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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3 19:01:11

이승엽/선수 경력/일본프로야구

1. 개요2. 치바 롯데 마린즈 시절(2004~2005)
2.1. 2004 시즌2.2. 2005 시즌
3.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2006~2010)
3.1. 2006 시즌3.2. 2007 시즌3.3. 2008 시즌3.4. 2009 시즌3.5. 2010 시즌3.6. 요미우리 시절 평가
4. 오릭스 버팔로즈 시절(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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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승엽의 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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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서는 이승엽의 일본프로야구 경력이 설명된 문서이다.

2. 치바 롯데 마린즈 시절(2004~2005)


(2004~2005)

2.1. 2004 시즌

이승엽은 2003시즌 종료 후 FA 자격을 얻게 되는데, 그의 거취에 많은 야구 팬들이 주목하고 있었다. 이미 이승엽은 오래 전부터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진출을 희망하고 있었고, 팬들은 한국을 대표하는 타자인 그가 최고의 무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뛴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이후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오브 애너하임,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시애틀 매리너스 등 다양한 구단의 이름이 언론에 오르내렸지만, 협상이 지지부진해지며 이승엽의 미국 진출은 불투명해지기 시작했다.[1]

그리고 2003년 12월 11일, 이승엽은 서울 리츠칼튼 호텔[2]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일본프로야구 치바 롯데 마린즈 입단을 발표한다. 미국 출신인 바비 발렌타인 감독 밑에서 뛰면서 2년 후 다시 메이저리그 진출을 시도하겠다는 것. 이날 기자회견에서 이승엽은 감정이 복받쳤는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당시 인터뷰에서는 눈물의 이유를 아버지께 죄송한 마음 때문이라고 얘기했었다. 살면서 아버지의 의견을 거스른 적이 없었는데 일본 진출을 반대하는 아버지의 의견을 거스르면서 선택한 것이 죄송했던 듯. 그리고 9년 후, 2012년 힐링캠프에 출연해 이날 눈물을 흘린 이유에 대해 더 자세히 밝혔다.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진출이 좌절된 것이 분해서 그런 게 아니라, 정든 대구와 삼성 구단을 떠난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파서 눈물을 흘렸다고. 이승엽 자신으로서는 심사숙고해서 내린 결정이었겠지만, 한국 최고 타자의 미국행을 기대하던 많은 팬들은 이승엽의 일본 진출 소식을 듣자 큰 실망감을 보이기도 했다.

어쨌든 시즌 초반 4월에는 폭풍과 같은 활약을 보였고 시즌 1호 홈런은 다이에의 젊은 파워피처 아라카키 나기사를 상대로 역풍이 불고 바람을 막기 위한 높은 외벽이 있는 치바 마린 스타디움에서 장외홈런을 쳤다. 바닷바람을 막기 위해 친 외야 벽의 구멍 사이로 뚫고 들어가 건너편 주차장 차 유리를 맞추는 진풍경을 연출하며 나름대로 임팩트 있는 시작을 장식했다. 그러나 5월부터 이승엽의 약점을 간파한 일본 투수들의 집요한 공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시작, 2군으로 떨어진다. 그와중에 기존 주전 1루수였던 후쿠우라 카즈야[3]와의 포지션 경쟁은 완패를 당하고, 좌익수로 완전히 전향하다시피 했다. 시즌 후반 다시 올라왔지만 큰 기대를 걸고 영입한 용병타자 치고는 평범한, 이승엽 스스로는 용납할 수 없는 부진한 성적을 거두며 우여곡절 많은 이적 첫 해를 보낸다. 이 해에 동료 용병타자인 베니 아그바야니가 3할 1푼에 35홈런 100타점을 찍으면서 대박을 쳤기 때문에 용병타자들 내에서의 입지도 밀렸다. 참고로 베니 아그바야니는 그 후로도 롯데에서 5년간 뛰었는데, 3할 타율, 20홈런, 100타점 중 하나라도 달성한 시즌이 없었다. 즉 첫 해에 괴물같이 활약하고 나머지 5시즌은 거의 먹튀수준이었던 것.

2004년 성적은 14홈런 50타점 타율 0.240, 출루율 0.328, 장타율 0.450, OPS.779.

2.2. 2005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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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은 롯데 구단의 영입으로 이승엽 전담 인스트럭터로 부임해 일본으로 건너온 김성근[4]과 함께 어마어마한 훈련량으로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범경기에서 20타수 1안타의 극도의 부진을 겪으며 개막을 2군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그래도 이승엽이 이때 얼마나 동계훈련을 많이 소화했던지 당시 막 팀의 주전급으로 올라온 니시오카 츠요시가 자기는 매일 1000번 스윙을 할 때도 힘들어 죽는 줄 알았는데 이승엽은 자신의 두 배인 2000번을 스윙했다며 "그동안 이승엽이 얼마나 노력했는데 시범경기에서 좀 못쳤다고 기회를 안 주는 건 말이 안된다."고 언론에 대놓고 말했을 정도였다. 사실 이게 말로만 써놓은 거다 보니 얼마나 대단한 건지 감이 안 올 수도 있는데, 당시 발렌타인 감독은 산전수전 다겪은 베테랑 감독이었고, 그때만 해도 니시오카는 아직 완전히 주전을 확보하지도 못한 고졸 3년차 신예였다. 그런 선수가 감독의 선수기용에 대해 대놓고 항명으로 비쳐질 수 있는 행동을 하며 이승엽을 감싸 준 것이었다.

당시 또 다른 에피소드가 있는데, 김성근 코치가 영입된 이유 중에 이승엽의 존재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공식적으로 김성근이 이승엽의 타격을 지도할 권한은 없었다. 발렌타인 감독 직속의 1군 타격코치[5]의 권한을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 그래서 둘은 훈련장 구석에 잘 안 보이는 곳이나, 주차장 등을 전전하며 남들이 안 보는 곳에서 훈련을 했는데, 특히 시즌에 들어서가서는 감독의 눈을 피해 훈련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구장 곳곳에 CCTV가 있어서 숨을 곳도 별로 없었다고. 그래서 항상 김성근이 CCTV 앞에 어슬렁거리다가 점퍼를 벗어놓는 척을 하면서 CCTV에 점퍼를 건 뒤 이승엽이 와서 타격 연습을 했다고 한다.

