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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릉양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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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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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제4대 황제
해릉양왕 | 海陵煬王
파일:해릉양왕.jpg
만주의 금나라 박물관에 있는 흉상[1]
출생 1122년 2월 24일
회령부 회령현 완안부
(現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아청구)
사망 1161년 12월 15일 (향년 39세)
상경 회령부 황궁
(現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아청구)
능묘 미상
재위기간 제4대 황제
1150년 1월 9일 ~ 1161년 12월 15일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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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82647><colcolor=#ece5b6> 성씨 완안(完顔)
중국식 : 량(亮)
여진식 : 적고내(迪古乃)
부모 부황 덕종[2]
모후 자헌황후[3]
형제자매 5남 5녀 중 차남
배우자 황후 도선씨
자녀 4남 3녀
작호 해릉왕(海陵王) / 해릉서인(海陵庶人)
존호 성문신무황제(聖文神武皇帝)
제호 폐황제(廢皇帝)
시호 양왕(煬王)
연호 천덕(天德, 1149년 ~ 1153년)
정원(貞元, 1153년 ~ 1156년)
정륭(正隆, 1156년 ~ 1161년)
}}}}}}}}}

1. 개요2. 생애
2.1. 제위에 오르다2.2. 성공한 쿠데타2.3. 집권 기간
2.3.1. 희대의 색마2.3.2. 그 외의 악행들2.3.3. 무리한 남송 침공, 그리고 처참한 말로
2.4. 사후
3. 중앙집권화4. 여담
4.1. 몽골과의 관계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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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贊曰:海陵智足以拒諫,言足以飾非。欲爲君則弑其君,欲伐國則弑其母,欲奪人之妻則使之殺其夫.
찬하여 말한다. 해릉의 지혜는 거간에 족했고, 언변은 시비에 족했다.[4] 군주가 되고자 할 때는 그 군주를 죽이고, 나라를 정벌하고자 할 때는 그 모친을 죽였으며,[5] 다른 사람의 아내를 빼앗으려고 할 때는 아내를 시켜 남편을 죽였다.
― 《 금사》의 <해릉 본기> 논찬

금나라의 제4대 황제.

폐위되어서 묘호는 없고, 시호(煬)으로 수양제와 같은 시호다.[6] 보통 즉위 이전의 왕호인 해릉왕(海陵王)이라고 부른다. 즉위 전에는 해릉군왕(海陵郡王)이었다. 《금사》(金史)에서는 폐제(廢帝) 해릉서인(海陵庶人)이라고 부르고 있다. 자는 원공(元功), 휘는 완안적고내(完顔迪古乃)였으며, 중국식은 완안량(完顔亮)이었다.

아버지는 금태조 완안아골타의 서장자인 요왕 완안알본(遼王 完顔斡本)이었다. 해릉양왕이 즉위하고 덕종 황제로 추존했으나, 해릉양왕이 폐위된 이후 묘호와 시호가 삭탈되고 황자로 다시 격하되었다. 어머니는 대씨(大氏)로 발해의 왕손이었으며, 자헌황후로 추존되었으나 역시 폐위 이후 삭탈되었다. 이 외에도 발해인의 후예가 금나라 황제의 황후나 비빈인 사례가 꽤 있는데 발해인 출신인 정식 황제의 황후나 비빈은 각각 1명과 12명이었고, 추존 황제의 황후나 비빈은 각각 3명과 2명이었다. 해릉양왕의 황후는 여진 귀족인 도단사야(徒單斜也)의 딸 도단황후(徒單皇后)였다.

중국의 수많은 폭군들 중에서 뽑은 3대 폭군에 들어갈 정도로 극악무도한 악행들을 저지른 황제였다. 나머지 둘은 후폐제 수양제이다. 이 때문에 후대에는 황제 취급도 못 받아서 해릉양 [7]이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 금사》는 해릉양왕을 왕으로도 취급하지 않아 아예 '해릉서인'이라고 칭했다. 해릉양왕은 칭기즈 칸의 먼 선조인 카마그 몽골의 제2대 칸이자 보르지긴 오복 타이치우드 씨족의 조상인 암바가이 칸을 목마에 못박아 죽인 자이기도 했다. 《금사》를 편찬한 원나라의 입장에서도 이 자는 불구대천의 원수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금사》에서는 해릉양왕을 열전이 아니라 본기에 넣어서 명목상으로는 황제로 취급해줬다.[8]

2. 생애

2.1. 제위에 오르다

그는 첫 출발부터가 추악하기 그지없었다. 해릉양왕이 번왕이었을 당시 금나라 황제였던 희종(해릉양왕의 사촌 형)은 해릉왕의 착실한 성품을 높게 사서 그를 자주 불러 같이 대화를 나눴으며, 금태조가 나라를 창건하는 과정에서 겪었던 어려움을 희종이 말해주자 해릉왕이 눈물을 흘리면서 듣는 것을 보고 희종은 그를 더욱 신뢰했다.

