일인데도 들어오는 꼼수 관광객도 있었기 때문에 결국 당국은 아그라 거주 무슬림만 타지마할에서 금요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규칙을 바꿨다. 한편, 평일에도 이맘 지도하는 공식 예배는 없지만 무슬림 방문객들이 예배 시간마다 모스크 건물 앞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 위키백과에 따르면 당시 3,200만 루피가 건축비로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2015년 시세로 환산해 보면 8억 2,700만 달러(한화로 약 9,400억)라고 한다. 괜히 아우랑제브가 자신의 아버지를 축출한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전시대 오스만 제국 출신의 이슬람 건축사의 거장인 미마르 시난의 제자들인 메흐메트 이사 에펜디와 메흐메트 이스마일 에펜디가 설계와 건축에 상당한 관여를 했다.
- 성 바실리 성당과 비슷하게 이 위대한 건축물을 설계한 설계자들도 눈을 뽑혔다는 둥, 인부들의 손목을 잘라버렸다는 둥의 이야기가 돌아다니지만 확실한 이야기가 아닌 ~카더라 식의 이야기이며 황제를 폐위시킨 것에 대한 정당성으로 조작한 기록일 가능성도 있다. 아들인 아우랑제브의 반란을 정당하게 만들고자 성군이 폭군이 되어가서 어쩔 수 없었다던가. 사실 전술했다시피 타지마할 짓느라 제국이 휘청할 정도로 무리했던 걸 생각하면 백성들 입장에서는 이 건축물을 악평해도 할 말이 없다.
- 세계사의 무굴 제국 파트에서는 다른 건 몰라도 세포이 항쟁과 더불어 반드시 짚고 넘어가는 키워드이기도 하다. 물론 사진을 통한 출제 빈도도 매우 높은 편이다. 주로 힌두교 전통 양식+ 이슬람 건축 양식의 절묘한 조화로 소개된다. 현지를 가 보면 사람들이 타지마할을 한 손으로 집어 들어올리는 자세로 사진을 찍는 걸 많이 볼 수 있다.
- 타지마할이 너무나 위대하고 유명하다 보니 암리차르 황금사원, 마하발리푸람과 같은 인도의 다른 유구한 문화유산들이 죄다 묻혀 버려서 타지마할 하나만 각인되는 부작용도 낳고 말았다. 시드 마이어의 문명 시리즈의 불가사의군에도 인도 것은 타지마할을 빼면 뭐가 있었는지 얼핏 생각이 안 날 정도다.[16] 이로 인해 타지마할은 인도 전통 건축물 하면 떠오르는 스테레오타입이 되기도 했다. 무굴 제국을 포함한 인도의 이슬람 정복 왕조들을 흑역사로 여기는 힌두교 근본주의자들에게는 뼈아픈 일이다. 2007년 확정된 신(新) 세계 7대 불가사의에도 이견 없이 안착하였다. 게다가 보존 상태가 나머지 불가사의 중에서 가장 양호한 거의 원형에 가까운 상태라는 점도 중요하다.
- 워낙 큰 건물이다보니 입장료를 내지 않고 밖에서 보는 뷰 포인트도 여럿 있다. 시내에서도 타지마할 보이는 식당이나 숙소가 있고 뒤쪽 야무나강변에 가면 배 타고 타지마할 구경시켜 준다면서 바가지 씌울 준비가 된 뱃사공들이 있다. 다만, 타지마할 구경용이 아니라 야무나강을 배 타고 건너는 건 과거엔 가능했고 훨씬 싸게 배를 탈 수 있는 방법이었는데 강 건너로 배 타고 가는 건 뱃사공들 말로는 2017년경에 금지됐다고 한다.
*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이렇게 되었는데 일본군 폭격기에게 공격 받지 않으려고 대나무 더미인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위장시켜 놓은 것이다. 이 사진은 아직 위장 과정이 끝나기 전에 찍은 사진으로, 실제로는 타지마할 전체를 위장시켰다고 한다. 출처
- 2015년 타지마할 주변의 환경 파괴 등으로 인해 타지마할의 목재 토대가 썩어가고 있어서 길어도 5년 안에 무너질 위험에 처해 있다는 관측이 나왔다. 다만 2015년이 지난 지 약 [age(2015-01-01)]년이 지난 지금도 무너지지 않았다.
- 타지마할의 내부는 갖은 진귀한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었으나 19세기 초엽 무굴 제국의 혼란기에 모조리 약탈당했다.
