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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군

백제의 투항자
국적 <colbgcolor=white,#191919>백제 → 당
이름 예군(禰軍)
온(溫)
아버지 예사선(禰思善)
동생 예식진
출생 613년
백제 웅진성
(現 충청남도 공주시)
사망 678년 2월 19일 (향년 65세)
옹주 장안현 연수리(延壽里) 사저
(現 산시성 시안시 창안구)
묘지 당 옹주 건봉현(乾封縣) 고양리(高陽里)

1. 개요2. 예군의 묘지명 발견3. 묘지명의 일본에 대한 해석
3.1. 왜국을 지칭3.2. 백제를 지칭
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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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제의 인물. 자는 온(溫). 동생 예식진은 백제의 매국노로 유명한 인물이기도 하다.

660년 7월 18일, 백제가 멸망할 때 의자왕 일행과 함께 에 투항해 웅진도독부 사마가 되었다. 이후 664년 4월 유인원의 명으로 당나라 사람 곽무종(郭務悰) 등 130여 명과 함께 왜국 사신으로 파견되기도 했지만, 황제가 직접 보낸 사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입국 거부를 당했다.[1] 이듬해 7월에는 고종의 명으로 곽무종, 유덕고(劉德高) 등 253명과 함께 재차 왜국을 방문하여 국서를 전달했다.

삼국사기》에도 예군의 행적이 기록되었다. 670년 7월 나당전쟁 당시 웅진도독부를 축출시키려 했던 신라에서 간첩 혐의로 붙잡혀 억류당했다. 2년 뒤인 672년 8월 신라가 당나라와의 석문 전투에서 패배하자, 동년 9월 문무왕이 사죄의 뜻으로 예군을 비롯한 당나라 포로들을 대거 석방하면서 비로소 당나라로 귀국할 수 있었다.

2. 예군의 묘지명 발견

2011년, 중국에서 그의 묘지명이 발견되어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파일:attachment/예군/anepitaphYeGun.jpg

묘지명 전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고대금석문

【원문과 해석】
||(묘지 주인에 대한 소개)
大唐故右威衛將軍上柱國祢公墓誌銘 并序
대당 고 우위위장군 상주국 예공 묘지명 병서
公諱軍 字溫 熊津嵎夷人也
공의 이름은 군 자는 온 웅진 우이 사람이다.
(가문 내력)
其先與華同祖 永嘉末避亂 適東因遂家焉
그 선조는 중화와 조상이 같으며, 영가 말 난을 피해 동쪽으로 가서 마침내 가문을 이루었다.
若夫
무릇
巍鯨山 跨青丘以東峙
높고 높은 경산은 청구를 넘어 동쪽 언덕이 되고
淼淼熊水 臨丹渚以南流
넓고 넓은 웅수는 단저에 임해 남으로 흐른다.
浸煙雲以檎英 降之於盪沃
연운에 스며들어 재주를 펼치니 탕옥처럼 내려오고
照日月而榳惁 秀之於蔽虧
일월을 비추어 빼어나게 밝으니, 어그러진 것 중에서 빼어났다.
靈文逸文 高前芳於七子
신령하고 뛰어난 문자는 높이기 전에도 칠자보다 아름답고
汗馬雄武 擅後昇於三韓
한마와 같은 웅무는 뜻대로 한 후에도 삼한에서 뛰어났다.
華搆増輝
화구는 빛남이 더해지고
英材繼響
영재는 메아리쳐 내려가니
綿圖不絕
면면히 끊어지지 않고
奕代有聲
대대로 명성이 있었다.
(가까운 선대에 대한 설명)
曾祖福 祖譽 父善 皆是本藩一品 官号佐平
증조부는 부, 조부는 예, 부는 선이고 모두 본번(백제)의 1품으로 관호는 좌평이었다.

