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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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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엽의 커리어는 크게 대한민국 시절과 일본 시절로 구분할 수 있다.
요약하자면 한국에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는 사상 최고의 홈런타자, 반면 일본에서는 3시즌[1]을 빼고 명성과 기대보다는 떨어졌다고 할수있다.[2]
2. 아마추어 시절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야구를 시작해 착실히 실력을 쌓아오다 1992년 경북고등학교에 입학한 이승엽은 1993년 투타에서 맹활약하며 12년만의 청룡기를 모교에 바치는데 일조했다. 대회 최우수투수상을 수상한 것은 그의 활약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 다만 고3때는 팔꿈치 부상[3]으로 큰 활약을 하지 못했다.
3. 프로 경력
3.1. 삼성 라이온즈 1기(1995~2003)
★★★ (1995~2003) |
KBO 골든글러브 1루수 부문 수상자 (1997~2003) |
이승엽이 있던 시절 삼성 라이온즈는 굉장히 타고투저의 경향이 심했다. 마운드가 약해서, 2001년까지는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한 적이 없었을 정도였다.
이승엽의 1997-2003년은 KBO 리그 타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성기 중 하나로 꼽히며 1기 시절의 통산 OPS는 무려 1을 넘는다. 그것도 서비스 타임인 95, 96년 성적을 합쳐서다.[4] 아무리 리그 전체적으로 이때가 타고투저였다지만, 매우 대단한 성적. 참고로 7년 연속 30홈런에 1기 9년 동안의 평균 홈런은 36개.
전성기인 1997-2003년의 슬래시 라인은 0.308/0.420/0.650/1.070으로, 단 한 해만 기록해도 MVP 후보가 될 만한 타격 성적을 7년 평균으로 남겼다. 또한 이 기간동안의 누적 wRC+는 무러 176.6이며 연평균 홈런 갯수는 43개. 한 시즌 경기가 133경기이던 시절에 달성한 기록이다. 이 기간이 2014-2018년 이전까지 KBO 최악의 타고투저였다지만, 실로 대단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겠다.[5]
KBO 1기 시절의 이승엽은 박찬호, 박세리와 더불어 단순히 스포츠 스타를 넘어서 Y2K 시절의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인물 중 한 명으로 꼽혔다.
3.1.1. 1995 시즌
1995년 신인 시절, 삼성 입단식에서 |
1995년 데뷔 초기의 앳된 모습 |
처음에는 한양대학교에 입학하는 것으로 가계약되어 있었으나, 수능에서 총점 40점 이하를 기록[6][7]하며 대학 진학 자격을 상실하여 어쩔수 없이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하게 된다. 이 해 처음 수능이 도입되었고 교육부의 규정에 따르면 체육특기자라 하더라도 수능시험 총점이 40점을 넘지 못하면 대학 입학이 불가능했다.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에 출연해 본인 이 프로입단을 위해 일부러 수능을 망쳐 37.5점을 맞았다고 밝혔다. 대학 오리엔테이션에 참가했는데 선배들이 술을 엄청나게 권하는 바람에 본인이 생각한 대학생활은 이게 아니라고 생각하고 1교시는 다 찍고 2교시부터 당구장으로 도망갔다고 한다. 이 증언은 한양대 입학 동기가 될 뻔한 김건덕에게서도 나왔던 말이다. 둘 다 한양대 입학을 위해서 합숙소에 잡혀 있었는데, 여기서 일부러 못보기로 의기투합해서 김건덕은 37점, 이승엽은 37.5점이 나왔는데 실업계인 경남상고를 나온 김건덕은 수능 점수랑 상관이 없어서 결국 대학을 가야했다. 이후 김건덕은 어깨부상으로 결국 프로지명을 받지 못했다.[8][9] 훗날 이 일화를 모티브로 한 뮤지컬 <너에게 빛의 속도로 간다.>가 대학로에서 공연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얘기는 당시 기사 등과 다른 사실이 많으며 당시 기사에서는 이승엽은 35점을 득했다고 되있으며, 기사 김건덕의 경우 37점을 맞아 커트라인을 못넘겼다고 말했으나 실제 기사에서는 커트라인을 넘겼다고 되있다. 기사 그리고 실업계 출신은 수능 커트라인과 상관없이 특기생 합격이라는 제도는 없었다. 당시에 체육특기생 중 98.9%가 수능 커트라인을 넘겨 대학에 진학했는데 이승엽만 프로를 가고 싶어 일부러 수능을 망쳤다는건 이해하기 힘들다. 한양대는 이승엽을 실업팀 현대 피닉스에 입단시킨 후 재수를 해서 영입을 하려고 했으나 삼성과 회동을 가진 뒤 이승엽을 놓아줬다.
경상중학교 재학 시절에는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고 경북고등학교 재학 시절에는 청룡기 대회에서 최우수투수상을 수상할 정도로 유망한 투수여서,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할 때에도 좌완 투수로 입단했다. 좋은 투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팀의 빈틈을 메꿔 줄 것으로 기대했으나, 경북고등학교 시절의 팔꿈치 부상으로 투수 훈련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다. (그래서)[10] 이미 군 면제를 받았던 상태 였지만 ...하지만 우용득[11] 감독과 박승호 타격코치는 이승엽에게 배팅 재능이 있음을 확인해[12] 스프링캠프에서 돌연 타자로 전향시켜, 1년간 타자로 기용하기로 계획을 변경한다. 여기에 우용득 감독은 한 수 더 떠 전년도에 완전히 지명타자로 전향한 양준혁을 우익수로 이동시키고 검증도 안 된 고졸 신인을 1루수[13][14]로 박았다.
