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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전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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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전 391년[1] ~ 서기전 221년
위치 중국 산둥
수도 임치
국성 규성(嬀姓) 전씨(田氏)[2]
국가원수 후작[3]
주요 군주 태공 전화, 위왕 전인제
주요 재상 맹상군
언어 상고 중국어
문자 금문 전서 (대전체)
종교 중국 토속 종교[4]
종족 화하족
통화 도폐
성립 전 강제
멸망 후 진나라
현재 국가 중국

1. 개요2. 역사
2.1. 전국시대 제나라(전제)2.2. 초한쟁패기 시기의 제나라(후제)
3. 기타4. 역대 군주
4.1. 전씨 종주( 춘추시대)4.2. 전제의 역대 군주
5. 같이보기

[clearfix]

1. 개요

중국 전국시대 제후국. 지금의 산둥 반도 일대를 중심으로 존재했던 전국칠웅 중 하나다. 왕성은 규(媯)성 전(田)씨였다.

춘추전국시대 제나라 전국시대 제나라 '전국제(戰國齊)' , 혹은 왕조의 성을 붙여 흔히 '전제(田齊)' 라 칭하여 춘추시대 '강제(姜齊)'와 구분한다. 작위이었다.

수도는 임치, 현재의 산동성 쯔보 시이다.

제민왕 충신 왕촉 화우지계로 유명한 구국 영웅 전단이 바로 이 전제 말기의 인물들이었다.

2. 역사

2.1. 전국시대 제나라(전제)

진나라 공족 출신의 전씨는 시조 전완 이래 강제에서 득세하여, 대대로 재상을 세습하고 강제의 실권을 장악했다. 결국 역성혁명으로 강제를 멸망시킨 후 전제를 창건했다.

총력전이 펼쳐지는 전국시대로 넘어오면서 태공 전화의 손자인 위왕때는 을 칭했다. 그의 아들인 선왕때는 손빈 등을 등용하여 점점 강성해졌고 민왕때는 전국칠웅 중 서쪽의 진(秦)나라 다음가는 강대국이 되었다. 민왕은 한때 왕보다 높은 칭호인 (帝)를 칭하는 등 위세를 부렸으나, 자주 침공하던 연나라 명장 악의를 포함한 각국의 연합군에게 대패한 후에는 연나라를 필두로 한 진나라, 조나라, 위나라, 한나라가 연합한 합종군의 침공에 제나라도 버티지 못해서, 수도 임치가 떨어지고 70여 개 성이 6개월 만에 모두 넘어가 결국 남은 성이 거와 즉묵 두 개(사료에 따라서는 세 개)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당시 민왕은 수도 임치에서 탈출한 후 (鄒), (衛) 등 여러 약소국들을 전전했는데, 그 꼴에도 자기가 왕이라면서 거드름을 피우다가 모두 거절당하거나 쫒겨났다.

