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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18-10-09 13:15:20

성경 탈출기

1. 성경 탈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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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나크의 율법서(토라)
창세기 탈출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탈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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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별 명칭 히브리어 סֵפֶר שְׁמוֹת(세페르 쉐모트)/ שמות (쉐모트)[1]
그리스어 Έξοδος (éxodos)
영어, 라틴어 Exodus
한자 出埃及記( 개신교) / 脫出記( 가톨릭)
기본 정보 저자 모세
기록 연대 B.C 1500년경
분량 40장
주요 인물 모세, 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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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레위기

1. 성경 탈출기2. 개요3. 제목 번역 문제4. 줄거리5. 해석6. 역사적·신학적 연구
6.1. 연구의 이유6.2.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 문제6.3.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문화적 연결성6.4. 탈출기의 시기 문제
6.4.1. 일반론6.4.2. 전기설과 후기설
6.5. 10가지 재앙 문제
6.5.1. 과학적 해석6.5.2. 신학적 해석
6.6. 이집트의 노예제 문제6.7. 현재 학계의 중론
7. 관련 문서

2. 개요

'이제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내 계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나의 소유가 될 것이다. 온 세상이 나의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나에게 사제들의 나라가 되고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이것이 네가 이스라엘인들에게 알려 줄 말이다.”
탈출기 19,5-6(가톨릭 새번역성경)
정경 구약 성경의 2번째 권이다. 창세기의 다음 부분이며, 이후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로 이어진다. 이상의 다섯 기록은 전통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 모세가 저술하였다고 알려져 있으므로 "모세오경"으로 부른다.

원제가 '탈출'을 의미하기 때문에 한국 천주교에서는 탈출기라는 명칭을 쓴다. 2005년 이전에는 출애급기[2]라고 썼으나, 2005년에 개정된 주교회의판 성경에는 영어 성경상 명칭인 Exodus를 그대로 번역한 탈출기를 사용하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탈출하는 과정, 곧 창세기 마지막에 이집트에 정착한 유대인들이 노예가 되었다가 탈출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어서 출(出)애굽이 되었다. 즉, 이집트 탈출기다. 때문에 이 내용은 쿠란에서도 나온다.[3]

3. 제목 번역 문제

한국 천주교에서는 구약 성경 제2권(Liber Exodi)을 중국식 명칭인 ‘出埃及記’를 따라 ‘출애급기’라고 불러왔다. 그래서 한국 천주교 최초(1959년)의 구약성경인 선종완[4] 라우렌시오 신부의 번역본에도 ‘출애급기’로 되어 있었다. 반면에 한국의 개신교에서는 초창기부터 ‘출애굽기’라고 일컬어 왔다. 그 유래를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성경 속의 지명 ‘이집트’를 ‘애굽’이라고 부른 데서 시작된 듯하다. 1977년 공동번역 구약이 출판되면서 어찌된 셈인지 이 구약 제2권의 이름이 개신교 측 용어인 ‘출애굽기’로 붙여졌고 1977년부터 무려 40년간 그렇게 불러왔다. 그러다가 1992년부터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에서 구약성경을 번역하기 시작해서 2005년 신구약 새 번역 성경이 출판되었는데,(이 바람에 주로 한국 천주교인들만이 열심히 구입하던 대한성서공회의 공동번역 성서는 그만 거의 팔리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다만 완전 절판 수준은 아님.) 이 천주교회의 새 번역 성경에는 ‘출애굽기’를 ‘탈출기’로 이름을 바꿔 놓았다.

4. 줄거리

탈출기의 내용은 창세기 끝부분에서 이어진다. 야곱의 아들들은 이집트 왕국에서 권력을 잡고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형제 요셉의 보호 아래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나일 강 동쪽 삼각주 지방의 여러 도시에서 번영하며 만족스러운 생활을 했고 가나안의 자기네 고향 땅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이후 43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열두 형제의 자손들과 그들의 직계가족은 하느님이 약속한 대로 커다란 민족으로 성장했다. 이집트 사람들은 그들을 히브리 사람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어 파라오(바로왕)[5]가 여러 명 바뀌었고 마침내 '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파라오가 등극하게 되었다. 히브리인들이 이집트를 배반하고 이집트의 적과 내통하지 않을까 우려한 새 파라오는 히브리인들을 노예로 삼아 비돔과 라암셋의 왕도를 건설하는 데에 강제로 집단동원했다. 이 위험한 이민노동자 집단의 폭발적인 인구 증가를 두려워했던 파라오는 히브리인 신생아 남자 아기를 모두 나일 강에 빠뜨려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갈대 바구니에 담겨 강물 위를 떠가던 레위 지파의 갓난아기가 파라오의 공주들 중 한 명에게 발견되어 양자로 입양되었다. 모세[6]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 아기는 이집트 궁전에서 성장했다. 여러 해가 지나 어른이 된 모세는 공사장의 한 이집트인 감독이 히브리인 노예를 매질하는 것을 보고 그를 죽인 다음 그 시체를 모래 속에 감추었다. 그러나 나중에 두 히브리 사람이 싸우는것을 막으려 하자 그중 하나가"너가 무엇을 어찌하려고? 우리도 죽이려 하는가?"라는 말을 하자 탄로났음을 알고 자기 행동의 결과를 두려워한 모세는 미디안 땅의 광야로 도망갔다.

이리저리 떠돌며 유목민 생활을 하던 모세는[7] 호렙 산 근처에서 히브리인들을 구출하라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고 형 아론과 함께 이집트로 돌아가서 파라오에게 민족의 자유를 요구한다. 파라오는 당연히 거부하고 히브리인 노예들의 고통을 더욱 가중시키는 조치로 대응했다. 그리하여 하느님은 '파라오가 명령을 계속 거부할 경우 일련의 참혹한 재앙을 내려 이집트를 위협하라'라고 모세에게 명했다. 하느님이 모세와 히브리 사람들을 위해 이집트에 준 재앙은, 이집트의 여러 신들로 인한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다. 파라오는 하느님의 경고에 굽히지 않았으며[8] 나일 강 물은 피로 변했다. 다음에는 개구리와 이, 파리떼가 이집트 전역을 뒤덮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질병이 이집트의 가축들을 죽였다. 독종이 번져 사람과 나머지 살아 있는 동물들의 피부가 곪았다. 하늘에서 우박이 떨어져 농작물을 파괴했다. 그래도 파라오는 여전히 굽히기를 거부했다. 그러자 메뚜기와 암흑의 재앙이 이집트를 덮쳤으며 끝으로 나일 강 유역의 모든 땅에 사는 사람과 동물의 초태생(처음 태어난 이)이 죽는 재앙이 일어났다.

이스라엘인들의 초태생을 보호하기 위해서 주님 모세 아론에게 지시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양을 잡아 특별한 희생제물로 준비하도록 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는 모든 집의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발라 이집트인들의 초태생을 모두 죽이는 밤에 재앙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넘어가도록 했다.[9] 하느님은 또한 이스라엘인들이 서둘러 이집트를 떠나도록 하기 위해서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식량으로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파스카(무교절, 無酵節)의 기원) 파라오는 자기 아들을 포함한 이집트인들의 초태생을 살해하는 10번째 재앙의 참혹한 피해를 똑똑히 보았을 때 마침내 굽히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축떼를 데리고 떠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스라엘 군중은 동부 삼각주의 여러 도시를 출발하여 시나이 광야지대로 향했다. 그러나 나중에 자신의 결정을 후회한 파라오가 정예 전차부대를 동원하여 도망치는 이스라엘인들을 뒤쫓아왔을 때 홍해[10]가 갈라져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다 밑바닥의 마른 땅을 통과하여 시나이에 도착했다. 거대한 절벽의 계곡처럼 갈라져 있던 바닷물은 이스라엘인들이 모두 건넌 직후 합쳐지면서 추격하던 이집트 사람들을 집어삼켰다.

