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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57:46

이동현(1983)/선수 경력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이동현(1983)
1. 개요2. 아마추어 시절
2.1. 서울고등학교2.2. 경기고등학교
3. LG 트윈스
3.1. 2001 시즌3.2. 2002 시즌3.3. 2003 시즌3.4. 병역비리와 부상 그리고 기나긴 재활3.5. 2009 시즌3.6. 2010 시즌3.7. 2011 시즌3.8. 2012 시즌3.9. 2013 시즌
3.9.1. 포스트시즌
3.10. 2014 시즌3.11. 2015 시즌
3.11.1. FA
3.12. 2016 시즌3.13. 2017 시즌3.14. 2018 시즌3.15. 2019 시즌
3.15.1. 은퇴
4. 연도별 주요 성적

1. 개요

이동현의 선수 경력을 다룬 문서.

2. 아마추어 시절

2.1. 서울고등학교

영남중학교 때까지 외야수였지만 서울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투수로 전향했다. 훗날 스톡킹에 출연해서 이동현이 술회하길 서울고 당시 체구가 너무 작아 서울고에서 오히려 퇴출 직전이었다고 한다.

2.2. 경기고등학교

고등학교 2학년인 1999년 당시 2000년에 개교 100주년을 맞는 경기고등학교의 야심찬 야구명문 부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스카우트 됐다는 건 사실이 아니라고 스톡킹에 출연하여 밝혔다.

2개월간 키가 15cm 넘게 크면서 성장통을 제대로 겪었고 구동우 당시 경기고 코치의 조련으로 투구폼을 다듬었다고 한다. 이 때 언더핸드에서 정통파 오버핸드로 투구폼까지 교정하면서 곧 전국 레벨의 투수로 성장하게 된다. 1999년(고2) 당시 경기고의 첫 대붕기 전국고교야구대회 우승을 이끌었으며 박찬호 야구 장학금도 받았다.

한편 경기고등학교는 메이저대회 우승을 위해[1] 유망주들을 대거 수집했는데, 이동현과 함께 대표적인 선수가 오승환이며 고3 승급 직전에 한서고에서 경기고로 전학왔다.[2]

2000년(고3) 이동현의 원 맨 팀이나 다름없던 경기고등학교는 제일 먼저 개최된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 8강전에서 김경언, 백승룡, 송산, 김덕윤의 경남상고를 이겼고 준결승전에서는 마산상고에 승리를 거뒀다.

대망의 결승전에서 연투에 따른 피로를 이기지 못한채 3-10으로 2년연속 대통령배 우승을 노리던 부산고에 패하고 준우승을 차지했다. 부산고는 추신수, 김백만, 정근우가 포진했는데 결승전 전날 준결승전에서 이동현은 마산상고와의 경기에도 등판하며 체력을 깎아 먹었으나 추신수는 김백만이 덕수정보고 류제국[3]과의 맞대결에서 완투승을 거둔 덕분에 꿀 같은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그런데 당시 이동현은 5일 동안 4경기에 등판해 4경기 동안 461구를 던졌다. 이는 경기고 야구부의 전체 투구수인 587구 중 78.5%에 해당하는 수치다. 추신수도 진통제를 맞아 가면서 버텼다고 한다. 시상식에서 감투상[4]과 타격상(12타수 6안타, 타율 0.500)을 수상했다.

다음 대회인 청룡기는 서울지역 예선 1회전에서 신일고에 패해 본선에 나오지 않았고, 바로 그 다음 대회인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신일고등학교를 누르고 우승을 차지하면서 100년만에 메이저 대회 우승의 숙원을 풀었다. 이동현은 이 대회에서 MVP와 우수투수상을 차지했다. 참고로 이 때 신일고등학교의 멤버가 채병용이다. 이 때 채병용은 타자였지만. 사실 황금사자기 우승 가도에도 위기가 있었는데 2회전 속초상고와의 경기를 앞두고 동대문야구장 근처 길거리 음식 판매대에서 사먹은 음식이 탈이 나 제 컨디션이 아니었고 13-12로 간신히 이겼다.[5]

이런 맹활약으로 2000년 대한민국 U-18 야구 국가대표팀 김태균, 이대호, 추신수, 정근우등과 차출되어 캐나다 에드먼턴에서 열린 IBAF 청소년야구대회의 우승을 이끌어내며 제2의 황금세대, 또는 에드먼턴 키즈의 일원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승승장구한 이동현과 달리 동창인 오승환은 2학년 때의 부상으로 점차 퇴보하게 되었고, 결국 프로에서 지명을 받지 못한 채 2001년 단국대학교 야구부에 입학했다. 그리고 오승환이 팔꿈치 수술 후 재기에 성공해 삼성의 지명을 받고 신인왕과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하면서 성공적인 데뷔 시즌을 보낸 2005년은, 이동현에게는 흑역사였다. 결과적으로 얘들은 2010년경까지 같이 잘 나간 적이 없다. 그나마 2011년 이후로는 둘 모두 준수하게 활약했다. 하지만 2013 시즌 후 오승환 일본으로 건너갔고, 16시즌 MLB로 진출해버렸다.

3. LG 트윈스

파일:18 이동현.jpg
<colbgcolor=#c30452><colcolor=#fff> LG 트윈스 No.18
이동현
李東炫 | Lee Donghyeon
2001~2019
당시 서울특별시 연고 야구단이 2개인 탓에 일찌감치 LG 트윈스 두산 베어스가 모두 이동현을 1차 지명감으로 점찍어둔 상태였다. 두 구단 간 치열한 스카우트 경쟁 끝에 LG 트윈스가 이동현과 먼저 3억 계약을 따냈고, 두산 베어스에서 이를 수용함으로써 LG 트윈스의 유니폼을 입게 된다. 그리고 이 때부터 양 팀이 주사위로 1차 지명 우선권을 획득하던 관례가 사라지고, 먼저 선수와 계약에 성공하고 발표하는 팀이 그 선수를 최종 확보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보니 더 비싼 계약금을 부르는 팀이 승리자였다. 한편 이동현을 놓친 두산 베어스 휘문고등학교 투수 황규택에게 계약금 2억을 주고 1차 지명으로 뽑았으나, 정작 황규택은 1군에서 단 1개의 공도 못 던진 채 은퇴하고 만다.

여담으로 이동현과 황규택 2000년 3월 13일 동대문야구장에서 열렸던 대통령배 고교야구 서울특별시 예선 첫날의 2번째 경기인 경기고 : 휘문고 경기에서 완투 대결을 벌였다. 이동현은 151구, 황규택147구를 던졌다. 3월 중순 서울의 날씨를 감안하자면 이는 혹사를 넘어 정말 지나친 수준.[6] 전술하였듯이 경기고 마운드를 이동현이 크게 지탱했다 보니, 이미 경기고 시절부터 혹사 문제가 불거져 나왔던 상태였다.[7] 이 경기에서도 이동현이 승리했다.

