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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홍(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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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764><colcolor=#fff> 대한민국 제25대 문화공보부장관
이원홍
李元洪 | Lee Won-hong
파일:이원홍 사장.png
출생 1929년 4월 3일 ([age(1929-04-03)]세)
경상남도 고성군
본관 함안 이씨[1]
재임기간 최규하 정부 초대 민원수석비서관
1980년 1월 20일 ~ 1980년 7월 28일
제4·5대 한국방송공사 사장
1980년 7월 28일 ~ 1985년 2월 19일
제3대 한국방송협회 회장
1982년 3월 18일 ~ 1985년 3월 23일
제25대 문화공보부장관
1985년 2월 19일 ~ 1986년 8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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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764><colcolor=#fff> 학력 부산고등학교 ( 졸업 / 3회)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 종교학 / 학사)
경력 한국일보 사회부장
한국일보 일본 주재 특파원
한국일보 편집국장
주일본 대한민국 대사관 공보관장 겸 문화원장
대통령비서실 민원수석비서관 ( 최규하 정부)
제4·5대 한국방송공사 사장
제3대 한국방송협회 회장
제25대 문화공보부장관 ( 전두환 정부)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위원장
한국차문화협회 이사장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
}}}}}}}}}

1. 개요2. 일생3. 수상 경력4. 출처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언론인, 관료이다. 1980년대~200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한국 방송사(史)에 선악을 떠나 많은 영향을 끼쳤던 전 KBS 사장이자 전 한국방송협회 회장이다. 또한 제5공화국에 적극 영합하여 허문도, 이진희 등과 함께 제5공화국 시절의 '언론계 3대 악당'으로 비판받는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2. 일생

1929년 4월 3일 경상남도 고성군에서 아버지 이진추(李鎭樞, 1891. 10. 4 ~ 1947. 2. 26)[2]와 어머니 칠원 제씨 제공인(諸孔仁, 1894. 9. 13 ~ 1962. 1. 12)[3] 사이에서 1남 1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부산고등학교(3회)[4],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종교학과를 졸업하였다.

1956년 한국일보 4기 기자로 입사해 1961년 기사심사부장으로 간부직 생활을 시작, 1962년 사회부장을 거쳐 1965년 주일특파원으로 발령나 <일본인>, <조총련>, <일본속의 한국문화> 등의 칼럼을 연재했고, 1971년 귀국 후 편집국 부국장, 편집국장, 논설위원 겸 기사심사위원장 등을 거치다 1974년 주일한국대사관 공보관장 겸 문화원장으로 임명돼 5년간 근무하였다. 1979년 12월 최규하 대통령으로부터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민원 수석비서관(현 민정수석비서관)으로 임명됐다.

이후 최세경의 뒤를 이어 1980년 7월부터 1985년 2월까지 한국방송공사 사장 겸 한국방송협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취임 후 그는 먼저 KBS 내의 양심적 기자 86명을 해직시켰고, 이때 KBS의 컬러화를 적극적으로 주도하고 언론통폐합으로 합병된 TBC DBS, 보도기능만 폐지된 CBS로부터 방송채널과 직원들을 낼름 받아먹었다.

또한 언론통폐합이 된김에 문공부, 방송위원회, 방송심의위원회 등을 적절하게 주물러서 광고도 편성하도록 하고[5] 무엇보다도 컬러TV 수신료를 2,500원으로 정하도록 로비해서[6] TV 채널 1개, 라디오 채널 3개 정도였던 KBS의 규모를 크게 확충하여 TV 채널 3개[7], 라디오 채널 9개를 지닌데다가 돈도 넘치는 세계구급의 초대형 방송사로 만들었다.[8] 물론 1980년대 중후반의 시청료 거부 운동으로 돈이 넘친다는 말이 무색해지기는 했다.[9]

여하간 이런 축복받은 환경에서 이원홍 사장 개인은 나름대로 선구안을 발휘해서 100분쇼 뉴스파노라마처럼 이전에 볼 수 없었던 형식의 프로그램이 속속 신설되었다. 또 KBS가 수신료의 가치를 제대로 발휘한 사례에 반드시 꼽히는 세계 최장기간 연속 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라는 프로그램이 탄생하도록 아이디어를 직접 냈다. 아울러 KBS를 대표하는 장수프로그램인 추적 60분이나 전국노래자랑[10],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딩동댕 유치원[11], TV유치원 등이 이원홍 사장이 재직하던 시절에 신설된 프로그램이었다.