* 1997년 야니가 인도 독립 50주년을 기념해 타지마할을 배경으로 라이브 콘서트를 열어 흥행에 성공했다. 당시의 실황을 담은 음반은 'Tribute'로, 타지마할 공연 이외에도 자금성 공연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 이때 얻은 수익은 타지마할 보존을 위해 기부하기로 했다.
- 인도에 타지마할이라는 로컬 맥주가 있는데 이름도 타지마할이고 라벨 표지에도 타지마할의 사진이 들어가 있을 정도다. 타지마할이 술을 금하는 이슬람의 장례 건축물인 것을 생각하면 모순적이기도 하다.
- 보이저 호에 실린 골든 레코드에 첨부된 116장의 사진 중 인류의 랜드마크로 만리장성과 함께 수록되었다. 평범한 마을이나 도시의 건물, 풍경도 수록되었지만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유명한 건축물 가운데서 골든 레코드에 수록된 것은 만리장성과 타지마할의 사진뿐이다. 타지마할이 선정된 이유는 세계적으로 아름답기로 유명한 건물인 데다 신에게 바쳐진 건물이 아니라 사랑에 바쳐진 건물이라 종교적인 논란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2007년 레고로 출시되었다.
- 한국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타지마할에 가면 특유의 사진 촬영법도 유명하다. 마치 피사의 사탑을 잡거나 받치고는 세우려고 하는 것처럼 찍듯이 타지마할을 손으로 들고 있듯이 찍는 사진을 많이 찍는다. 이렇게라든지 요렇게 찍는다.
* 미나렛이 좌우에 있는 익숙한 구도 대신 영묘 건물 자체만 찍은 사진을 보면 상당히 허전해 보인다. 근데 사실 엄밀히 보면 이 부분만 진짜 영묘고, 나머지는 부속 시설들일 뿐이다.
- 인도를 대표하는 랜드마크로 유명하지만 타지마할 관련 물품을 인도인에게 선물로 주는 것은 피해야 하는데 기본적으로 무덤이기 때문에 매우 불길하게 여긴다고 한다. 인도 무슬림들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라 보수적인 힌두교도에게 있어 모욕적일 수도 있다.
7. 매체에서의 등장
7.1. 영화
7.1.1. 슬럼독 밀리어네어
주인공 자말은 어렸던 유아기에 이곳에서 관광 가이드인 척 행세를 하면서 관광객들의 돈을 뜯었다. 그런데 자신도 아는 것이 없으니까 마구 말을 지어내는데 예를 들어 "교통사고로 죽은 왕비를 기리기 위해 지어졌다."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그게 다 진짜인 줄 알고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미국인 관광객들이 개그 포인트다. 그 중 어설프게 나마 알고 있던 관광객 하나가 "전 왕비가 아이를 낳다가 죽은 걸로 알고 있는데요?"라고 의문을 제기하자 자말은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그렇습니다. 아이를 낳으러 병원에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했지요."라고 대답한다.7.1.2. 찰리와 초콜릿 공장
타지마할이 직접 등장한 것은 아니지만 영화 초반에 이를 모방해 지은 초콜릿 궁궐이 등장한다. 인도의 한 라자의 의뢰로 윌리 웡카가 건축했는데 웡카가 녹기 쉬우니까 되도록 빨리 먹어치우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건축주인 라자가 여기서 아예 살겠다며 고집을 부렸다가 정말로 궁궐이 몽땅 녹아내리는 꼴을 보게 된다.[17]7.1.3. 픽셀
인도인 커플이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는 순간 알카노이드가 강력한 공을 튀기며 파괴한다. 사실은 원래 만리장성 붕괴 장면으로 계획되었는데 중국 당국의 검열 우려가 될까봐 불가피하게 바꾼 것이다.7.1.4. 화성침공
화성인들이 타지마할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데, 타지마할을 박살내는 순간 찰칵한다.7.2. 만화 및 애니메이션
7.2.1. 톰과 제리
톰과 제리: 수퍼 레이스(Tom and Jerry: The Fast and the Furry, 2005)에서는 톰과 제리가 비행기로 레이스 중에 대리석 돔 부분을 건드리자 갑자기 돔이 팽이마냥 돌더니 건물을 파괴한다.7.2.2. 몬타나존스
만화 5화는 타지마할을 배경으로 나온다.7.2.3. 머메이드 멜로디 피치피치핏치
루치아를 포함한 분홍색 꼬리의 머메이드들이 살고 있는 북태평양 나라가 이 대형묘를 모티브로 하였다.7.3. 게임
7.3.1. 문명 시리즈
문명 4에서 처음 등장해 최신작 문명 7에 이르기까지 줄곧 나왔다.- 문명 4: 위대한 예술가 점수와 많은 문화를 매 턴 제공하며 완공 즉시 황금기에 진입한다.