여기까지가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출애굽기의 내용이다. 뒤에는 모세 십계명을 받는 장면과 금송아지 숭배사건, 성막을 만드는 것으로 끝이 난다.

5. 해석

전반부에서는 노예로 얻어 맞고 살지만 화려하고 풍요로운 이집트 지역을 떠나서, 팔레스타인근처 광야 지역을 배경으로 힘겹게 사는 내용이 주로 나오며, 이에 따른 갈등이 번번히 등장한다. 잘 먹고사는 노예가 될 것이냐 가난한 자유민이 될 것인가 하는 문제랄까.

이집트 지역에 10가지 재앙이 내리는 장면[11], 바다( 홍해)를 쩍하고 가르는 장면이나[12] 고기를 달라 하니 엄청난 메추라기(원문은 자고새) 떼가 나타나 포식하게 되는 장면, 물이 부족하자 바위를 때려 부수고 샘이 나온다든가, 십계명을 받기 위해 뇌우가 쏟아지는 산으로 모세가 올라가는 장면이 나오는 등 묘사적으로 볼거리가 풍부하다.

하지만 20장 후로는 성전 건설이나 제사장 옷에 대한 규격이나 유대인의 법에 관한 내용만 나와서, 일종의 법전이 되며 때문에 기독교도들도 읽기 매우 힘들어하는 부분이 된다. 이는 레위기까지 이어지고, 민수기 신명기에도 율법에 대한 내용이 재등장한다. 성경 통독을 한 번쯤 결심한 사람에게 첫 번째이자 최대 고비. 흔히들 이 부분에서 그만두거나, 바로 요한계시록을 읽는다.[13] 그러나 출애굽기 이후에 나오는 율법에 관한 내용들은 이후의 구약들과 신약성경을 읽는데 분명 도움이 된다. 사사기에서 기드온의 에봇과 드라빔[14] 문제라던지, 복음서에서 회막이 갈라진 것의 함의, 간음하다 잡힌 여인의 처벌 문제에 대한 예수의 태도, 슬로보핫 여인들의 상속 과정에 터잡은 예수의 족보에 대한 해석론 등 중요한 떡밥마다 구약 시대의 관념이 신약의 기록 당시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압제자 파라오로부터 자유를 찾아 떠나는 내용이라는 점, 민주주의 사회에 건전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현대인들에게 거부감이 없는 데다가 내용 자체가 상당히 드라마틱하며 몰입감을 주어 서구권에선 출애굽기를 주제로 한 수많은 영화 ( 십계 등)와 애니메이션이 제작되었다.

6. 역사적·신학적 연구

6.1. 연구의 이유

근대 역사학과 고고학의 발달 이후 이스라엘의 역사와 성경의 내용에 대한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어디까지나 종교적 경전이며 초현실적인 과장과 기적들로 가득한 탈출기를 가지고 뭔 역사 연구를 다 하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 시기 근동 문서는 죄다 이렇다. 이집트, 히타이트,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등 어느 나라를 보든 역사서술법은 구약의 서술법과 비슷하다. 딱히 출애굽기만의 문제가 아니다.

예를 들어 이집트 기록 중에 유명한 투트모스 3세의 카르나크 비문을 보면 "아문 신이 파라오의 군대의 앞에 서서 팔을 뻗어 그들을 돕는다" 류의 표현이 수두룩하게 나온다. 당시 이 지역 사료들 자체가 반쯤은 초현실적으로 쓰여져 있기에, 다른 기록들도 마찬가지지지만 출애굽기 역시 학계에서 엄연한 고대 사료로 인정받는다. 한국의 경우에는 단군왕검신화를 들 수 있다. 곰과 호랑이가 사람이 되었다고 하지만 역사학계에서나 문학적으로 해석해보면 곰부족과 호랑이부족으로 해석한다. 주몽신화라든지 박혁거세신화라든지 자신들의 위엄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고의적으로 과장하는 것은 당시에는 동서양을 가리지 않았다.

고대 세계에서 역사를 기록했던 저자들에게는 우리에게 익숙한 '객관적인 사실을 기록해 후대에 전한다'는 관념 자체가 없었다. 고대 근동에서 역사서술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왕이나 신의 위업을 한껏 과장하여 기록하는 것이었다. 역사 기록 자체가 종교적 텍스트를 겸했다는 뜻이다. 이러한 목적에서 벗어나서 우리가 생각하는 역사서의 개념이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훨씬 후대인 헤로도토스, 투키디데스부터다. 하지만 이조차도 현대적 관점의 역사서는 아니다.

이 대목에서 그럼 박씨전도 사료냐고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으나, 박씨전은 저자가 역사적 사실은 사실대로 인정하는 상태에서 엄연히 소설로 쓴 것이고, 출애굽기 같은 문서는 후대 이스라엘인에게 선조들의 역사로 알리기 위한 의도로 쓰여졌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정말 진지하게 역사적 목적으로 썼다는 말. 게다가 그 '소설' 박씨전 또한 병자호란이라는 엄연히 역사적으로 실제했던 사건을 당대 조선인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증언하고 있는, 사상사(思想史)·문화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사료다. 하물며 출애굽기는 소설을 쓰겠다는 목적으로 쓰여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상, 문화사를 넘어서는 부분에까지 자료로 쓸 수가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오늘날의 우리가 출애굽기를 당대인처럼 받아들여야 한단 논리로 이어지지 않는다. 더 객관적이고 중립적이며 치밀한 연구가 필요한 것은 옳다. 그러나 박씨전과 출애굽기는 엄연히 다르다. '신화나 소설이나'라는 생각도 있을 수 있겠으나, 민족집단의 기억이 전승되어 온 출애굽기와 박씨전은 동급의 비교 대상이 아니다.

그리고 이집트의 역사조차도 '모두' 유물이나 유적으로 교차 검증된 것은 아니다. 팔레스타인 일대의 유물은 이집트 일대의 유물과는 보존 상황 자체가 다르다. 그리고 애초에 '고대사'는 자료가 택도 없이 부족한 영역이다. 고대에서 현대까지 세월의 간극은 많은 사료들을 소실시킨 것 못지 않게, 살아남은 사료들도 변형시켰다. 당연히 우리가 보는 원사료들은 다 사본들이고, 사본들은 필사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오류가 발생하게 된다. 특히 숫자와 관련된 것들은 가장 취약한 정보들이라 필사 과정에서 무수하게 변형되었다. 우리가 교양 수준에서 아는 부분만 교차검증이 되서 대중들에게 알려진 거지, 그보다 훨씬 많은 영역들은 아직도 논란거리다. 그 논란거리 중에 하나가 바로 출애굽기이고. 그러니 어디서 책 한 권만 읽고 "출애굽기는 문자 그대로 사실!" or "출애굽기 그거 다 쌩구라 아님?" 식의 주장은 펼치지 말도록 하자.

