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5-29 19:59:38

루이 2세 드 플란데런

파일:루이 2세 드 플란데런.jpg
성명 루이 2세 드 플란데런
Louis II de Flandre
생몰년도 1330년 10월 25일 ~ 1384년 1월 30일
출생지 프랑스 왕국 오드프랑스 아라스
사망지 프랑스 왕국 오드프랑스 생오메르
아버지 루이 1세 드 플란데런
어머니 발루아의 마르그리트
배우자 브라반트의 마르그리트
자녀 마르그리트 드 플란데런
직위 플란데런 백작
1. 개요2. 생애3. 가족

[clearfix]

1. 개요

플란데런 백국의 백작. 아버지의 실정으로 상실했던 플란데런 백국을 탈환한 뒤 선정을 베풀었지만, 말년에 겐트의 반란에 직면했다.

2. 생애

1330년 10월 25일 프랑스 왕국의 아라스에서 플란데런 백작 루이 1세 드 플란데런과 프랑스 국왕 필리프 5세의 딸인 발루아의 마르그리트 사이의 외아들로 출생했고, 아라스 주교 피에르 로제르[1]로부터 유아세례를 받았다. 어렸을 때 브라반트 공작 장 3세의 딸인 마르그리트와 약혼했으며, 1346년 8월 26일 크레시 전투에 아버지와 함께 프랑스군에 참전했다. 아버지는 이 전투에서 전사했고, 그는 부상을 입고 겨우 빠져나갔다. 이후 아미앵에서 필리프 6세에 의해 기사 작위를 받았다.

그 후 플란데런 백작으로 선임된 뒤 플란데런에 방문한 그는 강력한 직공 길드가 지배하는 겐트에서 억류된 뒤 잉글랜드 왕실과 결혼해 잉글랜드와의 양모 사업을 보장하고 잉글랜드의 편에 설 것을 강요당했다. 그는 그들의 요구를 따르는 척하며 시일을 끌다가 1347년 매사냥을 나가겠다는 핑계를 대고 겐트를 나간 뒤 곧바로 파리로 피신한 후 1347년 6월 6일 지난날 약혼했던 마르그리트와 결혼했다. 이에 분노한 겐트 시민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1348년, 루이 2세는 친프랑스파 망명자들을 이끌고 플란데런으로 돌아왔다. 그는 프랑스 왕의 폭정에 맞서 플란데런 공동체의 대의를 지지하겠다고 선포해 시민들의 호응을 이끌어냈고, 9월 17일 브뤼헤에 무혈 입성했다. 겐트와 이프르 시는 계속 저항했지만, 12월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가 루이 2세가 잉글랜드에 적대하지 않는 조건으로 그가 플란데런 백작이 되는 것을 용인하는 협약을 맺자 이프르 역시 귀순했다. 겐트는 끝까지 저항했지만, 1349년 1월 루이 2세에게 무력으로 정복되었다.

루이 2세는 아버지를 반면교사로 삼고 백년전쟁이 지속되는 동안 중립을 고수하는 한편 프랑스와 영국에 상당한 물자, 자금 지원을 해줘서 양국의 호의를 얻어내는 수완을 발휘했다. 1350년 프랑스의 새로운 국왕 장 2세에 대한 경의를 거부하고 왈롱 플란데런 도시들(, 두에, 오르키에)를 플란데런 백국에 반환할 것을 요구했다. 비록 이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플란데런 주민들이 그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도록 유도할 수 있었다.

1355년 12월 5일 브라반트 공작 장 3세가 사망하자, 그는 장 3세의 후계자인 잔 드 브라반트와 남편인 룩셈부르크 공작 바츨라프 1세에게 메헬렌 매각에 대한 연체금과 아내의 지참금 지불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에 루이 2세는 브라반트를 침공해 1356년 8월 17일 슈트 전투에서 브라반트군을 격파하고 브뤼셀을 점령했다. 브라반트인들은 이에 맞서 1356년 10월 24일부터 29일까지 반란을 일으켰지만 진압되었다. 이후 아트 평화 협약에서 브라반트 공국을 잔에게 돌려주는 대가로 메헬렌을 되찾고 엔트워프를 플란데런 백국에 편입시켰다.

