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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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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
2대

토머스 칼라일
3대

제임스 몬크리프
남작
4대

윌리엄 스털링맥스웰
준남작
5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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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작
6대

스펜서 캐번디시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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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치볼드 프림로즈
백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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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태퍼드 노스컷
백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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숌버그 커
후작
10대

조지 고셴
자작
11대

제임스 로버트슨
남작
12대

알렉산더 브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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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
14대

로버트 핀리
자작
15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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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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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윈덤
17대

길버트 엘리엇머레이키닌먼드
백작
18대

허버트 키치너
백작
19대

데이비드 비티
백작
20대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백작
21대

스탠리 볼드윈
백작
22대

존 길모어
준남작
23대

윈스턴 처칠
24대

이언 해밀턴
25대

에드먼드 알렌비
자작
26대

허버트 그리어슨
27대

존 도널드 폴록
28대

앤드루 커닝엄
자작
29대

앨러스터 심
30대

알렉산더 플레밍
31대

시드니 알프레드 스미스
32대

제임스 로버트슨 저스티스
33대

조 그리몬드
남작
34대

제임스 로버트슨 저스티스
35대

맬컴 머거리지
36대

케네스 올솝
37대

조너선 위트니 개리옥 윌즈
38대

고든 브라운
39대

마그누스 마그누손
40대

앤서니 로스
41대

데이비드 스틸
남작
42대

아치 맥퍼슨
43대

뮤리얼 그레이
44대

도니 먼로
45대

맬컴 매클라우드
46대

존 커훈
47대

로빈 하퍼
48대

토머스 디엘
준남작
49대

마크 밸러드
50대

이언 맥워터
51대

피터 맥콜
52대

스티브 모리스
53대

앤 헨더슨
54대

데보라 카옘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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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제41·43·45·47대 총리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
Rt Hon. William Ewart Gladstone
FRS FSS
파일:William_Ewart_Gladstone,_1892_(cropped).jpg
<colbgcolor=#01013a><colcolor=#ffc224>출생 1809년 12월 29일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리버풀
(現 영국 잉글랜드 머지사이드 리버풀)
사망 1898년 5월 19일 (향년 88세)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하워든 성
(현 영국 웨일스 플린트셔 하워든)
재임기간 제41대 총리
1868년 12월 3일 ~ 1874년 2월 17일
제43대 총리
1880년 4월 23일 ~ 1885년 6월 9일
제45대 총리
1886년 2월 1일 ~ 1886년 7월 20일
제47대 총리
1892년 8월 15일 ~ 1894년 3월 2일
서명 파일: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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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1013a><colcolor=#ffc224>부모 부모 존 글래드스턴 준남작
앤 맥켄지 로버트슨
배우자 캐서린 글린
자녀 윌리엄 헨리 글래드스턴
헬렌 글래드스턴
헨리 글래드스턴 남작
허버트 글래드스턴 자작 등 8명
학력 이튼 칼리지
옥스퍼드 대학교, 크라이스트 처치
정당
}}}}}}}}}
1. 개요2. 생애
2.1. 초기2.2. 대영제국의 총리로
2.2.1. 1기: 41대 총리, 5년 77일간2.2.2. 2기: 43대 총리, 5년 48일간2.2.3. 3기: 45대 총리, 169일간2.2.4. 4기: 47대 총리, 1년 199일
2.3. 여생
3. 정치4. 선거 이력5. 그 외6.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서로의 사랑은 영국 법에 의해 제한받지 않는다는 것과 기독교 문명의 범주에서 제한받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서로에 대한 사랑은 전 세계에 유효하다는 것을 기억하시오."
델케이스(Dalkeith) 연설에서, 1879년 11월
가장 위대한 평민 (The great Commoner)[1]
인민의 윌리엄 (People's William)[2]

19세기 영국 총리. 자유당을 대표하던 정치인 중 한명으로, 지금도 영국사에서 가장 위대한 총리 중 한명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제국주의가 절정이던 시기에 평화주의적 대외관계를 고수하였으며, 아편전쟁 반대, 아일랜드 자치법, 비밀투표 실시와 같은 많은 내정 개혁을 시도하는 등 자유주의 19세기 의회정치를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글래드스턴 자유주의로 대표된다.

