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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복원 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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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漕運船고려, 조선 시대에 각 지방의 세 곡을 수도로 옮기는 데 사용했던 배.
2. 역사
2.1. 조선 이전
한국에서 최초로 조운업을 시작한 것이 문헌으로 상세하게 남은 것은 고려시대다. 다만, 신라시대 때 선부(舩府)라는 관청을 만들고 조운 관련 업무(舟楫)를 맡겼다고 기록돼 있으므로 고려 이전에도 조운선을 이용했음은 분명하다. 수도 서라벌의 지리적 위치상 낙동강 내륙수로 및 울산항까지 해로로 물자를 모아서 경주로 운송했을 가능성이 높다.[1] 특히 울산항은 1500년 전과 지금이 많이 다르다. 현재 울산 남구일대가 모두 모래톱으로 이루어진 바다였고 울산 중구의 토성도 신라시대의 토성이니 울산항이 발굴된다면 획기적인 발견이 될것이다. 일본 쪽 기록인 일본후기에는 신라 각 지방의 현에서 사람을 뽑아 지방의 곡식을 남해안을 따라 운반하는 배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고려의 조운업은 중국보다는 늦지만 중국의 조운업은 강과 내륙수로를 사용했으며, 해양을 통한 조운업은 한국이 빠르다.
중국 명나라의 조운선으로 우리나라 것과 달리 뱃전이 낮은 내륙선이다.
고려시대 조운선은 초마선(哨馬船)이라고 불렸다. 이때부터 한 척당 무려 1,000석(섬)의 곡식을 적재할 수 있었다. 한 섬은 현대 용량단위로는 180 리터, 재래식 무게단위로는 곡식마다 다른데 벼는 200kg, 쌀은 144kg, 보리쌀은 138kg로 당시 조선기술 수준에 1,000석이면 상당한 양의 곡식을 수송할 수 있는 것이다. 도량형의 단위는 시대에 따라 다른데, 고려시대 1석(섬)의 부피는 약 51L, 조선시대로 오면 약 114.5L쯤 된다. 고려시대 초마선은 1000석을 싷었을때 대략 52.9톤쯤 된다.
이 정도 수준의 배는 비슷한 시기 주변국에서도 찾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훨씬 후대인 에도막부 말기 일본의 벤자이센이나 니부네중에 1,500~2,000석을 수송하는 수준의 대형선인 능원회선(菱垣廻船)이 있긴 했으나 수지타산을 맞추려면 다량의 화물을 가득 채워 한번에 날라야 했다. 자연히 운송주기가 오래걸려 신속하게 수요를 맞추기 힘들고 신선도가 중요한 음식류의 경우 지나치게 오랜 수송기간이 악재로 작용했기에, 결국 대형 벤자이센인 능원회선(菱垣廻船)은 그보다 소형인 준회선(樽廻船)에 밀려났다. 처음에는 보조용이던 준회선이 빠르게 수요를 충족시키는 게 가능하다는 점을 상인들이 높이 사면서 주력 상선으로 삼기 시작한 것.
음식류 중에서도 특히 술. 에도시대 술 소비량이 폭증하면서 재때 신선한 술을 빠르게 공급해야 했는데, 수지타산을 위해 운송기간이 긴 능원회선은 술의 신선도와 수요를 맞추지 못해 개발된 게 준회선이었다. 그나마 초마선과 가장 비슷한 시기의 배로는 중국 명나라 때의 내륙수로용 조운선 중에 2,000석을 수송하는 게 있긴 했으나, 여기서 2,000석은 중국과 한국의 석 단위의 차이로 인해 문헌만 봤을 때 중국 쪽이 커 보이는 것일 뿐 실제 수송량이나 배의 규모는 거의 차이가 없었다.
이 조운제도는 고려 시대 동안 계속 유지되었다. 도읍인 개경 자체가 서해안에 가까웠기에 고려 조정은 조운제도를 적극적으로 시행하려는 의지가 있었다. 고려 조운선이 드나들었던 13조창의 그 위치는 다음과 같다.