고대 로마나 중국 같이 잘나가고 대제국을 이뤘던 국가들에 대한 자료는 '그나마' 많이 남아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역시 부족한 부분이 많다. 이집트 역시 한때 잘나갔던 국가이니만큼 그 시대 그 지역치고는 자료가 좀 남아있는 편이지만 많은 제한된 사료와 여러 가지 가능한 증거들을 총동원하여 '추측'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추측의 영역은 학계에서 갑론을박이 오가고 학자마다 의견이 다르다. 출애굽기 또한 그런 영역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단락에서 말하는 건 신화적인 묘사를 이유로 그 나머지 부분에 대한 신뢰도를 모두 부정할 수는 없다. 다만, 수천 년 전에 문명이 시작된 이집트 기록에 비하면, 출애굽기는 그 기록의 분량과 검증에서 어마어마하게 뒤쳐질 수밖에 없다.

6.2.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 문제

탈출기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를 탈출해서 가나안 지역으로 이동했다는 이야기다. 즉, 탈출기는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이 '이스라엘 민족'은 과연 언제 형성된 것일까? 성경 외의 자료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최초로 언급되는 문헌은 기원전 13세기가 끝나기 직전 람세스 2세의 아들인 파라오 메르넵타가 가나안을 원정한 사실을 기록한 비석이다. 이 비석의 내용에 따르면 이집트 원정군이 가나안에 침공하여 이스라엘이라고 불린 민족을 대량 학살했고 파라오는 "이스라엘 민족의 후예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공언하였다.
가나안은 약탈당하고 각종 재난을 맞이하였다.
아스겔론(Ashkelon)은 정복되었다.
게제르(Gezer)는 함락되었다.
야노암(Yanoam)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황폐해졌다. 이스라엘의 후예는 이제 없다.

이 자랑에는 과장이 섞여 있겠지만 그 시기에 이스라엘이라고 불린 특정 민족집단이 이미 가나안에 살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문제는 이들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언제 이스라엘 민족이 되었냐 하는 것이다. 정말 이집트에서 이주해온 집단인가? 아니면 가나안 토착 민족인가? 그것도 아니면 여러 집단이 섞인 것인가?

탈출기 속에는 여러 시대의 역사적, 지리적 사실들이 혼재되어 있기 때문에 이집트 탈출이 벌어졌을 단 하나의 특정한 시대를 가려내기가 어렵다. 고대에는 이집트로 가는 이민의 물결이 주기적으로 끝없이 계속되었다. 중기 청동기 시대에 힉소스 족이 삼각주 지역을 지배한 구체적인 사실도 있다. 또한 람세스 시대의 이집트와 관련된 몇 가지 요소를 연상시키는 내용들이 성경에 등장하고[15], 이러한 내용들이 출애굽기와 일정한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집트 역사의 특정한 시대에 출애굽이 일어났다고까지 콕 찍어 주는 것은 아니다. 자세한 내용은 하술할 '전기설과 후기설' 참고.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탈출기에 묘사된 기본적인 상황, 즉 야곱의 가족들이 정착한 것처럼 이민 집단이 가나안에서 이집트로 내려와 이집트 동쪽 국경의 삼각주 지역에 정착한 현상은 고고학적인 발견과 역사기록 문서에 의해서 충분히 확인된다. 초기 역사시대 이후 고대세계에서, 가뭄과 기근 혹은 전쟁으로 생활이 견디기 어렵거나 힘들어질 때마다 가나안인들에게 이집트는 안전한 피난처로 생각되었다. 만만한 게 이집트[16] 고고학 연구 결과 청동기 시대에 가나안 남부지방에서 이집트 삼각주 지역으로 이주한 셈족은 여러 차례에 걸쳐서 대규모 집단을 이루어 이동했음이 밝혀졌으며, 그 집단마다 이주동기 역시 다양했고 이주한 뒤 성공한 정도에도 큰 차이가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농사지을 땅이 없어서 이집트 공공 건축사업의 노동자로 고용되었다. 문제는 이 셈족이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느냐 하는 것이다.

이집트학 학자인 도널드 레드퍼드는 힉소스 족이 이집트를 점령한 사실과 그들이 삼각주에서 무력에 의해서 추방된 대규모 사건들의 반향이 여러 세기 동안 전승되어 가나안 주민들의 공통적인 기억의 핵심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집트에 정착하여 삼각주의 지배권을 장악한 후 나중에 쫓겨나 고향땅으로 되돌아온 이 가나안 출신 식민 통치자들에 관한 각종 이야기가, 후기 청동기 시대에 이집트가 가나안에 대한 통치의 고삐를 더욱 조일 당시 가나안인들의 단결과 저항의 구심점 역할을 했을 수 있다. "지금은 비록 압제받지만 우리도 한땐 잘 나갔단다 아들아"

이러한 이스라엘의 민족적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민족적 정복설[17], 평화이주설[18], 농민 반란설[19] 등이 제기되었는데, 최근에는 평화이주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후기 청동기시대(기원전 1500~1200년)와 초기 철기시대(기원전 1200~1000년)에 걸쳐 있다고 추정되는 고대 가나안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면, 팔레스타인 북쪽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 향하는 산간 지대에서 고고학적 출토물이 나왔음이 확인된다. 고고학자들은 이 중앙 산간 지대에, 기원전 1250년 이후 갑자기 생긴, 성곽이 없는 몇 백 개의 작은 마을들이 있었음을 밝혀냈다. 팔레스타인의 초기 청동기 시대에 중앙 산간 지대의 인구는 초기 청동기시대에는 1만 2,000명, 12세기는 5만 5,000명, 200년 후에는 7만 5,000명이나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인구가 대폭 늘어났던 현상을 해당 지역의 작은 유목민들이 정착한 것으로만 설명하기는 어려우며, 결국 12세기경에 가나안 외부로부터 대규모 이주가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이들 중 일부가 이집트에서 나온 노예들과 연합하여 이스라엘을 만들었다고 보인다.

즉 가나안의 도시 군주 국가들에게서 억압받고 도망 나온 다양한 하층 민중들이 팔레스타인의 중앙산악지대에 거주할 때, 사회적 하층민에 있던 '하비루(Habiru)'[20]들이 이집트에서 노예로부터 탈출해 해방하여 나왔고, 광야와 가나안 남부의 사막지역에서 그들의 신으로 야훼를 선택한 후에 이 두 집단이 평화적인 방법으로 대략 1,200년경 가나안에 정착했다는 가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6.3.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문화적 연결성

유대인들이 정말 이집트 치하에서 노예 생활을 했다면, 유대인들의 문화에 자연히 이집트적 경향이 강하게 발견되어야 하는데, 이것이 어느 정도인지의 여부가 탈출 사건의 진실성을 말하는데 근거로 작용할 수 있다.[21]

일단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문화적 영향을 (강하냐 약하냐와는 별개로) 받았는가 받았지 않았는가하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확실하게 "받았다"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유대교에서 창조주와 인간이 맺은 계약의 증거로 여기는 할례를 보자. 헤로도토스는 이집트의 풍속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 이집트인의 풍속을 배운 자는 예외로 하고 — 성기를 타고난 그대로 두는데, 이집트인은 할례를 한다.
(중략)
페니키아인 및 팔레스티나의 시리아인은 그 풍속을 이집트인으로부터 배웠음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고, 테르모돈 및 파르테니오스 두 강변에 사는 시리아인 및 그들과 인접해 사는 마크로네스인은 최근에 이르러서야 이것을 콜키아인으로부터 배웠다고 말하고 있다. 요컨대 세계에서 할례를 행하는 것은 위의 민족들뿐이고, 게다가 그 방법도 명백히 이집트와 똑같다.

