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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6 20:20:01

이탈리아 왕립 해군


왕립 해군
Regia Marina
파일:이탈리아 왕립 해군 엠블럼.svg
해군 상징
{{{#!wiki style="margin:-16px -10.5px" 파일:이탈리아 왕국 정부기.svg 파일:이탈리아 왕국 선수기(1900-1946).svg
해군기 선수기[1] }}}
존속기간 1861년 3월 17일 ~ 1946년 6월 18일
소속 파일:이탈리아 왕국 정부기.svg 이탈리아 왕국군
군종 해군
본부 팔라조 마리나, 로마
규모 210,000명 (1940)
295,000명 (1943)
참전 7주 전쟁
이탈리아-튀르크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스페인 내전
알바니아 침공
제2차 세계 대전

1. 개요2. 참전 전쟁3. 전력
3.1. 함선
4. 활동
4.1. 7주 전쟁4.2. 제1차 세계 대전4.3. 전간기4.4. 제2차 세계 대전
4.4.1. 지중해4.4.2. 대서양4.4.3. 홍해4.4.4. 흑해4.4.5. 동아시아
4.5. 이탈리아 항복 이후4.6. 종전과 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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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861년부터 1946년까지 존재하였던 이탈리아 왕국의 해군. 7주 전쟁부터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많은 전쟁을 치렀다. 활동 범위 역시 전세계를 무대로 했던 영국 해군보다는 좁았지만, 지중해, 대서양, 태평양, 야프리카, 흑해 등 웬만한 곳에서는 실전을 치른 적이 있다.

흔히 이탈리아군의 졸전 기록과 엮여서 같이 폄하당하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는 나름 강대한 전력을 갖추고 전쟁에서 나름대로 활약했다. 특히, 주특기였던 항구 침투 및 수중 폭파 등의 특수작전 분야에서는 역사적인 기록을 다수 세운 것을 넘어서 아예 이 분야의 기초를 확립한 수준이다.

1946년 국민투표를 통해 왕정이 폐지되었고, 이에 따라 이탈리아 왕국이 멸망하고 이탈리아 공화국이 세워지면서 자연스럽게 이탈리아 왕립 해군은 이탈리아 해군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 참전 전쟁

이탈리아 왕립 해군이 참여한 전쟁
7주 전쟁
이탈리아-튀르크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스페인 내전
알바니아 침공(무력 합병)
제2차 세계 대전

3. 전력

3.1. 함선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제2차 세계 대전의 이탈리아 왕립 해군 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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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 어뢰정 <colbgcolor=#fefefe,#393b42> M,A,S 어뢰정
구축함 호위 어뢰정 스피카급, 오르사급, 아리에테급, 치클로네급
구축함 알레산드로 포에리오급, 카를로 밀레발로급, 팔레스트로급, 제네랄리급, 쿠르타토네급, 레오네급, 퀸티노 셀라급, 나자리오 사우로급, 투르비네급, 나비가토리급, 다르도급(프레치아급), 폴고레급, 마에스트랄레급, 알프레도 오리아니급, 솔다티급(*), 코만단티 메달리에 도로급(*)
잠수함 발릴라급, 아르고나우타급, 아르키메데급, 시레나급, 페를라급, 아두아급, 브린급, 아르고급, 아차이오급, 마르첼로급, 로몰로급(*)
장갑순양함 산 조르지오급
방호순양함 니노 빅시오급(**)
경순양함 콘도티에리급, 코스탄조 치아노급, 카피타니 로마니급(*), 타란토급, 에트나급E
중순양함 프로젝트 1923년형, 트렌토급, 차라급, 볼차노, 프로젝트 안살도E, 프로젝트 안살도 초중순양함E
항공모함 전함 프란체스코 카라치올로 재건조 계획, 전함 임페로 재건조 계획, 아퀼라(*), 스파르비에로(*)
수상기모함 주세페 미랄리아
순양전함 1928년형(**), 1930년형(**), 1933년형(**)
전함 쿠니베르티 17,000톤 노급(**), 단테 알리기에리(**), 프로젝트 페라티(**), 콘테 디 카보우르급, 카이오 두일리오급, 프란체스코 카라치올로급(**), 리토리오급(*), 프로젝트 UP.41형E(*)
노획함 순양함: 카타로파일:유고슬라비아 왕국 국기.svg , FR11파일:프랑스 국기.svg , FR12파일:프랑스 국기.svg
구축함: 프레무다파일:유고슬라비아 왕국 국기.svg , 시베니코파일:유고슬라비아 왕국 국기.svg , 류비야나파일:유고슬라비아 왕국 국기.svg , FR21파일:프랑스 국기.svg , FR22파일:프랑스 국기.svg , FR23파일:프랑스 국기.svg , FR24파일:프랑스 국기.svg , FR31파일:프랑스 국기.svg , FR32파일:프랑스 국기.svg , FR33파일:프랑스 국기.svg , FR34파일:프랑스 국기.svg , FR35파일:프랑스 국기.svg , FR36파일:프랑스 국기.svg , FR37파일:프랑스 국기.svg
잠수함: 프란체스코 리스몬도파일:유고슬라비아 왕국 국기.svg , 안토니오 바자몬티파일:유고슬라비아 왕국 국기.svg , FR118파일:프랑스 국기.svg
기타 2차대전기 이탈리아 포획 함선
포함 에리트레아 포함, 디아나 포함
(*) 표기: 해당 함급의 일부 또는 전부가 건조 중단된 함급
(**) 표기: 1차 세계 대전 전후 2차 세계 대전 이전 해체 및 계획 취소되었지만 편의상 틀에 넣은 함급
윗첨차E 표기: 수출용 함급, 취소선 표기: 계획만 및 취소된 함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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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활동

