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로코 의 세계유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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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
1981년 페스의 메디나 مدينة فاس |
1985년 마라케시의 메디나 مدينة مراكش |
1987년 아이트 벤 하두의 크사르 قصر آيت بن حدو |
1996년 메크네스 역사 도시 مدينة مكناس التاريخيّة |
1997년 볼루빌리스 고고 유적 موقع وليلي الاثري |
1997년 테투안의 메디나 (옛 티타윈) مدينة تطوان (قديمًا تيطاوي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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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에사우이라의 메디나 (옛 모가드르) مدينة الصويرة (قديمًا موغادور) |
2004년 마자간 포르투갈 요새 (엘 자디다) مدينة مازاكان البرتغالية (الجديدة) |
2012년 라바트, 근대 수도와 역사도시 : 공동유산 الرباط، العاصمة الحديثة ومدينة تاريخية: تراث مشترك |
250년 역사의 스칼라 항구와 유럽풍의 시타델
에사우이라의 메디나 (구도심) 거리
북쪽 군도에서 바라본 카스바 (내성) 일대
유네스코 세계유산 | ||
이름 | 한국어 | 에사우이라의 메디나 (옛 모가도르) |
영어 | Medina of Essaouira (formerly Mogador) | |
불어 | Médina d’Essaouira (ancienne Mogador) | |
국가·위치 | 모로코 에사우이라 주 | |
등재유형 | 문화유산 | |
등재연도 | 2001년 | |
등재기준 | (ii)[1], (iv)[2] | |
지정번호 | 753rev |
1. 개요
아랍어 الصويرة베르베르어 ⵜⴰⵚⵚⵓⵔⵜ / ⴰⵎⴳⴷⵓⵍ[3]
포르투갈어 Mogador
영어 Essaouira
모로코 중부의 항구 도시. 마라케쉬에서 서쪽으로 170km, 카사블랑카에서 서남쪽으로 300km 떨어져 있다. 현재 인구는 8만명으로, 작은 도시이지만 중세와 근대 시기 '마라케쉬의 관문'으로써 매우 중요한 항구였다. 남쪽으로 120km 떨어진 아가디르 만큼 아름답지는 않지만 긴 모래사장이 있고 유럽식 성벽이 완연히 남아있기에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다. 18세기 알라위 왕조가 대외 무역항의 목적으로 계획적으로 건설한 에사우이라 구도심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시가지는 서쪽의 구도심, 동쪽의 프랑스식 신도심, 그리고 해안의 휴양 단지로 구성되어 있다. 도시 주변은 작은 언덕들로 둘러싸여 있기에 에사우이라 모가도르 공항은 동남쪽 15km 지점에 위치한다. 휴양과 답사 외에도 에사우이라에 매 초여름마다 4일간 열리는 그누아 음악 축제는 '모로코의 우드스탁'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매년 45만명의 인원을 끌어모은다.
2. 역사
람사르 습지에 등록된 에사우이라 군도. 배경의 큰 섬이 고대 로마 유적이 있는 모가도르 섬이다.
에사우이라 해안은 모로코의 다른 대서양 항구들과 달리 근해에 바위섬들이 줄지어 있기에 물살이 잔잔하다. 따라서 고대부터 모로코 해안에서 정박하기에 가장 좋은 곳으로 여겨졌으며, 기원전 5세기 카르타고인 항해가 한노가 방문하여 무역 거점인 아람비스를 건설하였다. 또한 일대의 바위에서 생산되는 조개는 당시 지중해권의 귀중품이던 보라색 염료를 얻을 수 있었다. 따라서 기원전 1세기 누미디아 국왕 유바 2세는 티레인들을 고용해 만의 입구에 위치한 모가도르 섬에 염료 공장을 세웠다. 이렇게 생산된 보라색 염료는 로마 제국의 황실과 로마 원로원의 토가를 물들였다. 그외에 유바 2세는 이곳을 기반으로 대서양의 카나리아 제도와 마데이라 제도에 탐험대를 보내고 식민지로 삼았다. 누미디아의 멸망 후에는 로마의 영향력이 강화되어 모가도르 섬에 로마식 빌라가 세워지고 3세기 로마 동전과 도기가 발견되는 등 꾸준한 교류가 이어졌다.
