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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승병. 僧兵을 일본식으로 음독하면 '소헤이'가 된다. 군벌화된 사찰이 운용하던 독립적인 무력 집단이었다는 게 특징이다.2. 역사
2.1. 헤이안 시대
헤이안 시대에 일본의 사찰들은 장원 영주화하해서, 유명한 사찰은 중앙과 지방의 황실 · 귀족 혹은 무사들로부터 토지를 시주받아 넓은 장원을 보유하였다. 사찰이나 신사에는 면세 특권이 있었기 때문에 지방 영주와 귀족, 무사, 호족들은 국사(國司)에게 세금을 내고 간섭을 받는 상황을 피하고자, 자신들이 소유한 토지들을 사찰과 신사에 기진(寄進)해 영주로 모시고, 국가에 납부하던 연공과 잡역(公事), 부역을 그들에게 바쳤다.
일종의 명의 도용과 유사한 형태의 기진을 하여 사찰이나 신사의 면세, 면역 혜택을 받은 이들은 장원의 현지 관리인인 하사(下司)나 공문(公文)이 되어 영지를 실효 지배했다. 이게 이어지며 점점 사찰들은 막대한 재산을 소유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사찰들은 도적으로부터 사찰을 보호하고 주위의 치안을 유지하는 한편, 사찰의 부를 노리거나 종단을 종속시키기 위해 압박을 가하는 다른 정치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서 승병을 조직했다.
승병이 본격적으로 위세를 발휘한 것은 11세기 중반부터였다. 당시 일본은 남도북령(南都北嶺)으로 대표되는 대사원 세력의 힘이 막강하여 치천의 군(治天の君)이라 불리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한 시라카와 천황마저도 엔랴쿠지의 승병은 감당하기 어렵다고 말할 정도였다.[1]
시라카와 상황의 말은 다음과 같다. "천하에 내 뜻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세 가지가 있는데, 카모가와(賀茂川. 하무천. 교토 시내를 흐르는 강)의 강물과 쌍륙(당시 유행한 일종의 도박)의 주사위 패, 그리고 엔랴쿠지이다."[2]
자연현상인 강물과 도박의 운수에 맞먹을 정도로 다루기 힘든 것이 당시 승병 집단이었다는 것. 상황으로서 원정을 실현시켜 절대적인 권력을 누린 군주가 이런 한탄을 했을 정도니 당시 승병들의 위세가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사찰들의 위세는 국사까지 감당하기 버거운 것이었으며[3] 이들을 파견한 천황과 상황조차 국사들을 보호해 주지 못했다. 만약 국사가 사찰 소속의 승려나 신인(神人)[4]을 체포하거나 진압 과정 중에 죽이기라도 하면, 설령 그 승려가 부패한 승려였다 해도 사찰측에서는 휘하 승병들과 연계된 신사들의 신여(神輿)나 신목(神木)을 교토까지 들고 와 방치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 행위를 강소(強訴 고소)라고 하며 고후쿠지에서는 카스가 신사(春日神社), 엔랴쿠지에서는 히에 신사(吉日神社)의 신여와 신목을 들고 와서 교토의 길바닥에 던졌다. 당시에는 신령이 강림한다는 신목과 신여를 길 한복판에 내버려두면 천벌을 받는다는 관념이 있어서 절대로 방치해서는 안되었고 대중들은 신이 노하기 전에 빨리 신사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찰 세력들은 이러한 방법을 이용해 교토에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조정에 압박을 가해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가 있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헤이안 시대 말기부터 말법 사상의 재래로 종교적 분위기가 심화되어 대다수 사람들이 미신을 믿고 부정(不淨, 케가레)이나 원령(怨靈), 저주(詛呪) 등에 대한 관념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이 시기 일본인들은 괴이한 일, 원령, 부정 타는 일, 저주에 대해 심각할 정도로 민감하게 반응했다. 내세관 또한 변화하여 신분을 막론하고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했고, 천황들이 스스로의 극락왕생을 위해 종교적 행사를 벌인 것도 이러한 풍조를 부추겼다.[5]
따라서 사찰들의 고소 행위는 안 그래도 종교적 분위기가 심화된 판에 방치하면 천벌을 받는다는 신목과 신여를 길바닥에 던져 교토 전체가 신의 진노를 사고 부정을 입게 만든 것이다. 그래서 당대인들은 사찰의 고소 행위를 대단히 두려워했고 상황마저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주요 사찰인 고후쿠지는 후지와라 가문의 평안을 비는 사찰이고 소속된 승병들이 갖고 오는 신여는 후지와라 가문의 조상신들을 모신 카스가 신사의 것이었다. 자기 가문의 조상신들이 깃든 신여를 집어 던지고 후지와라 일문으로서 신의 뜻에 따르지 않는 자는 신의 이름으로 일족에서 추방하겠다고 협박을 하니, 후지와라씨가 장악하고 있던 조정은 공황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6]
시라카와 천황의 재위 기간에는 관료가 승려를 살해했다는 이유로 승병들이 몰려와 고소했고, 그가 상황으로 있던 1092년에는 엔랴쿠지에서 카가국 신사의 진닌이 살해당한 것을 이유로 고소를 벌여 상황의 측근이며 카가국 국사인 후지와라노 타메후사를 아와 곤노카미로 좌천시켰다.
엔랴쿠지가 시라카와 상황의 측근을 좌천시키자, 이에 질세라 경쟁 세력인 고후쿠지에서도 시라카와 상황의 측근이며 오미국 국사였던 타카시나노 타메이에가 카스가 신사가 소유한 장원에 대해 규제를 가했다는 이유로 승병 수천 명을 동원해 카스가 신사의 신목을 들고 상경하여 타메이에를 귀양 보낼 것을 요구했고, 이에 천황과 상황이 승병들에게 굴복하여 타메이에를 토사에 유배했다.