<역사> 2권 中

즉 헤로도토스는 시리아와 페니키아 사람들의 할례 풍습을 명백히 이집트에서 찾고 있다. 또한 이스라엘과 페니키아는 상당히 많은 문화적 요소를 공유하는 이웃이기도 하며, 지리적으로는 이스라엘을 시리아 지역과 세트로 묶기도 한다. 굳이 이런 민족적 근연 관계를 말하지 않더라도, 근동 지방의 할례 풍습이 이집트에서 나왔음은 (적어도 헤로도토스의 주장을 신뢰한다면) 부정할 수 없다.[22] 또한 일부 성 윤리 역시도 이집트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성역 내에서는 여자와 관계를 갖지 못하며, 또한 여자와 관계한 뒤에 목욕을 하지 않은 자는 성역에 들어올 수 없다는 등의 계율을 정한 것도 이집트인이 처음이다. 왜냐하면 이집트인과 그리스인 이외의 민족은 거의 모두 성역 내에서 여자와 관계를 갖는가 하면, 관계를 한 뒤에 목욕도 하지 않고 성역에 들어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도 딴 짐승들과 다름없다는 사고 방식에서 비롯된다. 그 주장에 따르면 모든 짐승과 새가 신전이나 경내에서 교미하고 있는 것을 늘 볼 수 있는데, 그것이 신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라면 짐승들이라 해도 그러한 짓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그러한 구실하에 그들이 하고 있는 행위를 좋다고 보지 않는다.

<역사> 2권 中

고대 근동은 성적으로 굉장히 문란한 사회였는데(심지어 문란하다고 알려진 고대 그리스인의 눈에도 이건 좀 아니다 싶을 정도로), 이스라엘은 특이하게도 여기에 대해 매우 엄격한 편이다. 이를테면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적지 않은 경우 신전의 신녀는 매춘부를 겸하기도 했고, 창세기의 유다 역시도 며느리가 신전 매춘부인 줄 알고 착각하여 관계를 맺은 적이 있다.[23] 반면 이스라엘 왕국은 성적으로 굉장히 엄격했으며, 레위기에는 다음과 같은 규정을 두고 있다.
누구든지 고름이 나왔을 경우에는 온몸을 물에 씻어야 한다. 그는 저녁때가 되어야 부정을 벗는다. 고름이 묻은 옷과 가죽은 모두 물에 빨아야 한다. 그것은 저녁 때가 되어야 부정을 벗는다.
여인이 남자와 한자리에 들었으면, 두 사람은 목욕을 해야 한다. 그들은 저녁 때가 되어야 부정을 벗는다.
레위기 15장 16-18절[24]

또한 학자에 따라서는 이스라엘에 이집트가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25] 특히 구약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인들의 인명은 그 어원을 이집트어에 두고 있는 경우가 많다. 가령, 이집트 탈출 이야기의 등장인물 중 한 명인 비느하스(아론의 손자)의 어원은 이집트 이름 Pa-nehasi에서 왔다는 게 중론이다.[26] 레위의 자손 므라리, 한참 후대인 사무엘서의 등장인물인 홉니 등의 이름도 이집트어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여겨지며, '모세'는 매우 흔한 이집트식 이름이다.[27] 게다가 구약성서의 이스라엘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정의할 때 "이집트인들이 하듯이 ...하면 안 된다"라며 제약을 거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직접적인 영향이었든 반면교사로서였든 이스라엘에 대한 이집트의 영향력이 매우 컸음을 보여주는 반증이다.[28] 더욱이, (이하의 '전기설과 후기설'에서 살펴볼) 아케나톤의 일신교 개혁이 이스라엘의 종교문화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6.4. 탈출기의 시기 문제

6.4.1. 일반론

고고학과 과학적 연구 성과들을 보면 그 당시 오랜 시간 동안 이집트에서 기상이변에 따른 여러 재해들이 발생했고, 이것이 해충의 대량발생이나 전염병 발발, 적조 현상 등의 '주님의 징벌'로 기억되었던 것이 아닌가 여기고 있다. 이런 역사적 배경에 의해 모이고 모인 '이주의 기억'들이 구전되며 쌓이고 쌓이다가 모세라는 아이콘에 정리되어 하나의 이집트 탈출 이야기가 만들어졌다고 본다.

이러한 이야기가 최종적으로 완성된 시기는 위에서도 살펴보았듯 바벨론 포로기(BC 6세기)에서 페르시아 치하 시기(BC 5세기)로 짐작된다. 포로로 끌려가고, 강대한 외세의 압제[29]를 받아야 했던 민족 수난의 시기에 "우리 민족은 야훼에게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민족주의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이러한 문헌이 쓰여진 것은 자연스럽다. 성경에는 "주님이 애굽에서 친히 인도해 내신 우리 민족"과 같은 표현이 반복적으로 나온다. #

그 외에도 모세 휘하의 이집트 탈출 행렬을 추격하던 파라오의 아들이 갈대밭에서 탈출 행렬의 호위 병력들에게 기습을 당해 죽은 사건이 홍해로 와전되면서 모세가 바다를 가른 사건과 이집트의 장자들이 죽은 사건의 모티브가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6.4.2. 전기설과 후기설

유대인들의 이집트 탈출의 연대에 관해 좀 더 구체적으로 대별하면 BC 15세기설과 BC 13세기설 2가지가 있는데 각각 전기설, 후기설로 불린다.

전기설 열왕기상 6장 1절에 묘사된 후대의 연대 계산에 의한 것으로, 아멘호테프 2세 치하설이 대표적이다. 열왕기상 6장 1절에는 솔로몬 왕이 '그의 치세 제4년', 즉 '이집트 탈출 후 제480년'에 성전을 짓기 시작했다고 되어 있다. 솔로몬 직후 르호보암(남유다 왕국)과 여로보암(북이스라엘 왕국)에 의해 왕국이 분열된 시기가 아마도 BC 931년~930년경으로 추정되며, 열왕기상 11장 43절에 따르면 솔로몬은 40년 동안 통치한 것으로 되어 있으므로, 역산하면 솔로몬은 BC 971~970년부터 BC 931~930년까지 통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솔로몬왕의 치세 제4년'은 BC 968~967년경이 되며, 만약 그것이 이집트 탈출 후 480년에 해당한다면 이집트 탈출은 BC 1448~1447년경의 일이 된다.[30] 순서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ㄱ. BC 1448~1447: 이집트 탈출
ㄴ. BC 971~970: 솔로몬 즉위
ㄷ. BC 968~967: 솔로몬 치세 제4년, 성전 건축 시작
ㄹ. BC 931~930: 솔로몬 사후 이스라엘 분열

ㄹ로부터 솔로몬의 40년 재위 기간을 고려하여 ㄴ을 상정할 수 있고, ㄴ 기준으로 4년째인 ㄷ과 ㄱ의 간극이 480년이라고 했으니 ㄱ의 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

전기설의 정황적 근거를 살펴보면 이렇다. 이전에 요셉이 출세하고 유대인들이 대거 이주했을 때의 이집트 왕조가 제15왕조인 이민족 힉소스 왕조였으리라는 것. 그게 맞다면 이집트인들이 힉소스를 몰아낸 이후 남아 있는 유대인들을 힉소스에 대한 일종의 부역자로 간주했을 가능성은 높아진다. "저 앞잡이들!" [31] 유대인들이 이집트의 노예가 된 것 역시 일종의 보복 차원이었을지 모른다. 전기설은 여기에서 시작되는 셈인데, 이 해석에 따르면 출애굽 시기는 (위에서 살펴보았듯) 대략 투트모세 3세 내지 아멘호테프 2세가 된다. 두 파라오 모두 힉소스 왕조를 몰아내고 이집트를 재통일한 제18왕조의 파라오들이다.