무려 4차례에 걸쳐 영국 총리직을 역임했다. 덧붙여 최고령 영국 총리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사임했을때 나이가 무려 84세였다.

글래드스턴이 유대인이라는 루머가 있지만, 글래드스턴은 유대인들이 많이 쓰는 성씨인 스턴(Stern)이 아닌 Gladstone이다.[3] 사실은 오히려 그의 동시대 라이벌로 유명했던 보수당 디즈레일리 총리가 유대인이었다.

2. 생애

2.1. 초기

1809년 잉글랜드 머지사이드 리버풀에서 부유한 상인이자 하원의원이었던 존 글래드스턴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튼 칼리지 옥스퍼드 대학교라는 엘리트 코스를 거친 뒤 아버지의 권유로 정계에 입문해 1833년 24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하원의원에 당선된다. 정적이었던 디즈레일리가 6번 낙선되고서야 정계진출 성공한 것과 여러모로 대비된다.[4]

초선 의원 시절인 1840년 영국 의회가 청나라와의 아편전쟁을 승인하는 찬반투표가 열리기 직전, 의회 연설을 통해 이를 통렬히 비판했다. 글래드스턴은 이것만큼 영국을 불명예스럽게 만들 전쟁은 없을 거라며 영국인들의 양심에 호소했다.[5]
" 중국에게는 아편을 금지시킬 정당한 권리가 있습니다. 그들은 아편의 무서움을 알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우리 영국의 외무대신은 청나라의 정당한 권리마저 짓밟으며 이 부정한 무역을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부정하고 치욕스러운 일이 될 수밖에 없는 전쟁은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중략)
이 전쟁의 승리와 그 이득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득이 크더라도 그로 인해 우리 국왕 폐하와 대영제국이 입을 명예, 위신, 존엄성의 손실은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중략)
중국 영토에 체류하고 있으면서 그 법률에 복종하지 않는 외국인에 대해 중국이 식량과 음료 공급을 거부한 것이 어째서 중국의 죄가 되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6] 정부는 이 전쟁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이 작전 행동이 어느 정도까지 확대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어떠한 판단도 내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확신을 가지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즉, 그 기원과 원인을 놓고 볼때 이것만큼 부정한 전쟁, 이것만큼 영국을 불명예로 빠뜨리게 될 전쟁을 나는 이제껏 보지 못했습니다."

결국 아편전쟁은 개시되었지만, 그의 연설은 엄청난 반향과 사회적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아무런 이의 없이 진행될 뻔 했던 영국의 전쟁 선포가 의회 표결에서 불과 9표차로 간신히 결정될 정도.[7] 이 일로 상당한 정치적 명성을 얻었다. 젊은 시절부터 비(非) 제국주의/도덕주의적 외교 정책의 싹수가 보였던 셈이다. 이후 글래드스턴은 친제국주의, 보호무역 성향이었던 보수당과 여러모로 상성이 안맞아 당시 보수당 내 진보 세력이었던 필라이트 파벌 쪽으로 붙게 되었고, 훗날 자유당 즉, 당시 보수당과 대척점에 서있던 정당을 창당하게 되었다.

자유당을 창당하게 된 과정을 보면 1841년 재선된 이후 로버트 필 내각의 상무원 총재(President of the Board of Trade)로 입각한다. 자유무역을 지지하는 소위 필 파(Peelites)였던 그는 이 시기 관세 개혁을 통하여 자유 무역을 증진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1845년 아일랜드의 종교 문제가 본인의 신념과 어긋나자[8] 장관직에서 사임한다. 하지만 당시 수상이었던 로버트 필이 글래드스턴을 각별히 아꼈던 만큼 채 1년도 지나기 전이었던 같은 해 12월에 식민지 장관으로 재임용된다. 1846년 로버트 필 내각이 곡물법 폐지 문제로 인해 붕괴되었을 때, 자유무역의 옹호론자답게 시종일관 곡물법 폐지를 주장하면서 주요 정치인 중 하나로 부상하기 시작한 그는 1852년 휘그당과 필 파의 연정이었던 애버딘 내각의 재무대신으로 취임한다. 이 시기 각종 관세 인하를 비롯한 획기적인 예산안으로 재정가로의 명성을 얻는다. 그는 자유주의자답게 작은 정부를 지향했고, 정부의 규모를 줄이기 위해서 직접세의 폐지를 주장하였다. 이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는 대중의 지지가 필요했는데, 글래드스턴은 직접세의 액수를 낮춰서[9]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직접세를 내게끔 하여 직접세 폐지 여론에 불을 붙였던 것이었다. 문제는 곧바로 크림 전쟁이 터지면서 산통 다 깨졌어요