1113년, 교토의 유서 깊은 사찰인 키요미즈데라(清水寺. 청수사)의 주지를 임명하는 문제 때문에 엔랴쿠지와 고쿠후지 간의 분쟁이 터졌다. 원래 양대 사찰은 경쟁 관계에 있었고 역사가 오래된 대사찰인 키요미즈데라의 주지 자리가 비자, 이참에 손아귀에 쥐어 영향력을 강화하려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라카와 상황이 엔랴쿠지가 지지하는 인사를 주지에 임명하자, 고쿠후지는 격렬하게 항의했다.
그러자, 상황은 고쿠후지가 지지하는 인사를 주지에 임명하고 엔랴쿠지측 인사를 내쳤다. 이에 격노한 엔랴쿠지는 고쿠후지의 승려가 일으킨 폭행 사건을 비난하면서 이에 대한 처벌과 고쿠후지가 장악한 키요미즈데라를 철거할 것을 요구했다. 시라카와 상황이 승병들에 대해 한탄한 이유를 알게 해주는 사건들이었다.
아직 일본 조정이 권위와 권력을 잃어버리지 않은 시대였기에 진압하려 한다면 충분히 진압할 수도 있었으나, 당시 위세를 떨치던 토다이지와 고후쿠지, 엔랴쿠지 같은 대사찰들은 막대한 재산과 병력을 보유한 것에 더해서 학교를 관리하고 궁전에서 열리는 여러 행사와 법회를 주관하는 등, 교육과 종교면에서 자기 몫을 다하고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에 쉽게 진압할 수가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조정이 가만히 있던 것은 아니었다. 승병들이 하도 극성을 부리니 겐지와 헤이시 같은 무사단들을 불러 들여 승병들에 맞설 무력 집단을 구성하고 고소를 막게 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상황의 군사 조직인 북면의 무사(北面の武士)이다.
1115년, 사찰 세력이 고소를 하기 위해 교토로 들어오다 상황의 지시를 받은 무사단에게 저지당했다.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었으나, 승병들은 원래 목표인 강소에 실패했기 때문에 무사들의 판정승에 가까웠다. 다만, 당시 일본의 최정예 병력이라 할 수 있는 상황 직속의 무사들에게 큰 피해를 강요할 정도로 승병들의 전투력이 대단했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1118년에는 엔랴쿠지의 승병이 봉기하여 교토로 진입하다가 카모가와 강에서 북면의 무사 1천명에게 저지당했다. 이렇게 승병들의 행패를 참지 못한 조정에서 무사들을 동원해 진압해버리면, 승병들은 신여나 신목을 교토로 가져오는 데서 그치지 않고, 본업에 맞게 종교적인 저주 의식도 행하기도 했다.
1095년, 미노의 사찰 영지에서 국사 미나모토노 요시츠나[7]가 승려를 체포할 때, 사망자가 나왔다는 이유로 승병들이 히에 신사의 신여를 메고 상경해 요시츠나를 유배 보내라고 요구했다. 이에 맞서 시라카와 상황과 관백 후지와라노 모로미치(藤原師通)는 무사들을 동원하고 미나모토노 요리하루, 이해 당사자인 요시츠나에게 진압을 명했다. 이 때 한 승병이 화살에 맞아 죽었고 엔랴쿠지와 히요시 신사 소속의 예속민과 추종 세력들 중에서도 사상자들이 나왔다.
고소가 저지당하고 사상자가 다수 발생한 데다가, 자신들이 실각시키려 한 요시츠나에게 진압당해 화가 있는 대로 난 엔랴쿠지는 5천 명이 넘는 승려들을 동원해 히에이 산에서 며칠 동안 대반야경[8]을 독송하며 관백 후지와라노 모로미치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후지와라노 모로미치는 엔랴쿠지가 저주를 퍼붓거나 말거나 계속해서 정무에 임했지만, 4년이 지나 1099년 향년 38세에 젊은 나이로 급사했다. 현대인이라면 병이나 과로를 의심했겠지만, 시대는 종교적이고 원한과 부정에 집착하는 헤이안 시대였다. 사람들은 승려를 함부로 죽인 것 때문에 신이 진노하여 모로미치의 목숨을 앗아갔다고 믿었다.
모로미치가 급사한 사건은 일본 역사에서 굉장히 큰 영향을 끼쳤다. 간파쿠 후지와라노 모로미치 생전까지만 해도 후지와라 섭관가의 세도 권력은 나름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고산조 천황이 후지와라 가문의 세도를 박살내고 시라카와 천황이 부황의 유지를 받들어 후지와라 가문을 계속 견제했지만, 여전히 후지와라 가문은 강력했고 국정을 이끌 동력도 그들에게 있었다.
그래서 후지와라노 모로미치 생전에는 호리카와 천황이 상황과 협의하지 않고 관백인 모로미치와 국정을 상의하고 협치하는 분위기였고, 상황은 개입할 여지도, 현재의 국정에 대한 지식도 없어서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모로미치가 급사하자 후지와라 섭관가의 권력에 공백이 발생했다. 모로미치 이후에 관백이 된 다다자네는 나이가 어려서 정치 경험이 부족해서 국정을 장악하는데 애를 먹는 동안, 상황이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나이 어린 호리카와 천황의 정치를 보조한다.'는 명목으로 본격적으로 조정에서 ( 원정 형태로) 정치력을 행사하게 되었던 것이다. 즉, 후지와라 섭관사의 세도 정치가 강소에 대한 무력진압 한 방에 날아간 것과 같은 꼴이 되어버려 조정이나 관에서 승려들의 강소를 마냥 강경하게 찍어 눌러 진압하기도 어렵게 되었다.