결국 민왕은 남아 있었던 성 두 개 중 하나였던 거성으로 달아났는데 초나라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초나라 고열왕은 장수인 요치(淖齒)에게 군대를 주어 구원을 하게 했는데 상황에 따라 잘 대처하라고 했다. 요치의 초나라 군대 덕분에 간신히 거성의 함락은 막았지만 제민왕은 초대형 악수를 두는데 요치를 재상으로 봉하고 모든 권력을 넘겼다. 그리고 실권을 장악한 요치는 곧바로 민왕을 죽여버렸다.[5] 이 일을 두고 < 범수 열전>에서 범수는 요치가 민왕의 힘줄을 뽑은 후 그 힘줄로 대들보에 목을 매달아 죽여버렸다고 말했는데, 다만 제나라의 <세가>나 당시 인물의 기록에는 그런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저 소문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최악의 상황이었던 제나라였지만 민왕의 비참한 죽음과 멸망 직전의 나라를 보고 분노한 백성들의 저항으로 요치는 죽음을 당했고 초나라 군대는 축출되었다.[6][7] 이후 거성의 백성들은 태사(太史) 교(嬓)의 집에 정원사로 위장한 채 숨어 있었던 민왕의 세자 법장을 찾아내 즉위시키니 그가 양왕이다. 한편 또다른 성이었던 즉묵에서는 왕족 전단이 나서서 이간책을 사용하여 연나라의 명장 악의를 쫓아내고, 소 꼬리에 불을 붙여 돌진시키는 화우지계를 써서 악의 대신 연나라의 대장으로 있었던 기겁을 죽이고 연나라 군대를 대파했다. 이에 연나라에 점령당한 제나라의 백성들이 들고 일어났고 연나라 군대는 전단과 제나라 군대에게 추격당해 국경 밖으로 쫓겨났다. 그 결과 제나라는 70여 개 성을 모두 수복했다. 하지만 제나라는 제-연 전쟁으로 국력을 너무 소모하여 중소국가로 위축되었고 예전의 영광은 다시 찾지 못했으며 지속적으로 주변 나라들인 조, 위, 초에게 야금야금 영토를 빼았기면서 수세에 몰렸다. 그 예시로 오랫동안 제나라의 이웃으로 있으면서 꾸준히 영토를 뺏겨 명맥만 유지하던 노나라를 멸망시킨 것은 제나라가 아닌 남쪽에서 꾸준히 북진해오던 초나라였다. 자기 바로 옆의 약소국도 병탄 못할 정도로 국력이 약해졌다는 의미이다.

결국 양왕의 아들이었던 제왕 건의 치세때 진(秦)왕 영정(진 시황제)에 의해 기원전 221년에 멸망했다. 제나라의 멸망은 연나라의 대규모 침공때보다 더 허망했다. 관동 6국 중 나머지 국가들은 이미 멸망한 상태였는데, 그나마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제나라는 싸움 한 번 안 하고 나라를 들어 바친 것이다. 이는 이사 등이 제나라 왕 전건과 그의 처남인 후승을 이간질+뇌물로 회유한 결과였다.[8][9] 전국칠웅 최후의 국가였던 전제의 멸망으로 춘추전국시대에 분열되었던 중원은 마침내 진시황 치하의 진나라에서 천하통일 완수되었다.

2.2. 초한쟁패기 시기의 제나라(후제)

사구에서 진시황 영정이 붕어한 이후 암군 이세황제 호해의 폭정과 반란으로 혼란에 빠졌던 진나라 말기에 적현(狄縣) 출신의 옛 제나라 왕족이었던 전담(田儋)을 대표로 내세우며 규성 (田)씨 일족이 부활했다. 역사에서는 이를 후제(後齊)라고 부른다. 전담은 제나라의 동쪽 땅을 평정했으나, 진나라의 마지막 명장이었던 장한에게 대패하고 임제 전투에서 전사했다. 전담의 사촌 동생이었던 전영(田榮)은 패잔병을 수습해 동아로 도주했고, 제나라 사람들은 전제의 마지막 왕이었던 전건(田建)의 동생인 전가(田假)를 제나라 왕, 전각(田角)을 재상, 전각의 동생인 전간(田間)을 장군으로 삼았다. 한편 동아에 있었던 전영은 제나라 사람들이 왕실의 직계인 전가를 제나라 왕으로 삼았다는 것에 분노하여 전가를 공격했고, 이에 전가는 남쪽의 초나라로, 재상 전각과 장군 전간 형제는 서쪽의 조나라로 도주했다. 전영은 전사한 사촌형 전담의 아들인 전불(田市)을 제나라 왕으로 삼고 그를 보좌했으며, 전영의 동생인 전횡(田橫)은 장군이 되었다.
전영과 서로 묵힌 감정이 상당했던 항우[10] 진나라(秦)를 멸망시킨 후 18제후왕 분봉 과정에서 당시 실권자였던 전영을 무시하고 제나라를 세 개, 즉 삼제(三齊)로 쪼갰다. 제왕 전불(田市)을 동쪽으로 옮겨 교동왕(膠東王)으로 삼고 수도를 즉묵(卽墨)에 두게 했으며, 전영에게 반기를 든 제나라 장군 전도(田都)를 제(齊)왕에 봉해 수도를 전제의 옛 수도인 임치(臨淄)에 두게 했다. 또한 전영 일족과는 별도의 세력을 보유했던 전안을 제북왕(濟北王)으로 삼아 수도를 박양(博陽)에 두도록 했다. 항우와 다른 제후왕들이 임지로 돌아가자 전영은 먼저 제왕 전도를 공격해 초나라로 몰아내고, 전불의 교동왕 부임을 막았다. 이에 전불은 봉지로 도망쳤는데 전영이 추격하여 즉묵에서 전불을 죽이고 돌아오는 길에 제북왕 전안도 죽여서 항우가 제북, 교동, 제로 나누었던 삼제를 통합하고, 자신이 제나라의 왕위에 올랐다.

