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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39:06

박진만/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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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프로 입단 전3. 현대 유니콘스 시절4. 삼성 라이온즈 시절5. SK 와이번스 시절
5.1. 2011 시즌5.2. 2012 시즌5.3. 2013 시즌5.4. 2014 시즌5.5. 2015 시즌
6. 국가대표7. 연도별 주요 성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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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진만의 선수 경력을 정리한 문서.

2. 프로 입단 전

인천청천초 시절 축구부로 뛰다가 인천서화초로 전학 후 4학년 때 야구에 입문, 상인천중를 거쳐 인천고 1학년 때 투수에서 유격수로 전환했다. 인천고 2학년 때는 1994년 2월 1일 경기 도중에 상대 선수와 충돌하여 무릎 인대가 찢어지는 부상을 당해 결국 수술받고 재활로 1년 유급을 했다. 근거 기사

같은 해 9월 재활 치료 후 그라운드로 복귀했으나 3학년이 아닌 2학년으로 뛰었다.

팀의 주전 4번타자로 94년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 4강[1],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타격상[2], 95년 한미일 고교대회 청소년대표로 선발됐고 전국체전 우승을 이끈다.

3. 현대 유니콘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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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골든글러브 유격수 부문 수상자 (2000,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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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입단식에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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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유니콘스 시절(2004년)[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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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루수 박종호와 키스톤 콤비네이션을 이루던 시절 2001년 또는 2003년으로 추정[5]

고교 졸업 후 고려대 진학이 결정되었으나 박진만이 인천 학익동 인천지방 병무청에서 신체검사 받고 나오는 것을 현대 유니콘스 스카우트팀이 납치했다. 스카우트들의 끈질긴 설득 끝에 계약금 2억8000만원을 받고 결국 고향팀[6] 현대에 연고지 고졸우선지명 선수로 입단하게 되었다.[7] 업계에서는 유명한 일화인 모양. 1 2 그러나 공식적으로는 당시 체육특기자 대학 진학 기준인 수능 점수 40점(200점 만점)을 넘지 못해 입학하지 못한 것으로 발표되었다. 이승엽과 비슷한 케이스.[8][9] 더불어 박진만이 고려대 특유의 구타와 악습에 학을 떼 입단했다는 얘기가 있다. 더욱이 유급생이라 선배들이 사실 박진만과 동갑내기였기에 충분히 그럴만 했다.

하여튼 1996년 현대 유니콘스로 입단하면서 그의 커리어는 시작되었다. 입단 당시부터 소속팀 감독이자 대한민국 대표 유격수 중 한 명인 " 김재박의 후계자"라는 별명을 얻으면서 화려하게 데뷔했다. 심지어 데뷔 당시 받았던 등번호도 김재박의 현역 시절 등번호였던 7번이었다.[10] 준수한 실력에 눈웃음이 매력적인 귀여운 외모와 더불어 인천 출신 성골이라는 이미지까지 더해지면서 도원전사들의 압도적인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프로데뷔 첫 해에는 0.283을 기록하며 쏠쏠한 활약을 펼쳤다.[11] 이듬해 97년에는 풀타임 뛰어서 0.185의 타율[12], 98년에는 2할 초반 타율을 기록했다. 이렇게 부진했음에도 꾸준히 기용했던것은 기본적으로는 박진만의 수비 때문이었지만, 백업 유격수인 염경엽[13]의 타격은 훨씬 더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염경엽은 1996, 1997시즌 동안 백업으로 출장하면서 0안타라는 위업(?)을 달성했다.[14]

멘도사 라인을 넘나드는 타격에[15] 수비는 어느 정도 하는 선수였지만 당시 현대 유니콘스의 감독이던 김재박이 3년 동안 죽어라 훈련시킨 끝에[16] 디펜딩 머신으로 탈바꿈, 1990년대 후반부터 약 10년간은 KBO에서 수비만큼은 독보적인 위치를 점유하고 있었다. 타격 또한 유격수로서는 기대 이상의 성적을 내주며 김재박 - 류중일 - 이종범의 뒤를 잇는 대형 유격수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 결과 1999년 타율이 0.263으로 오르면서 가능성을 보여주더니[17] 2000년 시즌에 각성, 0.288, 15홈런을 기록해 기존의 견고한 수비에 타격 포텐까지 터지며 리그를 대표하는 공격형 유격수로 자리잡으며 처음으로 KBO 골든글러브를 받았고, 2001년도는 커리어 하이를 찍었는데 3할과 22홈런에 골든글러브를 받으며 유격수 계보에 이름을 올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2002년에는 다시 멘도사 라인이 되었는데, 타율은 2할 초반으로 떨어졌고, 홈런도 12홈런으로 줄어들었다.[18] 골든글러브는 외국인 용병이자 삼성의 우승 주역인 틸슨 브리또가 받았다. 2003년에는 0.289, 16홈런으로 부활에 성공하지만 골글은 유격수 최초의 100 타점을 기록한 홍세완이 받았다. 2004년에도 그 기세를 이어나가 맹활약.

신인 야수를 키워내는데 나름대로 뛰어난 현대 유니콘스[19]에서 육성한, 이택근과 함께 단 두명 뿐인 현대 순혈 A급 야수이며 이택근이 포수였다가 외야수로 전향한 케이스란 걸 감안하면 현대가 제대로 키워낸 유일한 톱 클래스 야수. 투수쪽으로는 김수경, 조용준, 송신영(그러나 이 투수들은 타자들의 비해 기복이 조금 높지만 현대에선 이 외에도 거의 있으나, 한 해 반짝하고 버로우 타는 몇 몇 선수들이 꽤나 많다.)이 있긴 하지만.

현대에서 4번 우승했으나 현대가 투수왕국이었던 탓인지 정민태, 조용준, 톰 퀸란 셋의 네임벨류에 밀려 한국시리즈 MVP를 받지 못했고 삼성으로 건너가서 2005년에는 오승환이라는 대형 신인에 밀려 한국시리즈 MVP를 받지 못하다가 2006년 한국시리즈에서 명품 수비를 보여주고 우승하고 나서야 한국시리즈 MVP를 받았다.

그리고 심정수와 함께 4년 연속 리그 팀 우승 선수. 현대(2003,04),삼성 (2005,06)시절로, 과거 해태처럼 같은팀 4년연속이 아니고 FA로 영입이나 혹은 트레이드로 건너와서 맹활약을 해서 붙인거지만 정작 모르는 팬들이 꽤나 있을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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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대구구장에서 벌어진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는 배영수 퍼펙트 게임을 저지했다. 7회 2사 1,2루 상황에서 김한수가 친 중견수 앞 안타성타구를 그림같은수비로 잡아냈으며 8회에는 볼넷을 골라 그 게임에서 최초로 1루로 진루한 현대타자가 되었다. 배영수가 퍼펙트, 노히트 노런은 커녕 승리투수조차 되지 못하게 막았다. 반면 9차전에서는 8:6으로 앞선 9회 말 2사 2, 3루에서 마운드 근처에 높이 뜬 공에 히 드랍 더 볼 작렬하며[20] 스코어를 8:7로 만들며 우승을 코앞에 두고있던 조용준을 제외한[21] 현대 선수와 팬들을 똥줄타게 만들기도 했다. 만약 경기가 동점이 되거나 뒤집혔다면 대역적이 되었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조용준이 다음 타자 강동우를 땅볼로 잡고 우승을 결정지었다.[22]

4. 삼성 라이온즈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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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골든글러브 유격수 부문 수상자 (2004, 2006,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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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 계약으로 이적한 삼성 라이온즈 시절.