3.1. 2001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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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2001년 LG 소속으로 프로 무대를 밟게 되었다. 2001년 당시 LG 트윈스 양준혁, 이병규, 김재현의 막강 클린업 트리오 FA 홍현우를 데려오고 한화의 검증된 외국인 선수 로마이어까지 영입하면서 막강 타선을 구성하였다. 반면 투수력은 김용수가 2000년을 끝으로 은퇴했고[8] 장문석, 최향남, 최원호가 모두 전력에서 이탈하면서[9] 선발진이 극히 약화된 상태였다. 이동현으로서는 고졸 신인이지만 강하게 클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2001 시즌 SK와의 개막시리즈 출장을 포함하여 총 33경기에 출장했고 그 중 19경기에 선발로 출장했다. 최종 기록은 4승 6패 평균자책점 5.37 이었다.[10]

LG 트윈스 역사상 처음으로 고졸신인 데뷔해 선발승을 거둔 첫 번째 투수였다. # 6월 7일 잠실 SK전에서 7이닝 2실점으로 구단 역사상 최초의 주인공이 됐다.[11]

3.2. 2002 시즌

한편 2001 시즌 초반, 2할대의 승률을 기록하자 이광은 감독이 해임되고 감독 대행을 거쳐 후임으로 2군 감독[12]이자 수석코치, 감독 대행을 맡았던 김성근이 2001 시즌 후 정식 임명된다. 개판 5분 전인 팀을 중도에 맡았으나 팀을 추스려 6위로 마무리한다.

그리고 김성근 감독의 지도 하에 이동현은 2002년, 2년차 징크스같은 것은 없다는 듯이 대활약한다. 2002 시즌 초반에는 신윤호가 부진하자 마무리로, 이상훈 미국에서 돌아온 후에는 중간계투로 활약하는 등 전천후 불펜으로 뛰면서 8승 3패 7세이브 평균자책점 2.67을 기록했다. 특히 78경기는 2002 시즌 팀 내 최다 출장 기록이었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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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투구 내용으로 알 수 있듯이 불펜 투수가 124이닝을 던졌으며 이중 선발 투수로 등판한 적은 2번 있었다.[14][15] 이런 이동현의 눈부신 활약에 힘입어서 2002년 LG에는 리그 방어율 10위권 내의 투수가 단 한 명도 없었지만 팀 평균자책점은 리그 3위를 기록했고, 4위로 턱걸이한 포스트시즌에서는 한국시리즈까지 내달렸다. 그리고 2002년 한국시리즈 야신으로 대표되는 명 승부였다. 특히 이 포스트 시즌에서 이동현의 활약은 눈부셨는데, 진통제를 맞아 가며 위기상황마다 등판하면서도 10경기 3승 평균자책점 1.99로 역투했다. 그리고 이동현은 이 때의 활약으로 LG 팬들로부터 영구까방권을 획득했다. 하지만 강한 정신력으로 버텼던 LG는 6차전에서 이승엽 마해영에게 백투백 끝내기 홈런을 얻어맞았고, 그렇게 이동현의 데뷔 처음이자 마지막 한국시리즈는 끝났다. 여담으로 한국시리즈 5차전 구원승으로 21년간 LG 최후의 한국시리즈 승리투수로 남아있었다가 LG가 페넌트레이스 우승으로 21년 만에 한국시리즈에 올라간 2023년 2차전에서 함덕주가 구원승을 올리면서 LG의 마지막 한국시리즈 승리투수에서 벗어났다.

이후 KBS N 스포츠의 다큐멘터리인 더 레전드 이상훈편 인터뷰에서 이동현은 2002 KS 6차전 때 불펜 임무를 마친 후 탈진해서 아무것도 모른 채 자고 있다가 큰 소리를 듣고 깼는데, 그 때서야 상황을 뒤늦게 파악했다고 한다.

3.3. 2003 시즌

2003년에는 새 감독 이광환에 의해서 선발로 전환하였으나, 33경기 4승 10패 평균자책점 4.05의 그다지 좋지 않은 성적을 기록했다.

3.4. 병역비리와 부상 그리고 기나긴 재활

2004년에는 이상훈이 새 감독으로 부임한 금지어와의 마찰로 인해 SK 와이번스로 트레이드되고, FA로 영입한 진필중의 부진으로 다시 마무리를 맡아 48경기 1승 3패 12세이브 평균자책점 2.87로 합격점의 활약을 보였다.

그러나 2004년 9월 프로야구 병역비리 사건에 이동현도 연루되어 불구속으로 입건되었다. 그리고 이진영, 이호준 등이 그랬듯이 역시 입영 연기 취소소송을 제기했지만, 결국 패소했다. 그리하여 2005년 8월 22일부터 2006년 6월 1일까지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한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서 2004년, 마무리로 던지다가 8월 25일 문학 SK전에서 경기 도중 팔꿈치 통증을 호소하며 강판된 뒤 2군에 내려갔는데, 이 때부터 장장 5년의 기나긴 재활이 시작되었다. 물론 입단 직후부터 약 3년 반을 무자비하게 굴러다녔던 것이 사실이지만, 누가 봐도 가장 영향이 컸던 건 2002년의 다소 무리했던 혹사였다. 때문에 아직도 김성근 감독의 혹사 논란에서 이름을 찾을 수 있고, 또 그 혹사가 무의미한 혹사가 아니라 LG 팬들에게 2023년 우승 이전까지 가장 최근으로 남아 있던 한국시리즈의 기억(...)에 대한 공헌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대다수의 LG 팬들은 이동현을 절대로 까지 않는다. 심지어 블론을 저질러도 이동현이니까 어쩔 수 없다는 의견이 나왔다. 아무튼 2004년 12월에 첫 번째 토미 존 수술을 받았는데 당시 금지어 감독8개월 만에 그를 실전에서 써먹기 위해 무리한 재활을 지시[16], 결국 얼마 못 가 다시 팔꿈치 통증을 호소했고, 이렇게 또 팔꿈치가 아작난[17] 이동현은 겨우 1년 만에 두 번째 팔꿈치 인대 수술[18]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금지어가 남긴 말이 압권이었다. "재활은 마운드 위에서 하면 된다." 그리고 막상 그 말을 한 감독은 이동현이 소집해제됐을 즈음 감독직에서 잘렸다.

어쨌든 앞에서 언급한 소송에서 패소하는 바람에 꼼짝없이 공익근무요원으로 병역을 이행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2005년 8월 곧바로 공익근무를 시작했다. 하지만 복무 중 앞에서 언급된 팔꿈치 재수술을 받는 바람에 2006년 6월 의병 전역을 하게 되었다. 그 뒤 2007년 1월 LG의 스프링캠프에 합류하여 훈련을 시작했는데 인대가 또 늘어났다. 이 때 야구를 그만두려고 했지만[19] 주위의 도움과 그 자신의 굳은 의지로 결국 2007년 11월에 두 번째 토미 존 수술을 받는다.