이 소식을 듣고 격노한 항우는 제나라를 침공해 평원 전투에서 전영을 죽이고, 제나라의 수많은 인명을 대량학살했다. 이에 전영의 동생이었던 전횡은 제나라의 저항 세력들을 수습하여 항우의 서초 군대에 저항했고, 항복한 민간인까지 모조리 학살하는 항우의 잔혹한 전술에 분노한 제나라 사람들은 전횡 밑에서 일치단결하여 항우에게 맞서 맹렬하게 싸웠다. 결국 항우가 제나라에서 사람을 마구 죽이며 뻘짓해대고 있는 틈을 타 유방의 한군이 한중에서 빠져나와 진나라의 항장들이 나누어 다스리고 있었던 삼진(三秦)을 무너뜨리고, 관중을 장악하며 대규모의 반 항우 세력을 결집했다.

이에 놀란 항우가 군대를 30,000명 정도 떼어 즉시 팽성으로 돌아가 한왕 유방의 대군 560,000명을 개발살냈으나,( 팽성 전투) 전횡은 항우가 빠져나간 틈을 노려 잃어버린 영토를 거의 전부 되찾았다. 이 틈을 타서 전횡은 패사한 형 전영의 아들 전광(田廣)을 제왕으로 삼았다. 그리고 조카를 옹립한 전횡은 재상으로서 실권을 손에 넣었다. 결국 천하 초•한으로 갈라졌으나, 제나라는 초나라 한나라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고 사실상 중립의 위치에서 관망했다. 초나라와 적대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한나라와도 여전히 대립하는 관계였던 것이다.

아예 수도 함양까지 한 번 항우에게 점거당해 대학살이 일어났었던 관중 지방보다는 제나라 쪽의 처지가 그나마 나았던 것 같지만[11] 항우에게 타격을 입은건 분명한데다가, 한나라를 막을 방패로 받아들였던 진여 정형 전투에서 대패하면서 제나라는 조•연 등 북방의 여러 나라를 병합하고 순식간에 거대해진 한신 휘하의 한나라 정예 군단과 마주하게 되었다. 다만 한신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작전을 중지한 덕에[12] 바로 싸우지 않고 대략 6개월 동안 애매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다가 한왕 유방이 한신과는 별도로 역이기를 보내 제나라의 잔존 세력에게 유세를 하여 한나라에 가담시키고, 동맹을 맺는데 성공했다. 이때까지 딱히 한나라와 적대한 적도 없었고, 제나라로서는 단독으로 서초 패왕 항우에게 대항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니 당연한 선택이었다. 그런데 공을 역이기에게 빼앗길 것이라는 괴철의 충동질에 한신이 넘어가 동맹을 무시하고 제나라를 공격해버렸다. 사실상의 '배신' 행위에 화가 난 제왕 전광과 전횡은 역이기가 자신들을 속였다면서 기름솥에 튀겨 끔살시켰다. 그러나 화풀이를 한다고는 해도, 한신의 한나라 군대가 쳐들어오자 이미 대비태세를 풀어버린 데다가 항우와의 격렬한 전쟁으로 극도로 피폐해진 제나라는 버틸 힘이 없었다. 결국 전횡과 제왕 전광은 가신들을 데리고 흩어져서 도주했다.