모로미치가 죽은 뒤에도 조정과 황실은 무사들을 동원해서 승려들 강소 잘만 진압했다며 조정은 승려들의 난행을 놔둘 만큼 유약하지 않았다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헤이안 시대가 끝나고 무사들을 중심으로 하는 가마쿠라 막부, 무로마치 막부를 지나 전국시대에 이르기까지도 지사 세력에 의해 빈발하는 강소에 의해 제기되는 요구를 조정이나 막부가 굴복하고 관인을 유배시키거나 하는 경우도 많았다. 막부 정권이라고 마냥 닥치고 찍어 누르기식의 강경 진압만 한 것도 아니고, 종교 권력을 무턱대고 쓸어버리는 것은 무사들에게도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과거나 현재나 국가 공권력 못지 않게 대규모 인원을 규합해 조직화하고 크고 작은 형태의 집단행동을 벌일 수 있는 영향력을 가지고 행사하는 집단이 바로 종교다. 광신적으로 움직이는 종교 집단의 조직적인 저항은 무사들에게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분명히 위협적인 것이었기에[9] 척을 지는 것은 신중할 수밖에 없었고 강경진압만 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무사들이 소유한 영지를 강소를 일으킨 지샤에 기진(기증)하는 식으로 타협을 보려고 했다. 논자에 따라서는 처벌과 회유를 병행하는 '강온 조절'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종교 권력과의 충돌이 조정이나 무사들에게나 적잖은 부담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당시 정치 권력 즉 천황의 조정과 종교 권력 즉 불교계는 서로가 협조하고 협조를 받는 쌍무적 계약관계에 있으며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보다 우선되거나 낮거나 할 수는 없다는 것이 당시의 인식이었다.
1180년 다이라노 기요모리의 아들 다이라노 시게히라가 당시 헤이케에 반대하며 거병한 겐지의 편에 가담한 나라의 고후쿠지 승병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화공을 실시했는데, 하필 불길이 고후쿠지나 도다이지 같은 대찰들을 모조리 태워버렸다.[10] 이것이 바로 일본사에서 말하는 남도 소각(南都焼き討ち)이라는 사건이다. 다이라노 기요모리는 이듬해에 병으로 사망했는데, 헤이케모노가타리에는 기요모리가 죽기 전에 위에 '무(無)'라는 글자가 적힌 불이 붙은 수레를 기요모리의 집 앞으로 끌고 가는 이들이 목격되었고, 무(無)라는 한자의 의미를 묻는 사람에게 그 수레를 끌고 가던 사람은 "나라의 대불을 불태워 없앤 대악인 기요모리를 무간지옥으로 끌고 갈 수레라는 뜻"이라 대답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2.2. 전국시대
전국시대가 되면 대형 사찰은 사실상 종교 번, 또는 실질적인 의미로 다이묘가 되었다.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가 되어 중앙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절이 강력한 군벌 세력이 되어사찰 도시가 발달했다. 수십에서 수백여 말사를 거느린의 절을 수반한 종단이 경제적 이익을 두고 다른 종단의 승병들이나 봉건 영주인 다이묘들과 싸웠다. 반대로 정치적인 목적에 부합하는 다이묘의 세력에 가담하여 힘을 보태기도 하고, 단순히 다이묘에게 돈을 받고 승병을 파견해 싸우는 용병업을 하기도 했다.
전국시대의 승병들은 이들의 만행을 보다 못한 오다 노부나가가 완전히 때려잡을 때까지 당시 일본의 혼란을 더 부추겼다. 세금을 걷는 것도 모자라 주변 민가를 약탈하거나 기근이 들었을 때 재산은 한 푼도 풀지 않고 나몰라라 하는 등, 불교 종단이라고는 믿기 힘든 일들을 자행했다. 이런 행태를 부리는 쪽은 주로 당시 일본의 거대 종파였던 진언종· 천태종· 일련종[11]· 정토종· 정토진종 등 웬만큼 커진 종단에 많이 보였으며, 당시 종단의 교주들은 실질적인 다이묘라고 봐야 했다. 자신들의 세력권 내의 영지에 실질적인 지배권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도 신라~고려 시대 사찰의 재산과 토지가 점점 늘어나자 이를 방비할 목적으로 승려들이 자체적으로 경비대를 조직하기도 했지만, 이 정도로 거대해지지도, 역사에 영향을 끼치지도 않았다. 심지어는 대처승 제도를 이용해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서 절의 경영권을 세습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각 종단들이 정치 세력화됨을 가속시켰다.[12]
실제로 이들은 말이 승려이지 온갖 주지육림을 즐겼고[13][14], 심지어 떠돌이 낭인이나 도적을 절에서 용병으로 고용해 머리만 깎여놓거나 흰 천만 둘러싸놓고 승병이라 칭하는 깡패 집단이었다.[15] 오다 노부나가에게 허구한 날 대들던 엔랴쿠지가 대표적이다. 당시 엔랴쿠지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적대하던 아사쿠라 가문과 밀월 관계를 맺었다. 오다는 엔랴쿠지에 아사쿠라 가문과 관계를 청산하라고 요구하였으나, 엔랴쿠지는 오다를 불적(佛敵: 불교의 적)으로 몰며 저항했다. 결국 참다 못한 오다는 엔랴쿠지를 1571년에 대대적으로 공격했다.
아케치 미츠히데를 비롯한 주요 중신들이 유서 깊은 사찰 엔랴쿠지를 공격하면 민심을 잃기 쉽다고 반대하자, 오다는 "아니, 민중들은 되려 그것을 바라고 있을 것이다."라며 히에이산 근처 사찰 온조지(園城寺)에 포진했다.[16] 물론 엔랴쿠지 측에서도 죽기살기로 덤벼들었지만 이미 뎃포로 중무장하고 전문적인 전투 훈련을 받은 오다 군에게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불바다가 된 승단 쪽에선 여성들도 엄청 나왔고 옷도 챙기지 않고 나오는 승려들도 있었다고 한다.[17] 이를 본 오다는 분노하면서 "말로는 청빈과 경건함을 외치는 혹세의 무리들이 바로 저런 것이다! 죄다 죽여버려라." 하고 명령했다. 그렇게 수천에서 수만여 명이 학살당하자 "저놈들이 말하는 불지옥이 나타난 것뿐"이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땡중들의 횡포에 학을 떼던 민중들이 노부나가의 행동을 환영했다는 기록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엔랴쿠지 토벌에 주저하던 아케치 미츠히데 역시 평소에
仏のうそは方便と云う。侍のうそは武略と云う。士民百姓はかわゆきことなり。
부처의 거짓말은 방편(법문)이라 하고, 사무라이의 거짓말은 무략(전략)이라 한다. 사민 백성들이 가련할 따름이다.