후기설은 탈출기 1장 11절의 '유대인들에게 강제 노동을 시켜 파라오의 곡식을 저장해 둘 비돔과 라암셋(람세스) 성을 세웠다'라는 기록에 근거한 것으로, 람세스 2세 치하 설이 대표적이다. 1920년대 이후까지만 해도 위에서 언급한 열왕기상 6장 1절이나, 이집트의 카이로 남쪽 약 300km에 있는 '텔 엘 아마르나'에서 발견된 아마르나 문서(BC 14세기)에 기록된 '하비루(≒히브리)의 활동, 영국의 J.가스댕에 의한 예리코의 발굴 조사 등을 들어 대체로 전기설(기원전 15세기설)을 신뢰하였으나, 최근의 학자들은 이 후기설(기원전 13세기설)을 더 많이 따르고 있다. 후기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성경에 '라암셋(람세스)'라는 지명이 나오는 것을 볼 때 모세의 출생과 이집트 탈출사건이 제19왕조의 세티 1세와 그의 아들 람세스 2세 시대에 일어난 게 틀림없다고 주장한다. 유대인들이 강제로 동원되어 건설되었다는 라암셋(람세스) 성의 이름은 파라오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인데, 전기설이 주장하는 제18왕조 시기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람세스'라는 이름을 따서 이런 성이 언급될 수는 없다.[32] 따라서 출애굽은 제18왕조가 아니라 제19왕조 시대에 있었던 일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모세는 람세스 2세 시기인 BC 1290년 전후에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한 것이 되며, 이에 대해 당시 이집트를 둘러싸고 있었던 국제관계의 정황상 람세스 2세가 자발적으로 유대인들을 이집트에서 떠나도록 허락한 것이라는 설이 유력시되고 있다. 대인배 람세스 2세 그러나 BC 13세기의 어느 해를 이집트 탈출의 기점으로 잡느냐 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직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 가령 W.F.올브라이트는 BC 13세기초로 추정하고 있으나 T.J.미크는 BC 13세기 말로 추정하고 있다.

후기설의 정황적 근거는 다음과 같다. 아케나톤 파라오가, 아몬 라를 중심으로 한 종래의 다신교 대신 아톤 신을 내세운 일신교를 주장하였기에 이스라엘 민족은 덩달아 번영을 누렸다.[33] 그러나 아케나톤의 실각 이후 재등장한 아몬 라 신앙에 의해 이스라엘 민족은 박해를 받았고, 결국 19왕조의 람세스 2세 때 탈출했다는 건데, 전기설의 근거인 열왕기상 6장 1절의 '480년' 기록에 어긋난다는 약점이 있다. 단, 성경, 특히 구약에선 숫자를 정확히 명시하기보단 수비학적인 비유를 더 자주 썼던 관행이 있기에, 저 '480년'이라는 기간이 실제 기간이 아닐 수도 있음을 감안해야 한다. 즉 480이라는 수는 성서에서 완전수로 여겨지는 12와 40의 곱인바, 12는 이스라엘 열두 부족을 의미하는 수[34]이고 40은 한 세대(30년)를 포괄하는, 온전한 한 시대를 의미한다.[35] 이 해석에 따르자면 이집트 탈출 이후 480년 만에 성전을 짓기 시작했다는 성서 기록은 이스라엘 열두 부족에게, 노예생활로부터 성전 건축으로 완전히 새로운 시대(40년)가 시작되었다는 뜻이지 정확히 480년이라는 실제 숫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 후기설에서 주장하는 내용을 마냥 부정할 순 없는 이유다.

후기설의 또다른 근거는 위에서 언급된 메르넵타 비문이다. 이 비문에서 '이스라엘'은 도시나 국가가 아닌 부족으로 표기되고 있다. 이 말은 이 비문이 쓰여졌던 BC 13세기에는 이스라엘이 아직 가나안에 온전히 정착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점도 후기설을 뒷받침하는 정황 증거가 된다.[36] 전기설대로 BC 15세기에 출애굽이 이루어졌다면 애초에 국가를 이루었어야 한다는 것.[37]

여하간 전기설과 후기설 모두 떡밥으로는 양질이라서 인기가 있다. 각각의 설을 대표하는 파라오인 아멘호테프 2세와 람세스 2세의 장자는 모두 일찍 죽었다는 것 역시 떡밥 중 하나. 물론 람세스 2세는 당시로서는 비정상적으로 장수하여 8~90대까지 살았기 때문에, 그 당시 평균 수명과 평균 결혼 연령을 생각해 보면 아들이 아버지보다 일찍 죽었다고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38] 한편, 아멘호테프 2세의 다음대 파라오인 투트모세 4세는 그의 장자가 아니다. 보통은 장자가 파라오가 됨을 생각해 보면 뭔가 어마어마한 떡밥거리. 정말 초태생의 죽음 때 죽었나?[39]

그러나 한편으로는 연구가 더해짐에 따라 후기설의 허점이 많이 드러나는 상황. 후기설의 근거 중 하나인 '라암셋(람세스)' 성의 명칭은, 당시에 흔했다.[40] 제18왕조의 투트모세 3세와 그의 아들 아멘호테프 2세가 실제 역사에서 팔레스타인 지역을 점령한 시기 역시 전기설의 기간과 묘하게 일치한다. 또한 창세기 말미 부분에서 요셉에 대해 묘사하는 내용들 중 일부는 후기설과는 전혀 맞지 않고 전기설의 관행과 더욱 관련이 있다. 즉 서열 제2위인 요셉 총리에게 금사슬을 드리우는 건 한참 후인, 앗시리아에게서 막 독립한 이집트 시절[41]의 이야기지만, 자체적으로 수레를 몰 수 있도록 허용하는 부분은 힉소스 시절 이후부터의 관습이므로 전기설로 설명이 가능하다. 그러나 셈족들이 이집트 왕자들과 매우 동등한,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이집트식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가,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집트에서 그대로 관직을 받으며 이집트인으로서 살아갔던 사실은 전기설의 시기도 후기설의 시기도 아닌 훨씬 이전인 중왕국 때에도 있었다는 것이 새로운 난점. 즉 성경의 이집트 관련 기록에는 멀리는 중왕국 시대 이집트부터 가까이는 앗시리아 이후 이집트 시절까지의 몇 백 년 넘는 시대상이 한정된 본문 안에 나와있기 때문에 정확한 연대를 추정하기에는 이래저래 난점이 많다. 애초에 성경의 기록 자체가 장구한 시대를 따라 전해내려져 오며 많은 수정과 가필을 거쳤을 뿐만 아니라, '일반론'에서 보았듯 중층적인 성격이 있으므로 해석이 어려운 것은 당연하다.

그렇기에 이집트 탈출의 시기를 확정하는 것 자체는 오히려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문제일 수도 있다. 위 '일반론'에서도 언급한 내용이지만, 성서학자들이 주장하듯이 "몇몇 부족들이나 사람들이 이집트에서 시나이 반도로 탈출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다수의 이집트 문서들도 그러한 탈출을 저지하려 했다는 기록들을 남겼다."[42][43] 그중 몇몇 드라마틱한 탈출 이야기가 출애굽기의 모티브가 되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즉 출애굽기의 탈출 이야기는 오랜 시기에 걸친 수차례의 탈출과 관련된 기억이 나중에 이스라엘을 구성하게 된 여러 부족들에게 독립적으로 전승되다가 이후 하나의 탈출 사건으로 종합 편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 따라서 전기설의 근거가 되는 시대적 정황과 후기설의 근거가 되는 정황이 출애굽기에 공존하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6.5. 10가지 재앙 문제

일단 출애굽기에 묘사된 10가지 재앙은 다음과 같다.

