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이만수의 지도자 경력을 서술한 문서.2. 시카고 화이트삭스 시절
은퇴 후 마이너 리그에서 코치생활을 했으며, 이 시절 발굴한 선수가 훗날 한국 프로야구에서 외국인 용병으로 큰 활약을 하는 틸슨 브리또.[1] 여기서 삼성에서 외면한 은퇴와 영구결번 관련 작은 행사를 치러줬다는 이야기가 있다.시카고 화이트삭스 코치 시절 |
2000년에 시카고 화이트삭스 불펜 포수 코치로 부임했다. 최초의 한국인 메이저 리그 코칭스태프로 2005년 팀의 월드시리즈 우승에 기여를 했다. 이걸 두고 코치가 아니라 단순한 불펜 포수일 뿐이라며 폄하하는 이들도 있지만 시카고 화이트삭스 공식 로스터를 보면 화이트삭스에선 불펜포수도 엄연히 정식 코치 보직에 속한다. 메이저 팀 중에서도 불펜포수가 코치 보직에 속하는 팀도 있고 그렇지 않은 팀도 있다. 무릎팍도사에서 당시 코치로서 4억원 가량의 보너스를 받았다고 말했고, 당시 카퍼레이드에서도 A급 공신이라 맨 앞에 서 있었다고. 당시 사진을 보면 퍼레이드 버스에 선수들과 코칭 스태프 등번호와 이름이 붙어있는데, 버스 정면 상단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이만수의 것 역시 붙어 있다. 당시 카퍼레이드 사진[2] 당시 받은 우승 다이아 반지, 우승 다이아 목걸이(와이프용으로 구단에서 제공), 우승 기념 시계(스위스산으로, 세계에서 유일한 시계)도 함께 나왔다. 당시 그 우승기념물품은 구단에서 1000개를 뿌린 것이라고. 88년만의 우승이다 보니 다른 해의 월드시리즈 우승 구단들에 비해 돈을 더 많이 썼다.
언론에서는 이코치라고 부르며 정식 코치에 준하는 직함으로 강조를 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불펜포수는 불펜코치의 보조 겸 선수 대신 불펜에서 불펜 투수들의 공을 받는 선수와 코치의 중간 위치이다.[3] 재밌는 것은 이런 위치 때문에 예비긴 하지만 메이저리그 선수로 등록된 적도 있다. 실 경기 출전은 안 했지만. 어쨌든 화이트삭스의 정식 코치였던 것은 사실이다. MBC SPORTS+의 폴 코너코와의 짧막한 인터뷰에서 그는 이만수를 코치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렇기에 같은 보직에 대한 한국야구에서의 위치와 차이가 있을 뿐, 이만수를 화이트삭스 코치였다고 말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맞는 말이라 허위기재가 아니며 문제가 없다. 다만 권위나 보직의 중요도에서 보면 그 지위가 낮은 축에 속하는 것은 맞다. 팀에 대한 어떠한 전략적 발언을 하기 부족한[4], 막말로 별 것 아닌 보직은 맞다. 저메인 다이 옆에 설 정도로 대접을 받은 것은 일종의 정치적 올바름에 의한 배려. 미국은 전통적으로 군인, 소방관, 육체노동자 등 주위에서 눈에 띄지는 않지만 힘든 일을 묵묵히 하는 사람들을 대접해주고 영웅시하는 사회 풍조가 있다. 야구팀에선 불펜포수가 그에 해당하는 것. 전략적으로 중요한 보직은 아니고 보수도 높지 않지만 팀에서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하며 육체적으로는 고된 보직이다. 유일한 동양인이라 인종 간 화합을 강조할 수 있어 보기도 좋고.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한 덕에 한인 메이저리거 코치진 중에선 유일하게 백악관을 방문했다.
의외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만수의 미국 영주권 청원이 거절된 것도 시카고 화이트삭스 시절이다. 개인적인 흑역사이자 이민법의 역사적인 판례. 구단에서 이만수의 영주권을 신청했는데 이만수의 선수 시절 경력으로 영주권을 당연히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정작 이민국에서는 코치로 일할건데 코치로서의 뛰어난 경력을 가져오라고 한 것. 한마디로 좋은 선수가 좋은 감독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2.1. 2003년 삼성 라이온즈 계약 파기 사건
당시 삼성 프런트의 뒷통수로 한때 곤란한 입장에 놓이기도 했다. 앞에 내용처럼 2003년에 친정팀 삼성 라이온즈에서 코치 및 차기 감독 제의를 받고[5] 당시 시카고 화이트삭스에서 맡고 있던 코치직을 사임한 상태였는데,[6] 삼성측에서 없던 일로 하자며 돌연 코치 제의를 취소해버리는 바람에 실업자가 되어 버렸다. 다행히 화이트삭스가 이만수의 사정을 이해하고 다시 받아 줬기에 망정이지, 하마타면 삼성 구단 때문에 선수 생활에 이어 지도자 경력마저 망칠 뻔했다.[7][8] 이 내용은 이만수가 무릎팍도사에서 실제로 언급한 내용이고 아직까지 이만수는 왜 그때 삼성이 뒷통수를 쳤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시간이 꽤나 지난 2020년대에도 이만수 감독은 개인 SNS를 통해 아직까지도 이 때의 일로 삼성 프론트에게 서운한 감정이 있다고 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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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SK 와이번스 수석코치, 2군 감독 시절
SK 와이번스 No.22 |
이만수(李萬洙) |
3.1. 1군 수석코치 시절
2006년 말 김성근 감독이 계약할 때 구단에서 이만수를 수석코치로 요구했었고, 감독 취임 후 수석코치 취임식을 했다.[9]2006년 10월 SK 입단식에서.
게다가 김성근 감독을 이만수 자리 옆에 앉혀놓고 이만수 수석코치는 소감이라며 팀을 어떻게 바꿔가도록 하겠다고 하면서 김성근 감독은 이 상황에 위화감을 느꼈고 처음부터 어긋나 있었음을 보였다.[10] 등번호는 선수 시절과 같은 22번.[11]
구단에서는 공식적으로 부정했으나 2007년 SK 와이번스의 수석코치로 국내 복귀시 차기감독직을 보장받았다는 설이 있었고, 설의 진위여부와 상관없이 대내외적으로 김성근 감독의 2년 임기 이후 차기감독감으로 여겨져왔다. 하지만 김성근 감독 부임 후 연속 우승 등 좋은 성적을 거두어 계약연장을 하게 되면서 구단과 김성근 감독, 이만수 코치는 3자간의 갈등을 겪었다.
국내 복귀 후에는 SK에서 수석코치를 맡았으며 "스포테인먼트" 정신을 강조하는 사람 중 하나이다. 대표적인 예로 2007년 5월 26일 문학구장이 만원을 이루었을 때 "알몸 런닝"을 공고했었고, 경범죄 처벌 위험에도 불구하고 팬 서비스 차원에서 밀고나가 "팬이 있어야 야구가 있다."를 강조하며 실제로 사각팬티만을 걸친 채 문학구장을 한바퀴 돌면서 공약을 이행하였다.