라고 하며, 당시 백성들이 전쟁 뿐만 아니라 승려들에게도 온갖 고초를 겪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훗날
에도 시대 성리학자들 역시 오다 노부나가의 이런 행위를 옹호하였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부처의 거짓말은 방편(법문)이라 하고, 사무라이의 거짓말은 무략(전략)이라 한다. 사민 백성들이 가련할 따름이다.
그래도 당시 기록을 볼 때 엔랴쿠지에 죄다 썩은 자들만 있지는 않아서 오다에게 항복하고 이 기회에 제대로 승려답게 청빈하게 살자고 하던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엔랴쿠지에서 배신자로 몰려 학살당하거나 쫓겨 나왔고 일부는 오다 군이 쳐들어오자 상세하게 길에 대한 정보를 알려 주었다. 처음에 오다는 '더러운 배신자가 아닌가?' 했지만, 그들은 아케치 미츠히데를 통해 '엔랴쿠지가 너무나도 썩어서 결국 오다 님의 말대로 불로 다 태워야 하는데 어쩔 수 없었다'고 강변했다. 그리고는 '마지막 부탁이니 엔랴쿠지 창건 이후 계속 밝혀온 법등 하나만은 남겨서 처음의 뜻을 기리고 다시는 더럽히지 않도록 해달라'며 애원했고 딱 법등 한 개만 남아서 지금도 일본에 있다.
물론 다이묘들에게 불교 종단들은 중요한 정치적 수단이자 돈만 있다면 쉽게 군사력을 얻을 수 있는 수단이었기 때문에, 노부나가를 싫어하던 다른 다이묘들은 맹렬하게 노부나가를 비난했다. 그 중에서도 열렬한 불자이던 다케다 신겐[18]이 경악하여 불타버린 엔랴쿠지를 중건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정토진종[19] 계열의 소헤이인 혼간지 세력은 8세 법주 혼간지 렌뇨의 카리스마와 능력으로 오오미, 호쿠리쿠 일대 세력을 구축하였다. 심지어 카가 국에서 잇코잇키를 일으켜 다이묘를 몰아내기까지 했다. 하지만 렌뇨의 아들인 간쇼지 렌쥰과 혼센지 렌고가 서로 대립하여 내전을 벌인다. 결국 패배한 렌고는 파문 당하기에 이른다. 이와 같은 내분에 다른 거대 종단인 일련종과 롯카쿠 사다요리, 아사쿠라 타카카게 등 주위 다이묘들의 공격으로 야마시나 혼간지가 불타버리는 지경에 이르자 견디지 못한 10세 법주 혼간지 쇼뇨는 본산을 지금의 오사카인 이시미야 혼간지로 옮겼다.
물론 정토진종이 각지에서 탄압 받는 건 달라지지 않아서, 미카와에선 마츠다이라 가신들까지 정토진종에 가세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 생애 최악의 고투 중의 하나인 잇코잇키를 일으키기에 이르렀다.[20] 쇼뇨의 아들인 11세 법주 혼간지 켄뇨는 더욱 더 극렬하게 다이묘들에 대항하는 정책을 펼쳐 각지에서 잇코잇키를 일으켰다. 이 때문에 고생한 다이묘가 우에스기 겐신과 오다 노부나가. 특히 다케다 신겐은 우에스기 겐신을 견제하기 위해 호쿠리쿠 일대의 정토진종 신도들에게 잇코잇키를 사주하였다. 켄뇨는 처음에는 노부나가에 신종하는 자세를 취했으나, 이후 압박이 거세지자 그를 불적으로 규정하여 10년에 걸쳐 항전하였다.
노부나가는 1570년 혼간지 세력과 미요시 3인중이 힘을 합치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이시야마 혼간지를 공격하나 노다 성, 후쿠시마 성에서 대패하고 만다. 여기에 아자이 나가마사, 아사쿠라 요시카게, 롯카쿠 요시카타까지 혼간지 세력에 가세하자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중재로 혼간지 켄뇨와 화의를 맺었다. 사이가 마고이치의 사이가슈는 처음에는 오다군에 가세했으나 이들도 정토진종 신도들이라 이후 혼간지 세력에 가세한다. 이후 노부나가는 이세 나가지마에서 일어난 잇코잇키로 고생하게 된다. 혼간지의 방관 시모츠마 라이단이 일으킨 잇코잇키로 여러 일족과 장수들을 잃는 등 매우 고전하다가, 잇키 세력이 식량이 떨어져 항복하자 모두 총살에 처하고 나가지마 주민들을 학살하였다. 1574년 타카야성 전투에서 오다군이 승리하나 다케다 카츠요리가 침공해오자 결국 다시 화의를 맺는다. 물론 이 화의도 그리 오래가지 않아 1576년 텐노지 전투가 일어났다.
오다군도 피해가 제법 커서[21] 오다 노부나가의 입장에서는 안 그래도 다른 영주들과 전투를 벌일 일도 많은데 별 광신도들이 이러니 애가 탈 노릇이었고 그 와중에 아우 오다 노부오키(織田信興)가 잇코잇키와의 전투 중에 죽고 만다. 분노가 폭발한 노부나가는 광신자들에게 공포를 알려줘야 한다면서 고른 방법이 잇코잇키 승단에 들어간 자들의 3족을 멸하는 방법이었다. 광신도들의 식구나 친척까지 싸그리 죽이는 방법인데, 꽤 효과가 좋아서 자신은 극락에 간다고 나서던 광신도들이 상관도 없는 3족까지 죽게 할 수는 없다면서 겁을 먹거나 포기하고 나가는 경우도 속출했다.