충주 덕흥창(忠州 德興倉) 충주 주변 지역
원주 흥원창(原州 興元倉) 원주 주변 지역
아주 하양창(편섭포) (牙州 河陽倉(便涉浦)) 공주, 천안 주변 지역
부성 영풍창(富城 永豊倉) 서산 주변 지역
영광 부용창(부용포)(靈光 芙蓉倉(芙蓉浦)) 영광 주변 지역
승주 해룡창(조양포)(昇州 海龍倉(潮陽浦)) 순천, 보성 주변 지역
사주 통양창(통조포)(泗州 通陽倉(通朝浦)) 진주 주변 지역
합포 석두창(나포)(合浦 石頭倉(螺浦)) 김해, 양산 주변 지역
임피 진성창(조종포)(臨陂 鎭城倉(朝宗浦)) 전주, 금산 주변 지역
보안 안흥창(제안포)(保安 安興倉(濟安浦)) 부안 주변 지역
나주 해릉창(통진포)(羅州 海陵倉(通津浦)) 나주 주변 지역
영암 장흥창(조동포)(靈巖 長興倉(潮東浦)) 영암, 장흥 주변 지역
장연 안란창(長淵 安瀾倉) 현 북한 과일군, 옹진 주변 지역
원주 흥원창(原州 興元倉) 원주 주변 지역
아주 하양창(편섭포) (牙州 河陽倉(便涉浦)) 공주, 천안 주변 지역
부성 영풍창(富城 永豊倉) 서산 주변 지역
영광 부용창(부용포)(靈光 芙蓉倉(芙蓉浦)) 영광 주변 지역
승주 해룡창(조양포)(昇州 海龍倉(潮陽浦)) 순천, 보성 주변 지역
사주 통양창(통조포)(泗州 通陽倉(通朝浦)) 진주 주변 지역
합포 석두창(나포)(合浦 石頭倉(螺浦)) 김해, 양산 주변 지역
임피 진성창(조종포)(臨陂 鎭城倉(朝宗浦)) 전주, 금산 주변 지역
보안 안흥창(제안포)(保安 安興倉(濟安浦)) 부안 주변 지역
나주 해릉창(통진포)(羅州 海陵倉(通津浦)) 나주 주변 지역
영암 장흥창(조동포)(靈巖 長興倉(潮東浦)) 영암, 장흥 주변 지역
장연 안란창(長淵 安瀾倉) 현 북한 과일군, 옹진 주변 지역
위치를 보면 남해안 일대에 13개 중 3개가 설치되어 있는 것으로 나와 당시부터 장거리 조운을 시행했다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충청, 전라 지역 조창 설치 비율이 높은 것도 특징이다. 대체로 만의 깊숙한 안쪽 포구에 위치하였으며, 측면에는 지천이 흐르고 배후에는 야트막한 구릉이 놓여 있었는데, 조창 보호를 위해서였다. 따라서 이 구릉엔 방어용 성곽을 축조하기도 했다.
이러한 고려의 조운선과 조운 제도는 고려 후기에 망가지게 되는데 왜구의 침략 때문이었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은 그 규모 자체가 상상초월이었기 때문에 남해, 서해 연안 전체에 큰 피해를 입혔고 우왕 대에는 조운선 운영 자체가 중단된다. 이 시기 세곡 운송은 육로를 통하게 되었다.
2.2. 조선 시대
각선도본에 실린 조선시대 삽화.
배를 통한 조운제도는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여말선초 왜구의 침략 상황은 역으로 조운제도 개선과 발전을 위한 다양한 아이디어로 이어진다. 이 시기에는 조창 방어용 성곽인 조전성이 발전한다. 또 고려시대 선체는 선체 중앙에 1개의 돛을 설치한 구조였으나, 태안군에서 발굴된 조선 초기 조운선의 구조를 보면 조선 초 조운선은 앞쪽과 중앙에 각각 돛을 설치하는 형태로 바뀌고 쇠못을 사용하는 등 내구도가 올라갔다.