거기다 이번에는 2010 시즌에 우승할 경우 정형돈과 같이 여장을 하고 그라운드를 한바퀴 뛰겠다고 한다니...그런데 정말 SK가 정규시즌 우승하고 한국시리즈까지 일방통행으로 종결...과연 그는 뛸것인가? 다들 궁금해했는데 뛰지 못했다. 시리즈 내내 감기에 걸려서 우승 순간 라커룸에 누워 있었고 결국 병원에 실려갔다고. 기사링크
무릎팍 도사에 출연해서 삼성에는 이젠 더 이상 감정이 없다고 밝혔다. 그런데 그 뉘앙스가 용서라기보다는 체념에 가까운듯 하여 어쩌면 삼성팬들에게는 더 슬픈 발언일 수도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심리적으로 "이제 삼성 라이온즈는 뭘 하든 말든 특별히 관심 없는 팀"이라는 선을 그은 것일 수도 있기 때문. 차라리 미워라도 하면 삼성에 부정적이나마 마음이 있다고 할 수 있겠으나, 이제 이만수에게 있어서 삼성이라는 구단은 애착 그런 거 없고, 단지 비즈니스적으로 접근하는 여러 구단 중에 하나라는 의미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구단에서 2008년 말 김성근 감독과 3년 재계약하면서 이만수 코치는 1년 단위로 계약을 이어갔다. 이유는 다른 팀에서 감독으로 스카웃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라고 밝혔는데... 그 이후 한화, LG, 롯데, 삼성의 감독이 교체되었지만-더군다나 이 팀들의 감독인 한대화, 박종훈, 양승호, 류중일은 이만수에 비해 지명도나 커리어가 앞서지 않는다. 훗날의 감정 때문에 이만수가 무능해서 타팀서 영입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지만 애초에 이만수 영입시기부터 이만수의 커리어를 봐선 SK에 간건 그정도 커리어 인물이 군말없이 간건 이미 차기감독 보장이 되었다고 보는 시각이 많았다.[12] 이후 SK는 비슷한 형태로 운영되는데, 김용희가 프런트로 가면서 떠오르는 차기 감독감인 박경완이 2군 감독이 되었던 것이 대표 사례.
3.2. 2군 감독 시절
2010년 6월 19일 계형철과 보직을 맞 바꿔 수석코치에서 2군 감독으로 보직 이동되었다. 김성근 감독과 프런트와 갈등이 주 원인이라는 기사가 나왔는데, 그 기사가 내려간 데 이어 반론성 기사도 나오고 있다. 박동희 기자가 블로그에 김성근 감독과 프런트와의 갈등을 암시하는 내용을 게재하여 아직까진 혼돈의 카오스. 결국 시간이 흐르면서 유야무야 되었다. SK 프런트 측에서 부랴부랴 봉합한 듯.2010 올스타전에서는 시포를 맡았다. 시구와 시타는 삼성라이온즈에서 배터리를 이루던 김시진 감독과 장효조.
2010년 8월 16일 다시 2군 감독에서 1군 수석코치로 보직이 변경되었다. 그러던 중 2011년 3월 이철성이 수석코치로 임명되면서, 다시 보직이 2군 감독으로 변경되었다.[13] 당시 이와 같은 계속된 보직 변경은 프런트와 김성근 감독 간의 파워 게임의 결과로 보는 시각이 많다.
2군 감독으로서의 무능과 이중성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으나, 김성근이 한화에 재임하는 과정에서 SK 시절 파행적인 2군 운영까지 재조명되면서 어느 정도 재평가되었다. 또한 프런트도 문제였던 것이 김성근의 SK 재임 당시 신인 지명은 거의 실패였던 만큼, 애초에 키울 만한 인재가 부족했다는 것이 현재의 평. 그나마 예외적인 성공픽인 사이드암 에이스 박현준조차 트레이드로 팔아버렸다.[14] 어쨌든 한 마디로 SK 2군 팜 거덜은 이만수 탓만은 아니었다.
그나마 나중에라도 등장한 선수들조차 이만수보다는 김성근의 영향이 컸다. 윤희상의 재활을 지원한 것도, 박희수에게 투심을 장착할 것을 권하고 투구폼을 수정한 것도 김성근이었다고 투수들 본인이 인터뷰한 바 있다. 다만 이 또한 김성근 특성상 2군은 육성이 아닌 1군 보조 역할에 그치는 게 당연시되었고, 그래서 선수 육성의 사례들 또한 김성근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고 볼 수 있기도 하다.[15]
4. SK 와이번스 1군 감독 시절
4.1. 2011 시즌: 감독대행
부임 초기에는 서투른 투수교체로 인한 연패와 감독대행임을 자각하지 못한 인터뷰 등으로 SK팬들에게 눈치도 능력도 없다고 까였으나 에이스 김광현, 정근우등 주전 상당수가 부상으로 빠지고 SK팬들의 경기장내 시위로 극심하게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팀을 잘 추스려 남은 시즌을 5할 승률로 마크하여 3위를 지켜냈다. 포스트시즌에서 전문가들이 체력과 전력상 열세라 예상했던 KIA 타이거즈와 롯데 자이언츠를 꺾고 감독대행 최초이자 5년 연속 한국 시리즈 진출을 이뤘으나[16] 시즌 1위 삼성 라이온즈에 패해 준우승하였다. 어쨌든 기대치보다 나쁘지 않은 결과였기에, 3년 10억의 조건으로 SK 와이번스 차기 감독에 부임했다.[17]자세한 내용은 이만수/2011년 참고.
4.2. 2012 시즌
시즌 초중반의 삽질과 계속되는 연패로 SK가 한때 6위를 하고, 매끄럽지 못한 인터뷰와 과도한 리액션에 대한 비난으로 인해 한때 방송에서까지 언급될 정도로 평판에 위기에 몰리기도 했지만 가을이 되면 팀이 강해지는 버프와 가끔 터지는 신의 한수 전략으로 최종순위를 2위로 마감하고 한국시리즈에 6년 연속 진출에 성공했지만, 당시에는 이런 성적에도 불구하고 욕을 많이 먹었다. 게다가 가끔 삽질 경기운영을 하기도 해서 이만수 안티들이 더더욱 강성 안티가 되었다.[18]. 당시까지만 해도 SK의 팬들 중에도 이만수 감독을 그럭저럭 괜찮은 감독이라고 평가하는 팬들도 꽤나 있었다. 하지만 바로 다음 해부터 민심이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한다.자세한 것은 이만수/2012년 참고.
4.3. 2013 시즌
전년도의 인터뷰 논란은 계속되었고, 게다가 SK는 부진을 거듭하다가 8월 한달간 반짝하고 다시 추락하여 9월 25일, 7년만에 가을야구 진출 실패가 확정되고 말았다. 다만 2016년에는 김성근의 거품이 꺼지며 혹사의 대명사 김성근으로 인해 부실해진 전력을 감안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긴 하였다. 그러나 본인의 관리 부실도 명확한 만큼 단순히 김성근 탓만 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중론. 다만 김성근 탓'만'은 아니라는 것 뿐이지 김성근이 많은 지분을 차지하긴 했다. 즉, 김성근은 직접 전력을 쥐어짜냈고, 이만수는 그 전력을 더 좋게 했다기보다는 오히려 본인의 관리 부실과 박희수, 최영필[19] 등으로 대표되는 혹사로 더 사태를 장기화시켰다는 것.시즌 후 경질설이 나돌았지만 프런트는 2014년에도 재신임을 하기로 했다.
이만수/2013년 참고.
4.4. 2014 시즌
SK 팬들이 그렇게 염원하던 계약 마지막 해이다. 2013년까지만 하더라도 "이만수가 프런트의 앞잡이니 재계약하는 거 아닌가?"라는 우려도 있었으나, 일련의 사건을 통해서 프런트와 사이가 상당히 안 좋은 암시를 남겼기에 재계약할 가능성은 많이 낮아졌다.하지만 조인성, 스캇 사건을 보면 알겠지만 이 시즌에 그 SK 와이번스의 최대 강점이었던 팀 케미가 처참히 작살났으며, 또한 2014 시즌 후에 최정, 박재상,[20] 나주환, 김강민, 조동화 등 왕조 시절의 주전 라인업이 대거 FA를 신청할 예정인데, 설령 이들을 전부 잡는다고 해도 전력은 +도 -도 없이 0인데다가, 과거 이진영, 정대현, 그리고 정근우의 예에서 알수 있듯 프랜차이즈 선수 붙잡는 데에도 상당히 인색했던 전적을 생각해 보면 SK 와이번스는 이만수 감독이 나가더라도 최악의 경우 팀 자체를 사실상 리부트해야만 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맞이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후반기 갑작스럽게 좋은 성적으로 4강 싸움에 상당히 유리한 고지에 올라왔다. 9월 10일 김광현이 최악의 부진을 보여줬음에도 타선은 꾸준히 터졌지만 아시안 게임 휴식기 이후 10월 경기에서 부상자가 속출하고, LG가 미칠듯이 이겨대면서 4강 싸움에서 가면 갈수록 멀어지기 시작했고, 결국 10월 17일 목동 넥센전 패배로 5위가 확정되어 2시즌 연속 가을야구 초대장을 받지 못했고, 아울러서 그렇게 그는 재계약에도 실패하게 된다.