3.5. 2009 시즌

약 2년간의 재활을 거쳐 마침내 마운드에 복귀한 것은 2009년 5월 20일 무등 KIA전. 최고 구속은 138km/h,[20] 기나긴 시련이었다. 2009 시즌에는 34경기에 나와 1승[21]과 1홀드, 평균자책점 5.23을 기록했지만, 성적 같은 건 중요하지 않고 일단은 성공적으로 복귀했다는 사실이 고무적이었다. 아니, 그냥 공을 던질 수 있다는 것 자체로만으로도 기적이었다.

3.6. 2010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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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7일 대구에서 열린 삼성과의 개막전에서 승부가 연장까지 이어졌는데 10회말 1사 1,2루의 끝내기 위기에서 올라와 2사 만루에서 박석민을 삼진으로 잡아내는 등 아웃카운트 2개를 삼진으로 잡아내고 시즌 첫 승리투수의 주인공이 되었다.

4월 3일 넥센전 2실점, 4월 9일 두산전 3실점으로 리드를 날리며 흔들렸으나 잔여 4월 경기에서 8경기 무실점을 거두면서 핵심 불펜으로 자리매김했다. 4월 16일 광주 KIA전에서 시즌 2승째를 따냈고, 4월 17일 KIA전도 시즌 첫 홀드, 4월 22일 목동 넥센전은 시즌 2번째 홀드, 4월 25일 잠실 한화전은 시즌 3승째를 올렸다. 5월 2일 문학 SK전은 시즌 3번째 홀드, 5월 4일 잠실 두산전은 시즌 4번째 홀드를 기록했다. 무실점 행진은 5월 12일 청주 한화전에서 비자책점 1점을 내주며 14경기 만에 종료되었고 무자책 기록 역시 다음날 깨졌다.

5월 20일 대구 삼성전 0.1이닝 2실점 이후 구위 회복을 위해 1군에서 잠시 말소되었다. 그러다가 6월 5일에 복귀하였고 6월에 14경기에 등판해 14.1이닝 4실점(1자책)으로 ERA 0.63으로 맹활약하며 순위 경쟁에 큰 힘을 보탰다. 이 기간 홀드 4개를 추가했다. 6월 29일 잠실 넥센전에서는 2.2이닝 무실점으로 2004년 이후 6년 만에 세이브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다만 6월 15일부터 6월 19일까지 5일 연속 등판하면서 혹사 논란이 불거지기도 했다.[22]

다만 잦은 등판이 결국 무리가 왔는지 7월에는 1구원승 2홀드 1세이브를 챙기는 대신 ERA 5.02를 기록하며 3점대 ERA로 소폭 상승했다. 7월 20일 두산전에서 1.1이닝 무실점으로 데뷔 후 처음으로 10홀드를 달성했다. 그러다가 8월에 1구원승 1패 2홀드 2세이브 ERA 1.88로 회복하면서 다시 2점대 ERA가 됐다. 그러나 9월에는 9경기 중 6경기에서 실점하는 등 좋지 못했고 3점대 중반 ERA로 상승하면서 아쉽게 시즌을 마무리해였다.

2010 시즌, 이동현은 셋업맨으로 활약하며 오상민, 김광수 등과 함께 LG 불펜의 필승조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시즌 초반에는 LG로서는 꿈 같은 이야기인 막강한 불펜을 형성하며 팀 내 핵심 선수가 되었다. 그러나 봉중근을 제외한 선발진이 이닝을 먹어주지 못하고 부진하자 곧 불펜의 부담이 심해졌고, 노장인 오상민, 이상열 등이 먼저 컨디션을 잃어가면서 이동현의 부담은 더 커졌다. 결국 시즌 후반으로 갈수록 페이스가 떨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여름 들어 마무리인 오카모토가 맞아 나가자 점차 마무리로 등판하는 일이 잦았고 시즌 후반 그 자신도 구위가 떨어져 김광수에게 바통을 넘기기 전까지 일시적으로 마무리 역할도 했었다. 마치 2002년과 같은 시즌이었고 성적은 2002년에는 조금 못 미치지만 68경기 7승 3패 4세이브 15홀드 평균자책점 3.53. 무엇보다 이게 5년 간 재활하고 인대 수술을 세 번 한 투수의 성적이라는 거다.

성공적으로 복귀한 뒤에는 '내 마지막 남은 인대는 LG에 바치겠다'는 명언을 남겨 LG 팬들에게 감동을 선사했다.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의 대활약과 함께 이동현을 상징하는 장면 중 하나.

오카모토가 퇴출된 2011 시즌, 김광수와 함께 가장 유력한 클로저 후보군에 속해 있었다.

3.7. 2011 시즌

처음에 실점을 제법 한 것에 비해서 갈수록 나아지는 피칭을 보였다. 4월 10일 한화전에서도 등판해 1이닝을 깔끔히 막고 2탈삼진을 기록했다. 부상 복귀의 여파인지 연투를 하면 팔꿈치가 안 좋아지지만 그래도 2경기당 1이닝씩은 막고 들어가 줄 순 있었다.

다만 못할 때는 문자 그대로 훅 가 버린다는 것이 단점.

그러면서 5월초반까지 김광수와 더불어서 주자쌓는 나뭇꾼 노릇하면서 방어율이 7점대를 넘기기까지 하는 등 2010년의 많은 이닝 소화가 문제가 된게 아니냐는 말이 많았는데 그걸 감안해도 너무 긴장을 많이 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5월 중순부터 구위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물론 얻어 맞아서 문제이지만...그 사이에 평균자책점도 6.48까지 어찌어찌 낮췄다. 그리고 5월 22일 롯데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1⅓이닝을 깔끔하게 막고 마지막타자는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이 경기에서 연신 150Km/h 이상을 뻥뻥 꽂고 제구도 웬일로 잘 되더니만 154Km/h까지 기록하는 기염을 토해냈다. 2011년 자신의 최고구속을 경신했고 더군다나 제구까지 잘됐다. 구위를 되찾은 이동현의 향후 모습이 기대될 했다.

그후 좋은 모습을 보이며 6월 7일 한화 이글스전에서도 ⅔이닝을 삼진 두 개로 끝내버리며 평균자책점도 4점대 중후반까지 끌어내렸다. 그러나 6월 15일 대구 삼성전에서 아웃카운트 겨우 한 개 잡고 5실점하면서 무너져 버렸다.

2011 시즌 들쑥날쑥한 피칭에 대한 문제점에 대해서는 여러 지적이 있지만 대체로 2010 시즌 무리한 투구가 영향을 미쳤다는 의견이 있었다. 팔꿈치가 좋지 않은 투수가 68경기나 나와서 74이닝이나 던지게 한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었다는 평. 당시 LG가 일찌감치 DTD를 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박종훈 감독은 너무나 자주 그를 기용했다. 여기에 시즌 초반 구속이 전혀 살아나지 않는 모습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동현에게 2군행 등을 통해 휴식을 주지 않은 박종훈 감독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았다.

2011년 6월 28일 현재 LG가 치른 66경기 중 자그마치 30경기에 출장했으며 이닝도 26⅔이닝이나 먹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여기에 19살 고졸신인 임찬규까지 보직도 없이 노예로 구르다가 부진에 빠지고, 김선규가 출근도장 찍으면서 혹사당하고 있는 판국과 맞물려 박종훈의 투수진 운영에 대한 많은 비판이 일었다.