개막 후 열흘도 되지 않아 1군에 콜업되었으며 첫 경기에서 결승 3루타를 치고 시즌 첫 홈런을 세이부의 영건 와쿠이 히데아키에게 뽑아낸 것을 시작으로 잇달아 홈런과 안타를 터뜨리며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결국 홈런타자의 바로미터인 30홈런을 이 시즌에 달성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승엽 이후 치바 롯데에서 30홈런 타자는 무려 14년이 지나서야 다시 나왔다. 2019년 시즌 개막 전에 ZOZO 마린 스타디움 X-존과 유사한 홈런 라군이 설치된 뒤 해당 시즌 브랜든 레어드가 결국 30홈런을 넘겼다. 다만 바비 발렌타인 감독이 유달리 데이터 야구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좌투수에 약하다는 인식이 박혔던지 이승엽을 계속 플래툰으로 돌려버린다. 그럼에도 홈런 30개를 친 것은 무시할 수 없는 사항. 그러나 출루율이 0.315에 그치는 등 생산성에 있어서는 아쉬운 점이 있었다. 여튼 이러한 플래툰 기용은 이승엽 골수팬들에게 이는 발렌타인과 롯데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만드는 요인이 된다.

그러나 이 당시 롯데는 굉장히 변칙적인 라인업을 사용하던 팀이었고, 이 당시에는 부상이 없는 한 3번 타순에 고정되던 1루수 후쿠우라를 제외한 나머지 선수들은 모두 플래툰으로 돌려졌다. 플래툰은 기본에 타순도 엄청나게 변칙적이었는데, 예를 들어 당시 팀내 최고 타율이었던 이마에 토시아키를 8번, 9번 타자로 기용한다거나, 3-4-5 클린업 트리오에 후쿠우라- 사부로- 사토자키[6] 를 넣고, 7-8-9번 타순을 셋 다 20홈런 이상의 장타자인 맷 프랑코-이승엽-베니 아그바야니의 용병 3인방으로 채워 클린업 트리오를 2개 운영하는 식이었다. 이 외국인 타자 3인방에 제한된 출장기회에도 33경기 120타석만에 8홈런 OPS .941을 기록한 우타 코너외야수 발렌티노 파스쿠치도 경쟁자였다. 센터라인 또한 최고의 수비형 유격수 코사카 마코토와 젊은 니시오카 츠요시가 유격수 주전 경쟁을 하고, 그 중 경쟁에서 밀린 선수 한명이 2루 자리를 맡았는데, 3할-두자릿수 홈런급 기량의 베테랑 우타 2루수 호리 코이치나 젊은 선수들과 또 출장시간을 나눌 정도로 자원이 풍부했다. 어쨌든 이 당시 롯데는 이런 변칙적인 라인업으로 엄청나게 재미를 봐서 세이버적으로 볼 때 NPB 역대 탑급의 득점력을 뽐냈고 승패마진 +35의 84승 49패 3무, 퍼시픽리그 2위[7] 호성적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이렇듯 자국선수들도 뻔질나게 플래툰으로 돌려지는데 이승엽만 특별 대우를 해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을 뿐더러, 심지어 당시 김성근은 아직 스윙이 베스트로 올라온 상황이 아니므로 현재의 이승엽에게는 플래툰이 더 좋을수도 있다는 말을 했던 적도 있다.[8] 실제로 이 시즌까지 이승엽의 대좌투수 타율은 2할 1푼대로 매우 좋지 않았으며, 발렌타인이 이승엽에게 아예 기회를 안줬다는 편견과는 달리 이승엽은 좌투수를 적지 않게 상대한 편이었다. 좌완투수 상대 시 주로 투스트라이크에서 바깥쪽으로 뚝 떨어지는 변화구에 헛스윙 심진을 당하기 일쑤였다.

여하튼 그 해 롯데는 플레이오프 1스테이지에서 세이부 라이온스를 가볍게 따돌리고, 2스테이지에서는 퍼시픽리그 정규리그 최고승률팀인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마저 잡으며 일본시리즈에 진출했다. 다만 이승엽이 플레이오프에서는 매우 좋지 않았는데, 2경기 선발출전에 3경기 대타로 나갔지만 9타수 1안타로 타율 0.111의 미미한 기록을 남겼다. 특히 2차전의 4연타석 삼진과 더불어 최종 5차전은 대타로 출전했다가 상대투수가 좌완미세 코지로 바뀌자 타석에 서보지도 못하고 노장 우타자 카키우치 테츠야[9]로 교체되는 수모를 당했다.

파일:lsyjs20381.jpg
다행히 한신 타이거스와의 일본시리즈에서는 맹활약을 펼치며 유종의 미를 거뒀다. 1차전의 상대투수가 20승에 빛나는 좌완 이가와 게이였지만 발렌타인 감독은 이승엽을 선발 라인업에 기용했고, 이승엽은 그에 보답하듯이 쐐기 홈런을 기록했다.[10] 이승엽은 시리즈 전체 홈런 3개를 치면서 한신을 떡실신시켰고[11]4차전에서는 한신이 자랑하는 JFK라인[12]마저 난타하며 4타수 4안타 1홈런 2루타 2개[13]를 기록하며 마지막까지 한신을 박살내고 고시엔을 침묵속에 빠트렸다. 6할 타율을 때리며 MVP를 차지한 이마에의 미칠 듯한 활약[14]에 좀 가려졌어도 지금까지도 한신의 악몽으로 기억되는 '33-4', 하얀 안개 사건의 대미를 홈런으로 장식하며 롯데의 일본시리즈 제패의 일등공신의 선수가 되며 우수선수상을 수상한다.

2005년 성적은 30홈런 82타점 타율 0.260, 출루율 0.315, 장타율 0.551, OPS .866.

3.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2006~2010)

★★
(2006~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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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2006 시즌

그러나 팀의 대우에 불만이 많았던 듯, 시즌 종료 후 이승엽은 롯데와 재계약 협상을 하면서 계약서상에 수비보장을 명시해달라는 초유의 요구를 하게 된다. 실제로 지난시즌 이승엽은 지명타자로 뛰는 것을 무척 싫어했으며, 좌익수라도 계속해서 고정적으로 맡기를 원했으나 팀내 용병타자 셋이 모두 외야수였던 관계로 그렇게 할 수가 없어 돌아가면서 지명타자를 맡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당시 롯데의 세토야마 대표는 금액은 이승엽이 원하는 대로 맞춰줄 수 있지만 수비보장은 선수기용의 문제이고 감독의 권한이기 때문에 받아들이기 힘들다며 굉장한 난색을 표했고, 결국 롯데와의 협상은 결렬됐다. 사실 이건 팀 입장에서는 당연한 얘기다. 감독의 권한을 넘어서 선수의 요구를 들어주면 단순히 시즌운용의 어려움을 넘어 선수단 전체 관리가 어려워진다. 당시 김성근 롯데 코치도 "치바 롯데에서 해줄 수 있는 만큼은 최대한 해주었다"고 구단이 이승엽에게 제안한 조건을 높이 평가했다.