모두
絹地義以光身
지의(인간 세상의 덕)를 모아 몸(개인)을 빛냈고
佩天爵而懃國
천작(타고난 덕)을 지녀 나라에 봉사했다.
忠侔鐵石
충(성)은 철석(철과 돌)에 비기고
操埒松筠
(지)조는 송균(소나무와 대나무)과 같았다.
範物者 道德有成
만물의 범(모범)으로 도덕을 이루었고
則士者 文武不墜
선비의 칙(본보기)으로 문무가 떨어지지 않았다.
(묘지 주인에 대한 설명)

공은
狼輝襲祉
천랑성이 빛나듯 복을 이었고
䴏頷生姿
제비의 턱[2]과 같은 모습을 드러냈다.
涯濬澄陂
물가의 깊음이 못을 맑게 했고[3]
裕光愛日
넉넉한 빛은 해를 아쉬워한다.[4]
干牛斗之逸氣 芒照星中
우두[5] 뚫는 뛰어난 기운은 별 가운데서 황홀하게 빛나고
搏羊角之奠風 影征雲外
양각을 쥔(회오리 바람을 탄) 빼어난 바람은 구름 밖으로 그림자를 드리운다.
去 顯慶五年 官軍平本藩日
지난 현경 오년 관군(당군)이 본번(백제)을 평정하던 날
見機識變
때를 보고 변함을 알고
杖劍知歸
검을 지니고 귀순을 알았으니
似由余之出戎
유여가 융에서 나온 것과 비슷하고
如金磾之入漢
김제(김일제)가 한으로 들어온 것과 같았다.
聖上嘉嘆 擢以榮班 授右武衛滻川府析衝都尉
성상께서 기탄(기특히여기고 감탄하다)하여 영반으로 발탁하사 우무위 산천부 절충도위에 제수하셨다.
于時
이 때
日本餘噍 據扶桑以逋誅
일본의 남은 백성은 부상에 의지하여 주벌을 피하였고
風谷遺甿 負盤桃而阻固
풍곡의 남은 백성들은 반도를 의지하여 굳세게 저항했다.
萬騎亘野 與盖馬以驚塵
만의 기병이 들판에 펼쳐지니 개마와 함께 경진[6]이 일고
千艘橫波 援原蛇而縱濔
천의 배가 파도를 가로지르니 원사를[7] 도와 막혔던 물결이 풀어졌다.
以公
공이
格謨海左
해좌에서[8] 지모를 궁구하여
龜鏡瀛東
영동에서[9] 귀감이 되기에
特在蕑帝
특별히 황제에게 발탁되어
往尸招慰
초위를[10] 주관하러 갔다.

공은
侚臣節而投命
신하의 절조를 두루 보이며 목숨을 바쳤고
歌皇華以載馳.
사신가는 일을 찬미하며 빠르게 달려갔다.
飛汎海之蒼鷹
바다 위를 날아서 건너가는 푸른 매였고
翥凌山之赤雀.
높이 날아올라 산을 넘는 붉은 새였다.
決河眥而天吳靜
鑿風隧而雲路通.
驚鳧失侶
濟不終夕.
遂能說暢天威
드디어 천엄(天威)을 막힘없이 설파할 수 있어
喩以禑福千秋.
우복(禑福)의 영원함을 깨우쳤다.
僭帝一旦稱臣
참제(僭帝)가 하루아침에 신하라고 칭하고
仍領大首望數十人, 將入朝謁.
이에 대수망(大首望) 수천인을 거느리고 조정에 들어와 알현하려 하였다.
特蒙, 恩詔授左戎衛郎將, 少選遷右領軍衛中郞將兼檢校熊津都督府司馬.
材光千里之足, 仁副百城之心.
擧燭靈臺, 器標於芃棫.
懸月神府, 芳掩於桂苻.
衣錦晝行, 富貴無革.
雚蒲夜寢, 字育有方.
去咸亨三年十一月卄一日, 詔授右威衛將軍.
局影彤闕, 飾躬紫陛.
亟蒙榮晉, 驟歷便繁.
方謂克壯淸猷, 永綏多祐.
豈啚曦馳易往, 霜凋馬陵之樹, 川閱難留, 風驚龍驤之水.
以儀鳳三年歲在戊寅二月朔戊子十九日景午遘疾, 薨於雍州長安縣之延壽里第.
春秋六十有六.
皇情念功惟舊, 傷悼者久之.
贈絹布三百段, 粟三百斛, 葬事所湏, 幷令官給, 仍使弘文館學士兼檢校本衛長史王行本監護.
惟公雅識淹通, 溫儀韶峻, 明珠不纇, 白珪無玷.
十步之芳, 蘭室欽其臭味.
四鄰之彩, 桂嶺尙其英華.
奄墜扶搖之翼, 遽輟連舂之景.
粤以其年十月甲申朔二日乙酉葬於雍州乾封縣之高陽里, 禮也.
駟馬悲鳴, 九原長往.
月輪夕駕, 星精夜上.
日落山兮草色寒, 風度原兮松聲響.
陟文榭兮可通, 隨武山兮安仰.
愴淸風之歇滅, 樹芳名於壽像.
其詞曰
冑胤靑丘, 芳基華麗.
脈遠遐邈, 會逢時濟.
茂族淳秀, 奕葉相繼.
獻款夙彰, 隆恩無替. 其一.
惟公苗裔, 桂馥蘭芬.
緖榮七貴, 乃子傳孫.
流芳後代, 播美來昆.
英聲雖歇, 令範猶存. 其二.
牖箭驚秋, 隙駒遄暮.
名將日遠, 德隨年故.
慘松吟於夜風, 悲薤哥於朝露.
靈轜兮遽轉, 嘶驂兮跼顧.
嗟陵谷之貿遷, 覬音徽之靡蠹. 其三. ||