다만 선수 본인 역시 예전과 달리 지나치게 긴장하고 있다는 비판도 있었다. 큰 점수 차에선 부담 없이 잘 던짐에도 불구하고[23] 박빙의 상황에선 지나친 변화구 구사로 볼카운트를 불리하게 가져가다가 얻어맞는 패턴을 보였다.

전반기 막판 2군으로 떨어졌다가 후반기 시작과 동시에 양승진과 함께 1군에 올랐다.

아는 사람들만 아는 8월 8일 쌍마 청문회(라고는 해도 그냥 열명 남짓이 LG팀 버스 내리는데서 항의시위)에서 넘버 원의 모습을 보여줬는데, 야구 빠따를 들고 나왔다...고 후기에 나와있는데 나중에 나온 현장영상의 분위기와 후기가 워낙 달라서 얼마나 믿을 수 있는지는 미지수[24][25]. 할 말 있으면 내 앞에서 해

시즌 최종 성적은 38경기 출전 33이닝 1승 2패 2세이브 7홀드 30탈삼진, 평균자책점 6.27로 작년에 비해 크게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3.8. 2012 시즌

초반엔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이며 2군으로 내려갔지만, 복귀 후에 유원상과 더불어 승리조로 활약했다.

시즌 최종 성적은 52경기 출전 56⅔이닝 2승 2패 6홀드 56탈삼진, 평균자책점 3.02를 기록하였다.

3.9. 2013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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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 5일 정규시즌 2위가 확정된 뒤
유원상이 부상으로 빠져 있는 가운데 팀의 중간계투로 만점 활약을 했다. 특히 5월 26일 잠실에서 열린 SK 와이번스전에서 스코어 0:0, 5회초 2사 만루 상황에 등판해 이재원에게 3구 연속 볼을 던져 위기를 맞았지만, 풀 카운트를 만든 뒤 6구째 슬라이더로 이재원을 루킹 삼진 처리했다. 풀카운트에 몰린 상황에서 변화구를 뿌리는 배짱투로 실점 하지 않고 위기를 넘긴 것이었다. 여전히 스코어 0:0인 7회초에는 세 타자를 연속 삼진으로 돌려 세우는 등, 이동현은 이 날 3이닝 46투구수 1피안타 5탈삼진 무실점을 기록했다. 그리고 팀은 팀은 9회말에 정의윤이 끝내기 안타를 쳐서 스코어 0:1로 승리했다.

5월 30일 한화전에서는 3:0으로 지고 있던 8회초에 등판하여 김태균 추승우에게 연속 안타를 맞고 무사 1,2루의 위기를 자초했지만 김경언 한상훈을 각각 병살타와 땅볼로 처리한 뒤 8회 팀이 놀랍게도 5득점하면서 시즌 2승째를 기록했다.

7월 5일 넥센과의 대결에서 주자 1, 3루 상황에 박병호와 승부를 펼치지만, 박병호에게 3점 홈런을 내주며 팀 패배의 원인을 제공한다.

8월 16일까지 성적은 48경기 출전 55.1이닝 6승 무패 1세이브 19홀드 평균자책점 2.44로 LG의 필승조로서 좋은 성적을 냈다. 다만 시즌 후반 들어 타이트한 경기가 많아지면서 너무 자주 나왔다는 게 문제. 정현욱 유원상의 컨디션이 정상이 아니라 혼자서 필승조 역할을 도맡아야 했다. 그 여파로 페이스가 떨어졌고, 그 결과 8월 28일 넥센과의 홈경기에서 8회초 1아웃에서 이택근에게 2루타를 맞은 뒤 7월 5일 자신을 상대로 홈런을 쳤던 박병호에게 또 홈런을 허용하여 패전투수가 되었다. 다만 이번 시즌에 이동현은 넥센에 몹시 약했다. 다름 팀 상대로는 2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는데 넥센 상대로는 16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거기에 넥센의 4번타자 박병호 상대로는 5타수 5안타에 피홈런 두 개.

9월 들어 유원상이 자기 폼을 되찾으면서 그나마 숨통이 트였다.

정규시즌 최종 성적은 64경기 72이닝 6승 3패 1세이브 25홀드(2위) 53탈삼진에 ERA 3.00 FIP 3.81로 2013시즌에서 리그 정상급 우완 중계투수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포스트시즌에서의 활약이 기대되었다.

3.9.1. 포스트시즌

10월 16일 잠실 야구장에서 열린 두산 베어스와의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스코어 2:2인 6회초 1사 1, 2루 상황에서 선발 투수 류제국에 이어 등판하여 9번타자 김재호를 더블플레이로 잡고 이닝을 끝냈다.

여전히 스코어 2:2인 7회초에 선두 타자 이종욱에게 안타, 정수빈에게 희생번트를 허용하고 이상열로 교체되었는데, 이상열이 3번타자 김현수를 2루땅볼 진루타로 잘 잡아내고 바뀐 투수 유원상이 4번타자 최준석을 상대로 내야를 벗어나지 못하고 3-유 간에 크게 원바운드된 타구를 유도했지만, 이를 3루수 정성훈이 잡지 못하는 실책을 저지르는 바람에 3루주자 이종욱이 홈으로 들어와 이동현이 실점했다. 결국 이 점수가 결승점이 되어 팀이 스코어 4:2로 패하는 바람에, 이동현은 이 날 1이닝 8투구수 1피안타 1실점 비자책점으로 패전투수가 되었다.

10월 17일 잠실에서 열린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는 레다메스 리즈가 8이닝 무실점 호투하고 봉중근이 1이닝을 삼자범퇴로 처리하여 팀이 스코어 0:2로 이겼기 때문에 이동현은 이 날 등판하지 않았다.

10월 19일 잠실 야구장에서 열린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는 팀이 스코어 3:5으로 지던 7회말 무사 1, 2루 상황에서 유원상에 이어 5번째 투수로 나와 승계주자를 포함하여 한 점도 내주지 않고 2이닝 20투구수 무피안타 무사사구 1탈삼진 무실점으로 호투했지만, 팀은 스코어 4:5인 9회초 1사 2루에서 안타 2개를 치고도 외야수 홈 보살을 두 차례 당하며 패하였다.

10월 20일 잠실 야구장에서 열린 플레이오프 4차전에서는 팀이 스코어 1:4로 지던 8회말 1사 3루에서 봉중근에 이어 4번째 투수로 등판하여 첫 타자이자 7번타자인 민병헌에게 초구만에 1타점 적시타를 맞았으나 다음 타자인 최재훈을 상대로 6-4-3 병살을 유도해 이닝을 마무리했다. 이 날 이동현은 0⅔이닝 3투구수 1피안타 무실점을 기록했고, 팀은 스코어 1:5로 패해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하면서 이동현도 2013 시즌을 마감했다.

이동현은 2013년 플레이오프에서 3경기 3⅔이닝 2피안타 1탈삼진 1실점 비자책점, 1패를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1승 3패로 탈락했다.