전광은 마지막 수단으로 지금까지 싸워오던 숙적 항우에게 구원 요청을 했고, 이에 항우는 용저를 보내 제나라를 구원하도록 했다. 그러나 용저는 유수 전투에서 참패하여 초나라 군대는 궤멸해버렸고, 제나라의 잔존 세력은 조참 관영 등의 한군에게 완전히 진압당했다. 전광은 한신에게 살해당했다. 그리고 유방에 의해 한신이 제왕에 봉해졌다. 전횡은 죽은 조카 전광 대신 제나라의 왕위에 올라 한 번 더 기회를 노려봤지만 역부족이어서 결국 도망친 후 팽월에게 의탁했다.

해하 전투에서 항우가 유방에게 참패해 오강에서 자결하고 천하가 평정된 뒤, 팽월을 떠나 섬에 숨어있었던 전횡은 고황제 유방의 회유를 받아 항복을 하러 가게 되었다. 유방은 전횡을 우대할 생각이었는데 역이기의 동생 역상에게 '형을 죽인 원한을 갚으려 들면 반드시 너를 벌하겠다.'라고 미리 엄포를 놨을 정도였다. 그러나 전횡은 유방을 만나러 가는 길에 차마 자기가 튀겨 죽인 역이기의 동생인 역상과 마주보며 유방을 섬기기는 부끄러웠던 듯 회의를 느끼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전횡의 부하들도 주군인 전횡이 죽었다는 것을 알자 모두 집단 자살하여, 규성 전씨의 제나라 부흥 세력은 완전히 소멸했다.

해하 전투가 끝나고 노현 땅이 항복했을 때 유방이 한신을 기습해 초왕으로 옮기면서 제왕의 자리는 한동안 공석이 되었는데, 한신이 한 번 더 강등당해 회음후로 내려갔을쯤 전긍이 아주 잘하셨다고 칭찬하면서(...) 제나라는 동쪽의 진나라와 같은 곳이라서 유방의 친가족이 아니면 절대로 왕을 맡기지 말라고 간언했다. 이에 전긍의 말이 옳다고 생각한 유방은 자신의 서장자인 유비[13]를 제왕에 봉했다.

3. 기타

제나라 사람들은 전영에게 살해당한 제북왕 전안의 집안을 '왕가'(王家)라 불렀고, 전안의 후손들은 이 때문에 성을 아예 왕씨(王氏)로 갈았다. 전안의 후손 중에 대표적인 인물로 전한 찬탈하여 신나라를 세운 왕망(王莽)이 있다. 또한 제양왕의 후손이 《 삼국지》에 나오는 법정이라고 한다. 법정의 조상들 중 한 명이 양왕의 휘였던 법장(法章)에서 '법' 자를 따와 법씨(法氏)로 바꾼 것이었다.

4. 역대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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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제(田齊) 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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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씨종주(田氏宗主)
초대 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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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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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대 종주

무자
7대 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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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자
9대 종주

양자
10대 종주

장자
11대 종주

도자
전씨대제
전제(田齊) 국군
초대 국군

태공
2대 국군

제후 섬
3대 국군

환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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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왕
2대 왕

선왕
3대 왕

민왕
4대 왕

양왕
5대 왕

제왕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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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는 시호, 뒤에는 이름이다. 또 시호가 없는 군주도 있다.

