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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b0000><colcolor=#fecd21> 이탈리아 국왕 Patricius | 파트리키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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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호 | 파트리키우스(Patrician) |
휘 | 오도아케르(Odoacer) |
본명 | 아우다와크르스(Audawakrs) |
주군 | 제노[1] |
생몰 년도 | 435년 ~ 493년 |
재위 기간 | 이탈리아의 왕 |
476년 9월 4일 – 493년 3월 15일 | |
종교 | 아리우스파 기독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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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게르만계 스키리족 출신인, 서로마 제국의 장군. 오도아케르는 로마식 이름이고, 본래 이름은 아우다와크르스(Audawakrs).[2] 절반만 스키리족 혈통이었다. 아버지인 에데코가 훈족으로서 아틸라의 최측근이었고 모친만 스키리족 출신이기 때문이다. 서고트, 반달족, 훈족 및 갈리아와 이탈리아에 각기 기반을 둔 유력층의 갈등 탓에 쇠약해진 서로마의 종말을 확정지은 인물이다.다만 서로마 붕괴 이후 유럽 정치 지형은 크게 변하긴 했으나 그건 그가 무늬도 형체도 거의 없는 서로마 황제위를 삭제하기도 전에 이뤄진 일이라 이 부분은 상당히 빼서 받아들여야 한다. 물론 상징적으로 대단히 의미는 컸음을 부정할 순 없을 것이지만.
2. 생애
2.1. 출생 및 성장기
상술했듯 아우다와크르스는 훈족 아버지와 게르만 계열 스키리족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에데코는 아틸라의 최측근 부하였으나 아내가 스키리족이었기에 스키리족에게 상당한 영향력이 있었는데, 아틸라가 죽자 정작 훈족인 그가 택한 진로는 아내의 일족인 스키리족을 규합하여 대 훈족 투쟁 및 반(反)아틸라 일가 운동에 앞장선 것이었다. 스키리족을 막 괴롭히고 고기 방패로 굴려댄 훈족, 그것도 그냥 훈족도 아니고 가장 스키리족을 못살게 굴던 아틸라의 최측근인 에데코가 정작 아틸라가 죽으니 혼맥을 앞세워 갑자기 입장을 표변해 스키리족 독립 투쟁을 이끈 건 후세인에겐 매우 의아하게 보이는 부분이다.[3] 물론 이 시기에 오늘날 같은 민족 감정이 있었던 건 아니었으나, 피터 히더 교수가 입증했듯 후대 연구에서도 이 시기에는 고트족이든 프랑크족이든 최고 엘리트층일수록 귀속 의식이 오늘날 국민 감정에 가깝게 소속 민족 측에 기울어진다는 게 밝혀져 있는 걸로 봐선 꽤 이목을 끄는 부분이다. 하지만 아틸라가 죽었을 당시 훈족 내부에서도 안티 아틸라 세력들이 저마다의 세력을 규합해서 아틸라의 아들들에게 맞섰던 걸 보면, 에데코는 별 가망 없는 아틸라의 아들들한테까지 충성하느니 아예 그냥 본인이 훈족 정체성이든 뭣이든 그걸 떠나 새로운 스키리족 왕가를 꾸리기로 결심했던 걸로 보인다.2.2. '이탈리아 왕'이 되다
476년, 오도아케르 즉위 직후의 영토 |
오도아케르는 이 새로운 실력자인 오레스테스와는 경쟁 관계였고 이후 오레스테스가 자신의 아들 로물루스를 황제로 세우면서 둘 사이 긴장은 가장 높아지게 된다.
오레스테스가 병사들에게 땅 지급을 미루는 사이에 이에 불만을 품은 야만족 군대가 그를 리더로 옹립한 덕에 오레스테스를 공격해 죽이고 황제를 폐위한 다음 자신이 왕(REX)이 되었다. 사실 오도아케르는 마음만 먹으면 허수아비 황제를 새로 앉힐 수 있었다. 적당한 로마인을 앉혀 놓고 실권을 자기가 쥐면 동로마 제국에게 공격을 받을 이유는 없었을 텐데 어째서 그런 위험한 일을 저질렀는지는 의문이다. 다만 이전에 플라비우스 리키메르가 옹립했던 마요리아누스 황제가 서로 권력 다툼을 했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자기가 직접 왕이 되는 게 더 권력을 쉽게 장악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서로마 제국 황제가 더 이상 세워지지 않음으로, 서로마 제국은 476년에 사실상 망했다. 하지만 이 멸망 시점에 대해 이견도 많이 있는데 일전에 오레스테스에게 쫓겨난 율리우스 네포스를 로마 최후의 황제로 보기도 한다. 네포스는 쫓겨난 후에도 지속적으로 자신이 황제라고 주장하고 있었고 로물루스가 폐위되자 동로마 황제 제노도 네포스를 서로마 황제로 간주하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네포스가 살해된 480년을 서로마 제국의 멸망 시점으로 본다. 실제로 오도아케르도 동로마의 눈치를 살피며 480년까지는 네포스를 서방 '황제'로 인정했다.