다만, 이게 아주 불가능하고 상식 외의 요구는 아니었다는 점은 밝힐 필요가 있다. ML 출신 용병들이 일본에 올 때는 세세한 부분까지 계약서상 요구하는 게 흔했다. 소프트뱅크의 모 타자의 경우 계약서상에 '반드시 3번타자로만 출전한다.'라고 명시되어 감독이 부진에도 어쩔 수 없이 3번으로만 기용했던 경우도 있었다. 타순까지도 계약서상 지정하는데 수비보장 요구가 황당한 조건은 아니다. 다만, 바비 발렌타인이 워낙 지명도가 높고 우승까지 차지한 감독이었기 때문에 개성과 카리스마가 강한 우승 감독과의 조율없이 수비보장을 해 줄수가 없었던 것.

이후 이승엽이 메이저리그 진출을 다시 한 번 꾀할 것 같았지만 정말 의외로 정작 선택한 곳은 요미우리 자이언츠. 걱정과 우려를 하는 여론이 높았으나 어쨌든 이승엽은 배수의 진을 치고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하게 된다. 다음해 메이저리그 진출을 위해 계약기간은 1년으로 했다.[15][16][17]

요미우리 입단은 팀 타선이 약해진 하라감독의 강력한 요청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실제로 하라감독은 인터뷰에서 "신년정초부터 이렇게 기쁜 소식(이승엽 입단)은 없다."라고 할 정도로 크게 기뻐했다. [18] 하라 감독 복귀 선물로 구단이 이승엽을 선사한 셈.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최고의 활약을 보인 반면 봄 훈련에서 그다지 좋은 성적은 보이지 못했다. 그러나 개막전에서 6타석 3타수 3안타 1홈런 3볼넷의 화끈한 성적을 보이면서 진가를 보여주기 시작한다. 이후 6월 초 무라타 슈이치를 제치고 홈런 1위로 올라서며, 9월 초까지 계속하여 리그 홈런 1위를 달린다. 그러나 8월 말 고질적인 무릎 부상이 도지면서 홈런 페이스가 주춤해졌고 결국 타이론 우즈에게 홈런왕 자리를 내주게 된다. 다만 우즈가 워낙 미친듯이 후반기 몰아쳤기 때문에 이승엽의 몸이 정상이었더라도 홈런왕을 따낼 수 있었는지는 미지수였다. 이 해 우즈와의 홈런왕 신경전은 또 다른 볼거리였고, 우즈도 이승엽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듯한 언동을 자주 보여 그런 논란을 더욱 불거지게 했다. 이후 2007년 말까지 우즈가 낫다 이승엽이 낫다 논쟁은 국내 일본야구 커뮤니티에서 심심찮게 터지는 주제였다.

이 해, 정작 요미우리의 전력은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었다. 이승엽 혼자서 열심히 홈런을 쳐도 투수들은 죄다 흔들렸고 야수진에서도 이승엽 외에 니오카 토모히로 정도를 빼고 나면 그렇게 인상적인 선수가 없었다. 특히 이승엽과 함께 중심타선을 구축해줘야 할 타카하시 요시노부 고쿠보 히로키[19], 아베 신노스케 등이 부상으로 골골거린 것이 치명적이었다. 사실 2005년까지 감독하던 호리우치 츠네오가 팀을 대차게 말아먹고 다시 2006년에 하라 감독이 돌아와서 복구하던 과정이었다. 그 해 이승엽은 커리어 최고 성적을 찍었지만 반대로 팀은 사상 최초 2년연속 B클래스[20]라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 사실 그나마도 이승엽과 하라 다쓰노리 감독, 에이스 우츠미 테츠야 등의 활약이 좋아 이 정도로 선방한 것이었다.

2006년 성적은 41홈런 108타점 타율 0.323, 출루율 0.389, 장타율 0.615, OPS 1.003. 이런 인상적인 활약을 보였던 만큼 2006년 국내에서 이승엽의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물론 성적 자체가 좋았던 이유도 있지만, '일본 무대, 그것도 일본 최고의 명문팀에서 4번타자로 맹활약을 펼치는 한국 최고의 타자'라는 점이 시청자들에게 일종의 '극일 카타르시스'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21]

그리고 이런 좋은 성적을 바탕으로 이승엽과 요미우리는 4년 30억 엔의 초대형 재계약을 맺는다. 당시 일본프로야구 역사상 1위의 메가톤급 계약이었다.

이승엽 본인은 자신을 믿고 붙박이 4번타자로 지지해줬던 하라 감독에게 우승을 안겨주고 메이저리그로 가고 싶었다고 했지만, '일본 리그는 메이저리그에 진출하기 위해 거쳐가는 단계'에 불과했다고 생각했던 한국 팬들은 다소 허탈해했다. 본인의 말에 따르면 2006년 시즌 후 미국에서 꽤 좋은 제안이 있었지만 요미우리가 보여준 진심 때문에 요미우리에 남았다고 한다. 2ch를 포함한 안티들은 메이저리그에 간다는 말은 순전히 자신의 몸값 높이기 위한 술책에 불과했다고 비난을 가하게 되었고, 일부 팬들도 이승엽의 메이저리그 진출 의지에 대해서 의문을 품게 된다.[22]

