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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0 01:32:18

에른스트에버하르트 헬

파일:나치 독일 국장(화이트).svg 독일 국방군의 장성급 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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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rnst-Eberhard Hell.jpg
<colbgcolor=#666> 이름 Ernst-Eberhard Hell
에른스트에버하르트 헬
출생 1887년, 9월 19일
독일 제국, 슈타데
사망 1973년, 9월 15일
서독, 비스바덴
복무 독일 제국군
국가방위군
독일 국방군
최종계급 파일:Si_4b.png 포병대장
주요참전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서훈 백엽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
금십자훈장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군사무공훈장
오스만 제국 공로훈장 은장
오스만 제국 전쟁훈장

1. 개요2. 생애
2.1. 제1차 세계 대전2.2. 전간기2.3. 폴란드 침공2.4. 프랑스 침공2.5. 독소전쟁2.6. 소련군 포로2.7. 이후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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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치 독일의 군인.

2. 생애

2.1. 제1차 세계 대전

에른스트에버하르트 헬은 1887년 9월 19일 슈타데에서 태어났다. 1906년 사관후보생으로 입대하였으며, 1912년부터 로트링겐 야전포 연대에서 복무하였다. 동일 부대 소속으로 제1차 세계 대전을 치르게 되었고 1915년에는 유럽 본토에서 오스만 제국의 독일군 분견대로 파견되었고 대위로 진급하였다. 1차 대전기 동안의 서부전선과 오스만 제국에서의 활약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사무공훈장 3등급, 오스만 제국의 공로훈장(Liakat medal) 은장과 전쟁훈장(Harp Madalyasi)을 수훈받았으며, 독일 철십자 훈장 1, 2등급을 받았다.

2.2. 전간기

독일 제국이 패망하고 독일 제국군의 후신인 국가방위군에 남아 포병부대 및 사단의 참모로 복무하면서 10만 여 명의 편제를 재건하는 업무를 맡았다. 1935년 1월에 대령으로 진급하였으며, 그해 10월에 독일 국방군으로 전환되면서 제32포병연대의 연대장이 되었다.

2.3. 폴란드 침공

1939년 8월에는 소장으로 진급하였으며, 폴란드 침공을 불과 1달 앞두고 새롭게 편성된 제269 보병사단의 초대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폴란드 침공이 개시되면서 빌헬름 리터 폰 레프가 이끄는 C집단군의 직할 사단으로 배치되어 프랑스와의 국경에서 이른바 가짜 전쟁을 수행하였다. 초기에는 C집단군이 서부 전선 전체를 담당하였기에 마지노선에 배치되어 돌파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낫질 작전이 입안되면서 헬이 이끄는 제269 보병사단은 재배치된다.

2.4. 프랑스 침공

1940년 5월, 진짜 프랑스 침공이 개시되면서부터는 B집단군[1]의 16군[2]에 소속된 27군단[3]에 배치되어 안뉘(Hannut) 전투, 장불루(Gembloux) 전투에 참전하였다. 16기갑군단[4]의 전선 유지를 위한 방어부대로 투입되었다. 장불루 저지대에서의 약간의 교착으로 큰 손실을 입었다. 이때의 기동으로 연합군이 벨기에로 진군하게끔 부추기는 꼴이 되었고 덕분에 독일군은 스당을 돌파하여 낫질작전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이후 철십자보장 2등급을 받았으며 7월에 중장으로 진급, 제15보병사단장으로 보직을 옮겨 벨기에 점령에 투입되었다.

15보병사단이 프랑스 점령군으로 배치되었기 때문에 사단장 기간인 1940년 8월부터 1942년 1월까지는 일선 전선에 투입되지 않은 채로 오랜 기간 지냈다.

2.5. 독소전쟁

1942년 1월에 포병대장으로 진급하여 7군단 사령관을 맡았다. 동부전선에서 B집단군의 2군에 소속되어 청색 작전에 참여하였다. 청색작전의 제 1단계는 헤르만 호트 상급대장이 이끄는 4기갑군이 볼가강까지 진격하면 한스 폰 잘무트의 2군이 이를 따라 방어선을 구축하고, 헝가리 제 2군이 이 과정 전반을 보조하여 4기갑군의 진격로 북부에 대한 방어를 담당하는 식이었다. 헬이 이끄는 7군단은 헝가리 제2군에 배치되어 보로네시로 투입되어 돈 강의 교두보에서 방어전을 펼쳐 소련군의 모든 공세를 격퇴하고 총 1000여기의 탱크를 파괴하는 전공을 거두었다. 이 시기에는 "1941년/42년 동부 전선 동계전투포장"을 수훈받는다.