1. 나일 강을 피로 오염시킴 : 하수의 물고기가 죽고, 그 물에서 악취가 나서 물을 마시지 못하며, 이집트 온 땅의 물이 피로 다 변함.
2. 개구리 : 무수히 많은 개구리가 생겨 이집트 땅을 덮음.
3. 이( 각다귀)[44] : 지팡이로 땅의 티끌을 치니 모두 로 변함.
4. 파리 : 파리 떼가 이집트 전국을 덮음.
5. 생축의 악질 : 이집트의 생축에게만 심한 악질이 발생함.
6. 독종 : 풀무의 재가 날아 사람과 짐승에 붙어 독종을 발함.
7. 우박 : 이집트 이후 최대의 우박이 내려옴. 이집트 땅의 사람과 짐승과 밭의 채소에만 내렸음.
8. 메뚜기 : 사람이 지면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메뚜기가 날아와, 들의 모든 것을 먹어버림.[45]
9. 암흑 : 3일 동안 이집트 땅에 암흑이 가림.
10. 초태생(初胎生) 사망 : 이집트 사람의 장자와, 가축의 처음 난 것은 모두 사망함.

이렇게 스펙터클(…)한 재앙들이 실제로 일어났는지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유사한 기록을 찾을 수는 있다. 네덜란드의 라이덴(Leiden) 박물관에는 한참 나중에 기록했을 파피루스 기록이 보관되어 있다. 이 파피루스 기록은 어떤 초기 왕조 때의 파피루스 기록을 복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니, 그보다는 심정이 광포하다. 재앙이 땅을 휩쓸었고 방방곡곡은 유혈이 낭자하다…. 아니, 그뿐이랴. 강은 핏물이 범람한다. 사람이 그걸 마실까? 인간으로서는 못 마시리라. 목이 말라 죽을 지경이다…. 아니, 그뿐이랴. 지체 높은 집 아들도 알아보는 이가 없다…. 외지에서 낯선 사람들이 애굽으로 들어왔으니…. 아니, 그뿐이랴. 알곡은 곳곳에서 말라죽는다. 사람들은 옷조차 걸치지 못한 알몸이고 향수나 기름은 어림도 없다. 사람들은 입을 떼면, ‘더는 못 참겠네.’ 다들 한숨이다. 곳간마다 텅텅 비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 곤궁한 백성들은 마침내 왕을 끌어내렸다.”

학자들은 일단 이 재앙들을 최대한 과학적으로 해설하는 한편, 신학적인 분석도 내놓고 있다.

6.5.1. 과학적 해석

영화 리핑에서는 위 재앙들을 "나일 강에서 발생한 적조현상 → 나일 강의 포화산소량 부족 → 물고기 몰살 → 개구리 알을 먹던 천적(물고기)이 없어짐 → 개구리 등의 양서류가 번창 → 개구리의 폭발적인 개체 증가 → 개체 증가만큼 먹을 것이 없어 개구리 몰살 → 개구리 부패 → 개구리 시체에 이와 파리가 번창 → 이와 파리를 매개체로 전염병이 창궐 → 전염병이 가축과 인간에게 번창, 전염병이 발생한 시기에 모래 폭풍이 이집트를 덮침 → 모래 폭풍과 함께 메뚜기 때가 나일 강을 따라 올라와 이집트를 덮침 → 모래 폭풍으로 인한 암흑"으로 설명하고 있다. 한편 우박으로 인한 냉해 피해와 더불어 습기가 높아지고 여기에 곡식들이 곰팡이가 슬면서 곰팡이 독이 퍼졌고 많이 먹은 장자들이 사망했다고 한다. 이집트에서는 장자는 대를 이을 존재라고 배를 안 곯게 했기에 저런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장자만은 먹였고 그에 따라 오히려 곰팡이독과 식중독에 더 노출되어 사망했다는 것이다. http://ghj9301.blog.me/220995579441

즉 대부분의 재앙들은 인과 관계에 따라 이루어졌으며, 단순히 우연적으로 발생한 재앙은 적조현상, 우박, 모래 폭풍 3가지라는 설이다. 엑소더스: 신들과 왕들에서도 유사하게 설명되는 장면이 등장한다.

디스커버리 다큐멘터리에서도 이들 재앙에 대한 과학적 해석을 시도하였다. 즉, 1. 나일 강이 핏빛이 되었다는 것은 적조를 의미한다는 것. 2. 개구리 창궐도 산소가 부족한 나일강에서 개구리 알을 먹을 물고기들이 산소 부족으로 죽어 개구리들이 뛰쳐나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46] 이렇게 개구리가 많으면 생태계의 불균형으로 먹을 게 없어 개구리가 몰살당하니, 이 몰살당한 개구리에게서 가축이고 사람이고 막론한 전염병(5,6), 병충해(3,4,8; 파리 누리( 메뚜기)가 잇따르는 것은 당연하고, 7. 냉해와 우박 피해도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다. 9. 열흘간의 깜깜한 어둠도 모래폭풍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여기에 더해 10. 장자 절손, 즉 후계자 사망은 히브리인들의 탈출 시기에 있었던 거대한 군사적 충돌을 의미한다는 것. 홍해 혹은 갈대바다에서 있었다는 모세의 기적도 군사적 충돌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6.5.2. 신학적 해석

한편 이 10가지 재앙들이 이집트신들과 그 이집트 신들이 각각 상징하는 것들에 대한 주님의 징벌이라는 신학적 분석도 있다.

즉 단순히 이집트인들에 대한 재앙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섬기고 그들에게 정신적 근간이 되는 이집트 신들에 대한 타격(…)으로도 작용했다는 것. 요약하면 "너네가 섬기는 그런 거 없다". 탈출기 7장 5절에는 "내가 손을 들어 이집트를 치고 이스라엘 백성을 그들 가운데서 이끌어내는 것을 보고서야 이집트인들은 내가 야훼임을 알리라."라고 되어 있다.

사실 '징벌'이라는 건 지나치게 한쪽으로 치우친 단어고, 고대 세계의 전쟁은 대립하는 각 부족들이 자신들이 섬기는 신들의 전쟁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탈출기의 신학적 해석도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이해가 된다.
  1. 나일 강을 피로 오염시킴: 나일 강의 수호신 '크눔(Khnum)'과 물고기들을 주관하는 신 '하피(Hapi)'에 대한 징벌.
  2. 개구리: 개구리 형상의 이집트 신 '헤케트(Heqet)'에 대한 징벌.
  3. 이(각다귀): 땅의 신 '게브(Geb)'에 대한 징벌.
  4. 파리: 파리 형상의 이집트 신 '핫콕(Hatkok)'에 대한 징벌.
  5. 생축의 악질: 암소 형상의 이집트 신 '하토르(Hathor)', 황소 형상의 이집트 신 '아피스(Apis)'에 대한 징벌.
  6. 독종: 의술의 신 ' 임호텝(Imhotep)'에 대한 징벌.
  7. 우박: 하늘의 여신 '누트(Nut)', 기후의 신 '슈(Shu)'에 대한 징벌.
  8. 메뚜기: 곡물의 수호신 ' 세트(Seth)'에 대한 징벌.
  9. 암흑: 태양신 '(Ra)'에 대한 징벌.
  10. 초태생(初胎生)의 사망: 생명을 지키는 신 ' 이시스(Isis)', 생명을 부여하는 신 ' 오시리스(Osiris)'에 대한 징벌.