희종은 처음에는 의욕적으로 국정에 임하면서 꽤 준수한 통치력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재위 10년이 넘어가면서 차츰 사치와 향락에 빠져 살며 술주정을 부리고, 대신들을 때리거나 욕을 했으며, 무고한 대신을 함부로 죽이는 등 폭정을 일삼기 시작했다. 이런 그에게 실망한 신하들은 해릉왕과 함께 역모를 꾀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해릉왕은 좌승상인 당괄변(唐括辯), 우승상인 병덕(秉德)과 함께 희종을 폐위시키기로 공모했는데 "그러면 지금의 폭군을 폐위시킨 후 누가 황제가 될 것인가?"를 놓고 당괄변이 여러 이름을 제시했지만, 해릉왕이 그 이름을 부를 때마다 안 된다고 했다. 나중에 더 이상 황제로 만들 만한 사람이 없자, 당괄변은 해릉왕의 뜻을 눈치채고 그에게 "혹시 그대가 황제가 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오?"라고 물었다. 그러자 해릉왕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역시 어쩔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나 말고 또 누가 있겠습니까?"

모반을 꾸민 자들은 결국 해릉왕을 황제로 옹립하기로 결정하고 금희종의 호위 군관을 매수한 후, 일부 귀족 대신들과 짜고 황제의 침실에 뛰어들어 희종을 잡아 처형시키고 해릉왕을 제위에 올렸다. 1149년 쿠데타가 일어나자 희종은 황급히 동생을 찾았지만 희종 앞에 나타난 동생은 오히려 칼을 들며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 사태의 전말을 깨달은 희종은 온 힘을 다해 그와 결투를 벌였지만 패배하여 포로가 되었으며 결국 목숨을 잃고 말았다.

2.2. 성공한 쿠데타

쿠데타 성공 이후, 제위에 오른 해릉왕이 자손이 많아 다 합치면 7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하는 희종의 일족을 모두 죽였기 때문에 희종은 후사가 끊기고 말았다. 해릉왕은 제위에 오르고 나서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짐은 고대의 현명한 군주들을 본받고 싶으며, 경들의 직언을 듣고 싶다. 조정이 잘못하는 것이 있다면 언제든지 간언해 주길 바란다."
또한 병영을 순시했는데 병사가 흙이 섞인 밥을 먹자 자신이 그걸 빼앗아 먹고, 그 병사에게 더 좋은 밥을 주도록 했다.

또한, 순행길에 마차가 넘어져 깔린 사람을 보자 자신의 친위대에게 마차를 들어올려 사람을 구해주도록 시켰으며 자주 낡고 찢긴 옷을 입었고, 주변 신하들에게 이러한 것을 자랑하기를 좋아했다. 이렇게 자신이 아주 근검 절약한다는 황제라는 것을 세상에 알리고자 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멀쩡한 옷에다가 구멍을 만들고, 구멍난 곳을 꿰매게 하고는 황제의 의식주행을 기록하는 관리에게 이를 기록하라고 말하곤 했다.

선배인 수양제처럼 위선적인 쇼를 한바탕 벌인 뒤, 그는 희대의 폭군으로서의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2.3. 집권 기간

2.3.1. 희대의 색마

쿠데타에 성공해서 황제에 오른 해릉왕은 취임사를 발표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처음 사안이야 신임 황제의 입장에서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다. 특히 금나라는 부족국가에서 제국으로 너무 급발전한지라 영 엉성한 부분이 있었다. 가령 금태종은 신하 몰래 국고에서 돈을 써서 술을 마셨다고 신하들에게 곤장을 맞기도 했다. 중원 절반을 차지한 금나라의 사정상 어느 정도 중원제국으로의 전환은 불가피했고, 이는 국가의 중대사를 황제가 담당하게 되는 체제가 된다. 애초 해릉양왕이 죽고도 금나라의 중원제국화는 오히려 계속되었으니 이는 틀린 말이 아니다.

문제는 다른 두 사안이었다. 두 번째 사안 역시 황제로서 가져볼만한 목표였지만 금나라의 국력이 그걸 뒷받침하기엔 역부족이었고, 결과적으로 자신의 몰락을 자초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대망의 세 번째 사안은 그가 죽은 후 황제는 커녕 왕으로조차 대접받지 못하게 된 이유가 되었다.