2004년 심정수와 함께 4년 39억원의 FA 계약으로 삼성으로 이적했다.[23] 이 때문에 KBO 골든글러브 시상식 참여는 삼성 라이온즈 소속이었다...[24][25][26]

김재박이 직접 현역시절 달던 7번을 물려주면서 최고의 유격수로 키워 정상급의 선수로 만들어 놨건만 FA 때 삼성으로 이적하여 팬들과 구단을 충격과 공포에 빠뜨렸다.[27] 당시 언론들은 2005년 시즌을 앞두고 삼성 라이온즈 레알 마드리드 CF를 본뜬 "레알 삼성"으로 부를 정도였다. 한마디로 삼성판 갈락티코스 정책. 박종호에 이어 박진만까지 떠났기 때문에 현대 해체 이후 그대로 선수단을 물려받은 히어로즈는 2008년 강정호가 등장하기까지 약 3~4시즌 동안 내야 센터 라인에서 선수 돌려막기를 했다.
김재박 삼성 라이온즈 선동열을 더 싫어하게 된 원인 중 하나라는 이야기도 있다.[28][29] 그런데도 박진만 본인이 존경하는 유격수는 여전히 김재박이라고 한다.[30][31]

인조잔디의 단단함이 탁구장 수준일 정도로 시설이 낙후된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을 홈으로 쓰는 삼성으로 이적한 후, 고질적인 무릎 부상으로 신음하였다. 더구나 직전까지 현대에서 뛰던 홈 구장이 당시까지 경기장 펜스 안쪽만큼은 국내 최고 시설이었던 수원구장이었던걸 생각하면, 한마디로 천국에서 지옥으로 옮긴거였다. 인천 시절에도 숭의야구장은 외야에만 인조잔디만 깔려있었고, 내야는 전 구역이 흙이었으므로(박진만 데뷔시즌인 96년부터 일본산 황토를 깔았고 97년부터 일본산 화산재 섞은 최상급 흙으로 교체..결국 매우 좋은 환경에서 플레이) 박진만이 경기 중 인조잔디를 밟을 일은 별로 없었다. 그리고 굳이 인조잔디에 대해 트집을 잡는다 하더라도, 현대가 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하여 KBO 리그에 뛰어든 1996년에 교체한 새 인조잔디였으니 대구구장의 인조잔디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재한 수비력을 자랑했다.

2006-2007년 2년동안 유격수 치고 무시무시한 타격 성적을 올렸다. 이 두 시즌의 OPS는 0.8이 넘으며, 특히 6년만의 3할 타자 복귀와 동시에 OPS 0.858을 기록한 2007년은 명실공히 몬스터 시즌으로 여겨진다.[32] 더군다나 박진만이 현대에서 삼성으로 이적해오는 동시에 리그의 주도권까지 삼성으로 옮겨오는 바람에 2003~2006까지 주전으로 활동하면서 非 해태 출신으로서 4년 연속 우승을 경험한 선수가 되었다. 더욱 엄청난 건 4년 연속 정규리그 우승까지 거머쥐었다는 점.

2008 시즌 종료 후 두 번째 FA 자격을 얻었고, 삼성과 총 12억(계약금 6억, 연봉 6억)에 계약했다.

하지만 2007년 이후 타격이 죽었고, 거기에 고질적인 무릎 부상이 있던 탓에 탄탄한 수비마저 베이징 올림픽 이후부터 노쇠화 기미를 보임에 따라 점점 퇴화되며, 2009년 1차 지명으로 입단한 신인 내야수 김상수에게 주전 유격수 자리를 내주고 벤치로 밀리기 시작했다.

2009년에는 진갑용에 이어서 삼성의 주장이 되었다. 2009 시즌 종료 후 강봉규에게 넘어갔지만.

하지만 2010 시즌에는 돌글러브로 퇴화, 한달 반만에 실책 9개를 저지르며 내야 불안정화에 한몫 단단히 하고 있다. 하도 수비가 불안해지니 5월 17일, 결국 멘도사 라인 칠 때도 안 가 봤던 2군을 가게 되었다. 당연히 아시안게임 예비 엔트리에서도 빠지면서 사실상 자동적으로 국가대표 유격수에서 은퇴[33]하였다. 아예 6월 15일 화요일[34] 최훈 프로야구 카툰에서는 물만두로 변신하였다.

삼성으로 이적하고 나서 슬슬 문제시된 무릎부상 때문에 이제 유격수 수비가 예전만큼은 아니라는 평가가 지배적이고 박기혁, 강정호, 나주환, 손시헌같은 후배 유격수들에게 밀리기 시작했다.[35]

팀이 시리즈 전적 1승으로 앞선 2010년 10월 8일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두산 베어스와의 2010년 플레이오프 2차전부터는 팀 내에서도 유격수 자리는 김상수에게 물려주고 2루수 겸 6번타자로 나오기도 했다. 2루수를 처음 해보는 것에도 불구하고 수비도 나름대로 괜찮았고 4타수 2안타 1타점을 기록하며 타석에서 활약을 했다. 하지만 팀은 스코어 4:3으로 패했다.

2010년 10월 10일 잠실 야구장에서 열린 2010년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선발 2루수 겸 6번타자로 출장하여 포스트시즌 최다 출장기록도 세웠다. 그리고 팀이 스코어 1:0으로 앞선 1회말 1사 만루에서 2타점 적시 2루타도 쳐내는 등 5타수 1안타 1볼넷 2타점을 기록했다. 팀은 스코어 8:9로 재재역전패당했다.

2010년 플레이오프에서 10타수 3안타 1볼넷 3타점, 타율 .300, 장타율 .400, 출루율 .364를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3승 2패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그리고 뒤이어 SK 와이번스와의 2010년 한국시리즈에서 7타수 무안타 2볼넷 1득점, 타율&장타율 0, 출루율 .222를 기록했고, 팀은 4연패로 준우승에 그쳤다. 2010년 포스트시즌 전체로 17타수 3안타 2볼넷 3타점 1득점, 타율 .176, 장타율 .235, 출루율 .300을 기록했다.