대타로 데뷔전을 치른 이승엽은 LG 간판 김용수를 상대로 중전 안타를 때렸다. 1995년 데뷔 첫 시즌 타율 .285에 홈런 13개로 신인으로서는 놀라운 활약을 보였지만, 이동수에게 밀려서 신인왕 수상에는 실패했다.
1995년 5월 2일 광주 해태전에서 데뷔 첫 홈런을 치는 모습 |
3.1.2. 1996 시즌
이듬해인 1996년 백인천 감독이 부임했는데, 백인천 감독은 이승엽에게 외다리 타법을 전수해 주었고,[15] 1996년 2년차 시즌은 조정기를 보냈는데 첫 3할 타율을 기록했지만 홈런은 9개로 되려 한 자릿수로 줄어들었다.[16]이 시즌엔 이동수, 이만수와의 동시 기용을 위해 종종 좌익수로 나오기도 했다. 이만수가 지명타자, 이동수가 1루수를 보면 이승엽은 좌익수로 뛰는 식이었다. 가끔 이승엽이 1루를 보는 대신 이동수가 3루를 보는 경우도 있었다.
3.1.3. 1997 시즌
지난 2년 이미 고졸 신인치고 매우 훌륭한 성적[17] 으로 삼성 라이온즈의 주축 타자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받았고, 이 해 백인천의 집중 코칭으로 30홈런을 쳐내는 거포가 되며 만 21세의 어린 나이에 본격적으로 레전드의 반열에 들어서게 된다. 126경기 전 경기를 출전해 .329의 타율과 32홈런 114타점으로 특 A급 타자의 바로미터인 3할 30홈런 100타점을 모두 훌쩍 넘겼다. 170안타를 쳐내 최다안타 1위에 올랐으며, 홈런과 타점 또한 모두 1위. 또한 역대 최연소 홈런왕이었다. 타율만 2위였는데 이것도 1위였으면 일찌감치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할 뻔한 굉장한 시즌을 보냈다. 이 때부터 삼성 라이온즈의 화려한 타선의 중심축에 서게 되었다.1997년 5월에는 대구에서 LG 트윈스를 상대로 5:27이라는 역사적인 스코어를 포함하여 무려 3연전에서 49점을 내 LG를 완전히 박살내 버렸다. 여기서 나온 논란이 부정배트 논란.
참고로 이때까지 이승엽의 별명은 신해철이 이끈 밴드 N.EX.T의 노래인 ' 날아라 병아리'에서 나온 얄리 혹은 스나이퍼였다.[18] 참고로 이 스나이퍼라는 별명은 스포츠서울에서 공모를 통해 선정한 별명인데, 3할을 쳐내는 정교함과 필요할때 마다 나오는 클러치 능력 등으로 인해 붙여진 별명이라고 소개되었으며 한동안 이승엽의 별명으로 애용되었다. 하지만 후술할 활약으로 라이온킹이란 별명을 얻으면서 이 별명은 사실상 묻히게 되었고 이후 스나이퍼의 칭호는 이 분이 가져가게 된다.
장타 포텐이 터진 1997년 이후 이승엽은 명실상부한 한국프로야구의 홈런왕 신화를 만들어낸다. 특히 1997년부터 일본 이적 직전인 2003년까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홈런 30개 이상을 쳐냈다. 1998년, 2000년을 제외하고 다섯 번의 홈런왕을 차지했다. 특히 1997년에는 앞선 3시즌 동안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했던 삼성을 일약 포스트시즌에 복귀시킨 주역이 되었고, 이후로 삼성 라이온즈의 중심타자로 활약하게 된다.
3.1.4. 1998 시즌
1998년 7월 27일 대구 LG전에서 홈런을 치며 당시 월간 최다홈런 신기록(13개)을 기록한 이승엽. |
다만 스탯티즈 WAR을 보면 1998년 이승엽은 7.30, 타이론 우즈는 6.08로 꽤나 차이가 나며 우즈가 이승엽보다 앞선 건 사실상 홈런과 타점 밖에 없다. 현대 야구의 관점에서 보면 이승엽이 MVP를 뺏긴 게 억울할 수준으로, 투승타타가 대세였던 90년대 후반 당시에야 우즈가 골든 글러브를 못 탄 게 외국인 차별이라는 말이 나올 수 있었겠지만 세이버메트릭스가 발달한 현재로서는 딱히 외국인 차별이라고 보기 힘들게 됐다. 홈런 신기록 버프를 받은 선수가 통계적으로 더 훌륭한 성적을 거둔 경쟁자를 제쳤다는 점에서 보면 2003년 이승엽이 심정수를 제치고 MVP를 받은 구도와 유사하다. 차이가 있다면 2003년에는 이승엽이 수혜자였다면 1998년에는 이승엽이 피해자였다는 점 정도.
3.1.5. 1999 시즌
1999년, 전년도 홈런 경쟁을 펼쳤던 타이론 우즈와 함께 |
1999년 9월 30일 광주 해태전에서 54호 홈런을 친 모습 |
지난해 홈런왕 자리를 우즈에게 내주며 절치부심했던 그는 1999년 54홈런으로 1998년 당시 두산 용병이었던 타이론 우즈의 42개, 토종타자로서 장종훈이 세웠던 41개보다 무려 열 개 이상 많은 공을 담장 너머로 날리면서 그의 주가는 폭등하게 되었다.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홈런왕 이미지를 구축하기 시작. 1999년 5월이 특히 뜨거웠는데, 한 경기 홈런 3개를 밥먹듯 쳐내면서 순식간에 5월 말 합계 20개 중반대 홈런숫자를 기록했고, 8월 초에 장종훈과 우즈의 기록을 깨 버렸다. 그 해 왕정치의 기록을 깨뜨리고 60개 이상 칠 것이라는 추측까지도 나와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리고 홈런 기록을 새로 써나가던 이 시즌, 대구구장은 외야가 먼저 매진이 되고 사람이 더 많이 들어갔으며 잠자리채가 쫘악 깔려있었다.[19] 특히 1999년 한화 이글스와의 대구 홈 마지막 경기에서는 홈런성 타구가 한화의 용병 제이 데이비스에 의해 잡히자 팬들이 항의 차원에서 물병 등의 쓰레기를 투척했고 데이비스는 우산을 쓰고 외야에 서 있기도 했는데, 하필 그 시점에 이미 홈런 54개를 친 상태여서 더했다.[20][21] 결국 '99 이승엽은 출루율, 장타율, 홈런, 타점, 득점 5개 부분에서 1위를 달성해 총 5관왕으로 시즌을 끝마쳤다.
