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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로프 팔메/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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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년 ~ 청년기 시절2. 정계 활동
2.1. 정계 입문2.2. 총리 재임 1기2.3. 야당 시절2.4. 총리 재임 2기

1. 유년 ~ 청년기 시절

올로프 팔메 1927년 1월 30일,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부유한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인 팔메 가는 네덜란드 계통의 가문으로 발렌베리 가문을 필두로 하여 스웨덴 정계, 재계의 유력 가문과 사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 군나르 팔메는 성공적인 사업가였고, 어머니 엘리자베스 폰 크리님은 라트비아 발트 독일인으로 과거 제정 러시아의 귀족 집안 출신. 그의 정치 행보의 생각한다면, 뜻밖이라고 여기질 법한 집안 배경이다. 강남 좌파? 이런 가정 밑에서 자라며 일류 학교와 문화적 경험에 대한 접근을 포함한 특권적인 양육의 많은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어릴 때부터, 학문적으로 재능이 있었고 학업에 뛰어났다. 특히 언어에 재능을 보여 성인이 될 때쯤엔 스웨덴어 영어를 비롯한 7개 국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스톡홀름 대학교와 스톡홀름 경제 대학을 포함한 몇몇 명문 학교들을 다녔다. 대학에서 팔메는 광범위한 정치적, 사회적 사상에 노출되었고, 사회민주청년동맹을 포함한 많은 학생 단체에 참여하게 되었다.

방학을 할 때면 유럽과 미국 전역의 여러 나라에서 시간을 보냈다. 이러한 경험들은 그를 다른 문화와 삶의 방식에 노출시켰고 세상에 대한 그의 관점을 넓히는 데 도움을 주었다.

팔메는 1945년 징병제 스웨덴군에서 2년간의 복무를 마치고 스톡홀름 대학교에 진학, 법학을 전공한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오하이오 주의 케년 대학에서 2년간 수학한다. 미국 유학의 경험은 그에게 새로운 생각과 사상의 길을 열어 주었다. 사회주의 학생운동권의 영향을 크게 받아 신자유주의 사상가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The road to serfdom(노예의 길)> 을 비판하는 논문을 쓰기도 했으며, 미국자동차노동조합(United Workers Union)과 월터 루서[1]에 대해 쓴 논문은 학년 최우수 논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학부 과정을 마치고 그는 미국과 멕시코 히치하이킹으로 여행한다. 그 과정에서 본인의 우상이던 노동운동가 월터 루서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고, 북미 노동자들과 하층 계급의 열악한 처우와 인권을 직접 접하며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자본주의 리더 미국이라는 나라가 가진 모순과 엄청난 내적 불평등을 목격한 것은 젊은 올로프 팔메의 인생에서 중요한 경험이 되었다.

올로프 팔메는 후일 자신의 사회민주주의적 사상의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세 가지를 밝혔는데 첫째로 1947년 사회민주노동자당 에른스트 비그포르스와 보수당 야를 할마르손, 자유당 엘론 안데르손 간에 벌어진 세금에 대한 논쟁에 참여하게 된 것, 둘째로 위의 서술처럼 1940년대 미국에 머물며 인종차별과 사회적 양극화의 불평등을 목격한 것, 마지막으로 1953년 일본, 타이,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를 여행하며 전후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은 제국주의의 잔재와 식민지 문제를 목격하게 된 게 그것이다.

1949년 미국에서 돌아와 스웨덴 학생회 연맹의 간사가 된 팔메는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의 학생운동을 연구하고 프라하에서 발생한 쿠데타의 여파를 밝히기 위해 프라하로 향한다. 같은해 부활절, 이곳에서 팔메는 젊은 체코슬로바키아 여성인 엘레나 레네로바를 만나게 된다. 그녀의 오빠는 쿠데타 이전에 학생 운동의 지도자였고, 당시엔 파리에서 망명 중이었다. 팔메가 방문하고 시간이 조금 지난 뒤, 그녀의 오빠가 프랑스에서 반공 활동을 하자 보안경찰이 엘레나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엘레나는 팔메에게 편지를 보내 위장 결혼에 응해줄 것을 물었고, 같은해 12월 21일 둘은 서신을 통해 프라하 시장으로부터 결혼을 인정받았다. 결혼 열흘 뒤 외국인과 결혼한 체코슬로바키아인의 출국이 금지되기도 했다. 이후 그녀는 체코슬로바키아를 떠나 스웨덴 웁살라에서 의사 교육을 받게 된다. 비록 위장결혼이었지만 팔메는 그녀를 최선을 다해 보살폈다.

결론적으로, 올로프 팔메의 어린 시절은 그가 된 사람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는 그의 삶에 형성적인 시기였다. 그의 특권적인 양육과 학문적 성취에서부터 그의 정치적 행동주의와 개인적인 비극에 이르기까지, 팔메의 어린 시절은 그의 후기 정치 경력과 사회 민주주의와 평화에 대한 헌신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2. 정계 활동

2.1. 정계 입문

1949년 미국에서 돌아온 올로프 팔메는 스웨덴 사회민주노동자당에 입당한다. 다양한 교육을 받고 세계를 여행하며 몸에 체득한 경험은 그에게 강력한 사회민주주의자로서의 신념을 불어넣어 주었다.

1953년 당시 사회민주노동자당의 당수이자 스웨덴의 총리였던 타게 엘란데르의 비서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정계에 입문하였다. 1955년 사회민주노동자당 내부 조직인 스웨덴 사회민주청년연맹의 이사로 활동했고 노동자 교육위원회 등 다양한 조직에 참여하면서 사민당 내부의 입지를 탄탄히 다져 갔다. 1957년에는 하원의원에 당선되어 정계의 중심으로 들어가게 된다.