잇코잇키 간부들은 죽은 3족도 극락에 간다고 부랴부랴 이들을 막으려고 했으나 이미 세력이 크게 줄었다. 그러나 이시야마 고보(石山御坊, 지금의 오사카성)를 거점으로 한 혼간지는 키이의 정토진종 문도들인 사이카슈, 주고쿠의 다이묘인 모리 테루모토의 도움을 받아가며 10년동안 오다 군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오다 군이 모리 군의 수군을 격멸하고 혼간지측을 포위하며 전세가 기울어지자 결국 1580년 오기마치 천황의 중재로 혼간지 켄뇨가 귀순하면서 항복에 가까운 형태로 화의를 맺고 이시야마 고보에서 물러나면서 오다 노부나가의 가장 큰 대적이기도 했던 혼간지 세력 간의 이시야마 전투는 마침내 끝이 났다. 이때 혼간지는 오다군에 계속 저항하자는 큰아들 혼간지 코뇨와 귀순하자는 3남 혼간지 쥰뇨가 대립하였고 켄뇨의 아내인 뇨쥰니가 쥰뇨를 후계자로 지지하자 히가시혼간지, 니시혼간지로 분열하고 말았다. 다른 몇몇 잇코잇키는 이에 불복하고 독립하여 싸움을 이어갔지만, 결국 이들도 엔랴쿠지와 마찬가지로 오다 노부나가에게 철저하게 박살나 뿌리가 뽑혔다.
다만 네고로슈(根来衆)로 불렸던 신의진언종 계열[22] 승병집단은 줄을 아주 잘 탔다. 이들은 기존의 나기나타 대신 당대 최신 무기였던 조총을 도입하여 적극적으로 운용한 승병집단이었고, 사이카슈와 함께 기이(紀伊) 지방을 대표하는 정예 용병으로 이름을 날렸다. 처음에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붙었다가 노부나가 사후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사이를 저울질하면서 줄을 탔다. 하지만 오다의 세력을 그대로 물려 받은 히데요시와 적대했다가 대패했고 본사(本寺)인 네고로지까지 털리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23] 결국 세키가하라 전투 시점에서는 도쿠가와에게 완전히 붙어서 히데요시 잔당 숙청에 힘을 빌려줬다. 도쿠가와는 그 보답으로 교토에 네고로슈 승병들이 정착하도록 지원해줬는데, 이렇게 해서 지어진 사찰이 지금의 지샤쿠인(智積院)이다.
도쿠가와를 직접 도왔던 승병들 중 일부는 네고로(根来)를 그대로 성씨로 삼았고 도쿠가와의 측근 무사가 되거나 조슈번의 가신이 되어 무려 막말까지 잘 먹고 잘 살았다.[24] 네고로슈는 타 종파의 승병집단과는 달리 진짜 용병부대에 가까워서 권력자와 맞서기보다는 유리한 세력에 붙어 집단의 안녕을 꾀했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지금도 와카야마현 이와데(岩出)시에 위치한 네고로지(根来寺)에서는 '가쿠반 마츠리'(かくばん祭り)란 이름으로 관련 축제를 정기적으로 열며, 승려들이 전국시대 당시의 승병 복장으로
나중에 메이지 유신 이후로 공가와 사무라이로 나뉘어있던 귀족 계층을 일원화한 화족 계급이 신설되자, 그때까지 존속해있던 중대규모 이상의 종단의 세습 주지들이 규모에 따라 차등하여 귀족 작위를 하사받고, 화족의 일부로 편입되기도 했다.[26]
3. 종파
묘법연화경(법화경)만 극단적으로 추구하는 일련종[27], 나무아미타불만으로 구제를 받을 수 있다는 정토진종( 잇코잇키) 등이 있었다. 이들은 점점 시대가 지나고 초창기에 비해 세력이 커지자 자신감이 생겼는지, 자신들의 종교를 강권하는 성격도 띠었으니 그나마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쪽은 정상적인 불교 집단이라기보다는 민란 세력에 가깝기도 한데다,[28][29] 혼간지 켄뇨나 여러 종단이 전투용으로 신도들을 선동해버려서 민란을 일으킨 정도이므로 광신도라기엔 뭔가 아리송한 면이 있다.일본 불교는 오랜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이런 것도 많아져 일본의 승병을 이슬람 및 유럽 지역의 광신도와 같다고 보기에는 좀 모호한 면이 있다. 엄밀히 따지자면 광신도가 아니라 겉으로 종교를 내세워 특권을 누리고 권세를 휘두르다가 반대파가 생기면 스스로 광신도처럼 보여 내세를 들먹이며 겁을 주는, 완벽히 속세의 권력 맛에 찌들은 자들이었다.
다만, 위에서 보이는 일련종, 일련정종[30] 같은 니치렌(일련)을 교주로 하는 종단이 보이는 호전성은 부패에서만 오는것이 아니었다.
- 묘법연화경(이하 법화경)의 교리 자체의 특이점
일련종의 주된 적은 일본 전체에 이미 굳건하게 뿌리를 내린 다른 불교 종단들이었다. 법화경에 따르면, 당시 기준으로 상당한 충격이었던 이 설법을 석가세존이 얼마 말하지도 않았는데 아라한[34] 대부분이 견디지 못하고 떠나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만, 아라한들이 떠나갔다는 기록은 비유적인 표현이라는 해석이 많다. 대승 불교가 부파 불교로부터 분리되면서 기존 경전의 가르침과도 결별한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는 것.
- 종단의 시초부터 있었던 호전성 문제
- 중국과 한국의 천태종단들은 왜 과격하지 않았는가.
두번째, 천태종은 '묘법연화경 제일'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천태종은 법화경을 중심으로 여러 경전들을 함께 인정했다. 반면 일련종은 '묘법연화경 제일'이라는 호전적인 사상을 따랐다. 다만, 일본에서 천태종이 날뛰었던 것은 부패의 이유가 크다. 이는 센고쿠 시대 당시 일본 불교 전체의 폐단이었다. 일본에서는 대부분 불교종단이 승병을 모으고 다이묘화되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게다가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에 대각국사 의천이 송나라로 유학을 다녀온 뒤 숙종 2년(1097) 해동 천태종을 세웠지만, 조선 세종이 재위 6년(1424)에 숭유억불 정책의 일환으로 불교종파를 통폐합하는 과정에서 맥이 끊겼다. 현대 한국에 존재하는 대한불교천태종은 스스로를 대각국사 의천의 해동 천태종을 계승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의천의 해동 천태종이나 중국의 천태종과 아무런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현대 종파이다. 박정희 정권 시절에 창종하면서 '천태종'이라는, 유서는 깊지만 한국의 불교 역사에선 맥이 끊긴 지 5백 년이 넘은 종단의 이름을 가져왔을 따름이다. 한국의 불교 역사에선 천태종이 있었던 시절보다 없었던 시절이 훨씬 더 길므로 천태종이 눈에 띄는 어떤 일을 할 수가 없었다.