1999년 롯데와의 플레이오프 때는 홈런을 치며 활약했지만, 정작 자신의 동갑내기 임창용이 정규시즌 내내 너무 무리하게 등판한 결과 불을 지르면서...
3.1.6. 2000 시즌
2000년 롯데와의 준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홈런을 치고 난뒤. |
3.1.7. 2001 시즌
2001년 4월 6일 대구 한화전에서 자신의 윗대 홈런왕이던 장종훈의 통산 1000타점 기록을 축하해 주는 모습 |
2001년 6월 21일 최연소 200호 홈런을 기록한 모습 |
전 시즌에 이어 외다리 타법의 약점을 극복하지 못했던 모양인지 39개의 홈런을 기록했음에도 타율이 .276으로 더욱 떨어지며 위기가 계속됐다. 다만 OPS와 WAR은 오히려 전년도보다 올랐으며, wRC+는 전년도에 비해 2정도 하락했지만 그 하락한 성적도 펠릭스 호세 - 심재학 - 양준혁에 이은 4위였다.[22] 물론 국내 최고의 타자에서 국내에서 다섯 손가락에 드는 타자가 되었으니 미래를 알지 못하는 당시로선 하락세라는 위기감을 갖기엔 충분했다.[23]
하지만 2001년에 이승엽 인기는 매우 높았기때문에 신윤호를 상대로 1차투표에서 지고도 2차투표로 MVP를 수상한다. 당시 1차투표에는 신윤호가 우위였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과반수가 투표를 안하면 1, 2위를 두고 재투표가 되는 규칙이 있어서 재투표했고 신윤호, 이승엽을 뽑지 않은 기자들이 죄다 이승엽에 투표해서 이승엽이 MVP를 수상하게 된다. 이에 이승엽은 "이런 성적으로 MVP를 받아 부끄럽다."는 소감을 남겼을 정도로 이 시즌 이승엽의 MVP 수상은 다소 이례적이었다. 이후 타격폼 수정을 통해 위기를 돌파했다.
3.1.8. 2002 시즌
|
2001년 전까지는 혼자서 홈런을 치던 타자의 이미지가 강했다. 그렇다고 타자가 없던 것도 아닌게 1997년엔 양준혁(30홈런), 신동주(21홈런)가 버티고있었고, 1998년에도 여전히 양준혁이 27홈런을 치면서 뒤를 받쳤다. 1999년, 2000년엔 찰스 스미스(40홈런), 김기태 등이 중심에서 버텼고. 그러다 2001년 마해영이 들어오고 2002년 양준혁이 친정팀으로 돌아오면서 공포의 이마양 트리오 타선이 구축되었다.
시즌 전 2월 20일부터 3월 8일까지 메이저리그 시카고 컵스의 스프링캠프에 초청선수로 참여해 시범경기에도 출장했고, 11타수 3안타 2홈런[24] 5타점이라는 성적을 남기고 귀국했다.
2002년 0.323의 타율로 정확성을 회복하면서 동시에 홈런 개수도 47개로 늘리며 홈런왕[25] 2연패에 성공했다. 또한 득점, 타점, 장타율 모두 1위에 오르며 4관왕에 올랐다. MVP까지 수상하며 2년 연속 MVP와 개인 4번째 MVP 수상에 성공했다.
2002년 한국시리즈는 이승엽을 큰 무대에 강한 사나이로 격상시키는 계기가 되었다.[26] 6차전까지 20타수 2안타라는 극악의 타격 부진에 시달리던 이승엽이었지만 김응용 감독은 그를 믿고 계속 출전시키는
동점 쓰리런 홈런을 친 뒤 마해영과. |
그 뒤에 나온 마해영이 끝내기 백투백 홈런으로 경기를 끝낸 후, 그는 눈물을 보였다... |
마해영의 회고에 따르면 동점 쓰리런 홈런을 치고 더그아웃에 들어와서 "형 제발 끝내줘!"라고 했다고 한다. 그의 바람대로 마해영은 곧바로 한국시리즈 역사상 길이 남을 끝내기 백투백 홈런으로 정말로 시리즈를 끝냈다!!!