4.1. 7주 전쟁

7주 전쟁 당시에는 오스트리아 해군과 맞서 싸웠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1866년에 벌어졌던 리사(Lissa) 해전인데,[2] 이 전투에서 이탈리아 왕립 해군 함대는 어뢰정을 제외한 모든 전력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으나 함대의 지휘권을 놓고 갈등이 벌어진 데다, 오스트리아 해군의 교란작전에 넘어가 분산되었고 결국 하나둘씩 각개격파 당했다. 최종적으로 이탈리아는 이 해전에서 장갑함 2척을 잃고 620명이 사망하는 큰 피해를 입은 반면 적이었던 오스트리아 해군의 피해는 장갑함 2척 중파에 34명 사망이 끝이었다. 한마디로 완패한 것.

4.2. 제1차 세계 대전

4.3. 전간기

4.4. 제2차 세계 대전

4.4.1. 지중해

파일:Fire!.jpg
마타판곶 해전 당시 발포하는 리토리오급 전함 리토리오와 비토리오 베네토[3]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지중해에서 영국 해군과 치열하게 싸웠다.

사실 이탈리아군의 졸전 기록으로 이탈리아 왕립 해군의 규모까지 같이 평가절하되는 경항이 있는데, 2차대전 개전 당시 이탈리아 해군의 전력은 전함 6척[4], 순양함 22척, 구축함 160척, 잠수함 100척에 달해 서류상으로는 영국 지중해 함대에 도전할 수 있는 규모였다. 그리고 실제로 전쟁 초반에는 홈 어드벤티지와[5] 나치 독일의 지원을 적극 받은 이탈리아가 유리했으나, 영국 해군 역시 몰타를 거점으로 격렬하게 저항했고 일러스트리어스급 항공모함 U급 잠수함등 수많은 잠수함/항모들을 지중해에 파견해 이탈리아 해군을 막아냈다. 거기에 마타판곶 해전과 페데스탈 작전(주춧대 작전)[6] 등 대규모 전투를 치른 이탈리아 해군은 큰 손실을 입었다.

