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a60303, #DB1F26 20%, #DB1F26 80%, #a60303); color: #fff;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제1·2대 고병간 |
제3대 김상열 |
제4대 계철순 |
제5대 박정기 |
제6·7대 김영희 |
제8대 서돈각 |
제9대 한명수 |
제10대 서원섭 |
제11대 천시권 |
제12대 김익동 |
|
제15대 김달웅 |
제16대 노동일 |
제17대 함인석 |
제18대 김상동 |
||
제19대 홍원화 |
제20대 허영우 |
역임한 직위 | |||||||||||||||||||||
|
제8대 경북대학교 총장 서돈각 徐燉珏 | Suh, Ton Kak |
|
|
|
<colbgcolor=#DB1F26><colcolor=#fff> 자 / 호 | 상춘(相春) / 무애(無碍) |
본관 | 달성 서씨[1] |
출생 | 1920년 11월 3일 |
경상북도
달성군 (현 대구광역시 동구 지역)[2] |
|
사망 | 2004년 8월 24일 (향년 83세) |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회기동 경희의료원 | |
종교 | 불교 |
가족 | 부인 김명갑[3], 슬하 2남 1녀 |
학력 |
경북중학교 (졸업) 마쓰에고등학교 ( 문과 갑류 / 졸업) 교토제국대학 ( 법학부 / 수료) 경성대학 법문학부 ( 법학 46 / 학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법학 / 석사) 서던 메소디스트 대학교 대학원 ( 법학 / 석사) 경희대학교 대학원 ( 법학 / 박사[4]) |
경력 |
경북대학교 제8대 총장 대한민국 학술원 회장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서울대학교 학생처장 서울대학교 사법대학원 원장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학장 동국대학교 총장 국민대학교 교수 경희대학교 명예교수 한국보험학회 회장 한국상사법학회 회장 한국해법학회 회장 한국공인회계사회 회장 한국법학교수회 회장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법학자.2. 생애
1920년 11월 3일 경상북도 달성군(現 대구광역시 동구 지역)에서 아버지 효당(曉堂) 서병화(徐炳和, 1883. 9 ~ 1949. 7. 23)와 어머니 일직 손씨 손옥향(孫玉香, ? ~ 1962. 12. 5)[5] 사이에서 3남 3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938년 경북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하여 마쓰에고등학교(現 시마네대학) 문과 을류를 졸업했다. 이후 교토제국대학 법학부에 입학했으나 재학 중에 학병으로 징집되어 중국 남방 전선에 배치되었고, 1945년 종전을 맞았다.[6]이후 귀국해 1946년 4월 경성대학 법문학부 법학과(46학번)에 입학해 1948년 4월 졸업하고, 1948년 9월 서울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해 1951년 8월 상법 전공으로 법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1955년 9월 미국 서던 메소디스트 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해 1956년 5월 미국법 전공으로 법학 석사, 1965년 경희대학교 대학원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각각 취득했다.
1949년 12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조교에 임용되었고, 1951년 12월 전임강사로 승진했다. 1952년 12월에는 상법 및 법철학 전공 조교수에 취임했으며, 1959년 9월 부교수, 1962년 8월 교수로 각각 승진했다. 이 사이 1968년 8월부터 1969년 3월까지 서울대학교 학생처장, 1969년 3월부터 1970년 3월까지 사법대학원장, 1970년 3월부터 1972년 5월까지 법과대학 학장 등을 지냈다. 또한 1966년 5월부터 1969년 5월까지 한국보험학회 회장, 1967년 12월부터 1969년 12월까지 국제법률가협회 회장, 1968년 1월부터 1971년 4월까지 한국법학원 부원장, 1970년 4월부터 1971년 4월까지 한국공인회계사회 회장, 1970년 5월부터 1979년 9월까지 한국법학교수회 회장, 1971년 8월부터 1979년 7월까지 한국상사법학회 회장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1972년 5월 제7대 동국대학교 총장으로 취임하여 1974년 6월까지 재임하였고, 그 사이 1972년 5월부터 1974년 8월까지 동국대학교 대학원 교수를 겸임했다. 1974년 9월부터 국민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다가 1979년 2월 21일 제8대 경북대학교 총장에 취임하였다. 그 사이 1978년부터 1991년까지 한국해법회 회장, 1978년 8월부터 1989년 2월까지 한국해법학회 회장 등을 지냈다.
1981년 3월 6일 경북대학교 총장직을 사퇴한 뒤 1981년 9월 국민대학교 교수직에 복귀했으며, 같은 해 8월 12일 대한민국 학술원 인문사회과학부 제4분과 회원에 선출되었다. 1982년부터 1991년까지 법 및 사회철학 한국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1986년 2월 국민대학교에서 정년퇴직하였으며 1986년 9월 경희대학교 명예교수로 위촉되었다. 1988년에는 대한민국 학술원 회장으로 취임하여 4년간 봉직하였다. 1990년 12월부터 1996년까지 한국중재학회 회장을 지냈다.
