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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7 09:46:02

프랑수아 3세 드 브르타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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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도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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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34><colcolor=#ffffff>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3세 드 브르타뉴
François III de Bretagne
파일:프랑수아 3세 드 브르타뉴.jpg
이름 프랑수아 드 프랑스
(François de France)
출생 1518년 2월 28일
프랑스 왕국 앙부아즈 성
사망 1536년 8월 10일 (향년 18세)
프랑스 왕국 투르농 성
아버지 프랑수아 1세
어머니 프랑스의 클로드
형제 루이즈, 샤를로트, 앙리, 마들렌, 샤를, 마르게리타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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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 발루아 왕조 도팽, 브르타뉴 공국의 공작.

2. 생애

1518년 2월 28일 프랑스 왕국 앙부아즈 성에서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와 브르타뉴 여공작 프랑스의 클로드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루이즈[1], 샤를로트[2], 앙리, 마들렌[3], 샤를 2세[4], 마르그레테[5]가 있었다. 아버지 프랑수아 1세는 그가 출생하자마자 도팽 칭호를 수여해 왕위 계승자로 지명했으며, 그 해 6월 런던을 방문한 프랑스 사절단은 잉글랜드 국왕 헨리 8세 아라곤의 캐서린의 외동딸인 메리 공주(당시 2세)와 약혼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1520년 6월 헨리 8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된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 카를 5세)와 동맹을 약속하고 프랑스와 최소 2년간 어떠한 협약도 맺지 않기로 하면서, 프랑수아와 메리의 약혼은 자연스럽게 파기되었다.

1525년 파비아 전투에서 패하고 카를 5세에게 생포된 프랑수아 1세는 스페인에 인질 두 명, 즉 당시 7살이었던 프랑수아와 남동생 앙리를 보내는 조건으로 프랑스로 귀환했다. 1524년에 어머니를 잃었던 두 어린 왕자는 1526년부터 1530년까지 4년간 스페인의 마드리드 궁정에서 머물렀다. 한편, 브르타뉴 여공작이었던 어머니가 사망하면서 프랑수아가 브르타뉴 공작으로 선임되게 되었지만, 브르타뉴 귀족들은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전임 브르타뉴 여공작 안 드 브르타뉴와 프랑스 전임 국왕 루이 12세의 결혼 계약에 따르면, 프랑스 국왕이 될 장남이 아니라 차남 이하의 왕자가 브르타뉴 공작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프랑수아 1세는 "짐은 왕자에게 적합한 작위를 내릴 권리가 있다"고 답했고, 브르타뉴 귀족들은 프랑스 왕의 압력에 직면한 끝에 자기들이 자치와 특권을 누리는 걸 보장받는 조건으로 프랑수아가 브르타뉴 공작이 되는 걸 받아들이기로 했다.

1532년 8월 13일 낭트에서 프랑스와 브르타뉴의 연합 칙령이 반포되었고, 다음날 프랑수아는 화려한 축제가 진행되는 가운데 에서 브르타뉴 공작으로 즉위했다. 그는 프랑스 국왕의 기사를 상징하는 생 미셸 기사단의 깃을 벗은 뒤 담비 기사단[6]의 깃으로 장식했으며, 렌 주교 이브 마히유크는 그에게 공작의 검을 주고 축복한 뒤 황금 왕관을 그의 머리에 씌웠다. 이렇게 장비를 갖춘 프랑수아는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3세'로서 왕좌에 앉았고, 주교가 말한 맹세문의 각 문장에 아멘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이후에는 프랑스 궁정으로 돌아갔고, 브르타뉴 통치는 아버지가 파견한 관리들에 의해 수행되었다.

1535년 10월, 밀라노 공작 프란체스코 2세 스포르차가 후계자를 두지 못한 채 사망했다. 프랑수아 1세는 이 기회에 밀라노 공국을 병합하려 했고, 사보이아 공국 카를로 2세가 카를 5세의 동서인 점을 이용해 사보이아 공국을 무력으로 접수한 뒤 카를 5세에게 "사보이아 공국과 밀라노 공국을 교환하자"라고 제안하려 했다. 1536년, 프랑수아 1세는 사보이아 공국으로 진군해 사보이아 피에몬테에 무혈 입성하고 니차, 베르첼리, 쿠네오, 발레다오스타 일대를 제외한 사보이아 공국 대부분을 장악했다. 그 후 사보이아 공국에 주둔한 프랑스군의 수장으로 두 아들 프랑수아와 앙리를 선임하고, 밀라노 주둔 스페인군과 대치하되 절대로 교전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 카를 5세는 이에 보복하고자 1536년 6월 프로방스를 침공했지만 프랑스 무관장 안 드 몽모랑시의 결사적인 방어로 격퇴되었다.[7]

1536년 8월, 프랑수아는 리옹에서 테니스 경기에 참여한 뒤 얼음물 한 잔을 마셨다가 급병에 걸렸고, 며칠 후인 1536년 8월 10일 푸아티에발렌티누아에 있는 투르농 성에서 사망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18세였고, 결혼도 하지 않아 자녀를 낳지 못했다. 그래서 남동생인 앙리가 그의 뒤를 이어 도팽이자 브르타뉴 공작이 되었다. 그의 유해는 생드니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세간에서는 피에몬테 영주 세바스티아노 데 몬테쿠콜리가 얼음물에 독을 넣었다는 소문이 돌았고, 앙리의 아내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속한 메디치 가문이 앙리가 도팽이 되어서 장차 프랑스 국왕으로 즉위해 카트린의 신분을 격상하게 하기 위해 프랑수아를 독살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별다른 근거가 없는 이야기로 간주하며, 스페인에 인질로 잡혀 있을 때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걸린 흉막염이 악화하여 사망에 이르렀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1] 1515 ~ 1518, 요절 [2] 1516 ~ 1524, 요절 [3] 1520 ~ 1537,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5세의 왕비 [4] 1522 ~ 1545, 오를레앙 공작 [5] 1523 ~ 1574, 사보이아 공국의 공작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의 부인 [6] 1381년 브르타뉴 공작 장 4세가 창설한 기사단 [7] 두 군주는 교황 바오로 3세의 호소에 따라 1538년 7월 15일 에그모르트 평화 협약을 체결해 10년간 휴전하고, 힘을 합쳐 오스만 제국에 맞서기로 했으며, 카를 5세는 프랑수아 1세와 후계자들이 밀라노 공국에 계승권이 있음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러나 카를 5세는 프랑수아 1세의 아들 중 한 명에게 밀라노 공국을 수여하는 걸 끝까지 거부했고, 결국 양자는 4년만인 1542년에 전쟁을 재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