4. 기타
영어로 굳이 번역하자면 warrior monks[39]인데, 이걸로 검색하면 백이면 칠십은 소림사가 나온다.서양에서 비슷한 개념을 찾자면, 기사수도회를[40]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불교 승려는 그리스도교의 수도자에 대응되고, 이 수도자들이 전문적인 기사를 겸한 것이 기사수도회이기 때문이다.
5. 대중 문화
주로 역사를 주제로 한 매체들에서 많이 등장하며, 기본적으로 성직자이기 때문에 서양 판타지물에서의 근접 전투원 클레릭, 팔라딘에 해당되며, 근접 전투원보다는 마법사 혹은 힐러 등 보조전력의 성격이 강하다. 잇코잇키를 모티브로 한 반란군처럼 그려진다.쿠도 카즈야 원작, 이케가미 료이치가 그림을 그린 만화 오다 노부나가에서도 잇코잇키들이 죽창만 들고 우리 종파 아니면 죄다 불적이라며 죽어라 덤벼드는 게 소름끼치게 묘사되기도 한다. 이들은 '나무아미타불, 부처님의 은혜로 낙원이 열리느니 아미타불 아미타불, 불적에게 지옥이 기다리고 있느니~' 만 외치며 죽창만 들고 덤벼든다. 이건 실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린 부분이다.
만화 노부나가에선 매우 강한 승려 한 사람이 양심적으로 엔랴쿠지의 부패를 걱정했고 오다 군이 쳐들어오자 이 법등을 멀리 안전한 곳에 둔 다음, 홀로 오다 군을 베어가며 무쌍을 찍는다. 결국 오다 군이 조총 사격으로 집중하여 그 승려를 죽이지만 그는 죽어가면서도 미소 지으며 쓰러지고, 지금까지 남은 법등이 불을 밝히는 것으로 나온다.
5.1. 임진록(게임)
조선과 일본 모두 등장하는데, 사용 마법은 약간 다르다. 둘 다 공격력 게이지 = 마력이라 적을 너무 공격하다 보면 마력이 부족해 공격도 마법도 불가능해진다.임진록2/조선의 반격에서는 조선군의 힐러로 등장. 초기에는 세 국가의 힐러 중 제일 마력이 적고 치료 마법밖에 없는 전형적인 힐러였으나, 후에 패치로 인해 2번째로 마력이 많은 힐러가 되어 조선 영웅들의 무한 마법난타가 쉬워졌다. 그러나 여전히 사용 마법은 치료 마법 뿐이다.
5.2. 토탈 워: 쇼군2
승병(Warrior Monk) 계열에 해당하는 여러 병종이 존재한다. 역사 고증인지, 상당히 강력한 최종 테크급 병과이며[41] 나기나타와 활, 화승총 등을 사용하고 주 종교를 불교로 유지할 때만 사용 가능하다. 기독교로 개종하는 순간엔 양성 불가는 물론, 보유한 승병마저 모두 사라진다. 우에스기 가문 (이쪽은 고증에 안맞다)과 잇코잇키 (이쪽이 맞다. 대신 팩션 자체가 고증오류)의 경우 승병에 특화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조.DLC인 사무라이의 태동에선 약해졌지만 더 싸고 약점인 갑옷이 보완되어서 오히려 쓰기 좋아졌다. 약해진 것도 다른 징집병, 사병 유닛들이 워낙 허접해서 체감이 안된다. 종교도 불교밖에 없어서 고민할 필요도 없다.
5.3.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 아시아 왕조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 아시아 왕조에서는 중국과 일본의 탐험가로 수도승이 등장하며,[42] 일본과 중국 지형에서 교역소를 지어 동맹이 가능한 중립 종교 단체 중 소림사와 선불교 사원에서 각각 소림사 등패수 과 소헤이를 생산 가능하다. 성능은 둘 다 괜찮은 편. 이외에 고용 가능한 왜구 중에 장님 승병 궁사가 있다. 컨셉에 따르면 두 눈이 안 보이는 대신 도력으로 물체를 맞춘다고 하는데, 사정 거리가 무려 18이나 된다.5.3.1. 소헤이
자세한 내용은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원주민 문서 참고하십시오.5.3.2. 콘시 야마부시 승병
자세한 내용은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보병 문서 참고하십시오.5.3.3. 잇코잇키[43]
탐험가, 대전사와 같은 일본의 영웅 유닛. 중국 소림사 승려와도 닮았지만 활을 사용하는 원거리 공격이다.
체력이 얼마 남지 않은 적에게 크리티컬을 주는 패시브가 있고, 다른 수도승처럼 감시자를 기절시킨다. 사쿠마 키치로처럼 연막탄을 터뜨려 홈 시티로 귀환하는 능력을 갖고 있고, 건물에게 폭탄을 던지는 특수 능력도 존재한다. 특이하게도 일본의 영웅 유닛 하면 바로 생각날 법한 다이묘나 쇼군 같은 유닛들도 이 게임 내에 다 존재하는데, 정작 영웅 유닛은 이 이코 이키다. 다이묘와 쇼군은 홈시티 카드, 불가사의 막부와 연계되어만 생산할 수 있는 일반 유닛으로 존재한다.[44] 전작인 미쏠로지의 자알, 또는 중국 장군과 닮은 경우.
사실 이들은 열성 신도들이지 승병은 아니다.