1963년 새로이 구성된 내각에서는 무임소장관[2]으로 입각하였다. 당시 격화되어 가던 냉전 상황 속에서 팔메는 스웨덴이 지켜 오던 정치/외교적 중립 노선을 유지하는 것을 표방했고 내부적으로는 특히 학생운동과 사회의 혁신에 많은 관심을 가진 열정적 신진 정치인이었다. 1965년에는 교통통신부 장관직을 맡게 되었는데 언론이 국가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성과 정치적 중립성을 지켜야 한다는 강한 입장을 표출했다.

1967년 교육부 장관으로 임명되면서 팔메의 본격적 개혁 정책이 시작된다. 당시 그는 비싼 교육비로 인한 실질적 차등 교육과 그에 반발하는 강경 좌파 학생운동권의 표적이 되었는데, 집회 장소에 직접 나가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력적인 방법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설득하는 모습을 보여 국민적 인기를 얻는다. 팔메가 2년 간 교육부 장관으로 재임하며 이룬 대표적 업적은 학자금 대출 제도의 개선이 있는데, 특히 문턱을 낮추어 접근성을 강화하고 장기 대출을 가능케 하여 서민층의 고등교육 활성화에 실질적으로 기여했다는 평을 받는다.

그러던 와중 1968년의 총선은 사회민주노동자당의 압승으로 끝났는데, 당시 1946년부터 24년간 총리로 재임하며 장기집권해 온 팔메의 정치적 멘토이자 동지 엘란데르 총리는 후임의 양성과 사회민주노동자당의 쇄신을 위해 총리직을 사임한다. 사회민주노동자당 내에서 이미 강한 입지를 구축한 올로프 팔메는 당 대표 선거에서 무난하게 승리하여 엘란데르의 후임으로 지명되고 1969년 스웨덴의 제26대 총리로 취임하게 된다.

2.2. 총리 재임 1기

올로프 팔메의 정치 활동은 혁명적 개혁가라는 그의 별명을 통해 요약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복지 국가라는 스웨덴의 명성은 이전 사회민주노동자당 총리 대부터 기반을 쌓은 것이긴 하지만 완성은 그의 집권기에 이뤄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런 급진적 개혁 정책은 임기 초부터 바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1969년 총리에 취임한 그는 우선 사회민주노동자당 및 정계에서 이야기가 나오던 개헌 작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한다. 1971년과 1975년의 두 차례에 걸쳐 점진적으로 개정이 단행된다. 현대 입헌군주국들이 모두 그렇듯이[3] 개헌은 비록 명목상이나마 유지되고 있던 국왕의 권력을 개편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예시로 왕이 의제의 주도권을 쥐고 내각을 소집할 수 있던 제도를 없앤 것이 가장 대표적이다. 그의 재임 기간에 스웨덴은 비민주적인 귀족들의 정치체라는 비판을 받던 상원(추밀원)의 권한을 최소화하고 제도적으로 완전한 의회민주주의를 확립하게 되었다.

스웨덴 사회를 본질적으로 뜯어고치고자 했던 팔메의 노력은 단지 제도적인 측면에만 그치지 않았다. 자신의 사회민주주의적 신념에 충실했던 그는 국가의 개입을 늘려나가는 혼합경제적 정책을 포함, 사회보장제도, 고용 및 노동시장의 개편, 노인과 여성, 장애인을 비롯한 약자의 인권 증진에 대한 폭넓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971년의 노동연금법 개혁과 1974년의 의료보험법 개혁으로 모든 국민이 연봉의 90퍼센트 이상 의료보험 보장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에 이어 1975년의 대학 등록금 전면 무료화[4]는 앞서 교육부 장관 시절의 학자금 제도 개선과 더불어 스웨덴의 높은 고등교육 비율을 만든 대표적 제도로 손꼽힌다.

물론 이 과정에서 세금의 인상은 필연적인 것이었고 급진적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역시 급진적으로(...) 오른 세율은 스웨덴 국민들에게 염증을 주어 그가 한동안 실각하는 이유가 된다. 참고로 현재도 스웨덴의 세율은 유럽 최고 수준이며 그것이 '인민의 집' 이라는 복지 시스템을 돌리는 원동력임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장애인 인권 개선에도 관심이 많아 1975년에는 지적장애인 대상 불임수술을 폐지했다.

2.3. 야당 시절

하지만 1976년 총선에서 중앙당, 온건당, 자유인민당이 과반(175석)을 넘는 180석을 확보한 뒤 연정을 구성하기로 하면서 1936년 이후 처음으로 사회민주노당자당이 정권을 내주는 상황이 되며 야당으로 내려왔다.

2.4. 총리 재임 2기


[1] 미국 노동자의 대부로 꼽히는 인물. 제너럴 모터스 노조 소속으로 급진적인 노동운동을 하며 전후 미국 사회에서 노동자의 권리 신장에 큰 역할을 한 인물이다. [2] 국무회의의 구성원이지만 특정한 행정 부처의 업무를 담당하지 않는 장관직. [3] 보통 서구권에서 좌파가 주도하는 공화주의 논쟁을 보면 사회민주노동자당이 장기집권한 스웨덴은 진작에 공화국이었을 것 같지만, 의외로 지금도 왕이 존재하는 입헌군주국이다. [4] 이는 후일 신자유주의의 영향을 받은 후임 정권에 의해 일부 폐지 및 취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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