조선 초에는 국가에서 조운선을 만들고 관리했다. 조운에 동원된 조졸의 정원만 5960명이었다. 각 조창에서는 수확기부터 겨울까지 세곡을 거둬들여 보관하고, 조운선은 대체로 2월부터 5월 사이 날씨가 순한 날을 골라 항해를 시작했다.[2]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꼭 5월, 6월, 7월에는 조운선이 수십 척씩 바다에 침몰했다는 소식이 조정에 자주 올라온다. 특히 경상도로 가는 길이 험하여 경상도에 가는 배는 자주 침몰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멀리까지 조운선을 타야하는 조군들은 목숨이 아까워 기회를 보다 도망가는 일도 종종 발생했다. 하필 이때 태풍이 오는 일도 많았으니 파선도 흔했다.
그런데 이 조운선은 제작비도 높지만 유지비도 많이 들었다. 만든지 3년이 지나면 배를 결합하는 목전이나 노, 키 등의 삭은 부분을 다 보수해주어야 했고, 또 3년이 지나면 재보수 및 부품 교체, 총 9년이 지나면 아예 배 자체를 개조해야 했다. 이 과정에 목재가 어마어마하게 든다고 신하들부터 국왕까지 모두 한탄할 지경이었다.
이런 문제가 심화된 이유 중에는 조선에서 배 만들던 장공인들의 처우 문제도 있었을 것이란 추측도 있다. 배를 만드는 장공인 뿐 아니라 조선의 모든 장공인은 공역으로 일년 중 3분의 1을 출역했는데 이 제도가 조선의 민간 기술자들의 기술을 쇠퇴시키거나 그 인구 자체를 대폭 축소시켰기 때문이다. 배를 만드는 것은 상당한 기술력이 필요한 고급 작업이었지만 이 일에 동원된 장공인들은 임금을 아예 받지 못하거나 콩 한 줌 정도를 받았고, 처우도 나빴다. 실정이 이렇다 보니 관원들과의 갈등도 심했다. 그 결과 조선 중기에 가면 민간의 배가 관선보다 튼튼해지는 상황이 온다.[3]
조선 후기에 가면 도고 상업이 발달하고 민간자본 및 무역업이 발달하면서 국가가 직접 모든 배를 만들고 관리하는 대신 민간에 상당수를 위탁하게 된다. 조선 중후기 상업의 발달, 경강상인의 등장 등으로 민간 선박의 성능이 크게 향샹되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국가 소유의 배는 그 수가 줄어들어서 국가는 병선과 조운선을 서로 통용해서 쓰게 되는 등, 점점 조운선을 생산하고 운영하는 기능을 잃어간다. 조운에 동원되는 인원도 기존에는 나라에서 조졸[4]을 동원하던 것이 숙종 30년을 기점으로 나라에서 임노동자를 고용하는 형태로 바뀌게 된다.
조선 후기로 가며 대동법이 생겨 모든 공물을 쌀로 받게 되면서 수송량은 더욱 늘게 되는데 여기 전용할 조운선 및 군선 부족 문제가 가속화되면서 관영 조운제의 쇠퇴는 되돌릴 수 없는 흐름이 되고 말았다. 많은 사람들이 사선임운은 해악이라며, 어떻게든 국가 주도의 조운제 및 조운선 건조 복구를 주장했지만, 미곡의 선운량을 충당하기 위해서는 민간 동원을 뺄 수가 없었다.
조운에 참여한 경강상인들은 초기엔 퇴병선을 사들여 쓸만하게 다시 개조하여 참여했고 나중엔 도고 행위로 모은 부를 통해 목재를 구입해 직접 선박을 건조하기도 했다. 경강상인들은 이 과정에 세곡을 빼돌려 큰 부를 축적하게 된다. 참고로 조선시대의 해난사고 중 상당수는 탈세 및 횡령이었는데, 텅 빈 폐급 조운선을 몰고 나가서 침몰시킨 다음 "침몰해서 쌀 없어졌음" 하는 레퍼토리였다. 더구나 상인들이 조운을 맡았으니 운반곡을 착복하는 '투식', 선박을 침몰시키는 '고패'등의 부정행위는 점점 더 자주 행해져 조세 수입이 감소되는 결과로 이어진다.
