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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친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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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친왕비 흥친왕비
<colbgcolor=#29176e> 대원비
여흥순목대원비
영친왕의 부인 이방자는 영친왕호를 폐작한 후에 혼인했으므로 영친왕비가 아니다.
대한제국 황실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17px-The_Imperial_Seal_of_Korea_03.png
일제강점기 왕공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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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동궁 공비
이강공비 김씨(의친왕비) 이건공비 이성자(마츠다이라 요시코) }}}}}}}}}
<colcolor=#ffd800> 의친왕비 김씨
義親王妃 金氏
파일:의친왕비.png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소장한 의친왕비 사진 #
작호 <colbgcolor=#fff,#1F2023>연원군부인(延原郡夫人)
→ 의친왕비(義親王妃)
성명 김덕수(金德修)[1] / 김숙(金淑)[2]
본관 연안 김씨(延安 金氏)[3]
남편 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
생부 김사준(金思濬)
생모 창원 황씨(昌原 黃氏)
출생 1880년 12월 22일 (음력 11월 21일)
한성부 북부 순화방 상패계 자하동 사저[4][5]
사망 1964년 1월 14일 (향년 83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 칠궁
자녀 친자녀 없음
남편의 서자 12남 9녀
종교 불교 가톨릭 ( 세례명: 마리아, Mary)
1. 개요2. 당호3. 생애4. 여담5.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대한제국의 황족이며 고종황제의 5남[6] 의친왕 이강 친왕비이다.

2. 당호

당호 '덕인당(德仁堂)'으로도 알려져 있지만, 정식으로 받은 것은 아니다. 사실 왕실의 당호는 아이를 낳은 후궁이 받는 것이기 때문에 정실인 의친왕비는 당호를 가질 수 없었다.

그러면 '덕인당' 당호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의친왕의 9남 이갑의 증언에 따르면, 의친왕비가 하루는 의친왕에게 "후궁들에게만 당호를 주지 말고 저 한테도 줘보세요."라고 농담으로 이야기했고, 이에 의친왕이 웃으면서 지어준 당호가 '덕인당'이었다는 것이다.[7] 즉, 부부 사이에서 그냥 장난으로 가볍게 부른 것일 뿐, 정식 당호가 아니다. 그러므로 의친왕비를 '덕인당'으로 지칭하지 않는 것이 맞다. 의친왕비가 직접 기른 의붓딸 이해경은 본인의 저서 《대한제국 마지막 황실》에서 '덕인당 김씨라고 부르는 것은 그 분(의친왕비)을 모독하는 행위'라고 언급했다.[8]

3. 생애

1880년(고종 17년)에 아버지 김사준(金思濬)과 어머니 창원 황씨(昌原 黃氏) 황긍연(黃兢淵)의 딸 사이의 5남 1녀 중 외동딸로 태어났다. 본관은 연안으로,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의 11대손이다.[9]

1893년(고종 30년) 12월 6일에 의화군 이강과 혼인했고, # 연원군부인(延原郡夫人)으로 봉해졌다. #[10] 일설에 따르면, 광해군의 견제로 아버지 김제남과 아들 영창대군을 잃은 인목왕후 친정에 어떠한 경우에도 다시는 왕실과 혼인을 하지 말라 일러두었다고 한다.(왕실의 며느리이든 부마이든 가리지 않고.) 그래서 아버지 김사준이 처음에는 혼사를 거절했으나 왕실에서 신부를 마음에 들어하여 혼인을 밀어붙였다.[11]

대한제국 수립 후인 1900년( 광무 4년) 8월에 남편 의화군이 의친왕으로 승격했지만, 그는 여전히 군부인이었다. 1905년(광무 9년) 10월 5일에 서봉 대수훈장을 수여받았고 #, 순종 즉위 후인 1907년( 융희 원년) 10월 2일에야 비로소 의친왕비(義親王妃)로 정식 책봉받았다. #

1910년( 융희 4년) 경술국치로 대한제국 황실이 이왕가로 격하당해 의친왕이 '이강공(李堈公)'이 되면서 그 역시 '이강공비(李堈公妃)'가 되었다. 1917년에는 부친상을 겪었다. 아버지 김사준은 고종 망명을 꾀하는 해외 독립운동 조직과 연계하던 활동을 하고, 경기도 고양군 대자리[12]에 있는 산을 매각하여 독립군에 군자금을 제공했다.[13] 이 사실을 일제에게 발각당해 조선귀족 남작 작위를 박탈당하고,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아 복역하다가 병보석으로 석방된 직후 사망했다.

1924년 1월에는 일본 정부에게서 훈이등 수보관장을 수여받았고, # 1930년에 남편 의친왕이 공위를 아들 이건에게 물려주면서 '이강 비(李堈 妃)'가 되었다. #

1945년 일제가 패망하고, 1947년에 왕공족 직제가 사라지면서 평민이 되었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났을 때, 미처 서울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북한 치하 서울에서 고생했으며, 1.4 후퇴 부산으로 피난갔다가 전후 서울로 돌아왔다. 1955년 8월 9일에 남편 의친왕이 죽기 직전에 천주교에 귀의해 세례성사를 받았고, 같은 달 14일에 의친왕비도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 마리아(Maria) #.
파일:의친왕비 영세기념.png
<colbgcolor=#29176e> 영세 기념으로 서울 종로구 가회동 성당에서 찍은 사진 #
남편 사후 그동안 머물던 안동별궁을 떠나 성동구 화양동[14]에 있던 의친왕 재실에서 머물다가 5.16이 일어난 후 청와대 옆에 있는 칠궁으로 옮겨 거주했다. # 생계는 구왕궁 사무실에게서 매달 3만 9천 원을 받아 해결했다. 그 중 1만 5천 원은 자녀들에게 나눠주었고 남은 돈으로 생활했다. #

1964년 1월 14일에 칠궁에서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 장례 명동성당에서 노기남 대주교의 집전 하에 천주교식으로 치렀다. #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홍유릉 권역에 있다. 1996년에 후손들이 서삼릉 묘역에 있던 남편 의친왕 유해를 의친왕비 묘로 이장해 합장했다.