3.1.9. 2003 시즌
2003년 홈런 라이벌 심정수와 함께 |
2003년 6월 22일 대구 SK전에서 김원형을 상대로 세계 최연소 300홈런[28]을 기록하고 들어오는 모습. 그리고 이승엽은 같은 경기에서 끝내기 만루홈런으로 301호 홈런을 쳐낸다. |
그리고 2003년에는 엄청난 대기록을 세우게 된다. 5월 15홈런을 기록하였고, 6월 14홈런을 기록하는 등 한국프로야구를 통틀어 가장 화끈한 전반기를 보낸 이승엽은 시즌 초반부터 아시아 최다홈런을 달성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리고 후반기 주춤했지만, 결국 시즌 종료 시점에서 0.301의 타율에 당시 아시아 신기록이자 현재 한국프로야구 한 시즌 최다 홈런인 56홈런, 한 시즌 최다타점인 144타점을 달성하였다. 그리고 같은 시기 심정수와 펼쳐진 불타는 홈런왕 라이벌리는 2002년의 월드컵 열풍과 맞물려 침체되었던 한국프로야구의 흥행요소였으며, 이 둘은 2년 연속(2002~2003)으로 3할-40홈런-100타점을 찍었다. 그러나 심정수는 세부 스탯에서 앞섬에도 홈런왕을 하지 못하는 바람에 콩라인이 되었고 이승엽은 홈런왕과 MVP 2연패에 성공함으로서 승자로 기록될 수 있었다.[29]
이 시즌에는 홈런 신기록에 임박하자 3년 연속 꼴찌를 기록해 늘 관중석이 텅텅 비었던 최하위 롯데의 사직구장도 예외 없이 포함해서, 삼성의 원정경기에서도 관중들이 죄다 잠자리채를 들고 우측 외야부터 먼저 몰리는 진풍경을 볼 수 있었다.
이승엽 고의사구 당시 난동이 일어난 사직구장의 모습 |
그 절정은 2003년 9월 27일 사직 야구장에서 열린 롯데와의 원정 경기. 당시 프로야구 침체기였던데다 한창 하위권을 달리던 롯데의 성적 때문에 사직 야구장은 주말에도 텅텅 비어있을 정도였는데[30] 이날은 이승엽의 홈런 신기록이 나올 걸 의식해 간만에 만원 관중이 들어선 날이었다. 그런데 경기 종반이던 8회 초 이승엽의 4번째 타석에서[31] 롯데가 승부처라고 판단해 이승엽을 고의사구로 내보내자 사직 관중들이 오히려 열이 받아 경기장에 불을 지르고 그라운드에 오물을 투척하거나 난입하는 등 소요사태를 겪기도 했을 정도였다.[32] 이때의 충격이 너무 커서인지 롯데 구단은 이승엽의 은퇴 투어 때 진짜 순금으로 만든 '황금 잠자리채' 모형을 선물했다.
2003년 10월 2일 한국프로야구 홈런 신기록 (56호) 달성 |
히스토리 39 이승엽 56홈런, 위대한 전설의 탄생
현재까지도 한국프로야구 단일시즌 최다 홈런 1위 기록이며 동양인 단일시즌 최다 홈런 공동 1위 기록이다. 일본을 포함한 아시아 야구에서도 2013년 블라디미르 발렌틴이 깨뜨리기 이전까지 최다였다. 3루 베이스를 돌고 있는 이승엽을 축하해주는 코치는 류중일이다.
[38]
2003년 이마양 트리오는 합계 127홈런 356타점을 쳐내기도 했다.
여담으로 한창 홈런왕으로 전성기를 보내고 있던 시절에도 " 투수를 했으면 어땠을까?"하는 미련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 때 "너는 한국 최고의 타자."라고 치켜세워주며 마음을 다잡아 준 사람은 前 KIA 타이거즈 감독 김기태.[39]
3.2. 일본프로야구 시절(2004~2011)
|
자세한 내용은 이승엽/선수 경력/일본프로야구 문서 참고하십시오. |
3.3. 삼성 라이온즈 2기(2012~2017)
★★★★ (2012~20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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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엽 삼성 2기 시절 응원가 |
2011년 12월 5일, 연봉 8억+옵션 3억을 포함한 총액 11억원에 계약했다.
2012년 복귀 첫 해 시범경기 성적이 타율 0.429 2홈런 7타점으로 거포에서 이똑딱이라는 별명이 붙었지만 아주 긍정적인 성적이라 수많은 영양사들과 삼성팬들을 설레게 하고 있는 중.
3.3.1. 2012 시즌
KBO 골든글러브 지명타자 부문 수상자 (20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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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7월 29일 목동 넥센전에서 한일 통산 500호 홈런을 치고 그라운드를 도는 모습. |
자세한 내용은 이승엽/선수 경력/2012년 문서 참고하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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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복귀 후 첫 시즌. 클래스는 영원하다는 것을 보여주며 통산 8번째 골든글러브와 10년만에 첫 한국시리즈 MVP를 차지하였다.
3.3.2. 2013 시즌
|
2013년 한국프로야구 통산 최다홈런 신기록(352호) 달성.[40] |
자세한 내용은 이승엽/선수 경력/2013년 문서 참고하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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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2호 홈런을 때려내며 통산 최다홈런 신기록을 쓰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부진하며 이승엽의 커리어에서 가장 좋지못한 성적을 기록한 시즌. 2013 시즌 이승엽의 wRC+는 83.1로 KBO 커리어에서 유일하게 평균을 밑돌았다.
3.3.3. 2014 시즌
KBO 골든글러브 지명타자 부문 수상자 (20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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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11일 NC전에서 역대 최고령 30호 홈런을 기록하는 모습. |
자세한 내용은 이승엽/선수 경력/2014년 문서 참고하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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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귀 첫 시즌에 비해 클래식 스탯은 향상됐지만, 리그의 타고투저 광풍에 견줘보면 실제 생산성은 2012시즌에 비해서는 손색이 있었다. 그러나 한국 나이 39세에 3할-30홈런-100타점을 기록한 것은 무시할 수 없는 사항.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조.
한국시리즈가 끝나고 이 형님도 나이가 들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말았다. 사진은 나이가 들어 샴페인을 못 따 무차별 세례를 받고 있는 이승엽. |
시즌 종료 후, 9번째 골든글러브를 획득하며 KBO 역대 최다 골든글러브 수상자가 되었다.