루이 2세에게는 외동딸 마르그리트가 있었다. 그녀는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1세와 처음으로 결혼했지만, 1361년 필리프 1세가 사망하면서 미망인이 되었다. 루이 2세는 플란데런의 경제 부흥을 위해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어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1364년 10월 10일 플란데런의 상속녀인 딸 마르그리트를 에드워드 3세의 아들인 랭글리의 에드먼드와 약혼시켰다. 하지만 에드먼드와 마르그리트는 친족 관계였기에, 그 결혼이 성사되려면 교황청의 특별 허가를 받아야 했다. 프랑스 국왕 샤를 5세는 플란데런 백국이 잉글랜드와 이대로 결혼 동맹을 맺게 하면, 잉글랜드군이 저지대 국가를 확고히 장악해 프랑스에 두고두고 큰 우환이 되리라 여기고 교황 우르바노 5세를 압박한 끝에 마르그리트와 에드먼드의 결혼을 불허하게 했다.

이후 프랑스 국왕 필리프 5세의 딸이며 플란데런 백작 루이 2세의 어머니였던 발루아의 마르그리트가 아들을 적극적으로 설득하고, 샤를 5세가 릴, 두에, 오르키에 시를 플란데런 백국에 양도하고 지참금 20,000 두카트를 지불하겠다고 약속하자, 루이 2세는 마음을 돌려 프랑스와 손잡기로 했다. 1367년, 샤를 5세의 막내 동생인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와 루이 2세의 딸 마르그리트가 결혼헀고, 플란데런 백국은 프랑스의 동맹이 되었다. 이렇듯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에서 외교 전략을 잘 구사해 많은 이득을 챙기는 한편, 루이 2세는 플란데런인들이 하나로 뭉쳐서 자신에게 반기를 일으키는 일이 없도록 주의를 기울였고, 플란데런의 무역 부흥에 힘썼다. 그 결과 플란데런 백국은 그의 치세에서 번영을 구가했다.

그러나 루이 2세는 치세 말년에 마상창시합을 자주 열고 값비싼 보석에 집착하는 등 사치를 지나치게 부려 민심을 많이 잃었다. 특히 겐트 주민들은 라이벌인 브뤼헤가 운하를 파는 것을 허락한 것을 보고 그가 브뤼헤만 감싸고 돈다며 반감을 품었다. 결국 1379년 8월 겐트 직조공들이 반란을 일으켜 시민 정부를 다시 세웠고, 북부 플란데런의 나머지 지역에서도 루이 2세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다. 루이 2세는 토벌군을 규합한 뒤 반란군과 맞붙었고, 여러 전투에서 승리한 뒤 1381년 겐트를 포위했다. 겐트 시민들이 협상을 요청하자, 그는 겐트의 모든 성인 남성들의 운명을 자신이 결정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대숙청을 우려한 겐트 주민들은 끝까지 항전하기로 결의했다.

1382년 1월 24일 겐트 반란군의 지도자가 된 필립 반 아르테벨데는 1382년 5월 3일 베버하우트 평원 전투에서 수적으로 훨씬 많은 토벌군을 격파하고 브뤼헤에 입성했다. 루이 2세는 강에 몸을 던져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고 릴로 도주했다. 이후 플란데런 전역이 반란에 가담했고, 오직 덴데르몬드와 오우데나르데 만이 루이 2세에 대한 충성을 유지했다. 한편 가혹한 세금에 시달리던 프랑스 북부 백성들 역시 플란데런 반란에 고무되어 봉기를 일으켰다. 상황이 이처럼 악화되자, 루이 2세는 사위인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2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필리프 2세는 이 기회에 플란데런을 자신에게 귀속시키기로 마음먹었고, 자국의 농민 반란에 영향을 끼친 플란데런 반란군을 경계한 프랑스 귀족들 역시 그를 지원하기로 했다. 1382년 11월 초 아라스에서 10,000명의 병력을 집결한 프랑스군은 올리비에 5세 드 클리송의 지휘 하에 플란데런으로 진격했다. 11월 27일, 프랑스군은 루즈베케 전투에서 반란군을 궤멸시키고 필립 반 아르테벨데를 전사시켰다. 이 소식이 프랑스 북부에 전해지자, 플란데런 봉기에 호응하여 반란을 일으켰던 농민들은 저절로 수그러들었다.

그러나 플란데런 반란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겐트 주민들은 끝까지 항전하기로 결의하고 잉글랜드에 사절을 보내 원군을 요청했다. 그들은 루이 2세가 대립 교황 클레멘스 7세를 따른다는 점을 상기시키며, 자신들은 우르바노 6세를 위해 봉기를 일으켰으니 이단을 토벌할 십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우르바노 6세는 플란데런에서 발생한 사건을 전해듣고 클레멘스 7세를 추종하는 이들을 상대하는 십자군을 일으킬 것을 촉구하는 교서를 반포하면서, 노리치 주교 헨리 르 디스펜서에게 십자군에 참여하거나 지원하는 자들에게 면죄부를 발급하는 권한을 부여했다. 잉글랜드 의회와 상인들은 프랑스의 플란데런 침공으로 중단된 양모 수출이 이번 십자군 원정을 통해 재개될 수 있다고 여겨 호응했고, 의회 역시 부유한 플란데런 백국과의 우호 관계를 회복하고 상당한 이권을 확보할 수 있으리라 여겨 찬성했다.