결국 김상수에게 밀린 그는 더 많은 기회를 찾기 위해 2010 시즌 후 구단에 방출을 요청하였고, 계약 기간이 1년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삼성 측에서 쿨하게 놓아주며 삼성과 결별하게 된다. 그러면서 그의 등번호 7번도 김상수가 갖고 갔다.[36]

삼성 시절 응원가는 김용일의 응원가 중에서도 최악의 망작 중 하나로 그 악명이 자자하다. 박진~만을~사랑~해요~삼성의 박~진만~사랑~해요를 반복하는데, 이 응원가는 정말 힘이 빠진다. 오죽하면 20년 가까이 지나서 감독직을 맡은 지금도 감독인 그를 놀리기 위해 올드 삼성 팬들이 이 응원가를 부를까. 박재상 응원가와 원곡이 같은데, 그 응원가는 KBO 최고의 응원가 중 하나로 뽑힌다. 직접 들어보자.[37]

5. SK 와이번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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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 만에 인천[38]으로 되돌아온 SK 와이번스 시절.고향만두

2010년 11월 11일, 삼성은 선수 본인의 요청으로 인해 박진만을 자유계약선수로 방출하였다. 계약 기간이 2011년까지였기 때문에 1년 더 남아있었다면 6억을 받을 수 있었지만 잔여 연봉을 포기하고 시장으로 나오게 되었다. 사유는 '더 많은 출장기회'. 그리고 FA가 아닌 자유계약 신분이었기 때문에 삼성 쪽에 보상선수나 보상금을 줄 필요가 없이 연봉만 주면 되기에, 이에 대한 부담이 없는데다가 국민 유격수라는 이름에 걸맞게 방출선수 최대어로 급부상하며 자연스레 박진만의 행선지는 어느 구단이 될 지 주목받았다. 실제로 두산이나 넥센을 제외한 대부분의 구단에서 박진만에게 관심을 보였으나,[39] 박진만의 고향 팀인 SK 와이번스가 가장 적극적으로 움직였고, 협상 테이블을 차려 총액 3억 원(연봉 2억 5000만+옵션 5000만)에 SK와 계약하며 고향 인천광역시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SK 입장에서도 나주환이 시즌 후 군 입대를 하게 되고, 김연훈도 미필이었기 때문에 유격수 자원이 필요한 상황이라 박진만과 SK 모두 서로 이해가 맞아떨어지는 상황이었다. 거기에 김성근 감독 역시 박진만의 영입을 긍정적으로 보며 영입해 달라고 구단에 직접 요청하기도 했고. 등번호는 마침 7번을 쓰던 김재현이 우승 후 은퇴했기 때문에 SK에서도 7번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인천 팬들에게는 더없이 즐거운 소식이 되었지만, 한편 SK 와이번스 갤러리에서는 예상보다 별로 깎이지 않은 연봉과 인천고 성골의 부활을 마뜩지 않아하는 갤러들의 불만이 새어 나오고 있는 상황. 이것은 일명 '인고팸'들이라 불리는, 인천고 출신을 인천 야구의 적장자들이라 여기고 지나치게 두둔하는 무리들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2011 시즌 봇물 터지듯 터지는 프런트의 병크 중 하나로 박진만의 영입을 반대했다는 설이 나돌면서 상대적으로 이미지가 좋아졌다.

SK로 이적한 후 응원가로 비스트의 Beautiful을 개사한 응원곡을 썼다. 이성열, 채태인의 2010년 응원가[40], 박용택, 고동진, 이상훈(타자, 한화 시절)의 응원가와 더불어 한국 가요를 개사한 응원가이다.

5.1. 2011 시즌

2011시즌에 늘 수비가 불안불안 하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러다 9일 문학 삼성전에서 9회에만 연속으로 2개의 실책을 범했다. 그리고 그는 2군으로….

4월 27일 1군으로 올라와서 지명타자 로또준의 대타로 투입 되어서 첫 타석 번트 그리고 다음 타석에 안타를 기록 했다.

그리고 다음날인 4월 28일 대타로 나왔으나 서재응에게 헤드샷을 맞고 교체되었다. 일단 CT 검사 결과로는 이상은 없다는데 맞았을 당시 사진 보면 맞은 부위의 혹이 눈에 확 뜨일 정도로 났다.

그래도 정밀검사 결과가 나쁘지 않았는지 계속 1군 잔류중. 사실은 데드볼을 맞았을 때 뇌를 반대편으로 이동시켰기 때문에 멀쩡할 수 있었다고 불암콩콩코믹스 에서 밝히기도 했다.

2011년 6월 30일 한화 이글스와의 홈 경기에서 1회 2실책, 뇌주루, 견제사 의 쓰리런을 달성하여 팀의 패배에 일조하였다. 덕분에 SK 와이번스 갤러리에서는 돈성에서 보낸 첩자라고 까이고 있다.

그리고 전반기 마지막 경기인 7월 21일 삼성과의 3차전에서 선발 1루수로 출장. 1:1 상황이던 9회초 풀카운트 상황에서 안지만의 공을 제대로 맞춘 결승 솔로 홈런으로 팀의 역스윕에 공헌하며 그날 MVP에 등극. 덕분에 요번엔 솩갤에서 칭송하고, 삼성 라이온즈 갤러리에서 패드립까지 해대며 까대고 있다. 카도쿠라 방출건 때문에 더욱 열이 받아 있었으니....

2011년 시즌 전반기 3할의 타율로 SK의 타선을 이끌었다.

문학에서 스코어 8:2로 어이없게 무너졌던 두산전에서는 그날의 유일한 타점(2점 홈런)과 끝내기 뜬공을 모두 기록했다.

KIA 타이거즈와의 2011년 준플레이오프에서 1, 2, 3차전은 선발 유격수 겸 6번타자, 4차전은 선발 유격수 겸 7번타자로 출장하여 15타수 무안타 2볼넷으로 타율, 장타율 0, 출루율 .118을 기록하였고, 팀은 시리즈 전적 3승 1패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롯데 자이언츠와의 2011년 플레이오프에서 1, 2차전은 선발 유격수 겸 9번타자, 3, 4차전은 선발 유격수 겸 8번타자, 5차전은 선발 유격수 겸 7번타자로 출장하여 17타수 3안타 1희생플라이 2타점 타율 .176, 장타율 .235, 출루율 .167을 기록하였고, 팀은 시리즈 전적 3승 2패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삼성 라이온즈와의 2011년 한국시리즈에서 1차전은 선발 유격수 겸 8번타자, 3, 4, 5차전은 선발 유격수 겸 9번타자로 출장하여 11타수 2안타 1볼넷 1득점 타율 .182, 장타율 .182, 출루율 .250을 기록하였는데, 특히 팀이 시리즈 전적 1승 3패로 몰린 10월 31일 잠실 야구장에서 열린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그는 완전 팀의 X맨으로 대활약, 두 번에 만루 기회에서 모두 삼진(2회, 4회), 그리고 7회 1사 1, 2루 상황에서 병살타를 쳐 팀이 스코어 0:1로 지는데 아주 단단한 한 몫을 하였다.

2011년 포스트시즌 성적은 43타수 5안타 3볼넷 1희생플라이 2타점 1득점 타율 .116, 장타율 .140, 출루율 .170으로 공격면에서는 아주 처참한 모습을 보였다. 포스트 시즌 내내 풋워크가 시즌 중에 비해 떨어지는 모습을 보였는데, 그가 달고 있는 고질적 부상 중 하나인 무릎에 물이 찬 때문인 듯했다.

5.2. 2012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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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쇠화로 인해 많은 경기에 출장하지는 못했으나 나올 때마다 영양가 있는 플레이를 하였고, 수비에서만큼은 여전히 대한민국 최고 유격수다운 활약을 해 주었다.