2.1. 중세
돈대 끝부분에 위치한 포르투갈 성채와 예배당
이슬람 정복 전후 도시의 역사는 불분명하다. 그러던 11세기 베르베르인 무슬림 성인 시디 메그둘이 안장된 후로 '모가도르'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와타스 왕조의 혼란을 틈타 모코로 해안을 잠식해가던 포르투갈 국왕 마누엘 1세의 지시로 아가디르에 이어 1506년 만의 서북쪽 끝에 카스텔루 헤알 지 모가도르 성채가 세워졌다. (현 엘 바르밀 성탑 일대) 다만 현지 레그라라 공동체의 공격에 시달린 끝에, 1510년 12월 포르투갈인들은 성채에서 철수하였다.
이후 포르투갈 당국은 남쪽의 아가디르를 주요 거점으로 삼았으나, 1541년 그마저도 사드 왕조에게 상실하자 모로코 남부 해안에서 철수한다. 설탕 수출을 장려했던 사드 조의 술탄 아흐마드 알 만수르는 타루단트에 이어 1578년 모가도르 동남쪽 외곽에 흑인 노예들이 동원된 사탕수수 정제 공장을 세웠고[4], 설탕과 교환한 이탈리아 토스카나산 대리석으로 마라케쉬에 엘 바디 궁전을 건설하였다.
1641년 묘사된 모가도르 성채
다만 1603년 그가 사망한 후 사드 조는 내전에 돌입하며 사탕수수 공장의 가동이 중단되었다. 혼란을 틈타 스페인과 영국은 각각 신항로의 중간 거점 역할과 대스페인 견제의 목적으로 모가도르를 노렸고, 이에 사드 조는 도시의 요새화에 나섰다. 1626년 프랑스의 섭정 리슐리외 추기경 역시 모가도르 식민화를 구상하였다. 따라서 1629년 살레를 공격한 7척의 프랑스 함대 중 1척이 백명의 병력을 태우고 남하하여 10년 전에 정찰한 바 있던 모가도르로 향하였다. 프랑스군은 모가도르 섬에 상륙하고 도시를 탐색했는데, 100명의 수비대가 굳게 지키고 있는 것이 확인되자 철수하였다.
약 반세기 후, 알라위 왕조 시대에 모가도르는 바르바리 해적선의 정비소이자 피난항이었다. 18세기 초중반의 내전 이후 등극한 술탄 무함마드 3세는 유럽과의 무역 확대에 주력하였고, 그 중심 항구로 모가도르를 선택하였다. 이미 마라케쉬 총독 시절인 1751년에 그는 모가도르 섬의 덴마크 거점 설립을 승인한 바 있다.
2.2. 모로코의 중심 항구
1767년 테오도르 코르뉘의 설계도, 핑크색은 이미 완공된 구역
1757년 술탄에 오른 무함마드 3세는 기존의 페스에서 마라케쉬로 천도하고 아가디르나 사피에 비해 가까운 모가도르를 그 외항으로 정하였다. 1760년 술탄은 프랑스 건축가 테오도르 코르뉘를 고용하여 성채 도시라는 뜻인 '에사우이라'로 개칭된 도시의 건설을 맡겼다. 비록 1767년 그는 해임되어 영국 출신의 개조자 아흐메드 엘 인글리지로 대체되었만, 건설은 기존 계획과 크게 다르지 않게 진행되었다. 같은해 일전에 술탄에 반기를 들었던 수스 지방에 대한 징벌로 그 외항인 아가디르가 폐쇄되고 주민들은 에사우이라로 이주되었는데, 지금도 '아흘 아가디르'라는 구역명이 남아있다. 그외에 무함마드 3세는 유럽인들과의 중개를 맡을 유대인과 기독교도들의 이주 역시 장려하였고, 특히 유대인들은 19세기 초까지 무슬림보다 수적으로 우세하였다. 한편 제노바와 모로코 현지 건축가들도 가세한 끝에 1770년 항만 성벽과 밥 엘 메르사를 끝으로 에사우이라는 세련된 항구 도시로 재탄생하였다. 대체적으로 해안 성벽은 유럽식, 육지 성벽은 마라케쉬와 유사한 현지 양식으로 지어졌다.