그러나 이 부분은 알아야 할 것이 당시 하라감독과 이승엽이 어느정도 끈끈한 사이였냐면 감독이 따로 선수를 챙겨주는 건 물론 개인 블로그에서 올림픽때 자국팀을 침몰시킨 선수를 크게 칭찬했고, 이승엽이 한신의 시츠에게 발을 밟히자 감독이 뛰어나가 선수와 벤클을 할정도로 격하게 아꼈다. 인터뷰에서 조차 "3번(니오카)이 참 쓸모없었는데(원어:だらしない) 4번(이승엽)이 해결해줬다."며 대놓고 편애를 했을 정도, 이에 대해 이승엽은 한때 스승님 수준으로 모시면서 '올림픽등 국제대회에 소속팀 감독(하라)이 나오는 경우 나는 나갈 수 없다. 그게 암묵적인 룰이다.' 라며 하라감독에 대한 존경을 표시했었다. 그래서, 나중에는 틀어졌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하라감독에게 우승을 선사하고 싶어 메이저리그를 포기했다는 말은 일정부분 분명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3.2. 2007 시즌

4년 30억엔이라는 당시 일본 역대 최고 규모의 계약을 맺었다. 시즌 초 이승엽이 전년도 활약을 뛰어넘는 괴물이 될 것이라는 기대감들에 차 있었고, 이승엽이 개막전부터 가볍게 홈런을 때려내면서 기대감을 충족시키는 듯했다. 하지만 정작 시즌 중간 2군을 다녀오기도 하는 등 전년도에 비해 다운그레이드된 모습으로 결국 시즌 최종 성적 30홈런 74타점에 타율 0.274, 출루율 0.322, 장타율 0.501, OPS 0.823. WAR은 3.3으로 전 시즌 6.8에서 반토막 이상이 나버렸다. [23] 이 시즌에는 볼넷 38개를 골라내는 동안 119개나 되는 삼진을 당하면서 커리어 후반기의 고질적인 선구안 문제가 노출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해 3월에 당한 왼손 엄지손가락 부상도 이승엽의 하락세에 크게 일조했다. 손가락의 통증 때문에 몸쪽 공 타격 시 임팩트를 제대로 싣지 못했을 뿐더러 통증이 점점 심해져 시간이 갈수록 타석에 들어서는 것 자체가 곤욕스러웠다고 할 정도. 투수들이 이를 간파한 후론 집요하게 몸쪽 공 승부를 시작했고, 급기야 통증이 악화된 시즌 후반기엔 몸쪽 공은 버리고 바깥쪽 공 위주로 타격을 하기 시작하면서 전체적인 타격의 밸런스가 서서히 무너져가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월경 한경기 3홈런을 몰아치기더니 기어이 30홈런을 채우는 데 성공했다.

결국 시즌 종료 후 엄지손가락 수술을 받게 된다. 다만 이 수술에 대해서 장훈을 비롯한 다수의 원로들이 수술하지 않는 쪽이 좋다고 조언했다. 수술을 하게 되면 신경세포가 같이 죽게 되므로 타격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이유였다. 다시 말해서 통증은 없어질지 몰라도 이전과 같은 느낌으로 타격을 하기 힘들다는 것인데, 잘 치는 타자일수록 이 리스크가 크기 때문. 하지만 결국 이승엽은 수술을 택했고, 우려대로 이 결정은 일본에서의 남은 커리어의 발목을 잡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3.3. 2008 시즌

다음 시즌인 2008년은 4월 한달간 1할 2푼 5리의 처참한 성적을 내고 신속하게 2군으로 내려갔으며 이후 전반기를 쉬다시피 한다. 슬슬 먹튀소리도 나오고 혐한들의 조롱은 극에 달했다. 일본의 안티 요미우리 진영에게도 이승엽의 부진은 좋은 먹잇감이 되었고, 원로 노무라 카츠야는 "이승엽은 장식용 4번타자"라고 깠다.

7월 말 다시 복귀했으나 장타력이 되살아나지 않고 대타나 중간 교체가 많았으며 드문드문 나오는 등 보는 사람을 안타깝게 하는 장면이 많았다. 워낙 부진의 늪이 오래되자 베이징 올림픽에 참가한다는 의사를 밝혔음에도 차라리 다른 강타자를 넣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는 의견[24]들도 많았다. 하지만 하라 다쓰노리 감독은 "만일 한국이 일을 낸다면, 승짱이 일 낼 것"이라는 예언을 했고, 모두가 다 아는대로 그 예언은 적중했다.[25]

베이징 올림픽에서 준결승 전까지 중국전 끝내기 안타를 빼고는 지독한 부진에 시달렸으나,[26] 준결승 대 일본전 8회 이와세 히토키를 상대로 투런 홈런을 날려 전세를 완전히 뒤집었고, 결승전에서 1회 쿠바 투수에게 왼쪽 담장을 넘어가는 투런홈런을 쏘아 올려 대한민국 금메달의 일등공신이 되었고, 이때의 임팩트가 매우 컸기에 비교적 약효가 오래 간 까임방지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이후 이승엽은 요미우리 복귀 직전 일본전 홈런에 대해서 '홈런을 쳐서 일본한테 미안하다. 하지만 우리는 같은 아시아인이다'라는 인터뷰를 공개적으로 했는데, 한국 내에서는 '지나치게 예의를 차린다', '(일본 리그)팀 복귀를 의식하는 거냐', '이미 패배한 팀을 두 번 죽이는 말' 등의 부정적인 반응이 주를 이루었으나 이 기사를 접한 2ch 등 일본 커뮤니티에서 '맞아, 우리는 같은 아시아인이었어'라며 결승전에서 한국을 응원하는 등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물론 2ch는 강민호의 퇴장 빌미를 제공한 문제의 볼 판정이 나오기 전까지는 쿠바를 응원했다.

그리고 베이징 올림픽 야구 우승의 영광을 안고 8월 말에 다시 리그로 복귀한 후 9월 초에 잠깐 2군으로 내려가다가 9월 중순 부터 시즌 마지막 까지 5번 타자로 기용이 되었으며 요코하마 전에서 3연타석 홈런 #, 한신과의 3연전에서 맹타를 휘두르는 등 요미우리가 한신에게 13게임차를 뒤집고 우승을 하는 데에 기여하면서 활약을 했고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 2개의 홈런을 치면서 정규시즌의 부진을 어느 정도 만회하는듯했다. 하지만 그후에 벌어진 '일본시리즈에서 18타수 12삼진'이라는 무시무시한 기록을 찍으면서[27] 전혀 힘을 쓰지 못했고, 요미우리는 결국 준우승에 머무르고 말았다. 하라 감독은 이승엽이 끝내 한 건 해 줄 것이라면서 팬들은 물론 심지어 요미우리 출신 원로들까지 반대하는데도 최종 7차전까지 이승엽을 변함없이 주전으로 기용하는 근성으로 믿음의 야구를 선보였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이 때문에 요미우리 구단주는 시리즈 종료 후 하라 감독에게 "이승엽을 왜 썼느냐"고 분노를 쏟아냈으며, 이승엽 본인도 귀국 후 “일본시리즈 패배 원인이 나에게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준비가 부족했다. 야구를 시작한 이래 최악의 1년이었다. 응원해 주신 분들께 죄송하다”고 밝혔다.