2012년 시즌 성적은 57경기 138타수 타율 .210 29안타 5홈런 19타점 12득점 3도루 14볼넷 27삼진 무실책.

2012년 10월 16일 롯데 자이언츠와의 2012년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선발 유격수 겸 9번타자로 출장하여 타격에서는 3타수 무안타 2피삼진으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지만, 대신 스코어 1:1로 팽팽했던 6회초 1사 1, 3루 상황에서 대타 박준서의 안타성 타구를 호수비로 잡아내고 1루 송구로 병살로 연결시키며[41] 철벽 수비를 해냈다. 이 수비 덕분에 롯데는 역전에 실패했고, 팀은 스코어 1:2로 승리했다. 이날 박진만은 김광현의 부활투에 묻히긴 했지만 팬들로부터 숨은 MVP로 칭송받았다.

박진만은 2012년 플레이오프에서 1, 5차전은 선발 유격수 겸 9번타자, 2, 4차전은 선발 유격수 겸 8번타자, 3차전은 선발 유격수 겸 7번타자로 출장하여 13타수 3안타 2득점, 타율&장타율&출루율 .231를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3승 2패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팀이 시리즈 전적 1패로 지던 2012년 10월 25일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삼성 라이온즈와의 2012년 한국시리즈 2차전에서 팀이 스코어 3:8로 지던 9회초 2사 1루에서 7번타자 임훈의 대타로 나와 포스트시즌 통산 최초 100경기 출장의 대기록을 달성하였지만 2구만에 좌익수 플라이로 아웃되었다.

10월 28일 문학 야구장에서 열린 2012년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팀이 스코어 6:3으로 지던 4회말에 선두 타자로 나와서 상대 선발 투수 차우찬에게 솔로홈런을 쳐서 팀의 스코어 8:12 역전승에 공헌했다. 이날 박진만은 선발 유격수 겸 8번타자로 출장하여 4타수 3안타(2루타 1) 1홈런 1타점 2득점을 기록하였다.

박진만은 2012년 한국시리즈에서 1, 3, 6차전은 선발 유격수 겸 8번타자, 2차전은 대타, 4, 5차전은 선발 유격수 겸 7번타자로 출장하여 17타수 5안타 1홈런 1타점 2득점, 타율&출루율 .294, 장타율 .529를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2승 4패로 준우승에 그쳤다.

박진만은 2012년 포스트시즌에서 30타수 8안타 1홈런 1타점 4득점, 타율&출루율 .267, 장타율 .400을 기록했다.

5.3. 2013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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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환[42]이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오고, 최윤석 김성현[43]이 있기 때문에 출전 기회가 줄어들 것으로 보였으나, 이 셋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서 주전 유격수로 출전하였다. 6월 20일 기준 성적은 0.281, 2홈런, 10타점으로 좀 모자라긴 하나 SK의 하위타선이 망해버렸기 때문에 하위타선의 핵이 되었다. 그리고 순수하게 유격수로 뛰면서 통산 150홈런을 쳤고, 동시에 통산 1,500안타를 달성했다.

5.4. 2014 시즌

FA로 이적한 정근우의 뒤를 이어 2014년 SK 와이번스의 새 주장으로 선임되었다. 이만수 감독이 선임하는 대신 선수단 투표를 통해 선출되었는데 조인성을 단 2표 차이로 간신히 누르고 당선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신년 시무식에서 "프로는 2등은 필요 없다."란 말로 2014년 각오를 밝혔다.

김성현이 좋은 모습을 보이면서 출장 기회가 별로 없다가 4월 11일 삼성전에서 선발로 출전해서 4타수 3안타를 때리면서 좋은 모습을 보였으며 특히 2대2 동점이던 9회초 안지만을 상대로 팬스를 맞추는 2루타를 치면서 역전에 기여했다.

다음날인 12일에는 수비를 하다 무릎부상을 입었다. 그대로 들것에 실려갔으며 이후 단순 타박상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하지만 아직 며칠뒤에 정밀검진이 남아있는 상황. 결국 휴식기를 감안해 엔트리에서 말소되었다. 다만 주장이라는 점 때문인지 선수단과는 동행한다고 한다.

하지만 단순 타박상이라는 기존의 진단과 달리 정밀검진 결과 전방 십자인대 파열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올 시즌은 사실상 스톱이 될것으로 보인다. 타격감도 좋았는데 팀이나 본인이나 팬들이나 서로 너무너무 아쉬운 상황이다. 일단 재활판정이 나왔고 4월 넷째주는 거르고선 그 다음주부터 선수단과 계속 동행할 예정이라고한다.

당초 큰 부상이라 시즌 아웃을 예상했지만 회복속도가 빨라 8월 15일부터 2군경기에 출전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마침내 9월 확대 엔트리 5인에 포함되어 1군에 합류하였다!

당초 시즌 끝나고 FA 신분 자격 요건을 충족했지만 군에 입대하는 이원석과 함께 FA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다.[44] 본인은 고향팀인 SK에서 선수생활을 마무리하고 싶다고.

5.5. 2015 시즌

파일:external/www.sksports.net/20150722173228_1.jpg
2015년 6월 27일 전 삼성 동료였던, 권혁을 상대로 끝내기 홈런이자 자신의 현역 마지막 홈런을 친 후 환호하는 모습.

주장을 조동화에게 물려주고 시즌을 시작했다. 정규시즌에서는 주전으로 출전하지 않고 있으며 주로 내야 전 포지션 백업요원 및 대타로 활동하고 있다. 아무래도 지난 시즌 부상과 나이때문에 풀 타임 주전은 무리라고 판단한 모양. 김성현에게 유격수를 맡기고 있지만 거의 매 경기마다 실책을 일으켜서 팬들은 박진만이 유격수 주전을 맡았을때를 그리워하고 있다.

5월 중순부터는 김성현을 대신하여 스타팅으로 나오고 있다. 내야 전체적으로 실수가 속출하며 팀이 무너지자 김용희 감독이 내린 결단.

6월 27일 권혁을 상대로 2사 1루 상황에서 좌측 담장을 넘기는 끝내기 홈런을 쳤고, 이 날의 MVP로 선정되었다.

8월 8일 경미한 허리 통증으로 인해 1군에서 말소되었다. 다만 1군 선수단과 동행할 예정. 이후 20일 다시 1군으로 복귀했다.

9월 10일 한화 이글스와의 경기에서 귀루하던 도중 베이스를 잘못 밟으며 오른 무릎 십자 인대 부분손상이라는 부상을 입었다. 2000경기 출장의 대기록을 단 7경기만 남겨두고 당한 부상인지라 아쉬움이 큰 상황.

9월 15일 기사에 따르면 현역 생활 연장이 불투명한 상황이라고 한다. 무릎 수술이 필요하다는 진단을 받았다고.

결국 10월 26일 현역 은퇴를 선언하며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고 지도자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다. 인천광역시에서 자라서 1990년대 중후반의 고향팀에서 데뷔하고 2000년대 이후의 고향팀에서 은퇴한 케이스.

