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45:28

올로프 팔메/다른 정치인들과의 관계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올로프 팔메
{{{#!wiki style="margin:-10px"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ED1B34><tablebgcolor=#ED1B34> 파일:올로프 팔메 투명.svg 올로프 팔메
관련 문서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ED1B34> 일생 생애
다른 정치인들과의 관계
사건사고 올로프 팔메 총리 암살사건
평가 평가
관련 외국 정상 빌리 브란트 · 브루노 크라이스키 · 해럴드 윌슨
관련 스웨덴 정치인 타게 엘란데르 · 잉바르 칼손 · 토르비에른 펠딘
기타 사회민주주의 · 폴크헴메트 · 스웨덴/복지 · 밀리온프로그람 · 기록의 해 · 복지국가
파일:빨간색 깃발.svg 사회주의 }}}}}}}}}

1. 개요2. 스웨덴 정치인
2.1. 타게 엘란데르2.2. 잉바르 칼손2.3. 토르비에른 펠딘2.4. 올라 울스텐2.5. 예스타 보흐만2.6. 울프 아델손2.7. 라르스 베르네르
3. 해외 정치인

1. 개요

올로프 팔메와 다른 정치인들과의 관계를 정리한 문서다.

2. 스웨덴 정치인

2.1. 타게 엘란데르

파일:standard_compressed_Tage_Erlander.jpg
파일:Palme_erlander-1024x690.jpg
비서 시절
파일:13b5f5b9-2e3d-4ba7-aae9-8abd078f43d4.png
파일:album_alb8501473-transformed.jpg
1969년 사민당 전당대회 당시[1] 타게 엘란데르 퇴임 이후

2.2. 잉바르 칼손

파일:Palme och Carlsson.jpg
파일:90449299-6ca7-4022-8362-2719c37b8103.png

2.3. 토르비에른 펠딘

파일:Palme Fälldin.jpg
파일:1497342003.png
1976년 스웨덴 총선거 양자 토론회 1982년 스웨덴 총선거 양자 토론회
파일:s-l1600-_3_.png
1976년 2월 21일 외레브로에서 열린 토론회 1982년 우메오에서 열린 토론회

2.4. 올라 울스텐

파일:Palme och Ullsten.jpg
올라 울스텐과 올로프 팔메
이 둘은 서로 각각 야당 대표와 총리직을 지냈다. 특히 1978년, 우파 연정의 와해 이후 총리 후보에 지명된 울스텐이 원내 제4당 출신이었음에도 총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원내1당이었고 팔메가 대표를 맡고 있던 사민당이 반대가 아닌 기권을 했던 것의 역할이 컸다.

여담으로 스웨덴에서 올로프라는 이름을 사용한 총리는 이 둘뿐이다.[2]

2.5. 예스타 보흐만

파일:bohmanochpalme.webp
1976년 스웨덴 의회 총선거 양자토론에서 맞붙은 올로프 팔메와 예스타 보흐만

이 둘은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당시 온건당의 대표를 맡고 있던 보흐만은 여러 정책을 두고 사민당과 대립했는데, 특히 1975년에는 보흐만이 조기총선을 요구하며 당시 총리였던 팔메를 당황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2.6. 울프 아델손

파일:670580-front_800x.jpg

2.7. 라르스 베르네르

파일:2431921-front_800x.png
의회에서 대화 중인 올로프 팔메와 라르스 베르네르
앞선 의 총리들보다도 더욱 급진적인 사회민주주의자라는 팔메보다도 정치적 스펙트럼에 있어 더욱 좌익 성향이 뚜렸했던 스웨덴 공산당 (現 좌파당)의 대표였던 베르네르와는 때때론 충돌했고 때때론 협력하는 사이였다.

팔메는 복지국가 혼합경제를 추진한 반면, 베르네르는 급진적인 사회주의 개혁을 요구해왔기에 이러한 이념적 차이가 종종 이 둘을 대립시키곤 했다. 더 나아가 팔메는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과 인권문제를 두고 사사건건 충돌해온 반면, 베르네르는 다소 친소련적인 입장을 견지했기에 발생한 갈등도 없지 않았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둘 다 강력한 사회안전망, 노동자 권리 증진과 같은 정책에 있어서는 상당부분 의견을 공유했었기에 둘은 많은 경우에 협력하기도 했다.

