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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12 08:51:56

부선(전진)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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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83D8B><colcolor=#fff> 중산공(中山公)
苻詵 | 부선
시호 없음
작위 중산공(中山公)
(苻)
(詵)
불명
생몰 ? ~ 385년 10월 16일
출신 악양군(略陽郡) 임위현(臨渭縣)
부모 부황 세조 선소황제
모친 부인 장씨
형제자매 7남 4녀 중 7남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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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진의 황족. 세조 선소제 부견의 막내아들.

2. 생애

선소제 부견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아들들 중 가장 많은 총애를 받아 일찍이 중산공(中山公)에 봉해졌다.

건원 18년(382년) 11월, 선소제 부견이 남벌을 결심하고 조정의 신하들의 반대 의견을 따르지 않자, 부선이 나아가 간했다.
"신이 들은 바에 의하면 계량(季梁)이 수나라에 있을 때 초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였고, 궁지기(宮之奇)가 우라나의 관리가 되었을 때 진나라는 감히 군사를 보내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국가의 운명은 유능한 인물에게 달려있듯이, 그 모사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한 해도 넘기기 어려운 법입니다. 뒤따라 가는 마차는 앞서 가는 마차의 궤도를 교훈으로 삼아야 합니다. 양평공(陽平公)은 나라의 모주(謀主)임에도 폐하께서 그의 조언을 어기면서까지 사안, 환충이 있는 진나라를 정벌하려 하고 있습니다. 이리 행하신다면 신이 어찌 당혹스럽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에 부견은
"국가의 흥망은 귀갑에 달려있다. 조정에는 공경(公卿)만이 존재할 뿐으로, 어찌 나라의 대모(大謀)가 존재할 수 있겠으며, 어찌 그의 결정에 무조건 기속받아야만 하겠는가. 어린아이의 말로 어찌 장차 국가의 중요 사무를 정하랴!"
라며 부선의 말을 무시하였다.

건원 19년(383년) 12월, 비수대전에서의 패전으로 전진의 국력이 크게 기울자,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면서 모용수, 요장 강족, 선비족들이 전진으로부터 독립하기 시작하였다. 멸망한 전연의 황족 모용충은 무리를 이끌고 전진의 수도인 장안을 포위하였고, 선소제 부견은 농성하며 모용충의 선비족 군대와 악전고투하였다.

건원 21년(385년) 5월, 관중 일대에 대기근이 들어 농성하는 측인 전진군의 형세는 나날이 불리해져만 갔고, 장안성 내에도 식량이 다 떨어져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여기에 더해서 선소제 부견이 그동안 믿고 의지하던 맹장인 위장군 양정(楊定)마저 서연군에게 사로잡히니, 부견은 무척 두려워 자신이 과거 그토록 배척했던 도참서의 내용을 믿고, 막내아들 부선, 부선의 생모 장씨, 딸 부보(苻寶), 부금(苻錦)과 기병 수백 명과 함께 오장산(五將山)으로 향하였다.

건원 21년(385년) 7월, 선소제 부견이 오장산에 도착하였을 때, 후진을 건국한 만년진왕 요장이 표기장군 오충(吳忠)을 보내 오장산을 포위하였다. 부견을 따르던 병사들은 모두 흩어져 달아났고, 부견과 남은 일행을 붙잡아 신평(新平)에 가두었다.

건원 21년(385년) 8월 26일[1], 선소제 부견으로부터 전국옥새를 얻는 데 실패한 요장은 양위라도 해달라 요구했으나, 부견은 그마저도 거절하고 차라리 죽기를 구하였다. 이에 요장은 사람을 보내 신평의 어느 절에서 선소제 부견의 목을 졸라 죽이게 하였고, 부인 장씨와 부선은 모두 자결하였다.


[1] 양력으로 계산할 시 10월 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