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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Joachim von Kortzfleisch 요아힘 폰 코르츠플라이슈 |
출생 |
1890년
1월 3일 독일 제국 브라운슈바이크 |
사망 |
1945년
4월 20일 나치 독일 자우어란트 |
최종 계급 | 육군 보병 대장 |
주요 참전 | 제2차 세계 대전 |
주요 서훈 | 기사십자 철십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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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아힘 폰 코르츠플라이슈(Joachim von Kortzfleisch) 독일 제3제국의 군인이었다.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이 실패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2. 생애
1890년, 브라운슈바이크에서 베스트팔렌 지역 명문 귀족가의 아들로 태어난다. 1907년 입대한 뒤,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대위로 종전을 맞이한다. 바이마르 공화국 이후에도 계속 군에 잔류하여 1937년 소장까지 진급한다.3. 제2차 세계 대전과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1939년 6월 중장으로 진급한 뒤,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제1보병사단장으로 취임하였고, 1940년에는 11군단장으로써 기사십자 철십자장을 수여받는다.1944년 7월 20일, 발키리 작전이 발동되자 당시 베를린 군관구 사령관이었던 그는 프리드리히 프롬 상급대장에게 소환당하는데, 정작 그가 출석하자 그를 맞이한 건 프롬을 제압한 반란 세력이었다. 프리드리히 올브리히트 대장을 포함한 반란 세력이 발키리 작전을 개시하라고 명령하자 그는 히틀러의 사망을 완강히 부인하며 국방군 충성 서약을 잊었느냐고 반발했고, 체포되어 구금되었다. 그만큼 반란군에게 시간이 지체된 것은 덤. 그의 공석은 또 다른 반란군 장성 카를 폰 튕겐 중장이 맡게 된다. 와중에 자신은 "집에 가서 정원이나 가꾸기를 원하는 사람"이라 반란 같은 것에는 참여하기가 싫었다(...)는 드립을 친다.
쿠데타가 진압된 뒤 풀려난 그는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 주동자였다는 사실에 크게 충격을 받았는데, 그와 가까운 친척 관계라 쿠데타 1년 전에 그의 결혼식에 간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1945년, 발터 모델 원수 휘하 서부 전선에서 지휘를 맡았던 그는 적지를 돌파하던 중 미군 전차 대대와 맞닥드렸고, 손을 들고 항복하라는 미군의 지시에 저항하다가 가슴에 총을 맞고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