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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2 10:40:58

요한 3세(하바이에른 공작)

파일:요한 3세(하바이에른 공작).jpg
이름 요한 3세 폰 바이에른
Johann III. von Bayern
출생 1374년
에노 백국 케누아
사망 1425년 1월 6일 (향년 50~51세)
에노 백국 헤이그
아버지 알브레히트 1세
어머니 마르가레테 폰 브리크
형제 카타리나, 요하나, 빌헬름 2세, 알브레히트 2세, 요하나 소피
아내 괴를리츠의 엘리자베트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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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에주 주교를 역임했다가 형 빌헬름 2세가 사망한 뒤 여조카 에노의 자클린과 내전을 벌인 끝에 니더바이에른 공작, 에노, 제일란트, 홀란트를 쟁취했으나 얼마 못가 사망했다.

2. 생애

1374년경 에노 백국 케누아에서 니더바이에른 공작, 에노, 제일란트, 홀란트 백작인 알브레히트 1세 슐레지엔의 브리크 공작 루트비히 1세의 딸인 마르가레테 폰 브리크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성직자의 길을 택했고, 캉브레에서 참사회원으로서 활동했으며, 1389년 쾰른의 교구장을 역임했다. 1389년 11월 14일 교황 보니파시오 9세의 승인을 받고 리에주 주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리에주에서 강압적인 정치를 펼쳐 귀족과 시민들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혔다. 급기야 그들은 그에 대항해 대립 주교를 선출했다. 1395년 이래 리에주에서 쫓겨났다 복귀하기를 반복했던 그는 1408년 형 빌헬름 2세와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빌헬름 2세와 용맹공 장은 그를 돕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고, 오테여 전투에서 리에주 반란군을 분쇄했다. 그 덕분에 리에주를 완전히 장악한 요한 3세는 정적들을 모조리 물에 빠뜨려 죽였고, 이로 인해 'Sans Pitié(잔혹한 자)'라는 별칭을 얻었다.

1400년 말 바이에른잉골슈타트 공작 슈테판 3세와 접견해 프랑스의 상황에 대해 논의했으며, 1401년 초 아버지 알브레히트 1세, 형 빌헬름 2세와 함께 팔츠 선제후이자 같은 비텔스바흐 가문 출신의 독일왕 루프레히트에게 프랑스 도팽 샤를 드 기옌이 사망한 후 프랑스의 상황이 비텔스바흐 가문에 불리한 방향으로 바뀔 수 있다고 알렸다. 1408년 5월 20일 슈테판 3세의 아들인 루트비히 7세와 동맹을 맺었고, 리에주를 지배하는 데 도움을 받는 대가로 그가 바이에른뮌헨 공작과 분쟁을 벌일 때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1409년 빌헬름 2세, 루트비히 7세와 함께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과 동맹을 맺었다. 또한 에노의 에카용 성을 두고 부르고뉴와 니더바이에른 공국 사이의 분쟁을 중재하는 위원회의 위원을 맡았다. 1410년 12월 27일, 루트비히 7세는 프랑스 무관장을 맡고 있을 때 그를 바이에른-잉골슈타트 공국의 섭정으로 선임했고, 자신이 사망할 경우 행정관을 맡게 했다. 1413년 용맹공 장은 그를 궁정으로 초대해 자신의 정책을 지지하도록 설득했다. 한편, 그는 1397년 초 일찍 세상을 떠난 형 알브레히트 2세의 후계자로서 니더바이에른 총독을 맡았지만, 바이에른에 거의 오지 않았고 대부분의 시간을 리에주나 저지대 국가에서 머물렀다. 그 대신 재무관 하인리히 노타프트가 바이에른의 행정을 도맡았다. 요한 3세가 거주하던 슈트라우빙은 크게 번성했다. 거리 포장 공사가 실시되었고, 1400년경 도시의 랜드마크인 도시탑이 완성되었으며, 성 야고보 교회와 성 비투스 교회가 건축되었고, 카르멜회 수도원도 세워졌다. 그는 카르멜회 수도원에 형제 알브레히트 2세를 위한 장엄한 무덤을 기증했다.