2008년 성적은 고작 45경기 출장에 8홈런 27타점 타율 0.248, 출루율 0.324, 장타율 0.431, OPS 0.755.

3.4. 2009 시즌

2009년 제2회 WBC 불참을 선언하면서 시즌 성적에 집중하겠다고 공언한 뒤, 3월 시범경기에서 홈런 8개를 치면서 팬들의 기대를 높였다. 그러나 시즌 개막 후 하라 감독은 3번 오가사와라 미치히로와 4번 알렉스 라미레스를 제외한 나머지 선수들을 무한경쟁 체제로 운용하겠다고 발표했다.

2009시즌이 시작되면서 4월 초 부진에 빠졌고 하라 감독은 오래 기다리지 않고 이승엽을 붙박이 주전 자리에서 신속하게 제외시키며 플래툰 체제에 편입시킨다. 그간 이승엽에 대해 강한 믿음을 보여왔던 하라 감독의 선택이었기에 이 선택은 국내 이승엽 팬들 사이에서도 상당한 논란이 되었는데, 이승엽을 옹호하는 측에서는 하라 감독의 변심에 서운함을 표시했으나, 하라를 옹호하는 측에서는 그간 기다려 준것만으로도 보살이라며 충분했다는 반응을 보였다. 사실 수 년째 부진이 이어지는 가운데서도 이승엽을 계속 믿고 기용했던 하라 감독이었기에 '하라 보살' 이라는 웃픈 별명이 붙어 있을 정도였기에 우리나라 팬들은 속은 쓰려도 하라를 이해한다는 반응이 좀 더 우세했다.

그러던 중 5월 초 다시 대폭발하여 1할 대 타율을 잠시나마 3할 이상으로 높여 놓는 등 맹활약하면서 다시 주전으로 꾸준히 나오려는 찰나, 이승엽 데이를 기점으로 31타수 무안타의 부진에 빠지고, 감독은 그를 다시 플래툰으로 돌린다. 이후 잠시 살아나는가 했더니 다시 36타수 무안타의 극악의 부진에 빠져 사람들을 안타깝게 만들었다. 7월 초 하라 감독은 '무기한 2군 강등'을 선언하고 이승엽을 1군 엔트리에서 제외했다.

이후 이승엽은 다시 1군에 못 올라오고 77경기 출장에 머무르며 16홈런 36타점 타율 0.229, 출루율 0.327, 장타율 0.484, OPS 0.811이라는 초라한 성적에 그쳤다. 커리어 최초로 2년 연속 규정타석 달성에 실패했다.[28] 77경기 만에 16홈런을 친 것을 보면 확실히 파워면에서는 전년도에 비해 어느 정도 부활했다 볼 수 있지만, 대다수 타석에서 주구장창 선풍기를 돌리는 것을 보면 전반적인 이승엽의 타격 기술 상태가 처참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포스트 시즌에는 1군등록에 성공하고 플래툰 방식으로 선발과 대타를 오가며 뛰었으나 클라이막스 시리즈에서는 여전히 부진했고 일본시리즈에서는 초반에 홈런도 치는 등 조금 나아졌으나 막판가서는 또 그냥 그랬다. 일본시리즈 성적은 12타수 3안타, 그리고 6경기중 고작 2경기 선발출장에 그치는 등 팀의 주요전력에서는 사실상 배제되었다. 그래도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며 커리어 2번째 일본시리즈 우승 반지 획득.

3.5. 2010 시즌

2010시즌 타카하시 요시노부의 1루수 이동으로 인해 이승엽은 사실상 주전자리에서 밀리고, 대수비나 대타로 기용되었으나, 타카하시 요시노부의 기복 있는 플레이로 인해 가끔씩 주전으로 나오기도 한다. 2010년 5월 대타로 나와 번트를 대는 모습을 보이자, 일본에서 "6억 엔짜리 번트"라고 까였다. 자신의 선택이었는지, 벤치의 지시였는지는 모르겠지만.[29]

결국 계속된 타격부진으로 2010년 6월에 2군으로 내려갔다. 그의 거취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나돌았다. 장훈의 말에 따르면 요코하마 베이스타즈로 이적할 수도 있다고 했고 한쪽에서는 한국에서 이승엽을 받아주지 않는 분위기라서 은퇴 가능성도 있다고 했다.

이후 9월 초에 잠시 1군에 올라왔다가 3경기에서 5타석 서고 폭풍 강등. 9월 말에 다시 1군 등록으로 대타 및 대수비 요원으로 나왔으나, 홈런은커녕 안타 한 개도 추가 하지 못하고 시즌을 마쳤다. 2010년 시즌 성적은 커리어 사상 최악인 56경기 5홈런 13타점 타율 0.163, 출루율 0.280, 장타율 0.337, OPS 0.617. 그리고 BB/K 수치가 0.5에도 못미치는 최악의 시즌을 보냈다.

3.6. 요미우리 시절 평가

결국 요미우리의 와타나베 쓰네오 회장은 요미우리 시절의 이승엽에 대해 분노에 찬 한줄평을 남겼다. 근데 이승엽을 직접 영입한 장본인이 다름 아닌 와타나베 츠네오다.
일본 역대 최대 규모의 계약을 체결했으니 화날만도 하다. https://s.japanese.joins.com/JArticle/134376?sectcode=620&servcode=600
"4년 계약에 거액[30] 까지 지불했는데 X같은 활약밖에 못했다.(4年契約で大金払って、クソの役にも立たなかったってのもいる)"

결국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이승엽은 희대의 먹튀로 기록되었다. 일본에서는 이승엽을 "급료 도둑" 이라고 표현하며 깐다.