밴와트를 제외한 용병들이 모두 제 활약을 못해주었지만 시즌 마지막 경기까지 끝까지 힘을 낸 덕분에 저번 시즌보단 나아진 이미지로 감독직을 마무리하였다.
자세한 것은 이만수/2014년 참고.
5. 평가
양상문은 석사학위와 해설위원 경력 등 풍부한 이론적 배경과 준수한 팀케미 관리 능력을 보였음에도 선수기용이나 육성방법론 등에서 야구 내적 직관이 부족해 2017년까지 호불호가 갈렸던 감독이라면, SK에서의 이만수 감독은 전임 감독이 남긴 피해를 그럭저럭 수습하고 육성에선 훨씬 나은 모습을 보이며 그럭저럭 준수한 경기 운용을 보여줬으나 장기간 감독을 맡으면서 야구 외적인 팀 관리 능력의 부재로 계약이 종료되었다.5.1. 부정적 평가
종신감동, 갓동님이자 4강 진입 실패의 주범. 시작부터 좋지 못했던 감독 생활이었고, 그 때문에 다소 이미지가 안 좋은 채로 시작했기 때문에 판단은 유보되어 왔으나... 스스로 까일 거리를 수두룩하게 제공하고 어이없는 용병술과 임기 만년 개판이 돼 버린 팀 융화력으로 전성기 SK 왕조를 말아먹었다. 결국 타 팀 팬들에게 SK의 영원한 종신감독으로, 자기 팀 팬들에겐 금지어가 되었다.[21]간단히 말하자면, 입티디라는 신조어의 원조라는 점에서 알 수 있 듯 말 그대로 입과 경박한 행동이 문제였다. 물론 이만수가 살았던 세대의 한국의 스포츠 교육이 기록 향상에만 집중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만수의 이런 언행 미숙에 대해 조금 변명할 수라도 있겠지만, 감독의 자리는 매의 눈으로 기사거리를 찾는 언론을 상대하며 선수들의 심리상태와 입장도 고려해야하는 막중한 자리이기 때문에 이만수가 비판을 많이 받는 것이다.
가장 흔한 패턴은 말이 계속 바뀌는데다가 본인 입으로 한 말도 아무렇지도 않게 번복한다. 거기에 사소한 말 실수라고 보기엔 좀 심각한 입털기도 꽤 자주 있었다. 이만수 감독의 각 시즌 문서를 참고하면 말이 바뀌거나, 감독으로서 바람직하지 않은 언행을 보인 바람에 구설수에 오른 일이 꽤 많음을 알 수 있다. 주요 어록으로 돌아다니던 것은, 감독을 위해 이겨달라, 차라리 골절이였으면 복귀가 더 빨랐을 것이다 등이 있다. 분명한 것은, 팀의 지도자인 감독으로서 할 말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행동에 있어서도 초보감독의 실수라고 보기에는 미숙한 행동으로 최정에게 공을 던진다던지 선수들도 자제하는 세레머니를 오바에 오바를 곱해서 전구단 어그로를 끈다던지 하는등 입털기로 악화된 이미지에 한번더 덧칠을 하는 돌발 행동들이 감독기간 내내 있었다. 사실 이러한 점이 스타성이나 팀 분위기 측면에서 좋은쪽으로 해당될수도 있었다. 실제로 시대를 풍미했던 김응룡, 김태형은 이런 플레이에 도가 텄던 감독들이었지만, 정작, 이 둘은 선수단 장악의 대가였기에 적어도 팀 케미스트리를 망치는 일은 적었다. 근데, 이만수는 이런 행동들로 인해 팀 케미스트리를 망가뜨리는 일이 유독 잦았다는 것.
사실 이만수 감독 부임 첫 해였던(감독대행 시절 제외) SK 와이번스의 성적은 2위로, 성적 자체로는 꽤나 선방했다고 볼 수 있지 않냐는 의견이 종종 나온다. 문제는 최종성적 2위까지 가는 여정인데, 전임 김성근 감독 시기 SK 와이번스는 가장 부진했다는 2011년에도 3위 밑으로 떨어진 적이 없었건만 2012년 SK 와이번스는 시즌 중에 무려 6위까지 찍고 올라오는 기염을 토했다. 이러니 기껏 한국시리즈 준우승까지 해놓고도 선수빨이라는 주장이 SK 팬들 사이에서 크게 공감대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고, 실제로 그 다음해인 2013년 시즌 SK는 6위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예년에 비해 투타 전반적으로, 특히 타격쪽에서 많이 페이스가 떨어진 것, 그리고 이미 떨어지기 시작한 수비력이 바닥으로 쳐박혔던게 한몫을 제대로 했다. 2013 스프링캠프 때 닥공을 강조하고, 미국에서 맥스 베너블 타격코치를 데려온 것 치고는 결과가 썩 좋지 않았다.
일부에서 제시하는 미국에서 지도자 생활을 했기 때문에 한국 프로야구에 제대로 적응을 하지못했다는 논리도 그다지 설득력이 없는게, 이만수 감독이 취임하고 나서 선보인 운영은 메이저리그식 야구와는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오히려 많은 메이저리그 팬들이 비판하는 '한국 구세대들이 구사하는 일본식 야구'에 훨씬 가까웠다. 실제 메이저리그 구단에서 프런트와 스카우트로 일한 경력이 있는 칼럼니스트 대니얼 김은 다음스포츠 칼럼 ' 송재우, 대니얼김의 더블플레이'에서 "이만수 감독님의 야구는 메이저리그 스타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요. 전혀 달라요"라면서 혹평한 적이 있다. 그리고 여기에 메이저리그 전문 해설자인 송재우도 동감을 표시했다. 과연 리그에 따른 스타일 차이 때문인지는 의문이다. 적응이 문제라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좋아지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데 오히려 점점 퇴락하는 모습만 보여주고 있는 건 적응 문제라고 보기는 어렵다. 더군다나 스승 김성근 감독 체제의 SK 와이번스에서 1군 수석코치와 2군 감독을 거치며 준비된 차기감독으로 무려 5년의 시간을 보낸 이만수 감독이 적응을 운운한다면, 사실상 무명코치에서 덜컥 감독 자리에 오른 김경문 감독이나 염경엽 감독의 호성적은 설명할 길이 없다.[22]
특히 그가 적나라하게 보여줬던 외국인 선수 통제 실패는 다른 금지어 감독들에 비해서도 독보적으로 뒤떨어지는 부분으로서, 재임기간 내내 명색이 미국 야구를 경험해본 사람이라고 믿을 수 없을정도로 외국인 선수와의 불화가 매우 심각했다. 루크 스캇이 감독에게 거짓말쟁이에 겁쟁이라고 대놓고 비난한 건 이미 레전설급이고, 마리오 산티아고는 이만수에게 용병은 용병일 뿐, 3개월 간 기다려줬으니 더 이상 컨디션 100퍼센트까지 기다려 줄 수 없다이라는 충공깽급의 말을 들었다.[23] 조조 레이예스, 트래비스 밴와트도 감독의 기용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했으며, 로스 울프도 미국으로 돌아간 후에도 자신을 불펜으로 돌린 이만수에 대해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였을 정도다. 물론 스캇이나 조조의 경우 멘탈이 썩 좋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나, 그걸 감안해도 함께 뛰었던 외국인 선수들이 하나같이 감독에 대한 강한 불만을 터뜨리는 걸 보면 외국인 선수들은 감독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이만수는 그런 외국인 선수를 소모품 내지 지나가는 선수로 여기고 관리도 제대로 못해준 건 사실로 보인다. 더 황당한 건 이만수 재임 시 SK의 외국인 선수 질은 리그 내에서 상위권에 속해 있었던 점. 그런 선수들을 원칙 없는 기용으로 구위를 떨어뜨리고 부상을 재발시켜 기량을 떨어뜨린건 이만수 자신이었다. 어찌 보면 스스로 목을 조른 셈인데, 즉 저 외국인 선수를 잘 다스려서 팀에 융화만 잘 시켰어도 팬들에게 인기는 없을지언정 2013년 이후에도 가을야구에 출석하여 감독 재계약이 성사되었을 수도 있다. 즉전감인 외국인 선수를 단순히 소모품 취급하고 함부로 다뤄서 팀의 전체적인 잠재력을 말아먹은건 절대 좋은 점수를 줄 수 없다.
