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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5 21:20:53

에우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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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르타뉴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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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FFFF><colcolor=#000000> 브르타뉴 공작
애우돈
Eudon
파일:에우돈.png
이름 에우돈(Eudon)[1]
출생 999년
브르타뉴 공국
사망 1079년 1월 7일
브르타뉴 공국 팡티에브르
재위 브르타뉴 공국의 공동 공작
1008년 ~ 1035년
팡티에브르 백작
1035년 ~ 1079년
브르타뉴 공국의 섭정
1040년 ~ 1047년 또는 1057년
아버지 조프루아 1세
어머니 하와이즈
형제 알란 3세, 아델
배우자 오르구앙/아녜스 칸히아르
자녀 아델, 조프루아 1세, 브라이언, 알란 르 루, 기욤, 로베르, 리샤르, 알란 르 노이르, 에티엔, 에니산 드 플레벤의 아내( 사생아), 보두앵(사생아), 바르둘프(사생아), 아르놀드(사생아)
1. 개요2. 행적3. 가족

[clearfix]

1. 개요

브르타뉴 공국의 공동 공작, 팡티에브르 백작, 섭정.

2. 행적

999년경 브르타뉴 공국의 중심지 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브르타뉴 공작 조프루아 1세이고, 어버니는 노르망디 공작 리샤르 1세의 딸 하와이즈이다. 형제로 알란 3세, 아델[2]이 있었다. 1008년 조프루아 1세가 로마 순례를 다녀오던 중 알려지지 않은 사유로 사망한 뒤, 형제 알란 3세와 함께 브르타뉴 공국의 공동 주권자가 되었고 어머니 하와이즈가 섭정을 맡았으며, 노르망디 공작 리샤르 2세가 그들의 대부가 되어줬다. 두 형제는 여러 문서에서 브르타뉴 통치자(Brittanorum Monarchi) 또는 브르타뉴 공(Principes Brittaniae)으로 일컬어졌다.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두 형제가 공동 통치자가 된 것을 볼 때 쌍둥이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지만 불확실하다. 1031년, 알란 3세와 에우돈 형제는 몽생미셸 수도원에 기부했고, 1032년에는 생조르수 수도원 건립식에 참석했다.

15세기에 브르타뉴 공작 장 4세 드 브르타뉴의 측근으로 알려진 익명의 성직자가 집필한 <생브리외 연대기>(Chronique de Saint-Brieuc)에 따르면, 1035년 에우돈과 알란 3세가 브르타뉴 공국의 단독 주권자가 되기 위해 내전을 벌였다고 한다. 하지만 내전이 벌어진 정확한 경위 및 진행 상황은 별로 밝히지 않았다. 브르타뉴 출신의 법학자이자 역사가 베르트랑 다르장트레(Bertrand d'Argentré, 1519 ~ 1590)가 1580년부터 1582년까지 저술한 <브르타뉴의 역사>(Histoire de Bretagne)에 따르면, 에우돈은 알란 3세로부터 공작위에서 물러나라는 통보를 받자, 이에 반감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생브리외 연대기는 내전이 일어나자 삼촌이자 반 주교인 주디카엘이 중재에 나섰고, 에우돈은 알란 3세로부터 돔노네 통치권을 맡았다고 서술했다. 여기에는 생 말로, 돌, 팡티에브르, 고엘로 및 램발레가 포함되었다. 이후 생브리외 연대기는 에우돈을 팡티에브르 백작이라고 칭했다.

그러나 현대 학자들은 이 기록의 신빙성이 거의 없다고 본다. 1987년 프랑스 중세 역사가 노엘 이브 토네레(Noël-Yves Tonnerre, 1946 ~ )는 에우돈과 알란 3세는 공국을 조화롭게 통치했으며, 내전을 벌였다는 것을 교차검증할 다른 기록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또한 브르타뉴 역사가 스테판 모랭(Stéphane Morin)은 2009년에 발간한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 브르타뉴 공작의 역할>에서 에우돈이 알란 3세의 어린 아들이자 그의 조카인 코난 2세 섭정으로 선임되어 1047년까지 통치한 것을 볼 때, 알란 3세는 형제를 신뢰했고 서로 내전을 벌이지 않았을 거라고 주장했다. 학자들은 잔 드 팡티에브르를 상대로 브르타뉴 공작위 계승 전쟁을 치른 끝에 승리를 거둔 장 4세 드 브르타뉴의 측근이었던 생브리외 연대기의 저자가 팡티에브르 백작가의 선조인 에우돈이 장 4세 드 브르타뉴의 선조인 알란 3세의 봉신이었으니, 장 4세가 브르타뉴 공작으로서 정통성이 더욱 강하다는 걸 강조하려고 지어낸 이야기라고 추정한다.