1417년 5월 31일, 형 빌헬름 2세가 개에게 물린 여파로 사망했다. 빌헬름 2세에게는 외동딸 자클린이 있었는데, 바이에른 상속법은 여성 계승을 규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요한 3세는 즉시 자신이 이미 관리하고 있던 하바이에른 공국을 자기 것으로 삼았다. 자클린은 어머니 마르그리트의 조언에 따라 삼촌을 "에노 영지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주는 것으로 달래려 했지만, 요한 3세는 오히려 그녀의 수중에 넘어간 에노, 홀란트, 질란트 백국까지 손아귀에 넣으려는 야망을 품었다. 그는 이 기회에 저지대 국가에 대한 신성 로마 제국의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룩셈부르크 가문 헝가리- 크로아티아 왕국- 보헤미아 국왕이자 독일왕이었던 지기스문트의 지원을 받고 에노 침공을 준비했다.

자클린은 이에 대응해 브라반트 공작 장 4세 드 브라반트와 결혼한 뒤 남편의 지원을 받으며 항전하기로 했다. 자클린과 장 4세의 약혼은 빌헬름이 죽은 지 두 달 뒤인 7월 31일에 이뤄졌다. 두 사람은 친족 관계였기 때문에 교황의 허락이 필요했는데, 1417년 12월 교황이 승인을 내렸지만 지기스문트를 포함한 자클린의 정적들이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이에 반대하자 1418년 1월에 취소되었다. 그러는 사이, 요한 3세는 군대를 일으켜 에노로 진격했다. 자클린은 갈고리파(Hoeken)의 지원을 받고 군대를 일으켜 고르쿰 전투에서 작은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얼마 후, 홀란트의 중요한 무역 도시였던 도르도흐트가 요한 3세의 편에 넘어갔다. 게다가 남편 장 4세는 많은 빚을 지고 있어서 군대를 제대로 운영할 수 없는데다 심약한 성격이어서 요한 3세를 막는 데 별다른 지원을 해주지 않았다.

1419년, 자클린은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가 중개한 워르쿰 타협을 받아들여, 도르드레흐트, 고르쿰, 로테르담 일대를 요한 3세에게 넘기는 대가로 장 4세와의 결혼이 합법임을 인정받았다. 교황 마르티노 5세는 1419년 5월 공식적으로 자클린과 장 4세의 결혼을 승인했다. 하지만 요한 3세는 곧 태도를 바꿔 군대를 일으켰고, 장 4세는 자클린의 구원 요청을 묵살하고 1419년 5월 성 마르틴스딕 조약을 체결해 요한 3세에게 12년간 홀란트와 제일란트에 대한 통제권을 넘기고 그 대가로 금전적 보상을 받은 뒤 전쟁에서 이탈했다.

결국 남편의 지원을 받지 못한 자클린은 끝까지 항전했으나 홀란트에서 그녀를 지지하는 마지막 도시였던 레이던마저 1421년 초 요한 3세에게 함락당하자 잉글랜드 왕국으로 망명했다. 요한 3세는 이제 저지대 국가에 자리를 잡고 헤이그에서 화려하게 지냈으며, 1422년 화가 얀 반 에이크에게 자신의 집을 장식하도록 의뢰했다. 또한 괴를리츠 공작 요한 폰 괴를리츠의 딸이자 전임 브라반트 공작 앙투안 드 브라반트의 미망인인 엘리자베트 폰 괴를리츠와 재혼해 룩셈부르크 영지도 통치했다. 하지만 자녀를 보기엔 나이가 많이 들었기 때문에, 그는 1424년 선량공 필리프에게 저지대 국가 내 영지 상속 계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그의 영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1424년 말, 궁정 시종인 얀 반 블리에트가 공작 기도서의 페이지에 독약을 묻힌 혐의로 처형되었다. 그는 이 독살 시도의 여파로 인해 1425년 1월 6일에 사망했다. 엘리자베트는 룩셈부르크 영지로 돌아갔고, 선량공 필리프에게 저지대 국가 내 영지 관리를 맡겼다. 하지만 자클린이 장 4세와의 결혼이 무효라고 선언하고 새 남편 글로스터 공작 랭커스터의 험프리와 결혼한 뒤 1424년 말 잉글랜드군과 함께 에노로 돌아오면서, 자클린과 선량공 필리프와의 전쟁이 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