종합해보자면, 본인만의 원칙 및 야구관을 종잡을 수 없고,[24][25] 또 가만히 있으면 주목받지 않고 넘어갈 수도 있었던 일을 본인의 경솔한 발언 때문에 일을 키우는 일이 잦다. 이명기와 한동민을 중용한 것은 성과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조차도 양아들 한 명의 존재와 본인의 발언(...) 때문에 빛이 바래는 상황. 이러한 안 좋은 평가는 모두 본인의 입에서 나오는 만큼 발언이라도 조금 더 심사숙고해서 했다면 조금 더 좋은 평가를 기대할 수 있겠으나... 2013 시즌이 끝나고는 그런 거 없다.
여담으로 한때 인터넷에서는 진정한 SK팬을 운운하는 자칭 이만수 지지자들이 많아 보여서 평가가 생각보다 좋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박재홍 은퇴식 때 이만수 이름이 나오자 대규모 야유사태가 벌어지면서[26] 이만수 지지자들이 죄다 잠수를 타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2014년 박경완의 은퇴식에서도 이런 광경이 재현... 이쯤 되면 변명의 여지가 없다.
또한 2014년 내내 지적되어 온 불펜 혹사도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시즌 초반부터 박정배를 미친듯이 굴리면서 8월에 부상으로 이탈하면서 불펜진 붕괴를 불러왔고 그 부담은 고스란히 윤길현, 전유수, 진해수에게 넘어갔다. 시즌 후반기부터 이 셋은 혹사의 여파로 구위 저하로 인한 부진을 겪었으며, 아시안게임 휴식기가 끝난 10월에도 부진이 계속 이어지면서 4강 탈락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결국 박정배는 어깨 통증의 심화로 시즌 후 어깨수술을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2014년 11월 텍사스 레인저스와 마이너 계약을 맺은 2014 시즌 외국인 투수 로스 울프는 선발인 자신을 강제로 불펜으로 전환을 시키고서는 2이닝 세이브를 맡기는 건 기본에 제대로 워밍업을 할 시간도 안 주고 올려보내기까지 했다며 디스. 그리고 2군 선수들은 불펜 피칭을 하루에 평균 150개를 던지게 하고, 어떤 타자는 지나치게 많은 타격연습에 결국 손이 부러지기까지 했다는 발언도 하였다.
이만수도 어쨌건 3시즌 동안 감독을 했으니만큼 감독으로 한 일이 아주 없지는 않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명장의 기질이 보였다고 보기에는 그의 행적은 너무나도 부족했다. 냉정하게 말해서 평범한 감독으로 쳐주기도 무리이다. 이만수는 실수를 해 놓고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려 했으며[27][28], 그렇다고 투수 혹사를 안 한 것도 아니고 [29] 부상선수를 뚝심있게 관리하고 다 회복할 때까지 기다려 주지도 않았으며 [30] 또한, 팀 운용 측면에서도 좋은 평가를 내리기 어렵다. [31] 팀 케미 관리 제대로 못 한 것은 이미 유명하다. 2015년 들어 사람은 좋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지만 최소한 SK 감독시절 그의 행적에는 그 말을 적용시키기 어렵다.
전체적으로 야구에 대한 지식이나 직관은 안티들에 의해 까내려진만큼 부족하지 않고 오히려 제법 좋다는 옹호론도 가능하지만, 야구선수를 전력이 아닌 사람으로서 관리하는 매니징 능력이 매우 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 경기 운영이 나쁘다는 것은 오히려 순위에 대한 결과론에 가까우며[32] 투타 가리지 않고 김성근의 잿더미 속에서 전력을 구축하는 능력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나름대로 임기응변을 잘 해놓고도 선수단의 신뢰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준우승씩이나 기록해보고도 성공하지 못한 감독으로 남았다. 김성근의 민낯이 낱낱이 까발려지는 과정에서 이만수에 대한 긍정적인 재평가가 이루어질 요소가 더 많지만, 반대의 요소도 있다. 김성근 지지세력이자 기득권이던 노장 선수들[33]은 김성근을 지지했지만 김성근은 소위 왕조라 불리던 시기 자체에도 2군 선수들에게는 지지를 받지 못했었고, 이만수가 리더십이 있었으면 프런트의 지원을 받아 차기 감독으로서 선수단을 장악하기 용이한 환경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만수는 그렇게 하지 못했고 오히려 그렇게 하지 못해도 외국인 선수들만 잘 케어하면 어떻게든 4강은 찍을 수 있는 문턱에서 그 외국인 선수들에 대한 관리마저 낙제점을 받았다. 어쩌면 감동님계의 투 톱인 선동열과 매우 유사한데, 기자들 상대로 언변이 좋더라도 아랫사람과 진정성을 가지고 소통하는 능력은 단순 언변과는 다른 케이스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 단기적 환경이 받쳐주고 본인들도 야구에 대한 내공이 있기에 초기에는 나름대로의 성공을 맛봤으나 초반의 성공에 안주하는 동시에 장기적 매니지먼트 능력의 부재를 보여주며 침몰했다는 점에서 더더욱 유사하다.[34]
김성근의 색채를 지우겠다고 발언해놓고 본인도 어지간한 혹사를 했다. 이 점은 본인도 할말 없을 것이다. 물론 전임감독에 비해 본인이 한 정도는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느낄 수는 있겠지만. 그게 앞사람이 했으니 나도 해도 된다는 식의 면죄부는 절대 될 수 없고, 야구에 만약은 없다.[35] SK가 2017년 시점에서도 불펜 재건이 안되는 이유에는 역시나 김성근이 제 1의 원인이지만, 이만수가 장기적 안목을 가졌다면 어느 정도는 나아졌을 것이다. 대표적으로 김성근의 손을 타지 않은 수소폭탄 트리오라던가...
잘 보면 알겠지만 김성근 야구 밑에도 있어봤고 메이저리그 야구 밑에도 있어봤으니 이만수 자신에게 평균급 감독이 아닌 명장의 자질이 있다면 주체적으로 다양한 경험을 이용해 넓은 시야를 가져야 하는데, 다양한 경험이 오히려 독이 되어서 제대로 된 야구관을 확립하지 못하고 어설프게 적용하여 다양한 야구의 단점을 조금씩 마이너 카피해서 가져와 종잡을 수 없는 행보를 보인 것이다.