대표적으로, 이탈리아 해군의 치욕 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마타판곶 해전에서는 이탈리아군 전함 1척이 대파되었고 중순양함 3척과 구축함 2척이 한번에 날아갔는데 비해 맞서 싸운 영국군의 피해는 매우 경미했다.(순양함 4척 소파, 뇌격기 1기 격추)[7] 거기에 영국에게 타란토 공습이라는 희대의 빅엿을 먹은 결과 전함 등 이탈리아 왕립 해군의 대형함들은 항복 직전까지 말그대로 항구에 틀어박혀서 지내게 되고, 자연히 이탈리아 왕립 해군의 전술도 전함 등 대형함 위주에서 항공기와 잠수함, 소형 어뢰정을 이용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다만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이탈리아 해군은 북아프리카로 향하는 호송선단 호위 임무를 상당히 잘 수행하였다. 전쟁 초기에는 이탈리아 왕립 공군이 독일이 공여해준 Ju 87과 자체개발한 폭격기 SM.79를 이용해 해군을 도왔고,[8] 특수부대 Decima Flottiglia MAS는 자폭보트와 인간어뢰 등을 동원하여 알렉산드리아 항을 습격, 영국군의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을 두척이나 중파시키는 대전과를 올렸다. 또한 항구에 틀어박혔다는 오명을 쓴 리토리오급 전함 등 대형함들도 큰 활약이 없어서 그렇지 지중해에서 나름대로 꾸준히 할 일을 하면서도 끝내 격침당하지 않으면서 영국 해군의 속을 벅벅 긁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탈리아 왕립 해군은 전쟁 시작부터 영국군에게 질적으로 너무나도 밀렸고, 이후 든든한 뒷배 독일마저 전황 악화로 지중해에서 손을 떼자 사실상 영국 해군에게 지중해의 주도권을 내주게 된다.

하지만 무엇보다, 결과적으로 횃불 작전 이후에 이탈리아 해군은 아직 싸울 전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9] 일찌감치 항복해버렸다. 소수의 해군 전력은 항복을 거부하고 독일군의 지원을 받으며 계속해서 저항하였으나, 영국 해군을 상대하는 것만 해도 힘들었던 이탈리아 왕립 해군에게 미 해군은 너무나도 강력한 존재였다. 또한 이탈리아 해군이 항복하는 과정에서 이탈리아 해군의 전함 전력이 연합군으로 넘어가는 걸 원치 않았던 독일군이 항복한 이탈리아 해군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후술할 "이탈리아 항복 이후" 부분이나 로마 문서를 참조할 것.

4.4.2. 대서양

이탈리아 왕립 해군이 당장 본진인 지중해 지키기도 바쁜 상황에서 어떻게 대서양에 해군을 보냈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영국 본토 항공전 때와 비슷하게 이탈리아는 잠수함 전력 일부를 대서양으로 파견해 크릭스마리네 U보트와 합류시켰다. 대서양 파견 잠수함들의 본거지는 프랑스의 보르도였다. 전쟁 내내 총 32척의 이탈리아 잠수함들이 대서양으로 파견되었고 이들은 도합 109척에 달하는 연합군 상선을 격침시켰다. 영국 본토 항공전때 도움 1도 안되고[10] 신나게 털린 이탈리아 왕립 공군에 비해 그나마 이탈리아 왕립 해군은 동맹국 독일에게 체면 치레라도 한 셈. 그외 이탈리아는 1942년 12월 잠수정을 이용한 미국 뉴욕 항구 공격을 계획했으나, 여러가지 사정으로 인해 계획은 차일피일 미뤄졌으며 결국 연합군이 북대서양의 제해권을 완전히 확보한 이후 자동으로 폐기되었다.

4.4.3. 홍해

이탈리아의 아프 리카 식민지들이 홍해를 끼고 있었기 때문에, 이탈리아 해군은 홍해에서도 활동했다. 홍해 전단의 본거지는 마사와였다.[11] 이들은 전쟁 초반에는 이탈리아 육군과 함께 영국령 소말릴란드를 침공하여 항구 몇 개를 점령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으나, 얼마 가지 못한 1941년 4월, 홍해 전단은 영국 영연방 해군에게 맹렬한 반격을 받았고, 결국 전단 전체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이 과정에서 본거지 마사와 역시 영국이 탈환하였다.

