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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8 02:17:12

사와무라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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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국 프로야구 리그 최우수 투수 수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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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LB NPB KBO
사이 영 상 사와무라 상 최동원 상



1. 개요
1.1. 투표 기준1.2. 수상에서의 예외1.3. 기록들
2. 역대 수상자 명단3. 논란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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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沢村栄治賞

사와무라 에이지 상(賞), 통칭 사와무라 상(沢村賞). 전설이자 비운의 투수였던 사와무라 에이지를 기리는 의미에서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

일본프로야구에서 매년 그 해의 최고 투수에게 수여하는 상이며 그 대상은 선발 투수로 한정된다.

1947년 熱球라는 야구 잡지에서 처음 제정해서 1956년 제정된 메이저 리그 사이 영 상보다도 먼저 생긴 상이다. 그러나 1988년까지는 센트럴 리그의 투수만 대상으로 했다. 1989년( 헤이세이 원년)부터 수상의 범위를 퍼시픽 리그까지 확대. 아직도 리그별 시상은 하지 않고 양대리그를 통틀어서 최고의 투수를 뽑는다.[1] 1988년까지는 반쪽짜리 최고투수상이었던 셈. 다만 양대리그 모두 시상범위에 들어간 첫 해인 1989년엔 요미우리 자이언츠 사이토 마사키가 수상했고, 이듬해인 1990년 킨테츠 버팔로즈 노모 히데오가 사와무라 상을 수상하며 퍼시픽리그 최초의 수상자가 나왔다.

1.1. 투표 기준

1982년 이전까지는 기자투표로 수상자가 선정되었다가, 1981년 에가와 스구루투수 5관왕 + 센트럴 리그 MVP를 차지하고도 기자들의 안티 여론에 밀려 수상을 하지 못하면서 논란이 되었다.[2] 이에 1982년부터 아래의 7가지 자격 기준이 제정되며 전직 프로야구 투수들로 이루어진 ' 사와무라상 선정위원회'에 의해 수상자가 뽑히게 되었다. 그 기준은 다음과 같다.

하지만 꼭 저 항목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서, 위의 항목을 한 두개 만족하지 않더라도 수상자로 뽑히기도 한다. 물론 모든 항목을 충족한다면 수상 확률도 높아진다. 시대가 흐르면서 위의 모든 항목을 만족하기가 쉽지 않아지고 있지만[3], 전 항목을 만족하는 '괴물투수'는 여전히 가끔씩 나오고 있고 82년 사와무라상의 기준이 생긴 이후 7가지 항목을 모두 채운 투수는 총 11명이다. 1982년 키타벳푸 마나부 에가와 스구루, 1987년 쿠와타 마스미, 1989년 사이토 마사키, 1991년 사사오카 신지, 1993년 이마나카 신지, 2007~2008, 2011년의 다르빗슈 유, 2009년 와쿠이 히데아키, 2011년 타나카 마사히로, 2013년 카네코 치히로, 2018년 스가노 토모유키. 보다시피 2번 이상 채운 선수도 없는데 다르빗슈 유는 혼자 3번이나 채우는 괴물 같은 모습을 보였으나 정작 수상 자체는 2007년 1번에 그쳤다.

1.2. 수상에서의 예외

그런데 사와무라상은 더 많은 항목을 만족한 선수가 있음에도, 그렇지 못한 선수가 뽑히기도 한다.

예를 몇 가지 들어보자면,
몇몇 예를 보면 알겠지만 단순히 성적을 기계적인 수치로 대입해서 뽑는 게 아니라 해당 시즌에 선수가 보여준 임팩트, 팀 성적 등도 같이 반영됨을 알 수 있다.

더 특이한 사실은, 수상 자격에 걸맞은 선수가 없을 경우 시상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6번(1971년, 1980년, 1984년, 2000년, 2019년, 2024년)이나 수상자가 없었는데, 리그 사무국이 주관하는 공식 연간 선수상에서 자격미달로 시상을 하지 않는 경우는 전 세계를 통틀어도 유례가 없다.[11][12] 하지만 2011년 센트럴 리그 2루수 베스트나인과 퍼시픽 리그 포수 베스트나인을 생각해보면..