3.3.4. 2015 시즌
KBO 골든글러브 지명타자 부문 수상자 (20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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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6월 3일 KBO 리그 개인통산 400홈런 달성의 순간. |
자세한 내용은 이승엽/선수 경력/2015년 문서 참고하십시오. |
바로 지금. 이 위대한 순간의 증인이 될 수 있어 행복합니다!
ㅡ 2015년 6월 3일 포항 롯데전에서 KBO리그 최초 개인통산 400홈런 달성 후 정우영 캐스터의 멘트
ㅡ 2015년 6월 3일 포항 롯데전에서 KBO리그 최초 개인통산 400홈런 달성 후 정우영 캐스터의 멘트
KBO 최초의 두 자릿수 골든글러브 수상자가 되었지만, 수상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내의 해당 항목 참조.
3.3.5. 2016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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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9월 14일 대구 한화전에서 한일 통산 600호 홈런을 기록하는 모습. |
자세한 내용은 이승엽/선수 경력/2016년 문서 참고하십시오. |
"
1995년
5월 2일 통산 첫 번째 홈런, 7806일의 기다림! 담장을 넘었다는 600번째 외침! 이제 대한민국에도
600홈런 타자가 있습니다!
전설로에서 전설로 가는 600호 홈런을 쏘아올린 전설의 타자 국민타자 이승엽, 우리는 이승엽의 시대를 함께 살았습니다!"
- 김민수 SPOTV 캐스터(9월 14일 이승엽의 한일통산 600호 홈런 후 멘트)
- 김민수 SPOTV 캐스터(9월 14일 이승엽의 한일통산 600호 홈런 후 멘트)
3.3.6. 2017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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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3일 은퇴식에서 |
자세한 내용은 이승엽/선수 경력/2017년 문서 참고하십시오. |
이승엽의 현역 마지막 시즌
4. 국가대표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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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한 내용은 이승엽/선수 경력/국가대표 문서 참고하십시오. |
5. 주요 기록
5.1. 기록 달성
- 2000년
- 인천 SK전, 최연소-최소경기 통산 500타점
6. 수상 경력
6.1. K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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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엽의 KBO 수상 경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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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 | KBO MVP / 골든글러브 (1루수 부문) / 안타 1위 / 홈런 1위 / 타점 1위 |
1998 | 골든글러브 (1루수 부문) / 장타율 1위 / 득점 1위 |
1999 | KBO MVP / 골든글러브 (1루수 부문) / 홈런 1위 / 타점 1위 / 득점 1위 / 장타율 1위 / 출루율 1위 |
2000 | 골든글러브 (1루수 부문) / 득점 1위 |
2001 | KBO MVP / 골든글러브 (1루수 부문) / 홈런 1위 |
2002 | KBO MVP / 골든글러브 (1루수 부문) / 홈런 1위 / 타점 1위 / 득점 1위 / 장타율 1위 / 출루율 1위 / 한국시리즈 우승 |
2003 | KBO MVP / 골든글러브 (1루수 부문) / 홈런 1위 / 타점 1위 / 득점 1위 |
2012 | 골든글러브 (지명타자 부문) / 한국시리즈 우승 / 한국시리즈 MVP |
2013 | 한국시리즈 우승 |
2014 | 골든글러브 (지명타자 부문) / 한국시리즈 우승 |
2015 | 골든글러브 (지명타자 부문) |
6.2. NP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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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엽의 NPB 수상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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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 일본시리즈 우승 / 일본시리즈 우수타자상 |
2009 | 일본시리즈 우승 |
6.3. 국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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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엽의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수상 경력 | |
2000 | 2000 시드니 올림픽 야구 종목 동메달 |
2002 |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야구 종목 금메달 |
2006 |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4강 |
2008 | 2008 베이징 올림픽 야구 종목 금메달 |
7. 연도별 성적
이승엽 개인 통산 기록 | |||||||||||||||||||
<rowcolor=#fff> 시즌 | 경기 | 타석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4사구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
23시즌 | 2703 | 9800 | 2842 | 602 | 36 | 626 | 1937 | 1749 | 75 | 1331 | .290 | .372 | .550 | .921 |
7.1. KBO
- 푸른 글씨는 통산 1위, 붉은 글씨는 시즌 1위, 진한 글씨는 시즌 5위 이내.