한편 홍해 전단의 최후가 임박해지자, 이탈리아 왕립 해군 지휘부는 잔존 홍해 전단 소속 함선들의 탈출을 명한다. 이에 마사와가 함락되기 2달 직전이었던 1941년 2월, 에리트레아급 포함 에리트레아와 무장상선 2척이 마사와를 탈출해 일본 제국으로 긴 대장정을 시작했다. 이들의 최종 목적지는 고베였다. 결과는 성공이었는데, 중간에 무장상선 1척이 뉴질랜드 해군 순양함에게 격침당하였으나 에리트레아와 나머지 무장상선 1척은 무사히 고베에 도착했다.[12] 마찬가지로 마사와가 함락되기 직전, 홍해 전단 소속의 잠수함 4척 역시 탈출을 시도하였는데, 이들은 성공적으로 희망봉을 돌아 보르도[13]로 탈출하는데 성공하였다. 또한 이탈리아 상선 한두척 역시 비시 프랑스의 영토였던 마다가스카르로 탈출했다. 그리고 6월 11일, 이탈리아의 마지막 홍해 항구였던 아사브에 영국군이 입성했고, 이것으로 홍해 전단은 소멸하였다.

4.4.4. 흑해

1942년 5월, 독일군은 흑해에 이탈리아 함대를 파견할 줄 것을 공식적으로 요청했고, 이에 회답한 이탈리아 왕립 해군은 어뢰정 잠수정으로 이루어진 20척 가량의 해군 전력을 흑해로 파견시켰다. 이들은 다뉴브 강을 통과해 최종적으로 루마니아 왕국의 콘스탄차 항을 통해 흑해로 진입했다. 흑해 전단의 본거지는 전술한 콘스탄차 항이었고 전단 자체는 주로 얄타와 페오도시아 부근에서 활동하였다. 이후 이탈리아가 항복하고 추축국에서 탈퇴하자, 살아남은 대부분의 함선들은 독일군이나 루마니아가 접수했고 크릭스마리네나 루마니아 왕립 해군 소속이 되어 활동했다. 그리고 흑해 전단은 1944년 본거지였던 콘스탄차 항이 함락되면서 완전히 소멸되었다.[14] 이때까지도 살아남았던 운좋은 일부 잠수정들은 모조리 루마니아 해군이 가져갔다.

4.4.5. 동아시아

놀랍게도, 이탈리아 왕립 해군은 적은 전력에도 불구하고 아시아까지 손을 뻗었다. 당시 이탈리아 왕국은 톈진 식민지로 두고 있었는데, 톈진은 항구도시였기 때문에 잠수함이나 무장상선을 비롯한 소수의 해군 전력을 파견해 둔 상태였다. 이들 전력은 제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같은 추축국이었던 일본과 협력해서 통상파괴작전을 벌이며 싸웠다.

그러는 사이 이탈리아 본토에서는 별도로 일곱 척의 잠수함을 동아시아로 파견했다. 다만, 이들은 그냥 잠수함은 아니었고 개조를 해서 무장을 떼어내고 물자를 수송하는 일명 "수송용 잠수함"들이었다. 이들은 일본에 전략물자를 전달하러 가는 길이었고, 독일의 몬순 전단[15]을 지원할 목적도 있었다. 또한 이탈리아 왕립 해군은 없는 살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추가적으로 지원할 로몰로급(Romolo-Class) 수송용 잠수함을 12척이나 건조시켰지만, 이중에서 고작 2척만이 종전 전까지 완공되었다. 게다가 이 2척 역시 진수식 직전 연합군의 폭격으로 항구 내에서 격침당하고 말았다.

4.5. 이탈리아 항복 이후

이탈리아가 항복하자, 이탈리아 왕립 해군 역시 두 파로 찢어졌다.[16] 대부분의 잔존 해군 전력은 연합군에 온전히 넘어갔으나, 소수의 병력들은 항복을 거부하고 살로 공화국 정부에 충성했다. 이건 특수부대도 예외는 아니어서, 소형함 중심으로 지중해에서 활동하며 영국 해군을 끊임없이 괴롭혔던 특수부대 Decima Flottiglia MAS 역시 두 파로 찢어져 활동는데, 이 중 연합군에 협력하였던 세력은 자폭 보트를 이용해 살로 공화국이 가져가 건조 중이던 항공모함 아퀼라를 공격해 대파시켰다. 추축국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는데, 독일 공군이 항복 후 연합군 점령지로 이동하던 이탈리아 전함대를 공격, 대함 유도 폭탄 프리츠 X를 사용해 전함 로마를 격침시키고 동급 전함 리토리오를 대파시키기도 했다. 또 살로 공화국은 한때 이탈리아 왕립 해군을 지휘하였던 이니고 캄피오니 제독을 자신들과의 협력을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총살했다.
파일:DeathofRoma.jpg
로마의 유폭 순간.