역사적으로 여색을 밝힌 중국 황제가 해릉양왕만은 아니다.[9] 하지만, 이 사람은 대놓고
"짐은 풋사과(처녀)보다는 단물이 철철 흐르는 농익은 사과(유부녀)[10]성기가 익은 여자를 좋아한다는 말을 했다.]를 더 좋아하느니라."
라며 말하고 다닐 정도로 유부녀를 좋아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오죽했으면 신하들이 해릉양왕에게 제발 유부녀는 냅두고 처녀를 건드리십시오라고 간언하기까지 했다.[11]

해릉왕이 재위 당시에 벌인 일은 가히 패륜광의 소행이라 할만한 것으로, 단순히 호색이나 엽색으로 표현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대표적인 것만 해도...
위에 글을 자세하게 풀어서 쓰면 이렇다.

1. 쿠데타로 사촌형인 희종 황제를 암살하고 즉위하자마자 본래 맘에 두고 있었던 미망인 포찰아리호를 거두어서 현비로 봉하고, 곧 소비로 고쳐 봉했다. 그러나 곧 싫증이 나던 중에 눈에 들어온 여자가 바로 그 미망인 소비의 딸 중절이었다. 그 딸을 역시 황궁에 들여 옆에 두고 문란한 성관계를 즐겼다. 소비는 이를 보고 화가 나서 딸의 뺨을 때렸고, 해릉양왕은 이때 소비를 죽이려고 했으나 도단황후가 뜯어말려 겨우 살았다. 그후 소비는 낙담하여 궁인과 동성애를 했고, 그러다가 해릉양왕에게 동성애 사실이 드러나자 해릉양왕은 소비와 궁인 모두를 잔혹하게 처형하고, 소비의 딸을 데려와 역시 소비로 삼았다.

2. 해릉양왕은 평장사 완안오대의 아내였던 당괄정가에게 남편을 버린 뒤 자신에게 오라고, 안 오면 가문을 몰살하겠다고 협박했다.[12] 이에 당괄정가는 결국 남편을 독살하고 귀비로 책봉되었으나 곧 해릉양왕의 총애를 잃어, 다른 남자와 간통하다가 걸려 자결했다. 그리고 해릉양왕은 당괄정가의 여동생(즉, 처제) 당괄석가를 강제로 범하고, 그후 당괄석가의 시어머니인 안도과에게 며느리를 쫓아내라며 협박했다. 안도과는 협박에 못이겨 당괄석가를 입궁시켰다. 당괄석가는 언니 정가가 간통한 것이 걸렸을 때 본인도 연루되어 내쫓겼다가, 얼마 뒤 해릉양왕이 다시 불러들여 여비에 봉했다.

3. 1150년 금태종의 자손을 몰살시킬 때, 숙부였던 완안종민을 죽이고 그 부인(즉 숙모) 아라를 후궁으로 삼았고, 완안종필의 딸 완안포랄을 비롯한 사촌동생들을 범한 후 후궁으로 삼았으며, 우승상 완안병덕의 일족을 처형하면서 완안병덕의 동생에게 시집갔었던 조카(누나인 경의공주의 딸) 포찰차찰을 강간하고 후궁으로 데려왔다.

4. 그 외 유부녀는 더 볼 것도 없는데, 특기할 점으로 사촌동생의 부인도 성폭행하려 들었다. 제수는 성폭행을 당하기 직전에 자결했는데, 이 여자가 바로 당시 동경유수였던 완안오록의 부인이었다. 완안오록은 이후 해릉양왕을 폐위시킨 뒤 죽이고 제위에 올랐는데, 그가 바로 금나라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다고 평가받는 세종이었다.

게다가 신하들의 아내를 강제로 빼앗아 성폭행하고, 신하가 이를 거부하면 바로 죽여버렸다. 심지어 더 큰 쾌락을 즐기기 위해 성폭행을 저지를 때 반드시 성폭행 대상의 남편에게 자신이 그 남자의 아내를 성폭행하는 광경을 지켜보도록 했다.희대의 NTR충

심지어 해릉양왕은 본인의 성미가 뒤틀리면 성관계 도중에도 갑자기 칼을 빼들어 성관계 중이던 여자의 목을 잘라버렸다고 한다.

황제가 이 꼴이니 금나라는 볼 것도 없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2.3.2. 그 외의 악행들

2.3.3. 무리한 남송 침공, 그리고 처참한 말로

그 와중에 취임사를 실천하려고 무리하게 남송 침략을 시도했다. 그런데 사실 남송을 정벌하려는 목적도 남쪽에 미녀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였다고 한다. 참고로 수양제도 강남 총관을 하다가 강남 미녀에 빠져 후량 선제의 딸이었던 소씨를 부인으로 삼았다.