물론 조선 후기에도 어떻게든 관영 조운업의 비중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은 이어졌다. 그러나 조운선을 더 만드는 것은 한계가 있었기에, 주로 병선을 조운선으로 쓰기 위한 방책을 논의하였다. 예를 들어 병선을 건조할 때 본판에 나무를 더 붙여서 넓이를 증가시키는 식으로 하여 전쟁 시와 조운 시에 모두 쓰기 편하게 하자든지, 2백 석밖에 싣지 못하는 기존의 병선을 길이를 7파에서 8파로, 넓이를 1파 반에서 3파로, 높이를 1파 반에서 2파로 고쳐 5백 석 적재가 가능하게 개선하자는 식이었다. 다만 이러한 논의는 실제 행해지는 데까진 이르지 않았으므로 관영 조운업은 점차 쇠퇴하게 된다.
그러나 근대에 서구의 운송 시스템과 조세제도가 도입되어 정착하기 전까지 조운선과 조운 제도는 조선의 국가경제를 책임지는 핵심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그외에도 조운선은 배가 둔중하고 튼튼해 아래 소개할 군용선인 맹선으로도 쓰였고, 국왕의 행차시 배다리를 만드는 데에도 쓰였다.
이 조운선은 북부지방에서 사용하는 것과 중남부 지역에서 쓰는 것이 조금 달랐는데, 북부 지역에서 쓰는 것은 북조선(北漕船)이라고 불렀다. 북조선은 일반 조운선보다 뱃전이 조금 낮은 대신 배가 더 넓어 보통 조운선이 800~1,000석을 수송하는 데 반해 1,000~1,200석의 곡식을 나를 수 있었으며, 북조선은 서울이 아닌 함흥 별궁에 북부지역의 세곡을 모아놓고 북방지역의 재정에 사용했다. 조선시대 북부지방은 세곡을 서울로 가져오지 않고 그 지역에서 사용하는 지역이었는데, 그 북부의 세곡을 관리하는 별궁으로 수송하는 것이 북조선이었다.
화륜선처럼 수차로 움직이는 윤선 조운선을 조선시대에 만들었다는 기록이 실록에 남아있다. 그러나 중국이나 유럽에서도 증기기관 등장 이전에는 기술적 문제로 항해용으로는 잘 쓰이지 않았던지라 해로를 사용하는 조운선의 특성상 얼마나 쓰였을지는 의문이다.
개항 이후인 1880년대부터는 서양식 기선들이 속속 도입되었다. 이때부터 외국계 해운업체는 물론이고 조선/대한제국 정부, 조선의 상인들 역시 기선으로 물품을 운송하면서, 전통적 조운선의 시대는 끝을 맞이한다.
3. 맹선
맹선(猛船)은 조운선 중 800석 이하급의 쌀을 수송할 수 있는 조운선을 군용으로 사용할 때의 이름이다. 승선 인원에 따라 대맹선·중맹선·소맹선으로 나뉘는데, 대맹선은 수군 80명, 중맹선은 60명, 소맹선은 30명 정원이다. 세종 시대 병조선(兵漕船)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도입되었으나, 아직 관련 제도가 정비되지 않아 이때의 병조선은 지방마다 그 수준이 들쭉날쭉하고 대충 만들어 성능도 떨어졌다. 때문에 조선 조정에서는 한때 중국선이나 일본선, 유구국의 동자갑선 등 외국 선박을 사들이고 기술자를 초청하여 외국의 선박을 도입하려는 시도를 했으나, 다음과 같은 이유로 중단된다.- 중국선(당선)은 한국 지형에 맞지 않는다.
- 일본 배는 빠르기는 하나 방수가 떨어지고 선체가 약하다.
- 유구국의 동자갑선은 군선으로 쓰기 불편하다. 특히 유구국이나 중국의 배는 갑선(甲船)인데, 갑선은 선체를 이중으로 만들기에 그 제조과정이 복잡하고 충격을 받으면 쉽게 떨어져 부서지며, 나무를 많이 소비한다.(여기서 갑선의 이중선체 구조는 배의 내구력을 직접적으로 향상시키기 위해 선체를 두껍게 덧붙이는 게 아니라, 따개비나 바다벌레(목선천공충)를 막기 위해 선체 겉에 조금 얇은 나무를 덧붙이는 것이다.)