- 문명 5: 약간의 문화와 행복을 제공하며 완공 즉시 황금기에 진입한다.
- 문명 6: 시대 점수를 2점 이상 받을 때마다 1점씩 추가로 받는다. 본작에서는 시대 점수를 많이 모아야 황금기에 진입할 수 있으므로 여전히 황금기와 관련이 있는 셈.
7.3.2. 라이즈 오브 네이션즈
산업 시대의 불가사의로 등장한다. 효과는 모든 건물의 체력이 2배로 증가하는 것과 재화 채취 속도가 2배로 빨라지는 것, 재화 상업 한계치가 크게 증가하는 것.7.3.3. 팡(게임)
16~18 스테이지의 배경이 타지마할이다.7.3.4. 도미네이션즈
화약 시대의 불가사의로 등장한다.자세한 내용은 불가사의/타지마할 문서 참고하십시오.
7.4. 기타
- MBC every1의 예능 '위대한 가이드' 2024년 6월 17일 방송분에서도 나왔다. 여기서 아비셰크 굽타가 가이드 역할을 맡았는데 들어서자마자 비는 물론 천둥번개까지 치면서 여행하는 데 최악의 조건이 만들어진다. 여행 가이드를 맡았던 시절을 포함해 400여회나 방문해 봤는데도 4월에 비가 오는 타지마할을 보는건 사상 처음이었다고 한다.[18] 하지만 멤버들은 오히려 시원해서 좋다며 당황하는 기색 없이 그대로 여행을 즐겼다.[19]
8. 관련문서
[1]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
[2]
타지는 아랍어, 페르시아어, 우르두어로 '왕관'을 뜻한다. 마할은 페르시아어, 우르두어로 궁전을 뜻한다. (아랍어로 가게를 뜻하는 마할과 연관)
[3]
주로 페르시아 계통
[4]
남아시아 지역 협력 연합
[5]
방글라데시, 부탄, 인도, 미얀마, 네팔, 스리랑카, 태국 시민
[6]
인도 재외국민카드다.
[7]
힌두어로 영주를 뜻한다. 과거 여러 작은 국가들의 왕손들에게 영주권을 주는 조건으로 인도에서 독립운동을 벌이지 않기로 합의하면서 문화재나 유물에 대한 관광 수익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것도 극과 극이라서 어느 영주는 그야말로 엄청난 부자인 반면 말이 영주이지 큼직한 성에서 영주가 직접 서빙을 하고(...) 종업원 고용할 여력이 없어서 혼자서 관리하는 이도 있다.
[8]
이슬람 방향인 키블라를 알리는 벽감
[9]
모스크의 설교단
[10]
참고로 그는 샤 자한과 뭄타즈 마할 소생의 셋째 아들이었다. 정실 황후이자 자기 친모를 위해 타지마할을 짓는 것임에도 너무 비용이 많이 들고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한다며 이를 반대했다.
[11]
4개 구역 중 위의 2개는 예비 영묘 및 손님 맞이방이었다고도 한다.
[12]
여기에 원근법이 적용되어 바깥의 글씨가 더 크다.
[13]
대략 신에게 돌아간다는 뜻이다. 글씨는 아마나트 칸 시라지의 작품
[14]
이러한 대칭 건물을 자왑이라고 부른다.
[15]
카나 혹은 하네는 튀르키예어, 페르시아어, 우르두어로 집이란 뜻이다.
[16]
타지마할은 4편부터 6편까지 잇달아 나왔다. 다만 "인도 건 타지마할 빼면 없더라" 라는 건 사실이 아닌데 4편에 카시 비슈와나트(Kashi Vishwanath) 사원, 문명 5에 붉은 요새, 6에 마하보디 사원과 미낙시 사원 등이 나왔기 때문이다. 파키스탄까지 합하면
모헨조다로도 있다.
[17]
실제로
인도는
히말라야산맥 인근 지역을 제외하면 전 지역이
열대기후로 들어가므로 야외에 놔둔
초콜릿이 멀쩡히 남아날 리가 없다.
[18]
아그라의 강수량은 인도 전 지역을 통틀어서 2위 수준으로 적으며 4월 강수량은 거의 가뭄 수준이라고 한다.
[19]
사실 비가 오지 않는 4월에 비를 맞으며 타지마할을 구경하는 건 매우 진귀한 구경에 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