아 둘의 관계는 경쟁과 협력으로 특징지어지는 스웨덴 정치의 축소판으로 이해될 수 있다.

3. 해외 정치인

3.1. 빌리 브란트

파일:Palme och Brandt.jpg
두 사람은 모두 총리 재임 기간 동안 외교, 국제 협력 및 대화를 강력히 옹호했다. 이 두 사람은 국제 무대에서 평화, 군축, 그리고 사회 정의를 적극적으로 촉진하며 비슷한 가치와 목표를 공유했다. 더불어 이들은 외교 정책에서 보다 정의롭고 평화로운 하나된 세계 질서에 대한 변함 없는 헌신을 강조하며 세계 정세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두 지도자는 특히 개발도상국들과의 국제적 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개발 원조, 부채 탕감, 공정 무역의 확대 등을 옹호했다. 특히 팔메는 이 분야에서 매우 적극적이기로 유명했고, 강대국이 개도국을 경제적으로 착취하는 행태를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 둘은 또한 베트남 전쟁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내비치기도 했다. 두 사람은 공적으로도 자주 협력하는 사이였지만 사적으로도 가까운 사이로 알려져있다. 스웨덴에서 망명생활을 해왔던 브란트는 스웨덴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었고, 발트 독일인 어머니를 둔 팔메는 독일어에 매우 유창했다고 한다.
파일:5351755182_281cd9af7d_z.jpg
이 둘은 후술할 브루노 크라이스키와 함께 민주사회주의 삼총사로 함께 묶이곤 한다. 이 셋은 모두 비슷한 시기에 집권해 공동적으로 국제사회에 목소리를 냈기 때문이다.


파일:CC-white.svg 이 문단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685
, 번 문단
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단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685 ( 이전 역사)
문서의 r ( 이전 역사)

3.2. 브루노 크라이스키

파일:palmeochkreisky.jpg
이 둘은 브란트와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같은 정치적인 입장과 견해를 공유했고, 여러 이슈에 있어서 함께 협력했기에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특히 이 둘은 反 아파르트헤이트와 군축, 중동평화와 같은 국제적 문제에 있어 같은 입장을 공유했던 평화에 대한 헌신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러한 입장과 함께 둘은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둘 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법학을 공부한 사회주의 정치가라는 비슷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

안슐루스 이후 유대인이었던 크라이스키는 모국인 오스트리아를 떠 스웨덴에서 망명생활을 했기에 스웨덴어에 대해 어느정도의 배경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팔메 역시도 상술했듯이 독일어에 유창했다.

3.3. 해럴드 윌슨

파일:palmeochwilson.jpg
둘 다 비슷한 시기에 집권한 사회민주주의 정당 출신 총리들인만큼 공적으로 자주 협력하곤 했다. 이 둘은 모두 내치에서는 사회민주주의를 기반으로 사회 복지 확대와 노동자 권리 증진에 노력했으며, 외교적으로는 반식민주의와 평화주의, 반전주의에 목소리를 높였다. 이 둘은 서로 양국을 국빈방문하며 공개성명서를 자주 채택하기도 했고, 둘이 속한 정당이 모두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소속인만큼 자주 협력해왔다.

다만 베트남 전쟁에 있어서는 둘의 입장이 상이했는데, 팔메가 베트남전에 있어 노골적인 반대 입장을 표한 반면, 윌슨은 다소 신중한 입장을 취했기 때문이다.[3]

3.4. 피델 카스트로

파일:e-927151-1356092675000.png

3.5. 트뤼그베 브라텔리

파일:Bratteli_palme_73.jpg
서로 이웃 국가 정부 수반이면서 같은 정치적 입장을 공유했던 둘이었기에 긴밀한 협력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북유럽 협의회에서도 브라텔리 이후에 팔메가 의장을 맡으며 북유럽 복지모델을 강화하기 위해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1] 이때 엘란데르로부터 총리직을 물려받았다 [2] 올라가 올로프의 애칭이다. [3] 이는 영국 친미 국가이자 나토 회원국이었음으로 미국의 눈치를 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