2004년 8월 24일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회기동 경희의료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하였다. #
3. 연구 활동
전공분야는 상법, 법철학이다. 특히 미국 상법 연구의 선구자로 평가받으며, 미국상법원리를 한국의 상법에 도입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상법제도심의위원과 개정심의위원을 지냈다. 이 시기 한국의 상법체계가 제대로 정비되지 않았던 시점이었는데, 상법의 제정과 개정 등 입법활동에 참여하고 교과서, 주석서를 집필하여 한국 상법학을 정립한 연구자이다.상법학 분야 뿐만 아니라 미국법에 대한 교과서를 번역하였고, 독일의 법철학교과서도 번역하였다. 법철학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국제법 및 사회철학회 세계학회의 집행위원을 역임하였으며, 법철학과 법학분야의 국제적 교류와 발전에 기여하였다.
1953년 처음으로 『상법(총론, 사회법)』(세문사, 1953)을 출판하였고, 그밖에 『유가증권법』(상, 하), 『신고상법』(법문사, 1960), 『상법연구』제1권(법문사, 1962), 『신상법』(법문사, 1962), 『상법강의』상,하(법문사, 1963),『주식신상법통람』(법통사, 1963),『축조회사 정리해설법』(법문사, 1964), 『신주식회사법의 기본문제』(법문사, 1965), 『상법대의』(법문사, 1966), 『상법예해』(상, 하)(국민서관, 1966), 『제2전정 상법강의』상,하(법문사, 1975), 『전정 상법대의』(법문사, 1978), 『상법연구』제2권(법문사, 1980), 『주식어음법, 수표법』(육법사, 1981), 『역주 개정 사법토론』(1994), 『제4전정 상법가의 회하권』(1996) 등을 남겼다.
이 밖에도 한국보험학회 회장, 국제법률가협회 회장, 한국공인회계사회 회장, 한국법학교수회 회장, 한국상사법학회 회장, 한국해법학회 회장, 법 및 사회철학 한국학회 회장, 한국중재학회 회장 등의 학회 활동을 활발히 하였다.
이와 같은 연구업적을 인정받아 1981년 학자로서는 최고의 영예라 할 수 있는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아울러 국민훈장 동백장(1970) · 보험문화상(1970) · 국민훈장 모란장(1972), 법률문화상(1979), 국민훈장 무궁화장(1991) 등을 받았다.
4. 총장 재임기 행적
제6, 7대 총장을 역임한 김영희 박사가 사임하면서 1979년 2월 경북대학교 총장으로 임명되었다. 재임 기간은 재임 기간은 1979년 2월 21일부터 1981년 3월 6일까지로, 약 2년 정도 된다.재임 시기 정부에 의해서 실험대학, 정원확대정책, 전문학교의 대학 승격, 학도호국단 설치 등이 추진되었다. 서돈각 총장은 이에 대해서 "법학과 등 전문직업 교육학과까지 실험대학에 포함시켜 교육이 불충싱해지고 있고, 도서관 시설 지도교수 등이 모자라는 실정에서 제도만 앞서 학점이 줄어들어 학력저하가 우려된다. 그러나 새로운 대학교육의 방향으로서 좋은 제도이다"라는 당시 교육정책에 대해서 논평했다.
1980년 8월 28일 경북대학교 교직원, 학생들과 함께 경북대 정화추진 결의대회를 개최하였다. 28일 오전 11시 교내 실내체육관에서 교직원 1,231명, 학생 837명 등이 참석하였다. 서돈각 경북대 총장은 "정화운동은 과거의 비리와 병폐를 응징하는데만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새 시대, 새 역사를 위한 창조적 역할을 중시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1981년 1월 중화민국 교육부장(한국으로 치면 교육부 장관) 초청으로 중화민국의 교육계를 시찰하였다.
1981년 2월 27일 서돈각 총장은 문교부에 돌연 사표를 제출하였다. 사표를 제출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고, 같은 날 학생처장과 만난 자리에서 사표제출을 통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5. 신앙
- 상당히 독실한 불자로, '호'는 '무애'(無碍)이다. 1960년대 탄허 스님, 성철 스님, 청담 스님을 비롯한 여러 고승들과 깊은 인연을 맺고 참선수행에 매진했다고 한다. 불단(佛壇)을 설치하고 예불을 하며 수행하였으며, 대한불교진흥원 이사장, 불교방송재단 이사 등으로 활동하면서 불교 포교와 중흥에 힘을 쏟았다. 1989년, 대한불교진흥원 창립 때 이사로 참여한 후 1992년부터 2004년까지 이사장으로 재임하기도 했다. 또한 서울대학교 총불교학생회를 결성한 사람 중 한 명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