한편,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2세는 삼촌인 곤트의 존이 카스티야 십자군을 운운하며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던 터라, 디스펜서 주교의 십자군을 지원한다면 삼촌이 원정을 포기하게 만들 수 있을 거라 보고 지지를 표했다. 또한 그는 1년 전 막대한 세금 부과에 반발한 농노들이 와트 타일러의 난을 일으킨 것 때문에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세금을 부과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번 십자군에 들어가는 비용은 교회가 전적으로 부담하니 꺼릴 게 없기도 했다.

1382년 12월 6일, 리처드 2세는 잉글랜드 전역에 십자군을 선포했다. 그리고 12월 말에 디스펜서 주교와 기사들은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클레멘스 7세를 숭배하는 이단을 토벌할 때까지 십자가를 지겠다고 맹세했다. 1383년 2월, 잉글랜드 의회는 국왕에게 지급하던 전쟁 수행 보조금을 디스펜서에게 할당하기로 결의했다. 이후 잉글랜드군은 1383년 5월 칼레에 상륙한 뒤 프랑스군의 지배를 받던 됭케르크, 부르부르, 베르그, 포페링에, 뉴포르트 등 플란데런의 여러 마을을 공략했으며, 5월 25일 루이 2세의 지휘를 받은 프랑스-플란데런 연합군을 됭케르크 인근에서 격퇴했다.

하지만 디스펜서 십자군은 1383년 6월 8일 ~ 8월 8일 이프르 공방전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여기에 도시를 돕기 위해 인근에 군대를 배치한 루이 2세와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2세가 수비대와 연락을 원활하게 주고받으면서 잉글랜드군을 앞뒤로 괴롭혔다. 결국 8월 8일, 디스펜서는 겐트 동맹군에게 알리지 않고 철수했다. 겐트군은 이후에도 도시를 포위했지만 9월 10일 갈수록 불어나는 손실을 더는 견디지 못하고 철수했다. 그 후 디스펜서와 기사 휴 칼블리는 프랑스로 진격하기를 원했지만, 다른 사령관들은 프랑스의 압도적인 병력을 감당할 여력이 되지 않는다고 여겨 가기를 거부했다. 일부 십자군은 아예 전쟁을 포기하고 잉글랜드로 돌아가버렸다. 이후 십자군이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소년 왕 샤를 6세를 대동한 프랑스군이 8월 15일 아라스에서 소집된 뒤 플란데런으로 이동해 8월 말에 테루안에 이르자, 디스펜서는 그하블린느로 퇴각했다.

얼마 후 십자군이 점령했던 됭케르크, 부르부르, 베르그, 포페링에, 뉴포르트 등이 차례로 프랑스군에 재정복되었고, 십자군이 플란데런에 마련한 마지막 거점인 그하블린느도 며칠 뒤 포위되었다. 디스펜서는 처음엔 항복을 거부하고 리처드 2세가 원군을 보내주기를 희망했지만, 리처드 2세가 프랑스와 정면 대결하기 싫어서 군대를 보내주지 않는데다 그하블린느 시민들이 프랑스군에 항복하겠다고 통보하자,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이 잉글랜드로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는 조건으로 항복하겠다고 제안했고, 프랑스군 수뇌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디스펜서의 십자군은 10월 말까지 영국 해협을 건너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이렇게 잉글랜드군은 물러갔지만, 겐트는 전쟁을 꿋꿋이 이어갔다. 루이 2세는 겐트 반란군을 끝내 완전히 제압하지 못하고 1384년 1월 30일에 사망했다. 이후 외동딸 마르그리트가 플란데런 여백작이 되었고, 부르고뉴 공작이자 마르그리트의 남편 호담공 필리프가 플란데런 백국을 관리하게 되었다. 호담공 필리프는 2월 27일 장인의 장례식을 성대하게 거행하고, 브뤼헤, 이프르, 메신느, 딕스무이데, 담, 메헬렌 및 앤트워프를 잇따라 방문해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이후 필리프는 겐트 반란 진압에 몰두한 끝에 1385년 12월 18일 투르네 협약을 체결하면서 겐트를 복종시키고 플란데런 백국의 지배자가 되었다.

3. 가족



[1] 훗날 교황 클레멘스 6세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