이 시기 얻은 명성을 바탕으로 점점 자신의 지위를 키워나간 글래드스턴은 1850년대 후반 이후 휘그당, 급진파(영국) 세력과 통합해 자유당을 창당하며 후에 당수로 등극하게 된다. 디즈레일리와 인생매치의 시작

재무대신 시절에는 " 정신이 온전한 모든 성인남성에게 투표권이 주어지지 않을 이유가 없다."[10] 라고 발언한 적이 있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엄청나게 급진적인 주장이라서 총리 파머스턴 경은 격노하여 선동적인 언행이라고 비난했고 심지어는 빅토리아 여왕의 귀에까지 들어가 여왕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고 한다[11]

이후 존 러셀 내각에서 노동자 계급 중 상당수에게 참정권을 부여하는 개혁을 추진하지만 당 내 보수파들의 반발로 인해 실패로 돌아간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정적 디즈레일리의 보수당 정부가 글래드스턴의 개혁안보다 오히려 더 급진적인 투표권 확대 정책을 실시하였고[12][13] 이것이 큰 반발을 불러오는 바람에 1868년 선거에서 승리, 글래드스턴이 총리직에 오르게 된다. 죽 쒀서 자유당 줬다

2.2. 대영제국의 총리로

2.2.1. 1기: 41대 총리, 5년 77일간

1868년부터 1874년까지 이어진 그의 1차 내각 시기 글래드스턴이 보여준 주요 자유주의적 정책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이 시기는 영국 내 자유주의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민족주의 제국주의의 광풍이 유럽을 휩쓸고 있었고, 영국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영국은 3대 파머스턴 자작 헨리 존 템플의 주도하에 제국주의 정책을 내세우고 있었고, 식민지와 제국주의에 대해 전반적으로 무관심했던 글래드스턴 내각에게 민중은 실망했고 디즈레일리가 이 점을 집요히 공격하면서 민심을 사로잡는다. 결국 1874년 총선에서 디즈레일리의 보수당이 다시 글래드스턴의 자유당을 누르고 2차 디즈레일리 내각이 성립하게 된다.

1874년 총리직에서 물러난 이후 글래드스턴은 자유당의 당수직에서도 내려오고 언론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1876년 불가리아를 비롯한 발칸반도에서 오스만 제국에 대항한 독립운동이 일어나고, 글래드스턴은 오스만 제국의 잔학행위에 분노하여 영국의 인도주의적 개입을 호소[16]하는 팸플릿을 쓴다.

2.2.2. 2기: 43대 총리, 5년 48일간

그런데 호소문이 대중 사이에서 대폭발을 불러일으켰고 이를 발판으로 글래드스턴은 다시 정계에 복귀했고 디즈레일리 내각의 제국주의적 외교의 비도덕성을 비판하면서[17] 1880년 선거에서 승리, 다시 총리직에 오르게 된다. 1881년 제2차 아일랜드 토지법을 성립시켰으나 외교적으로는 이집트에서 반영 독립항쟁 및 마흐디 신국 건국 전쟁이 일어났을 때의 유약함[18] 등을 비판당하면서 1885년 다시 총리직에서 물러난다.

여담으로 거문도 점령 사건이 이 시기 일어났다. 러시아와 그레이트 게임을 이어가는 사이 고종이 인아거청[19] 전략을 펼치며 러시아에 부동항을 내주려고 하자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려는 일환으로 선제적으로 거문도를 점령했던 것. 결국 거문도 점령 사건은 글래드스턴의 후임인 로버트 게스코인세실 총리가 처리해야했다.