그 외에 가족오락관이나 가요톱10,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 유머 1번지, 젊음의 행진, 100분쇼, 11시에 만납시다, TV가정고교학습, 사랑방중계, 전국일주 등의 히트 프로그램도 이원홍 사장 시절에 방송이 시작된 프로그램인데다가 결정적으로 현재의 KBS 로고를 1984년부터 써왔다는 점을 생각하면[12] 이원홍이 KBS에 남긴 발자취가 얼마나 큰 것인지 알 수 있다.

게다가 난시청 지역 해소를 위한 간이중계소 설치 등 방송기술 발전과 관련해서도 힘썼다.

하지만 이동규, 이광형, 김기열 등 방송과 전혀 관계없는 인사들을 간부직에 꽂아놓고 정권에 비판적인 직원들을 대량 해고하고 땡전뉴스 전두환 정권에 아부한 게 큰 오점으로 남았다. 대표적인 게 국풍81인데 기획면에서는 이 사람한테서 나왔다. 이쪽은 아예 전두환 본인이 "이번에 국풍81 말이야, 그거 KBS에서 아주 과감한 도전이라고 생각해"라고 육성으로 말하는 기록이 남아 있다.[13] 게다가 TV와 라디오 프로그램 제작에 시시콜콜 간섭한건 물론이고 마음에 들지 않은 부하 직원들에게는 쪼인트를 마구 까대는 등 이에 관련된 에피소드를 많이 남겼다. 게다가 박용식도 출연금지 시켰다. 그래서 당대 KBS 직원들 사이에서는 ' 네로 황제', '왕PD'[14][15], '노예선의 선장'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이는 당시 문화방송 사장을 역임하였고 이원홍의 전임 문화공보부 장관이었던 이진희나 그 외 5공 시절 다른 KBS, MBC 사장들도 마찬가지였다.[16]

여하튼 이원홍의 임기말부터 수신료를 비싸게 걷어들이고 광고료도 받으면서도 땡전뉴스 편성은 적극적으로 행한 업보로 인해서 시청료 거부 운동이 점차 확산되기는 시작했지만 1985년에 문화공보부로 발령나면서 KBS 사장직에서 물러났기 때문에[17] 일단 경영상으로는 큰 타격을 받은 걸로 되어있지는 않다. 그렇지만 퇴임 직전에도 당시 여당인 민주정의당을 홍보하고 야당을 비난하는 선거용 드라마의 제작을 지시하고 제작 현장에 일일이 찾아다니며 의도적으로 민주정의당에 유리한 대사를 넣도록 지시하는 등 신경을 써서 결과적으로 해당드라마의 제작진들과 출연진들, 방송사 안내 직원들을 항의전화로 욕보게 만들고 KBS의 이미지를 완전히 작살내서 시청료 거부 운동을 확산시키는데 일조했다.

1985년 2월부터 1986년 8월까지 문화공보부장관을 역임하였다. 이 때도 보도지침을 통해 자신의 연설이나 담화 내용을 눈에 띄게 보도할 것을 지시했다고 한다. #[18][19] 또 '민중'이란 단어에 과민 반응을 심하게 보여서 이념서적 탄압에 적극적으로 앞장섰는데 김언호의 <출판일기> 1985년 8월 20일자에 의하면 교보문고 시찰 당시 '민중'이나 '민주'라는 제목이 들어간 서적을 구매한 담당자를 질책한 뒤 해당 단어가 들어간 책들을 진열 서가에서 빼도록 지시한 일화가 있었다.

퇴임 후 1986년부터 3년여간 대한무역진흥공사 비상근 이사장을 역임하며 1988년 12월 13일 허문도, 이진희, 이광표 등과 함께 국회 문공위 언론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한 바 있다. 1991~1995년까지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위원장, 1995~2001년까지 한국차문화협회 이사장을 각각 지냈고, 월간 <세대> 지 발행인(1997~1998)과 한-러극동협회 이사(2001)도 지냈다. 2001년 한국차문화협회 명예이사장으로 추대됐다.