시즌 전체를 평하자면 2009년 이후 최고의 시즌으로 평할 만한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혹사를 견디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줬기에 2014년 시즌에도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2010년에도 2013년과 비슷한 경기수와 이닝을 소화했지만 다음 해에 드러누웠었다.

정국노였던 어떤 투수의 삼성 시절, 안지만이 2013년 롸켓 역할을 하다 드러누운 게 떠오를 정도로 2013년에 이동현은 심할 정도로 굴렀다.

3.10. 2014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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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 2015 시즌

파일:2015 이동현.jpg
5월 9일 기준으로 16.2이닝을 투구하여 14K 4BB 3실점 3자책점으로 평균자책점 1.62, FIP 2.57을 기록하고 있다. 올해도 어김없이 좋은 투구내용을 보여주며 활약을 이어나가는 중이다.

5월 10일 수원 kt 위즈 파크에서 열린 kt wiz와의 원정 경기 중 7회 말 스코어 1:1 주자 2사 1,3루 상황에서 루카스 하렐의 뒤를 이어 등판, 1점을 분식회계하여 1-2 역전을 허용했다. 이후 8회 말까지 1.1이닝을 무실점으로 막고 팀은 8회 초에 박지규의 3타점 3루타에 힘입어 역전, 6:2로 경기가 끝나 승리 투수가 되었다. 시즌 전적은 4승 3홀드 2세이브가 되며 1선발 헨리 소사를 제치고 팀 내 다승 1위가 되었다.

5월 14일 NC 다이노스와의 홈 경기에서 9회 말에 등판, 만루까지 허용하며 위기를 맞이했으나 실점하지 않고 막아냈다. 그러나 투구 도중 다리에 이상이 생겼는지 부축을 받으며 퇴장해 LG 팬들의 우려와 걱정을 샀다. 병원 검진 결과 이상이 없다고 했으나 양상문은 SK와의 주말 3연전에는 기용하지 않겠다고 밝혔다.[26]

6월 27일 NC 다이노스와의 홈 경기에서 승리투수가 되어서 시즌 5승을 거두었다. 이 날까지 이동현은 올 시즌 한 번도 패전을 기록하지 않았다.

하지만 7월 3일 삼성과의 경기에서 3점차 리드 상황에서 구원등판하여 아웃을 하나도 못잡고 연속 5안타를 맞고 5실점을 하고 첫 패전을 기록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인 7월 10일 한화전에서는 5-5 동점 상황에서 등판했으나 선두타자에게 볼넷을 내준후 후속타자의 번트타구에 악송구를 저지르며 무사 2,3루의 위기를 자초했다. 다음 타자가 4번 타자인 김태균이라 고의사구로 거르며 무사 만루 상황에서 어이없는 폭투로 1점을 헌납한 후 봉중근으로 교체되었다. 결국 역전하지 못하고 2패를 기록했다.

7월 부진에 대해 걱정여론이 형성되고 있다. 까는것도 자진해서 2군 갔다오라는 것 말고는 없으며, 대부분의 팬들은 가뜩이나 팔꿈치도 엉망인데 무릎 부상의 여파가 지금도 있지 않냐는 평. 일단 잠실 한화전 이후로 올스타 브레이크 휴식일로 인한 재정비 목적과 성적 등에 의한 문책성으로 2군에 내려갔다.

7월 26일 1군 복귀하여 9회초 1아웃 상황에서 진해수와 교체, 공 4개로 윤요섭 박경수를 모두 3루 땅볼로 처리하며 경기를 마무리했다.

7월 29일 롯데전에 8회 2사 부터 등판해 9회까지 잘 막았고 10회 다시 마운드에 올랐으나 10회말 아두치의 안타와 1사 후 안중열의 안타로 1-3루 위기에 몰리며 봉중근에게 마운드를 넘겼지만 봉중근이 박종윤에게 끝내기 안타를 맞으면서 자신의 책임주자가 득점하는 바람에 패전투수가 되고 말았다.

8월 11일에는 8회 1사 유원상 다음으로 등판, 유원상의 승리를 지켜주었다.
파일:external/1.bp.blogspot.com/cd9eabded79ec39a7ef8f4a05f6b3e6b.gif
8월 14일 경기에서는 부러진 배트가 몸에 맞는 아찔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불행중 다행으로 단순 타박상만 입었다.[27]

그러나 이후에도 썩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하면서 평균자책점이 4점대 중반까지 폭등했다. 초반에 신나게 불 지르던 봉중근(4.61)하고 동급일 지경으로, 9월 3일 기준 이동현의 성적은 아래와 같다.
경기 이닝 삼진 피홈런 피안타 실점 자책점 4사구 폭투 보크 ERA FIP
53 53.2 49 3 56 29 27 24 7 0 4.53 3.36

보다시피 FIP에 비해 ERA가 1점 이상 높다. 세부적으로 보면 BABIP이 .346에 이를 정도로 높게 형성되고 있으며, 잔루율(LOB%)이 65.5%로 리그 평균에 비해 5~10%정도 낮은 수치를 보이고 있다. 한편 K/9는 8.22, BB/9는 3.02, HR/9는 0.5로, 평년에 비해 비슷하거나 오히려 좋은 기록으로, 전형적인 불운에 시달리고 있는 투수의 유형이다. 피OPS는 .710대로, 평년에 비하면 3푼 가량 올라간 편이지만 이는 BABIP 때문에 피안타율이 자연적으로 높아진 영향으로 봐야 한다. 빗맞은 타구들은 안타가 되고, 주로 득점권에 안타를 맞는데다 뒤에 자주 나오는 투수가 툭하면 분식회계를 시전하니 자연적으로 평균자책점이 올라가는 상황으로 보인다.

9월 9일에는 7번째 투수로 등판해 1.1이닝 무실점을 기록하였다.

5승 5패 4세이브 11홀드 ERA 4.40으로 시즌을 마쳤으나, 이는 못 했다고 볼 수 없다. 왜냐 하면 수비무관평균자책점(FIP)는 2014년(4.12)보다 좋은 3.43, WAR은 심지어 지난 3시즌 동안 가장 높은 1.19를 기록. 즉 본인이 못한 게 아닌 봉중근 등 뒷투수들의 분식 희생양이 되었고,거기에 BABIP가 비정상적으로 높다.(0.359) 이쯤 되면 그냥 운이 엿인 거지, 절대 본인이 못한 게 아니다.

시즌 후 이상훈의 LG 코치 복귀 소식이 들리자, 바로 이상훈에게 전화했다고 한다. 이동현의 프로 2년차 때 메이저에서 돌아온 이상훈은 이동현의 야구관에 큰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3.11.1. FA

2015 시즌 후 FA를 신청했다. 구단과 협상을 진행 중이지만, 우선협상 마지막 날까지도 관련 기사가 거의 없는 걸로 봐서, 협상 결과가 박용택처럼 낮에 나올듯 싶었다.

