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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5 21:21:20

알란 3세

파일:브르타뉴 상징 문장.svg
브르타뉴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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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FFFF><colcolor=#000000> 브르타뉴 공작
알란 3세
Alain III
이름 알란 3세(Alain III)
출생 997년 또는 999년
브르타뉴 공국
사망 1040년 10월 1일
노르망디 공국 비무티에
재위 브르타뉴 공국의 공동 공작
1008년 ~ 1040년
아버지 조프루아 1세
어머니 하와이즈
형제 에우돈, 아델
배우자 베르테 드 블루아
자녀 코난 2세, 하와이즈, 조프루아 그레도나( 사생아)
1. 개요2. 행적3. 가족

[clearfix]

1. 개요

브르타뉴 공국의 공동 공작.

2. 행적

브르타뉴 공국의 중심지 에서 브르타뉴 공작 조프루아 1세와 노르망디 공작 리샤르 1세의 딸 하와이즈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에우돈, 아델[1]이 있었다. 1008년 조프루아 1세가 로마 순례를 다녀오던 중 알려지지 않은 사유로 사망한 뒤, 형제 에우돈과 함께 브르타뉴 공국의 공동 주권자가 되었고 어머니 하와이즈와 낭트 주교 고티에 2세, 반 주교 주디카엘, 돌 대주교 융게네가 섭정을 맡았으며, 노르망디 공작 리샤르 2세가 그들의 대부가 되어줬다. 두 형제는 여러 문서에서 브르타뉴 통치자(Brittanorum Monarchi) 또는 브르타뉴 공(Principes Brittaniae)으로 일컬어졌다. 여러 연대기는 그가 에우돈보다 2년 빠른 997년에 출생했다고 밝혔다지만,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두 형제가 공동 통치자가 된 것을 볼 때 999년 쌍둥이로 출생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1009년, 리샤르 2세는 몽생미셸 수도원장 메이너드 2세에게 압력을 행사해 르동의 생소뵈르 수도원으로 밀어내고 힐데베르트 1세를 몽생미셸 수도원의 새 수도원장으로 세웠다. 또한 1014년에는 자기 형제이자 루앙 대주교 로베르에게 세레를 받은 올라프 2세 하랄드손을 사주해 돌을 일시적으로 점령하게 했으며, 브르타뉴 공국에 압박을 계속 가해 양국의 국경을 셀루네 강에서 셀룬 강까지 밀어냈다. 한편 <성 길다스의 생애>에 따르면, 농민 반란이 브르타뉴 각지에서 일어났으며, 귀족들도 종종 반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1018년, 알란 3세는 블루아 백작 외드 2세의 딸인 베르테와 결혼함으로써 블루아 백국과 렌 간의 오랜 동맹을 갱신했다. 그는 1024년 또는 1025년에 권력을 잡았고, 형제 에우돈과 함께 브르타뉴인의 군주로서 문서에 명시했다. 그는 치세 동안 13개의 헌장, 6개의 통지 및 11개의 사적 법안을 포함하여 32개의 법안을 반포해 통치를 재정비했고, 군사 원정도 종종 벌였다. 1027년 르 루데와 라 페르테베르나르를 포위 공격했으며, 1032년 부활절에 프랑스 국왕 앙리 1세의 수행원으로서 오를레앙에 군대를 이끌고 나타나기도 했다. 1027년 헌장에서, 그는 "어떤 사람들은 왕이라고도 부르는"(qui est aussi appelé roi par certains) 브르타뉴 공작으로 묘사되었다. 그는 때때로 중세 연대기 작가들에 의해 'Rebrit(브르타뉴 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한편, 그는 노르망디와 멘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벨렘 가문과 갈등을 겪고 있던 멘 백작 허버트 1세를 지원했으며, 1027년 앙주 백작 풀크 3세에 대항하여 프랑스 국왕 앙리 1세, 블루아 백작 등과 연합해 공세를 벌여 라 페르테베르나르를 포위한 끝에 접수헀다. 이후 샤르트르의 풀베르 주교의 후원 아래 화해를 통해 적대 행위를 종식했으며, 풀크 3세가 인질로 잡아뒀던 망소 출신 기사들을 구출하는 데 관여했다. 1031년 코르누아이유 백작 알란 칸히아르와 다소 갈등을 벌인 뒤 화해했으며, 닝트 백작 부디크에 맞서는 낭트 주교 고티에 2세를 지원헀다. 1033년 돌의 대주교 융게네의 설득 덕분에, 낭트 백국은 앙주 백작 풀크 3세에 대한 충성을 포기하고 브르타뉴 공작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1030년, 브르타뉴 공작 로베르 1세가 브르타뉴를 침공했다. 알란 3세는 아브란친에서 맞섰지만 큰 손실을 입은 채 격퇴되었다. 이후 루앙 대주교이며 노르망디 최초의 대주교이자 덴마크 출신의 인사인 로베르의 중재하에 몽생미셀 수도원에서 평화 협약을 맺고 로베르 1세와 화해했다. 1031년, 알란 3세와 에우돈 형제는 몽생미셸 수도원에 기부했고, 1032년에는 생조르수 수도원 건립식에 참석했다. 1034년, 로베르 1세는 예루살렘 순례를 떠나면서 사생아이자 노르망디 공국 후게자인 기욤 2세의 후견인을 그에게 맡겼다. 1035년, 로베르 1세는 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던 중 사망했다. 이후 알란 3세는 노르만 귀족 일부의 반란으로 위협을 받고 있는 후계자 기욤 2세의 권리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노르망디에 개입했지만, 실제로는 자기가 어머니를 통해 노르망디 공작 리샤르 1세의 진정한 후계자라고 자처했다.

