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둘은 서로 각각 야당 대표와 총리직을 지냈다. 특히
1978년, 우파 연정의 와해 이후 총리 후보에 지명된 울스텐이
원내 제4당 출신이었음에도 총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원내1당이었고 팔메가 대표를 맡고 있던 사민당이 반대가 아닌 기권을 했던 것의 역할이 컸다.
앞선
두
명의 총리들보다도 더욱 급진적인
사회민주주의자라는 팔메보다도 정치적 스펙트럼에 있어 더욱 좌익 성향이 뚜렸했던 스웨덴 공산당 (現
좌파당)의 대표였던 베르네르와는 때때론 충돌했고 때때론 협력하는 사이였다.
팔메는
복지국가와
혼합경제를 추진한 반면, 베르네르는 급진적인 사회주의 개혁을 요구해왔기에 이러한 이념적 차이가 종종 이 둘을 대립시키곤 했다. 더 나아가 팔메는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과 인권문제를 두고 사사건건 충돌해온 반면, 베르네르는 다소 친소련적인 입장을 견지했기에 발생한 갈등도 없지 않았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둘 다 강력한 사회안전망, 노동자 권리 증진과 같은 정책에 있어서는 상당부분 의견을 공유했었기에 둘은 많은 경우에 협력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모두 총리 재임 기간 동안 외교, 국제 협력 및 대화를 강력히 옹호했다. 이 두 사람은 국제 무대에서 평화, 군축, 그리고 사회 정의를 적극적으로 촉진하며 비슷한 가치와 목표를 공유했다. 더불어 이들은 외교 정책에서 보다 정의롭고 평화로운 하나된 세계 질서에 대한 변함 없는 헌신을 강조하며 세계 정세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두 지도자는 특히
개발도상국들과의 국제적 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개발 원조, 부채 탕감, 공정 무역의 확대 등을 옹호했다. 특히 팔메는 이 분야에서 매우 적극적이기로 유명했고, 강대국이 개도국을 경제적으로 착취하는 행태를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 둘은 또한
베트남 전쟁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내비치기도 했다. 두 사람은 공적으로도 자주 협력하는 사이였지만 사적으로도 가까운 사이로 알려져있다. 스웨덴에서 망명생활을 해왔던 브란트는 스웨덴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었고,
발트 독일인 어머니를 둔 팔메는
독일어에 매우 유창했다고 한다.
이 둘은 후술할 브루노 크라이스키와 함께 민주사회주의 삼총사로 함께 묶이곤 한다. 이 셋은 모두 비슷한 시기에 집권해 공동적으로 국제사회에 목소리를 냈기 때문이다.
이 둘은 브란트와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같은 정치적인 입장과 견해를 공유했고, 여러 이슈에 있어서 함께 협력했기에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특히 이 둘은 反
아파르트헤이트와 군축, 중동평화와 같은 국제적 문제에 있어 같은 입장을 공유했던 평화에 대한 헌신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러한 입장과 함께 둘은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둘 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법학을 공부한 사회주의 정치가라는 비슷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
안슐루스 이후 유대인이었던 크라이스키는 모국인 오스트리아를 떠 스웨덴에서 망명생활을 했기에 스웨덴어에 대해 어느정도의 배경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팔메 역시도 상술했듯이 독일어에 유창했다.
둘 다 비슷한 시기에 집권한
사회민주주의 정당 출신 총리들인만큼 공적으로 자주 협력하곤 했다. 이 둘은 모두 내치에서는 사회민주주의를 기반으로 사회 복지 확대와 노동자 권리 증진에 노력했으며, 외교적으로는 반식민주의와 평화주의, 반전주의에 목소리를 높였다. 이 둘은 서로 양국을 국빈방문하며 공개성명서를 자주 채택하기도 했고, 둘이 속한 정당이 모두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소속인만큼 자주 협력해왔다.
다만
베트남 전쟁에 있어서는 둘의 입장이 상이했는데, 팔메가 베트남전에 있어 노골적인 반대 입장을 표한 반면, 윌슨은 다소 신중한 입장을 취했기 때문이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