마감일에 3년 총액 30억 원의 조건으로 LG와 재계약을 맺었다는 기사가 났다.[28]

3.12. 2016 시즌

파일:2016 이동현(통산 8번째 100홀드.jpg
역대 8번째 통산 100홀드 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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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3. 2017 시즌

파일:2017 이동현.jpg
넥센과의 개막전에서 홀드를 기록하며 좋은 모습을 보이며 출발하였으나 시즌 개막 일주일도 안 되어 옆구리 부상으로 1군에서 제외되었다. 두 달 쯤 흐른 5월 말 1군으로 콜업되었으며 표본은 적지만 무실점을 기록하며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6월 8일 kt전에서는 5-4로 앞선 9회말 2사 2루 상황에서 등판하여 박경수를 삼진 처리하면서 세이브를 올렸다. 삼진 콜이 나온 후 포효하는 모습이 압권.

6월 27일 롯데전 연장 10회말부터 등판해 2.1이닝을 잘 막았으나 1사 1, 2루에서 전준우의 안타를 중견수 안익훈이 놓쳐 비자책 패전투수가 되고 말았다. 12회초 배트를 들고 타석에 선 모습이 포인트.

7월 12일 SK전에서 만루 위기를 2번이나 무실점으로 막아내며 팀을 수호했다. 첫 번째 만루 위기에서는 상대 쪽에서 대타로 그 분을 내밀었으나 외야플라이로 막았고, 두 번째 만루 위기는 강승호의 수비 실수로 만들어졌으나, 최정을 삼진으로 잡아낸 후 한동민을 거르고 김동엽을 선택하여 외야 플라이로 막아내었다.

8월 31일 넥센전에서는 아웃카운트가 2개 남은 상황에서 연속 안타와 몸에 맞는 볼을 내주더니 고종욱에게 결국 만루홈런을 내주면서 역전패의 원흉이 되었다. 잘 던지는 진해수를 또 이닝 쪼개면서 바꾼 양상문의 고질병 탓도 있지만 그렇다고 만루홈런까지 맞은 이동현에게 책임이 없진 않다.

9월 9일 두산전에서 8회초 등판해 무피안타 2탈삼진으로 두산 타선을 틀어막았다. 새벽에 산부인과에서 뜬눈으로 부인 곁을 지키면서 등판이 확실시되지 않았는데 깔끔하게 세이브를 올렸다. 아들도 태어났고 팀도 연승가도를 달리면서 5위로 올라왔는데 여러모로 이동현에게 뜻깊은 날이 되었다.

그러나 9월 19일 무사 3루에서 김지용의 뒤를 이어 올라왔는데, 주자를 불러들이며 분식 블론을 저지르더니 아예 타자 일순을 당하다 끝내 로하스에 만루홈런까지 내주며 6대 7의 스코어를 순식간에 15대 7로 바꾸는 데뷔 이래 최악의 피칭을 선보이고 말았다. 중간의 오지환- 손주인의 실책이 겹쳐 이 날의 기록은 0.1이닝 7자책, 즉 ERA가 189.00(...)이다.[29]

9월 30일 삼성전에서 9회초 3대3 상황에서 허프에 이어 등판해 이승엽을 포함한 3타자를 모두 땅볼로 처리했고,[30] 9회말 2사 만루에서 나온 안익훈의 끝내기 내야안타로 승리투수가 되었다. 여담으로 경기 전 줄을 서서 이승엽에게 사인을 받는 장면이 포착되었다.

3.14. 2018 시즌

4월 3일 16안타를 치고도 꼴랑 4점만 지원한 타선 덕에 연장 11회말까지 끌려오자 등판했으나 1사 1,2루를 만들고 최성훈과 교체되었다. 최성훈이 최주환에 끝내기 2루타를 얻어맞아 패전투수가 되었다.

이후 1군에서 말소되어 2군으로 갔으며 4월 21일 다시 1군으로 콜업되었다.

4월 25일 8회 1사에 진해수를 이어 등판해 지루한 견제 퍼레이드 끝에 김하성 하나만 잡고 정찬헌과 교체되었다.

5월, 결국 엘지 모든 불펜 요원들과 함께 장렬히 산화하고 말았다. 한달간 평자가 10점에 육박하는 중.

6월 6일 한화전 7회 1사에서 2구만에 정근우에 2루타를 맞고 즉시 내려갔다. 최성훈의 분식으로 방어율이 8.10까지 상승.

전반기까지의 성적은 28경기 27이닝 1승 1패 4홀드 ERA 5.67.

7월 24일 삼성전에서 1.1이닝 5실점으로 얻어터지면서 이 날까지의 성적은 2승 1패 4홀드 30이닝 평자 7.80.

아시안게임 브레이크를 거쳐 회복하기를 바랐지만... 여전히 구위가 살아나지 않아 9월 7일 NC전 0.2이닝 5실점 붕괴. 평균자책점은 9.10까지 치솟았다.

결국 2016년을 능가하는 최악의 커리어 로우 시즌이 되고 말았다.

3.15. 2019 시즌

파일:2019 이동현.jpg
2018년의 부진 때문에 연봉이 6억에서 무려 5억이나 삭감된 1억에 계약했다. 삭감률은 무려 83.3%.

간간히 2군 경기에 마무리 투수로 등판하는 중이다.

첫 1군 등판이 이루어졌다. 8월 9일 등록되었으며 8월 14일 잠실 야구장 키움 히어로즈전.. 에 올해 1군 마운드에 첫 등판.. 6회 강정현에 이어 세번째 투수로 출전.. 서건창에게 6구 안타 허용했지만 무실점..7회 김혜성에게 4구 안타 허용했지만 무실점.. 넥동현답지 않은 호투를 보여주며 1⅔이닝 26투구수 (S:17, B:9) 2피안타 무실점으로 막아냈다.

8월 16일 잠실 야구장 두산 베어스전 8회 배재준에 이어 4번째 투수로 출전.. 호세 미겔 페르난데스에게 2구 내야안타 허용했지만 무실점.. 1이닝 16투구수 (S:10, B:6) 1피안타 3삼진을 기록하였다.
파일:롸켓통산700경기.jpg
이동현 통산 700경기 출장
8월 22일 잠실 야구장 NC 다이노스 경기 8회 세번째 투수로 등판하여 이상호에게 4구 땅볼아웃, 김성욱에게 4구 파울플라이, 김찬형에게 4구 안타 허용했지만 김태진에게 1구 플라이로 이닝을 마무리 지었다. 1이닝 13투구수 (S:10, B:3) 1피안타 무실점을 기록하였고 동시에 통산 700경기 출장을 달성하였다. 이닝을 마치고 덕아웃으로 들어와 그 동안의 고생이 생각나서였는지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혔다. 영상 [31]

8월 23일 1군 엔트리에서 말소되었다. 류중일 감독은 이상규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서라고 했는데, 다음날 아침 현역에서 은퇴한다는 기사가 떴다. # 여러 팬들이 700경기 달성 직후 이동현이 눈물을 흘리는 것과 바로 이어진 엔트리 말소에 대해 "혹시 이게 마지막인가?" 라는 추측도 있었는데 결국 실제로 은퇴를 선언했다. 이에 구단은 현재 이동현의 은퇴를 만류하고 있는 상황이다. #

8월 24일 올라온 기사에 따르면 일단 은퇴는 보류했고, 배려 차원에서 1군과 동행하기로 했다고 한다. [32]


700경기가 마지막, LG 이동현도 은퇴한다.