이 경우 마지막 3개의 재앙은 이집트 들에 대한 징벌이므로 이집트 인들에게는 그야말로 멘붕.

6.6. 이집트의 노예제 문제

출애굽기 초반부의 유대인들이 노예로 혹사당하는 부분이 과장되었을 거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당시 이집트에서의 건설은 나일강의 범람으로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농민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뉴딜정책의 일종이었는데 그것을 노예에 의한 혹사로 왜곡시켰다는 것. 단, 히브리인들이 건축한 것은 피라미드도 아니고 도시였기 때문에 피라미드 건축에 대한 기록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무리다. 거기다가 위의 전기설에 따르면 소위 힉소스 앞잡이들에 대한 보복 차원도 되므로. 애초에 외국인 집단인 하비루에 대한 대우가 이집트인과 같으리란 생각 자체가 문제다.

먹고 사는 것 자체는 오히려 이집트 시절이 좋았던 것 같다. 민수기에서는 만나가 지긋지긋하다며 불평하는 구절에서 이집트에 있을 때는 생선, 오이, 참외, 부추, , 마늘 같은 온갖 먹거리가 공짜였는데 이집트 나가면서 개고생한다는 식으로 불평한다. 매 맞으면서 노역하기 vs 광야에서 만나만 먹기. 어차피 나중에는 메추라기도 주지만... 심지어 만나 전에는 이집트에 있을 때는 고기라도 먹을 수 있었고 나름 먹고 살았는데 우리를 죽이려 하냐 라는 걸로 봐서는 나름 대우는 받은 것 같다. 애당초 고대 이집트에서는 노예에 대한 개념이 신왕국 시절이 되어서야 제대로 들어선 것도 있고, 그마저도 다소 애매하여 보통의 임금 노동자와 다를 바 없는 대우를 하는 경우가 많은 것을 생각해보면 딱히 이상한 것은 아니다.

혹은 어떤 주장에 따르면 2등 시민 대우 때문에 사실상 노예라는 표현을 썼다는 것도 있다. 위에서 나온 성경 속 내용들을 종합해보자면 노예 노동력의 비중이 그리 크지 않았던 이집트 사회에서 일단 제도적으로는 히브리인들도 이집트의 시민들이긴 하였으나, 사실상 이집트인들에게 받는 대우 자체가 노예나 다를 바가 없었다는 것. 위에서 나왔듯이 이집트에서 오히려 먹을거리들이 풍족했다는 점과 그럼에도 노예라는 표현과 거기에 걸맞은 대우라는 상반된 면모를 보면 2등 시민이라는 설도 아주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애당초 인종차별이라는 것은 고대에도 존재했기 때문.

당시 힉소스인의 왕좌가 막 들어선 때였다는 추측을 종합하였을 때, 소수 힉소스 민족으로 이루어진 정부가 당시 수가 늘어나던 히브리인들을 경계하여 제재했다는, 즉 학살과 차별과 노예 대우가 있었으나 오래되지 않았다는 설도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다만 당연히 충분한 기록이 없는 이 시대의 일은 의견이 분분하다.

6.7. 현재 학계의 중론

이집트 탈출의 전설은 순전히 역사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순전히 문학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이 둘의 분리할 수 없는 혼합물이며, 우리가 지금 다큐드라마라고 부르는 것에 가장 가까울 것이다.[47]

1970, 80년대에 시작된 미니멀리스트 학자들[48]의 공격은 기존 올브라이트가 세운 가설, 즉 출애굽기의 내용은 전반적으로 믿을 만한 역사적 사실이라는 가정을 효과적으로 허물었다. 현재에 와서, 일부 근본주의자들을 제외하면 이집트 탈출에 대한 성경 본문을 글자 그대로의 역사적 사건을 묘사한 문서로 보는 학자들은 거의 없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49] 성경의 역사성을 가장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맥시멀리스트 학자들도 성경 본문만으로는 이집트 탈출과 관련된 역사 서술에 필수적인 특정한 시간과 연대를 확정할수 없다고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학자들이 출애굽기는 아무런 역사적 가치가 없다는 미니멀리스트의 주장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대다수의 학자들은 출애굽기의 성경 본문이 역사적 사실을 문자 그대로 반영한다는 주장과, 전혀 반영하지 않는 후대의 창작에 불과하다는 두 극단적인 주장의 중간 어디쯤에 있다.

따라서 고대 이스라엘 역사를 연구하는 현대 학계의 대다수 학자들은,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히브리인들이 대규모로 엑소더스를 하여 광야를 방랑했다는 이야기의 역사성은 입증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인들의 대부분은 이집트 출신이 아닌 팔레스타인 토착민들이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많은 학자들은 이후 이스라엘 역사에 등장하는 이집트 탈출의 기억[50]은 상당한 진실성을 가지고 있어, 쉽게 부정될 수 없다고 본다.

이러한 정보들은 출애굽기의 내용이 문자 그대로의 사실이라고 입증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러나 초기 이스라엘을 구성한 이들 중 이집트에서 탈출해온 이들이 일부 있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51] 이러한 소수 집단이 이집트를 탈출했으며, 이들의 기억이 이후 성경 전승의 일부가 되었을 가능성은 회의적인 학자들도 완전히 부정하지 않는다. [52]