5.2. 반론과 긍정적 평가
2013년 SK의 4강 탈락의 주범이라는 인식이 박혀서 그렇지, 자세히 따지면 이만수도 손을 쓸 수 없었던 부분이 있다.첫 번째 이유는 김성근 전 감독의 소모적인 팀 운영에 있다. 김성근은 전력을 최대한 쥐어짜고 경기 후나 시즌 후 다시 회복하는 방식으로 SK 왕조를 이룩했다.[36] 강병철-조범현 감독 시기를 거치며 내실을 다지고 20대 젊은 주전감들을 대거 확보했고[37] 한국시리즈 준우승까지 해봤던 중상위권팀 SK는 이러한 김성근의 운용과 강한 시너지를 가진 팀이었다. 30대가 주축인 2015~16년의 한화와 달리 훈련을 통한 스텝업과 시즌 후 회복도 빠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런 소모성이 강한 야구는 언젠가는 한계가 오게 마련이고 특유의 베테랑 선호와 2군, 병역관리에 대한 무관심 때문에 SK는 조금씩 곪아들어갔다. 그리고 조금씩 한계가 드러날 시점에 감독을 맡은 사람이 이만수다.
이만수는 지나친 독선으로 프런트와 척을 져서 불시에 경질된 김성근 탓에 권위에 치명타를 입은데다 김성근식 운용법의 뒤처리를 하다 최악의 효과가 났다고 봐야한다.[38] 야구는 멘탈 스포츠라고 할 정도로 심적 안정도가 중요한 스포츠인데, 김성근 감독의 재계약 문제 잡음으로 당시 감독대행인 이만수가 오기 전에도 이미 SK 와이번스는 이전에 하락세에 있었고 경질 이후로는 팀 케미스트리가 붕괴된 상태였다.[39]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만수 감독이 전임 감독 해임으로 어수선한 분위기의 SK 와이번스를 이끌고 준우승을 한 것은 분명 인정해야 할 부분이다. 또한 당시 팬덤이 이만수 감독에 대한 욕설, 모욕, 살인 예고 등의 협박을 심각하게 해댔다. 일반인이라면 대인기피증을 넘어 자살 기도까지 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 그럼에도 버텨내며 2011년과 2012년에 한국시리즈를 연속 진출했다는 점은 인정받아야 한다.
두 번째 이유는 김성근 감독 이후 이만수 감독은 김성근 감독 당시의 최상의 전력을 쓰지 못했다. 구시대적 포수 리드 만능론에 매몰된 과장이긴 하지만 김성근 감독이 SK 전력의 절반으로 평가했고 실제로도 우수한 포수였던 박경완은 2010년의 아킬레스 부상 이후 하락세를 탔다. 투수진의 경우 에이스 김광현은 2010 시즌의 혹사와 2011년 뇌경색 후유증으로 컨디션이 완전히 무너졌으며, 송은범(2011 시즌 중반부터 계속 부진하다가 2013 시즌 중 KIA 타이거즈와 트레이드로 이적), 전병두(김성근의 혹사로 2011년을 마지막으로 어깨 수술 받고 기약없이 재활), 이승호(2011 시즌 이후 FA로 롯데 자이언츠로 이적), 정대현(2011 시즌 이후 FA로 롯데 자이언츠로 이적)도 차례로 전력에서 이탈했다.
즉 이만수 감독에게 제대로 남겨진 전력은 김성근의 마지막 유산이라고 하는 윤희상, 박희수와 병역 문제도 해결 안 된 정우람 정도였다. 결국 정우람은 2011년 후반기와 2012년에만 쓰고 군대 보냈다. 오죽했으면 2011년에 임경완을 정대현의 대타로 FA 영입했겠는가. 전임 감독 김성근은 우승팀 전력을 유지하기 위해 세대 교체나 신인 선수 기용보다 안정적인 기량의 베테랑 선호 성향이었던 데다가, 김성근 감독 시절 스카우트에서 지명한 선수들이 워낙 인재가 없었다 보니 조범현 시대 지명한 최정, 김광현이 김성근 말기까지 막내 노릇을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박정배(두산에서 방출당하고 아무도 관심을 안주던 선수를 영입), 전유수(넥센에서 트레이드를 통해 영입), 백인식, 진해수( 송은범 트레이드 당시 반대급부. 트레이드 당시 폐기물 소리를 들었으나 SK에선 2014 시즌 마당쇠로 활약했다.) 같은 투수들을 중용하였으며,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던 최영필을 영입하여 투수진에 새 피를 수혈했다. 공격력 강화를 위해 영입된 조인성은 박경완과 정상호의 부상 공백을 잘 메워주었다.[40]
2013년 한동민과 이명기, 2014년 김성현을 중용해 야수진 리빌딩도 단행했으며 김성근이 강요한 다운 스윙 때문에 장타 포텐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하고 있던 최정에게 레벨 스윙을 주문해 장타력을 맘껏 발휘할 수 있게했다.[41]
흔히 말하는 2014 시즌의 5대 감동님들 중 나머지 넷과 비교하자면, 송일수와 김시진은 최악의 스몰볼과 투수 혹사를 시전하며 당장의 성적은 물론 팀의 미래까지 갉아먹었다. 본바탕이 튼튼한 두산은 빠르게 반등했지만 그래도 풍부한 야수진에 비해 투수력 불안정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으며, 전임 감독 시절부터 혹사가 누적되던 롯데의 경우 후임 이종운과의 콜라보로 롯데시네마라는 용어가 자리잡고 말았다. 선동열은 KIA의 전력이 많이 약해졌고 삼성 시절과 달리 상대적으로 무리를 덜하긴 했지만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바닥에 가까운 성적을 기록하며 감독으로서의 평판에 먹칠을 했다. 게다가 혹사는 앞의 둘보다 덜했지만 특유의 대졸 선호 신인지명으로 포텐 높은 유망주 대신 애매한 즉전감을 다수 확보해서(...) 팀에 만만치 않은 해악을 끼치고 떠났다. 마지막으로 김응용 감독은 송창식 혹사 등을 제외하면 앞의 셋에 비해 팀의 미래에 별로 악영향을 끼치지 않고 이태양 같은 선수도 남겨놓고 떠났지만 당장 2년 연속 9위의 대기록은 물론 자기 팀 선수 이름도 못 외우는 등 굉장히 성의없고 무책임한 발언으로 한화 팬들의 미움을 샀다.
최정 스스로 자신이 홈런타자로 변신하게 된 것을 “이만수 전 감독 덕분”이라고 했다. 그는 “김성근 감독님 시절엔 홈런 스윙을 하면 혼났다. 위에서 아래로 치는 ‘다운스윙’을 하라고 강조하셨다”면서 “이만수 감독님은 미국식으로 공을 띄우기 위해 밑에서 위로 퍼 올리는 ‘어퍼스윙’을 하라고 하셨다. 스윙 연습을 하니 나한테는 그게 편했다. 그러면서 홈런 20개 이상씩 나오더라”고 설명했다.
최정 "이만수 감독님 덕분에 홈런타자가 됐다"
최정 "이만수 감독님 덕분에 홈런타자가 됐다"
반면 이만수는 5위로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지만 최정을 업그레이드 시키고 이명기, 한유섬, 김성현, 전유수 등 적지 않은 유망주와 노망주들의 포텐셜을 이끌어냈다. 이런 기반에 FA 단속까지 성공적으로 마친 SK는 2015 시즌 개막 전 우승 전력으로 평가받았다.[42] 한마디로 앞의 3인방이 팀의 전력을 크게 약화시키고 떠났고, 김응용 감독이 당장 최악이었다면[43] 이만수는 당장도 최악은 면했고 미래에도 부정적인 영향보다는 긍정적인 영향을 더 많이 남겼다.
2007~10 시즌까지 4시즌 간 SK가 강력하긴 했어도 김광현이 프로 5~6년차에 접어들어도 투수조 막내를 했을 정도로 팀의 나이가 많은 편이었고 당시 주축이었던 박재홍, 박경완, 김원형, 김재현이 모두 은퇴했음에도 어느 정도 전력을 추스렸다는건 세대 교체나 유망주 육성 능력에서 딱히 이만수가 다른 감독에 비해 떨어지지는 않았다는 의미다. 문제가 있었다면, 위에서 말한 대로 전임 감독의 경질 관련 잡음과 그에 의한 팬덤과의 충돌, 언론 플레이 능력의 결여[44]와 투수 운영 능력과 선수 기용 타이밍, 외국인 선수를 비롯한 팀 케미 관리의 문제 등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임 감독의 막장행보와 그 감독을 따르는 이성 상실한 무리들이 저지른 일의 반대급부 덕분에 약간의 재평가도 이뤄지고 있다.