8월 26일 인터뷰에서도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 주기 위해 은퇴를 선택한다는 말을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후배들에게 밀려 자리가 없어지면 주저하지 않고 그만두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이 지금이었다. 아직도 실감이 잘 나지 않고 혼란스러울 때도 있지만 절대 후회는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

8월 27일 페이스북을 통해 은퇴심경을 담은 장문의 글을 게시하였다. #
먼저 이렇게 떠나게 되는 것에 죄송하고 또는 미안함에직접 글을 남깁니다. 많은 일들로 저의 은퇴결정이 희석되고 또는 다른 판단의 내용으로 생각하시는 것에 저의 지인 또는, 가족들이 상처받는 것에 저 스스로 상처가 되어 떠나기 보다는 저의 입장을 이해하고 알아주시길 바라는 마음에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2000년 8월에 입사해서 고등학생 신분으로 LG TWINS에 입단하게 되었고 이후로 2019년 8월 22일에 이제는 퇴사하려 합니다. 어찌보면 저의 살아온 인생의 절반 이상을 LG라는 대기업에 기여했다 생각하고 또는 그랬기에 LG에 저의 모든걸 걸어왔습니다. 단 한번 도창피하지않았고 저 스스로는 자랑스럽고 영광이었습니다. 저의 결정에 있어 단 한번도 강요나 강합은 없습니다. 저는 실력이 모자라 떠나는 지나가는 선수입니다.. 다만 어떤 누군가의 인터뷰 내용에 인대를 바친다는 말 한마디가 팬의 마음을 울렸을뿐 어느 선수와는 다르지않을거란 생각에 이런 결정을 했지만 솔직히 후회합니다. 하지만 뜨거운 함성을 들었고 저 나름대로는 많은노력을 했거든요.. 저의 은퇴 의사가 다른 타인의 기사와 희석되며 가려져도 저의 씩씩한결정과 저의 야구인생에있어 보여드렸던 모습이 다르다면 아쉬운결정일진 모르지만 저의 힘든 결정에 응원해주시는 팬들에 감사함을 이 글로나마 대신함에 너그러히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저의 이런 결단이 어찌되었건 평생 LG 야구단을응원할 것이며 다만 아쉽다면 우리 LG가 우승하는 순간에 나의 인대를 팀에 받치겠다는 약속 지키지 못한거에 아쉽지만 이제는 제가 아닌 저희 아들 정후가 야구를하겠다고 하면 함께 공던져줄 인대는 남겨놓았다생각해주세요.. LG에 입단하게끔 하려면 아빠가 도와야사잖아요;; 함께 켓치볼 해야하기에 이해 해주시길바랍니다.. 저의 팬이자 LG의 최고인 팬 여러분 그동안 아쉬움에 사랑에 감사드리고 그 열정과 사랑에 보답해드리지 못했지만 보여주신 사랑에 감사함에 고마움에 이제 팬들과 함께 팬으로서 TWINS를 응원합니다. 그동안 선수 이동현을 응원해주심에 감사드리며 이제 TWINS의 18번 이동현은 감사한 마음 진심으로 가슴속깊이 담고 떠나겠습니다.

한편 2019년 8월 말 현재 백업 타자들에게 배팅볼을 던져주고 있다고 한다. 트윈스에 헌신하는 그의 마음을 또 한 번 느낄 수 있는 대목.

3.15.1. 은퇴

2019년 9월 29일 잠실야구장 두산베어스 16차전으로 은퇴식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이날 701번째이자 마지막 등판이 예정돼 있다. 시구는 이동현 투수의 부친으로 직접 아들인 이동현 투수가 요청했다고 한다. 클립 영상 은퇴 경기는 7회초에 이뤄졌다. 마운드에 올라온 이동현은 박세혁을 삼진 처리하면서 19년간의 현역 생활을 마무리 했다. 그리고 이 날의 임시 투수코치는 바로 박용택이었으며 두 선수가 껴안는 장면에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클립 영상






Good Bye! Rocket!

4. 연도별 주요 성적

파일:이동현.jpg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01 LG 33 105⅔ 4 6 0 0 0.400 5.37 130 15 58 51 71 63 1.760
2002 78
(1위)
124⅔ 8 3 7 6 0.727 2.67 110 13 48 106 39 37 1.227
2003 33 95⅔ 4 10 0 0 0.286 4.05 105 14 45 57 47 43 1.516
2004 48 53⅓ 1 3 12 5 0.250 2.87 46 1 27 48 18 17 1.350
2005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
2006
2007 1군 기록 없음
2008
2009 34 41⅓ 1 0 0 1 1.000 5.23 39 7 28 30 24 24 1.621
2010 68
(5위)
74 7 3 4 15 0.700 3.53 65 5 37 58 38 29 1.338
2011 38 33 1 1 2 7 0.500 6.27 39 3 25 30 29 23 1.848
2012 52 56⅔ 2 2 0 6 0.500 3.02 43 1 18 56 20 19 1.076
2013 64
(5위)
72 6 3 1 25
(2위)
0.667 3.00 70 4 28 53 29 24 1.319
2014 61 59⅓ 5 1 2 23
(3위)
0.833 2.73 54 2 29 38 18 18 1.264
2015 60 59⅓ 5 5 4 11 0.500 4.40 65 4 20 55 33 29 1.433
2016 46 43⅓ 4 3 2 5 0.571 5.40 54 5 17 38 26 26 1.57
2017 45 56⅔ 3 6 7 5 0.333 4.80 52 4 13 39 30 27 1.22
2018 36 36⅓ 2 1 0 4 0.667 7.93 49 6 10 23 35 32 1.54
2019 5 5 0 0 0 0 0.000 0.00 6 0 0 5 0 0 1.20
KBO 통산
(15시즌)
701 910⅓ 53 47 41 113 0.530 4.06 927 84 432 687 457 411 1.42