6. 국가대표

6.1. 2000 시드니 올림픽

2000년 시즌을 기점으로 기존의 탄탄했던 수비를 바탕으로 타격 포텐까지 터지면서 공수 양면에서 최고의 유격수로 평가받은 박진만 2000 시드니 올림픽에 출전하는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에 주전 유격수로 선발됐다. 당시 삼성 라이온즈의 김태균이 백업 유격수 겸 내야 유틸자원으로 선발됐지만[45] 박진만의 주전자리를 위협할 만한 요소는 아니었다.

박진만은 대표팀이 본선에서 치른 9경기에 모두 선발출전하며 김응용 감독의 절대적 신뢰를 받았다. 비록 1할대 타율과 4할대 OPS를 기록하며 최악의 타격 성적을 기록했지만, 순간순간 클러치 능력을 보여주었고 명불허전 수비력으로 내야를 든든히 지키면서 대표팀의 수비 안정에 크게 기여했다. [46] 특히 시드니 예선 한일전에서는 동점을 깨는 2루타, 동메달 결정전에서는 0:0으로 맞서던 8회 안타를 치고 출루하고 이승엽의 2루타때 홈으로 들어보면서 결승득점을 기록하는 등 공격에서도 쏠쏠한 활약을 펼쳤으며 무엇보다 전매특허인 안정된 수비력은 사상 첫 올림픽 메달을 획득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예선인 한일전에서 9회 1사에서 6-4-3 병살, 동메달 결정전 일본전 9회 2사 1루상황에서 4-6으로 이어지는 수비 등에서 안정적인 모습을 선보이며 경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등 주요 하이라이트의 단골손님이 되며 국가대표 유격수 세대교체를 알린다.

올림픽 동메달 획득으로 박진만 본인도 병역특례 혜택을 받게 되었다.

6.2.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김민재와 함께 교대로 선발과 백업으로 출장을 비율을 나눴었다. 국대 첫 금메달

6.3.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대회

자기 스승과 함께 대참사를 맛보고 2004 아테네 올림픽에 탈락하는 수모를 본 국대 첫 흑역사

6.4. 2006 WBC

박진만은 MLB 사무국이 진정한 야구 월드컵을 표방하며 개최한 제 1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서 참가했다. 이 대회는 박진만의 근 10년간 국가대표 경력중 커리어 하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박진만은 대한민국이 치른 7경기에 모두 선발출전하며 자신이 대표팀 부동의 유격수임을 재확인시켰다.

먼저 1라운드 도쿄돔에서의 대만과의 개막전, 박진만은 8번타자 겸 유격수로 선발출전하여 4타수 1안타, 1득점을 기록했다. 특히 5회 선두타자로 나와 안타를 때려내어 팀의 2번째 득점을 직접 기록했다. 수비에서의 활약은 더욱 빛났다. 경기내내 안정적인 유격수 수비를 뽐내던 박진만은 2:0으로 리드중인 9회에 맞이한 2사 1, 3루 위기 상황에서 중견수쪽으로 빠져나가는 안타성 타구를 환상적인 다이빙 캐치로 막아냈다. 이후 이어진 2루수 토스까지 완벽하게 해낸 박진만은 팀의 2:0 승리를 지켜내면서 '국민 유격수'라는 애칭으로 국민들에게 불리게 되었다. [47]

1라운드 2차전 중국과의 경기 역시 8번타자 겸 유격수로 출전한 박진만은 3타수 1안타를 기록한 뒤 김민재와 교체되어 나왔다. 팀 역시 10:1로 중국을 꺾으면서 2라운드, 즉 8강 진출을 조기에 확정지었다.

1라운드 3차전 일본과의 경기는 기존의 8번이 아닌 7번타자 겸 유격수로 선발출전했다. 박진만은 이 경기에서 4타수 1안타, 1득점을 기록했다. 이 1득점 역시 0:1로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 기록한 동점 득점으로 이번 1라운드 타율은 그다지 높지 않지만 알토란 같은 영양가를 기록했다. 게다가 4회 말 1사 2-3루 일본 공격에서 유격수 땅볼을 잡아 바로 홈으로 송구 주자를 잡아내면서 팀을 추가 실점 위기에서 구해낸다. [48] 9회 말 2사에서 이치로의 뜬공을 잡으며 경기를 끝낸 것은 덤.

이후 2라운드 1차전 멕시코전 역시 8번타자 겸 유격수로 출전한 박진만은 3타수 0안타로, 안타를 기록하진 못했지만 경기내내 안정적인 수비로 팀의 2:1 신승에 기여했다. 멕시코 감독이 경기 후 인터뷰에서 한국 선수 중 유격수(박진만)가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2라운드 2차전 미국전 8번타자 겸 유격수로 선발출전한 박진만은 3타수 0안타, 2볼넷을 기록했다. 특히 이날 역시 환상적인 유격수 수비력을 뽐내며 세계 언론의 관심을 받았다. 이날 박진만은 다수의 MLB 올스타 선수들에게 수비만큼은 메이저리그 정상급이란 평가를 받기도 했다.

2라운드 3차전 일본과의 경기 역시 선발출전해 2타수 0안타를 기록한 박진만은 다시 일본과 만난 4강전에도 7번타자 겸 유격수로 선발출전했다. 2타수 1안타를 기록했지만 팀의 0:6 영봉패를 막진 못했다.

박진만은 2006 WBC에서 21타수 4안타, 1할대 타율로 타격에서는 결코 좋았다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이 4안타가 승부처마다 나온 알토란 같은 안타였다는 점, 매 경기 엄청난 수비력으로 대회 최고의 유격수로서 평가받았다는 점은 박진만이 2006 WBC 대한민국이 3위 입상함에 있어 언성 히어로로서 얼마나 큰 기여를 했는 지 보여주었다.

6.5. 2006 도하 아시안 게임

박진만은 2006 도하 아시안 게임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서 참가했다. 금메달을 따낸 2002년 이후 4년만의 대회 출전이자 커리어 2번째 아시안 게임 참가이다.

당시 대표팀은 불과 몇개월전 2006 WBC 4강 기적으로 기대치가 매우 높아져 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지난 2번의 대회에서 연속으로 금메달을 따낸 전적 때문에 이번 대회 역시 당연히 국민들은 금메달을 기대했다.

하지만 당시 김재박감독은 최정예 선수들이 아닌 미필 어린 선수들을 중심으로 엔트리를 꾸렸다. 결국 경험이 미천한 대표팀은 대만, 일본에 연달아 패하며 동메달에 머물러야 했다. 박진만 역시 팀의 고참이자 주전 유격수로 거의 모든 경기에 선발출전했지만 팀의 몰락은 막지 못했다. 백업으로 따라간 박기혁이 좀 더 좋은 성적을 냈다.

대회 후 3위라는 최악의 성적에 일국의 국가대표팀을 단순히 병역면제 수단으로 활용하려했다는 괘씸죄까지 더해져 김재박호는 상당한 국민적 비판 여론에 휩싸이게 되었다. 자세한 것은 도하 참사(야구) 참조.