다른 견해로는 서로마 최후의 군벌인 시아그리우스가 클로비스 1세가 이끄는 프랑크족에게 수아송 전투에서 참패한 시점인 486년을 서로마제국의 멸망 시점으로 보기도 한다. 시아그리우스 본인은 딱히 황제를 자처한 적이 없지만 그의 군대가 (서)로마군이라는 명분이 있었던 마지막 세력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한편 오도아케르가 서로마 황제의 의장을 반납하면서 동로마 황제의 신하를 자처했으므로, 일단 서로마는 유지되었으나 그가 테오도리크에게 제거된 뒤 테오도리크가 진짜로 동고트 왕국을 세워 독립하면서 소멸됐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2.3. 치세
'이탈리아 왕' 오도아케르의 통치는 의외로 안정적이고 유능했다. 450년대 이후 리키메르의 전횡으로 참상이 끊이지 않았던 서로마 제국이었지만, 얄궂게도 '야만인' 오도아케르가 왕으로서 권력을 잡자마자 정국은 상당히 안정화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17년동안이나 왕위를 지켰는데, 그 이전의 20여년동안 서로마 제국이 얼마나 지도자 교체가 빈번했는지 생각해본다면 그의 치세는 나름 성공적인 것이었다.[5]
그는 리키메르처럼 허수아비 황제를 세우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황제'로 즉위하지도 않았다. 그는 실권을 장악한 후 동로마 제국을 받든다는 명분으로 동로마의 황제 제노가 수여한 '파트리키우스'라는 호칭을 받아들였다. '상황이 어떻든 간에 네포스가 서방 황제'라는 제노의 입장에 따라, 오도아케르는 이탈리아의 실권자면서 제노와 네포스가 새겨진 동전을 발행하는 등 능청스러운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즉위한지 약 한달쯤 지났을 때, 시칠리아에 한 발을 걸치고 호시탐탐 이탈리아를 노리던 반달 왕국을 설득해 시칠리아를 온전히 돌려받았고, 자신에게 반항하는 로마 귀족을 죽여 반대파를 숙청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480년에 네포스가 살해되자 오도아케르는 시해자들을 처벌한다는 명분으로 달마티아까지 손에 넣었다. 이렇듯 오도아케르는 멸망 직전 극단적으로 쪼그라들었던 서로마 제국의 영토를 어느정도 수복하는 데에 성공했다.
오도아케르는 북이탈리아를 본거지로 삼으면서 그곳을 병사들에게 봉토로 지급하고 군대를 재건하였다. 원로원도 서로마 제국을 폐한 그에게 대항하기는커녕 재빨리 신질서에 순응했고, 오도아케르는 기존 지배 계급의 특권을 계속 보장하면서 그들을 적재적소에 임명하여 로마인들과 협력을 이루었다. 서로마 정부의 행정능력이 힘을 잃고 황제가 지속적으로 교체됨에 따라 서로마 말기에는 원로원의 영향력이 오히려 이전보다 늘어난 상태였기 때문에, 원로원의 협력을 얻은 것은 오도아케르의 통치에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오도아케르는 또한 본인이 아리우스파였음에도 불구하고 칼케돈파를 존중하고 위해를 끼치지 않는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하여 이 시기의 교황 펠릭스 3세는 서로마 제국이 날아가버린 상황 속에서도 아카키오스 분열 사태에 집중할 수 있었다. 오도아케르로부터 딱히 어떤 탄압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로마인과 적극 동화되지는 않았고, 점점 이민족들의 침략도 적극적으로 방어하지 않으며 피해를 방치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런 점들이 로마인의 외면을 불러 그의 통치가 오래 못가는 원인이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오도아케르가 이탈리아 로마인들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선 적이 있었는데, 이탈리아 북동부의 루기족이 선을 넘어서 대규모 침략과 약탈을 저지르자 직접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오도아케르가 이끄는 군세는 루기족 왕 플레쿠스의 군세를 분쇄했고, 너무나도 심각한 피해를 입은 루기족은 전사한 플레쿠스의 아들 프레데릭의 지휘 아래 테오도리크에게 망명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그의 종말을 부르게 된다.