3. 묘지명의 일본에 대한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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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예군 묘지의 "日本"의 해석에 관한 서술은 MPOV를 적용하며, 다음과 같이 문단을 구성하여 서술한다. }}}}}}}}}
이때 日本(일본)의 남은 백성은 扶桑( 부상)에 의지하여 주벌을 피하고 있고, 風谷(풍곡)의 남은 백성들은 盤桃(반도)를 의지하여 굳세게 저항했다.
于時日本餘噍, 據扶桑以逋誅; 風谷遺甿, 負盤桃而阻固.
2011년 예군묘지명의 내용 중 '日本(일본)'이라는 표현이 발견되어 화제가 되었다. 예군묘지명의 탁본을 학계에 처음으로 소개한 왕롄룽(王連龍)은 日本(일본)을 倭(왜)국의 바꾼 국호로 보았다.[11] 게가사와 야스노리(氣賀澤保規)[12], 거지융(葛繼勇)[13], 김영관[14], 권덕영[15] 등 2011~2012년 사이의 연구자들도 왕련룡의 견해의 따라 의심없이 日本을 국호로 인식하였다.

그러나 도노 하루유키(東野治之)는 묘지명의 일본이 당시의 왜국이 아니라 백제를 뜻한다고 처음 반론을 제기하여 학계에 큰 파장을 던졌다. 고바야시 도시오(小林敏男), 이성시, 이용현 등도 이에 동의하여 예군묘지명의 일본이 국호가 아니고 일반명사로서 백제를 뜻한다고 보았다.

이용현은 일본 용어를 중점으로 학계의 의견을 정리하였고, 평제비[평]의 '부상'과 비교하여 예군묘지명의 '부상'을 백제로 보았고 해석에 따라 '일본' 역시 백제로 보았다.[17] 이준호는 이용현의 학설을 들어 "일본이 왜국의 국호로 성립되기 이전 시기의 용어로서 당에 의해 멸망한 백제를 가리키는 표현이라는 것이 확실시 되었다"라고 하였다.[18]

3.1. 왜국을 지칭

왕롄룽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19]
1.日本은 국호이며, 扶桑(부상) 역시 일본땅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2. 風谷은 바람이 부는 계곡이란 뜻이고 遺甿(유맹)은 移民(이민) 혹 後裔(후예)를 가리킨다고 하였다.

3. 盤桃(반도)는 秦(진)의 徐福(서복)이 구하였다는 신화 중 仙桃(선도)로 먹으면 수명을 연장하여 장수할 수 있는 과일이라고 하였다.

3.2. 백제를 지칭

도노 하루유키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20]
1. 墓誌(묘지)는 기교를 응축시킨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묘지의 작문자는 결코 국호를 쓰지 않았다.

2. "日本(일본)"이란 국호로 정착되기 전의 용법으로 중국에서 볼 때 해가 뜨는 곳이라는 의미로 쓰였으며 百濟(백제)를 가리킨다.

3. 倭國(왜국)은 묘지에서 "海左(해좌)", "瀛東(영동)"으로 표기되었다.

4. 唐(당)대에 日本(일본), 日東(일동)은 신라를, 日域(일성)은 新羅(신라)나 고구려를 가리키는 예가 있다. 扶桑(부상) 역시 마찬가지로 고대 한국을 가리킨다.

5. 백제가 아니라 "本藩(본번)"이라 쓰고, 삼국시대를 살아갔음에도 불구하고 삼국에 대해서는 "三韓(삼한)", "靑丘(청구)"라 하였다.

6. 日本餘噍(일본여초)와 대구를 이루는 것이 風谷遺甿(풍곡유맹)의 風谷은 바람부는 계곡이란 뜻으로 쓰였고, 風師(풍사), 風伯(풍백)은 箕星(기성)과 연결되어, 결국 箕子朝鮮(기자조선)을 가리킨다.