요미우리 퇴단 후 오릭스 입단식 반응에서도 일본 내 여론은 심히 좋지 않았다. #1 #2

4. 오릭스 버팔로즈 시절(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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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단식에서 박찬호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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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방출당했다. 본인은 일본프로야구에서 계속 플레이하기를 희망하고 있었기 때문에[31] 요미우리 시절에 비하면 많이 삭감된 연봉으로 뛰게 되었다. 영입에 흥미를 보인 구단은 대규모 보강으로 현질을 한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와, 알렉스 카브레라와의 재계약이 불투명해서 대체로 1루수 자원을 찾고있는 오릭스 버팔로즈가 꼽혔으며, 결국 오릭스 버팔로스에서 뛰게 되었다. 1억 엔도 못넘는 싼값에 계약할 것으로 점쳐졌었으나 의외로 1억 5천만 엔에 인센티브 포함이라는 대박 계약. 물론 요미우리 시절 받던 금액에 비하면 턱없이 적지만 3년간 부진했던 것을 감안하면 완전 대박이라는 평. 당시 오릭스 금융그룹은 한국시장에서 규모를 적극적으로 확장하려 하고 있었고 그래서 사실상 한국 마케팅을 위해 박찬호와 함께 영입한 것이었다. 당시 박찬호의 연봉도 2억 5,000만엔이나 되었는데, MLB에서 불펜으로 돌아선 지 꽤 되어 선발로서는 이미 수명이 끝난 박찬호에게 2억5천만엔을 주는 것 역시 엄청난 오버페이였다.

등번호는 3번으로 확정되며 선수 생활 최초이자 유일하게 한 자릿수 등번호를 달게 되었다.[32] 또한 유니폼 뒤에 이름 역시 일본 진출 직후부터 요미우리 시절까지는 그냥 성씨만 나오는 "LEE"였으나, 오릭스 입단 직후에는 "LEE.S.Y"로 이름 이니셜까지 붙이게 되었다.

2011년 4월 13일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와의 경기에서 8회말에 쐐기를 박는 큼지막한 쓰리런을 날렸다.

그 와중에 대선배이자 자신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장훈 선생을 디스하는 발언을 했다. 장훈 선생이 자신을 5천만 엔짜리 선수라고 평한 것이 너무나 기분 나빴다고 디스했는데, 정작 장훈 선생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연봉이 5천만 엔 정도라면 이승엽을 원하는 팀이 2팀 정도 있다며 한국 복귀도 선택이 될 수 있다고 했는데 사실 이승엽이 지바 롯데에서의 마지막 시즌과 요미우리에서의 초반 2시즌을 제외하고는 계속 최악의 먹튀 연봉 킹 2군선수였으므로 그가 낸 성적으로 보면 연봉 5천만엔도 아까운 수준이었다. 결국 오릭스에서 준대박 계약인 1억 5천만 엔에 계약했지만 그것은 중계권료 등 수익성이 포함된 것이지 절대 1억 5천만엔 수준의 선수는 아니었다. 그가 오릭스에 오기 전 시즌에 낸 성적은 무려 타율 .163 / 5홈런 / 11타점으로 영입조차 아까울 수준이었다. 이 정도 성적의 용병은 영입하지 않는 게 훨씬 나은 선택이다. 일본 프로야구 1군에 뛰기 모자란 선수를 5천만엔 수준의 선수라고 해준 장훈 선생께 큰 절을 해줘도 모자를 판에 디스를 했으니 결국 오릭스에서 준 대박 계약을 받고 타율 .201 / 15홈런 / 51타점을 기록하였다.

5월 7일, 극심한 부진으로 인해 2군에 내려갔다가 보름만에 올라왔다. 여러모로 위기감을 느낀 것인지 5월 22일 1군에 복귀한 이후부턴 맹타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해줄 몫은 해줬다.

2군 가기 전 0.145 1HR 5RBI 2루타 3개 장타율 0.241 출루율 0.214 OPS 0.455 이었으며 1군 복귀 후 0.232 6HR 15RBI 2루타 10개 장타율 0.451 출루율 0.305 OPS 0.756(7월 26일 기준)이었으며 보다시피 비율 스탯이 크게 향상됨을 알 수 있다. 1군 복귀 후의 비율 스탯은 요코하마의 4번 타자 무라타 슈이치나 현재 하락세를 보이고 있지만 한때 40홈런을 치기도 한 소프트뱅크의 베테랑 내야수 고쿠보 히로키와 비슷한 정도다.

2011년 9월 20일, 13호 홈런을 기록했다. 시즌 중반부터 이 기세였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이승엽의 기량이 죽지 않았다는 반증이었으며 그리고 10월 4일, CS 진출에 유리한 고지를 마련할 수 있는 중요한 세이부와의 원정 경기에서 세이부의 에이스 와쿠이 히데아키를 상대로 쓰리런 홈런을 뽑아냈으며 그리고 이 홈런이 결승점이 되며 CS 진출에 한 발 앞서게 되었다.

그러나 그 다음 날인 10월 5일. 세이부 선발 투수 호아시 가즈유키에게 전날 3번째,마지막 타선 포함, 5연타석 삼진이라는 굴욕과 동시에 4타수 무안타에 그치고 말았다.

10월의 부진으로 한동안 선발라인업에서 빠져 있던 10월 14일, 니혼햄과의 원정경기에서 시즌 15호 홈런을 때려냈다. 10월 18일에는 CS 진출권이 달린 시즌 최종전에서 4타수 무안타 3삼진 무안타로 삽질을 해버렸다. 결국 팀도 패배하고 CS 진출 실패, 본인은 타율 딱 2할을 마크했다.[33]

2011년 최종성적은 15홈런 51타점 타/출/장 .201/.257/.365 OPS .622. 덤으로 32볼넷을 얻는 동안 자그마치 121삼진을 당하는 (안 좋은 의미로) 엄청난 BB/K를 기록하고 말았다. 2011년 이승엽의 성적은 다음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규정타석도 못 채웠는데 삼진은 리그 5위. 게다가 정규타석을 채운 타자 중 타율 꼴찌를 기록함으로써 팀내에서 고액연봉임에도 리그 타율 꼴찌라는 먹튀의 금자탑을 쌓았다.[34]

2011년 10월 19일, 이승엽이 국내 복귀를 결정했다는 기사가 떴다. 오릭스와의 계약 기간이 1년 남았지만 잔여 연봉을 받지 않는 조건으로 계약을 해지했다. 2012시즌부터는 다시 국내에서 이승엽을 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2011년 10월 21일 홋토못토 필드 고베에서 자신의 일본프로야구 무대 은퇴 기자회견을 열었는데, 자신이 가진 실력과 노력을 전부 보여주지 못해서 아쉽다고 하며 후에 일본에 진출할 후배들에게 멘탈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했으며 승엽의 경기 내적인 멘탈은 흔들림이 많은 편이다.