2021년 전두환 전 대통령이 사망하자 그의 빈소에 방문했다. #

3. 수상 경력

4.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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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운포공파(雲圃公派) 24세 수(洙) 항렬. 족보에 기록된 초명은 이도수(李度洙). [2] 자는 용현(庸顯). [3] 제원용(諸元容)의 딸이다. [4] 1980년대는 부산중-고교 출신 언론인들이 대거 약진했던 시기였다. 3회 동기생인 방태영은 코리아타임스 편집국장, 6회 졸업생들인 김성우, 이채주, 이동윤은 각각 한국일보, 동아일보, 부산일보 편집국장을, 10회 졸업생인 최병렬은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맡았다. 훗날 12회 졸업생인 김영일이 연합통신 편집국장으로 취임했다. [5] 1973년부터 1981년 3월 6일까지 KBS에서 광고를 전혀 편성하지 않았다. [6] 원래는 KBS에서 광고를 편성하기로 결정난데다가 이미 1979년과 1980년에 흑백TV 수신료가 인상되었다는 점 때문에 수신료를 굳이 비싸게 받을 필요가 없다는 가정하에 1,150원이나 1,850원안이 유력하게 검토되었지만 이원홍과 부하직원들이 청와대나 각 정부 부처에 로비를 열심히 한 덕택에 컬러TV 수신료가 2500원으로 결정났다는 후문이다. [7] 지금이야 지상파와 케이블 채널까지 해서 복수의 TV 채널을 보유한 방송사가 매우 흔해졌지만 당대에는 소련국영텔레비전이나 이탈리아 RAI 등 얼마 없던 수준이다. [8] 다만 1980년과 1981년에는 컬러화 완료 작업과 언론통폐합 과정에서 인수한 방송사들에 대한 인수자금 마련 때문에 적자를 보기는 했다. TBC와 DBS는 정부 주도로 강제로 빼앗은거나 마찬가지지만 일단 명목상으로는 TBC와 DBS의 원소유주인 중앙일보 동아일보가 자발적 결의와 법인 지분 인수인계 등의 과정을 걸쳐서 KBS로 넘어간 것이라 인수자금을 줘야했다. [9] 다만 이것도 수신료 수입이 많이 감소해서 그런 것이지 광고 수입은 그야말로 기하급수적으로 꾸준히 늘어났기 때문에 최소한 흑자는 냈다. 1980년대의 초고속 경제 발전을 등에 업고 광고 수요가 늘었고 당시 광고 영상을 방영할 수 있는 TV 방송사라고는 KBS와 MBC가 전부였기에 자연스럽게 광고 수입만으로 떼돈을 벌 수 있는 구조였다. 단지 1TV의 광고 편성량이 적다보니 광고를 통해 올린 수익 규모가 기대보다 적었을 뿐이었다. [10] 방송 자체는 1970년대 초반에 시작되었지만 현재의 전국노래자랑으로 개편된건 1980년 10월부터다. [11] 현재는 EBS 프로그램이나, 시작은 전신인 KBS 3TV에서 했다. [12] 참고로 현재의 KBS 로고를 디자이너인 정준(2003년 작고)이 디자인했다. 서울올림픽 공식 엠블럼에 응모했을 때는 떨어졌는데 KBS 로고 응모에는 붙었고 작품 선정 이후로 KBS에서 공식 로고로 쓴 것이 현재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다. [13] 이 영상은 30여 년이 지나 KBS 아카이브에 잠들어 있던 것을 다큐 인사이트 모던코리아 팀이 자료화면을 발굴하여 다큐에 써먹었다. [14] 참고로 역대 KBS 사장들 중 '왕PD'로 불렸던 사람이 두 명이 있는데 하나가 이원홍이고, 다른 하나는 2003년 4월부터 2008년 8월까지 사장이었던 정연주였다. # [15] 다만 정연주의 경우에는 제작 현장에 일일이 간섭을 해서라기보다는 구조조정 작업으로 지역방송사를 대거 정리하면서 노조와 관계가 그리 좋지 않아서라고 보는게 중론이다. [16] 단 1982년 6월부터 1986년 2월까지 MBC 사장이자 이원홍의 후임 문화공보부 장관이었던 이웅희의 경우 다른 사장들보다 조용하다는 평가를 받았다고는 하나 재임기간 중 업무상 비리는 이들 중 가장 많았다고 한다. [17] 잔여 임기는 한국일보 후배였던 박현태가 채웠다. [18] 참고로 이 당시 문화공보부장관은 현재의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 역할도 맡았다. [19]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도 이 시기에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