2019년에는 야마구치 슌(요미우리)과 아리하라 코헤이(닛폰햄)가 최종 후보에 올랐으나 수상에 실패했다. 두 투수 모두 완투 숫자과 최소 투구이닝 요건을 충족하지 못했다. 심사위원장인 호리우치 츠네오는 "우선, 사와무라상은 원래 사와무라 에이지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상이다. (사와무라와 같은) 선발 완투형 No.1 투수에게 수여하는 것이지 결코 그 시즌의 베스트 투수에게 수여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완투 숫자 충족)이 불가능한 시대가 계속된다면 기준을 재검토해야겠지만, 그 때가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상 이름에 사와무라 에이지의 이름이 있는 이상, 더 이상은 (수상자의) 레벨을 낮추고 싶지 않았다"고 '수상자 없음'의 이유를 밝혔다. 신문기사(일어) 노무라 카츠야는 ''에이스는 개인주의자일 수 있지만 이기주의자가 돼서는 안 된다"며 선발투수의 이닝이 갈 수록 줄어드는 세태를 부정적으로 바라봤다. 선발투수라면 등판한 경기를 다 책임진다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는 주간 베이스볼에서 쓴 칼럼에서 "어깨는 소모품이라고 하는데, 보통 100개 남짓인 투구 수 제한은 과학적 근거가 모호하다. 그걸 지켜서 투수의 수명이 늘었나. 반대로, 매일 같이 던지던 옛 투수들이 덜 다친 건 무슨 이유인가"라고 문제를 제기했다." 신문기사 혈액형 성격설을 믿으시는 분께서 과학적 근거 얘기하는건...

참고로, 그 다음년도 수상자인 오노 유다이는 비록 야마구치와 아리하라보다도 부족한 148⅔이닝[13]을 투구해 최소 투구이닝 요건을 충족하지는 못했으나 무려 10완투를 기록함으로써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사 사와무라 상 수상에 성공하였다.

