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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5 20:22:27

샤를 1세 드 부르봉

<colbgcolor=#00FFFF><colcolor=#000000> 부르봉 공작
샤를 1세 드 부르봉
Charles Ier de Bourbon, Duc de Bourbon
파일:샤를 1세 드 부르봉.jpg
이름 샤를 1세 드 부르봉
Charles Ier de Bourbon
출생 1401년
프랑스 왕국 부르봉
사망 1456년 12월 4일 (향년 55세)
프랑스 왕국 오베르뉴 몰랭 성
아내 아녜스 드 부르고뉴 (1425년 결혼)
자녀 장 2세, 마리, 필리프, 샤를 2세, 이자벨[1], 피에르 2세, 루이, 마르그리트, 카트린, 잔, 자크
아버지 장 1세 드 부르봉
어머니 마리 드 베리
형제 루이, 루이 1세 드 부르봉몽팡시에
직위 부르봉 공작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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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귀족, 장군. 백년전쟁 시기에 잉글랜드군에 맞섰다.

2. 생애

1401년경 프랑스 왕국 부르봉 공국에서 제4대 부르봉 공작 장 1세 드 부르봉과 프랑스 국왕 장 2세의 아들이자 베리 공작인 장 드 베리의 딸인 마리 드 베리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루이[2], 루이 1세 드 부르봉몽팡시에[3]가 있었다. 1415년 아버지가 아쟁쿠르 전투에 참가했다가 잉글랜드군에 생포된 후, 부르봉 공국 관리는 어머니 마리 드 베리와 섭정 의회가 맡았다. 15세에 부르봉 의회의 의장이 되었으며, 1424년 클레르몽앙보베시 백작이 되었다.

1418년 아르마냑파가 권력에서 밀려난 후, 프랑스의 권력은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의 수중에 넘어갔다. 부르봉 가문은 본래 아르마냑파였지만, 그는 현실을 인정하고 장 1세에게 복종했고, 1425년 장 1세의 딸 아녜스와 결혼했다. 1420년 랑그독과 기옌의 중장으로 임명된 뒤 푸아 백작 장 1세 드 푸아그레일리를 몰아붙여 에그모르트. 베지에, 소미에르를 공략했다. 1424년 오베르뉴, 포레, 보졸레, 리옹의 중장을 맡았다.

이후 아르마냑파에 가담한 그는 1429년 오를레앙 공방전을 치르는 잉글랜드군을 격퇴하기 위해 블루아에서 군대를 소집한 뒤 스코틀랜드 장성이자 에브뢰 백작인 단리의 존 스튜어트와 함께 오를레앙으로 진군했다. 그러나 1429년 2월 12일 루브레 전투에서 존 파스톨프가 지휘하는 잉글랜드군 수송 부대를 공격해 보급물자를 탈취하려 했으나 패배하고 부상을 입었다. 이후 잔 다르크 루아르 원정을 단행할 때 참여했으며, 7월 17일 샤를 7세의 프랑스 국왕 대관식에 참석했다. 그해 9월 1차 파리 공방전에 참여했고, 11월 4일 생피에르르무티에 공방전, 라 사리테 공방전(1429년 11월 24일 ~ 12월 25일)에 참여했다.

이후 일드프랑스, 샹파뉴, 브리의 보안관에 선임된 그는 1430년 클레르 몽앙보베시 전투에서 토머스 키리엘이 지휘하는 잉글랜드군에게 패배했다. 1432년 조르주 1세 드라트레무아유를 타도하는 음모에 가담했지만 실패했다. 1434년 1월 5일 아버지 장 1세가 런던에서 포로 생활을 하던 중 사망했고, 어머니도 같은 해 7월에 사망했다. 이리하여 그는 부르봉과 오베르뉴의 공작령을 물려받았다. 같은 해에 샤를 7세로부터 프랑스 대시종에 선임되었다.

1439~1440년 장 2세 달랑송, 장 드 뒤누아, 도팽 루이 등과 함께 샤를 7세에 대항하여 프라그리에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프랑스 무관장 아르튀르 드 리슈몽이 토벌대를 이끌고 오자 항복했고, 대시종 직위와 일부 성을 잃고 자기 영지에 은퇴했다. 1456년 12월 6일 통풍으로 인해 물랭 성에서 사망했다.

3. 가족



[1] 부르고뉴 공작부인으로 마리 드 부르고뉴의 어머니. [2] 1403 ~ 1412, 포레 백작 [3] 1406 ~ 1486, 몽팡시에 백작 [4] 그녀가 결혼했을 때 필리포 2세는 아직 사보이아 공작이 아니었다. 사보이아 공작으로 즉위한 것은 필리포 2세가 죽기 1년 전인 1496년으로 마르그리트가 죽고 나서 한참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