동고트의 지도자 테오도리크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궁정에서 제노와 불화 중이었는데, 제노는 짜증스러운 테오도리크를 쫓아버리면서 반발을 부르지도 않을 해결책을 떠올리게 된다. 그것은 제노와 테오도리크 모두가 싫어하는 오도아케르의 제거였다. 오도아케르에게 궤멸적 타격을 받은 바 있는 루기족 또한 여전히 원한을 잊지 못한채 이를 갈고 있었으니 이보다 더 좋은 갈등 해결책은 없었다.
2.4. 몰락
오도아케르는 형식적으로는 동로마에 복종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서로마를 대체해버린 독립세력을 이탈리아에 구축해 이탈리아 반도를 장악한 것이었고, 계속 군사적 성과를 거두어나가며 자신만의 세력을 확장하자 같은 로마계 국가인 동로마 제국은 오도아케르에게 상당한 경계를 하게 되었다. 그가 동로마 제국에서 4년동안 반란을 일으킨 일루스와 연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등 선을 넘는 모습을 계속 보이자, 동로마 제국의 제노 황제는 그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견제 세력을 찾던 제노는 자신과 갈등이 있었던 동고트족의 지도자 테오도리크와 협약을 맺고 그를 동로마 제국 장군으로 받아들이며 오도아케르 축출을 명령했다. 드디어 489년에 테오도리크는 알프스를 건너 이탈리아 반도로 침공해 들어갔다. 이때 오도아케르에게 받은 피해를 잊지 못하던 루기족 전사들이 테오도리크를 따라 들어간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테오도리크 입장에선 가문 대 가문의 은원을 완전히 씻어버릴 좋은 기회였으나, 오도아케르로서는 수십 년 전 피해 달아났던 악몽의 재림이었다. 오도아케르는 그와 맞붙어 승패를 주고 받았으나 승률이 크게 밀렸고[6], 여기에 서고트족 왕 알라리크 2세까지 같은 민족인 테오도리크를 지원하자 난공불락의 도시인 라벤나에 은신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테오도리크의 공성에 맞서서 3년간 라벤나에서 버티던 오도아케르는 라벤나 주교 요한의 주선으로 테오도리크와 협상을 하게 되었다. 여기서 오도아케르는 안전을 보장받고 테오도리크와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그러나 함께 앞장서서 싸운 루기족 전사들이 오도아케르의 죽음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고, 테오도리크도 은원 관계가 깊은 오도아케르를 하위 동맹 파트너들 원성을 사가면서 굳이 살려둘 이유가 없었다. 테오도리크는 라벤나 입성 10일 후 오도아케르와의 연합을 축하하는 잔치를 벌이다가 흥이 오를 때쯤 갑자기 오도아케르를 검으로 목 아래쪽으로부터 옆구리까지 단칼에 세게 베어내려 죽여 버렸다.[7] 동시에 오도아케르의 친위세력도 테오도리크의 부하들에게 공격을 받아 잔치가 벌어지는 동안에 모조리 살해당했다. 물론 스키리족의 독자적 역사도 끝장났다. 장례식을 축하 잔치로 대신한 셈. 이에 대한 테오도리크 자신의 평가는 다음과 같았다.
"그 불쌍한 놈은 마치 뼈가 없는 것 같았다."
오도아케르가 몰락하면서 동로마는 한시름을 덜었으나 테오도리크도 만만찮은 야심가로 동로마와는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기 때문에 훗날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시기에 또 한 번 큰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1]
명목상.
[2]
원시 게르만어 아우다와크라즈(Audawakraz)에서 유래했다. 아우다와크라즈는
부라는 뜻의 아우다즈(audaz)와 깨어 있다는 뜻의 와크라즈(wakraz)의 합성어였다.
[3]
한국사에서 가장 비슷한 경우로 삼백 년 넘게 신라 근위대 및 정예부대에 인력을 공급해온 추풍령 일대 호족 가문 견훤이 신라의 숙적 백제를 부활시킨 사례가 있다.
[4]
독살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5]
동방의 제노 황제가 계속되는 반란에 대처하느라 서방에 신경쓸 틈이 없다는 것도 그에게 큰 행운이었다.
[6]
다름아닌 그 루기족 중 일부가 오도아케르에게 매수당해 오도아케르측에게 이반했었기 때문이었다. 루기족은 전반적으로 오도아케르에게 강렬한 반감이 있었으나 늘 그렇듯 어느 나라나 돈에 혹해 매국노가 되는 자가 나온다.
[7]
오도아케르가 죽어가면서 "주여, 어디 계시나이까"라고 중얼거리자 테오도리크는 "이게 네가 내 친구들에게 했던 짓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