- 기존의 한선은 단선이라 튼튼하고, 한선도 좋은 목재로 만들어 석회로 방수하고[5] 바다벌레를 막기 위해 겉을 그슬려 탄화층을 만들며,[6] 정기적으로 개삭(묵은 부품을 갈아끼우는 것. 완전조립식인 한선의 특징이기도 하다.)을 해 주면 얼마든지 오래 쓸 수 있다.
위 내용을 주장한 것은 세조 시기 외국을 직접 다니며 각국의 선박들을 면밀하게 비교 검토한 신숙주다. 이후 외국식 선박의 도입 대신 기존의 조운선을 유사시 상장(상부 구조물)을 설치해 싸움배인 맹선으로 쓰도록 하는 제도가 완전히 정착한다.
그러나 맹선은 본래 곡식 수송선인 조운선을 개조해 만들었기에 선체가 속도를 내기에는 부적합하여 왜선들을 추적하기는 힘들어 소형선들과 협동 작전을 펼쳐야 했다. 더욱이 시간이 지나면서 왜구들이 맹선보다 더 크고 누각을 설치한 대형선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싸움배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7] 명종 때 판옥선이 새롭게 등장하였고, 조운선은 다시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판옥선 역시 속도전보다는 내구력과 화력에 투자한 배라서 속도가 느렸기에, 여전히 소형선들과의 합동 작전을 필요로 하였다.
이후 명종조에 들어 판옥선과 방패선이 등장하면서부터는 더 이상 군용으로 쓰이지 않게 되었다.
여담으로 조선 전기에 시암, 자바 등에서 방문한 사신들[8]이 왜구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를 요청하자 귀국길에 조선의 병선들이 일정거리를 호위한 적이 있어 원해까지 제한적이지만 이동이 가능했다는것을 알 수 있다.
4. 대중매체의 등장
대항해시대 온라인에서 등장. 남만무역 추가 후 등장한 배로, 같은 시기 추가된 한국 배인 거북선과는 달리 상거래용에 좋은 배다.게임상에 등장하는 모습. @
모바일 게임인 베네치아스토리에도 등장한다. #
종영 드라마인 공주의 남자에도 등장. 11,12화에 등장하며, 죄인들을 태우고 강화도로 가던 중 수양대군의 음모로 2척 중 죄인들을 태운 한 척이 침몰한다. 간신히 무인도에 죄인들이 상륙하자 떠나가지 않고 주변에서 감시하는데, 이때 추적을 피하던 죄인들이 모여 얘기하던 중 수양대군의 부하들이 탄 배를 '맹선'이라 부르는 장면이 나온다.
5. 관련 문서
[1]
경주 근처의 울산항은
통일신라대에 멀리
중동의 물품까지 모이는 국제항이었으며, 경주의 시대별 신규 사찰 창건 추세와 도시 확장 방향 연구에 따르면 통일신라기에 울산항으로 이어지는 경주 동남방향이 크게 발전한 것이 울산항의 중요성과 관련이 크다고 추정되고 있다.
[2]
날씨에 따라 6월에 출발하는 경우도 있었다.
[3]
<
표해록> 중 민간의 좋은 배가 나라의 배보다 좋다고 언급된다.
[4]
조운업을 전담한 선원들로 세습직으로 조운업 외에 다른 일에 동원되지는 않았으나, 신분은 양인이면서 천시되던 신량역천중 하나였다.
[5]
기록에는 유회로 나온다. 기름에 반죽한 석회를 말한다.
[6]
이를 연훈법이라고 한다. 이 방법을 쓰면 탄화층이 생겨 바다생물들이 붙지 못하고, 이미 붙은 경우 열로 죽이는 효과가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탄화층이 사라져 가면 주기적으로 다시 해주어야 하지만, 이는 과거의 갑선이나 현대의 배도 마찬가지다. 갑선의 경우 겉에 붙인 목재에 바다생물이 잔뜩 붙으면 당연히 수리해줘야 하고, 현대 배도 주기가 길 뿐 주기적으로 손봐줘야 한다.
[7]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중국 해적들이 일본 왜구들과 협업했기 때문.
[8]
이 중 한 명이 바로 화교 상인
진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