남송을 침공할 때 신하들에게
"하늘에서 사자가 와서 송나라를 정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라고 했다. 당시 금나라와 남송은 화평조약을 맺고 있었지만 남송은 이전 북송 시절, 이민족들에게 당한 정강의 변이라는 매우 아픈 역사가 있었다. 심지어 그 이민족은 바로 금나라였다. 당연히 다른 이민족들보다도 심하게 경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남송은 강남으로 후퇴한 뒤에도 늘 전선을 만들고 성곽을 고치는 등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금나라의 신하들도 이것을 알았기에 여러 신하들이 남송 침공을 반대했지만 해릉양왕은 1160년에 그들의 목을 모두 베며 여론을 탄압했다.[17] 심지어 이 과정에서 태후가 '금 왕조를 망칠 셈이냐?!'는 식으로 전쟁을 벌이지 말라고 간언하자 그 태후까지 살해하는 패륜을 저질렀다. 거기다 죽였으면 그냥 조용히 묻어주기라도 하면 좋았을 텐데, 해릉양왕은 태후의 시신을 불태운 뒤 뼈를 물에다가 뿌려버리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다만 해릉양왕이 자신을 낳아준 친어머니를 죽인 것은 아니었는데 그의 친어머니였던 대씨는 이미 사망했기 때문이다. 해릉양왕이 죽인 태후는 '적모'[18]였던 선황제의 정실 부인인 황태후 도단씨였다.

이렇게 반대 의견을 억누른 뒤 해릉양왕은 본인이 제위에 오를 때부터 밝혔던 남송 정복을 위해서 무려 500,000여 명의 장정을 강제로 징병하거나 배를 건조하는 일에 동원하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금사》에 따르면 금나라의 국고는 이미 파탄이 났고, 가족이 서로 떨어지거나 뿔뿔이 흩어졌으며 전쟁에 나가 죽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아서 이를 원망하는 울음 소리가 하늘을 진동시킬 정도였다고 한다.[19]

그렇게 남송 침략을 개시했는데 여기서 해릉양왕에게 약간의 천운이 따랐다. 바로 위에서 보이는 것처럼 엄청나게 광고를 해줌에도 당시 남송 황제였던 고종 조구는 이에 대한 방비를 따로 하지 않았던 것이다. 금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우윤문이 금나라가 변경(개봉)으로 천도하여 남송을 침공할 것이라고 하면서 금나라군에 대한 방비를 하라고 했으나[20] 남송 조정이 이를 기각했던 것에서 드러난다. 그래서인지 금나라군이 양회 전선을 함락시키자 당시 사령관이었던 왕권이 지레 겁을 먹고 도주한 것에서 보이듯 남송이라고 방어 준비가 제대로 되어있진 않았다.

그런데도 원정 과정은 신통하지 않았다. 남송으로 가려면 장강이라는 큰 강을 건너야하는데 당시 금나라의 선박 기술은 남송에 뒤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금나라군은 수전에서 번번이 남송군에게 물을 먹었야했는데 당장 총관 아린이 채석기에서 도강을 시도했지만 남송의 명신 우윤문에게 저지당했으며[21] 산동 지역에서도 이보가 이끄는 수군이 금나라의 수군을 격파했다. 그외에도 위승이 이끄는 군대 역시 금나라군을 저지하여 금나라군은 별다른 소득없이 양주로 이동해야 했다.

거기다 1161년 제국 북서쪽에 있었던 거란인들이 강제 징병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특히 남송 원정군에 속했던 거란인 장군들도 아예 남송에 항복해 길 안내까지 할 정도로 답이 없었으며, 결국 거란의 반란은 금세종이 즉위하고 나서야 건도 화약을 주도했던 복산충의가 진압했다. 또한 동경 요양부(東京遼陽府)에 있었던 사촌동생 완안오록도 반란을 일으켜 중도 대흥부에 입성했다.

이렇게 내부적으로도 붕괴되어가는 상황에서도 해릉양왕은 반란을 진압하기는커녕 남정에만 더욱 골몰하는 삽질로 시간을 보냈다. 양주로 이동한 해릉양왕은 아예 정신이 나가버렸는지 거기서도 도강에 실패하면 장수들을 죄다 죽이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호북의 남송 수군이 장강 중류에서 양주가 위치한 하류로 내려오는 중이었고, 남송군의 저항이 격렬해 도강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강을 건너자니 남송 수군에게 죽을 지경이었고, 강을 못 건너면 해릉양왕에게 목이 잘릴 판이었기에 장수들은 결국 해릉양왕에게서 등을 돌렸다.