1.3. 기록들

2. 역대 수상자 명단

연도 투수 등판 완투 승리 승률 투구 이닝 탈삼진 평균자책점
1947년 벳쇼 아키라[16] 난카이 호크스[17] 55 47 30 .612 448 ⅓ 191 1.86
1948년 나카오 히로시 요미우리 자이언츠 47 25 27 .692 343 187 1.84
1949년 후지모토 히데오 39 29 24 .774 288 137 1.94
1950년 사나다 쥬죠 쇼치쿠 로빈스 61 28 39 .765 395 ⅔ 191 3.05
1951년 스기시타 시게루 나고야 드래곤즈 58 15 28 .683 290 ⅓ 147 2.35
1952년 61 25 32 .696 355 ⅔ 160 2.33
1953년 오토모 타쿠미 요미우리 자이언츠 43 22 27 .818 281 ⅓ 173 1.85
1954년 스기시타 시게루 주니치 드래곤즈 63 27 32 .727 395 ⅓ 273 1.39
1955년 벳쇼 타케히코 요미우리 자이언츠 50 17 23 .742 312 152 1.33
1956년 카네다 마사이치 코쿠테츠 스왈로즈 68 24 25 .556 367 ⅓ 316 1.74
1957년 61 25 28 .636 353 306 1.63
1958년 56 22 31 .689 332 ⅓ 311 1.30
1959년 무라야마 미노루 오사카 타이거스 54 19 18 .643 295 ⅓ 294 1.19
1960년 호리모토 리츠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69 26 29 .617 364 ⅔ 210 2.00
1961년 곤도 히로시 주니치 드래곤즈 69 32 35 .648 429 ⅓ 310 1.70
1962년 코야마 마사아키 한신 타이거스 47 26 27 .711 352 ⅔ 270 1.66
1963년 이토 요시아키 요미우리 자이언츠 39 18 19 .704 236 ⅓ 166 1.90
1964년 진 바키 한신 타이거스 46 24 29 .763 353 ⅓ 200 1.89
1965년 무라야마 미노루 39 26 25 .658 307 ⅔ 205 1.96
1966년 38 24 24 .727 290 ⅓ 207 1.55
호리우치 츠네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33 14 16 .889 181 117 1.39
1967년 오가와 겐타로[18] 주니치 드래곤즈 55 16 29 .707 279 ⅔ 178 2.51
1968년 에나츠 유타카 한신 타이거스 49 26 25 .676 329 401 2.13
1969년 타카하시 카즈미 요미우리 자이언츠 45 19 22 .815 256 221 2.21
1970년 히라마츠 마사지 타이요 훼일즈 51 23 25 .568 332 ⅔ 182 1.95
1971년 수상자 없음
1972년 호리우치 츠네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48 26 26 .743 312 203 2.91
1973년 타카하시 카즈미 45 24 23 .639 306 ⅓ 238 2.21
1974년 호시노 센이치 주니치 드래곤즈 49 7 15 .625 188 137 2.87
1975년 소토코바 요시로 히로시마 도요 카프 41 17 20 .606 287 193 2.95
1976년 이케가야 코지로 51 18 20 .571 290 ⅓ 207 3.26
1977년 코바야시 시게루 요미우리 자이언츠 42 11 18 .692 216 ⅓ 155 2.92
1978년 마츠오카 히로무 야쿠르트 스왈로즈 43 11 16 .593 199 ⅓ 119 3.75
1979년 코바야시 시게루 한신 타이거스 37 17 22 .710 273 ⅔ 200 2.89
1980년 수상자 없음
1981년 니시모토 타카시 요미우리 자이언츠 34 14 18 .600 257 ⅔ 126 2.58
1982년 키타벳푸 마나부 히로시마 도요 카프 36 19 20 .714 267 ⅓ 184 2.43
1983년 엔도 카즈히코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 36 16 18 .667 238 ⅓ 186 2.87
1984년 수상자 없음
1985년 코마츠 타츠오 주니치 드래곤즈 33 14 17 .680 210 ⅓ 172 2.65
1986년 키타벳푸 마나부 히로시마 도요 카프 30 17 18 .818 230 123 2.43