다만 말만 이렇지 대부분의 전력은 연합군 측에 붙었다. 당장 격침된 로마를 제외한 나머지 리토리오급 전함 2척이 모조리 연합군에 넘어갔고, 카이오 두일리오급 전함이나 콘테 디 카보우르급 전함 나머지 전함들도 전부 연합군측에 투항했다. 이탈리아 왕립 해군의 중추라고 할 수 있는 경/중 순양함 전력 역시 절대다수가 연합군에게 항복했다. 살로 공화국 해군에게 남았던 건 소수의 어뢰정, 자폭 보트, 반잠수정 그리고 극소수의 구축함이 전부였고 뿐이었고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사실상 연안 초계나 기뢰부설이 다였다.[17] 그나마 독일이 약간의 지원을 해주기는 했는데, 상황상 함정 원조는 꿈도 못 꾸고 수병만 조금 지원해준 게 다였기에 별 의미가 없었다. 살로 공화국 해군의 유일한 전과는 전쟁이 끝나기 몇 주 전인 1945년 4월 16일 자폭 보트로 프랑스 해군 구축함 트롬베를 대파시킨 것이 전부이다.

헌데 의외로 살로 공화국측은 미완성 함정만 보자면 꽤나 강대한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 리토리오급 전함 4번함 임페로나, 이탈리아 왕립 해군의 유이한 항공모함이었던 아퀼라 스파르비에로는 모두 살로 공화국과 독일군에게 접수되었다. 이 외에도 몇 척의 구축함이 독일의 손에 들어가긴 했지만, 당시 살로 공화국이나 독일이나 저런 대형함을 완성할 여력은 없었고, 결국 저 함선들은 단 한 척도 완성되지 못하고 연습표적으로 소모, 항구봉쇄용으로 자침, 폭격으로 격침, 아님 그냥 종전까지 방치되었다가 스크랩되는 등 모두 비극적인 운명을 맞았다.

4.6. 종전과 해체

어찌 되었든, 전쟁은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고, 1946년 이탈리아가 공화정으로 전환되면서 이탈리아 왕립 해군은 해체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이탈리아 해군으로 바뀌었다.

한편 신생 이탈리아 해군은 1947년에 맺어진 파리 조약으로 인해 중요 전력 대부분을 연합국에게 넘겨 주어야 함과 동시에 독일 등 다른 추축국들과 비슷하게 향후 핵무기, 전함이나 항공모함 등 대량살상무기나 대형함 보유를 제한받았다. 이로 인해 그때까지 어찌어찌 살아남았던 대형함들은 배상함으로 영국이나 미국 등의 승전국들에 넘겨졌으나, 이 중 영국이나 미국이 가져간 대형함 일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탈리아로 반환된 뒤 해체되었다.[18] 어뢰정이나 기뢰부설함, 구축함 등의 중소형 함선들의 경우, 이탈리아에게 시달렸던 유고슬라비아, 그리스, 알바니아 등의 발칸 반도 국가들이 배상함 형식으로 가져갔다.

