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의
백제에는 여러 방면에서 활약한 수많은 인물들이 존재했을 것이나, 현재 남아있는 기록은 상세하지 않다. 대신
일본서기에 백제인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잘 보면 삼국사기보다 많다.
특히
백제는
고구려나
신라에 비해서 그 기록이 굉장히 부족하다.[1] 덕분에 백제사를 연구하는 것은 상당히 힘든 편이다. 그런데 어째 고구려보다 남아있는 인물 숫자가 많은데 그 이유는 일본서기 덕분이다. 일본서기가 없었다면... 더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사실
발해,
가야의 인물 기록도 상당한 비중을 일본의 기록에 할애하고 있는 등 한국 고대사에 있어 일본 사료의 비중은 결코 무시 못한다.
당대의 2인자이자 오늘날의
총리나
수상 격에 해당하는 자리. 나열 순서는 재임순, ()는 재위기간.
260년 고이왕의 관등정비[7] 이후
좌평[8]직이 신설되고 내신좌평[9]이 수석 좌평으로서 좌평들을 통솔했으나 408년 상좌평이 새로이 신설되어 좌평들의 좌장으로서 정사암 회의를 관장하고 나랏일을 총괄하였다.[10] 이후 사비시대 후반부터 언급되는 대좌평직은 일반적으로 상좌평과 동일한 관직으로 추측되고 있으며 자세한 내용은
상좌평 문서를 참고하길 바란다.
저근: 충성과 공로를 다하여 국난을 제거해서 사직을 견고하게 지킨 데 대한 논공이 있고 시무를 보좌하는데 무공이 뛰어났다는 공로로 백제로부터 중국 남제에게 관직의 제수가 요청되어 남제로부터 삭녕장군에 임명됐으며 백제의 제후왕으로서 면중왕(面中王),도한왕(都漢王)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아마도 웅진 천도 당시 이탈한 지방세력들을 복속하는데 큰 공을 세웠으리라 추측된다.
목간나외 3명(사법명,찬수류,혜레곤): 모두 490년 북위의 침공에 맞서 공을 세운 장수들이다. 이 중 목간나는 유일하게 과거에도 군공이 있고, 선박과 성문을 때려 부수었다는 구체적인 군공의 설명이 있어 북위와의 전쟁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을 하였고 이전의 다른 전쟁에서도 공을 세웠던 명장으로 추측된다.
[1]
일례를 들자면 삼국사기 인물 열전의 50여 편 중에서도 백제인의 열전은 고작 3개 정도에 불과하다.
[2]
일본서기에는 누리시치케이(ぬりしちけい)라는 훈이 달려있다.
[3]
일본서기에서는
백제의 시조를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으로 보며, 근구수왕 이전에 도모왕을 제외하고 1명의 왕이 더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4]
위의 동성자막고와 함께 동성子이름의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에 성씨가 아닌 그냥 동성왕의 자손 누구를 표기한 거란 견해가 있다.
[5]
다만 이 인물이 백제인으로 밝혀진 건 묘지명이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6]
전국시대
다이묘 가문 중 하나인
오우치(大内) 가문이 이 사람의 자손으로 알려져 있다.
[7]
허나 이후의 기록이 앞당겨진것 이라며 추측되며 근초고왕 시기때 비로소 관등 정비가 이루어진 것이라고 추정되는데 자세한 내용은
고이왕 문서를 참고 바란다.
[8]
현대의 장관에 대치되며 중국 6전제의 영향을 받아 6좌평제로 체계화되었다.
[9]
왕명 출납을 담당했으며 현대의 대통령 비서실장에 대치된다.
[10]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기존의 6좌평과 별개의 존재로 왕이 측근을 임명했다는 견해도 있고, 기존의 내신좌평 동일하게 보는 견해도 존재한다.
[11]
내신좌평 부여신과 동일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