[1] 서울 동대문야구장에서 열리는 4개 대회(대통령배, 청룡기, 황금사자기, 봉황대기)를 뜻한다. 경기고는 1998년 봉황대기 결승까지 진출했으나 경남고의 송승준에 막히며 준우승의 아픔을 겪었다. [2] 한서고 동료 채병용은 신일고로 갔다. [3] 덕수정보고는 1회전에서 경남고를 만났는데 투수 이대호가 2-3 완투패를 기록했다. 이대호는 1회 3실점 후 2회부터 8회까지 노히트노런(!)을 기록하며 8탈삼진, 류제국은 15탈삼진을 기록했다. [4] 준우승팀 에이스투수에게 수여한다. [5] 당시 대회에 전남대표로 출전한 순천효천고에는 이동현의 사촌 이승철이 뛰고 있었다. [6] 정영일은 진흥고 시절이던 2006년 242구를 던진 적이 있었다. 결과는 다 알다시피..... [7] 출처 : 관련 블로그 [8] 김용수 이광은 감독과의 불화로 사실상 반 강제적으로 은퇴했는데, 방어율이 5점대였지만, 127이닝을 소화했었다. 당시 그의 나이가 41세라는 점에서 놀라울 따름이다, 그리고 후임 감독이 노장 선수를 선호하는 김성근이라는 점에서 잘 하면 김용수는 2002~2003년까지도 현역으로 있었을지도 몰랐을 일이고, 그랬다면 신윤호와 이동현의 부담도 크게 덜어졌을 것이다. [9] LG 사상 최고의 용병 투수 중 하나로 꼽히는 데니 해리거가 남아 있었으나 결과론적으로 해리거도 2001년에 8승 11패 ERA 4.62로 부진했다. 2000년 기록은 17승 10패 평균자책점 3.12. [10] 한편 2001 시즌의 신데렐라는 신윤호였다. 15승 6패 18세이브 32세이브포인트 평균자책점 3.12로 3관왕(다승, 승률, 구원)을 차지했다. 거기에 골든 글러브까지 받았다. 참고로 신윤호의 선수 생활 13년 통산 승수는 28승이다(…). [11] 타구단에 비해 많이 늦은 기록이다. 해태는 문희수 이대진, 김상진, 한화는 정민철, 롯데는 염종석 주형광, 현대는 박정현 김수경, 삼성은 김진웅, 두산은 박명환, 쌍방울은 김원형, 심지어 신생팀인 SK조차도 이승호가 고졸신인 데뷔 첫해 선발승을 LG보다 먼저 기록했다. [12] 2001년에 2군 감독으로 영입되었으나 2001년 팀이 부진에 접어들즈음에 수석코치로 승격되었다. [13] 류택현이 70경기 남짓 나왔지만 원 포인트 릴리프였기에 긴 이닝을 먹지는 않았다. [14] 이후 2009년 김성근 아래서 혹사당하며 전천후로 등판해 133이닝을 던진 전병두도 있지만 전병두는 순수 불펜으로 나온 이동현과 다르게 그해 선발로 몇 번 등판한 적 있다. [15] 똑같이 김성근에게 혹사당했던 2010년의 정우람이 102이닝, 2015년의 권혁이 112이닝을 소화한 것을 보면 이게 얼마나 심한 혹사인지 알 수 있다. 한국시리즈만 뛴 정우람이나 정규시즌 끝나고 푹 쉰 권혁과 달리 준플부터 코시까지 풀로 구른 건 써비스. 게다가 정우람은 시즌 133경기 체제에서 102이닝을, 권혁은 시즌 144경기 체제에서 112이닝을 소화하였다. 이동현은 133경기 체제에서 무려 불펜으로 124이닝을 던졌다. [16] 참고로 토미 존 수술 시 재활 기간은 아무리 빨라도 1년~1년 반은 잡아야 한다. 비슷한 시기 KIA의 신용운 역시 토미 존 수술을 받고 재활 중이었는데 당시 감독이던 서정환이 1년도 안 되어 무리하게 당겨썼다가 결국 커리어를 망치고 말았다. [17] 첫 번째 수술 때 뼈에 크랙이 가면서 인대를 잘못 물게 되었고 미처 수습되지 못한 뼛조각이 그 주위를 돌아다녔다. [18] 토미 존 수술은 아니다. 뼛조각 제거와 인대를 다시 핀으로 고정하는 수술이었다. 나중에 스톡킹에서 밝히길 인대를 핀으로 고정하기 위해 뼛조각을 제거할 때 무려 28개나 나왔다고 한다. [19] 인대 수술을 세 번 하고 복귀한 선수는 전 세계적으로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20] 단, 무등 구장 스피드 건에 142km/h까지 찍히기도 했다. [21] 시즌 최종전에서 3이닝 1실점하고 거둔 승리다. [22] 그 여파인지 6월 22일과 23일 문학 SK전에서는 0.1이닝 비자책 3실점, 0이닝 2볼넷으로 장작을 쌓으며 좋지 않았다. [23] 다만, 공 자체의 위력이 떨어진 건지 7월 30일 삼성전에선 7점 차의 큰 리드 속에서 나왔음에도 상대한 2명의 타자에게 연속 2루타를 허용하면서 바로 교체되었다. [24] 영상 자체엔 이동현 관련 내용은 없다. [25] 은퇴후에 본인이 스톡킹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당시에 지인에게 전달할 정의윤의 싸인볼과 배트를 들고 가던 상황에서 생긴 오해라고 한다. [26] 결국 마지막 경기에 나와 1과2/3이닝 을 던지고 홀드를 챙겼다,사실 세이브도 가능해 보였으나 경기 종료를 한 차례 남겨 두고 봉포극장과 교체되어 세이브를 양보했다. [27] 결국 이 때문에 몸이 제대로 풀리지도 않은 봉중근이 올라와 4실점을 하고 말았다. 엘지 지못미. [28] 구단은 2+1년에다가 20억대 중반을, 본인은 4년 35억을 제안했다는 말이 있다. [29] 엄밀히 말해서 손주인의 실책은 병살로 이닝이 끝날 수 있었던 상황에서 저질러졌던 일이라 이동현의 자책점은 실질적으로 0점이 될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팬들은 당연히 피해자인 이동현 말고 손주인을 미친듯이 깠다. 덤으로 멘탈이 나가 한가운데 배팅볼만 던지는 이동현을 놔두고 멀쩡한 포수를 뜬금없이 교체하는 기행을 저지른 양상문도 신나게 까였다. 진작 고우석을 투입했다면 경기는 알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 [30] 단 이승엽은 좌전 안타성 타구를 날린 게 시프트에 걸린 것이었다. [31] 역대 LG투수로는 前 선수였던 오상민, 이상열 / 現 kt 코치 류택현에 이어 4번째이며 LG소속으로만 700경기 출장은 류택현 코치에 이어 두번째.. 2012년 ~ 2015년 4년 연속 50경기 출장, 역대 800번째 100홀드 달성, 최소투구 (1구)승리와 세이브를 기록한 동시 보유자이기도 하다. 본인으로써도 700경기 출장을 원했었는데 그 700경기가 달성된셈... 더군다나 좌완과는 달리 등판하면 최소 1이닝 정도는 채우는 우완 중간계투의 특성 상 이동현의 700경기는 더욱 의미가 다르다. [32] 구단 측에서 내년이면 데뷔 20년차 이기 때문에 그때까지 뛰는 것은 어떠냐며 선수의 은퇴를 만류하는 것도 있고, 차명석 단장은 이동현의 은퇴 경기 및 은퇴식과 향후 구단과 함께 일항 방법 등을 모색하고 있어서 은퇴가 유보되었다고 언급했다. 덧붙이자면 내년에 박용택도 은퇴할 예정인고로 팀의 투타 상징이 같이 은퇴하는 것도 모양새가 좋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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