역대 기록 | |||||||||||||||||||
<rowcolor=#fff> 연도 | 나이 | 팀 | 경기 | 타석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볼넷 | 삼진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wRC+ | WAR* |
1995 | 19 | 삼성 | 121 | 411 | 104 |
29 (3위) |
1 | 13 | 73 | 55 | 0 | 33 | 54 | .285 | .345 | .477 | .822 | 136 | 2.77 |
1996 | 20 | 122 | 504 | 139 |
32 (2위) |
6 (2위) |
9 |
76 (3위) |
57 | 4 | 34 | 42 | .303 | .354 | .458 | .811 | 134 | 3.65 | |
1997 | 21 |
126 (1위) |
577 (1위) |
170 (1위) |
37 (1위) |
3 |
32 (1위) |
114 (1위) |
96 (3위) |
5 | 49 | 79 |
.329 (2위) |
.391 |
.598 (4위) |
.988 (5위) |
172 (5위) |
6.78 (5위) |
|
1998 | 22 |
126 (1위) |
568 (1위) |
146 (3위) |
32 (3위) |
2 |
38 (2위) |
102 (2위) |
100 (1위) |
0 |
78 (4위) |
97 | .306 |
.404 (3위) |
.621 (1위) |
1.024 (3위) |
175 (4위) |
6.73 (2위) |
|
1999 | 23 |
132 (1위) |
614 (1위) |
157 |
33 (5위) |
2 |
54 (1위) |
123 (1위) |
128 (1위) |
10 |
112 (1위) |
114 (4위) |
.323 |
.458 (1위) |
.733 (1위) |
1.190 (1위) |
191 (1위) |
8.91 (1위) |
|
2000 | 24 | 125 | 544 | 133 |
33 (2위) |
0 |
36 (4위) |
95 |
108 (1위) |
4 |
80 (4위) |
113 | .293 | .404 |
.604 (5위) |
1.008 (5위) |
157 (5위) |
5.18 | |
2001 | 25 | 127 |
574 (4위) |
128 |
31 (3위) |
2 |
39 (1위) |
95 |
101 (2위) |
4 |
96 (2위) |
130 (2위) |
.276 | .412 |
.605 (2위) |
1.017 (3위) |
155 (4위) |
5.52 (5위) |
|
2002 | 26 |
133 (1위) |
617 (1위) |
165 (2위) |
42 (1위) |
2 |
47 (1위) |
126 (1위) |
123 (1위) |
1 |
89 (1위) |
109 |
.323 (3위) |
.436 (2위) |
.689 (1위) |
1.125 (1위) |
198 (1위) |
8.96 (1위) |
|
2003 | 27 | 131[43] |
596 (4위) |
144 | 23 | 0 |
56 (1위)[44] |
144 (1위) |
115 (1위) |
7 |
101 (2위) |
89 (5위) |
.301 |
.428 (3위) |
.699 (2위) |
1.127 (2위) |
191 (2위) |
8.39 (2위) |
|
2012 | 36 | 삼성 | 126 |
556 (4위) |
150 (4위) |
28 | 2 |
21 (5위) |
85 (5위) |
84 (3위) |
6 | 59 | 101 | .307 | .384 | .502 | .886 | 157 | 5.47 |
2013 | 37 | 111 | 483 | 112 | 43 | 0 | 13 | 69 | 62 | 3 | 30 | 94 | .253 | .298 | .395 | .693 | 83 | 0.37 | |
2014 | 38 | 127 | 548 | 156 | 33 | 0 |
32 (4위) |
101 (5위) |
83 | 5 | 40 | 77 | .308 | .358 | .557 | .915 | 118 | 2.42 | |
2015 | 39 | 122 | 522 | 156 | 44 | 1 | 26 | 90 | 87 | 2 | 40 | 71 | .332 | .387 | .562 | .949 | 140 | 3.14 | |
2016 | 40 | 142 | 623 | 164 | 32 | 2 | 27 | 118 | 91 | 5 | 65 | 89 | .303 | .380 | .518 | .899 | 123 | 2.62 | |
2017 | 41 | 135 | 533 | 132 | 35 | 5 | 24 | 87 | 65 | 1 | 47 | 85 | .280 | .347 | .517 | .864 | 111 | 1.18 | |
KBO 통산 (15시즌) |
1906 | 7132 | 2156 |
464 (2위) |
28 |
467 (2위) |
1498 (3위) |
1355 (3위) |
57 | 953 | 1344 | .302 | .389 |
.572 (1위) |
.960 (1위) |
150 |
72.08 (3위) |
7.2. NPB
- 붉은 글씨는 시즌 1위(리그 기준), 진한 글씨는 시즌 5위 이내.
역대 기록 | |||||||||||||||||||
<rowcolor=#ffffff> 연도 | 나이 | 팀 | 경기수 | 타석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볼넷 | 삼진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wRC+ | WAR |
2004 | 28 | 치바 롯데 | 100 | 382 | 80 | 20 | 4 | 14 | 50 | 50 | 1 | 42 | 88 | .240 | .328 | .450 | .779 | 97 | 0.6 |
2005 | 29 | 117 | 445 | 106 | 25 | 2 | 30 | 82 | 64 | 5 | 33 | 79 | .260 | .315 | .551 | .866 | 131 | 2.4 | |
<rowcolor=#ffffff> 연도 | 나이 | 팀 | 경기수 | 타석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볼넷 | 삼진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wRC+ | WAR |
2006 | 30 | 요미우리 | 143 | 592 | 169 |
30 (4위) |
0 |
41 (2위) |
108 (4위) |
101 (4위) |
5 | 56 |
126 (4위) |
.323 (2위) |
.389 |
.615 (3위) |
1.003 (3위) |
171 (3위) |
6.8 (3위) |
2007 | 31 | 137 | 583 | 148 | 29 | 2 | 30 | 74 | 84 | 4 | 38 |
119 (4위) |
.274 | .322 | .501 | .823 | 118 | 3.2 | |
2008 | 32 | 45 | 170 | 38 | 4 | 0 | 8 | 27 | 21 | 1 | 11 | 6 | .248 | .324 | .431 | .755 | 103 | 0.9 | |
2009 | 33 | 77 | 257 | 51 | 9 | 0 | 16 | 36 | 33 | 1 | 28 | 65 | .229 | .327 | .484 | .811 | 120 | 1.8 | |
2010 | 34 | 56 | 108 | 15 | 1 | 0 | 5 | 11 | 13 | 1 | 12 | 26 | .163 | .280 | .337 | .617 | 61 | -0.2 | |
<rowcolor=#ffffff> 연도 | 나이 | 팀 | 경기수 | 타석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볼넷 | 삼진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wRC+ | WAR |
2011 | 35 | 오릭스 | 122 | 432 | 79 | 20 | 0 | 15 | 51 | 28 | 0 | 32 | 121 | .201 | .257 | .365 | .622 | 89 | 0.1 |
NPB 통산 (8시즌) |
797 | 2668 | 686 | 138 | 8 | 159 | 439 | 394 | 18 | 252 | 661 | .257 | .324 | .494 | .818 | 121 | 15.6 |
[1]
한 해는 당연히 2006년이고, 나머지는 시즌 30홈런을 치고 일본시리즈 우수 선수상을 수상한 2005년과 마지막으로 30홈런을 쳤던 2007년. 다만 같은 30홈런이라도 플래툰 출장 속에 투수친화 구장을 홈구장으로 쓰며 30홈런을 기록하고 일본시리즈에서도 대활약한 2005년이 더 고평가를 받는다. 무엇보다 2007년은 성적 하락의 분기점이 되는 해다.