참고로 소련도 승전국이었던 관계로 이탈리아 왕립 해군의 함선들을 배상함 형식으로 받았는데, 이들 중 한 척( 전함 줄리오 체자레)는 사고를 가장한[19] 이탈리아군 특수부대의 파괴공작으로 침몰하였고 소련 역시 자국 내 사기하락 방지를 위하여 이를 은폐, 사고로 위장했다는 설이 존재한다. 이탈리아가 워낙 2차 세계 대전에서 Decima Flottiglia MAS 같은 걸출한 특수부대들을 많이 운용했고 실제로 아퀼라를 대파시키거나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 2척을 중파시킨 전적도 있음을 고려하면 나름 현실성 있는 가설이기도 하다. 애초에 소련이 아무리 허술했어도 항구 내의 기뢰를 제거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현실성이 떨어지기에. 여담으로 소련 해군의 제독 니콜라이 쿠즈네초프 역시 평생 이 사건은 이탈리아 특수부대의 공작이었다고 믿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냉전이 터졌고, 공산화된 발칸 반도 국가들과 유사시 지중해로 내려오는 소련 흑해함대로부터 지중해 수에즈 운하 일대를 방어해야 한다는 이유로 이탈리아 해군은 다시 대형함 보유를 허용받았으며, 이탈리아 해군은 빠르게 예전 전력을 되찾을 수 있었다.
[1] 한 차례 개정된 문장으로, 1900년부터 해체될때까지 사용한 문장이다. 아래는 1861년부터 1900년까지 사용한 문장. 파일:이탈리아 왕국 선수기(1879-1900).svg [2] 1811년에 있었던 영국 해군 프랑스 해군의 리싸 해전과는 다른 전투이다. 참고도 당시에는 프랑스의 괴뢰국이었던 이탈리아 왕국은 이 전투에서도 프랑스와 함께 싸웠지만 패배했다. [3] 앞이 비토리오 베네토이고 뒤가 리토리오임에 유의. 참고로 이 해전은 이탈리아 측이 대패했다. 문서 참조. [4] 다만 여기에는 함정이 있는데 이들 중 개전 시점에 동원할 수 있었던 건 콘테 디 카보우르급 2척이 전부였다. 줄리오 체자레급 2척은 개장 중이었고 리토리오급들은 전부 건조 마무리 단계였기 때문. [5] 허나 영국이 몰타나 이집트를 사실상 자기 본진처럼 썼던 관계로 큰 의미는 없었다는게 문제. [6] 주춧대 작전 자체는 추축국의 전략적 승리였지만, 이탈리아 해군이 입은 피해는 제법 컸다. [7] 다만 이 경우는 예정되어 있던 독일의 항공자원이 오지 않아서 이렇게 참패한 것이긴 하다. 당시 이탈리아군은 뇌격기들을 상대하면서 간절히 독일군 항공기들을 기다렸으나, 관측된 건 전황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 Ju 88 2기 뿐이었다. [8] 해군 항공대가 아닌 공군이 이 일을 도맡은 것은 이탈리아 왕립 해군이 자체적인 항공대를 보유하지 못했던 것도 한 몫 했다. 그 이유는 즉슨 공군사령관 이탈로 발보가 해군의 함재기 보유를 금지시켰기 때문이었다. [9] 대표적으로 저 시점에서 이탈리아 왕립 해군의 주력함 리토리오급 전함 3척은 모두 멀쩡히 남아있었며, 전함 전력 전체로 봐도 7척의 전함 중 콘테 디 카보우르급 1번함 콘데 디 카보우르가 타란토 공습으로 착저한 것을 제외하고서는 일체의 전함 손실이 없었다. [10] 실제로 영국 본토 항공전 내내 이탈리아 왕립 공군은 루프트바페의 고위장군들과 파일럿 모두에게 골칫덩어리였다. [11] 마사와는 한때 에티오피아의 항구도시였지만 1993년 이후 에리트레아의 도시가 되었다. [12] 이후 에리트리아는 일본해군 소속이 되어 이탈리아가 항복하기 전까지 태평양에서 통상파괴전을 실행하다가 이탈리아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스리랑카로 가서 연합국에게 항복한다. [13] 전술했듯이 이곳은 이탈리아 대서양 잠수함 전단의 본거지이도 했다. [14] 흑해 전단 자체는 이탈리아가 연합국에 항복하고 전쟁에서 빠진 1943년에 해체되었다. [15]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을 도울 목적으로 독일 해군이 아시아에 파견한 유보트 전단을 이르는 말. 이들은 일본 해군과 합동 작전을 펼쳤다. [16] 이 시점에서 이탈리아 왕립 해군은 전력의 상당수를 잃은 후였다. [17] 애초에 이들의 규모는 연합군측에 붙은 이탈리아 해군의 20%밖에 되지 않는 실로 열악한 규모였다. [18] 여기에 대해서는 유지비 문제로 그랬다는 설이 존재한다. [19] 공식적으로는 제거하지 못한 기뢰로 인한 사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