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원
신성균 申性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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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58b34><colcolor=#fff> 출생 | 1907년 6월 8일 |
전라남도 곡성군 | |
사망 | 1967년 9월 28일 |
북한 일대 | |
학력 |
곡성공립소학교 (졸업) 일본 행교현립중학교 (졸업) 와세다대학 전문부 (법과 / 졸업) |
의원 선수 | 1 |
의원 대수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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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과 북한의 정치인.2. 생애
1907년 전라남도 곡성군에서 태어났다. 곡성공립소학교, 일본 행교현립중학교, 와세다대학 전문부 법과를 졸업하였다.이후 곡성군 곡성면장, 건국준비위원회 곡성군 위원장, 한국독립당 전주특별당위원장 및 전라북도당위원장, 신한정의사 전주지사장, 건국소비조합 이사 등을 역임하였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전라북도 전주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국회에서 내부치안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으며, 1948년 6월 27일 제헌 헌법에 대해 토론할때 대통령제 대신 내각책임제를 주장했다. 1948년 9월 1일 반민족행위처벌법의 처벌 기준을 완화하자는 의미의 연설을 했다.[1]
1948년 10월 27일 국회의 내무치안위원회에서 제출한 여수·순천 10.19 사건 상황 보고서를 낭독했다. 보고서에는 대한민국의 유엔 승인 문제가 논의되자 좌익세력들에 의해 반란이 일어나게 되었다며 설명되었고, 반란군은 여수경찰서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 경찰을 비롯한 우익들을 살해, 인민공화국 국기를 게양, 인민재판소를 개칭하여 민간인들을 학살했다고 한다. 이에 국군과 경찰은 반란군을 진압했으나, 일부 반란군들은 지리산과 백운산으로 도피하여 유격전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1948년 11월 16일 김옥주 의원이 발의한 '국가보안법안 폐기에 관한 동의안'에 동의를 표했으나 김인식, 김준연, 정광호 등의 수많은 반대로 동의안은 철회되었다. 이후에도 신성균 의원은 계속해서 국가보안법 폐기를 주장했다. 1948년 11월 20일 최윤동 의원이 발의한 '미군주둔에 관한 결의안'[2]이 국회에서 통과되자 11월 23인 18명의 의원과 함께 반대 성명을 냈다.[3]
1949년 8월 11일 서용길 의원과 함께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8월 27일 전라남도 곡성에서 일본 제국의 협력했다는것이 밝혀졌다.[4] 재판 과정에서 남로당의 지령을 받았다는 내용이 나오고 결국 1950년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1950년 6.25 전쟁 중 월북했다.
월북 이후 북한에서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3. 둘러보기
전라북도 제헌 국회의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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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석 | 윤석구 | 배헌 | 나용균 | 김종문 | |
고창 갑 | 고창 을 | 부안 | 익산 을 | ||
김영동 | 백관수 | 조재면 | 백형남 | 공석 | |
김제 갑 | 김제 을 | 완주 을 | |||
조한백 | 홍희종 | 이요한 | 류준상 | 이석주 | |
진안 | 금산 | 무주 | 장수 | 남원 | |
오기열 | 정해준 | 김교중 | 김봉두 | 이정기 | |
임실 | 순창 | ||||
진직현 | 공석 | ||||
* 무주
신현돈 사퇴 (1948.10.19.) * 전주 신성균 자격상실 * 익산 을 이문원 자격상실 * 순창 노일환 자격상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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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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