2.2.3. 3기: 45대 총리, 169일간

이후에도 3차, 4차 내각에서 아일랜드 자치 법안을 상정했으나 3차 내각의 첫번째 법안은 하원의 보수당과 자유당 반란표로 부결되었다.[20] 이후 하팅턴 후작(Marquess of Hartington)[21] 조지프 체임벌린을 중심으로, 자유당 내의 신흥자본가와 구 휘그파가 뭉쳤으며, 제국주의에도 우호적이었던 이 반대세력은 탈당 후 "자유통일당(Liberal Unionist)"을 차리고 보수당과 연정을 구성하고 점차 보수당에 섞여갔다.

2.2.4. 4기: 47대 총리, 1년 199일

아일랜드 민족당의 도움으로 구성된 4차 내각의 두번째 법안은 하원에서 통과되었으나 보수당이 지배하는 상원에서 부결되었다. 또한 독일 제국과의 군비 경쟁에도 반대하다가 물러난다.

2.3. 여생

이후 연구와 강연으로 여생을 보내다 1898년 8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무덤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있다. 은퇴한 그에게 백작 작위를 서임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그는 평민의 신분으로 죽겠다며 이를 거절했고, 그에게는 '가장 위대한 평민(The Great commoner)'이라는 찬사가 붙게 됐다.[22][23]

글래드스턴의 사상은 이후 제1차 세계 대전 시기 영국의 총리를 지낸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등에게 계승된 것으로 평가받는다. 사실 자유주의와 도덕 정치라는 개념 자체는 언제 어디서든 나타날 수 있는 호소력 있는 사상이지만 이것을 영국의 제도권 정치로 본격적으로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3. 정치

그는 대표적인 도덕정치(Moralpolitik)[24]의 지지자였다. 경쟁국가들 사이의 갈등이나 마찰을 국제적 여론과 중재에 의해 해결한다는 것이 글래드스턴 총리의 정치관이었다. 국제적 위기가 있을 때 주로 강경책을 내놓았던 디즈레일리 내각과는 달리, 글래드스턴의 내각은 주로 유화책을 사용했다. 1870년 러시아에게 흑해 재무장을 허용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 1856년 크림 전쟁 종전 이후 흑해는 무장 중립지역으로 남았었는데, 이 '런던 협약'으로 러시아는 이 조항을 파기해 버렸다. 또 하나의 예는 1872년의 '앨라배마 호 보상사건'인데, 미국 남북 전쟁에 남부연합 소속의 영국 배가 입힌 손실을 영국이 배상해 내라는 요구를 받아들인 것이다. 당시 대영제국의 위상을 생각하면 쿨하게 씹었어도 될 요구였으나, 글래드스턴은 "보상액은 (영국이 얻게 될) 도덕적 가치에 비하면 먼지에 불과한 수준"이라 말했다고 한다.

자유주의와 도덕정치를 중시했던 그의 관점은 많은 영국인들에게 찬사를 받으며 그에게 G.O.M.(Grand Old Man)이라는 명예로운 별명을 얻게 했지만, 말년에는 실각하는 역효과를 불러오기도 했다. 1881년 이집트에서 일어난 반영항쟁에서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한 것도 한몫 했고, 1883년 수단에서 민족주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군대 투입을 지나치게 망설인 것도 결정적이었다. 뒤이은 1885년 이집트 주둔군의 장군이었던 찰스 고든이 자의적으로 군대를 끌고 수단 문제에 개입했다가 포위되는 상황에 이르렀고, 글래드스턴은 구원군을 신속히 보내지 못해 고든은 효수당했다. 자세한 내용은 마흐디 운동, 파쇼다 사건 참조. 사건 이후 그의 별명이었던 G.O.M.은 안티들에게 '고든 살해자'라는 M.O.G.(Murderer of Gordon)로 전위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 외 상기했듯 인류애 주창, 의무교육, 비밀투표 등 다양한 행적을 남겼다. 기타 다른 사상은 글래드스턴 자유주의 항목도 참조.