1161년, 황제의 막사로 화살이 날아드는 것으로 진중 반란이 시작되었다. 원정군을 이끌던 지휘관들이 이반하여 해릉양왕을 향해 칼을 돌렸고, 이 희대의 폭군은 도주하려다가 병부상서 겸 신무군 도총관 야율원의[22], 무승군 도총관 도단수소 등에게 붙잡혀 막사에서 처형당하는 실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야율원의와 도단수소는 해릉양왕을 살해하고 그를 따르는 다른 부하들도 잡아 죽였으며, 수도로 가서 황태자를 죽였다.

2.4. 사후

해릉양왕을 사형에 처한 부장들의 주도로 완안오록이 제위에 올랐는데 그가 바로 금나라 최고의 명군이었던 세종이었다.[23]《금사》에 따르면 이때 해릉양왕을 처형한 부장이 '새로운 황제께서 중도 대흥부에 입성하셨다!'라고 알리자 해릉양왕은 웃으면서 "옹(雍, 금 세종의 중국식 휘)이 황제가 되다니! 그 녀석을 먼저 처리했어야 하는데!"라는 유언을 남기고는 처형되었다.

해릉양왕은 사후 악행에 대한 업보를 치렀는데, 세종은 해릉양왕의 태자 완안광영을 포함하여 그의 자손들의 목숨을 남김없이 모두 빼앗은 뒤 해릉양왕을 서인으로 격하시켰다. 무엇보다 해릉양왕의 시체를 중도 대흥부에 성대하게 조성한 황제 묘역에 묻지도 않았다. 그래도 황좌에 앉아있었던 사람이라 나름 왕으로 대접해서 왕들의 묘역에 묻었지만, 대정 20년에 신하들이
"이놈은 팔왕의 난 당시의 사마륜보다도 죄가 큰 놈이라 왕으로 대접해서도 안 됩니다."
라는 간언을 올렸고, 이 간언에 따라 최종적으로 폐서인시켜버렸던 것이다. 이미 황제 자격이 없는 짓을 실컷 했고, 서인으로 떨어졌으니 예를 갖추지 않았으며 시신을 중도 대흥부에서 멀리 떨어진 모래밭에 대충 묻어버렸다. 그래서 해릉양왕의 무덤의 위치는 오늘날까지도 알 수 없게 되었다.

《금사》에는 완안량의 조정에서 크게 권세를 누렸던 대방기(大邦基)라는 인물의 열전이 있는데, 성씨에서도 보이듯 발해 왕실의 후손으로 본명은 흥국(興國)이었다. 이 사람은 앞서 희종 시해 당시 희종의 침전 문지기를 맡고 있었던 권근시국직장(権近侍局直長)이었다. 희종이 시해되던 날 자객들과 짜고 침전 문을 열어준 장본인이 대흥국이었다.《금사》에 따르면 황통(皇統) 9년( 1149년) 완안량의 생일에 희종이 대흥국을 시켜 생일 선물로 사마광(司馬光)의 초상화를 비롯한 여러 물품을 보냈는데, 당시 희종의 황후로 정사에 관여하고 있었던 배만씨(裴満氏)도 마찬가지로 완안량에게 선물을 보냈고, 이를 알게 된 희종은 불쾌해져서 선물을 도로 가져오게 하는 동시에 완안량에게 선물을 가져간 사자인 대흥국도 화풀이삼아 곤장 100대를 쳤다. 단지 선물을 갖다주라고 해서 갖다 줬을 뿐인데 졸지에 화풀이로 찍혀 곤장을 맞게 된 대흥국은 이 일로 희종에게 앙심을 품어 희종 시해에 가담했다. 침전까지 쳐들어온 침입자를 발견한 희종은 평소 침대 머리맡에 세워두었던 호신용 패도(佩刀)로 맞서 싸우려고 했지만 이 패도마저도 대흥국이 어디론가로 치워버린 바람에 결국 희종은 속수무책으로 죽임을 당했다. 이로 인해 대흥국은 완안량이 즉위한 뒤 크게 출세하고 방기 즉 '국가의 기반이 되는 자'라는 거창한 이름을 해릉양왕으로부터 하사받았지만, 해릉양왕이 죽은 뒤 재산은 몰수되고 대방기 자신도 세종에 의해 희종의 능침인 사릉 앞에서 처형되었다.