또 이만수도 어느 정도 혹사를 자행한 건 사실이다. 박희수는 2012년에 혹사 당한뒤 2013년 47이닝으로 전년에 비해 관리를 받았다고는 하지만, 송은범 트레이드의 반대급부로 데려온 진해수는 이닝 수만 놓고 보면 적을지 몰라도 이만수 지휘 하에 2년간 134경기에 출장했다. 특히 2014년도에는 75경기에 나서며 시즌 절반 이상을 등판한 혹사 피해자임에도 박희수 혹사에 묻혔다. 그 때문에 시즌 성적을 조진 건 덤이다. 전유수도 같은 해 67경기에 등판해서 84.2이닝을 먹었다. 많은 이닝도 문제지만, 많은 경기 등판이 투수 생명에 어떤 영향을 준다. 김성근 수준의 혹사는 아니지만, 혹사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는 것. 정작 박희수와 정우람은 이만수 체제 초기에 이길 때 무조건 나온다는 의미에서 이만수 혹사의 상징처럼 되었지만,[45] 2013년 이후에는 박정배, 전유수, 진해수 등이 더 많은 고통을 받았다.
양적 차이 외에 이만수의 혹사를 약간이나마 변호할 수 있는 다른 시각은 의도의 관점이다. 어쨌든 이만수가 경험했던 메이저리그에서도 불펜을 소모품으로 여겼기에 몇몇 감독들이 일정 수위의 혹사를 자행했기에, 이보다 더한 김성근의 끔찍한 백정야구까지 경험한 이만수는 자신의 투수운용이 금기를 깨는 수준이거나 불펜투수 개개인의 인생을 작살내는 수준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메이저리그에서도 불펜투수의 가치가 확실하게 재평가받고 존중받게 된 것은 샌프란시스코와 캔자스시티의 성공을 거쳐 컵스의 저주가 깨지는 2016년에 와서야 이루어진 일이고, 한국야구에서도 2차 삼성왕조가 STC를 활용한 철벽불펜으로 지키는 야구를 선보이며 대중에게 점차 선발뿐만 아니라 불펜관리의 중요성이 인정받게 된 것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요약해보자면, 비판받을만한 점도 상당했으나 마냥 무능하기만 하지도 않았고, SK에 남긴 유산도 의외로 많은 감독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유섬은 결국 선풍기 수준을 넘어 수위급의 홈런타자가 되었고, 최정은 이만수의 타격관을 장착한 이후 단순히 뛰어난 5번타자 수준이 아니라 KBO 역대 최고의 3루수로 기록될 탁월한 장타자로 성장했다. 1군 기록도 제대로 없던 윤희상을 12시즌 팀의 유일한 10승 투수로 만들어 준수한 선발투수로 만들었으며, 두산에서 방출되고 팀을 못구하던 박정배와 김성근이 박종윤과 바꿔 먹으려 했던 박희수를 굉장히 유용한 불펜으로 사용했다. 이명기는 연속안타 대기록에 도전할 만한 재능을 이만수 밑에서 꽃 피웠고 뒷날 KIA로 가서 팀 우승의 공신이 된다. 김성현은 유격수/2루수로써 정근우가 떠난 팀의 핵심 내야수가 되었다. 결국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 홈런 스윙을 장착한 최정은 2018년 한국시리즈 6차전 9회 2아웃 동점 홈런으로, 한동민은 13회초 결승 홈런으로 8년만의 우승에 기여했다.
다만 이만수가 감독하던 시절 SK 팬덤의 반발심리는 그야말로 악성 수준이었다. 만수동은 물론이요 심지어 자신이 SK 감독으로 재임하던 시절에 공사하고 있던 인천 도시철도 2호선 만수역[46]은 아예 이렇게 팬덤의 화풀이 대상이 되기도 했다. 영문 역명을 Mansu가 아니라 Judas 라고 취소선을 긋고 썼을 지경.
5.3. 총평
'감독'으로서의 이만수는 평판에 비해서 심각하게 부족한 수준은 아니었다. 5선발이 제대로 유지되었던 2013 시즌을 제외하면, 2011 시즌과 2012 시즌의 준우승 그리고 어쨌든 외국인 선수가 없이도 4강 싸움을 끝까지 했던 2014 시즌을 봤을 때 이만수의 감독 능력은 결코 낮다고 보기는 어렵다.문제는 '인간'으로서 한 팀을 이끄는 능력이 너무나 부족했다는 것이었다. 당장 이만수가 대행이 되었던 시절만 해도 그렇다. 김성근이 성적은 쭉 제대로 내는 중이었으나 팀에 해악을 끼치고 있다는 양면의 상황에서 팬들은 김성근의 긍정적인 면만 주목하였고, 심지어 김성근을 비판하던 의견도 김성근의 경질에 대해서는 프런트들을 비판하였다. 그러한 시점에 당연히 김성근과 마찰이 있었던 이만수를 향해 화살이 날아오는 건 당연지사였고, 거기서 이만수는 언론, 그리고 선수들의 동요를 잠재우기 위해서 상황을 몸소 봤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고, 감독 대행으로서 모든 걸 바꾸겠다는 폭탄선언을 하면서 안 그래도 동요하던 여론에 기름을 잔뜩 들어부은 격이 되었다.[47]
이러다 보니 당연히 팀의 케미스트리는 붕괴될 수밖에 없었다. 템퍼링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정근우의 이적, 송은범의 트레이드 등등 프랜차이즈들이 하나 둘 떠나는 것에 이만수의 탓이 전혀 없다고 하는 게 불가능하며, 외국인 선수들과 불화를 일으키는 등 감독으로서의 자질 논란도 사서 드러냈다. 그리고 그나마 긍정적으로 평가를 해 줄 수 있는 운용 부분 또한 문제점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물론 김성근 前 감독의 책임도 어느 정도 있겠지만, 이걸 전부 다 김성근의 탓으로만 일방적으로 돌려버리는 건 김성근한테 굉장히 미안하다는 평가. 비록 이만수의 이미지가 과도하게 저평가된 것은 맞으나, 그렇다고 반대로 이만수가 감독으로서의 능력이 온전히 재평가 받을 정도도 아니다. 이만수가 야구 오지로 알려진 라오스 등 동남아시아에 가서 야구 전파를 하는 것도 단순히 본인이 자원하기도 했겠지만, 실상은 현장이고 해설계고 행정계고 야구 현장 일선 그 어느 곳에서고 전혀 불러주지 않으니 결국 타의도 아예 없다고 할 수 없다. 애초에 동남아에 가게 된 시기도 프로야구계 지도자 경력이 사실상 끝난 이후다.
하여간 지금도 이만수에 대한 SSG 랜더스 팬덤의 여론은 여전히 부정적이다. 삼성 라이온즈 팬덤도 선수로써의 이만수는 지금도 명실상부 최고라고 칭찬할지언정 지도자로 친정팀에 돌아오길 원하는 의견은 보기 힘들 정도다.
6. 감독 성적
역대 감독 전적 | |||||||
연도 | 팀 | 경기 | 승 | 패 | 무 | 정규리그 | 포스트시즌 |
2011[48] | SK 와이번스 | 40 | 19 | 18 | 3 | 3위 | 준우승 |
2012 | 133 | 71 | 59 | 3 | 2위 | 준우승 | |
2013 | 128 | 62 | 63 | 3 | 6위 | ||
2014 | 128 | 61 | 65 | 2 | 5위 | ||
통산 | 429 | 213 | 205 | 11 | |
6.1. 감독 복귀?