7. 風이 바람이듯 그 對句(대구)가 되는 日도 해로 읽어야 한다.

8. 盤桃(반도) 역시 日本과 관련된 仙桃(선도)라기보다는 東海(동해)의 度索山(도삭산)에 있는 큰 복숭아 나무가 수천리 뻗은 지역을 가리킨다.

9. 만약 이 시점에서 일본이란 국호가 존재하였다면 "日本"이라고 쓰지 않았을 것이다. 日本이란 용어를 쓴 자체가 일본이란 용어가 아직 국호로서 성립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된다.
이에 대해 이용현은 "이와 같은 주장은 학계에 큰 파장을 던졌다."라고 하였고, 고바야시 도시오는 예군묘지의 "日本"이 국호가 아니라는 점에 동의하였다.

이성시 일본 와세다대학 문학학술원장 또한 도노 하루유키의 의견에 동의하며 678년에 ‘일본’이 국호로서 성립돼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고 하였다.

이용현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
1. 도노 하루유키의 학설, "일본, 부상, 풍곡, 반도, 해좌, 영동 등 예군묘지명에는 단 한번도 국호가 쓰지 않았다."에 동의하며 일본 즉 "해 뜨는 동쪽 끝"이란 의미는 중국에서 표현하면 일본열도 뿐 아니라 백제 등 한반도가 들어간다. 즉 국호 성립여부와 관계없이 부를 수 있는 칭호다. 예군묘지에서의 일본은 비록 국호가 성립된 이후의 자료라 하더라도 국호가 아닐 가능성이 크며, 그것은 백제 혹은 웅진도독부 중심적 호칭이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본번", "웅진우이"란 표현이 좋은 예가 된다.

2. 風谷(풍곡)은 風伯(풍백), 箕星(기성)과 관련있고 箕(기)는 箕子朝鮮(기자조선)의 箕子(기자)와 연관되는데[21] 기자조선의 후예는 고구려를 의미하며 양자는 평양을 매개체로 공통된다는 도노 하루유키의 견해를 봤을 때 풍곡은 고구려일 수도 있고, 箕子朝鮮의 箕準(기준,준왕)이 韓의 金馬郡(금마군)에 내려온 설화와 고구려와 백제를 연관된 나라로 보던 사례를 봤을 때 백제일 수도 있다.

3. "扶桑(부상)"을 평제비[평]에서처럼 백제로 보게 된다면, "日本"도 百濟로 보는 것이 정합적이다. 이 경우라면, 日本은 백제저항세력(백제부흥운동세력)을 가리키되, 扶桑은 백제저항세력의 백제내 근거지를 가리킨다. 백제저항세력은 州柔城(주류성)이나 任存城(임존성)등을 근거로 저항했다.[23]

4. 평제비의 蟠木(반목)이 고구려를 가리킨 사례를 볼 때 風谷遺甿(풍곡유맹)은 백제나 고구려의 지원을 받은 백제 세력를 가리키며, 원래 백제에 있던 세력인 福信(복신)이나 고구려로 망명한 遲受信(지수신)과 같은 부흥세력이 해당하고 일본의 지원을 받은 부여풍은 해당되지 않는다. 盤桃(반도)는 任存城(임존성)같은 근거지를 가리킨다

5. 일본과 부상을 왜국 땅으로 해석할 여지도 있는데, 이 경우 "日本餘噍(일본여초)"에 해당하는 이들은 부흥운동의 장수로 저항세력의 최후 근거지인 주류성(州柔城, 周流城)이 함락되자 일본에 망명한 여백신(餘自信) 달솔(谷那晉首), 목소귀자(木素貴子), 억례복류(憶禮福留) 등으로 볼 수 있다. 고로 "日本餘噍"란 1.日本=백제의 餘噍, 2. 日本으로 달아난 餘噍(日本의 후원을 받은 餘噍)가 된다.

언급된 평제비문의 해석은 # 다음과 같다.
용맹스런 군대[貔貅] 백만이 번개처럼 일어나고 바람같이 드날려 앞에서는 반목(蟠木)을 베다가도, 물러나서는 부상(扶桑)을 베어버리매, 얼음은 여름 해에 녹고 잎은 가을 서리에 부서졌다.
반목(蟠木)註 몸이 휘감겨진 나무라는 뜻으로 좋지 않은 나무를 의미한다(김영심, 1992, 473쪽)
부상(扶桑)註 동쪽 바다의 해돋는 곳에 있다는 神木 또는 그 신목이 있는 곳. 동쪽의 백제를 가리킨 듯하다(박지현, 2015, 564쪽).