4. 선거 이력

<rowcolor=#ffc224>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832 1832년 영국 총선 뉴어크
887 (36.8%) 당선(1위) 초선
1835 1835년 영국 총선
무투표 당선 재선
1837 1837년 영국 총선 3선
1841.6 1841년 영국 총선 633 (38.2%) 당선(1위) 4선
1841.9 1841년 영국 하원의원 보궐선거 무투표 당선
1847 1847년 영국 총선 옥스퍼드 대학교 '''
필라이트
'''
997 (28.3%) 당선(2위) 5선
1852 1852년 영국 총선 1,108 (34.3%) 6선
1853 1853년 영국 하원의원 보궐선거 1,022 (53.2%) 당선(1위)
1857 1857년 영국 총선 무투표 당선 7선
1859.2 1859년 영국 하원의원 보궐선거
1859.4 1859년 영국 총선
8선
1859.7 1859년 영국 하원의원 보궐선거 1,050 (55.0%) 당선(1위)
1865 1865년 영국 총선 1,724 (25.1%) 낙선(2위)
1865 사우스 랭커셔 8,786 (17.4%) 당선(3위) 9선
1868 1868년 영국 총선 사우스 웨스트 랭커셔 7,415 (24.9%) 낙선(2위)
그리니치 6,386 (28.8%) 당선(2위) 10선
1868.12 1868년 영국 하원의원 보궐선거 무투표 당선
1874 1874년 영국 총선 5,968 (26.0%) 당선(2위) 11선
1880 1880년 영국 총선 미들로시안 1,579 (53.6%) 당선(1위) 12선
리즈 24,622 (33.5%)
1880년 영국 하원의원 보궐선거 미들로시안 무투표 당선
1885 1885년 영국 총선 7,879 (70.8%) 당선(1위) 13선
1886 1886년 영국 하원의원 보궐선거 무투표 당선
1886년 영국 총선 14선
1892 1892년 영국 총선 5,845 (53.1%) 당선(1위) 15선
1892년 영국 하원의원 보궐선거 무투표 당선