2016년 10월 12일, kt wiz가 조범현 감독과의 재계약 포기를 선언하면서 후임 자리 후보 4인 중 한 명으로 거론되었으나, 어디까지나 후보군일 뿐이였고, 결국 전 두산 베어스 감독 김진욱이 내정됐다.또한 2016년부터 삼성의 부진이 계속되면서 팀의 간판 스타였던 김시진 등과 함께 삼성의 차기 감독 후보로 거론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현재는 라오스 야구 보급과 기부, 봉사활동에만 전념하는 중이며, 본인도 감독직 복귀에 굳이 욕심을 내지는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고, 삼성 팬덤도 김시진은 물론 이만수의 선임설에 대해서도 매우 고깝게 여기고 있다. 결국 친정팀 삼성은 김한수를 선임하였고, 계약이 끝난 2020년에도 허삼영을 감독으로 선임했다.
이만수 본인은 현재 재능 기부, 봉사 관련 활동을 하는 것에 만족해하며 지도자로서 현장에 복귀하는 것은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여러 차례 인터뷰를 통해 밝하고 있다. 실제로 그 동안 여러 구단들의 오퍼는 있었으나 전부 거절했다고 한다.[49]
[1]
브리또는 당시 이만수 코치를 거의 아버지처럼 여겼다고 한다.
[2]
카퍼레이드 사진을 보면 LEE옆에 DYE라고 적혀있는데, DYE는 2005 월드시리즈 MVP인
저메인 다이다. 월드시리즈 MVP와 함께 카퍼레이드를 한걸 보면 구단에서 제대로 대접받은 셈.
[3]
한국에서는 원래 2군 포수가 이 역할을 했지만 2010년대 들어 정식으로 불펜포수를 운용하고 있는 팀이 몇 늘어났다. 대표적으로
KIA 타이거즈의
이동건.
[4]
배터리코치나 타격코치가 아니기 때문에 불펜포수로서 할 수 있는 역할은 투수의 컨디션이나 구질 파악 등으로 제한적이다.
[5]
당시 삼성은
김응용 감독을 필두로
선동열 투수코치,
한대화 타격코치,
이만수 배터리코치 이렇게 코치진을 구상할 예정이었고 앞에 둘은 삼성의 코치로 영입되는데 성공했으나 결국 이만수는 영입이 불발되었다.
[6]
당시 살던 집과 타던 차까지 처분하고 한국행 비행기표까지 발권해 두는 등 귀국 준비를 마쳐뒀다고 한다. 더불어 화이트삭스도 후임 불펜 포수를 일치감치 구해둔 상황이었다.
[7]
본인에 의하면 비슷한 시기에 삼성이 아닌 KBO의 다른 팀에서 코치 제의가 들어왔으나 삼성의 코치 제의가 들어오는 바람에 이를 거절했다고 밝혔다.
[8]
이 때 야구를 아예 그만두고 다른 분야의 일을 할 생각까지 했다가 지인의 설득으로 간신히 마음을 다잡는 등 심리적 충격이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인다.
[9]
참고로 2004년 삼성 수석코치로 취임한
선동열도 수석코치 취임식을 한 바 있다.
[10]
근데 취임 당시의 기사를 보면
좀 미묘하긴 하다.
진실은 저 너머에.
[11]
현재까지 영구결번 된 선수중 타 팀 코칭스텝으로 이적한 후에도 선수시절 번호를 사용한 유일한 사례로 남아있다.
[12]
기존 서술과 달리 차기 감독을 2군 감독에 박는 경우는 결코 흔한 경우가 아니다. 애초에 해당 사례들 대부분이 OB 시절 이광환, 한화 시절 이정훈 등 김성근 관련 사례들이고,
김용희의 케이스는 당시까지만 해도 차기 감독설은 나오지도 않았다.
박경완 정도가 맞는 사례지만, 애초에 SK의 사례이고 이건 오히려 이만수와 같은 케이스.
김용희 전 롯데 감독이 2군 감독을 맡은 사례는 그냥 일반적인 내부 승진 사례에 해당한다.
[13]
동시에 계형철 2군 감독은 재활코치로 전보되었다.
[14]
30 전후의 포수 유망주 윤요섭과 불펜 요원인 김선규까지 총 3명을 40세의 대타요원
최동수, 30대 중반의 만년 백업요원이었던
안치용과
권용관, 불펜 요원
이재영과 바꾼 3:4 트레이드. 만약 승부조작만 아니었어도 이 트레이드는 SK의 역대급 호구딜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박현준이 승부조작으로 금지어화되었고, 최동수와 권용관도 1-2년간 나름 역할을 해주었으며 안치용은 꽤나 쏠쏠하게 써먹음으로써 이는 SK 쪽의 승리로 정리되었다.
[15]
이는 한화에서도 마찬가지로, 이에 반발한 2군 감독 이정훈이 육성군 타격코치로 밀려나기도 하였다.
[16]
문제점도 드러났다. 부상후유증에 시달리던
김광현의 무리한 포스트시즌 기용,
김성근 전감독의 부임시보다 작전 간파 빈도가 늘고 공수에서 조직력이 약해진 모습도 보였다.
[17]
여담으로, 동료 체육인들이 주로 40대 중후반에 감독 커리어를 시작한 것과 달리 이만수 본인은 명성과는 달리
지천명이 훨씬 넘은 상당히 늦은 나이에 1군 감독이 되었다.
[18]
솩갤을 비롯한 SK 와이번스 팬 커뮤니티에서 이만수는 김성근과 함께 일관되게 평가가 매우 나쁘다.
[19]
하도 집중적으로 나와서 별명이 이만수의 2번 투수였을 정도.
[20]
2014년 1군 등록 일수를 채우지 못해 FA 자격이 1년 뒤로 미뤄졌다.
[21]
다만 종신감독 소리는 준우승 2번 당시는 아니고 2013년부터 나온 것.
[22]
다만
김경문,
염경엽은 투수를 갈면서 성적을 냈음이 드러나면서, 포스트
김성근 소리를 듣는다.그리고 염경엽은 다른 팀 가서 통합 우승
[23]
물론 용병인 당사자가 자기 입장을 모를리가 없지만 감독이 대놓고 저런 말을 하면 멘탈에 부정적 영향을 더 주니 대개 좋은 말로 달랜다. 모르는 언어로 관중들이 하는 욕도 알아듣는 판국에 대놓고 저런 말을 하는 걸 선수가 모를리가....
[24]
이만수에 비하면 김진욱은 최소한 혹사도 덜시키고 수비지향적이라는 야구관이라도 있다. 게다가 이 쪽은 섣불리 인터뷰를 하지도 않는 편이고.