[2]
일본 생활 8년동안 좋았다고 할 시즌은 딱 3시즌밖에 없으며 마지막 3~4년은 정말 망했다 수준임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8년 통산 성적은 타율 .257, 연평균 홈런 약 20개(19.875), OPS .818로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 이는 2006년에 리그를 씹어먹을 정도로 워낙 잘한 것도 있었고, 부진하던 시기에는 2군에 많이 내려가서 1군 기록을 누적하면 많이 완화되기 때문. 대체로 한국팬들은
안 좋았던 시기를, 일본팬들은 좋았던 시기를 더 많이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
[3]
이 부상이 군 면제의 원인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 고교 때부터 팔꿈치 부상을 안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고교 시절 경기가 있는 날이면 항상 진통제를 먹고 경기에 나섰다고 한다. 실제로 프로 입단 이후 초창기에도 이 때 입은 팔꿈치 부상으로 상당히 고생을 했다. 과거 MBC에서 방송했던 다큐멘터리 성공시대에서도 언급된 내용. 이 후유증으로 인해 지금도 왼쪽 팔이 펴지지 않는다고 한다.
[4]
사실 95-96시즌 성적도 이게 이승엽이라 초라해보이는 것이지, 고졸 신인 선수가 냈다기에는 참으로 대단한 성적이다. 실제로 21세 이하 누적 기록같은 기록에서 이승엽은 30년 전 기록임에도 최상위권에 있다. 리그 전체 역사를 통틀어서도 막 스무살이 된 고졸 신인급 연차의 선수가 저 정도로 훌륭한 성적을 낸 것은 이정후, 김현수같은 먼치킨급 교타자 사례를 제외하면 없다.
[5]
2024년 기준으로 KBO 역대급 성적을 남긴
김도영이 타격만 봤을때 이 이승엽의 7년 평균 성적과 비슷한 수준의 성적을 남겼고, 삼성 라이온즈로 한정해 보아도 2020년대 삼성 최고의 타격 시즌인 2022년
피렐라나 2024년
구자욱 등은 모두 이 기간 이승엽 7년 평균에 미치지도 못한다. 이것만으로 이 시절의 이승엽이 얼마나 대단한 선수였는지 알 수 있는 셈이다.
[6]
당시 수능 총점은 200점.
[7]
일부러 그랬다고 한다.
[8]
김건덕은 정말 비운의 선수였는데, 고교시절의 혹사로 인해 한양대 입학 후 1년 동안은 투수로 등판하지 않기로 했으나 국제대회에 참가하면서 다시 공을 던지면서 부상이 악화, 투수로는 더 뛰지 못하고 타자로 전향하지만, 프로 지명을 받지 못한다. 그 후 삼성에서 연습생 신분으로 데려가서 경산 볼파크에서 훈련을 받던 도중 군입대 영장을 받아 군면제를 위해 체중을 늘리지만, 규정의 변화로 결국 현역으로 입대한다. 그 때 어려웠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산업체로 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손가락이 잘리는 부상을 당해 결국 프로 생활을 접게 되었다고 한다.(추가로 부상으로 인해 산업체에서 일을 못하게 되면서 구청에서 추가로 공익근무를 해야 했다.) 그 후 야구배트를 파는 영업사원으로 있다가 춘천고, 부경고 코치를 거쳐 리틀야구단 감독으로 지내다가 2016년 11월 17일에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고교시절에는 이승엽하고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는데, 엄청나게 일이 안 풀려 비운의 선수로 남고 만 것이다.
[9]
김건덕의 대학행을 추진한건 그의 아버지였는데 이후 아들의 인생을 망쳤다며 한평생 자책하며 술만 마시다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10]
척추분리증이 있는 선수이므로 이게 원인일 가능성도 있다.
[11]
이승엽뿐만 아니라 투수 유망주였던
이대호를 타자로 전향시킨 것도
우용득 당시 롯데 감독의 작품이다.
이대호도 어깨 부상이 있었다.
[12]
사실 최우수 투수상을 수상했던 청룡기 결승전에서는 결승홈런도 쳤었고, 1994년 세계청소년 대회 국가대표팀에 뽑혔을 때도 팔꿈치 부상으로 타자로만 활약해 홈런상과 득점상을 수상한 바 있다.
[13]
타격에 비해 수비가 약했던 이동수가 1루수로 나올 때는 좌익수를 보기도 했다. 또는
양준혁이 좌익수를 서기도 했는데 1993년부터 주전 우익수로 복귀한
이종두가 어깨와 허리통증을 호소한 데다가 양준혁과 함께 또다른 1루수 요원에 속한
김성래는 1995년 시범경기 도중 장단지 부상으로 전열에서 이탈했고 전년도에 1루수로 포지션을 바꾼
이만수 역시 당시에 노쇠 기미를 보여왔던 탓에 이승엽을 1루수로 전향시키기도 했으며 좌완투수가 선발에서 나올 당시에는 이만수가 1루수를 보기도 했다.
[14]
양준혁이 본인 유튜브에서 밝힌 일화로는 당시 양준혁이 외야로 전향 하면서 1루 자리가 비게 되었고, 당시
우용득 감독이 팀 사정이 좋지 않다. 1년만 타자를 해봐라 하다가 안되면 너가 원하는 투수를 하면 되는거 아니냐라고 말하게 되면서 타자로 전향을 하게 된거라고 일화를 언급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승엽도 잘 모를것 같다고 밝히기도 하였다.