15세기에 브르타뉴 공작 장 4세 드 브르타뉴의 측근으로 알려진 익명의 성직자가 집필한 <생브리외 연대기>(Chronique de Saint-Brieuc)에 따르면, 1035년 에우돈과 알란 3세가 브르타뉴 공국의 단독 주권자가 되기 위해 내전을 벌였다고 한다. 하지만 내전이 벌어진 정확한 경위 및 진행 상황은 별로 밝히지 않았다. 브르타뉴 출신의 법학자이자 역사가 베르트랑 다르장트레(Bertrand d'Argentré, 1519 ~ 1590)가 1580년부터 1582년까지 저술한 <브르타뉴의 역사>(Histoire de Bretagne)에 따르면, 에우돈은 알란 3세로부터 공작위에서 물러나라는 통보를 받자, 이에 반감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생브리외 연대기는 내전이 일어나자 삼촌이자 반 주교인 주디카엘이 중재에 나섰고, 에우돈은 알란 3세로부터 돔노네 통치권을 맡았다고 서술했다. 여기에는 생 말로, 돌, 팡티에브르, 고엘로 및 램발레가 포함되었다. 이후 생브리외 연대기는 에우돈을 팡티에브르 백작이라고 칭했다.

그러나 현대 학자들은 이 기록의 신빙성이 거의 없다고 본다. 1987년 프랑스 중세 역사가 노엘 이브 토네레(Noël-Yves Tonnerre, 1946 ~ )는 에우돈과 알란 3세는 공국을 조화롭게 통치했으며, 내전을 벌였다는 것을 교차검증할 다른 기록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또한 브르타뉴 역사가 스테판 모랭(Stéphane Morin)은 2009년에 발간한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 브르타뉴 공작의 역할>에서 에우돈이 알란 3세의 어린 아들이자 그의 조카인 코난 2세의 섭정으로 선임되어 1047년까지 통치한 것을 볼 때, 알란 3세는 형제를 신뢰했고 서로 내전을 벌이지 않았을 거라고 주장했다. 학자들은 잔 드 팡티에브르를 상대로 브르타뉴 공작위 계승 전쟁을 치른 끝에 승리를 거둔 장 4세 드 브르타뉴의 측근이었던 생브리외 연대기의 저자가 팡티에브르 백작가의 선조인 에우돈이 장 4세 드 브르타뉴의 선조인 알란 3세의 봉신이었으니, 장 4세가 브르타뉴 공작으로서 정통성이 더욱 강하다는 걸 강조하려고 지어낸 이야기라고 추정한다.

1040년 10월 1일, 노르망디 원정을 착수하던 알란 3세가 비무티에에서 중독이 의심되는 증세를 보이며 사망했다. 사후 페캉의 트리니티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이후 그의 아들 코난 2세가 브르타뉴 공작이 되었고, 그의 아내인 베르테 드 블루아와 형제 에우돈이 섭정을 맡았다.

3. 가족



[1] 996 ~ 1067, 1037년부터 생조르주 수도원의 첫번째 수녀원장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