[1]
남도는
나라(奈良), 북령은
히에이 산(比叡山)을 의미하며, 전자에는 고후쿠지(興福寺)가, 후자에는
엔랴쿠지가 있다. 고후쿠지는
후지와라 가문의 절이기도 했으며 부처를 악귀로부터 지켜주는 후지와라 가문의 조상신을 모신 카스가 신사(春日神社)와 사실상 합쳐진 상태였다. 신이 불교에 귀의해 불교의 신중이 된 그 신은 대명신(大明神)이라 불렸다. 거꾸로 신의 모습으로 부처가 세상에 현현했다는 믿음도 널리 퍼졌는데, 이 경우는 권현(權現)이라고 불렸다. 이렇게 신토의 토속신이 불교의 신중(神衆), 호법신으로 편입되며 두 종교가 어느 정도 합쳐지는 현상을 신불습합이라고 부르는데, 불교가 전파된 세계 여러 나라에서 비슷한 일들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무불습합, 중국에서는 도불습합이 일어났다.
[2]
카모가와 강이 수시로 범람하여 지지대였던 기존 교토의 서쪽 절반을 완전히 황무지로 만든 일도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새로 쌓은 교토의 성벽은 원래 교토의 동쪽 지역이다. 그래서 긴 직사각형 모양이다.
[3]
현재도 세속의 정치 권력이 제일 진압하기 까다로운 것이 종교 권력이 그들의 종교적 위치를 이용해 내세우는 시위다.
[4]
사찰 소속의 예속민
[5]
죽기 직전에 출가하는 임종 출가, 매일 염불을 외우는 일과 염불, 죽은 이들을 위해 재를 지내는 역수와 같은 행위들이었다. 국가 지도자인 천황이 이러한 행태를 벌이니 민간에도 이게 퍼져서 10세기 후반부터는 귀족과 도시민들도 천황을 따라 일과 염불을 했다.
[6]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후지와라씨에게 해당되는 것이었기에 조정의 실권자가 후지와라씨가 아니면 안 통하기도 했다. 무로마치 시대의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는 자신은 미나모토씨라는 이유로 이를 무시하고 조정 행사를 강행하며 승병들을 굴복시켰다.
[7]
'하치만타로'라 불리며 무사들의 신망을 얻고 있던
미나모토노 요시이에의 손아랫동생, 즉
미나모토노 요시미쓰(신라사부로)의 손윗형이다. 가모 신사에서 원복을 올렸기에 '가모지로'라고 불렸다.
[8]
삼장법사가 번역하고 대승 불교에서 최고로 중요하게 여기는 경전 중 하나이다.
[9]
같은 교리로 한데 뭉쳐 있다는 소속감은 물론, 교리대로 지들이 살든 죽든 "살아서 이기면 좋고 죽어도 극락(천당) 간다"며 눈 뒤집혀 너 죽고 나 죽자며 덤비는 인간들인데 그걸 보고 어떤 식으로든 충격을 받지 않을 인간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동양뿐 아니라 서양에서도
유대인들의 로마 제국에 대한 반란이나 중세
십자군 원정 및 이슬람의 암살자 집단으로 알려진
아사신파가 그랬고, 현대에도
탈레반이나
다에쉬,
신천지 같은 사이비들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10]
시게히라도 원래부터 이러려고 한 것은 아니고 한밤중에 휘하 병사에게 "불을 밝히라"고 말한 것을 병사들이 "불을 놓으라"는 말로 잘못 알아들어서 화공을 가했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전해지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헤이케의 군대는 분명 화공을 펼쳤으나, 대찰들까지 죄다 불태워 버릴 의도는 없었던 모양이다. 헤이케 군은 공세를 유리하게 끌기 위해 불을 질렀을 뿐 절들을 없애서 정치적으로 큰 문제를 야기할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헤이케가 몰락하고 난 뒤에 시게히라는 나라로 호송되어 그곳에서 처형되었다.
[11]
니치렌슈.
가마쿠라 시대의 승려인
니치렌을 종조로 하는
종파. 후술하겠지만 매우 과격한
법화경 지상주의를 내세웠다.
[12]
이 시기에 이런 식으로 일본 전국시대의 대영주가 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혼간지 켄뇨다. 그래도 혼간지 켄뇨는 꽤나 개념인이라서 영지의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고, 흉년이 들면 세금을 면제해주고 식량을 무료로 나누어주던
명군이었지만, 그도 결국은
공경의 딸과 혼인하여 자식들을 두고 본거지인
혼간지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의 다이묘로 행세하는 등, 당시의 승병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13]
노부나가는 이들을 비난하는 글에서 "그들은 온갖 새와 물고기의 더러운 고기를 먹는다."라고 언급했다.
[14]
일본은 675년 덴무 천황이 육식을 금지한 이후 메이지 유신 때까지 일반적으로 육식을 꺼려서 잘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된 것도 당연히 불교의 영향이었는데 정적 불교의 중들이 고기를 먹고 술을 마셨으니 노부나가로서도 기가 찰 노릇이었을 것이다.
[15]
상황이 이러하니 당시 승려들 중에서는
불경을 읽지도 못하고 글을 쓸 줄도 모르는 무식한 자들이 매우 많았다고 전한다.
[16]
온조지는 엔랴쿠지 내부 파벌 싸움 끝에 떨어져 나온 사찰로 엔랴쿠지와 수백 년 이상 치고 박고 싸웠을 정도로 사이가 극도로 험악했다. 당연하게도 오다를 편들었고 그래서 박살나지 않았다.
[17]
이것이 오다 노부나가의 분노를 끌어올린 가장 큰 이유이다. 당시 일본의 관습에서 성역으로 구별된 곳은 여인이 들어갈 수 없는
여인금제(女人禁制)였다. 하물며 왕성진호(王城鎮護)라 불리며 영산으로 숭상받던 히에이산의 엔랴쿠지에서 여인들이 나왔으니 이 꼴이 어떻게 보였을지 알 만하다.
[18]
노부나가와 친했던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는 이러한 신겐의 불교 존숭을 두고 "그냥 다른 나라를 차지하기 위한 정치적 수단일 뿐"이라고 냉소했다. 물론 이 사람이
가톨릭 사제라는 점은 어느 정도 감안하고 볼 필요가 있다.