여담으로, 일본 생활을 하며 후쿠오카 돔에서는 홈런을 기록하지 못했고, 만루홈런은 삼성에 복귀한 이듬해 기록하였다.

결국 오릭스에서의 1시즌도 먹튀 성적[35]을 기록함으로서 요미우리에서의 희대의 먹튀를 넘어 일본야구의 희대의 먹튀가 되었다.

일본에서 반응도 심히 좋지가 않았다. https://m.blog.naver.com/dokdo_han/100131361149

이후의 활약에 대한 문서는 이곳을 참고.


[1] 2002년에는 시카고 컵스 스프링캠프 초청선수로 7경기 11타수 3안타 2홈런 5타점을 기록했고, 2003년 시즌 전 메이저리그 스프링캠프 초청을 심정수와 함께 플로리다 말린스(현재의 마이애미 말린스) 받아 주로 후반이닝 대수비로 투입되어 10경기 10타수 2안타 2홈런 3타점을 기록했었다. 그리고 이후 메이저리그에서 이승엽에 대한 관심은 끊어졌다. [2] 2017년도 경 르메르디앙 호텔로 변경 뒤 2021년 코로나 사태로 인해 폐업하였다. [3] 당시 3할 타율에 20홈런의 활약을 보장할 수 있었던 A급 교타자였고, 1루 수비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었으며, 결정적으로 치바현 출신으로 학교도 프로도 전부 치바에서만 보낸 마린즈 순혈 끝판왕이다. [4] 사실 김성근도 상황이 안 좋았던 것은 같아서 2002년 말에 LG 감독에서 경질된 후 스포츠투데이에서 칼럼을 쓰면서 신문 해설위원으로 살고 있었다. 이승엽이 한국인 코치가 필요하다고 구단에 부탁하자 롯데 구단에서 이승엽 전담 인스트럭터로 김성근을 영입한 것. [5] 당시 타격코치는 톰 롭슨이라는 사람으로, 텍사스 레인저스와 난카이 호크스에서 뛰었는데, 양팀 모두에서 처참한 타격력 때문에 실패한 경력이 있다. 바비 발렌타인 사단의 일원으로 1995년에도 지바 롯데에서 타격코치를 했으며, 발렌타인이 잘린 1996년에도 1년간 코치를 하고 미국으로 돌아간 후 2004년에 발렌타인과 함께 지바 롯데에 복귀하였다. 2006년까지 타격코치를 한 후 팀 타격 성적의 하락과 지병의 악화로 인해 계약을 해지하고 미국으로 귀국. 이후 2021년 향년 75세로 세상을 떠났다. 롯데에서 코치를 할 당시에 톰 롭슨은 "이승엽은 한국 시절과 비교해서 타격폼이 달라졌다. 한국 시절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평가하면서 이승엽의 타격폼을 한국 시절로 돌려 놓으려고 온갖 시도를 했다고 한다. 톰 롭슨의 코칭이 먹힌 것인지 김성근의 특별 코칭이 먹힌 것인지 이승엽이 스스로 해결책을 찾아낸 것인진 모르겠지만 일본 2년차인 2005년에는 전년도에 비해 성적이 급상승하는 데 성공. [6] SK로 치면 박경완 급의 입지를 차지했던 프랜차이즈 스타 포수. 리그 최강의 수비력을 자랑하는 데다 2할 중후반 타율에 20개 이상의 2루타와 두자릿수 홈런을 보장했던 웬만한 공격형 포수들 수준의 공격력도 갖추고 있었다. [7] 정규시즌 1위는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다만 이 해는 전 시즌 5위 팀(긴테츠)와 6위 팀(오릭스)의 쩌리급 선수들 위주로 구성된 신생팀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가 97패를 하며 승률 3할을 못 찍을 정도로 워낙 독보적인 약함을 자랑했던지라 승률이 다소 인플레된 감이 있다. [8] 하지만 김성근의 이 발언을 이승엽 본인은 탐탁지 않게 생각한 듯하다.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05052681898 [9] 통산 110홈런을 기록한 파워히터였으나 공갈포여서 두자릿수 홈런은 여러번 넘겼으나 딱 한 해 28홈런을 기록한 걸 빼면 전성기 때도 플래툰 위주로 나왔다. 사실 세이부에서 대부분의 선수생활을 보낸 세이부의 프랜차이즈 선수인데 말년에 트레이드로 롯데에 와서 대타 위주로 4년 더 뛰고 2006년 36살로 은퇴했다. 은퇴 이후 개인사업을 하다 주니치와 라쿠텐에서 코치를 했고 2023년부터 대만으로 건너가 푸방 가디언스의 1군 타격코치를 맡게 되었다. [10] 사실 이때 이승엽은 상대 선발이 좌완 이가와라서 당연히 자신이 선발에서 빠질 줄 알고 아버지가 직관오시는 것을 못 오게 했으나, 예상외로 자신이 선발로 출전하고 홈런까지 기록해서 아버지를 모시지 못한 게 후회된다는 말을 했었다. [11] 이후 요미우리로 이적한 후에도 유난히 한신전에 강한 면모를 보였다. 2006년 커리어 하이 때는 물론이거니와 2008년 요미우리가 한신과의 13게임 승차를 뒤집고 센트럴 리그 우승을 차지할 때 중간에 만난 한신전에서 결승타를 치는 등. 재미있는 것은 일본시리즈 이전까지는 대 한신전 타율이 1할도 안될 정도로 매우 약한 면모를 보였다는 점. 다만 당시 이승엽은 파리그 소속이라 한신을 만날 일 자체가 적어서, 그냥 단순히 표본이 덜 쌓인 것에 가깝다. 2004년엔 교류전 자체가 없었고 2005년에 교류전이 처음 생겼는데 달랑 6시합 갖고 강하니 약하니 할 게 없다. [12] 제프 윌리엄스/후지카와 큐지/쿠보타 토모유키로 각각 7,8,9회를 맡는다. [13] 이날 마지막 타석에서 2루타를 치고 3루로 뛰다 아웃되었는데 세이프였다면 사이클링 히트가 될 뻔 했다. 벤치에서 팀 동료가 사이클링 히트 아깝다고 하자 그런게 아니라 그냥 살 수 있을 것 같아 뛰었다고 대답. [14] 일본시리즈 연속안타 기록수립 [15] 정작 오퍼는 요미우리가 유일했다. 입단하면서 지바롯데가 제시한 금액보다 적은 금액에 싸인을 했다. 