1765년 1월 라바트-살레의 유럽 상인들의 이전 명령을 시작으로 1770년에 이르러 에사우이라는 모로코의 유일한 대유럽 무역항이 되었다. 1775년 술탄은 에사우이라에 외교 궁정을 세웠고, 카스바에 국내 동전 주조소를 두었다. 같은해 그는 미국 상인들의 교역을 허가하였다. 팀북투 등 사하라 이남 지역의 풍부한 물산은 사하라 사막과 아틀라스 산맥을 넘어 마라케쉬에 당도하였고, 다시 그곳에서 직선 도로로 연결된 에사우이라에서 유럽 상인들에게 팔렸다. 무역 기능과 함께 사피와 마라케쉬 등지의 장인들까지 집결된 도시는 크게 발전하였고, 19세기 말까지 모로코 제1의 항구로 유지되었다.
대부분 기술직이었던 유대인들은 도시의 활성화에 크게 기여하였고, 지금도 드넓은 유대 묘지과 시나고그가 남아있다. 다만 무함마드 3세가 사후 뒤이은 술탄들이 대외 무역을 경시하며 에사우이라의 침체기가 시작되었다. 1799년에는 역병이 덮쳐 4,500여 주민들이 병사하였고, 기독교도 주민들이 도시를 떠났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포르투갈 공관이 밀집되어 있던 에사우이라의 외교적 독점 역시 술탄 슬리마네가 탕헤르에 미국영사관을 마련해주며 깨지게 된다. 19세기 초중반 모로코는 술탄 압델 라흐만의 통치 하에 안정을 누렸고, 당시 에사우이라의 인구는 1만 5천이었다. 그중 유대인은 4,000명이었고, 기독교도 상인은 50명이었다. 1844년 모로코가 프랑스에 맞선 알제리의 저항군 지도자 압델 카데르의 망명을 받아주자 프랑스는 모로코를 침공, 육군은 우지다를 공격하고 해군은 탕헤르와 에사우이라로 향하였다.
2.3. 프랑스군의 점령
에사우이라를 포격하는 프랑스군
당시 에사우이라에는 항구 쪽에 40문, 해안에 24문의 대포를 지니고 있었고, 모가도르 섬에도 5문이 배치되었다. 8월 6일 탕헤르 포격 이후 남하한 15척의 프랑스 함대는 5일 후 에사우이라 만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날씨가 개기를 기다린 후 8월 15일 수비대의 발포를 시작으로 3시간의 포격전이 이어졌다. 우세한 프랑스군의 화력에 성벽의 포대는 무력화되었는데, 모가도르 섬의 포대는 건재하였다. 이에 500명의 프랑스군이 섬에 상륙하여 모스크, 감옥, 성탑 등 몇 안되는 건물들을 점령하였다. 수비대는 완강히 저항했지만 200여명이 전사하고 400여명이 포로로 잡혔다. 50여 수감자들은 해방되었고, 프랑스군은 14명의 전사자와 64명의 부상자를 내었다. 이후 프랑스 군은 섬의 포대를 이용해 불과 1.5km 떨어진 시가지에 26시간 동안 포격하였고, 에사우이라의 건물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다음날 600명의 프랑스군이 항구로 향하여 별 저항을 받지 않은 채 선박을 침몰시키고 방어 시설을 접수하였다.
프랑스 파리의 앵발리드에 전시된 당시 모로코 군기 | 프랑스군의 포격으로 일그러진 에사우이라 해안포 |
이미 주민들은 도주한 상태였기에 프랑스군은 시내로 진입하지는 않고 모가도르 섬에 수비대를 남긴 후 나머지는 17일에 철수하였다. 그후 인근 쉬다마, 하하의 마스무다 계열 베르베르 부족들이 성벽이 무너지고 비어있는 시내로 진입하여 40일간 약탈하고 떠났다. 다른 기록에 의하면 피신하지 못한 주민들이 학살과 강간을 당하였고, 특히 유대인들의 피해가 극심했다고도 한다. 모가도르 섬의 프랑스군은 9월 16일에야 떠났고, '술탄의 보물고'에 대한 포격으로 충격을 입은 모로코 조정은 9월 17일 탕헤르 조약을 맺어 휴전하였다. 그후 1845년 7월에 이루어진 포로 교환에서 123명의 에사우이라 수비대가 석방되었다. 한편 알라위 조는 약탈에 임한 해당 부족들에게 복구 비용을 청구하고 군대를 파견해 보복하였다.