5. 그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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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백작 작위를 거부하고 평민 신분으로 죽겠다고 하면서 얻게 된 별칭. [2] 체통 있는 노동자들에게 선거권을 주어 참정권을 부여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선언하면서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으며 얻은 별칭. [3] 이 루머가 황당하게도 꼴에 유대인에 대하여 분석했다는 책자(90년대 후반에 나온 책이었음)에 유대인 유명인이라며 여러 위인들, 인물들과 같이 나온 바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름만 보고 대충 비슷하면 유대인이라고 싸그리 넣어뒀는데, 같은 이유로 존 굿맨, 찰턴 헤스턴도 유태인이라고 엉터리로 서술하고, 스티븐 스필버그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스티븐 소더버그까지 유대인이라고 기재했다. 우피 골드버그도 넣지 그랬냐? 태양중심설로 유명한 코페르니쿠스도 유대인으로 올라왔다. [4] 실제로 글래드스턴은 원래 보수당이었다가 자유당을 창당했고, 디즈레일리는 원래 급진파였다가 보수당으로 입당했다. 즉, 서로의 정당을 공교롭게도 맞바꾼 셈이다. 물론 디즈레일리가 활동했던 급진파 시기에는 자유당이 없었지만, 결국 급진파도 자유당 계열에 합류했으니 사실상 디즈레일리가 원래 속했던 정당은 자유당이다. [5] 지금 와서 보면 마약으로 전쟁을 일으킨 아편전쟁은 대표적인 영국의 흑역사로 취급되니 글래드스턴이 옳았던 셈. [6] 당시 영국 법률은 타국에 체류할 경우 타국의 법률을 준수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7] 271대 262. 표결이 끝난 후 글래드스턴은 "262. 우리 영국의 양심의 무게가 고작 이 정도였단 말인가!"라고 한탄하였다고 전한다. [8] 당시 아일랜드의 가톨릭 세력을 달래기 위해 필 내각에서 각종 국비를 지원하기로 결의했는데 이 시기 글래드스턴은 아직 자유주의로 성향이 바뀌기 전인 보수주의자였고 열렬한 성공회 지지자였다. [9] 150파운드에서 100파운드. [10] "다만 노동자들이 이 문제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가지게 된 이후에야 그것이 가능할 것이다" 라고 덧붙이기는 했다. [11] 차티스트 운동을 무엄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라고 여겼던 사람이니 당연한 반응이다. 여왕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귀족들과 상류층의 생각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 당시(19세기 중반)는 영국, 미국 정도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나라에서 여전히 전제군주제가 유지되고 있던 시절이었으니 시대의 한계라고 볼 수 있다. [12] 상술한 글래드스턴의 발언에 불쾌해했던 빅토리아 여왕은 정작 디즈레일리의 개혁에는 찬성했다. 실제로 여왕은 사적인 관계에서도 글래드스턴을 싫어하고 디즈레일리를 더 총애하기도 했다. [13] 이럴 수밖에 없는데, 디즈레일리는 원래 급진파였던지라 진보 성향이 남을 수밖에 없고, 글래드스턴은 원래 보수파였던지라 보수 성향이 남을 수밖에 없다. [14] 정확히 서술하자면, 아일랜드의 국교 성공회로 지정해놓았던 법령을 폐기했다. 이것으로 아일랜드 사람들은 마침내 믿지도 않던 성공회에 내던 1/10의 교구세를 내지 않게 되었다. [15] 실제로 아일랜드의 소작농들은 이전까지 세금을 똑같이 바치면서도 영국 본국의 소작농들에 비하면 한참 부족한 대우를 받았다. 가장 대표적으로 감자 역병 창궐로 인한 아일랜드 대기근 당시에 영국 정부는 자국의 소작농들에게만 지원을 해주었고 아일랜드 소작농들의 경우에는 지주들에게 지원을 맡겨버렸으며, 이로 인해 아일랜드 소작농들 대다수는 미국으로 망명하거나 굶어 죽었었다. [16] 디즈레일리 항목에도 나와있지만 디즈레일리는 불가리아의 독립이 러시아의 남방진출을 불러올 것을 뻔히 알고 있어서 개입에 소극적이었다. [17] 미들로디언 연설(Midlothian Campaign)이라고도 한다. 이 연설에서 글래드스턴은 제국주의의 배제와 자유주의의 수용을 선언했다. [18] 어떤 영국인 학자는 ' 네빌 체임벌린보다도 외교를 못했다'라고 까기도 했다. 근데 체임벌린은 히틀러가 희대의 돌아이였다는 핑계거리라도 있잖아. [19] 톈진 조약의 결과로 청일 양군이 철군한 사이 러시아에 접근하는 방식으로 청의 간섭을 거부하려 했다. [20] 자치권 관련 투표를 하루 앞두고 영국의 한 진보적인 성향의 일간지에서 가결은 평화, 부결은 피바다로 가는 길을 그린 시사만화를 그렸었는데 그대로 들어맞았다. 글래드스턴 총리의 처조카의 남편이자 신임 아일랜드 수석장관이었던 프레드릭 캐번디쉬 경[25]과 아일랜드 최고위 관료였던 토마스 버크가 더블린의 피닉스 공원에서 칼에 찔려 살해당한 것은 덤. 흠좀무. [21] 데본셔 공작(Duke of Devonshire)의 후계자가 가지는 예우경칭이다. [22] 다만 전통적인 귀족 가문이 아닐뿐, 아버지가 준남작위를 계승하고 하원의원을 역임하는 등 사회적으로 명망있는 집안이긴 했다. 흔히 '평민'이라는 단어에서 연상되는 일반 서민 집안과 거리는 있었던 셈. 물론 신분상 평민은 맞기에, 그의 행보를 기리기 위해 지지자들이 붙여준 별칭 정도라고 보면 될듯. [23] 여담으로 그의 자손들은 귀족 작위를 받게 되는데, 글래드스턴의 3남 헨리가 남작, 4남 허버트가 자작 작위를 받았다. 하지만 모두 자녀가 없어 1대로 끝났다. 한편, 글래드스턴의 부친이 갖고 있던 준남작위는 글래드스턴의 형들의 가계들이 모두 아들 없이 단절됨에 따라 5대째부터 글래드스턴의 직계 자손들이 잇고 있다. [24] '현실정치'를 뜻하는 Realpolitik과는 대립하는 성격의 정치사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