3. 중앙집권화

폭군 중의 폭군으로 유명한 해릉양왕이지만, 금나라의 중앙집권화와 황제독재체제 강화에 대해서는 상당한 업적이 있었다. 보수적인 여진 황족들을 숙청하여 황권에 저항하는 세력들을 모두 쳐내고, 주요 관직에는 한인과 발해인, 거란인들을 임명해 믿을만하고 능력있는 이들을 선발했다.[24]

또한 해릉양왕은 한자를 쓰고 시를 지을 수도 있었다는 희종 이상으로 중국 문화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 사서오경, 시, 사, 가곡, 부를 읽고 감상할 수준의 '문화군주'였다. 물론 이 정도는 평범한 한인 학생도 갖춘 교양이었지만, 삼림•수렵 민족 출신의 금 황실이 화북 지역을 통치한 것이 채 30년이 안 되는 시점이었고 전대 황제인 희종이 겨우 한자를 읽고 시를 쓸 정도의 교양을 지녔다는 것을 생각하면 당대 여진인 귀족, 황족 중에서 해릉양왕만큼의 교양을 쌓은 이는 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해릉양왕은 중국의 문화에 호의적이었고, 중국의 국가 제도를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해릉양왕은 금태종이 시행했던 한복(漢服) 금지령을 폐하고, 중국 왕조들의 황실 의례를 도입했다. 요나라 출신의 문인과 송나라 출신의 문인들 간의 학문 성향의 차이를 배려해 만든 남•북선 과거 제도를 일원화하고, 송나라의 과거 제도를 모방하여 과거 제도의 개혁을 이루었으며, 국자감과 같은 고등교육기관도 설립했다. 여진인 귀족들의 힘을 약화시키고 한인을 기용하는 해릉양왕의 개혁은 만주가 아닌 화북을 통치의 중심으로 삼는다는 기조하에 이루어졌다.

해릉양왕은 황권 강화와 중앙집권화를 가속화하기 위해 행정 개혁을 실시했다. 중서성과 문하성을 폐지하고 상서성을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는 이 개혁은 1156년, 정륭 원년에 완성되어 정륭관제라 부른다. 정륭관제의 추진 목적은 여진인 귀족의 영향이 강했던 중서성과 문하성을 폐지하고, 황제가 통제할 수 있는 상서성만을 운영하여 황권을 강화하고, 상서성의 소속 기관으로 추밀원을 설치하여, 황제가 군권을 틀어쥐기 위함이었다. 또한 수도를 상경 회령부에서 중도 대흥부로 남천한 것은 보수적인 여진인 귀족들을 약화시키고, 화북 지역에 대한 통치력을 확립하는 한편, 중국 대륙 전체의 통일을 염두에 둔 조치였다.

이러한 조치는 성공적이었으며 금나라 역사상 최고의 명군으로 알려진 세종도 해릉양왕이 만든 정륭관제는 약간의 개정만 하고 그대로 운용했으니 희종이 도입한 3성 6부제를 해릉양왕이 금나라에 맞는 형태로 변화시켜, 완성했다고 볼 수 있다. 해릉양왕이 만든 정륭관제는 금나라가 1234년에 멸망할 때까지 큰 변화없이 유지되었다.

이처럼 중앙집권화와 황권 강화에는 확실한 공적이 있는 해릉양왕이었지만, 위의 여러 문단에서 지적하듯이 그의 황권 강화 과정은 너무 조급하고 잔혹했다. 필요 이상의 학살과 엽색 행각, 수도 이전을 비롯한 대규모 토목 공사와 화려한 사치는 아직도 송금전쟁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인민과 행정이 체계화되지 못한 금나라에게는 너무나 부담스러운 것이었고, 민심이 이반하기에 충분했다. 세종과 장종대의 경제 성장을 '경제 회복'이라 평가할 정도로 세종 이전의 화북 지방은 송대의 경제력을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는데, 이 상황에서 과다한 숙청, 사치, 토목 공사를 벌이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대군을 동원해 남송을 친다고 했으니 해릉양왕은 자기 손으로 목을 조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해릉양왕이 죽고 난 뒤에 즉위한 세종은 해릉양왕이 보수파 귀족들을 다 숙청해 준 덕분에 정변으로 제위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황권에 도전할만한 세력이 없어 상당히 편하게 치세를 시작했으며 해릉양왕이 행한 폭정을 종식시키고, 과다한 세금 징수를 없애주는 것만으로도 성군 소리를 들었다. 국가의 행정 제도는 희종과 해릉양왕이 상당 부분 완성시켜 둔 상태였기에 세종은 이를 조정하고 마무리하는 작업에 착수해 금나라의 정치, 행정 제도를 완성시켰다. 즉, 해릉양왕은 죽 쒀서 남 좋은 일만 시킨 셈이 되었다.