1040년 알란 3세가 사망한 뒤, 알란 3세의 아내인 베르테 드 블루아와 함께 브르타뉴 공국의 섭정이 되었고, 코난 2세의 후견인이 되었다. 생브리외 연대기는 그가 공작 작위를 찬탈하고 베르테 및 브르타뉴 귀족들의 조언을 무시하고 코난 2세를 성에 가두고 1047년까지 바깥에 나가지 못하게 했다고 기술했지만, 현대 학자들은 근거없는 이야기이며 코난 2세에게 고급 교육을 공평하게 제공했을 거라고 본다. 1045년 알란 3세의 아내인 베르테 드 블루아가 멘 백작 위그 4세와 재혼하면서, 그는 브르타뉴 공국의 단독 섭정으로 군림했다. 한편, 에우돈은 앙주 백작 조프루아 2세에게 자기 딸 아델을 아내로 삼게 함으로써 앙주 백국과 손잡고, 노르망디 공작 기옴 2세와 대적했다.

1047년, 에우돈은 브르타뉴 공국의 옛 영토였던 베생과 코탕탱의 남작들을 부추겨서 노르망디 공작 기욤 2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도록 했다. 그는 이를 통해 두 지역을 독립시킨 뒤 자국에 병합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해 8월 10일, 기욤 2세는 발에스듄 전투에서 반란군을 섬멸했다. 노엘 이브 토네레에 따르면, 에우돈은 이 실패로 인해 입지가 약해져 섭정에서 물러났고, 코난 2세가 주권을 행사했다고 한다. 반면, 스테판 모랭은 11세기와 12세기 노르망디 수도자이자 역사가 오더릭 바이탈(Orderic Vital, 1075 ~ 1141/1143)의 저서에서 에우돈이 이후에도 계속 집권했다고 밝힌 것과 교황 레오 9세가 1049년에 반포한 교령에서 그를 "브르타뉴의 공(Princes des Bretons)"으로 밝혔으며, 비슷한 시기에 렌 조폐국에서 발행한 금화에서 에우돈을 "브르타뉴 공작(dux Britanniae)"이라고 칭한 것을 근거삼아, 에우돈은 1057년까지 계속 군림했으며 코난 2세는 1047년부터 1057년까지 에우돈의 지배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다고 추정한다.

1052년, 에우돈은 프랑스 국왕 앙리 1세와 앙주 백작과 손잡고 노르망디 공작 기욤 2세를 대적했다. 그러나 연합군은 1054년 모르테메르 전투에서 기욤 2세에게 패배했다. 1056년, 에우돈은 피카르디의 보베 영지를 앙제의 생토뱅 수도원에 기부했다. 1057년, 에우돈은 조카 코난 2세에게 체포되어 샤르트르로 수감되었고, 아들 조프루아 1세 드 팡티에브르가 아버지를 대신해 코난 2세와 맞섰다. 1062년, 코난 2세와 조프루아 1세간의 평화 협약이 체결되면서, 에우돈은 감옥에서 풀려났다. 이후 에우돈은 영지로 돌아갔고, 그의 자식들은 노르망디 공작 기욤 2세와 친분을 뱆었다. 1066년 기욤 2세가 잉글랜드 원정을 단행했을 때,브라이언, 알란 르 루, 알란 르 노이르, 에티엔, 보두앵, 리발드 등 그의 여러 자식이 참여했다. 1075년, 에우돈은 아들 조프루아 1세 드 팡티에브르가 코난 2세의 후계자인 호엘 2세를 상대로 반기를 들었을 때 참여했다. 1079년 1월 7일에 사망했고, 생브리외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3. 가족



[1] 중세 브르타뉴어 이름. 근대 브르타뉴어로는 에오젠(Eozen)이고, 당대에는 라틴어로 에우도(Eudo)로 표기되기도 했다. 프랑스어로는 외드(Eudes)이다. [2] 996 ~ 1067, 1037년부터 생조르주 수도원의 첫번째 수녀원장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