이용현은 '반목을 베다가도'에서 '반목'은 고구려, '물러나서는 부상을 베어버리매'의 부상은 백제로 본 것이다. 이는 644년부터 660년 사이에 벌어진 1,2차 고구려-당 전쟁에서 당이 물러났다가 660년 백제를 정벌한 사실과도 부합한다.
去 顯慶五年 官軍平本藩日
지난 현경 오년 관군(당군)이 본번(백제)을 평정하던 날
(중략)
日本餘噍 據扶桑以逋誅
일본의 남은 백성은 부상에 의지하여 주벌을 피하였고
風谷遺甿 負盤桃而阻固
풍곡의 남은 백성들은 반도를 의지하여 굳세게 저항했다.
(중략)
僭帝一旦稱臣
참제(僭帝)가 하루아침에 신하라고 칭하고
仍領大首望數十人, 將入朝謁.
이에 대수망(大首望) 수천인을 거느리고 조정에 들어와 알현하려 하였다.
예군 묘지명
이에 왕과 태자 효가 여러 성과 함께 모두 항복하였다. 정방이 왕과 태자 효, 왕자 태, 융, 연(演) 및 대신(大臣)과 장사(將士) 88명, 백성 12,870명을 당나라 수도로 보냈다.
於是, 王及太子孝與諸城皆降, 定方以王及太子孝·王子泰·隆·演及大臣將士八十八人·百姓一萬二千八百七人, 送京師.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예군묘지명의 일본과 부상이 등장한 문구의 앞뒤 문장은 백제를 정벌의 시작에서 의자왕을 압송한 백제의 멸망까지를 묘사한 상황이기 때문에 660년 평제비의 부상과 같이 백제로 볼 수 있다.

이용현은 이와 같이 부상이 백제를 뜻하므로 '일본 잔당은 부상에 근거하여 주벌을 보면하고'라는 문장은 '백제 잔당이 백제지역에 근거하여 주벌을 모면하고'의 해석이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한편, 일본이 백제를 뜻하는 일반명사로 보는 학설은 구당서 신당서의 왜국이 일본으로 국호를 고친 것의 관한 기사의 해석으로도 이어졌다.
왜국은 옛 왜노국이다. (중략) 일본국은 왜국의 별종이다. 이는 그 나라가 해 뜨는 곳에 있기에 일본이라 이름지었다. 혹은 말하기를 왜국이 아름답지 않은 이름이기에 스스로 나쁘게 여겨 일본이란 이름으로 고쳤다. 혹은 일본은 예전엔 작은 나라였는데 왜국의 땅을 병합하였다고 한다. 그 사람들 중 입조하는 자들 대부분이 자랑하고 그것이 실제와 일치하지 않는 까닭에 중국이 의심을 하였다.

倭國者,古倭奴國也。··· 日本國者,倭國之別種也。以其國在日邊,故以日本為名。或曰:倭國自惡其名不 雅,改為日本。或雲:日本舊小國,並倭國之地。其人入朝者,多自矜大,不以實對, 故中國疑焉
구당서 동이열전
일본은 옛 왜노이다. (중략) 함형원년[24] 사신이  고려[25] 평정을 축하하였다. 이후 조금씩 하음[26]을 익혔으며 왜란 이름을 나쁘게 여겨 일본으로 고쳤다. 사자가 스스로 말하기를 나라가 해가 뜨는 곳과 가까워 그렇게 이름을 정했다고 한다. 혹은 일본은 작은 나라인데 왜국 지역을 병합하고 그 이름을 사칭한다고 한다. 사자가 그 실정을 말하지 않아 의심스럽다.

日本,古倭奴也。··· 鹹亨元年,遣使賀平高麗。後稍習夏音,惡倭名,更號日本。使者自言,國近日所出,以為名。或雲日本乃小 國,為倭所並,故冒其號。使者不以情,故疑焉。
신당서 동이열전

구당서의 별종이라는 표현은 발해를 언급하면서도 나타난다.
발해말갈의 대조영은 본래 고려의 별종이다.