그가 숙청과 학살을 줄이고 엽색 행각과 사치를 즐기지 않았다면 금나라의 기초를 세우고, 황권을 반석 위에 올린 황제로 평가받았을 수도 있었겠지만, 해릉양왕은 문제를 지적해주는 충신들은 죽이고, 반대파들은 피에 굶주린 악마처럼 학살했으며 수많은 여성들을 손에 넣어 지배층이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이것만 해도 충분히 폐위당할 명분이 되었는데, 과다한 토목 공사와 세금 수취, 남송 정벌로 민심까지 잃고 끝내는 자신을 최후까지 지켜야 할 금군에 의해 살해당했다. 해릉양왕의 이러한 모습은 세종을 비롯한 후대의 군주들에게 반면교사의 예로 늘 인용되었다.

4. 여담

1980년대 대한민국에서 《폭군 해릉왕》이라는 이름으로 소설이 나온 바 있는데, 시대가 시대인 만큼 3S정책에 제대로 편승한 일종의 야설이다. 해릉양왕의 엽색 행각에 따라 인처&로리물에 적나라한 성적 묘사가 일품인데, 당연히 절판되어서 구하기 좀 어렵다. 다만 국립중앙도서관과 몇몇 대학교 도서관에 있다.

대체역사소설 《 왕조의 아침》에서도 등장. 주인공을 죽이려는 외국 최고 지도자로 유일하게 등장한다. 그러나 주인공 측이 다음 군주인 금세종과의 연합전선을 구축하고 오히려 역공을 가해, 해릉양왕은 죽음을 당한다.

해릉양왕의 아들들은 완안광양만 빼고 다 아기 때 죽었고, 완안광양은 아버지가 죽은 지 얼마 후 새로 황제로 즉위한 금세종에게 피살되었다.
금사》<후비전>(后妃傳)에 따르면, 여러 비빈궁(妃嬪宮)을 모시는 모든 시녀들에게 남자의 의관을 착용시키고, '가시아'(假嘶兒)라 불렀다고 한다.

4.1. 몽골과의 관계

재위 당시 카마그 몽골 암바가이 칸을 나무 노새(목마)에 못박아 처형시켰는데, 암바가이 칸이 죽으면서 자신의 후손들이 반드시 복수할 것이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는 《 원조비사》에 실려 있는데 이를 들은 해릉양왕의 답변은
"그 말은 너희 부족 무리한테나 고하는 게 옳도다! 짐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였다.

암바카이 칸이 금희종 때인 1136년에 죽었다는 설도 있는데, 중국 드라마 < 칭기즈칸>에서는 이 설을 채용했다. 그러나 해릉양왕 때인 1156년에 죽었다는 설이 더 유력하다.