1987년 쿠와타 마스미 요미우리 자이언츠 28 14 15 .714 207 ⅔ 151 2.17
1988년 오노 유타카 히로시마 도요 카프 24 14 13 .650 185 183 1.70
1989년 사이토 마사키[19] 요미우리 자이언츠 30 21 20 .741 245 182 1.62
1990년 노모 히데오[20] 킨테츠 버팔로즈 29 21 18 .692 235 287 2.91
1991년 사사오카 신지 히로시마 도요 카프 33 13 17 .654 240 213 2.44
1992년 이시이 타케히로 세이부 라이온즈 27 8 15 .833 148 ⅓ 123 1.94
1993년 이마나카 신지 주니치 드래곤즈 31 14 17 .708 249 247 2.20
1994년 야마모토 마사 29 14 19 .704 214 148 3.49
1995년 사이토 마사키 요미우리 자이언츠 28 16 18 .643 213 187 2.70
1996년 25 8 16 .800 187 158 2.36
1997년 니시구치 후미야 세이부 라이온즈 32 10 15 .750 207 ⅔ 192 3.12
1998년 카와사키 켄지로 야쿠르트 스왈로즈 29 9 17 .630 204 ⅓ 94 3.04
1999년 우에하라 코지 요미우리 자이언츠 25 12 20 .833 197 ⅔ 179 2.09
2000년 수상자 없음
2001년 마츠자카 다이스케 세이부 라이온즈 33 12 15 .500 240 ⅓ 214 3.60
2002년 우에하라 코지 요미우리 자이언츠 26 8 17 .773 204 182 2.60
2003년 이가와 케이 한신 타이거스 29 8 20 .800 206 179 2.80
사이토 카즈미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26 5 20 .870 194 160 2.83
2004년 카와카미 켄신 주니치 드래곤즈 27 5 17 .708 192 ⅓ 176 3.32
2005년 스기우치 토시야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26 8 18 .818 196 ⅔ 218 2.11
2006년 사이토 가즈미 26 8 18 .783 201 205 1.75
2007년 다르빗슈 유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26 12 15 .750 207 ⅔ 210 1.82
2008년 이와쿠마 히사시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28 5 21 .840 201 ⅔ 159 1.87
2009년 와쿠이 히데아키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 27 11 16 .727 211 ⅔ 199 2.30
2010년 마에다 겐타 히로시마 도요 카프 28 6 15 .652 215 ⅔ 174 2.21
2011년 다나카 마사히로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27 14 19 .792 226 ⅓ 241 1.27
2012년 셋츠 타다시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27 3 17 .773 193 ⅓ 153 1.91
2013년 다나카 마사히로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28 8 24 1.000 212 183 1.27
2014년 카네코 치히로 오릭스 버팔로즈 26 4 16 0.762 191 199 1.98
2015년 마에다 겐타 히로시마 도요 카프 29 5 15 .625 206 ⅓ 175 2.09
2016년 크리스 존슨[21] 26 3 15 .682 180 141 2.15
2017년 스가노 도모유키[22] 요미우리 자이언츠 25 6 17 .773 187 ⅓ 171 1.59
2018년 28 10 15 .652 202 200 2.14
2019년 수상자 없음
2020년 오노 유다이 주니치 드래곤즈 20 10 11 .550 148 ⅔ 148 1.82
2021년 야마모토 요시노부[23] 오릭스 버팔로즈 26 6 18 .783 193 ⅔ 206 1.39
2022년 26 4 15 .750 193 205 1.68
2023년 23 2 16 .727 164 167 1.21
2024년 수상자 없음