4.1. 전씨 종주( 춘추시대)

4.2. 전제의 역대 군주

4.2.1. 전국시대

군주명 사기 죽서기년
원년 사망 재위 원년 사망 재위
태공(太公) 화(和) 서기전 386년 서기전 385년 2년 서기전 386년 서기전 385년 2년
(剡) 기록누락 서기전 384년 서기전 375년 10년
환공(桓公) 오(午) 서기전 384년 서기전 379년 6년 서기전 374년 서기전 357년 18년
위왕(威王) 인제(因齊) 서기전 378년 서기전 343년 36년 서기전 356년 서기전 320년 37년
선왕(宣王) 벽강(辟彊) 서기전 342년 서기전 324년 19년 기원전 319년 서기전 301년 19년
민왕(湣王) 지(地) 서기전 323년 서기전 284년 40년 서기전 300년 서기전 284년 17년

참고로 《 사기》와 《 죽서기년》에 표시된 군주의 재위 연도가 많이 다르다.

4.2.2. 초한쟁패기

한신을 끝으로 제나라는 폐지되어 한나라의 직할 통치를 받다가, 고제 말에 유씨가 다스리는 제후국으로 부활했다.

5. 같이보기


[1] 주왕의 승인에 따른 공식 건국은 서기전 386년 [2] 춘추전국시대에는 성과 씨를 구별했는데 첫 공족은 강성의 여씨(呂氏), 찬탈 이후는 규성의 전씨(田氏)이다. [3] 서기전 323년부터. [4] 단, 춘추전국시대 사람들은 세속적인 편이었다. [5] 출처: 사마천, 《 사기》 <전경중완세가> [6] 출처: 《 자치통감》 <주기> 4권 [7] 《사기》 <세가>에서는 그냥 요치가 물러갔다고만 서술하고 있다. [8] 물론 후승은 전제의 멸망 후 곧바로 처형되었다(...). 좋은 토사구팽의 예. [9] 마지막 왕인 제왕 건은 항복하면 500리의 땅을 주고 조상의 제사라도 지내게 해준다는 조건에 혹해서 항복했지만 속임수였다. 진시황에 의해 북쪽 국경 부근의 산골 마을인 공현으로 유배당한 제왕 건은 조그마한 집에서 초라하게 말년을 보내게 되었다. 공현은 땅이 척박하여 식량이 부족한 지방이었다. 이때 같이 끌려온 수백 명의 제나라 규성 전씨 왕족들이 굶어죽었으며, 왕족 아이들의 밥을 달라는 울음이 이어졌다. 결국, 아들이 행방불명되자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병을 얻은 제왕 건은 비참하게 굶어죽었다. [10] 항량은 전영의 정적인 전가를 보호했는데, 이러자 전영은 항량을 지원하지 않은 것은 물론 항량이 패사한 후엔 송의를 이용해 항우를 한 번 실각시키기도 했다. [11] <혜제기>를 기준으로 제나라의 수도인 임치의 인구가 65만 명, 수도 장안이 50만 명 가량이었다고 한다. [12] 이좌거의 전략안은 내실이 부실한 군사로 무리하게 싸우느니 드높아진 한신의 위세로 연나라와 제나라를 겁주어서 항복시키자는 것이었으나, 한신은 연나라를 항복시키는 데까지만 따르고 제나라는 내버려두었다. [13] 후한 삼국시대 촉한의 열조 소열제 유비와는 별개의 인물이다. [14] 한문제의 이름이 항(恒)이다. [15] 《죽서기년》에서 태공과 환공 사이에 기록된 군주로 《사기》에서는 기록되지 않았다. 그래서 섬의 재위 기간은 《사기》에서는 환공의 재위 기간에 포함되어 있다. [16] 《사기색은》(史記索隱)의 저자 사마정(司馬貞)은《 장자》 거협편과 《귀곡자》에서 '전성자(전항)가 제나라 임금(간공)을 죽인 후부터 제나라에는 12대가 있었다'라고 한 것을 인용하여 전도자와 전후 섬의 존재를 긍정했다. 곧 《사기》에 따르자면 전성자부터 왕 건까지 10대에 불과하고, 전도자와 전후 섬을 합해야 12대가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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