渤海靺鞨大祖榮者 本高麗別種也

구당서와 신당서의 기록에서 왜국이 일본으로 국명을 바꾼 부분이 있다. 그런데 설명하는 사람마다 내용이 달라 의심스럽다고 서술되어 있다. 또한 일본이 왜국의 땅을 합병하였다는 설명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었는데 일본(日本)을 '백제의 유민들'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왜국으로 넘어간 '백제의 유민들'은 스스로를 왜국과 다르다고 인식하였을 것이다. 야마토인들도 '왜'라는 표현을 싫어하여 일본어 발음이 같은 화할 화(和)자를 주로 사용하였다. 일본(日本)이라는 국명을 쓰게 된 것은 양자 간에 이해관계가 맞아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구당서와 신당서에서 언급한 국명 변경의 세 가지 이유를 모두 설명할 수 있다. 별종에 대한 표현도 일본과 왜국은 연속성 있는 다른 나라로 추측할 수 있다. #

일본이라는 국호의 공식 사용701년 다이호 율령 이후에 쓰이게 된다. #
678년 예군의 묘에 '日本' 이라는 글자 (백제를 뜻함)
701년 다이호 율령으로 일본(日本) 국호 공식 사용
945년 구당서 편찬 - 여기서 왜가 일본으로 국호를 변경했다고 기록
1054년 신당서 편찬 - 함형원년(670년) 왜가 일본으로 국호를 변경했다고 기록
1145년 삼국사기 편찬 - 670년 일본으로 국호를 변경했다고 기록.[27]

또한 일본이라는 말은 해가 뜨는 곳을 말하는데, 이는 중국이나 한국의 입장에서 이르는 말이다. 즉, '일본(日本)'이라는 이름 자체는 해당 나라의 입장에서 사용된 말이 아닌 것이다. 타 지역 사람이 그 나라로 유입된 이후 '왜국'을 대체하기 위해 제시되었다는 것이 중론.

4. 관련 문서



[1] 733년 일본에서 편찬된 《해외국기》의 기록이다. [2] 후한시대 반초의 생김새를 보고나온 고사 연함호두(燕頷虎頭) [3] 자녀가 부모의 은덕을 입음 [4] 자녀가 부모를 위함 [5] 장화가 우성(牛星)과 두성(斗星)의 사이에서 발하는 빛을 보고 용천과 태아를 얻는 일. [6] 말발굽에 일어나는 먼지 [7] 전함의 행렬 [8] 바다의 좌측. 중화문명에서 북쪽이 윗쪽이기 때문에 동쪽은 좌측이다. 한반도 [9] 바다의 동쪽. 한반도 [10] 초유(招諭)와 위무(慰撫), 불러서 위로하여 귀순시킴 [11] 王連龍, 2011 「百濟人祢軍墓誌考論」 『社會科學戰線』 第7期(總第193期), pp.123~129 [12] 2011.10 「百済人祢氏墓誌の全容とその意義・課題」 [13] 2012「百済人祢軍墓誌についての覺書」 ,『東アジア世界史硏究所センター年報』 [14] 2012.4 중국 발견 백제 유민 예씨 가족 묘지명 검토」(『신라사학보』 24, 예군) [15] 2012 「백제 유민 祢氏 一族 묘지명에 대한 斷想」 『史學硏究』 105. [평] 대당평백제비문 大唐平百濟碑銘, 660년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하고 쓴 정림사지 석탑의 비문 [17] 祢軍 墓誌의 “日本”에 대한 검토(2014) # [18] 이준호 ‘일본(日本)’이라는 국호의 유래에 대한 일고찰(2019) # [19] 王連龍, 2011 「百濟人祢軍墓誌考論」 『社會科學戰線』 第7期(總第193期), pp.123~129, # PDF 12~13쪽 [20] 「 百済人祢軍墓誌の‘日本’」 『圖書』 2012-2月號, 岩波書店,pp.2~4. # PDF 13쪽 [21] 단군신화에서 풍백은 환웅의 신하로 고조선과 관련된 인물이고, 한자사전에서 箕(기)의 뜻 중 하나로 바람귀신(風伯) #, 강희자전의 글과 주석에서 好風者箕星,好雨者畢星。(바람을 좋아하는 것은 바로 기성(箕星)이다.) 【註】箕伯,風師。(기백(箕伯)은 풍사(風師)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평] [23] 祢軍 墓誌의 “日本”에 대한 검토(2014) PDF 18쪽 [24] 670년 [25] 당이 멸망시킨 고구려의 당시 국호 [26] 한자의 음 [27] 삼국사기는 구당서, 신당서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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