4. 여담

파일:의친왕비 대수머리.png }}} ||
<colbgcolor=#29176e> 전통 예복을 입은 의친왕비 사진 #
대수 머리를 하고 대례복을 입은 사진이 쌩뚱맞게도 한 때 샘 해밍턴과 닮았다고(...) 인터넷 상에서 돌아다닌 적이 있었다. 출처기사.[24] 2014년에 JTBC 마녀사냥》 제작진들이 SNS에 "샘 닮은꼴 제보가 들어왔다. 별에서 온 샘"이라는 글과 함께 의친왕비의 사진을 올렸다. #

5. 대중매체에서

파일:명성황후 의화군 부인.png }}} ||
<colbgcolor=#29176e> 〈명성황후〉의 의친왕비
2002년 KBS2 드라마 〈 명성황후〉에서는 이주은이 연기했다.[25]

[1] 김수덕(金修德)으로도 알려져있으나 김덕수가 맞다고 한다. 출처 [2] 천주교 서울대교구 가회동 성당 홈페이지에 따르면, 의친왕비가 세례성사를 받을 때 작성한 세례증명서에 세속명이 '김숙'으로 적혀있다고 한다. 이방자 여사가 〈 경향신문〉에 올린 회고록 《세월이여 왕조여》에서도 '김숙'으로 언급했다. [3] 내자시윤공파-대자리 종중 24세 기(基) 항렬. [4] 출처: 1933년 작 《공족보》 이왕직 저. [5] 의붓딸 이해경에게 남긴 책자에 따르면, 임오군란으로 피란했고, 고양 침헌 묘막에 살다가 입궁했다고 한다. 이를 보아 자란 곳은 고양군인 듯 하다.(출처: 이해경, 2023, 《대한제국 마지막 황실》, 유아이북스, 270쪽.) [6] 영아 시절 사망한 아들을 제외하면 차남이다. [7] 출처: 〈우리황실사랑회〉. [8] 출처: 이해경, 2023, 《대한제국 마지막 황실》, 유아이북스, 269쪽. [9] 김제남(金悌男) → 김규(金珪) → 김홍석(金弘錫) → 김호(金澔) → 김상익(金相益) → 김엽(金燁) → 김재항(金載恒) → 김용(金鎔) → 김석연(金石淵) → 김덕수(金德秀) → 김사준(金思濬) → 의친왕비 [10] 작호는 본관지인 황해도 연안군에서 따왔다. [11] 인목왕후의 저 당부는, 앞으로 왕실과 통혼하여 친정의 구성원들이 불행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 것으로, 연안 김씨 문중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유언이었다고 한다. 인목왕후의 우려대로, 의친왕비는 자식을 낳지 못한 채 의친왕의 수많은 혼외자를 키우는 등 순탄하지 못한 결혼생활을 했으며, 친정도 여러 사건에 얽혀 평안하지 못하게 되었다. 사실 인목왕후 친정의 선대인 효혜공주와 연성위 김희( 김안로의 차남)의 왕실 통혼도 집안의 비극으로 끝이 난 선례가 있었다. [12] 현재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13] 출처: 이해경, 2023, 《대한제국 마지막 황실》, 유아이북스, 278쪽. [14] 현재는 광진구. [15] 의친왕이 한 때 소유했다고 한다. [16] 지밀은 궁의 안방이다. 저기서 말하는 '지밀어머니'는 '사동궁 안방을 쓰시는 어머니'란 뜻이다. [17] 숙종의 3남 연령군의 종가. [18] 흥선대원군의 큰형 흥녕군의 손자로 계동궁의 종주였다. [19] 아마 이해경이 보이지 않아 수소문 끝에 친구 집으로 간 사실을 알고 사람을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20] 잔치나 제사를 지낸 뒤 목판에 몫몫이 담아서 주변에게 나누어 주던 음식. 출처 [21] 영선군부인 광산 김씨가 1878년 생으로 의친왕비보다 2살 많았다. 나머지는 전부 어렸다. 순정효황후( 순종의 황후)는 1894년 생, 이방자( 영친왕의 부인)는 1901년 생이다. 심지어 흥친왕비는 시백모(남편의 큰어머니)인데도 의친왕비보다 3살 연하였다. [22] 손윗사람이 먼저 식사를 하고 손아랫사람들이 퇴선을 받는 전통 규범을 지킨 것으로 보인다. [23] 출처: 이해경, 2023, 《대한제국 마지막 황실》, 유아이북스, 279쪽. [24] 기사 원문에는 '이름 모를 누군가'라고 적혀있다. [25] 당시 본명 이상인으로 활동. 현재 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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