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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7 18:55:36

호엘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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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르타뉴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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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FFFF><colcolor=#000000> 브르타뉴 공작
호엘 2세
Hoël II
이름 호엘 2세 (Hoël II)
출생 1031년
브르타뉴 공국 코르누아이유
사망 1084년 4월 13일 (향년 52~53세)
브르타뉴 공국 낭트
재위 브르타뉴 공국의 공작
1066년 ~ 1084년
아버지 알란 칸히아르
어머니 주디트
형제 게레치 2세, 부디크, 호디에른, 베네딕트, 오르구엔 또는 아녜스
배우자 하와이즈
자녀 알란 4세, 마티아스 2세, 아델, 하와이즈, 힐데베르게, 베네딕트

1. 개요2. 행적3. 가족

[clearfix]

1. 개요

브르타뉴 공국의 공작.

2. 행적

1031년경 브르타뉴 공국에 속한 코르누아이유에서 코르누아이유 백작 알란 칸히아르와 낭트 백작 마티아스 1세의 딸인 주디트의 아들로 태어났다. 형제자매로 게레쉬[1], 부디크[2], 호디에른[3], 베네딕트[4] 오르구엔 또는 아녜스[5]가 있었다.

1050년 또는 1051년, 낭트 백작 마티아스 1세가 후계자를 낳지 못한 채 사망했다. 코난 2세 또는 에우돈은 낭트를 접수하려고 시도했지만, 코르누아이유 백작 알란 칸히아르의 아내이자 호엘 2세의 어머니인 주디트가 낭트를 회수했다. 이후 양자간의 분쟁이 수년간 이어지다가, 1054년 주디트의 아들인 호엘 2세와 코난 2세의 누이 하와이즈가 결혼하고, 호엘 2세와 화이이즈가 낭트를 공동으로 통치하는 것으로 종식되었다. 1058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코르누아이유 백작이 되었다. 1062년에서 1066년 사이에 단로 섬을 앙제의 성 니콜라 수도원에 기증했다.

1066년 12월 11일, 코난 2세가 노르망디 원정에 착수했다가 공티에 성 앞에서 돌연 사망했다. 브르타뉴 역사학자 아르튀르 드 라 보더리(Arthur de La Borderie, 1827 ~ 1901)는 기욤 2세가 사주한 반역자들에 의해 독살되었을 거라고 추정했지만 진위는 불분명하다. 코난 2세는 생전에 결혼하지 않아 적합한 후계자를 낳지 못했기에, 그의 누이인 하와이즈가 남편 호엘 2세와 함께 브르타뉴 공동 공작에 선임되었다. 다만 렌 백작 조프루아 그레노나트가 브르타뉴 공국으로부터 이탈했다.

1072년 하와이즈가 사망한 뒤 브르타뉴의 단독 공작이 되었다. 이후 1075년부터 팡티에브르 백작 에우돈의 아들인 조프루아 1세 드 팡티에브르, 렌백작 조프루아 그레노나트, 포르호에트 영주이자 렌 자작 에우돈 1세의 반란에 직면했다. 먼저 조프루아 그레노나트는 이스트 앵글리아 백작 라울 1세 드 게일이 돌(Dol)을 점령했고, 뒤이어 조프루아 1세 드 팡티에브르, 포르호에트 영주 에우돈 1세가 호응했다. 호엘 2세는 노르망디 공작이자 잉글랜드 국왕 윌리엄 1세의 도움을 받아 반란군을 상대로 우세를 점했다. 그러나 프랑스 국왕 필리프 1세가 노르망디를 압박하자 윌리엄 1세가 이를 막으러 돌아가면서 전세가 역전되었고, 1077년 반군에게 생포되었다. 하지만 그의 아들 알란 4세가 반란군을 물리친 덕분에 곧 풀려났다. 반란은 1079년 팡티에브르 백작 에우돈이 사망한 뒤 양자가 화해하기로 하면서 종결되었다.

한편, 호엘 2세는 1072년에서 1078년 사이에 로마 순례했다고 전해지나 방문 목적 및 자세한 경과는 알려지지 않았다. 1078년,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브르타뉴 공작 호엘, 렌 백작 조프루아, 팡티에브르의 아들 조프루아"에게 교회 개혁 사업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호엘 2세는 1079년에서 1084년 사이에 란두겐에 수도원에 설립했다. 1084년 4월 13일에 사망했고, 알란 4세가 브르타뉴 공작을 역임했다.

3. 가족



[1] 1030 ~ 1078, 낭트 주교 [2] ? ~ 1091 [3] ? ~ ?, 킹페르의 로크마리아 수녀원장 [4] ? ~ 1115, 캉페르의 성 십자가 수도원장, 낭트 주교, [5] 팡티에브르 백작 에우돈의 아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