7. 관련 문서


[1] "이름들은"이라는 뜻. 원문의 맨 첫 문장 둘째 어절이다. 참고로, 탈출기 1장 1절은 "야곱을 따라 가족을 데리고 이집트로 내려간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 [2] 출애굽이란 명칭은 이집트의 한자 음역인 '애급(埃及)'으로부터 유래했다는 설도 있지만, 그리스어인 '아이귑토스(Αἴγυπτος, Aígyptos)'의 어간을 직접 음차했다는 설도 있다. 아무튼 한자로는 '애급'이라고 읽는 것이 맞으므로 한자 '埃及'을 '애굽'이라고 읽으면 오독이다. [3] 이슬람교에서도 모세, 예수, 아브라함 등의 존재를 인정한다. 애초에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모두 뿌리는 같은 아브라함계 종교이다. 물론 주된 내용으로 다루지는 않으며, 모세가 계명을 받거나, 황금송아지를 숭배하거나, 이집트를 탈출하는 등의 정도만 언급되는 편. [4] 천주교 원주교구 소속. 말씀의 성모영보수녀회 창립자. [5] 보통 파라오의 한자 음차어인 바로라고 많이 쓰는데, 애초에 왕이라는 뜻의 파라오 뒤에 왕을 또 붙인 잘못된 단어 사용례도 보인다. 심지어 왕 개인의 이름인 것처럼 나올 때도 있어 성경 읽다 "뭐야, 바로왕이 몇 백 년을 사네?" 같은 반응을 보일 때도 있다. [6] 히브리어로 '물에서 건져냈다'라는 의미. [7] 결혼해서 아들도 있었다. [8] 파라오가 완고하게 변한 건, 하느님의 계획이라고 한다. (출애굽기 10장 1~2절) 다만, 이 부분은 보수적인 신학자들도 하나님이 '원'하신게 아니라 그러도록 '허락'했을 뿐이고, 구약은 이 허락과 원의를 구분하지 않았다고 해석한다. [9] 유월절(Passover)의 유월의 뜻이 '넘어가다'라는 뜻이다. [10] 경로상 홍해가 아니라 다른 호수일 것으로 추정한다. [11] 실제로는 산토리니화산이 폭발해서 흉년과 전염병이 돌았다고 전해진다. [12] 모 패러디 만화에서는 지팡이 풍압으로 갈랐다고 나와있기도 하고, 기독교인들도 지팡이를 들자 바로 홍해가 갈라졌다고 알고 있는 경우도 많지만 실제 내용상으로는 사흘 밤새도록 바람이 불게 해서 갈라졌다. [13] 그러나 이는 신학계 및 뜻 있는 사람들이 매우 문제 삼는 부분. 이 부분들에는 이민족에 대한 처우에서 오늘날 감성으론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 있으나, 기독교인에게 중요한 건 그 부분이 아니다. '고용인의 임금을 떼먹으면 결코 안 된다'라거나, '좋지 못한 행실로 남에게 원한을 품게 해 놓고 제단 앞에 오지 말고 그 문제부터 해결하고 오라'라거나, '교리를 자기 편할 대로 악용해서 사익 챙기지 말라'라거나 하는, 현대 생활에도 적용하기 매우 좋은, 의외로 선진적인 내용들이 있다. 특히 고용인의 임금을 아껴서 그 돈으로 헌금 많이 하는 파렴치한 행태는 이후 예언서들에서도 계속해서 질타하며 금하는 아주 중요한 내용이다. 주님이 원하는 건 헌금의 돈이 아니라 감사하는 마음이라는 의미다. [14] 창세기에서 야곱의 일화에서 처음 등장하는 주신. [15] 가령 홍해와 동부 삼각주의 '시홀(Shihor)' 강, 이스라엘인들이 머물렀던 '비하히롯(Pi Hahiroth)'의 야영지 등 출애굽기의 수많은 지명은 이집트 어휘로 보인다. [16] 사실 이집트가 꽤 풍요롭고 부강한 나라이긴 했다. 창세기에서도 아브라함, 이삭이 기근을 피해 이집트로 가는 내용이 나온다. [17] 윌리암 팍스웰 올브라이트(W. F. Albright)의 주장 [18] 알브레이트 알트(Albrecht Alt)의 1925년 논문 (“Die Landnahme Der Israeliten in Palästina”) [19] 조지 멘덴홀(George Mendenhall)의 1962년 논문 “The Hebrew Conquest of Palestine” [20] 성경의 '히브리'를 연상시킨다. [21] 가령 그리스 문명만 해도,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영향을 받았음이 쉽게 확인된다. 그리스 문명은 에게(크레타→미케네) 문명을 그 뿌리로 하고 있고, 에게 문명은 이집트 문명에서 강한 영향을 받았던 것. [22] 물론 이집트 탈출에 대한 기억이 없는 시리아인 등도 할례 풍습을 공유하므로 할례 그 자체가 탈출의 증거는 되지 못한다. 그러나 이집트가 이스라엘에 끼친 문화적 영향에는 분명 강한 증거가 된다. [23] 창세기의 증언에 의하면 아브라함 가문은 메소포타미아 지역 출신이다. [24] 참고로, 성경에서 말하는 '부정하다'는 '사악하다'라기보다는 '더럽다'에 가까운 의미다. 즉 더러우니까 씻고 오라는 의미. [25] Lawrence Boadt, Reading the Old Testament, p. 134. [26] Oxford Guide to the Bible [27] 파라오 중 '아모세', 투트모세' 등의 이름이 자주 발견된다. 물론 성경에 따르면 모세는 애초에 이집트에서 길러진 것으로 되어 있고, 그 이름 역시 이집트 공주가 이집트어로 붙인 것이므로 다소 경우가 다르긴 하다. [28] Boadt, p.134. [29] 페르시아는 유대인들에게 상당한 자치를 허용하기는 했다. [30] 단 BC 1448~1447년의 이집트 파라오는 제18왕조 투트모세 3세이며, 전기설에서 대표적으로 밀고 있는 아멘호테프 2세는 그의 아들이다. 고대 문헌들이 다 그렇듯이 이 정도 오차는 그러려니(...) 하자. [31] 더욱이 힉소스인이라는 집단에는 지금의 유대인의 조상들 역시 끼어 있었을지 모른다는 학설도 있다고 한다. ( 참고) [32] 즉 세티1세가 그 부왕 람세스 1세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 된다. [33] 주지하다시피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는 유일신교다. [34] 성서학자들은 이 12라는 숫자 역시 실제 열두 부족을 나타낸다기보다는 상징적인 수라고 보는 경우가 많다. [35] 광야생활 40년, 예수가 40일간 광야에서 보낸 일 등도 마찬가지 맥락으로 상징적인 기간인 셈. [36] Lawrence Boadt, Reading the Old Testament, p.134. [37] 그런데 전기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왕이 생긴 것은 한참 후였다는 점을 들면서, 메르넵타 시기에 이스라엘이 국가가 아닌 부족으로 표기되어도 이상할 것이 없다고 설명한다. 오히려 가나안 땅의 여러 민족 중 '이스라엘'이 기록되었다는 자체가 부족의 형태로나마 가나안 땅에 잘 정착했음을 의미한다는 것. 따라서 이 비문이야말로 전기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라고 해석하는 중이다. [38] 람세스 2세가 죽을 당시, 젊었을 적에 낳은 자식들은 이미 죽은 상황이었고, 심지어 일부 손자들과 증손자들도 죽은 상태였다. 자세한 내용은 람세스 2세 항목 참고. [39] 실제로 투트모세 4세에게는 웨벤세누라고 하는 형이 있었기에 본래 투트모세 4세는 왕위를 물러받을 처지가 아니었는데, 어느 날 꿈을 통해 스핑크스를 발견한 그 사건 이후에 웨벤세누가 죽게 되었고, 그로 인해 왕이 되었다고 한다. 거기다가 그가 스핑크스를 발견하게 만들었던 그 꿈이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여담으로, 투트모세 4세가 스핑크스를 발견한 건 그 스핑크스가 지어진 지 천 년 후였다. [40] 굳이 람세스 1세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게 아니라는 소리 [41] 열왕기하 시대 [42] ANET 259 [43] Boadt, p. 134 [44] 실제 각다귀는 사람을 물기는커녕 공격도 하지 않는다 [45] 최근에도 이집트에 같은 피해를 주는 사막메뚜기(Desert Locust)로 추정된다. [46] 이하의 "신학적 해석"에서 재차 거론하겠지만, 풍요의 신인 헤케트가 개구리의 형상을 하고 있었으니 이집트 인들에게는 말 그대로 충공깽이었을 것이다. [47] Carol A. Redmount, "Better Lives: Israel in and out of Egypt", in Michael D. Coogan (ed.), Oxford History of the Biblical World (Oxford, 1998). [48] 유물 및 다른 동시대 기록들과 교차검증으로 증명된 것 이외의 성경의 역사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학파. [49] Lester L. Grabbe, 류광현, 김성천 역, <고대 이스라엘 역사> (CLC, 2012), p. 155. [50] 시편, 예언서 등에 드문드문 나타나는 언급, 초기 히브리인들의 이름에 무수히 나타나는 이집트어의 흔적 등. [51] Megan Bishop Moore and Brad E. Keller, Biblical History and Israel's Past: The Changing Study of the Bible and History (Cambridge, 2011), pp. 91-95 [52] Grabbe, p. 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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