6.6. 2007 아시아 야구 선수권대회

2008 베이징 올림픽의 예선을 겸해 치러진 2007 아시아 야구 선수권대회에 박진만은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서 참가했다. 박진만은 이 대회 주전 유격수로서 주요 경기에 모두 선발출전했지만 팀의 우승을 이끌지는 못했다.

4년전 2004 아테네 올림픽의 예선을 겸해 치러진 이 대회에서 대만, 일본에 연달아 패해 올림픽 본선을 밟지 못한 악몽을 지우기 위해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은 당시에 현역 메이저리거였던 박찬호, 류제국까지 소환하는 열의를 보였다.

이러한 열의를 바탕으로 4년전과 달리 류현진, 박찬호, 정대현 등 투수들의 연이은 호투를 통해 대만을 5:2로 꺾었지만, 일본에 3:4 1점차 석패를 당하며 2승 1패, 2위에 머무르게 되었다. 결국 대회 1위팀에게만 주어지는 올림픽 본선 티켓을 놓치고 최종예선에 참가해야하는 신세에 놓이게 되었다.

비록 올림픽 본선 직행에는 실패했지만, 박진만 개인으로서는 빼어난 활약을 펼친 대회였다. 수비에서 변함없이 안정적인 유격수 수비를 과시했고, 타격에서 역시 대만전 홈런을 때려내며 5:2 승리의 일등공신으로 등극했다. 이 홈런은 박진만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소속으로 때려낸 유일한 홈런이다.

6.7. 2008 베이징 올림픽

박진만은 근 10년간 KBO 최고의 유격수이자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주전 유격수였다. 하지만 그런 그도 세월을 피해갈 수 없었는 지 2008년에 들어서 급격한 타격능력 노쇠화를 보이며 최악의 성적을 기록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무리 '국민 유격수'로 사랑받던 박진만일지라도 베이징 올림픽 대표팀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하지만 당시 김경문 감독은 박진만은 유격수 수비만으로 존재 가치가 뚜렷한 선수라며 그를 엔트리에 포함시켰다.

올림픽 본선에서 박진만은 주전 유격수로 활약했다. 하지만 세간의 예상대로 처참한 타격성적을 보여주었다. 박진만은 총 7경기 출전해 15타수 1안타, 1볼넷으로 0.067/0.125/0.067이란 최악의 슬래쉬 라인을 기록했다. 로테이션 파트너인 김민재마저 5경기 11타수 0안타, 1볼넷으로 최악의 타격 성적을 보이며 별 다른 대안이 없었기에 박진만은 결승전까지 주전 유격수로 출전할 수 있었다.[49]

하지만 이 대회에서 박진만의 가치를 타격에서만 찾는 것은 잘못된 것이었다. 박진만의 본래 진가는 일품수비였다. 박진만은 타격과는 달리 유격수 수비에서 매우 안정감있는 모습을 뽐내며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9전 전승에 크게 기여했다. 수비 리더인 박진만의 존재만으로 내야수비 전체가 안정되는 효과를 보였고, 이 효과는 결국 대회내내 대표팀이 짠물야구를 통해 금메달을 획득한 원동력이 되었다. 결승전 9회 1사 상황에서 6-4-3 병살을 잡아내며 역시나 마지막 장면을 장식한다.[50]