[15]
이것 하나만으로도
백인천 감독은 삼성에서 아주 큰 일을 해냈다고 할 수도 있다. 사실 백인천은 롯데 감독 시절 단순한 성적 부진을 넘어서 태업을 저지른 큰 과오가 있기에 여러모로 개인의 거대한 업적에 비해 야구계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분위기였는데, “
백인천이 롯데 감독 이후에도
대한민국에서 야구로 먹고 사는 것의 8할은 이승엽 덕분이다.”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 나머지 2할은 82년 기록한 4할. 물론 현재는 여전히 이미지가 나쁜 롯데 팬덤한테를 제외하면 대부분 '마지막 4할 타자' 정도로 알려져있다.
[16]
한국에서의 유일한 한자릿수 홈런을 기록한 시즌이다.
[17]
이정후, 김현수같은 괴물을 제외하면 역대 최상위권의 고졸신인 성적을 올렸다.
[18]
1995년 팬북에선 얄리로 소개됨
[19]
2003 시즌도 마찬가지
[20]
이 해 삼성과 한화는 매직리그 1위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으며 대구 마지막 홈 경기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최후반부 경기였다. 따라서 한화는 이승엽에게 홈런을 절대로 양보할 수 없었다. 실제로 삼성이 최종전에서 한화를 이기고 1경기차로 앞선 1위를 차지했다.
[21]
특히 당시 아시아 홈런 최괴록이 55개였고 타이기록을 눈앞에 둔 마지막 경기여서 관중의 난동이 거셀 수 바에 없었다.
[22]
규정타석을 채우지 못한
김태균을 포함한다면 5위.
[23]
시즌 중반 이승엽이 계속 부진하자
김응룡 감독이 이승엽을 6번타순으로 내리기도 하고, 인터뷰를 통해 공개적으로 질책하기도 했다.
[24]
여담이지만 이 때 친 2개의 홈런 중 1개는 당시
애너하임 에인절스 소속 마이너리거이자 훗날
롯데 자이언츠에서 뛰는
크리스 부첵을 상대로 기록했다.
[25]
심정수와 홈런 46개로 공동홈런왕 수상이 유력했으나 정규시즌 마지막 경기 연장에 돌입 후 마지막 타석에서 47호 홈런을 쳐서 단독홈런왕을 차지했다.
[26]
사실 전년도 한국시리즈에서 타율 0.375, 3홈런 7타점 WAR 0.56으로 맹활약했으나 두산 타선에 마운드가 무너지면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27]
이미 2000 시드니 올림픽 때 그렇게 고집을 피워가며 절대로 빼지 않았다. 김경문의 스타일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사실 어떤 감독이든 잠깐 못 한다고 홈런을 칠 수 있는 팀의 중심 타자를 갑자기 빼는 짓은 할 수도 없고 하지도 않는다.
[28]
종전의 기록은 약쟁이
알렉스 로드리게스의 만 27세 249일
[29]
다만 현재에는 2003년 한 시즌만큼은 심정수의 우위라고 보는 팬들이 대다수이다. 2003년 심정수는 2015년 에릭 테임즈와 함께 21세기 최고의 타격 시즌으로 여겨진다. 물론 이것도 결과론인 것이 이승엽과 심정수의 홈런 격차는 시즌 중반까지만 해도 10개 이상의 차이가 있었다. 이승엽이 56호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홈런도 거의 다 따라잡히고 세부스탯도 더 나빠지게 된 것이다.
[30]
이 때 롯데의 관중 동원력이 얼마나 처참했냐면 전년도인 2002년 10월 19일 홈 최종전에 들어온 관중은 겨우 69명. 심지어 이날은 평일도 아니고 토요일이었으니 말 다 했다.
[31]
앞선 3번의 타석에서 이승엽의 기록은 삼진-뜬공-땅볼이었다.
[32]
당시 경기가 무려 1시간 30분이나 중단됐고, 그럼에도 난동이 지속되자 전투경찰까지 출동하고 결국 당시 롯데 감독대행이던
김용철이 직접 마이크를 잡고 관중들에게 사과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33]
이 해 홈런왕을 처음으로 차지했다. 2위는 30개를 기록한
이종범.
[34]
이 해
타이론 우즈가 기존
장종훈의 시즌 41홈런을 경신하여 42개를 쳤다.
[35]
타이론 우즈의 KBO 홈런 신기록을 바로 이듬해에 경신.
[36]
홈런왕은 40개를 날린
박경완.
[37]
이른바 "아시아 홈런 신기록". 자신의 KBO 신기록을 자신이 갈아치움. 이미 전반기 끝나갈 시점에 홈런 40개를 돌파했었다. 다만 2013년에
NPB의
블라디미르 발렌틴이 57홈런을 치면서 아시아 홈런 신기록 타이틀은 발렌틴에게로 넘어갔고 아시아 최초로 60홈런을 돌파하면서 시즌을 마감하였다.
[38]
위 사진에 1993년도 트리오라고 적혀져있는 것은 방송 오타다.
[39]
삼성에서 뛰었을 때 주장을 역임했으며, 이승엽이 그를 보스처럼 따랐다고 한다.
[40]
참고로
이 분은
2002년 한국시리즈 물론
2012년 한국시리즈 이어 이번에도 당했다.
[41]
이 기록은 9년 후
류현진이 신인왕과 MVP를 동시에 석권하면서 경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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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의 50%이상을 KBO에서 기록한 선수기준으로 네번째. 현재 국내 최고기록은 양준혁의 2318안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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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즌 연속 전 경기 출장에 도전 중이었는데, 2003년 8월 9일
서승화와 벤치클리어링 난투극 사건으로 2경기 출장정지 징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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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역대 단일시즌 최다 홈런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