[25]
이만수 감독 스스로 실패했다고 평한 자율야구만 해도, 해태 왕조 시절의
김응용 감독은 단체훈련은 두세시간으로 끝내고 나머지는 개인훈련으로 돌리는 방식을 고수했고
넥센 히어로즈의
염경엽 감독도 데뷔 첫 해에 자율야구로 제법 괜찮은 결과를 가져왔다. 다른 팀도 아니고
SK 와이번스처럼 리그를 대표하는 명문팀에서 자율야구가 처참할 정도로 실패했다면 그건 자율야구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운용방식의 문제라고 봐야 한다. 그리고선 자율야구가 이제 결실을 본다고 하질 않나 그리고 몇년 후에
재임 2년차 감독이 진짜로 자율야구를 성공시키면서 더더욱 재평가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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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상의 만리타 삼빠들이 주장하던 '만수까들은 (김성근을 옹호하거나 삼성을 까기 위해) SK팬으로 위장한 LG팬이나 KIA팬 혹은 옛 쌍방울에서 넘어온 SK팬들이고 순혈 인천야구팬들은 이만수에게 호의적이다'라는 논리가 사실이라면, 단지 이만수를 야유하기 위해서 슼빠, 갸빠, 옛 쌍방울빠들이 그 악천후를 뚫고 문학까지 가서 자기들과 아무런 연관이 없거나 혹은 오히려 싫어하는 선수인 박재홍의 은퇴식에 참석했다는 말이 되는데, 이는 상식적으로 전혀 말이 안 되는 논리이기 때문. 박재홍이라는 선수가 광주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인천 팬들에게서 인천의 순혈 레전드나 마찬가지의 대우를 받고, 오히려 고향인 광주에서 배신자 취급을 받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의 은퇴식에 참석한 이들은 당연히 대다수가 옛
도원아재들과 그들의 후예들, 그러니까 말 그대로 뼛속까지 인천 야구를 응원하는 팬들일 것이므로 인천 야구팬들이 이만수에게 호의적이라는 것은 완전한 헛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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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전역한 이재원, 모창민을 당장 급하다고 끌어썼다가 큰 성과도 못 내고 모창민을 NC에 그냥 보내고 말았는데도, kt 특별지명을 앞두고 군 전역한 정우람을 올려야 한다고 줄기차게 주장하다 결국 프런트에 의해 무산되었다. 마치 한화에 온 김성근을 보는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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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김성근 시절에 젊은 선수들의 군 문제가 한화 마냥 꼬여서 이런 사태가 터진 점을 감안해야 한다. 군 문제가 꼬인 것과 별개로, 당장의 성적과 쓸만한 군필 백업을 바꿨다는 문제가 있다. 모창민 이후 코너 내야수 백업의 상태를 보면... 답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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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첵하다시피 한
진해수,
전유수, 구속이 떨어진 것이 눈에 보이는데도 괜찮다고 우기다가 결국 탈나서 15년 후반기까지 얼굴조차 못 보게 된
박희수, 아예 이만수 감독의 2번 투수로 유명했던
최영필 등, 사례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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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 등의 선수에게는 아파도 참고 뛰어라라고까지 했다. 회복기간이 더 필요한 김광현을 무리하게 끌어써서 부상의 터널을 길게 만들어버렸던건 지금도 쿨타임 될때마다 까이는(...) 과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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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중요할 때 대타 성공을 자주 시키거나 심판 클레임 매의 눈으로 오심이 될만했던 것도 매우 잘 잡아낸것등에서 볼 수 있듯, 막상 경기 내에서 임기응변 능력은 다른 감독들이랑 비교해도 평균 이상이었다. 실제로 포스트시즌때 패넌트레이스보다 좋은 모습을 보였던 것도 이러한 맥락. 근데, 그런 임기응변형 운용을 페넌트레이스때도 기준없이 그렇게 했기에 크게 문제가 되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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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가진 전력 대비 운영을 다소 심각할 정도로 못한 감독으로는 바로 후임인 김용희 감독이 더 많이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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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으로
송은범이 있다. 트레이드로 팔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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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장기적인 팀에 대한 해악 문제를 따지면 삼성에서나 기아에서나 스몰볼 야구관에 대졸 즉전감 선호로 인해 팀의 체질을 약화시킨 선동열 감독이 더 부정적인 영향을 많이 끼쳤다. 어쨌든 이만수는 완전 선진야구까지는 아니더라도 끔찍한 스몰볼 성향은 분명 더더욱 아니고, 선동열 정도로 근시안적이지도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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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사례로 김성근과 이광환의 색을 모두 지우려고 각종 무리수를 둔 이순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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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부터 초여름까지 승수 왕창 벌어서 이걸로 한여름에 나타나는 오버런 후유증을 버티고, 시즌 막판인 가을에는 1, 2위팀과 정면으로 부딪치기 싫어하는 중하위권 팀들의 심리를 이용해 승수를 쌓았다. 시즌 말에 하위권 팀은 당장의 승수보단 차기 시즌을 대비하는 운용을 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전력으로 부딪칠 이유도, 동기도 없다. 마찬가지로, 가을야구를 노리는 중위권 팀도 같은 중위권 팀과 하위 팀을 상대로 승수를 쌓을 생각을 하지 상위권 팀을 상대로 전력을 다하지는 않는다. 물론 이 당시엔 제대로 선발 야구한 사람이 로이스터와 조범현 2명에 불과했을 정도로 불펜 야구가 대세였으며, 8개 구단 체제라 경기수도 적었고,
KBO 와일드카드 결정전도 없었기에 쓸 수 있는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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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 연령 27세로 8개 구단 중 가장 젊은 구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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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와 김성근이 진즉 재계약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김성근이 대놓고 엿 먹였다고 봐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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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2011년 6월 중순까지만 해도 SK는 1위였으나 제계약 문제 등으로 7월 이후 엄청난 하락세에 힘입어 8월에는 7위에서 올라온 롯데에게 따라잡히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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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입한 직후
기사를 보면 조인성의 영입은 포수로 앉히기 위해 데려왔다기보다는 공격력 강화를 염두에 둔 영입이다. 공격력 강화를 위해 포수가 아닌 지명타자에 둘 생각이었으나 시즌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박경완과 정상호의 부상, 부진으로 포수 미트를 자주 낀 것이지 포수 약화 때문에 조인성을 이만수가 영입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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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수는 레벨스윙을 기본으로 삼는 타격 코칭을 했지, 어퍼스윙을 시키지 않았다. 최정은 오히려 김용희, 힐만을 거쳐가며 어퍼스윙으로 타격폼이 바뀐다. 하지만 선수 본인이 이만수 덕에 홈런타자가 되었다고 말을 하긴 했다. 자세한 건 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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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힘겹게 와일드카드 다툼했지만 그것까지 이만수 탓인 것은 아니다. 이쪽은 오히려 김용희의 잘못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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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망주에게 직접 글러브 사주고 고기 구워먹이는 등의 정성을 쏟았지만 성적은 99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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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언급하는 '야구관이 없다'라는 내용이 바로 이 것이다. 야구관이 없는 게 아니라 운영 능력과 전력의 한계로 그것이 발현되기 힘들었으며, 거기에 더해서 언플 능력이 아쉬워서 팬들에게 무얼 하려고 했는지를 잘 포장해서 보여주지도 못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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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수는 혹사의 상징이 맞다. 단순한 82이닝이 아닌 혹사로 인한 팔꿈치 통증으로 6월부터 7월 1달 가량을 던지지 못했는데도 82이닝인 것이다. 'TV만 틀면 박희수가 나온다'라는 말이 괜히 나온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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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수가 SK 감독에서 물러간 이후로도 거의 2년이 지나서야 개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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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언론플레이라 하더라도 전임자의 수고 및 책임감을 언급하면서 갑작스러운 경질로 인해 충격을 받았을 선수단과 팬들을 포용하면서 이야기했다면 김성근의 난데없는 경질에는 화가 나지만 언론과 선수들의 동요, 팬덤을 어느 정도나마 안심시켰을 수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모든 걸 바꾸겠다는 말 자체가 김성근의 운영방식을 비난하는 그 이상이나 그 이하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데, 같은 팀의 코치로서 팀을 운영하는 입장에서 좋게 받아들이긴 힘든 말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상황이다. 당장에 이만수의 후임자
김용희가 5위 - 6위로 아쉬운 성적을 냈다 할지언정 비난과 비판이 적었던 이유는 스몰볼 야구가 아직 남아 있는 SK식 야구를 빅볼 야구로 개편시켰으며, 성적 부진에 대한 아쉬움과 비판을 김용희 본인도 확실히 인정함과 동시에 심한 무리는 하지 않고 오로지 주어진 전력 구상에만 공을 들이며 그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시스템 야구를 내세워서
트레이 힐만 감독 부임 이후 8년만의
KBO 한국시리즈 우승에 기여하는데 적지 않은 공을 세웠던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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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질된 김성근 감독 대신 감독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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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 감독으로서 비록 호불호는 상당히 갈릴지언정 감독 커리어로서 한국시리즈 2회 준우승의 나름의 커리어도 있고 코치로서 경험도 꽤나 있기 때문에 타 구단의 감독 - 코치 제의는 많이 왔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