7. 연도별 주요 성적

파일:KBO 리그 로고(영문/다크모드).svg 박진만의 역대 KBO 기록
<rowcolor=#fab93d>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OPS wRC+ WAR*
1996 현대 115 361 .283 102 21 2 6 38 49 11 27 .402 .332 0.734 106.2 2.85
1997 112 351 .185 65 11 0 5 29 29 7 28 .259 .245 0.504 32.3 -0.87
1998 123 330 .203 67 17 0 4 33 36 8 24 .291 .257 0.544 41.6 -0.25
1999 128 395 .263 104 21 2 3 42 50 5 43 .349 .334 0.684 70.0 0.98
2000 129 420 .288 121 30 4
(5위)
15 58 67 0 42 .486 .350 0.836 112.7 3.51
2001 122 383 .300 115 13 0 22 63 72 9 51 .507 .380 0.886 124.1 3.98
2002 126 401 .219 88 24 0 12 57 47 2 52 .369 .306 0.675 78.0 1.41
2003 129 421 .283 119 26 0 16 48 68 6 68 .458 .379 0.838 117.2 4.09
2004 129 434 .286 124 18 0 17 69 65 5 57 .445 .365 0.810 115.5 4.03
<rowcolor=#ffffff>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OPS wRC+ WAR*
2005 삼성 85 281 .249 70 16 0 7 44 34 5 41 .381 .343 0.723 97.1 1.89
2006 115 382 .283 108 22 1 11 65 54 10 63 .432 .380 0.812 141.1 4.90
2007 100 333 .312 104 25 0 7 56 34 5 57 .450 .408 0.858 144.4 4.42
2008 104 332 .244 81 12 3 5 38 28 5 47 .343 .335 0.679 88.1 1.77
2009 76 223 .256 57 11 0 6 29 22 2 28 .386 .333 0.719 82.8 0.96
2010 46 131 .237 31 5 1 1 14 14 1 25 .313 .354 0.667 83.7 0.60
<rowcolor=#ffffff>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OPS wRC+ WAR*
2011 SK 100 282 .280 79 18 0 6 39 42 6 39 .408 .363 0.771 105.7 2.21
2012 57 138 .210 29 7 1 5 19 12 3 14 .384 .281 0.665 78.9 0.62
2013 100 276 .250 69 14 1 3 24 25 3 42 .341 .346 0.686 89.1 1.40
2014 19 32 .250 8 1 0 0 2 3 0 2 .281 .294 0.575 43.4 -0.07
2015 78 133 .248 33 5 0 2 14 12 0 27 .331 .375 0.706 92.5 0.48
KBO 통산
(20시즌)
1993 6039 .261 1574 317 15 153 781 763 94 777 .394 .342 .736 95.2 38.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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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타격상을 수상했다. [2] 동기생들 포스가 매우 ㅎㄷㄷ한 레전드들이 많은데 이승엽, 홍성흔, 박귀홍, 임창용, 정수근이 가장 대표적이다. 하지만 한국프로야구 감독은 박진만이 가장 먼저 되었다. 하지만 정식 프로감독 취임은 박귀홍이 가장 빠른데 무려 크보보다 상위리그인 NPB 감독으로 지도자커리어를 시작하게 되었다. [3] 박진만이 입은 얼핏 생소해 보일 수 있는 유니폼은 현대 유니콘스의 창단 유니폼으로 창단 선언 직후부터 1996시즌 스프링캠프 전까지 잠깐 쓰인 임시 유니폼이다. 잘 보면 모자의 HD 로고 역시 이후의 것과 약간 다르다. 박재홍과 다르게 왜 박진만은 이 유니폼 촬영을 하게 된 이유는 95년 9월 ~ 11월 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한 현대가 임시로 지급했던 유니폼이다. 유니폼이 공식적으로 등장한게 96년 1월 28일이다. 박진만 옆에 서 있는 사람은 현대 유니콘스 구단주 대행 역할을 했던 이내흔 현대건설 사장으로 태평양 돌핀스 인수를 주도한 사람이기도 하다. 현대그룹이 야구단을 만들기 직전에는 정치에도 발을 담은 적이 있는데 정주영이 창당한 통일국민당 소속으로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종로구 지역구에서 민주자유당의 거물 이종찬 의원과 각축을 벌였으나 낙선했다. 이후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아시아 야구 연맹 회장을 각각 역임했다. 거기다가 박재홍은 92년 드래프트에서 이미 박진만의 선례에 지역연고 1차 지명으로 해태 타이거즈에 "지명"이 되었지만 이를 거부하고 연세대학교로 진로를 선택하였다고 말했다. 당시만해도 대졸 선호 성향이 높았고 취업율이 고졸에 비하면 더 높았다. 그런데, 창단하고 각 지역 초특급 고졸/ 대졸 유망주를 싹쓸이 하려고 하던 현대 유니콘스 프런트들의 레이더망에 잡힌 박재홍 본인은 오히려 피해자 였고 구단들끼리의 잡음으로 타이거즈 유니폼이 아닌 유니콘스의 유니폼을 뒤늦게 입게 된다. 그래서 박진만과 다르게 입단일이 늦혀진것 거기에 한술을 더 뜨면 박재홍은 해태와 현대를 뺀 6개구단의 " 공공의 적"이 되어 큰 피해를 보는데 해외 전지훈련을 배제 해야 한다는 잡음이 커져 결국 따라가지 못하고 오로지 국내에 홀로 남아 연습을 하게 되었고 그가 바로 대한민국 야구사에 큰 획을 긋는 30-30 클럽의 첫 기념비를 세우게 된다. 고졸 선호도는 훗날 이승엽이 등장하던 시기와 김태균이 등장하던 시대에 고졸 지명 선호도가 더 높았다고 한다. 정수근, 박명환: 이거 진짜에요 대졸이랑 고졸 대우도 다르고 많이 까였어요 캐비지TV에서 그 일화가 나온다. [4] 유니폼 소매에 2003년 한국시리즈 우승 기념 패치가 붙어 있다. [5] 박진만 왼팔에 검은리본이 달려있는데 정주영 or 정몽헌 회장 추모 리본으로 추정 2001년이 맞지 않는 이유는 2000년 한국시리즈 우승 당시 패치 유니폼을 입고 입기 때문에 맞지가 않다. 2003년 현대는 2002년에 4위를 기록했기 때문에 우승 패치 유니폼이 없다. 아무래도 유니폼을 봤을땐 후자일듯. 이유는 김재박 감독 내려갈 팀은 내려간다의 사진을 보면 유니콘스의 유니폼이 2001년도의 유니폼이다. [6] 당시 현대의 연고지는 박진만의 고향인 인천이었다. [7] 1996년 당시 기준으로 역대 고졸 신인타자 중 계약금 1위였다. 5년 후인 2001년 정상호가 SK에 입단할 때 4억 5000만원을 받으며 경신. [8] 그 당시 고려대 감독 조두복( 고려대학교 체육교육과 71학번으로 한일은행에서 뛰었던 야구선수였다. 1993년 중반까지 부산고 감독이었고, 최남수 고려대 감독이 세상을 떠난 뒤에 고려대 감독으로 부임해 팀을 계속 이끌다가 2000년 초 아마야구 비리에 연루되어 구속된 뒤 현장을 떠났다.)은 프로 구단들의 스카우트 경쟁에서 밀리지 않기 위하여 아예 뛰어난 고교 선수들을 데려다가 납치 수준으로 연수관에 데려와서 입학시키곤 했다. 그가 데려온 케이스로는 진갑용, 손민한, 조성민, 박용택, 김동주, 김상훈, 김선우 등이 있었다. [9] 사실 고려대뿐만 아니라, 90년대까지만 해도 대학야구의 위상이 지금과는 다르게 상당히 높았기 때문에 대학과 프로 팀 간 선수 스카우트를 두고 치열하게 경쟁하던 시절이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대학 쪽이 고교야구의 유망한 선수들을 대상으로 장학금 지원 및 동기들을 데리고 입학할 수 있다는 조건을 제시한 뒤 해당 학교 출신 선배들을 동원해 지방 여관에 감금(!)