2.4. 근현대
여름이면 피서객들이 몰리는 에사우이라 해변
1863년 술탄 무함마드 4세는 기존 카스바 바깥의 시가지를 두르는 외성을 축조하고 멜라 구역을 확장하였다. 그럼에도 1844년의 파괴를 극복하지 못한 도시는 점차 쇠락하였고, 유대인 상인들은 서구권 영사들과 공모하여 이자를 늘리고 불평등 교역을 조장하여 모로코 국부의 유출과 무슬림 주민들의 반발을 야기하였다. 또한 19세기 후반 들어 유럽 열강들이 서아프리카 내륙에까지 진출하여 유럽과 말리를 연결하던 사하라사막 횡단 무역 및 에사우이라의 역할이 격감하였다. 비록 1880년대까지도 말리의 상인들이 왕래하긴 했지만 1896년 프랑스의 틴투프 점령으로 이마저도 끊겼다. 이미 유럽 국가들은 영사관을 카사블랑카나 라바트 등 중북부의 항구들로 옮겼고, 술탄의 에사우이라 독점령도 흐지부지 되었다. 20세기 들어 모로코를 식민지화한 프랑스는 술탄의 잔재라 여겨진 에사우이라 대신 탕헤르, 카사블랑카, 아가디르를 발전시켰다.
이로써 도시는 국제 무역항의 지위를 완전히 잃으며 쇠퇴하였고, 지명도 18세기 이전의 모가도르로 명명되었다. 1912년 마라케쉬 ~ 아가디르를 장악한 아흐마드 알 히바의 반란에 직면한 프랑스 당국은 도시 외곽에 8천 병력을 주둔시킨 후 진압에 나섰다. 1913년에는 스마르나의 반군에 대한 원정군이 출정하였다. 프랑스 지배기에 기존 카스바와 메디나 동쪽에 넓은 신작로를 지닌 신도시가 조성되었고, 프랑스어 학교가 세워지는 등 프랑스인들이 정착하였다. 1926년에는 18,401명의 주민이 있었고 그중 7,730명은 유대인이었다. 1952년에는 메디나가 배경 중 하나였던 오델로 영화의 촬영을 위해 당대의 명배우 오손 웰즈가 성벽 남쪽 해안의 호텔 데 일에스[5]에 머물렀는데, 동시에 투숙객이던 윈스턴 처칠과 만났다고 한다. 그 외에도 여러 영화들이 중세적인 분위기를 위해 에사우이라 구도심에서 촬영되었고, 60년대에는 히피들의 여행지 중 하나였다고 한다.
옛 유대인 구역 (멜라)의 건물
모로코 독립 후 에사우이라 지명을 회복한 도시는 동명의 주의 주도가 되었다. 1960년 당시 인구는 26,392명이었고, 1965년 도시는 신설된 사피 주에 배속되었다. 한편, 한때 주민의 다수를 차지하던 유대인들은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 조금씩 이주하기 시작하였는데, 1967년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의 우위가 확고해지자 대부분 그곳으로 이주하였다. 2017년 유대인 주민은 3명에 불과하였다. 이로써 인구 손실을 겪은 에사우이라의 1971년 인구는 30,061명이었다. 1975년 에사우이라는 재창설된 동명의 주의 주도가 되었다. 다만 1990년대 이후 관광업을 통해 조금씩 옛 영광을 되찾아가는 중이며, 인구도 1970년대의 3만에서 8만까지 불어났다. 1998년부터는 '모로코의 우드스탁'인 그누아 음악 축제가 열리고 있다.
3. 갤러리
스칼라 항구 일대
영국/스페인 대포들이 배치된 해안 포대
메디나의 풍경
구도심으로 향하는 밥 스바
만자나 성문과 시계탑. 1912년에 건설된 시계는 1997년 고장났지만 2012년 복구되어 30분마다 종이 울린다.
벤 유수프 모스크
시타델과 밥 엘 메르사 일대
해안 성문인 밥 엘 마르사
밥 엘 메르사 1
에사우이라 동쪽 12km 외곽에 위치한 사드 왕조 시절 설탕 공장 유구 (Ancienne sucrerie d'Ida Ougourd) |
시가지 남쪽 끝에는 작은 강이 바다와 합류하는 하구가 있는데, 디아바트라는 마을과 다르 앗 술탄 궁전이 있다. 해안에는 엘 바루드 성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