[19]
또는
에도 막부에게 강제로 개명되어 지금까지 잘 알려진 일향종이라고도 불린다. 일본어로는 잇코슈.
잇코잇키, 즉 일향일규의 일향이 일향종에서 따온 것이다. 일규는 평범한 단어이며, 의미는 단결 등을 말하는 것이다.
[20]
이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책사인
혼다 마사노부 등 마츠다이라 가문 중진들 여럿까지 잇코잇키에 가세한 것으로 유명하다.
[21]
이들은 오다군을 주로 비가 오는 날에 공격하여 총포를 쏘지 못하게 했다.
[22]
고야산으로 대표되는 '고의(古儀) 진언종'과 의식과 교리 등이 약간 달라서 붙은 종단명으로, '흥교대사'(興教大師)라고도 불리는 가쿠반(覚鑁)이 창종했다.
[23]
이 사건의 여파로 신의진언종 계열 종단은 진언종지산파(智山派)와 풍산파(豊山派)로 분리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24]
지금도 네고로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와카야마현과
야마구치현을 중심으로 존재한다. 물론 모두 승려인 것은 아니며 다른 직업을 가진 일반인들이 더 많다.
[25]
사실 이런 건 일본에서는 전통 무술의 일환으로 취급하며, 중요 무형 문화재로 보호받고 있다.
[26]
이런 역사적 상황 때문에, 오늘날에도
일본의
승려들은 대처승이 많으며,
이슬람,
힌두교,
기독교
정교회 및 한국의 일부
개신교 교회들이 그러는 것처럼
절 자체를 세습하는 경우도 많다.
[27]
법화경을 소의경전으로 삼는다는 점에서는 천태종과 입장이 비슷하지만 차이가 극명하다. 천태종은 법화경을 가장 중시하긴 하지만, 다른 경전과 선종의 수행법도
석가모니의 가르침에 근거한 것이라 하여 인정하였다. 그러나 일련종은 오직 법화경만이 석가모니의 참된 가르침이고 다른 것들은 무의마하다고 주장하여 당시 일본 불교에도 널리 퍼진 염불, 선(禪), 진언 등과 기복적 신앙을 깡그리 부정한다. 더 쉽게 말하면 법화경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최소 극락행, 성실히 불도에 정진했다면 성불. 하지만 법화경을 믿지 않는 다른 종파들은 모두 지옥.
[28]
일련종은 이전경 다 믿지 말고 법화경만 믿어야 한다는 워낙 과격한 주장 때문에 지배층에게는 당연히 인정 받지 못했고, 정토진종 역시 센고쿠 시대 때 자주 잇키를 일으켜 불온 세력으로 낙인 찍힌데다, 정토종을 후원한 에도 막부에게 일향종이라 강제 개명당하기도 하는 등, 여러모로 인정받지 못했으니
민란 세력이라고 불려도 별 수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세력이 너무 커져서 다이묘들은 물론 쇼군을 위시한 중앙에서도 별 수 없이 일단 불교 종단이라고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전부터 절들을 짓고 조직을 확립해서 이미 어엿한 종단으로 발족했고. 현재 일련종의 일본 내 인식은 호전성 짙은 불교 종단 정도.
[29]
정토진종은 에도 막부 시대 때 강제로 일향종이라는 이름을 써야 했으나, 원조인 시종일향종과의는 접촉점은 없고, 사실은 전혀 다른 종단이다. 애초에 종단을 창종한 시조부터가 다르다. 시종일향종은 잇코 준쇼, 정토진종은 호넨.
[30]
일련종의 분파.
[31]
동아시아 불교계의 경전 분류 과정에서 나온 해석으로, 역사적 사실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법화경을 비롯한 대승 불교 경전들은 석가세존의 입적 이후 수백 년 뒤에 만들어졌다는 것이 정설이다.
[32]
생명평등 주장의 연장선.
[33]
다만 이건 이전의 가르침이 모두 거짓이라는 뜻이 아니라, 중생들의 이해 정도에 따라 완급을 조절했다는 의미이다. 법화경이 석가세존의 본래 의도를 있는 그대로 전달한 경전이라고 강조하기 위해 이렇게 표현한 것.
[34]
나한이라고도 한다. 붓다의 제자들 중 최고 단계의 깨달음을 성취한 성자. 초기 불교와 부파 불교의 목표가 바로 아라한이 되는 것이었다.
[35]
사실 헤이안 시대나 센고쿠 시대나 상관없이 다이묘들에게 법화경의 내용에서 오는 자극성은 그다지 중요치 않았다. 오히려 모든 생명이 "평등"하다는 것은 자신도 쇼군이 될 수 있다는 구실이 되기도 하고. 문제는 다른 경에서도 생명평등의 주장이 있기에 법화경만의 큰 매력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36]
사실상 니치렌이 살아 있었을 때부터 일련종은 세워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조직적이지가 않아서 문제지.
[37]
석가모니를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38]
도가와 다름에 유의. 도가는 초기
노자가 창시하여
장자가 완성한 "철학"에 가깝다.
[39]
소헤이 항목에 있는 사진에서는 Fighting Monk라고 기재되어 있는 것도 있다.
[40]
튜튼 기사단,
성전 기사단,
구호 기사단 등등 흔히 생각하는 '중세 기사단'은 모두 기사수도회다.
[41]
상당히가 아니라 정신 나간 스텟을 보유하고 있다. 몰락의 서양 해병대도 그냥 쳐바른다. 유일한 약점이라면 갑옷 수치가 너무 낮아서 원거리 유닛한테 덤비면 좀 깨지고 들어간다는 것이지만, 갑옷 업그레이드를 해주고 가면 그마저도 보완된다. 물론 갑옷 테크를 끝까지 탈 수 있는 지역이 상당히 적고, 그에 들어가는 비용도 무지막지하지만.
[42]
인도는 힌두교의
브라만이라 논외.
[43]
번역자의 무지함으로 인해 '이코 이키'로 잘못 번역되었다.
[44]
대전사와 마찬가지로 오라빨을 주긴 하지만 부활이 안되는 일반 유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