수비보장 때문에 간 것도 아니고, 롯데와의 협상이 결렬된 상황에 유일한 오퍼이었기 때문에 그냥 선택 할 수 밖에 없었던 것. [16] 사실 요미우리의 센트럴 리그는 지명타자슬롯이 없는 리그라 주전으로 출전할 수만 있으면 수비 보장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측면도 있다. [17] 이 때 김성근은 지바 롯데 마린즈에 잔류하여 1년을 더 일하다가 SK 와이번스 감독으로 취임하여 V3을 이룬다. [18] 올드 스쿨 성향이 강한 하라감독은 이승엽이 거포이면서 찬스에 강하다고 내내 높게 평가했는데 2005년 일본시리즈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보면서 크게 인상에 남은 듯 하다. 심지어 2008년 베이징 올림픽때는 자국을 침몰시켰음에도 일부러 블로그에 글을 게재해가며 훌륭한 선수라고 크게 칭찬했다. 당시만 해도 하라감독이 블로그에서 선수 개인에 대해 칭찬을 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었던 일, 그래서 하라감독이 훗날 완전히 돌아서기까지 중요한 찬스에서 이승엽을 기용했고 일본시리즈에서 패해서 요미우리 본사에 들어가서 왜 부진한 이승엽을 기용했냐며 추궁을 당하기에 이르렀을 정도였다. 물론 말년에는 실망이 커서인지 둘이 냉랭하게 돌아섰고, 이승엽은 오릭스를 거쳐 한국으로 돌아갔다. [19] 2015 프리미어 12 때 그 일본 감독 맞다. [20] 2005년에 5위로 B클래스 찍고 가을야구에 실패했고 2006년에는 4위를 찍었다. [21] 지금은 상상하기 힘들지만 이승엽이 일본에서 뛰던 2000년대 중후반은 한국의 호프집 야외 대형 TV에서 일본 프로야구를 틀어주는 경우도 많았다. 이승엽의 인기와 더불어 일본 프로야구에 대한 관심도도 꽤 높았던 시기이다. 그리고 스포츠 채널에서는 당시 맨유에서 활약하던 박지성의 '박지성 골모음', '박지성 명경기' 같은 박지성 하이라이트 모음과 함께 '이승엽 홈런 모음', '이승엽 명경기' 같은 이승엽 하이라이트를 수시로 틀어주었다. [22] 4년 계약이 끝나면 이승엽은 30대 중반에 접어들게 되었다. 나이도 나이지만 기복과 멘탈 약점이 뚜렷한 30대 중반의 선수를 메이저리그에서 영입할 이유가 현실적으로 없기도 했다. [23] 30홈런으로 준수해 보이지만 3.3의 WAR은 리그 최고의 연봉을 받은 선수에게서 기대하는 승리기여도가 절대 아니다. [24] 특히 이 때 김별명이 최종 후보인선에서 탈락을 해 버렸다. 성적이 압도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때문에 특히 김태균 넣으라는 소리도 많이 나왔다. 그래도 김태균은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으로 이미 군 면제를 받아서 망정이었지 꼼짝없이 군대 갈뻔했다. 김태균은 이듬해 2009 WBC에서 맹활약하고 이를 바탕으로 일본까지 진출한다. [25] 이에 대해 하라감독은 개인 블로그에서 절체절명의 순간에 강한 타자라며 이승엽을 극찬했다. 하라감독이 개인 블로그에서 특정 선수를 극찬하는 경우는 이전에 거의 없었으며 자국팀을 꺾고 금메달을 딴 선수에게 그정도로 극찬을 할 정도로 자랑스러워 했다. 이승엽이 팀에 복귀했을때는 전 선수가 모여서 금메달리스트인 이승엽에게 박수를 치게 했을 정도로 이승엽을 아꼈다. [26] SBS스페셜 승엽의 시대편에 따르면 예선 경기 내내 진통제를 맞아야 할 정도로 왼손 엄지 손가락의 통증이 심해 타격감이 매우 안좋아졌다고 한다. [27] 이것은 당시에 일본시리즈 최다삼진 기록 역대 2위였다. [28] 그리고 이 시즌은 이승엽이 NPB에서 OPS 0.8을 넘긴 마지막 시즌이다. [29] 여담이지만 잘 나가던 2006시즌에 뜬금없이 기습번트 안타를 성공시킨 적이 있었는데, 이 때는 '승짱은 번트도 잘 댄다'며 찬양받았다. [30] 4년 30억엔으로 당시 일본 역대 최고 규모 였다. 당시 환율로 따지면 켄 그리피 주니어와 비슷한 연봉이였다. [31] 사실 친정팀 삼성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요미우리에서의 활약 때문에 와도 자리없다라고 한 당시 삼성 감독 때문에 갈 엄두가 안났다고 한다. 와도 자리가 없다고 하신 분이 만에 하나라도 한 시즌이라도 일찍 물러났거나, 양준혁이 2010년에 은퇴하지 않았더라면 2011년에 이승엽 - 양준혁 체제를 삼성에서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선동열의 이 발언도 순화된 버전이라는 점. 당시 선 감독의 반응은 왜 온대요? 걔 여기 와도 자리가 없어요. 식이었다고 한다. [32] 삼성과 지바롯데 시절 36번, 요미우리 시절 33번과 25번을 달았고 삼성 복귀 후 다시 36번을 달았다. 또한 국가대표팀에서도 36번(1999~2002, 2013) 27번(2003), 25번(2006~2008)을 다는 등 오릭스 시절을 제외하면 내내 두 자릿수 등번호만 달았다. [33] 여담이지만 이 시즌에서 클라이맥스 시리즈에 진출 실패한 오릭스 성적이 가관인 것이 그것도 3위 세이부에게 승차없이 딱 1모 차이로 승률에서 밀려 탈락했다. [34] 그런데 이 해가 워낙 투신타병이었던지라 wRC+는 의외로 90대이다. 물론 이 성적이 잘한 건 아니다. [35] 리그 타율 꼴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