호트의 4기갑군이 사실상 스탈린그라드 방면으로 질주에 성공하였고, 기갑대장 프리드리히 파울루스의 6군이 스탈린그라드로 진격하여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치르게 된다. 스탈린그라드에서 포위된 6군을 구하기 위한 겨울 폭풍 작전이 실패하고 이후 캅카스 전선 일대에서 소련군의 대규모 반격이 이루어지면서 독일군은 이대로 우크라이나 방면으로 점점 패퇴하게 된다.

1943년의 소련군이 별 작전을 개시하면서 헝가리 제 2군 및 그 예하의 독일군 7군단에 공세가 몰아 쳤으며, 하르코프를 빼앗기게 되지만 헬이 이끄는 7군단은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퇴각에 성공하였다. 캅카스 전선에서의 효과적인 방어전으로 기사십자 철십자훈장을 수훈받는다. 1943년 11월, 결국 드네프르 강의 서쪽까지 밀리게 되고 키예프에서 진지를 구축한 7군단은 드네프르 강의 지형을 이용해 적을 일정 부분 막아 내었으나 소련군의 포격이 지속되면서 방어선이 뚫리게 된다.
"포병대장 헬의 지휘 아래에 호흐바움 중장이 이끄는 모젤 제34보병사단, 폰 호른 중장이 이끄는 바덴바덴의 제198보병사단, 브라운 소장이 이끄는 바덴바덴의 제4산악사단이 치열한 방어전에서 특히 효과적이었다."
1944년 3월 12일, 독일국방군 보고(Wehrmachtbericht)
키예프에서 퇴각하고 난 뒤 1944년 3월, 헬이 이끄는 7군단은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에서 형성된 체르카시 포위망에 구원군으로 출격한 3기갑군의 후방보조의 역할을 맡았다. 탈출한 독일군 병력은 사실상 궤멸과 다름없었지만 여하튼 소련군의 추격을 끊어내는데 성공하였고 헬의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에는 백엽이 추가되었다.

44년 8월에는 루마니아까지 밀려났고 소련군은 이야시-키시뇨프에서 공세를 이어나갔다. 헬의 7군단은 루마니아군의 드미트레스쿠 집단군의 독일국방군 6군으로 배치되었다. 하지만 병력과 물자, 루마니아의 내부적 상황 마저 모든 것이 열세였고 결국 지금의 몰도바 불카네슈티에서 소련군에게 포로가 된다.

2.6. 소련군 포로

이미 캅카스 전선에서 프리드리히 파울루스를 비롯한 많은 독일군 장교들이 포로가 되어 있었던 상태였다. 특히 소련은 독일에서 망명해온 공산주의자들을 바탕으로 독일 자유국민 위원회[5]를 결성하였다. 여기에는 독일군 출신 장교들 중에서도 발터 폰 자이틀리츠쿠르츠바흐 빈센츠 뮬러 등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장교들도 있었으며, 친소련 성향의 포로들은 적극적이지 않았던 국방군의 장교들을 지속적으로 회유시켰다.

소련은 이런 영관~장성급 포로들을 활용하여 전방의 독일군을 설득하고 회유하는 방송과 선전에 투입시켰다. 에른스트에버하르트 헬 또한 독일 자유국민 위원회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특히 포로가 된 50인의 국방군 장교 이름으로 성명문을 작성하여 발표하였으며, 그 내용은 아돌프 히틀러를 비난하고 민족의 미래를 위해서 전쟁은 포기해야하며 이미 패배하였음을 강조하는 것이 었다.

2.7. 이후

1955년까지 소련에서 포로로 지내다 석방되었다. 1973년 9월 15일 서독 비스바덴에서 사망하였다.

3. 기타

2차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HOI4에서 나치 독일의 장군으로 나오며, 전쟁영웅의 배경 특성을 갖고 있다. 동계전에서 두드러지게 활약한 것은 없는데도 훈장 때문인지 쓰고 있는 모자 때문인지 동계전 전문가 특성을 달고 있다. 그 밖에도 공병 특성을 갖고 있다.


[1] 사령관 페도어 폰 보크 상급대장 [2] 사령관 발터 폰 라이헤나우 상급대장 [3] 사령관 알프레트 바거 [4] 사령관 에리히 회프너 기갑대장 [5] Nationalkomitee Freies Deutschland(NKF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