다음 카마그 몽골의 칸이 된 쿠툴라 역시 5년만에 금나라와 타타르의 협공을 받아 죽었는데, 시기가 시기인지라 해릉양왕 때인지 금세종 때인지는 알 수 없다. 쿠툴라 칸 사후 몽골은 약 40년 동안 칸 없이 분열된 시기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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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후대의 상상으로 만들어진 모습이다. 참고로 복장이 고증 오류인데, 금나라 박물관에는 역대 금나라 황제의 흉상을 전시하면서 해릉양왕을 포함한 금나라 역대 황제들을 북방 이민족스러운 옷을 입은 모습으로 만들었다. 중국 사서에 요나라와 금나라의 상류층들이 송나라식 단령 사모를 착용했다는 기록이 있음에도, 현대 중국에서는 요나라와 금나라의 복식을 묘사할 때 중국식이 아닌 이민족식 의상으로 복원한다. 전 황제인 희종 통천관과 24류 면류관, 강사포를 입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그냥 이민족스럽게 만들었다. 한국 드라마 < 무인시대>에서는 이것을 제대로 재현했다. [2] 금태조 완안아골타의 서장자로 덕종 황제로 추존했으나 세종이 집권하고 삭탈했다. [3] 요왕부인 대씨로 해릉양왕이 자헌황후(慈憲皇后)로 추존했으나 세종이 집권하고 삭탈했다. [4] '거간'은 간언을 물리친다는 뜻이고, '시비'는 말을 교묘하게 얼버무린다는 뜻이다. [5] 생모가 아니라, 적모인 도단씨를 말한다. 죽인 다음 뼈를 불태워 물에 뿌려 버렸다. [6] 양(煬)은 '방탕하고 악랄하며 여색을 좋아하고 예를 무시하며 하늘의 뜻에 거역하고 백성을 착취했다'는 최악의 뜻이다. 자세한 내용은 시법 참조. [7] 군주로도 취급하지 않았다. 황족으로서 친왕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왕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8] 후술되어있듯 중앙 행정을 정비하는 등 중앙집권화 과정을 잘 수행했고, 몽골을 잠시나마 억누르는 등 업적이 아예 없진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9] 명나라의 목종 융경제는 난잡한 성생활을 즐겼지만, 이는 궁녀와 후궁 한정으로 충분히 합법적인 범위 내에서 한 것이었고, 황제로서의 행적으로 따지면 오히려 명군으로 평가받는다. 비록 지나친 여색으로 인해 건강을 해쳐 요절했지만 말이다. [10] 정확히는 [11] 전근대 시기엔 조기 사망률이 높았으므로, 왕조의 혈통을 유지시키기 위해 신하들이 군주에게 후궁을 여러 명 두어 다산을 권고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시기였다. 단, 이건 결혼한 적이 없는 처녀들이 대상이었지, 유부녀를 건드리는 건 절대적인 금기였다. [12] 다만 당괄정가는 해릉양왕이 황제로 즉위하기 전에도 사통하던 관계였다. [13] 비슷한 사례로 왕씨 왕족들을 마구 숙청했던 고려의 광종이 있다. 이쪽은 자기 친아들인 경종도 죽이려 했으며 어찌나 많이 죽였던지 목종 대에는 왕좌를 계승할 인물이 대량원군(현종)밖에 남지 않았을 정도였다.(광종의 아들이었던 경종은 자식이 목종 하나뿐이었고, 목종이 너무 어려 대신 왕좌에 오른 경종의 사촌인 성종도 아들이 없이 딸 둘만 낳았다. 거기다 목종은 동성애자라서 아이를 못 낳았다.)(당시 왕씨로는 대량원군 말고도 효은태자의 자손들도 있었지만 광종에 의해 계승권이 박탈된 상태였다. 그러나 대량원군에게 유고가 생겼다면 목종은 자식을 못 낳는 상황이고 왕씨 남성도 효은태자의 자손들만 남은지라 이들이 계승권을 회복했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광종은 해릉양왕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많은 업적을 쌓아 명군 소리를 듣는 군주라, 해릉양왕이 비벼볼 건덕지가 없다... [14] 中都大興府, 지금의 베이징 [15] 上京會寧府, 지금의 하얼빈 [16] 역대 여진 추장들이었으며, 황제로 추존받은 이들이었다. [17] 이때 죽은 대표적인 인물이 기재인데 해릉양왕이 무슨 일이 있으면 직언해도 된다는 그의 말을 믿고는 남송을 공격하는 일에 반대 의견을 냈다가 그 즉시 목이 잘렸다. [18] 첩의 자식이 아버지의 정실 부인을 부르는 호칭이다. [19] 이런 상황에서도 해릉양왕은 천하에 군주가 네 명인데 남에는 남송, 동에는 고려, 서에는 서하가 있으니 이를 통일해야 진정 넓은 나라가 된다며 남송 정복이 끝나면 고려 서하를 정복하겠다고 선언하기까지 했다. 즉, 남송이 쓰러져도 전쟁을 멈추지 않겠다고 선언했으니 금나라 백성들의 앞날은 가시밭길이나 다름 없었다. [20] 우윤문은 금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금나라가 변경으로 물자를 운송하는 것을 보고, 금나라가 남송을 침공할 것을 예측했다. [21] 이때 금나라군의 도강을 저지할 때 화약 무기를 사용했다고 한다. [22] 성이 야율씨인 걸 봐도 알 수 있듯이 요나라 황족 혈통이다. 천조제의 직계 혈통을 단절시킨 장본인이 해릉양왕이므로 친척의 원수를 갚은 셈이다. [23] 금세종은 해릉양왕에 대해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기에 반란에 동참한 것이었다. 즉 해릉양왕에게 부인 오림답씨를 잃은 것이 그것으로, 해릉양왕은 오림답씨가 미녀라는 소식을 듣고 그녀를 강탈하려했는데, 오림답씨는 남편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황궁으로 향했고, 해릉양왕의 유혹을 거절한 후 자진하면서 절개를 지켰다. 금세종은 제위에 오른 뒤 오림답씨를 황후로 추존하고 늘 그리워했다. [24] 이런 과정을 통해 해릉양왕의 충신이 된 한인, 발해인, 거란인들은 세종의 쿠데타 이후 일반 백성으로 위장하거나 고려, 서요, 남송, 서하 등 다른 나라로 망명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