3. 논란

4. 관련 문서



[1] 메이저리그는 1966년까지 리그전체에서 한 명을 뽑았다가 1967년부터 사이 영 상을 리그별로 뽑는다. [2] 그 해에는 1981년 일본시리즈 MVP를 수상했으나 선발등판, 소화 이닝을 제외하곤 무관에 그쳤던 에가와의 팀 동료 니시모토 타카시가 수상했다. 에가와는 1980년에도 다승왕-탈삼진왕을 차지했지만 사와무라상을 타지 못했고(심지어 이 해는 사와무라상 수상자가 없는 해다! 기자들이 작정하고 투표지에 "해당자 없음"이라고 적어서 냈고, 그게 과반이 된 것.), 1982년에는 7개 기준을 모두 충족했지만 역시 7개 기준을 모두 충족한 히로시마 키타벳푸 마나부에 밀리면서 결국 은퇴할 때까지 사와무라상과 인연이 없었다. 안티 여론이 컸던 이유는 드래프트 제도의 허점을 이용해 요미우리에 편법을 쓰다시피 입단하여 논란을 일으킨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는데, 이에 관해선 본인 문서 참조. [3] 특히 완투 10경기 이상. 선발-중계 분업화가 확대되어가는 현대야구의 추세로 완투형 투수를 보기가 힘들게 되었다. 이 조건이 붙은 이유는 일본에서는 한 경기를 끝까지 책임지는 완투 능력을 이상적인 에이스의 조건으로 보기 때문. 다만 일본 메이저리그보다는 로스터 운용이 자유로운 편이므로 선발이 좀 더 쉬는 대신 좀더 많은 이닝을 소화하는 6선발+ 로테이션을 구축하기도 한다. [4] 일본프로야구에서 사이토 마사키 이후로 현재까지 2년 연속 20승을 거둔 투수는 나오지 않고 있다. 사이토는 사와무라상을 3번이나 수상하며 역대 최고 수상 기록을 세웠고 최다탈삼진 1회, 다승왕 5회, 평균자책점 1위 3회 등의 화려한 실적을 기록하며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중반 센트럴리그를 지배했던 대투수다. 그러나 성적과는 별개로 사이토는 명문팀 요미우리의 에이스로 이렇게 대단한 성적을 올렸음에도 이 정도로 눈에 띄지 않고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지 못한 투수이기도 하다. 단적인 예시로 올스타전 출전이 고작 6번에 불과하며 이마저도 팬 투표로 선발된 것은 단 1번에 불과했다. 요미우리의 불가사의 중 하나. [5] 이 해 평균자책점 1위는 노모의 팀동료 아카호리 모토유키(1.80)가 수상했다. 다만 이시이에겐 다소 억울할 수도 있는 게 원래 전문 구원투수였고 이 해부터 마무리 투수에 자리잡은 아카호리가 리그 최다인 50시합 등판을 달성하는 등 무지막지하게 등판하면서 시즌 막판에 평균자책점 타이틀까지 노릴 수 있는 상황이 되자 킨테츠 구단에서 아카호리를 선발로 2차례 등판시키는 등 대놓고 밀어주는 바람에 시즌 종료 시점에서 아카호리가 규정이닝에 도달하여 이시이를 제치고 평균자책점 1위에 오르면서 수상에 실패했다. [6] 이 해 센트럴리그 최다 탈삼진 1위는 리그 MVP를 수상한 요미우리 쿠와타 마스미가 185개로 수상했다. 쿠와타도 최다탈삼진을 비롯해 28등판 27선발 10완투 1완봉 207.1이닝 14승 11패 ERA 2.52의 출중한 성적을 기록했지만 은근 많았던 패수와 야마모토 등의 임팩트에 밀려 사와무라상 수상에 실패했다. [7] 이라부도 퍼시픽리그 다승왕(15승)과 완투 1위(15완투)를 기록. [8] 공동수상 자체는 1966년에도 있었으나 이 당시엔 센트럴 리그만 수상범위에 들어갔기에 퍼시픽리그 투수는 수상에서 제외되었다. 참고로 1966년의 공동수상자는 각각 무라야마 미노루( 한신)와 호리우치 츠네오( 요미우리). [9] 존슨 15승 v 노무라 16승. [10] 존슨 180.1이닝(3완투) 141탈삼진 2.12 v 스가노 183.1이닝(5완투) 189탈삼진 방어율 2.01. [11] 매년 선정하는 상의 경우 경쟁수준이 낮을 경우 종종 수준낮은 수상자가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대표적인 사례가 KBO 리그 2003년 신인왕 이동학이다. 이동학은 2003년 투수로 27경기 8승 3패 평균자책점 5.35라는 초라한 성적을 기록했지만 당시 경쟁자가 없어서 신인왕에 올랐었다. 사와무라 상의 경우에는 심사위원회에서 그런 성적으로는 상 받을 자격 없다!라고 선정을 거부할 수 있다. [12] 더욱이 일본프로야구에서는 같은 이유로 신인왕이나 골든글러브를 시상하지 않는 사례도 있다. 일본프로야구에서는 기자투표로 시상하는 상의 경우 기자가 후보자의 이름을 적어서 내는 식으로 투표하고, 수상할 만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되면 "해당자 없음"이라고 적어서 낼 수도 있는데, "해당자 없음"이 과반이 되면 그 상을 시상하지 않는다. [13] 다만, 코로나로 인해 120경기밖에 치르지 않았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또한, 오노는 2020년 투구 소화 이닝이 리그 1위였다. [14] 1989년 이후 수상자가 없는 구단은 롯데 말고도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가 있다. [15] 2010년대에는 그나마 가능성이 보이는 선수가 이시카와 아유무, 후타키 코타 정도인데 둘 다 2019년에 폭망. 유망주 중에서는 타네이치 아츠키 사사키 로키에게 기대를 걸어볼 수 있을 것이다. [16] 하술할 벳쇼 타케히코의 개명 전 이름. [17] 이 해는 일본프로야구가 양대리그로 분리되기 전이다. 따라서 지금은 퍼시픽 리그 소속인 난카이의 벳쇼가 수상이 가능했다. 즉, 리그가 분리되기 전인 1949년까지는 진정한 최고 투수를 뽑는 상이었던 셈. [18] 검은 안개 사건에 연루되어 영구제명되었다. [19] 양대리그 통합 첫 수상자. [20] 퍼시픽 리그 첫 수상자. [21] 52년만의 외국인 선수 수상. [22] 역대 5번째이자 22년만의 연속 수상. [23] 카네다 마사이치 이후 역대 2번째이자 65년만의 3년 연속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