시켜놓으면, 이를 프로 팀 스카우터가 뒤를 밟아 그 선수를 다시 빼돌려 선수와 부모에게 높은 액수의 입단 계약금을 제시하는 등 웃지 못할 촌극도 벌어졌다. 김재현만 봐도 LG 트윈스 연세대학교와의 치열한 경쟁 끝에 간신히 빼와서 겨우 계약을 성공했을 정도다. [10] 박진만이 입단하기 전 태평양에서 등번호 7번은 대졸 출신 내야수 유영환이 달았으나 이렇다 할 활약을 하지 못하고 1997년 은퇴했다. [11] 타점 영양가 또한 좋았으며, 현대 창단 첫 승의 결승득점은 박진만이 기록했다. [12] 이 기록은 규정타석을 넘겨 공식 기록으로 인정받는 시즌 타율 기록이다. 단일시즌 최저타율 기록은 1986 시즌에 권두조가 기록한 0.162. 물론 이쪽도 규정타석 채웠다. [13] 참고로 96년 현대로 이름이 바뀌고 개막전에서 자신의 명단이 있을 줄 알았으나 그 이름엔 박진만이 있고 본인은 없어서 허탈했다고 한다. [14] 참고로 염경엽 문서에도 있지만 염경엽의 커리어 하이가 1994년의 0.212였다. 진짜 커리어 하이다!! [15] 인천고 시절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타격왕을 차지한 적이 있다. 유격수지만 평타는 꾸준히 쳐주는 선수. 2012년 시즌까지 평균 타율이 0.262이다. 다만 큰경기에서의 타점 생산 능력이 좋았다. [16] 당시 박진만은 포수 장비를 착용하고 펑고를 받았는데, 그 펑고를 직접 쳐주던 김재박 감독 본인 손에서 피가 흐를 정도로 혹독하게 쳤다고 한다. [17] 유례없는 타고투저의 시대가 터졌었다. [18] 전년도 기준으로 팀의 핵심이던 박경완도 성적이 하락 했다. [19] 이는 검증된 선수가 아니면 안쓰는 김재박 감독의 성향에서 비롯된 바가 컸다. [20] 그러나 이 경기는 시작 전부터 가을비가 줄기차게 내렸던데다 경기가 진행될 수록 빗줄기가 더욱 굵어지는 악조건 속에서 치러졌기 때문에 박진만을 마냥 깔 수는 없다. 정규시즌 경기였다면 이 정도로 비가 오면 바로 노게임이나 콜드 게임이 선언되었겠지만, 이 경기는 한국시리즈, 그것도 우승의 향방이 걸린 경기였기 때문에 경기를 중간에 끊을 수가 없었다. [21] 조용준은 당시 다음 타자 누구지? 빨리 잡아야 되겠다라고만 생각했다고... [22] 이것이 현대의 마지막 우승. [23] 이때 둘의 계약금이 총 99억이라 그때부터 돈성이 되었다.... [24] 2004 시즌을 현대 유니콘스에서 보냈으니 현대 소속으로 골든 글러브를 수상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KBO에서는 수상일 기준 소속 구단으로 시상하겠다는 지침을 내렸다. 이 지침에 따라 골든글러브 시상식 전에 팀을 옮긴 선수들의 경우에는 수상일 기준의 소속 팀 선수 자격으로 참가한다. [25] 2015년 시즌 종료 후 NC 다이노스로 이적한 박석민 kt wiz로 이적한 유한준, 2016 시즌 후 KIA 타이거즈로 이적한 최형우의 사례에도 이 지침이 적용되었다. [26] KBO의 지침과는 정반대로, 컴투스 프로야구 시리즈와 같은 야구게임에서는 골든 글러브 수상일 기준의 소속팀이 아닌, 그 시즌에 뛰었던 팀 소속으로 골든글러브 카드를 부여한다. 즉, 게임에서는 이 지침을 따르지 않는다. [27] 당시 현대 팬들은 물론이요 구단 역시 굉장히 충격이 컸었다. 2004년 시즌이 끝나고 FA가 되어도 당연히 구단에 남을 거라고 누구나 믿었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재정이 열악했던 현대 구단도 심정수는 몰라도 박진만은 반드시 잡겠다고 공언까지 했었다. 그만큼 박진만이 팬들로부터 얼마나 사랑받는 존재였는지 짐작하게 해 준다. [28] 이 당시 나온 김재박 명언으로 "돈으로 선수 모으면 우승 못할 팀이 어디 있나?"가 있다. 관련 기사 [29] 선동열은 이 말에 열이 받아 FA 영입보다 내부 육성을 통해 성적을 내는 쪽으로 스타일을 바꿔 버렸다. [30] 이건 당연한 말이다. 박진만은 1996년 현대 원년 멤버요, 창단 첫 해부터 입단한 '창단둥이'였다. 그렇게 구단으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았으니, 자신에게 있어 여전히 애증과 애착이 강한 건 당연하다. FA로 삼성으로 이적했을 때 현대 구단 홈피에 가서 '죄송합니다'라고 글을 남겼더니 수많은 팬들이 비난을 굉장히 많이 했었다. 이는 역설적으로 그만큼 사랑을 받았고, 팬들이 남아 주기를 바랐던 마음이 강했다는 것을 반증한다. [31] 세간의 이미지와 달리 현대는 2000년대 이후에는 더이상 부자 구단이 아니었다. 모기업 부도로 과거처럼 선수를 돈으로 영입하는 것은 하늘에 별따기였다. 그나마 과거 잘나가던 시절 공격적으로 영입한 선수들 위주로 몇년을 버티긴 했다. [32] 이 기간동안 KBO는 투신타병이었다. 그래서 이런 타격성적으로 박진만은 wRC+ 140 이상을 찍었을 정도이다. [33] 박진만은 1976년생이다. 다음 국가대표 선발 기회인 3회 WBC는 2013년에야 열리는데, 그때쯤 되면 나이가 38세이다. [34] 2011년 기준, 화요일은 최훈 카툰이 나오지 않는 날이다. [35] 그나마 FA때 펄펄했던 시절 유격수 대항마는 손시헌과 박기혁이 있었다. 다만, 저 두사람이 박진만 보다 공격력이 한참 떨어져서 그랬지 수비는 상당히 좋았다. 나주환과 강정호의 경우 박진만의 삼성말년 시절 쯤 포텐이 터졌다. [36] 공교롭게도 김상수 역시 박진만이 2022시즌 후반기 삼성 감독 자리에 오자마자 박진만과 가장 플레이 스타일이 비슷한 이재현에게 바로 7번 등번호와 주전 유격수 자리를 빼앗겼으며, 김상수는 즉시 주전 자리를 찾아 kt로 이적했다. 이를 보면 세상은 돌고 도는 셈. 우스갯소리로 박진만이 이재현을 밀어줌으로써 본인을 밀어낸 김상수에게 복수했다는 얘기도 있으나, 이미 박진만이 감독을 하기 전부터 이재현이 사실상 핵심 유망주로 지목되며 김상수를 밀어내버렸다. [37] 박진만은 SK 시절 이 응원가를 쓰지는 않았지만 SK 시절 그의 등번호를 물려받은 선수가 박재상이다. [38] 다만 박진만은 수원 시절에도 현대 선수로 뛰었다. [39] 당장 롯데는 유격수 박기혁이 군 입대를 하고, LG는 오지환이 있지만 아직 성장이 완전하지 않은데다 박경수가 군 미필이기 때문에 그동안 내야를 맡아줄 선수가 필요하다. 내야진이 부실한 한화는 말이 필요없고 KIA는 이현곤 김선빈이 있지만 이현곤은 부상이 잦아 풀타임을 뛰기 힘들고, 김선빈은 수비가 불안하기 때문에 보다 안정적인 수비를 자랑하는 박진만을 영입할 가능성이 있었다. 실제로 이 당시 SK 다음으로 KIA가 박진만 영입에 가장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40] 이거 또한 김용일의 망작이다... [41] 박준서의 타구는 유격수 플라이 아웃으로 기록되었고, 2루로 뛰었던 홍성흔이 미처 1루로 돌아오지 못하면서 아웃되었다. [42] 군복무 벌크업을 했는지 이후 수비가 예년보다 뒤떨어져 다음 해인 2014년 정근우의 빈자리도 메울 겸 결국 2루수로 옮긴다. 그러나 2루에서 FA로이드를 맞고 제 2의 커리어하이를 찍는다 물론 틈틈히 유격수와 3루수 알바도 했었다. [43] 수비로는 도저히 차마 못 볼 지경인데, 나주환 보다도 심각해졌다. [44] 절묘하게도 둘은 2017 시즌부터 선수와 코치로 한솥밥을 먹고 있다. [45] 다만 최종 엔트리 제출 전까지만 해도 주전 유격수 박진만에 백업 유격수 겸 내야 유틸자원으로는 LG 류지현의 선발이 유력했으나 대회 직전 발표된 최종 엔트리에는 유지현 대신 김태균이 선발되면서 엔트리 구성에 대해 말이 많았던 편이었다. [46] 그는 한일전과 WBC등 주요 경기의 9회 1사 주자상황에서 6-4-3 병살로 한국의 경기를 마무리하는 장면에 대부분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47] 이후 이종범이 달려와 안기면서 포옹하는 장면은 덤 [48] 이후 4회 말 2사 만루에서 그 유명한 이진영의 우익수 호수비가 나온다, [49] 다만 2루수는 타격이 좋은 정근우나 고영민이 있어서 이 둘이 주로 출전했다. [50] 2008 시즌이 끝나고 골든글러브 후보 2위를 기록했다. 1위 박기혁과는 불과 2표차이 근데, 정작 당사자인 박진만은 집에서 여유롭게 TV시청을 했다. 만약 박진만이 뽑혔다면 그야말로 시상식에서는 후보자들 및 KBO 관계자와 MC들 전부 아수라장이 될 뻔. 박기혁은 이듬해 2009년 WBC에서 주전 유격수로 수비에서 맹활약한다.